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세상은 마녀의 믿음을 비웃는다
내 피가 담긴 통을 들고 황궁으로 나선 에반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에반은 자주 가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자 노력했으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길어지면 틈틈이 찾아와 얼굴이라도 내비쳤다.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되는 건지, 습관인 건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이윽고 구름 사이로 달빛이 잔잔하게 스며들어오는 밤이 되었음에도 에반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날이 저물고 밤이 가라앉는 세상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토록 고요한 밤은 처음이었다. 창문 새로 비추는 달빛으로 물든 탑 안은 마치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왜인지 까마득하게 넓어 보였다. 온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무척이나 오랜만에 느끼는 공허함이 나를 덮쳤다.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에반과 함께 지낸 나날들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되었다. 문득 에반이 다치거나 아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서둘러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지금의 에반을 다치게 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게다가 상처든, 고통이든 그의 힘으론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러니 그보단 현실적인 사정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 그저 일이 너무 바빠서, 혹은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혹은 갑작스레 식사에 초대받아서, 혹은 깜빡 잠이 들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것이 가장 그럴듯했다. 에반은 계속 피곤해 했고 나와 있을 때도 졸곤 했으니까.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에반을 기다리면 돌아온 그가 미안해 할 것 같았다. 늦게 와서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먼저 자지 그랬어……. 항상 미안한 건 나인데 사과는 그가 했기에 차라리 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다릴 자신이 없기도 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에반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불안함이 몸집을 불려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 조바심이 일 것 같았다.
자다 보면 에반이 와 있을 것이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다음 내 옆에 누워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잠에 빠져들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쉬이 오지 않았다. 그저 깜빡 졸았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계에 끼어 있다가 또 가물가물 눈을 떴다가 졸고. 그렇게 내내 설치고 있을 때였다.
“……닉스.”
어렴풋이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졸았나 보다, 그리 생각하며 평소보다 더욱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 했다.
내게 걸어오는 에반의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조용하고 가볍고 그러면서도 힘 있는 걸음이었는데, 마치 비틀거리듯 불규칙했고 거의 질질 끄는 듯 무겁기까지 했다. 혹시 술을 마신 걸까?
소리에 집중하느라 눈을 뜨지 못한 사이 그는 내 앞에 다가와 조심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손길 또한 평소와 달리 힘겨워 보였다. 심지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다시금 입을 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 역시 미약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힘에 부치는 듯 간신히 쥐어짜 말을 덧붙였다.
“왜 이렇게 보잘것없을까?”
지금이라도 일어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대로 모른 척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상반된 생각도 떠올랐다.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에반은 이불 위로 드러난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며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 무능한 걸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데,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은데, 왜 그럴 수가 없는 걸까?”
그의 목소리에서 자책과 답답함, 그리고…… 허무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그간 그를 갉아먹던 것이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갈수록 예민해지고 제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던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것은 아닐까.
열심히 노력하고자 하지만 아득하게 멀기만 하고, 방법조차 모르겠고.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 물어볼 사람조차 없고. 그런 제 자신이 답답하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답답하고 그랬을 터였다. 그를 갉아먹던 감정은 그로 인해 생겨난 조급함일지 몰랐다.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네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영영 볼 수가 없는 걸까?”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인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나도 마음 놓고 행복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반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나는 누군가가 가슴을 쥐어짜는 듯 숨이 콱 막히며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에반은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그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자신도 알았을 텐데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에반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소용이 없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는 듯했다.
그래, 나도 사실 알고 있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 같은 건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 또한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저 저주라고 칭했을 뿐이었다. 내 목숨을 거두고 싶지 않은 신의 저주인 거라고. 만일 정말로 신이 내게 내린 저주라면 영영 풀리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고 싶진 않아 내 어미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죄업인 게 아닐까? 어머니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그러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신의 저주보다는.
한동안 말이 없던 에반은 내 손가락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웠다.
“아니야, 괜찮아. 약속은 지킬 수 있어. 반드시 지킬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어. 절대 너를 혼자 두고 죽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속삭임에 안심이 되면서도 몰아치는 슬픔을 참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내게 평범한 삶을 줄 수 없게 된 에반이 약속을 지킬 길이란, 나를 죽여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제 손으로 내 목숨을 앗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에반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자신에게 되뇌고 있는 듯했다. 주문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지킬 거야.”
