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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녀는 변해가는 용사를 불안하게 지켜본다 (26/45)

  25. 마녀는 변해가는 용사를 불안하게 지켜본다

또 악몽을 꿨다. 온 세상이 핏물에 잠기고 시체는 쌓이고 쌓여 마치 끝없이 이어져 있는 산처럼 보였다. 흐르는 피의 강과 시체로 이루어진 산. 그리고 빛 하나 없는 새카만 하늘과 그 속에 홀로 서 있는 나. 언제나 그랬듯이 절망만이 가득했다.

메마른 눈으로 주위를 훑는데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점점 커져 나를 옥죄었다. 발작하듯이 몸을 비틀어 무작정 뛰었지만 앓는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마치 내 바로 옆에서 앓는 듯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악몽이라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꾸니까, 나 스스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만들어내는 거니까, 이렇게라도 죄를 빌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오늘따라 뭔가 이상했다. 그 이유는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을 뜨니 은은한 달빛이 느껴졌다. 어느덧 익숙해진 하얀 탑 내부도 보였고 이마를 훔치자 식은땀도 묻어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귓가에선 앓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고통을 토해내듯 뜨거운 숨결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곁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치는 에반이 눈에 들어왔다.

“에, 에반!”

그는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신 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고, 손톱 끝에 피도 맺혀 있었다. 옷은 진작 찢어진 듯 너덜너덜했다.

“에반! 일어나라, 에반!”

나는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고, 입마저 콱 다물고 있어 뿌드득거리며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

내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깨우자 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간신히 드러난 붉은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아닌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 초점이 없었지만, 그 붉은 색상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해서 도리어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주변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그는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가슴에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있었다. 손을 부여잡으며 막아보지만, 그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질렀다.

“에반!”

순간 에반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두어 번 깜빡거리던 그가 어리둥절함이 깃든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고 있었고 얼굴 또한 잔뜩 찡그린 채였지만, 조금 전보다는 덜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괜찮아? 정신이 드나?”

“……닉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제 보니 입술 사이로도 피가 비추고 있었다. 입안을 깨문 것인지, 입술을 깨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서둘러 닦아내었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그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상처를 치유해야…….”

“아니, 괜찮아.”

애써 웃어 보이던 그가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저 악몽을 꾼 것뿐이니까. 너무 피곤했나 봐.”

“대체 무슨 꿈이길래…….”

에반은 자신의 몸 위에 거의 올라타다시피 한 나를 팔을 뻗어 끌어안더니 그대로 옆으로 눕히곤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 뒤 익숙하게 몸을 토닥거렸다.

“그러는 닉스는 왜 일어난 거야? 또 악몽을 꿨어?”

말을 돌리고자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에반이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턱을 괴고 누워 바라보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악몽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슴에 난 상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기에 쉽사리 안도할 수가 없었다.

“어서 자. 피곤하겠다.”

나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피곤한 듯 눈을 나른하게 뜬 채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반을 보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가 늦게 잘수록 에반 또한 늦게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침에 일어나서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멍하니 앉아 거의 의무적으로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휘젓고 있으려니 당연히 반죽은 제대로 섞일 리가 없었고, 중간중간 튀어 바닥마저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칼질을 멈추고 그런 에반을 지켜보고 있건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눈을 뜨고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갈수록 말라가고 얼굴이 푸석해져 걱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조금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다.

“에반?”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그의 붉은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뭐라고 했어, 닉스?”

“피곤하면 조금 자두는 게 어떤가?”

“……아.”

에반은 자신이 들고 있는 반죽 통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금 힘차게 휘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고……. 빨리 끝낼게. 재료는 다 준비된 거야?”

“대강.”

“닉스도 칼질이 많이 늘었네. 전에는 조금 어설펐던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좋았지만. 귀여웠거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이었지만 눈가에 자리 잡은 피곤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칼을 내려놓았다. 에반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래? 힘들면 내가 할까?”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다, 에반. 음식은 내가 만들 테니 침대에 가서 누워라. 밤새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그러다가 몸이 상할지도 모른다.”

에반이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러더니 곧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혹시 나 때문에 잘 못 잔 거야? 아, 그럼 안 되는데……. 침대를 하나 더 가져다 놓을까? 따로 자는 건 싫지만, 나 때문에 닉스가 깨면 곤란하니까…….”

“나는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언제든 잘 수가 있으니. 그보단 네가 걱정이지. 도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토록 고통스러워한 건가?”

“그냥 단순한 악몽이야.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봐. 일 좀 줄여달라고 항의해야겠어. 이러다 내가 죽겠다고 말하면 봐주지 않을까?”

