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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용사는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다 (29/45)

  28. 용사는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다

“와, 진짜 넓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황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나는 능청스럽게 과장하는 에반의 말에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유일무이한 계급인 황궁 주술사가 살 저택이었으니 크기는 확실히 컸다. 하지만 일반적인 귀족가와 달리 하인들이 묵는 건물도 없었고, 저택 내부 또한 화려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에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내내 별다른 장식품이나 액자 따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족 모두 집을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하다못해 손님이 오는 일조차 거의 드물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크기만 커다란 저택이었다. 사용하는 방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 텅 비어 있거나, 잡동사니를 쌓아놓은 창고로 썼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집에 눌어붙은 식객들이 몇몇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본 것은 그중 한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손님으로서 찾아오는 걸 본 게 끝이라 내게 이 집의 구성원은 아버지와 언니, 집사와 나. 이렇게 네 명이었다. 어머니도 집에서 사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종종 찾아오는 친척으로만 느껴졌다.

“닉스,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닉스의 방?”

“아버지가 사용하던 방에 가고 있다.”

에반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슬그머니 웃으려다가 서둘러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에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손목에서 덜그럭거리는 금속에 잠시 눈길을 줬다가 다시 복도를 바라보았다.

얼마 걷지 않아 어느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내가 문고리를 잡자 뒤에 서 있던 에반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야?”

“그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 앞에 놓인 책상과 침대로 사용해도 될 만큼 커다란 소파,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탁자 등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아버지의 집무실이었지만 종종 응접실이 되기도 했고 또, 침실이 되기도 했다. 책상 옆 바닥에는 주술진이 그려져 있었다. 주술각과 황궁, 두 군데와 이어져 있는 이동 주술진이었다.

에반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두리번거리다가 책장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무심코 책을 뽑아들려다가 물었다.

“있지, 닉스. 여기 있는 거 만져도 되는 거야?”

나는 에반이 물건들을 얼마나 소중히 다뤄주는지 잘 알고 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조심스레 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가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될 법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황궁에선 유실된 자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책과 서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우리는 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방 안에 들어차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에반은 방을 나서면서도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더니 결국 내게 물었다.

“여기 있는 책들 탑에 가져가도 돼? 다 읽고 나면 돌려줄게.”

“그럴 필요 없다.”

내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에반은 이어진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니까.”

“왜?”

“그편이 네게도 낫지 않나? 책은 저 방 말고도 얼마든지 있는데.”

잠시 고민하던 에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금 복도를 가로지르던 우리는 또 다른 방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내가 지내던 방이다.”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옅은 색의 커튼이었다. 화려한 레이스로 이루어진 속 커튼과 그보다는 두껍고 빳빳하지만, 색상만큼은 밝고 아기자기한 겉 커튼은 방 안을 부드러운 느낌이 들도록 만들고 있었다. 에반 역시 커튼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기자기하네. 의외야.”

그럼 어떤 것을 상상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게 어울리는 방의 모습이란 새카만 커튼으로 빛 하나 스며들어오지 않게 막고, 썰렁할 정도로 가구가 없는 그런 거였다. 마치 이전까지 갇혀 있던 탑처럼.

하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귀족 여성의 방이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옅은 색 융단과 레이스로 꾸며져 있는 커다란 침대, 하얀 색상의 이불, 창가에 놓여 있는 꽃병, 화장품과 작은 소품이 가지런히 정리된 화장대.

“왜인지 기분이 이상해. 닉스의 다른 면을 발견한 기분이야, 내가 모르는.”

에반은 화장대 위에 손을 뻗어 올리더니 그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역시 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비밀을 들킨 것 같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을 드러낸 것 같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내 방이지만 내가 꾸민 기억이 없다. 나는 그저 마음대로 하도록 뒀을 뿐이다.”

내 말에 에반이 웃음이 치미는 것을 참는 듯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다시금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대신 뺨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돌리며 괜히 방을 훑을 뿐이었다.

이전에 집에 왔을 때, 내가 더럽힌 탓에 눈물을 흘리며 닦아냈던 융단과 이불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빨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냥 두었다. 하지만 눈에 밟혀 이불을 들여다보는 사이 에반은 욕실 문을 열고 그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향료가 몇 개 없네.”

그리고 그는 욕조 앞에 정리되어 있는 향료병 중 하나를 들어 올려 살피며 물었다.