내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슬프게, 아프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했으니 그 말을 지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이토록 다정하고 인내심이 강한 에반이라면 결국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내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이 더 아픈 것을 택할 거라고, 내가 지금껏 봐온 에반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적어도 그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죽지는 않을 거라고.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에반은 침대 앞에 앉아 내 손을 쥔 채 엎드려 있었다. 꼭 감은 두 눈과 일정하게 내쉬는 숨을 보니 이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이마와 머리카락, 여전히 피가 묻어나오는 찢어진 입술 등을 바라보며 그가 인내하는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 오죽 괴로웠으면 반쯤 열려 있는 하얀 제복이 엉망진창으로 뜯어져 있고, 온 손이 상처투성이인 걸까. 그 괴로움을 얼마나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면…….
“미안해, 에반.”
너를 힘들게 만들어서, 이토록이나 아프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힘들고 아프고 괴로워지면 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거였다.
나는 야윈 에반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운명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용사와 사랑하는 용사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될 마녀.
어차피 이런 운명이었더라면, 차라리 그때 끝내줄 것을. 청년이 죽고 더욱 느려진 시간 속에 갇혔을 때, 그 고통으로 끝내줄 것을.
왜 돌려놓았을까? 그래서 왜 내겐 같지만 더한 고통을, 그리고 용사에겐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었을까? 단지 세상을 구하게 하려고? 지금과 같은 세상이 열리도록 하려고?
단지 그런 거라면 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 * *
에반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늘 그랬듯 능청스럽게 굴었고, 언제 힘들어했느냐는 듯 웃었다. 내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해볼 작정인지 여전히 나에 관해 묻고, 알아보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비슷한 나날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지난밤 내내 내리던 눈이 소복하게 쌓여 다시금 동물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세상이 되어버린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잠깐 황궁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에반이 품에 뭔가를 한가득 안고 나타났다.
“닉스, 이리 와봐.”
에반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품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중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 내 등 뒤로 둘렀다. 그것은 옷이었다.
에반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망토를 둘러주더니 옷을 여미고 꼼꼼히 정리해 주었다. 그러곤 내 등 뒤로 걸어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쥔 뒤 끈으로 대강 묶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다음엔 너울을 내게 씌워 얼굴을 가리고 옷에 달려 있던 모자까지 덧씌웠다. 그제야 나는 말을 걸 수가 있었다.
“근데 왜 내게 이런 것을 입히는 거지, 에반?”
“아, 그걸 말하지 않았네. 전에 닉스가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오늘 나가보려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반을 올려다보자 그는 너울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러곤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잘 안 보이네. 어때, 닉스는? 불편하지 않지?”
세상이 뽀얀 색으로 한 겹 덧씌워지기는 했으나 보는 데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신겨주기 시작했다. 나는 드레스를 살짝 걷어 올리고 맨발을 잡는 그의 손길에 놀라 외쳤다.
“내가 신……!”
“가만히 있기나 해. 균형 잡기 힘들면 내 어깨에 손 올리고.”
발에 힘을 주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신겨주려는 모양인지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서둘러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에반의 입에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괜히 고개를 돌리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반대쪽도.”
한쪽 발에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낮은 신발을 신긴 에반이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맨발로 지내다가 신게 된 신발이 낯설어 살짝 꼼지락거리며 반대쪽 발을 들어주었다. 그는 내 발바닥을 안정감 있게 받치고는 반대쪽 손으로 신을 신기는 대신 발등을 쓸어내렸다.
“에반!”
간지러움에 놀라 에반을 부르자 그는 아예 고개를 내리더니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금세 떨어졌지만 이미 모든 신경이 그리로 쏠린 후였다. 그는 조금 전과 달리 느릿한 손길로 신발을 신겨주었다. 거의 발을 매만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하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참을게.”
그렇게 말하며 내 발을 다소곳이 내려놓은 에반은 조금 떨어져 이리저리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내 팔을 붙잡아 올렸다. 손목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싶더니 묵직해졌다. 그게 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반은 반대쪽 손까지 채운 뒤 자신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코 그를 바라보다가 제복을 벗어 드러난 그의 상체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말 내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탓에 언제나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짙은 색 외투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에반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는 주술을 사용했다. 탑에 왔을 때처럼 하얀빛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더니 곧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몇 번 깜빡거리는 사이 주위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모두 눈에 담기도 전에 귀까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먼저 세상을 가득 채웠다.
“가자.”
여전히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에반이 나를 가볍게 밀듯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덩달아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모두들 밝은 얼굴이었다. 가격이 비싸다며 하소연하는 사람, 짐이 무겁다며 끙끙거리는 사람, 찾는 게 없다며 투덜거리는 사람 등 하나같이 다 기뻐 보이는 건 아니었는데도 얼굴만큼은 밝았다. 모두들 빛을 잃고 죽지 못해 살아가던 예전과는 달랐다. 적어도 내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는 시장인가?”