에반은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내 마음은 쉬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곧 말을 돌렸다.

“그보다 닉스, 닉스의 어머니 말이야…….”

나는 그가 말을 돌리고자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결국 넘어가 주고 말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걸 계속 물고 늘어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에반의 말대로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아 그런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치유 주술에는 상처뿐 아니라 몸을 가볍게 만들고 기력과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도 있으니 알아봐라. 너라면 쉽게 사용할 테니. 그리고 내 어머니는 왜?”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주술사셨어?”

“그래.”

“혹시 어떤 속성이셨는지 알아?”

“그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문을 트며 손질한 재료를 바구니에 옮겨 담다가 순간 멈칫했다. 무슨…… 속성이지?

가만히 앉아 어머니를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주술을 사용하곤 했던 터라 그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껏 어머니의 주술 속성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던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딘가 이상했다. 어머니는 속성을 따지지 않고 주술을 사용했다.

무속성 주술사였나 싶어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손짓 하나로 불을 피우고, 또 손짓 하나로 금속의 모양을 바꿨다. 손짓 하나로 욕조에 물을 채웠고, 또 손짓 하나로 멀리 있는 카드가 날아오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속성 주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 많은 속성력을 지닐 수가 있지?”

게다가 이상한 건 또 있었다. 그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머니의 주술 속성을 암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둠을 빼닮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주로 사용하던 것이 암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즐겼고 또 괴물을 지휘했다는 소문까지 들어, 당연히 내 머릿속에서 암흑 속성 주술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머니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또 너무 오래전에 헤어졌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모르고 있을 수가 있나 싶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도 이 정도까진 아닐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나 주위에 무관심했던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는 걸까.

“나의 어머니는 대체 누구인 걸까.”

내가 의문 섞인 혼잣말을 내뱉자 에반 역시 비슷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건가?”

에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야. 너무 터무니없는 정보가 많더라고. 확실해지면 그때 말해 줄게.”

그러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만든 반죽에 내가 다듬고 썰어놓은 재료들을 섞었다. 그러자 오래전 언니가 만들어주었던 부침개라는 음식의 반죽과 꽤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다음에는 뭐야?”

나는 조금쯤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뭐 문제 있느냐는 듯 태연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로선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었다.

“내가 할 테니 자리를 정리해줬으면 좋겠는데.”

에반은 냉큼 알겠다고 대답하며 부산스럽게 자리를 치웠다. 나 때문에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잠시 힘겹게 바라보다가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득 에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다가, 어쩌면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이 모든 행동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 구원줄인 양 놓을 수 없는 건, 헛된 욕심인 걸까?

* * *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

에반의 중얼거림에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듯, 혹은 무심결에 내뱉은 듯 미동도 없었다.

나는 에반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읽고 있던 교서를 내려놓고 그사이 더 해쓱해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만 유독 불그스름하게 어두워 울다 지친 사람처럼 보였다.

요즘 에반은 계속 이런 상태였다. 조용하다 싶어 에반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는 깜빡 졸고 있거나 혹은 멍한 표정으로 한곳만 바라봤다. 들고 있는 서류나 책은 한참이 지나도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그런 그가 걱정되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 보았지만,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야 에반의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일 좀 줄여달라고 부탁해본다고 하더니 황궁에 갔다 오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밤마다 온실로 가 일을 하는 듯했다.

내가 억지로 재울라 치면 그 잠깐 사이 끙끙거리며 앓다가 도로 깨곤 했다. 끈질긴 내 질문에 결국 꿈 내용을 말해 주기는 하지만, 비슷한 듯 다 다른 악몽들이었다. 대부분 내가 꾸는 것처럼 피에 젖은 세계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이었다.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

다시금 에반이 중얼거렸다. 어느 날 에반이 내게 ‘왜 네가 죽으면 어둠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내가 말해 준 점괘였다. 그 뒤로 에반은 더 이상 점괘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웬일로 입 밖으로 내비쳤다.

에반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빛은 나고 어둠은 닉스인 걸까?”

점괘가 칭하는 빛은 에반이라고 확신했다. 기억 속 청년이 죽었을 때, 점괘는 사라졌었다. 내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에반이라는 것이니, 어둠을 몰아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인 건지, 여태 사라지지 않은 괴물인 건지, 어둠이라고 칭할 수 있는 모든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건 왜 묻지, 에반?”

내 질문에 에반은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금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문득 점을 본 지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반이 있는 황궁으로 가던 날, 탑에 있는 것들을 모두 정리하며 카드 역시 집에 가져다 놓았다.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내가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기에 카드를 다시금 가져오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탑 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에반을 불렀다.