“여기 오니까 더 궁금해졌어. 어린 시절의 닉스는 어땠을까? 뭘 좋아하고 즐겼을까?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생각을 하며 이곳을 돌아다녔을까? 평소에는 뭘 하며 지냈을까?”

그의 질문에 내가 해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평범했다.”

뭐라 달리 말할 것도 찾지 못할 정도로 평범했다. 가족의 품에서 응석을 부리며 자라나 내가 아는 것이 세상 전부라고 믿으며, 지루할 정도로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때는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달랐으니까. 전날과 마찬가지로 밥을 먹고, 씻고, 책을 보고, 산책하러 나가도 전날과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런 삶에 만족했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닉스의 가족은 어땠어?”

“아버지는 자상하셨다.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차갑다고 오해를 하곤 했지만, 누구보다도 속이 여린 분이었다.”

“……그냥 닉스네.”

생긴 것은 어머니와 닮았지만, 성격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던 가족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저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굉장히 솔직하신 분이었다. 때로는 너무나 차분하고 고요해 그야말로 잔잔한 어둠처럼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유쾌하고 거침이 없어 아버지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통 걷잡을 수 없는 분이었지.”

“세상에는 성녀라고 알려진 그분은?”

나는 언니를 생각하자마자 비집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가볍게 흘리고 말았다. 내가 대놓고 웃는 것에 놀랐는지 에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또 웃었느냐며 달려들 테니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르다. 내 언니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성녀는 무슨 얼어 죽을 성녀. 착한 짓 한 건 손에 꼽히는데 다들 알아서 찬양해 주니 이것 참 살 만한 세상이네, 라고.”

언니가 자주 하던 말을 내뱉으니 귓가에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맑고 고운 목소리였지만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던, 자주 듣는 나조차도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말투였다.

에반의 얼굴은 자신이 뭘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해가 되었다. 내 가족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했고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던 언니였으니까.

“내 언니는 정확히 말하자면 상인에 가까운 분이었다. 이익을 중시했고 더 많이 얻기 위해 움직였다. 실이 되는 일에는 웬만해선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베푸는 선행일지라도, 그 끝에 가선 결국 원하던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상재 중 상재였다. 실제로 신탁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언니는 단지 넘쳐나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혹은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일이 빈번했다.”

언제나 새로운 지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온갖 특이한 능력으로 알게 모르게 많은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나눠주고 세상을 밝혔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언니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사실이니. 내가 보기에 언니는 아버지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거기까지 말하고 내가 입을 다물자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에반이 마치 언니에 대해 더 궁금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랬구나. 설마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럼, 그분이 닉스를 부를 땐 뭐라고 불렀는데?”

“시아…….”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에반에게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에반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시아……. 시아였구나, 닉스의 본명은. 아니, 애칭인가?”

당황한 내가 입을 가리며 대답하지 않는데도 그는 상관없는지 아예 웃음을 흘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시아, 시아. 워낙 닉스라는 이름에 익숙해서 그런지 영 입에 안 붙네. 시아……. 시아는 어때? 간만에 옛날 이름 듣는 기분이?”

“그냥 닉스라고 불러라.”

“싫은데. 시아라는 이름도 마음에 드는데.”

그렇게 말하며 에반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 뺨에 댄 채 물었다.

“그 당시의 시아는 이렇게 방 안에 남자를 들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을까?”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에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러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할 거라고 단꿈에 젖어 있기는 했으나, 그건 그야말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을 모르던 온실 속 화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조차 제대로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겪지도 못했고, 아는 것도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에반은 나른하게 시선을 내리뜨며 물었다.

“그럼 이런 거는?”

그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심장이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소가 낯설기 때문인 건지, 에반이 나를 놀리려 하는 의도가 다분히 보여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열이 오른 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차가운 금속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에반, 모처럼 집에 왔으니 욕조에 내가 좋아하던 향료를 풀고 몸을 담그고 싶다.”

내 말에 그의 눈이 차차 크게 뜨였다. 나는 붉어진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더욱 숙이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같이…….”

간신히 입 밖에 냈는데 에반은 대답은커녕 별다른 반응조차 없었다. 혹시 듣지 못했나 싶어 고개를 슬쩍 올렸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크게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에 그가 내 말을 정확히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에반은 도통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닉스, 지금 방금 같이 씻자고 말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닉스가? 나는 한 번 하기도 버거운 말을 또 내뱉어야 하는 상황이 곤란해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고 말았다.