“비슷해. 원래는 사람들이 그날그날 가판대를 열어놓고 팔던 곳인데 그게 커져서 지금은 일정한 날마다 장이 열리거든.”
그리고 오늘이 장이 열리는 날인 모양이었다. 나는 바닥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팔거나 제법 그럴듯한 가판대를 열어 판매하는 사람, 간단하게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판매하는 사람 등을 훑었다. 상인뿐 아니라 손님도 대단히 많았다.
“닉스는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라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젓기는 했으나 내 시선은 연신 다양한 물건들과 음식을 담아내느라 바빴다. 왜인지 지금껏 없던 물욕이나 식욕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에반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끌고 갔다.
“이건 어때, 닉스?”
도착한 곳에는 편하게 입기 좋은 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에반은 하나, 둘 들어 올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내게 대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런 곳 말고 의상실로 데려가고 싶은데 닉스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어차피 닉스는 뭘 입든 예쁠 테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내가 어색하게 서 있기만 하자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고르지 않으면 전부 다 사버릴 거야.”
이건 대체 협박이 맞기는 한 건지. 나는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다가 진짜 그럴 생각인 듯 닥치는 대로 옷을 품에 안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막아섰다. 그러곤 색이 어둡고 길이가 길며 아무런 장식도 달리지 않아 배기지 않을 것 같은 옷을 들어 올렸다.
“닉스 취향도 참 한결같다.”
에반은 그렇게 얘기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했다. 내가 고른 옷 말고도 몇 개를 더 잡아 든 채였다. 어차피 말려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격이 비싸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 뒤로도 에반은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사댔다. 왜인지 나보다 그가 더 즐거워 보였다. 어차피 황궁에서 일하는, 그것도 단 한 명뿐인 신성 주술사니 아마 버는 돈은 적지 않을 테고, 이런 시장에서 맘껏 쓰는 정도로는 무리도 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에반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 탓에 장을 벗어날 때쯤엔 에반의 품 한가득 짐이 쌓여 있었다.
“음식도 사갈까? 여기서 먹기는 조금 불편할 것 같고, 잔뜩 사가서 집에서 먹자.”
“그러지.”
그렇지 않아도 해쓱해진 에반을 살찌우기 위해 열심히 요리하는 중이었으니 이런 곳에서 잔뜩 사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식당과 주점이 몰려 있는 곳을 걸어 다니며 구경했다.
“정말 살 만해졌나 보군.”
“그치? 달라진 건 별로 없는데도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좋아졌어.”
“식량도 많이 늘어난 건가?”
“응. 아무래도 그것도 한몫하겠지. 내가 온갖 농작지를 다 돌아다니며 축복, 정화해 대니 작물의 양이나 자라는 속도 등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게다가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기도 했고.”
“대지를 안정시키지는 못한 건가?”
에반의 얼굴이 사뭇 어두웠다. 하지만 금세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와선 말했다.
“나는 천자의 그릇이니 뭐니 이런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정말 뭐가 많이 다르긴 한가 봐. 하지만 노력하고 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 문제는 황제폐하께서 너무 힘들어하신다는 거지만…….”
“신의 힘을 선택받지 않는 자가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가 없겠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할 뿐이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에반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새로 짓고 있는 신전이 있는데 가서 구경해볼래? 음식은 돌아가는 길에 사가도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은 건물 사이로 뼈대밖에 없는 커다란 건물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직 지어지지 않았음에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다. 에반은 근처에 있는 의자에 나를 앉히더니 짐 역시 모조리 내려놓고 말했다.
“안 그래도 들를 일이 있었는데 잠깐 갔다 올 테니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차피 보이는 곳에 있을 거니 도망쳐도 소용없어.”
힘도 묶여 있는 내가 무슨 수로 에반을 피해 도망친다는 걸까. 게다가 그럴 생각도 없는데.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그런 나를 두고 신전 앞에 걸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연신 내 쪽을 힐끔거리기는 했으나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의 곁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쯤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이 매달려 짓고 있는 신전을 바라보았다. 완성되면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만약 에반에게 부탁하면 그때도 데리고 나와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어휴, 진짜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쳐서 원. 빨리 좀 치워주면 안 되나? 언제까지 걸어둘 참인지.”
문득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장을 본 건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는 여인 셋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어졌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나마 평화를 되찾은 지금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선은 앞으로 돌린 그대로 귀만 기울였다.
“형장에 걸려 있는 머리들 얘기하는 거지?”
