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마녀는 의도치 않게 용사를 유혹한다
“닉스, 혹시 먹고 싶은 음식 없어?”
“없다.”
딱 잘라 대답하자 에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정말로 그렇다기보다는 과장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에반은 다시금 떠올린 듯 보였다. 내가 이런 것에 약했다는 사실을. 그는 연달아 한숨을 푹푹 쉬며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힘없이 쳐다보았다.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도 닉스는 먹어주지도 않고. 가장 좋은 재료만을 가져와 열심히 다듬고 책을 보고 공부하며 요리를 만드는데 언제나 버려지기만 하지. 닉스는 자꾸 말라만 가고…….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핏기 없는 얼굴은 가여워서 볼 수가 없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보았다. 에반의 힘 덕분에 흉터가 사라지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매끄럽고 보드라운 피부가 되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탓에 푸석한 것도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인데, 핏기까지 없으면 그야말로 시체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반은 정말이지, 내 감정과 생각을 일깨우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텅 비어 있던 내가, 죽고자 했던 내가 여자의 고민을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여자이고 싶은 걸까. 혹은 여자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는 걸지도. 그의 속삭임 앞에서 나는 무너지고 말았나 보다.
“무엇이든 괜찮은 건가.”
내 말에 에반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또 넘어갔다. 어린 시절의 에반, 툭하면 탑에 찾아왔던 에반, 그리고 지금 앞에 있는 에반까지 어쩜 그리 영악하고 능청스러운지 휘말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문득 불안한 마음도 든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앞에선 이렇게 사랑스러우면서, 뒤로는 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그가 죽여주겠다고 약속을 한 이상, 나는 그의 곁을 떠날 이유가 없으니 불필요한 일이지만.
“뭐든 만들어줄게. 이왕이면 닉스가 먹고 싶은 거였음 좋겠어. 사실 나는 닉스가 뭘 좋아하는지도 전혀 모르니까, 생각나는 게 없으면 가장 좋아하는 걸 말해도 좋아.”
내가 뭘 좋아했더라. 무언가를 좋아하긴 했던가. 나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즐겨 먹거나 찾던 음식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간신히 언니가 만들어주던 돈가스라는 음식을 떠올리곤 과연 요리책에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가슴 속을 휘감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는지, 에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저었다.
“돈가스. 혹시 돈가스라는 음식의 조리법이 나와 있나?”
“돈가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찾아볼게.”
에반은 자리에 앉아 요리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마 황궁에서 가져온 책일 테니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종이를 넘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떠올랐던 생각을 다시금 되짚었다.
잊고 있었다, 내 가족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여겼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 언니, 집사, 그리고 시간이 멈춰버린 집,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과 추억까지도.
무엇을 보든 떠올라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었던 그 기억들은 어느덧 한참을 더듬어봐야 할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내게는 망각이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 대신 새로운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저분할 정도로 마구 먹어치우던 에반의 모습, 에반을 위해 요리를 만들던 모습, 내가 만든 요리만 유독 맛있다고 해주지 않던 모습, 그런 에반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치던 모습, 요안을 따라가 그곳에서 처음 식사를 하던 모습, 토벌을 위해 이동하던 중 아무렇게나 앉아 간단히 먹던 모습…….
그것뿐이 아니었다. 눈을 보아도 그 안에서 뛰어놀던 에반이 떠올랐고, 태양을 보아도 그와 닮은 에반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에반을 위해 움직였고 살아갔다. 오로지 에반만 생각했고, 에반이 없는 삶만 걱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와의 추억들로 아파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가족들과 보냈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였는데, 이제 행복했던 날을 떠올리라고 하면 에반과 함께하던 날이 그려질 터였다.
그야말로 지금의 내게는 에반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에반이 없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그 어떤 고통보다 끔찍할 테니까.
“닉스. 돈가스라는 음식이 나와 있기는 해. 왜인지 다른 음식에 비해 조리 방법도 터무니없이 간략하고 재료 역시 어설프지만. 이거 황궁 요리사가 집필한 책이라고 했는데?”
나는 에반의 중얼거림에 정신을 차렸다. 심장이 불안할 정도로 뛰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에반이 그저 나를 곁에 두기 위해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눈물이 나를 꼬여내기 위한 덫이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그의 말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 정말로 저주를 풀든, 결국 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나를 죽여주든, 그때까지 이대로 있으면 된다. 그렇지 않아도 괴롭고 힘겨울 그에게 더한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자.