순간 짧게 끊어 내뱉는 숨소리가 들렸다. 보통 기가 차거나 황당할 때 내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당황했다. 하지만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밝다 못해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에반은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빙글 돌았다.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짧게 짧게 웃음소리만 흘리던 그가 말했다.

“닉스가 유혹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진짜. 와, 미치겠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이게 무슨 유혹인가.”

“유혹이지. 유혹 맞지. 으아, 사랑스러워 미치겠네.”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자 그는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닉스. 정말 정말 사랑해. 할 수만 있다면 내 심장과 머릿속을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사랑해.”

연신 사랑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내뱉던 에반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욕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에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예상은 했지만 에반은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씻겨준다는 핑계로 더듬거리다가 그대로 탐했다. 하지만 분명 불편해하면서도 내 양손목을 묶고 있는 금속은 풀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기운을 뺀 에반이 나를 욕조에 넣어주고 그 역시 같이 들어와 나를 품에 안았다. 오래전 즐겨 사용하던 향료 덕분에 마음속 답답함까지 가시게 하는 시원한 향이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의 몸을 쿠션 삼아 기댄 채 따뜻한 물에 의해 미지근해진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아파?”

에반이 손을 뻗어 금속 주위 손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혼잣말을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그냥…… 언제쯤 나를 믿어줄까 싶어서…….”

“……닉스.”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믿을까.”

나야말로 내 머릿속과 심장을 끄집어내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금껏 내가 바라던 대로 된 건 없었고, 이제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에반이었다. 나는 에반의 곁을 떠날 이유도,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만일 에반이 나를 죽여주지 않겠다면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와 쌓는 추억과 그에 대한 기억이 많아질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질 테니까.

“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그건 아닌데, 닉스…….”

에반의 목소리에 난감하다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결국 에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저 내 손목만 매만지며.

“그래, 닉스. 나는 너를 믿고 있어.”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금속이 힘없이 떨어져 물속에 잠겼다. 나는 욕조 바닥에 가라앉는 금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닿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한 생각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힘을 사용할 수가 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가 있다. 에반이 내게 죽음을 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나는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었다. 에반과 같이 가서는 안 되고, 알려줄 수도 없는 장소였기에 에반이 내 힘을 풀어주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에반을 재워야 한다는 생각에 그대로 몸을 돌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내게는 회복 주술을 사용해 주지만 자신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에반이니,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와 몸을 섞는다면 결국 지쳐서 잠이 들게 되리라.

아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서툴게나마 그를 유혹했다. 깜짝 놀란 듯 잠시 굳어 있던 그는 다정하게 내 얼굴을 감싸 쥐며 입술을 문질렀다. 에반이 받을 상처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 * *

집에서의 생활은 탑 안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반과 나는 거의 종일 붙어 있었다. 함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을 맞댄 채 한 몸처럼 지냈다. 그 상태로 틈틈이 책이나 서류를 보고, 생겨난 의문 등에 대답해 주며 새로운 지식을 일깨우다가 어느 순간, 그야말로 이유도 알 수 없이 흥분한 에반으로 인해 갑작스레 몸을 섞고 그대로 가물가물 졸거나 다시금 책을 읽거나 하는 식이었다. 식사는 거의 대강 때웠으며, 가끔은 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기도 했다.

어느 순간 보면 방 안이 짙은 노을로 가득 차 있었고, 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여명이 트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있다가 에반이 만들어주는 빛에 눈이 부셔 찡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냈을까. 갈수록 말이 없어지고 멍하게 누워 있거나 조는 시간이 길어지던 에반은 결국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자신에게는 회복 주술이나 치유 주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피곤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쉴 틈이 거의 없고, 정신적인 고통도 적지 않은 에반이었는데 적지 않은 힘을 내게 사용하니 쓰러질 만도 했다. 그간 그의 얼굴은 더욱 해쓱해져 있었다.

나는 에반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 입었다. 혹시라도 에반이 깰까 봐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읽다가 머리맡에 내려놓았던 책을 펼쳐 에반 몰래 만들어두었던 쪽지를 꺼내 들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사실 금방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적어두지 않으면 정신을 차린 에반이 당장 나를 찾아다닐 것만 같았다. 아니, 이렇게 쪽지를 남긴다고 해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만일 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언제 다시 나오게 될지 모르니까.

쪽지를 어디에 둘까 고민하다가 내가 누워 있던 베개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가 어둠을 끌어모았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느낌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니 어둠이 걷히고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는 금색 모래와 푸른 하늘. 사막이었다.

