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마녀는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는다 (22/45)

  21. 마녀는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는다

나는 새하얀 세상 속에 갇히게 되었다.

탑 주위는 온통 눈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나갈 수조차 없으니 나의 공간은 탑 안이 전부였다. 계단을 내려가면 유리 온실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에반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보석 가루처럼 아름답게 흩날리는 눈과 종종 창가로 날아드는 작은 새, 눈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하얀 동물이나 해가 지고 뜨는 모습 등 세상은 그 자체로 눈부시도록 빛이 났으며 경이로웠다. 왜 예전에는 이렇게나 가슴 저밀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금의 내게는 저것밖에 없기 때문일까? 차라리 세상이라면 언젠가 나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나는 죽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나 또한 소멸할 테니까, 유일하게 나와 함께 존재할 세상이 이제 와서야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그래도 안 먹어줄 거야?”

에반이 창가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접시에는 신선한 채소를 볶아 만든 요리가 담겨 있었다. 이곳에선 구하기가 힘든 재료였다. 아니, 사실 어디에서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윤이 나고 먹음직스러운 채소 자체를 보기가 어려운 세상이니까.

이런 귀한 재료임에도 내가 손을 대지 않으면 결국 버려진다. 에반은 협박처럼 말했다. 너를 위해 만든 요리이니 네가 먹어주지 않으면 필요가 없다고. 그래도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내 앞에 놓인 음식은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버릴 터였다.

에반은 대부분의 시간을 내 곁에서 보냈다. 요리하거나 청소를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요리는 쉽지 않은지 주방에서 조리 도구를 들고 끙끙 소리를 냈다. 그래도 갈수록 내게 가져오는 요리의 상태가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래 봤자 버려지지만.

그리고 그는 책을 가져와 읽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 내 무릎에 턱을 괸 뒤 올려다보기도 했다. 혹은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며 ‘그게 재미있어?’라든가 ‘무슨 생각해?’ 등의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듣지 못한 것도 많으리라. 에반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시선이 창밖으로 향해 있듯 내 마음과 생각 역시 온통 그곳에 가 있었다. 그저 멍하니, 시간이 흘러감을 지켜보았다.

간혹 에반은 그런 내 모습에 화를 내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본래대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러는 척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다.

에반은 이곳에서 먹고 씻고 잠을 잤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공간은 욕실이 맞는지, 그가 들어갔다가 나오면 따뜻한 김이 창가로 다가와 유리를 데웠다. 시원한 냄새가 탑 안에 들어찼고, 그는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어둠과 빛 속성 외에는 주술을 사용할 수가 없는데 어떤 원리로 따뜻한 물이 나올까, 잠시 의문이 생겨날 때도 있었지만 금방 사라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돌아가든 알 필요도 없었다.

“닉스, 따뜻한 물을 채워놓았어. 가서 몸을 담가보는 건 어때? 기분이 조금 괜찮아질지도 몰라.”

에반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묻는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내 옷을 적셨다. 그는 아예 젖은 머리를 가져다 대기까지 한다.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뱉더니 조금쯤 심통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꾸 그러면 내가 직접 씻겨줄 거야. 어차피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 그냥 그대로 빠트려도 좋을 것 같다. 젖은 옷을 벗기는 건 조금 귀찮겠지만, 그냥 찢어서 버리지, 뭐.”

하지만 그는 말만 그렇게 할 뿐이었다. 몇 번이고 들은 얘기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적은 없다. 단순히 협박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은데 참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에반이 내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해가 지고 붉었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이내 남색으로, 그리고 곧 별이 반짝거리는 밤이 되었을 때.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안아 든 뒤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내 옆에 비스듬히 누워 나를 바라보며 배를 토닥여준다. 내가 눈을 감은 뒤에도 한참이나.

만일 내가 눈을 감지 않으면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는다는 것과 다시금 의자에 앉으면 도로 끌어안고 침대에 눕힌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곤 했던 내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이게 탑 안에서의 생활이었다. 에반은 그의 말대로 무엇이든 해주고자 했다. 먹을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없지만 필요해 보이는 것은 재빨리 채워놓곤 했다. 그중 하나가 의자였으며, 또 하나는 의자에 앉은 내게 덮어줄 담요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자 했다. 사실 의자도 에반이 자꾸 앉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냥 바닥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담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뭐든지 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마녀의 숲에 있는 탑에 갇혔을 때처럼 그저 멍하니 죽어 있고 싶었다.

언젠가는 에반이 나를 포기해 주길. 그저 막연히 떠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기대 한 줌만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거였다.

* * *

에반은 휴가를 받았다고 말했지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이에게 휴가를 주는 황제 따윈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는지 에반이 집을 비우는 횟수가 조금씩 잦아졌고 또 길어졌다. 처음에는 깊은 밤중에 다녀오는 정도에 그치더니, 이윽고 낮에도 불쾌한 감정을 한가득 드러낸 채 모습을 감추곤 했다.