겨우겨우 마음을 다잡은 뒤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러곤 옆에 앉아 요리책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돈가스라는 음식이 나와 있기는 했으나, 그 조리법은 형편없이 단순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있었다. 이 요리 방법은 내 언니가 만들어낸 것이며,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의 요리사들에게만 알려주었던 것이니까. 이 책은 아마도 요리를 직접 먹어 분석하거나 멀리서 훔쳐본 이들의 얘기만 듣고 적은 것이리라.
나도 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몇 번 본 것이 전부였기에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일단은 이대로 해보는 수밖에.
“일단 만들어보지. 나는 맛을 알고 있으니 보완하는 식으로 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럼 알겠어. 앉아서 눈 구경하고 있어. 내가 빨리 만들어줄 테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책을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언젠가 음식을 보관할 창고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더니 정말로 그렇게 한 모양인지 계단 아래에서 재료를 가져오곤 했다. 그리고 금세 돌아온 그의 품에는 갖은 채소와 고기 등이 한가득 안겨 있었다.
“일단 고기를 준비하고……. 그냥 이대로 통째로 썰면 되는 건가? 음, 이걸 튀기면 질기지 않나?”
나는 책을 보며 재료를 다듬고 또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도 크고 무거운 검 정도는 가볍게 휘두르던 사내가 주방 앞에서 재료를 다듬고 있으려니 참 오묘했다. 어쩐지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올 것 같아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정말로 신기했다. 이토록이나 간단히 표정을 찾아주니까.
나는 고기를 넣자마자 타타닥 튀는 기름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에반을 바라보다가 결국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그가 볼까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쉬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은 탑은 하얀 탑으로, 어린 에반은 성인 에반으로 바뀌었지만 왜인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래, 이대로도 나쁘지 않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가에 턱을 괴고 그의 요리가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접시 하나를 들고 내게 걸어왔다. 별다른 표정은 없지만 망설이는 걸음을 보아 하니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어렵네. 고기를 익히려니 겉이 타고 그렇다고 덜 익히자니 핏물이 자꾸 흘러나와 난리도 아니야. 고기는 완전 질기고.”
에반이 내어준 접시에는 요리라고 보기 어려운 새카만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주위는 핏물이 소스처럼 흥건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에반의 손재주도 나나 언니 못지않게 별로인 듯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접시만 내려다보자 그는 무안해진 건지 도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안 될 것 같아. 내가 황궁 가서 배워올 테니까 오늘은 다른 걸 먹자.”
“먹고 싶다.”
내가 서둘러 에반의 팔을 잡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정말 먹고 싶어졌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겉모습은 별로일지 몰라도 그가 만든 요리를 처음으로 먹고 싶어졌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망설이던 그가 접시를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한 점 잘라 입에 넣었다. 씁쓸한 탄 맛이 났다. 그리고 비릿한 고기 냄새도 풍겼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모두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맛인지 모른다. 이렇게나 오랜만에 먹어보는 음식인데 심지어 에반이 요리를 해준 것이라니.
“맛있군.”
그렇게 말하자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에반은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게 또 오래전, 내가 만든 요리를 에반에게 처음 먹였을 때와 겹쳐 보이는지라 슬며시 웃음이 올라왔다. 나 역시 저랬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맛있다고 말해 주려던 참이었다.
“닉스, 지금…… 웃어?”
에반은 경악한 목소리로 물으며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내 뺨을 붙잡고 들여다보았다. 서둘러 미소를 지웠는데 예전과 달리 많은 것이 성장한 그는 그 흐릿한 것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금, 웃은 거지? 그렇지?”
나는 아무래도 말을 돌릴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가 만든 요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맛있긴 하나 내가 말한 돈가스는 아니군. 아마 황궁 요리사에게 물어도 알아내는 건 없을 거다. 차라리 같이 만들도록 하지. 나는 그래도 몇 번 본 게 있으…….”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입술로 틀어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저 멍하니 시야를 가로막는 하얀색을 바라보는데 천천히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는 그대로 멈춰 있는 내게 다시금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가볍게 포개졌다 떨어지던 그 행동은 반복됨에 따라 점차 깊고 진해져 갔다. 그럴수록 내게 파고드는 그로 인해 내 몸 전체가 뒤로 밀렸다.
그리고 밀려나던 것이 내 몸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큰 소리를 내며 같이 넘어간 의자를 통해 깨달았다. 들고 있던 접시는 고기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 으읍.”