* * *

나는 급하게 나오느라 얼굴은커녕 머리카락을 가릴 그 어떤 것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도, 더운 바람에 뒤섞여 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모래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은 한참 전부터 뻑뻑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메마른 입속은 잔뜩 꺼끌꺼끌했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깨어나 있는 에반과 마주칠 생각을 하면 소름이 일었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태양보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모래바람보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메마른 사막보다 더욱 두려웠다.

그래서 긴 치맛자락을 대충 찢어 얼굴과 목에 둘렀다. 그리고 사막만큼이나 끝없이 길게 이어져 있는 금속 벽을 따라 걸어갔다.

이곳은 과거 중앙 대륙과 하르빌 사막이 맞닿아 있던 경계 지역이었다.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기 전에도 사막에는 괴물이 살았고,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높고 긴 금속 벽이 경계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이 벽 안쪽에는 나라를 떠나온 사람들과 하르빌 사막 부족의 일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세상을 뒤엎은 직후, 사막의 원주민들 대부분이 괴물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흩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직도 나라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식으로 텅 비어 있거나, 혹은 괴물로 우글우글하니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어이, 인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표정이 밝아 보이는구먼!”

“이번에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거든!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나?”

“그건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네! 방법이 쉬우면 더할 나위 없고.”

“아무렴. 안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하니까 말이지.”

내 앞에 꽤 커다랗고 활기찬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휩싸인 이후 오랫동안 거의 텅 비어 있었지만, 지금은 마치 예전으로 되돌아간 듯 사람도 꽤 많았고 새로 지은 듯 깨끗하지만 엉성한 건물이 간혹 보였다.

나는 내가 꿨던 꿈과 달리 피에 젖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곳은 사막과 맞닿아 있고 새로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와 거리도 있는데다, 그 사이에는 아직 괴물들이 잔뜩 몰려 있는 마을이 몇몇 있어 왕래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사막이라는 특성상 이 지역 자체가 메마른 땅인지라 작물을 재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 더욱 부족했고, 사람들은 이곳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나는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 물길에 시선을 던졌다. 이곳과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강물이 흘러내려 오고 있는 거였다. 에반이 성장하던 그 시간 동안, 루아단과 나는 이 물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북서쪽에 위치한 강은 메마를 일이 없으니 이곳 또한 앞으로도 메마르지 않는 물길이 생긴 셈이었다.

당연히 주위 땅은 비옥해졌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괴물 때문에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이들, 핍박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이들이 운 좋게 괴물을 피해 이 주위를 맴돌다가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많지는 않지만 남아 있던 사막 부족들로 인해 주위에는 괴물의 씨가 말라 있었으니 새로운 황제가 다스리게 된 중앙을 제외하곤 이곳만큼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없는 셈이었다.

나는 창문 등에 내걸기 위해 쌓아두었던 얇은 천 중 아무거나 잡아든 뒤 머리에 둘러썼다. 치마를 찢었던 천으론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묶은 채였다.

천을 깊게 눌러써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마을에 들어서자 제 할 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을 숙인 채로 눈동자만 굴려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중에는 낯이 익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낯이 익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나로 인해 삶 자체가 크게 달라진 이들인데.

이 마을이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들어찼던 건 아니었다. 물길이 생겼다고는 하나 원래 여기에 남아 있던 사람들 외에는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 거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나라에서 도망치거나 운 좋게 괴물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수도 극히 적었다. 중앙과 이곳은 거리가 멀었다.

그런 곳에 갑자기 수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고 방황했고 벗어나고자 했지만, 차차 익숙해져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요리사도 있었고, 정원사도 있었고, 기사도 있었으며, 용병도 있었다. 대부분이 가렌스 후작가와 젠다니오 백작가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이었다. 간혹 전쟁터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던 이들이 오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지옥과 다름없는 상황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죽음에서 빗겨나간 자신들의 운명에 감사했다.

이 모든 상황은 죽는 것보다는 이렇게나마 살 수 있도록 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으로, 내가 벌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전쟁으로, 반역으로 희생되었을 이들이니까. 내 죄를 조금이나마 덜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배척당하게 될 어둠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자 했던 것도 있었다. 이곳은 황제의 지배가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사람들이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유일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을 마녀처럼 핍박하고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모든 죄를 떠안고 죽은 뒤 루아단은 다른 일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되어 있었다. 억지로 이곳에 오게 된 사람들이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사용하고, 중앙에서 외면당하는 어둠들을 데려다가 역시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면서.