대부분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는 건지 금색으로 장식된 하얀 제복을 입은 에반은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중간중간 들려 짧게나마 얼굴을 비치곤 했는데 그마저도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그가 없는 사이 손목을 들어 올려 내 힘을 속박하는 주술진을 살펴보거나 창문, 벽 할 것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주술진을 들여다보았다.

계단으로 내려가 아직은 텅 비어 있는 온실을 훑고, 욕실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도망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간신히 손목에 묶여 있는 것을 푼다 쳐도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같은 주술진이 탑 안을 비롯한 모든 곳에 가득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탑 안에 있는 한, 나는 힘을 사용할 수가 없다. 손목을 묶어둔 것은 그저 더욱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결국, 에반이 나를 죽여주거나 포기하고 떠나거나. 둘 중 하나밖엔 없었다. 그를 지치게 하고 더욱 아프게 만들고 화나게 하고……. 나를 미워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여야 했다.

나는 가장 쉬운 길을 택했다.

먼저 주방으로 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후벼 팠다. 어느새 고통이 낯설어져 있었다. 고통이란 늘 나와 함께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에반을 만난 후, 아니, 정확히는 에반을 무사히 성장시키고자 결심한 이후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파들거리는 손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큰 상처가 났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시도해 보려 했지만, 하필이면 바닥에 떨어진 칼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게다가 점차 의식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니, 닉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에반의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고통은 금세 사라졌고 토해내던 피도 잦아들었다.

다급하게 달려와 내 머리를 품에 끌어안은 에반은 칼 때문에 찢어진 옷을 조심스레 여미며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화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는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칼을 비롯한 날카로운 물건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다못해 깨질 수 있는 접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목숨을 끊을 방법이 어디 그것뿐이던가. 나는 틈이 남과 동시에 옷을 찢어 끈으로 만든 뒤 천장에 매달았다. 그리고 곧장 목을 걸고 발아래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첫 번째 자해를 겪은 에반이 재빨리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헐떡이는 나를 품에 안고 구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닉스, 제발……. 제발 이런 짓은 하지 마. 제발…….”

그리고 나는 발이 묶였다. 손목을 감싸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금속 재질의 물건으로 발목을 묶고는 침대와 연결했다. 그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하라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에반.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나는 너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프니까 어쩔 수가 없어.

나를 침대에 묶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에반은 제복을 벗고 내 곁에 머물렀다. 그렇게 되니 지금까지와 달리 생소한 무언가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휘몰아치는 거라고 여겼는데 그보다 밝고 따스했다. 그리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그것이 두 개가 되고, 또 다섯 개가 되고, 결국 열 몇 개까지 늘어나고 나서야 빛으로 이루어진 나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허공을 누비는 아름다운 나비는 에반의 주위를 맴돌다가 이따금 내게 다가와 내려앉기도 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날아다니는 나비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종종 나비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스치듯 어렴풋이.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또 금세 사라진 터라 빛 무리를 잘못 보았겠거니, 눈 그림자를 잘못 보았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게만 보이는 것이 아닌지 에반은 무척이나 거슬리고 짜증 난다는 표정과 신경질적인 손길로 휘젓기도 하고 잡아채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비는 하나씩 줄어들었다.

에반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거라면 저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나비는, 에반의 의지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나는 그 나비가 무엇인지를,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며 거칠게 제복을 입는 에반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에반을 부르는 명령이었다.

이곳과 황궁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황제마저도 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곳에 에반이 자꾸 와 있으려니 황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에반에게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자리를 비우려면 너를 호출할 방법을 마련해 두라고.

“잠시 다녀올게. 금방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그것을 증명하듯 에반이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하늘하늘 날아다니던 나비들이 모습을 감췄다. 에반과 요안이 무슨 거래를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에반은 요안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그는 가고 싶지 않아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은 나를 두고 탑을 나섰으니까.

혼자 남은 나는 바닥을 기어가 최대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간신히 닿은 작은 탁자를 끌고 와 바닥에 내리쳤다. 탁자를 장식하고 있던 색색의 유리파편이 튀었다.

그것들을 손에 쥐자 따끔거리며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목과 손목을 그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십, 수백 번을 난도질했다. 솟구치는 피 때문에 스스로도 어디를 긋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때쯤 돼서야 더 이상 유리를 쥘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침대에 기대어 붉게 물드는 융단에 시선을 던지는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사이 방금까지 없던 무언가가 생겨난 것이 보였다. 또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에반의 발이었으니까. 내게 이런 짧은 죽음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그에게 작은 원망이 솟아났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리고 반응도 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발밖에 볼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무겁고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섬뜩할 정도로 고요한 분노였다.