나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드러누워 조금 더 격렬하게 퍼붓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는 넘어질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아니면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넘어지는 순간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눕혔다. 그 바람에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상태가 되었고, 그의 입술을 피해 도망갈 수도 없게 되었다.
에반은 아예 내 머리를 감싸고 거칠게 입술을 문질렀다. 벌어진 틈으로 들어온 그의 혀가 입속을 훑고 핥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맛봤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점차 가빠졌다. 그리고 그 역시 뜨거운 숨을 가파르게 내쉬고 있었다.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깊숙이 탐하던 그는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하지만 많이 아쉬운 듯 여전히 입술을 비롯한 턱, 뺨, 귀 할 것 없이 자잘한 입맞춤을 퍼붓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흐읏, 닉스.”
숨을 헐떡이면서 귓가에 연신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생소한 감각이 일었다. 에반은 조금 떨어져 번들거리는 내 입술을 엄지로 짓누르고 곧 입속으로 파고들어 혀를 문질렀다.
“닉스가 웃다니…….”
혀에 닿았던 손가락을 뺀 뒤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한 어설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동자만큼은 불길처럼 뜨거웠다. 진득한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가지고 싶다는 집착이었다.
“기쁜데, 정말 기쁜데……. 그만큼 괴롭다.”
고민하는 건지, 망설이는 건지, 아니면 참아내는 건지 한참을 입술만 지분거리며 앓는 소리를 흘리던 그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넘어지는 바람에 뒤집혀버린 내 치마 끝을 내리며 의자와 함께 원래대로 되돌려주었다.
“잠깐만 기다려. 요리 얘기는 다녀와서 하자.”
어딜 가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다급한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섰으니까. 나는 혼자 남아 치마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이진 않지만 내 뺨은 그의 눈동자 못지않게 붉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 * *
결국 돈가스를 만드는 것은 성공했다.
물론 그 전에 수많은 실패작이 있었고, 덕분에 꾸역꾸역 먹다가 포기한 것은 산짐승을 위해 아무렇게나 던져두었지만 그래도 맛있는 돈가스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과거 언니가 해주었던 돈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본 것인데도 아예 모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에반도 그 맛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해했다. 사실 그는 완성된 요리보다는 그 과정이 더 즐거웠던 것 같기도 했다. 같이 책을 들여다보며 문제점을 찾고,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 보고, 실패한 음식을 보며 실망하기도 하고……. 나 역시 요리가 이렇게 재밌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부른 배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의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종일 이러고 있으려니 익숙해질 법도 했다.
또다시 두껍게 쌓여버린 눈 속을 돌아다니며 에반이 뿌려놓은 음식을 주워 먹는 산짐승들을 보고 있는데 에반이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있지, 닉스. 머리 만져 봐도 돼?”
뜬금없는 질문에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는 들고 있던 것을 창가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뒤로 섰다. 나는 창가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머리빗이나 리본 끈 등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제대로 만져보고 싶었거든.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인지라 간질거림이 타고 올라왔다. 머리카락에는 아무 느낌도 없는 줄 알았는데 오싹거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쥔 다음 의자 등받이 너머로 빼고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이것들은 다 뭐지?”
“이건 빗이고, 이건 머리를 묶는 끈이고, 이건 장식 핀이라고 했고…….”
“그건 아는데,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궁금한 거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반이 빗을 들고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답했다.
“당연히 샀지. 신전 주위에서 모처럼 큰 장이 열렸더라고. 그 앞에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서 사버렸어.”
에반의 손길은 서툴렀다. 그저 길게 늘어트린 것이 전부인 내 머리카락은 이따금 엉망으로 엉켜있었고, 그는 몇 번 헤매다 점차 요령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아프지 않도록 머리 중간쯤을 붙잡고 끝에서부터 살살 풀어내며 올라왔다. 어쩐지 시원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손길을 느끼다가 문득 의아한 것이 생겼다. 남자들이 빗질을 하던가. 나는 아버지가 머리를 빗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가끔 언니가 머리를 다듬어주거나 만져준 적은 있어도.
게다가 보통 남자들은 여자만큼 길지가 않으니 묶거나 장식하는 일도 드물었다. 격식을 차릴 정도인 이들은 시중에게 맡겼다. 그리고 기사라든가 평민들은, 머리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니 에반에게 이런 물건들은 생소하다 못해 아예 모를 법도 했다. 일찌감치 어미를 잃었고, 그 뒤로는 마녀의 탑에서 지냈으며, 성장기 대부분은 남자밖에 없는 기사단에 머물렀으니까.