그게 내가 어둠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소임이라고, 그리 여겼는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나라도 나설 수밖에. 나라도 이들을 지키고 더는 어둠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애쓰는 수밖에. 에반에게 어둠은 안타까운 희생자들이 아닌 듯 보였으니 이곳을 그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나는 지금쯤 일어났을 에반을 생각하다가 분노와 배신감으로 일렁일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곤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겨 마을 어귀로 이동했다. 아마 지금 이곳을 지배하거나 혹은 지켜주고 있는 이들은 사막 원주민일 터였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는 편이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보다 더욱 밝은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훑으며 걸어가던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우뚝 멈추어 서선 하염없이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새로 낸 물길로 보이는 곳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재료를 다듬는 여인들 사이로,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수척해지고 피부도 까맣게 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루엘라?”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 그 짙은 갈색 눈동자에 있는 감정이 의구심에서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을 통해 최대한 눌러썼던 천이 들려 새카만 내 머리카락과 눈 일부를 드러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루엘라는 의문 어린 시선들을 던지는 여인들에게서 벗어나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 역시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당혹스럽고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아는 분이 맞는 건가요? 지금 제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거죠?”

“저예요, 루엘라. 당신이 아는.”

“맙소사. 처음에 뵈었을 땐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 오신 거죠? 아니, 잘 오셨어요. 어떻게 왔는지는 상관없어요. 언제나 간절히 바랐어요. 죽기 전에는 꼭 한 번 뵙고 싶다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네?”

루엘라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게 감사하다니? 나는 그들을 이용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몬 마녀였다. 아니, 지금 루엘라가 이곳에 있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니었지만…….

그조차도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분명 형장에 내걸려 있는 루엘라의 머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여인은 누구지?

루엘라는 멍하니 서 있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만 동시에 웃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노력했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이 마을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애쓰신 것도,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꺼내놓으신 것도,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것도 너무나 늦게 알았어요.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언제나 바라던 평범한 삶을요. 비록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생활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원하던 세상은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정말 감사해요.”

루엘라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듯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원망을 들을 거라 생각했다. 복수를 바라던 이들을 이용해 나라를 구하고, 결국 이들에겐 새로운 삶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을 붙인 유배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미워하고 저주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그리 여겼는데.

이들이 이렇게 믿도록 설득한 것은 역시 루아단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루아단 역시 살아 있는 것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살아남아 애초 나의 계획대로 이 마을로 어둠들을 데리고 온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가 원했던 대로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인가?

“혹시 다른 이들도 이곳에 있는 겁니까?”

루엘라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당신께서 붙잡혀 있는 대신 우리를 풀어준 것이 아니었던가요? 당신의 희생 덕분에 새로운 삶을 받게 된 것이니 영원히 감사하며 살라는 명을 들었는걸요.”

“누가 그런 명령을…….”

“이제는 황궁 주술사가 되신 그분이요.”

“네?”

에반이? 내가 놀라 되묻자 루엘라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우리가 죽이려 들었음에도 아무 죄도 묻지 않고 풀어주셨지요. 그리고 그간 괴로웠던 삶에 대한 보상으로는 부족하지만, 최대한 안락한 미래를 보장해 줄 테니 더 이상의 희생은 막자고. 사람들의 분노는 당신과 루아단이 감수하고, 그것을 끝으로 더는 과거의 일이 들춰지지 않게 될 거라고……. 그리 들었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내가 듣고 있는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되묻는데 대답은 루엘라가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낮고 싸늘하며 어딘가 모르게 잔뜩 억눌려 있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마녀는 탑에 갇혀 있었음에도 이리 도망치고 말았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흩날리는 모래바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반이 시야에 담겼다. 바람에 따라 하얗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 굳은 눈매와 비틀린 미소를 걸친 입술.

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 침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 * *

“왜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거지, 에반?”

에반에게 붙잡힌 나는 그대로 탑으로 돌아왔다. 거의 강제로 끌려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반은 온갖 주술진이 새겨져 있는 탑조차도 불안한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질질 끌고 가 손목마저 구속했다.

나는 에반에게 계속 물었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리 알려주었다면, 말만 해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나를 꿰뚫어보듯이 닿는 붉은 눈동자에 놀라 절로 입이 다물어졌기 때문이었다.