“그래, 그거. 끔찍하기도 끔찍한데 악취 때문에 더 괴롭다니까?”
“밤에는 얼씬도 못 하겠어. 무슨 생각으로 형장을 공개해 둔 거래.”
형장? 머리? 나는 어느덧 한참 전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렸다. 반역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했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에반의 빛으로 태워 죽였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머리까지 잘라 매달아 놓은 모양이었다. 아마 다시는 반역 따윈 꿈도 꾸지 못하도록 걸어놓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형장은 작은 광장을 손봐 만들었던 것 같았다. 그게 이 근처였구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래야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어둠들이 몸을 사리지 않겠어? 그들의 목을 걸어두면 자기들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참을 만해.”
“그래, 맞아. 또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더욱 끔찍하니까 말이야.”
순간 주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로지 내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저 멍하니 여인들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중 한 여인이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모습이 느릿하게, 정말이지 아주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해! 그 얘긴 절대 하지 말라는 황명을 못 들었어? 걸리면 잡혀가니까 그 얘긴 꺼내지도 마! 마녀든 마녀 일당이든 어둠이든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라고!”
화들짝 놀란 다른 여인들은 괜히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여인들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어느새 내게 다가온 에반을 알아차리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닉스?”
에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아, 가기 전에 음식 사기로 했지? 거기만 들렀다가 가자.”
에반은 내 곁에 내려놓았던 짐들을 도로 품에 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귓가엔 연신 웅웅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픽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에반의 표정이, 목소리가, 말투가 모조리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세상 전체가 극장으로 변했다. 나라는 관객을 속이기 위해 모두들 가면을 쓰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닉스,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나는 허리를 숙여 나를 빤히 쳐다보는 에반의 눈빛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호흡이 가빠진다. 아니야, 아닐 거야.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간신히 커다란 돌로 목구멍이 콱 막힌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내고 목소리를 냈다.
“에반.”
“응, 말해.”
에반의 붉은 눈동자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키다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물었다.
“네가 그랬지? 붙잡혔던 어둠들을 모두 풀어주었다고.”
순간 에반의 얼굴에 얇은 균열이 생겼다. 금세 고개를 돌리며 피했지만, 그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까지 모조리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왜 또 그 얘기를 꺼내는 거야? 대체 그들이 네게 어떤 존재였길래 그리 신경 쓰지 못해서 안달이냐고.”
“말해줘. 풀어준 거, 맞아?”
“그래, 풀어줬어. 그러니까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마.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려.”
에반은 아예 나를 등진 채 그리 말했다. 그 바람에 내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옷자락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허공을 부여잡은 나는 연신 단 한 가지 단어만 떠올리고 있었다. 형장, 형장, 형장……. 그곳에 가면 진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곳에만 가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내달렸다.
“……닉스?”
뒤에서 당혹감에 찬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다리에 달라붙는 옷자락을 쥔 채 쉬지 않고 뛸 뿐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에반에게 팔을 붙잡혔다. 에반은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새 헐떡이는 내게 물었다.
“어딜 가는 거야, 닉스!”
나는 그의 팔을 강하게 뿌리치고 뛰어가려 했지만, 다시금 붙잡히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감정은 분명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놔. 지금 놓지 않으면 너를 피할지도 몰라. 너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고.”
에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내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빠진 것을 느끼곤 망설이지 않고 뒤로 돌아 뛰었다. 형장이 어디인지는 찾을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장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형장 가운데 매달려 있는 머리들을 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는 피부와 반쯤 벗겨진 채 비어 있는 머리통으로 인해 거의 다 비슷하게만 보였지만 굳어버린 핏물과 함께 엉망진창으로 엉켜있는 회색 머리카락만큼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루아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루엘라였고, 카토와 트루도도 보였다.
“닉스.”
어느샌가 쫓아온 에반이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슬픔이기도 했고 분노기도 했으며, 배신감이기도 했고 혼란스러움이기도 했다.
“어떻게…… 어떻게…….”
“닉스, 내 말 좀 들어봐.”
에반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들여다보려 애를 썼다. 멍하니 바닥만을 바라보는 내 뺨을 감싼 뒤 그대로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내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지? 사실만을 말하자던 그가, 그날 바로 말해 준 것조차 거짓이라면, 나는 어떻게 그를 믿을 수가 있지? 대체 어떻게?
“……않아.”
“뭐?”
“듣고 싶지 않아. 네 그 거짓말은 더는 듣고 싶지가 않다고.”
내게 말해 준 것 중 진실은 있었나? 내가 아는 네 모습 중 진실은 있었던 건가?