“매끄럽다. 원래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이렇게 가느다랗고 부드러운가?”
“보통 그렇지. 그런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려니 잘 엉키고 끝이 상해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어떻게 관리하는데? 보니까 냄새가 강한 것들을 막 바르던데, 그런 건가?”
냄새가 강한 것들? 나는 에반이 어디서 뭘 본 건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황궁에서 본 건가?”
에반은 황궁에서 지낸 적도 있고, 지금도 드나들고 있었다. 황궁에는 수많은 여자가 있었고 당연히 귀족과 황족도 있었다. 남자인 에반이 그녀들이 단장하는 모습을 어떻게 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 많은 시녀들이 달라붙어선 머리를 빗고 바르고 올리고 묶고 장식했어. 이렇게 했던가? 아니, 이렇게?”
내 머리카락을 비비 꼬기도 하고 얼기설기 교차한 뒤 올려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스르륵 흘러내렸다. 에반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운지 조금쯤 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번들거리는 것들이 머리를 고정해 주는 거였나? 그렇게 하니까 편해 보이던데.”
“머리에 바르는 것만 해도 종류가 수없이 많다. 그중에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드는 게 있을 거고, 또 향이 나는 게 있을 거고, 윤이 나게 하거나 색을 옅게 혹은 짙게 만드는 것도 있을 거고, 네 말대로 단단하게 고정하는 것도 있겠지.”
잠시 말이 없던 에반이 기가 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나 많아?”
왜인지 에반의 반응이 귀여운지라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아마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 이런 반응일 터였다. 여자들의 문화는 같은 여자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곤 했으니까. 신기한 것은, 내가 그 속에 섞여 있을 땐 그게 무척이나 당연했다는 점이다.
“머리뿐만이 아니지. 목욕할 때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발라지고 뿌려진다. 향기를 내기 위한 꽃잎, 남자를 유혹한다는 가루, 피부를 매끄럽게 만드는 기름과 하얗게 만드는 수액. 씻고 나면 온갖 향기가 뒤섞여 종종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웃긴 것은, 그렇게 아픈 머리를 가라앉히는 데에도 향기를 사용했다는 거다.”
아름다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가루라니.”
“여자의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은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닉스도? 닉스도 그랬어?”
나는 어땠지?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피부를 매끄럽게 만든다든가 뽀얗게 만든다는 기름 같은 건 발랐지만. 머리카락도 엉키지 않도록 관리했던 것 같고.”
아무래도 나는 귀족의 딸이라기보다는 주술사에 가까웠으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주술사가 이 정도까지 치장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고. 나는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아버지가 주술사와 귀족 계급 사이에 있는 분이었기에 나 또한 그렇게 중간쯤 위치한 그런 경우.
“그래?”
“머리 묶는 것이 익숙지 않을 텐데, 내가 해볼까?”
나는 창문에 놓여 있는 끈을 집어 들곤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에반이 놓아준 머리카락을 하나로 쥐고 조금씩 정리하며 올려 묶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이고 거울도 없으니 감으로 해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헤맨 뒤에야 끈으로 묶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를 다시금 말아 장식 핀으로 고정하려 했다. 황궁에서 본 거라면 아마도 이렇게 깔끔하게 올려 목과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녀들이 해준 것은 이보다 더 화려하고 복잡하겠지만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핀을 꽂았다가 다시금 빼는 것을 반복하며 머리를 고정하려던 나는 황궁하니까 생각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고 보니 에반, 전에도 잠깐 물어봤던 것 같은데……. 황궁에 가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왜인지 한참 말이 없던 그는 조금 흐려진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아직까진…… 괜찮겠지.”
“나비가 나타나지 않는데, 바쁜 일은 끝난 건가?”
“……어떻게 알았어? 나비가 날 부르는 건지?”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마 쉽게 부르진 못할 거야. 자꾸 그렇게 부르면 피가 마르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으니까……. 아마도 전처럼 함부로 사용하진 못하겠지.”
“피?”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물어보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핀을 꽂고 있던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아직 제대로 고정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가 대신 꽂아주려는 건지 알고 핀을 넘겨준 뒤 손을 내리려는데 목덜미에서 낯선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에, 에반?”