사막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반은 예상대로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의외로 침착했고,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어디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예상대로 이곳에 있으니 됐다는 것처럼 느껴져 그나마 분노가 거세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에반의 붉은 눈동자 뒤로 미처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깊이 가라앉아 일렁거리고 있었다. 가면처럼 보이는 무뚝뚝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제 자신도 주체 못 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만 같았다.

나는 깊은 심해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글거리는 화산을 마주하는 기분에 결국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내 고개는 힘없이 뚝 떨구어졌다.

에반은 그런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그러쥐더니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며 불편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보다 더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보이는 에반과 마주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너는 정말 대단해.”

잔뜩 비틀린 에반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속삭여놓고 그 말을 어긴 나로 인해 또 상처를 받았을 그에게, 변명도 사과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다는 식의 말도, 나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던 말도, 어쩌면 그전부터, 너는 내 것이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속삭였던 것부터가 거짓이었겠군. 이렇게 도망치기 위해서 철저하게 나를 속였어. 내 마음마저 이용해 가며.”

그의 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술진이 없는 집으로 데려가고 결국 손목을 풀게 한 다음, 그를 재운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에반의 것이라는 말과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말과 에반밖에 없다는 말, 그건 모두 진심이었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

에반은 짧게 숨을 토해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잔혹하게 느껴질 만큼 비틀려 있었다.

“언제? 내가 죽기 전에? 물론 돌아오긴 했겠지. 너는 죽고 싶어 하니까. 내가 너를 죽여줄 거라 믿고 있으니까. 언제가 되었던, 내가 죽기 전에만 돌아오면 되었겠지.”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자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주 똑똑하신 마녀께서는 그렇게 해도 내가 죽여줄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너를 두고 혼자 죽을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쯤은 일찌감치 깨달았겠지.”

에반의 비꼼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알고 있었다. 에반의 표정이, 행동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완전히 믿지 못해 긴가민가하면서도 에반이 나를 죽여줄 거라는 약속은 믿었다. 믿으려 했다.

은연중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보이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게 하는 것조차 막고 싶을 정도로 깊고 지독한 그 애정은, 결코 나를 혼자 두고 죽게 하지 않을 터였다.

그게 제 손으로 목숨을 앗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죽고 난 후에 괴로워하거나 혹시라도 찾아온 누군가를 만나게 될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약속을 믿었다. 그러니 에반의 진심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는 내게도 할 말이 많았다. 나로서도 또다시 그에게 속은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저 내가 벌인 일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다, 에반. 하지만 네게 말하면 그 마을이 없어질까 봐……. 혹시 모를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 할까 봐 이렇게 하고 말았다. 네가 이미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줬다면 굳이 움직이지 않았겠지.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

“나는 분명 사실을 말했어, 풀어주었다고. 믿지 않은 건 너야.”

“아니. 넌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에반.”

나는 에반의 진심은 믿었지만, 그 외에는 의심했다. 사실만을 말하겠다 해놓고, 그는 내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그곳은 어떻게 알아냈으며, 내가 그리로 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에반이 삐뚜름하게 입술을 치켜 올리며 답했다.

“다. 너에 대한 건 모조리 다. 네가 나 몰래 무슨 짓을 벌였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들을 한 건지. 너와 만났던 자들은 누구고, 너에게 있어서 그들은 어떤 의미인지. 네가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것들은 모두 알고 있어.”

이미 예상했던 대답에 나는 건조하게 물었다.

“루아단인가?”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에반의 눈은 한 차례 더욱 딱딱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사막에서 만나게 된 루엘라는 나와 루아단의 희생이라는 말을 했다. 내가 탑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아단 역시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에반이 결국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필요에 의해 곁에 두었다면, 제 역할을 다한 뒤에도 살려 둘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는…… 살아 있나?”

에반에게 어둠 일원에 관해 물을 때마다 시선을 피했던 건 거짓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사실을 말했다고 하지만 그중 하나가 거짓이니 그걸 내게 들킬까 봐. 루아단의 이름 앞에선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을 내보이는 그였으니 또 그렇게 될까 봐.

“말해라, 에반. 내가 너에게 묻는 마지막 질문이다.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고, 알아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에반의 눈동자가 폭풍이라도 만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이전에는 태양이나 보석처럼 찬란하다고 느껴졌던 붉은 눈동자는 왜인지 피로 물든 바다처럼 느껴졌다. 피로 이루어져 파도로 넘실거리는 그런 붉은 바다.