“에반.”

“응? 왜?”

“잠시…… 나갔다 오고 싶다.”

“안 돼.”

그곳이 어딘지 말을 하기도 전에 에반은 재빨리 막아섰다. 그는 여전히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눈매 또한 싸늘했다.

“금방 돌아오도록…….”

“안 된다고 했어.”

“왜지?”

“싫으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그의 표정과 목소리로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에반이 뭘 불안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내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했던 에반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가려거든 함께 가는 쪽으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망설여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에반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내 쪽으로 걸어와 무릎을 베고 누우며 물었다.

“혹시 답답해진 거야? 바깥에 나가고 싶어졌어?”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에반의 표정이 조금 풀려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말했다.

“그럼 왜? 뭐 필요한 게 생겼어? 그런 거라면 말해. 내가 줄게.”

내가 슬며시 고개를 젓자 에반이 내 뺨을 아프지 않게 붙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혹시 화났어? 기분 상한 건 아니지?”

“아니다.”

그제야 에반은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화났으면 어쩌나 했어. 난 그 화를 풀어줄 수 없으니까. 있지, 닉스. 나는 닉스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줄 거야. 그게 뭐든 해주기 위해 노력할 거야. 하지만 딱 하나 안 되는 게 있어. 여기를 벗어나는 것. 날 욕하고 때리고 울어도 그것만은 해줄 수 없어.”

그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가 진심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런 그를 흔들면서까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드는 듯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금세 떨어진 그의 얼굴은 말간 웃음이 가득 맺혀 있었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

“뭔데?”

“너와 함께 나가는 것도 안 되는 건가?”

에반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나는 에반이 어디까지 허용해 줄 수 있는 건지 알아보기 위해 이번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가 내게 찾아오는 것은?”

“다른 이? 누구?”

굳이 묻지 않아도 대답을 알 것 같은데 괜히 물었나 싶었다. 에반은 애초부터 이곳을 ‘아무도 모르는 곳, 누구도 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었는데.

“……글쎄. 여자?”

“여자?”

“딱히 누구를 생각하고 물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에반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깃드는 걸 눈치채고 별다른 뜻이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그저 문득 궁금해졌을 뿐이다. 지금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얼마나 변했는지. 너는 내게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으니까.”

“별거 없어. 그냥 조금 더 살기가 좋아지고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진 것 외에는.”

그렇게 대답하곤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에반이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별거 없는데.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대체 사람들이 닉스에게 뭘 해준 게 있다고 그리 마음을 쓰는 거야? 해주긴커녕 상처만 입혔는데.”

나는 에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괜히 혼자서 투덜거리던 그는 결국 한걸음 양보해 주었다.

“알겠어, 알겠어. 기회 되면 누구든 데리고 올게.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로서는 많이 양보하는 것일 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함께 나가는 것도 안 되는 거군.”

그렇다면 카드는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인지 기분이 무척 나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에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생각은 해볼게. 대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건 안 되고 멀리서 구경하는 정도만. 이 이상은 안 돼!”

어차피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곳은 카드가 있는 집이었기에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에반이 그걸 원한다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는 여전히 뭔가 불안한지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신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해. 전처럼 네 힘도 묶어놓을 거야. 그리고 옷으로 얼굴을 비롯한 네 모든 것을 가린 뒤 나 없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할 거고.”

그건 상관이 없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물었다.

“나는 어차피 네 곁에 있을 건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가.”

“그냥 다! 다 불안해, 다!”

에반은 소리를 지르듯 답했다. 나는 한껏 일렁이는 에반의 붉은 눈동자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에반은 자신의 표정이, 목소리가 어떤지 눈치채지 못한 듯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불안해! 세상을 그리워하는 걸까 봐, 내 곁에 있는 것에 싫증 난 걸까 봐 불안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보며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원하게 될까 봐 불안하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필요 없어질까 봐 불안해! 아니, 그냥 간신히 얻어낸 이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릴까 봐 불안해! 불안하다고!”

말을 끝마친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화를 내는 그를 처음 봐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에반이 내게 소리를 지른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리고 내가 죽여달라고 매달릴 때도 목소리만큼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단 한 번, 내가 끊임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노력했을 때. 그때는 왜 그러느냐며 외치기는 했으나 금세 애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아차 싶은 듯 에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다가 탄식을 내뱉으며 양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하다가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진짜 미쳤나 봐. 닉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리나 지르고 있고.”