“……닉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나는 죽어서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태어난 이후로 살아가는 내내 고통받던 이들이었는데. 세상에 버림받고, 마녀에게도 이용당한 안타까운 이들인데 죽음마저 이토록이나 끔찍하다니, 대체 이들이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안겨준단 말인가!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했잖아. 감옥에 갇혀 있을지언정 살아 있기만을 바라던 내게 무사히 풀어주었다는 거짓말을 하다니.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믿었던 거야? 어차피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으니 영원히 속이려 했던 거냐고.”
“…….”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꿨던 꿈이 단순한 악몽일 거라 여겼다. 에반의 말만 믿고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으려 했다. 내 계획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더욱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리라. 모든 죄를 내가 끌어안고 죽은 뒤, 그들을 보살피기로 했던 이가 이토록 끔찍하게 눈을 감았으니.
“……루아단.”
내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루아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따스한 눈으로 걱정해 주던 남자였다. 늘 고맙고 미안하기만 했다. 내 욕심으로 그에게 짐만 떠안겨주었다, 마지막까지도.
이 죄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나는 감당키 어려운 죄책감에 속이 답답해졌다. 끊임없이 치미는 울음을 토해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에반이 내 팔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내가 제대로 서지도 못한 걸 알면서도 그대로 탑으로 이동했다. 나는 주위 풍경이 달라졌음을 깨닫고 나서야 이동 주술을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곤 그의 힘에 밀려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거의 집어 던져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우는 건데?”
에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닦아낼 정신 따윈 없었다. 에반은 입고 있던 외투를 거칠게 벗으며 다시금 말했다.
“대체 왜 우는 거냐고. 뭐가 그렇게 서럽고 아파서 눈물을 흘려? 그들이 뭐라고 네 눈물을 바닥에 떨구는 거야? 어?”
내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계속 눈물만 흘리자 에반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내게 걸어와 침대에 손바닥을 댄 채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그 자식 때문에 그래? 루아단인지 뭔지.”
그의 입에서 루아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곧바로 도망갔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다.
아마 나를 지켜보다가 붙잡혔으리라. 혹시라도 내가 돌아올까, 기다리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으리라. 언제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몸을 사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라고 했는데, 그는 그 부탁만은 들어주지 않곤 했었다.
“루아단은 죽어선 안 되는 남자였다. 그래선 안 되는…….”
“그 자식이 그렇게 소중했어?”
에반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길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씹어 먹듯 말을 덧붙였다.
“둘이 대체 무슨 관계였어?”
“……에반.”
“내가 말했지. 너의 모든 것은 내 거라고. 근데 왜 그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려? 왜 그 자식의 이름을 부르고, 그 자식을 바라보고, 그 자식을 생각하는데? 그 자식이 대체 뭔데? 어?”
나는 에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뒤를 짚으며 조금이라도 더 도망가기 위해 애를 썼다. 내가 알던 에반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사나울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짐승처럼 포효하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 낯설었다.
그는 도망치는 내가 가소롭다는 듯 침대 위로 올라와 무릎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내가 결국 벽에 닿아 도망칠 곳이 없어지고 나서야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처럼 여유로움을 드러냈다.
“너는 내 것이야.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야. 네 머릿속엔 나만이 있어야 해. 나만 생각해. 네 눈은 나만을 바라봐야 하고, 네 목소리는 나만을 부르고, 네 손은 나만을 만지도록 해.”
에반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자 머리 쪽으로 오던 그의 손은 잠시 방황하다가 자신의 옷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단추를 끄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몸과 마음, 모든 곳에 나를 새겨줄게. 다시는 다른 사람 따위 떠올릴 수 없도록. 영원히.”
순식간에 자신의 상의를 벗어 던진 그가 내 다리를 붙잡고는 그대로 확 잡아당겼다. 벽에 기대어 있던 나는 그의 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맥없이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 반동으로 치마가 뒤집힌 채 올라가 서둘러 잡아 내리려는데 그가 더 빨랐다. 에반은 아예 내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걸치며 치마를 사정없이 찢었다.
“에, 에반!”
비명처럼 내지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마뿐 아니라 나머지 부분도 마구잡이로 찢어대는 에반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에반의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천이나마 부여잡으며 몸을 가리려 애썼다. 입에선 쉼 없이 애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지 마, 에반. 제발.
“제발, 제발 너를 미워하게 하지 마.”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손길로 옷을 잡아 뜯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결국 양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나오는 대로 울음을 토해냈다.
“……제발, 에반.”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빙글 도나 싶더니 순식간에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