나는 그 어둡고 진득한, 끝을 알 수 없는 나락과도 같은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듯하면서도 이미 예전에 다 불타고 재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공허함이 공존하는…….

“그래. 살아 있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하나하나 정확하게 내뱉는 에반의 대답에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이 말 역시 거짓은 아닌 걸까?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을 거라 여겨졌다.

지금 상황에서 에반은 루아단이 죽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차라리 내 기억에서 영영 루아단을 지우는 편이 나을 테니까.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라기에는 에반의 표정이 지독하게 비참해 보였다.

“너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지.”

에반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의 꽉 쥔 주먹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터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언제나 네 마음속엔 내가 없는 거야. 단 한 조각도 박혀 있지 않는 거야. 그렇게나 애를 써도, 나는 네게 사막의 모래보다도 보잘것없는 거야.”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에반의 말에 당혹스러운 숨을 삼켰다. 에반은 지금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나에 대해 잘 안다던 그가, 왜 이런 말을? 루아단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틀림없이 내 마음도 알 터였다.

“……나는 네게 그런 존재인 거야.”

“아니, 아니다. 에반. 그럴 리가 없…….”

“또 어떤 말로 나를 속일 거지? 이번에는 어떤 행동으로 너를 믿게 만들며 행복이라는 환상 속에 가둘 건가?”

에반의 얼굴은 일그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게 더욱 그가 불안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텅 빈 그 얼굴이, 퍼석하게 메마른 눈이 체념을 담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결국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조각만이 남은.

“네 눈에는 내가 얼마나 우스울까. 달콤한 말 한마디로 천국에 들여놓고, 그게 사막의 신기루라는 걸 알게 된 내가 다시금 지옥에 처박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손아귀에 쥔 적조차 없는데 자신의 것이라 믿는 나를 얼마나…….”

“에반! 에반, 그런 게 아니다. 에반?”

나는 에반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보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까맣게 죽어버렸다. 빛을 잃고 그대로 어둠에 삼켜졌다. 그저 번들거리는 붉은색 구슬이 되어버린 그 눈동자에 소름이 끼쳤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걸 느꼈다. 끝없이 탐하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공허함. 그 비틀린 끔찍한 감정이 에반에게서 보였다.

나는 저런 눈을 한 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자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두려움에 질려 목소리가 떨렸지만 조급함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에반. 나는 진심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 그 진심을 외면하지 말거라. 내 마음속엔 오롯이 너 하나만이 담겨 있고 그것을 위해 움직였다. 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너밖에 없다.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루아단이라면 말했을 것이다. 나를 걱정하고 가여워하는 그라면, 사막을 말하기 이전에 내 감정을 그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내 꿈에 대해서도, 그를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조차. 나는 에반이 그 사실들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단지 의심했을 뿐.

“네가 내게 사실을 감추었듯이, 나 역시 차마 밝히지 못한 게 있었을 뿐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다. 네게 했던 말, 행동……. 모조리 진심이었다고.”

“진심이라고?”

에반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돌아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전처럼 맑게 빛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렇게 아프게 만들 리가 없어. 네가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면 내게 이럴 순 없다고.”

“에반…….”

“그래, 알고 있었어. 내가 네게 조금쯤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너와 나의 마음이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너는 언제나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고, 그렇다는 착각을 심어주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애를 썼다고 말해 주는 자도 있었고.”

역시 루아단은 내 예상대로 그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아단, 그 자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아니, 네가 그 자식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라면, 그 진심을 거짓으로 이용하는 것쯤은 우스운 일일 테니까.”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짚은 채 허망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 비웃음은 제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

“바보같이. 이미 알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 얽매여선. 처음부터 희망 따윈 없었는데. 노력할수록 상처로 돌아올 뿐이었는데.”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표정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어차피 완벽히 가질 수 없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지. 안 그래?”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윈 상관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질 거야. 내 것이니까. 모조리 다 내 것이니까.

높은 곳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황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꾸만 이는 갈증을 채우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원망들을 받아낼 마녀를 만들어냈던 황제와 에반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었고, 원하는 것 또한 각기 달랐지만 끝없는 욕심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잡아먹히고 만 것은 똑같았다.

나는 자비 하나 묻어나지 않던 황제의 눈을 빼닮은 붉은 눈동자 앞에서 또 한 번 두려움에 질리고 말았다. 마치 마녀가 되었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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