나는 마구잡이로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놀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도, 이렇듯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피곤하면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으니……. 너를 위해서라도 조금 쉬는 것이 좋을 텐데.”

에반은 손을 조금 내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잔뜩 찌푸려진 붉은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그저 조금 궁금했을 뿐, 세상이 그립다거나 했던 건 아니다, 에반. 그리고 나 역시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니 떠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어린 시절의 에반에게 그랬듯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가 삶을 바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내게 마지막을 선사해 줄 너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 내 마지막 희망은 너뿐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너의 곁을 떠날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듣던 에반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결국 내 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양팔로 허리를 감싸 안고는 폭 파묻었다.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진짜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아직 시간은 많으니 조금 자두어라.”

“……응. 나 조금만 쉴게.”

나는 에반이 내게 그러듯 약하게 도닥이며 나와 마찬가지로 놀랐을 그를 안심시켜 주는데, 금세 졸음이 몰려드는 듯 그는 조금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같이 나들이 가자. 시장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필요한 것도 사고……. 그래도 얼굴은 가릴 거야. 닉스는 너무 예뻐서 안 돼……. 사람들이 다 쳐다볼 거야…….”

“그래, 그래.”

그 뒤로도 자신이 사준 옷은 입지 않으니 직접 골라보라든가, 짓고 있는 신전에도 가보자든가 조금 더 중얼거리던 에반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그런 에반을 계속 도닥여주다가 아까까지 읽던 교서를 다시금 들어 올렸다.

* * *

피곤한 에반을 위해 그의 짐을 덜어주려 하다 보니 나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식사 준비도 거의 내가 도맡게 되었고, 여러 서류를 검토하며 서명하거나 새로이 작성하는 그의 옆에서 고대어로 된 교서를 읽고 풀이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하려 애를 썼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에반이 잠을 자는 시간은 조금이나마 늘었지만, 한 번 쌓인 피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지 여전히 야위었고 멍했다. 그리고 예민했다.

별것 아닌 것에 목소리를 높이거나, 일을 하다말고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집어 던지는 둥 예전보다 감정 기복이 심했다. 그러곤 자신도 놀라거나 뒤늦게 후회해서 사과하고 정리했다.

불안했다. 뭔가가 에반을 갉아먹는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에반.”

“응, 말해.”

“이전에 내가 말했던 주술은 알아내지 못한 건가? 기력과 체력 등을 회복시켜 준다는…….”

“워낙 힘을 사용해야 할 곳이 많아서 내게 사용하는 건 왠지 아깝더라고. 조금 여유로워지면 그때.”

에반이 더욱 피곤해하는 것은 쉬지 않고 사용하는 힘 때문일지도 몰랐다. 회복되기도 전에 계속 사용해 대니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이러다가 몸이 상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도 에반의 속성이 신성이니 다행이었다. 회복력도 남보다 뛰어날 테고, 정말 그의 말대로 조금 여유로워진 뒤 자신에게 사용하면 금세 돌아올 테니까.

물론 아무리 신성 주술에 치유가 있다고 하나 쌓여 있던 피로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아버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육체는 몰라도 정신까지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보다는 닉스, 아무래도 닉스의 피가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은데 가져가도 될까?”

나는 단검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에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든 죽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원한다면 핏물에 잠길 만큼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에반이 또 안 된다며 화를 낼지도 모르니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번엔 조금 더 가져갈게.”

그러나 의외로 에반은 이전과 비교하면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큰 통 하나를 내려놓더니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을 그어버렸다. 망설임 없는 몸짓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바닥이 갈라지고 피가 흘러넘쳤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힘이 빠지고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벌어진 살이 아리기도 아렸다. 그럼에도 피가 뚝뚝 떨어져 흥건하게 고이는 통만을 바라보는 에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짚어낼 수 없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알아낸 거라도 있나?”

“……아니, 아직. 근데 곧 알아낼지도 모르겠어.”

그 긍정적인 대답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에반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기대하지는 말고. 아직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확인할 방법도 없고.”

에반은 단검을 들어 손바닥으로 피를 닦아냈다. 왜 손 다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하느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예리한 검날이 순식간에 에반의 손에 선명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에반은 무심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이 묻어나는 손길로 검을 허리춤에 찼다. 어느새 그의 손에 난 상처에 피가 맺혔다.

“괜찮은 건가?”

“응, 괜찮아. 아까워서 핥아 먹으려고 일부러 손바닥에 닦은 건데 삐끗했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내 피와 점점 더 송글송글 맺히는 자신의 피를 혀로 핥았다. 하지만 내 피와 달리 에반의 피는 계속해서 묻어났다. 그때마다 입술로 머금던 그는 결국 관심을 끄고 피가 나든 말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져선 물었다.