그것이 에반의 입술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에반의 입술은 목덜미뿐 아니라 어깻죽지까지 지분거리며 범위를 넓혀갔다. 그 부드러운 입술과 데워진 숨결이 무척이나 간지러운지라 몸이 자꾸 움찔거리며 움츠러들었다.
“흐, 흐읏!”
낯선 간지러움은 점차 오싹거림으로 변해갔고 입에선 짧은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혀가 닿아 핥을 적에는 나조차 듣기 민망할 정도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을 구부린 채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에반의 입술이 집요해졌다. 그의 숨은 나 못지않게 거칠었다. 에반은 입을 막는 내 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신의 손으로 떼어낸 뒤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곤 턱을 붙잡고 헐떡거리느라 벌어진 입속을 가볍게 훑었다. 귓가로 그의 숨결과 속삭임이 들렸다.
“여자들이 머리를 이렇게 올려 묶는 것에도 이유가 있는 건가? 예를 들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함이라던가.”
그랬던가? 여자들이 머리를 올려 묶는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저 화려한 드레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 바람이 불거나 음식을 먹을 때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 더욱 많은 장신구를 꽂기 위함.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남자를 유혹하기 위함이라니, 그런 건 상상조차 못 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앗! 으, 에반? 에반!”
그의 질문에 이유를 생각하는 사이, 턱을 붙잡고 있지 않은 에반의 다른 한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깜짝 놀라 그를 부르며 몸을 비틀어보지만, 의자에 앉은 그대로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뭉개던 손 또한 목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차차 내려갔다.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손을 조금씩만 움직여도……. 여전히 목덜미를 핥고 빠는 그의 입술은 은밀한 소리도 쉬지 않고 내고 있었다.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낯선 행위에 두려워진 건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에반…….”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그를 부르자 일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여전히 가쁘고 뜨거운 그의 숨결이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고요할 정도였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먼 곳만을 응시하는데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머리는 묶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손을 거두었다. 내 몸에 닿아 있던 뜨거운 체온이 사라지자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그의 손이 내 머리 쪽을 만지작거리나 싶더니 곧 검은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흘러내렸다.
에반은 머리끈을 내밀어 내게 준 뒤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은은하게 남은 빛 무리만 시야에 들어왔다. 힘까지 사용하다니, 갑자기 어디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찾던 내 눈에 창문이 보였다. 정확히는 창문 너머 새하얀 세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반이 보였다.
“에반?”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린 에반은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누웠다.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데굴데굴 굴러 스스로 눈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그의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쩐지 알 것 같기는 했지만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가 주고 간 머리끈만 만지작거렸다.
* * *
결국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에반은 뚱한 얼굴로 눈앞에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뻗자 나비는 피하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원리일까. 주술은 사용하는 이의 능력에 따라 새로운 것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렇게 그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나비를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봐야겠군.”
“그래야겠지. 자세히 설명해줬는데도 나타난 걸 보니 저엉말, 지인짜 급한 걸 테니까.”
에반은 그렇게 말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는 그를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렸다. 남자들하고만 같이 있던 습관 때문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원체 부끄러움이 별로 없는 건지 내 시선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다. 설마하니, 내가 부끄러워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는 걸까.
하얀 제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정말 근사했다. 나는 단추를 잠그는 그를 힐끔 훔쳐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주술사라곤 생각지도 못할 것 같았다.
주술사라고 약하거나 체구가 작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주술사들은 외모뿐 아니라 체격이나 지력도 같이 타고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에반은 그야말로 기사다운 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키, 넓게 벌어진 어깨, 제복 아래로 윤곽이 드러나는 단단한 몸, 남자다운 손. 시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니 사람 같지 않아 보이겠지. 게다가 남자답기까지 하니 더더욱.
옷을 다 입고 소매를 정리하던 그는 힐끔거리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 탓에 눈이 딱 마주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를 훔쳐보며 감탄하고 두근거리던 내 속을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에반은 왜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얌전히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라, 에반.”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자살 시도를 했으니 불안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내 말에 에반은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금 강조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서 기다릴 거지?”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그리고 나갈 생각도 없고.”
그제야 에반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럼 다녀올게, 닉스.”
“그래.”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에반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입을 맞추곤 빛과 함께 사라졌다. 모처럼 텅 빈 탑 안에 혼자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쁜 기분은 아닌지라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에반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저 지금은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면 되는 거였다. 나는 턱을 괸 채 또다시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