“왜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 건가?”

“별거 아닌데 뭘 치료까지 해. 어차피 금방 나을 텐데.”

물론 신성 속성 주술사인 에반은 상처가 금방 낫고 흉터도 잘 사라지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저 정도 작은 상처는 힘도 얼마 들어가지 않을 테니 거슬리는 것보단 치료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에반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다.

그저 통이 어느 정도 찰 때까지 핏물만 바라보다가 벌어진 내 상처가 흉터 하나 없이 사라지도록 치유 주술을 걸어준 뒤 주변을 정리했다.

“그새 피가 팔까지 흘러갔네. 어쩌지? 닉스 옷에도 묻었어.”

미처 통 안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손바닥에 남아 있던 피가 손목과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충 걷어 올렸던 소매 부분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몇 방울 떨어진 핏방울은 치마를 더럽혔다. 어느새 앞에 와 앉은 에반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곤 피를 핥았다. 그리고 점차 피를 따라 손목과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내 손에 깍지를 낀 채 팔 안쪽을 핥는 에반을 내려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의 행동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심장이 크게 뛰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내 손에 상처를 내는 순간, 고통보다는 내 피를 핥을 그를 떠올리며 더욱 떨렸던 것 같다.

에반에게 잡혀 있는 손바닥은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졌고, 입술과 혀가 닿을 때마다 간지러움이 남았다. 나는 힐끔 에반을 내려다보았다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의 붉은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었다.

동시에 팔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이 피 대신 살을 머금고 빨아들였다. 그 생소한 느낌에 당황해 손을 빼려고 하는데 그가 더욱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닉스.”

에반은 내 팔과 손목 여기저기를 빨며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팔이 온통 불긋한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그게 꽤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내가 벗겨줄까?”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붉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가라앉자 그 자체로 무척이나 유혹적인지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지만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더 가까이 다가와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나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내가 하지.”

그러고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그가 손목을 확 잡아챘다. 힘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자 아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나 싶더니 그대로 감싸 안았다. 나는 순식간에 앉아 있는 그의 다리 위로 쓰러져 품에 갇혀버렸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빡일 정도로 찰나였다.

“닉스.”

“……에반, 이게 무슨…….”

“내가 닉스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거, 닉스도 알고 있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는데, 내 등허리를 감싸고 있던 에반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어깨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리한 그가 드러난 내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 단단히 힘을 주어 끌어안고 있었기에 움찔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닉스를 볼 때마다 참기 어려운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끝없는 욕심이 나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닉스의 숨결, 살결 모조리 삼키고 싶은 욕구에 안달이 난다는 것을.”

목과 어깨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쇄골과 드레스 위로 드러난 가슴 윗부분…….

턱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부드럽게 짓눌리는 그의 입술에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라도 신음을 내뱉을까 봐 입술은 콱 깨문 채였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계를 맛보는 기분이야. 가끔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도 닉스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슬프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또 미움 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참아내. 지금도 그래. 나는 당장에라도 이 옷을 벗기고 그대로 닉스의 살결을 음미하고 싶어. 희고 부드러운 피부에 입술을 묻고 낱낱이 탐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던 에반은 잔뜩 벌어져 등이 훤히 보이는 옷자락 안으로 양손을 넣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맨살을 더듬던 손은 어느새 손가락으로만 부드럽게, 혹은 간지럽게 등허리를 쓸며 올라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늘 생각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여전히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던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가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짙게 가라앉아 일렁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안을 수가 없다니, 이건 정말 고문이 따로 없어.”

에반의 어깨 쪽에 올려놓았던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들바들 떨릴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어떨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일그러져 있을까? 아니면 불쌍하게 처져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수줍은 여인처럼 보일까? 도저히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닉스, 네가 싫다면 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참아보려 애를 쓸 거야. 다만…… 네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어.”

그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나를 받아들여 줄 수는 없는 거야? 응? 닉스…….”

에반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에반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정도는. 그런데도 모른 척했다.

두려웠다. 나는 분명 에반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그가 나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부터,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청년 때부터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에도 그를 완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내 성격 탓이기도 했고, 낯설고 부끄러운 행위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고,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기억들이 남아 있어 그렇기도 했고, 결국엔 헤어져야 할 사람과 이 이상 깊은 관계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일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에반은 그 손으로 나를 죽여야 할 텐데. 품에 안았던 여인을, 따뜻하게 쓰다듬던 그 손으로 과연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에반의 애처로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시왕관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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