고통은 이미 진작에 무뎌져 있었고, 에반의 빛은 그저 상처를 없애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눕혔다. 그 바람에 에반의 새하얀 제복이 붉은색으로 더럽혀졌다. 그의 손은 물론이고 아마 나를 눕힌 침대마저도 온통 붉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흐릿한 눈으로 점차 번지는 붉은빛을 바라보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왜…….”

그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았다. 내가 숨만 헐떡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내 목을 부여잡고 들어 올려 강제로 눈이 마주치게 하였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인해 불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들어, 왜!”

못 견딜 정도로 화가 난 모양인지 나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가 있었다.

“……그냥 죽여.”

“……뭐?”

“나는 죽고 싶어. 계속 이렇게 죽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그냥 죽여. 아니면 버려. 내게 관심 가지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말든 신경 쓰지 말라고.”

크게 뜨인 에반의 눈동자가 불안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썹을 찌푸리나 싶더니 결국 고개를 떨궜다.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닉스. 그것도 거짓이었어?”

얼핏 검을 부여잡은 채 죽지 말라고 외치던 소년의 얼굴이 그려졌다. 아프지 않으냐고, 너 또한 고통을 느낄 텐데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화를 내며 울었다. 토라졌다.

아,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나는 그런 소년을 달래며 사과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야, 결국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너라면 나를 죽여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결국 다시금 자라 청년이 되었는데, 빛 그대로 성장해 세상을 밝히는 용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죽여주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너에게 했던 그 약속은 언젠가 네가 나를 죽여줄 테니 굳이 스스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러니,

“나는 지킬 수 없다. 죽고 싶으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에반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안 돼.”

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난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다시 마주한 그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어깨를 내리누르며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넌 내 것이야. 네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그러니 함부로 하지 마. 내 허락 없이 죽지 마.”

그는 시선을 내리떠 내 얼굴 아랫부분을 살폈다. 그러곤 손을 뻗어 피에 젖어 있는 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았다. 그 크고 마디가 굵은 손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쥐고 부스러트릴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자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아까워. 피 한 방울조차 허투루 흘릴 수 없어.”

그러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밀어내고자 했지만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움직임이 점차 거칠어졌다. 다급한 손길로 피에 흠뻑 젖은 옷을 젖히고, 흘러내린 피를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숨을 삼키며 몸을 비틀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눈동자만큼이나 온통 붉어져 버린 제 자신의 입술 부근을 핥았다.

나는 그간 어떻게든 붙잡고자 애쓰던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와 허벅지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 손길을 피하려 하자 아예 자신의 하체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누르며 속삭였다.

“너의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닉스. 알아들어?”

에반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연신 내 목과 어깨를 탐하다 축축하게 젖어 살에 들러붙는 상의가 불편한지 결국 손을 가져다 대었다. 투두둑. 옷을 잡아 뜯는 소리였지만 나의 귓가엔 그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로 들렸다.

그는 드러난 내 몸마저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아플 정도로 강하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죽음의 고통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잖아?”

그의 손길은 무자비했다. 억센 힘으로 콱 쥐었다가 놓으며 고통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견디기가 힘들어 묶여 있는 양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도리어 진작에 멈췄지만 이미 흥건하게 흘러나와 여전히 팔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를 머금었다. 내 얼굴 앞에서, 나를 마주 보며 손목과 팔 등을 핥고 빨며 화가 난 것을 감추지 않았다.

“이토록 피에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에 무딘데도 난 뭘 망설인 걸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데, 다른 것은 볼 것도 없겠지. 안 그래?”

그리고 피로 범벅된 자신의 제복 상의를 마찬가지로 잡아 뜯듯 벗어 던지더니 그대로 내 상체에 얼굴을 묻었다. 양손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 속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짓누르고 엉망진창으로 쥐어뜯던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생소한 감각이 일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자 했지만 두려움에 질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예상했는데.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과 마음, 게다가 우리의 관계.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고 끔찍할 것도 없으니 지금껏 그러했듯 생각과 감정을 깊숙한 곳에 가두고 텅 빈 채 그리 받아들이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닉스.”

그는 귓가에 연신 내 이름을 속삭이며 다리를 벌렸다. 지금껏 애써 초연하려 노력하던 나는 그의 속삭임에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허벅지를 잡고 있는 억센 손과 달리, 다급하게 치마를 올리는 그의 몸짓과 달리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애원을 하듯, 울음을 참듯 간절하기 짝이 없었다.

에반의 마음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차라리 조금 더 거칠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좋을 것을. 그러면 나는 너를 증오할 수라도 있을 텐데. 아니, 사실 그런다고 해서 나는 너를 증오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내게 와 닿는 네 고통이 아프다. 괴롭다. 어느새 눈가가 시큰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눈물이 내 의지를 벗어나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닉스.”

“……여줘.”

에반이 가슴께에 파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눈 옆을 훑었다. 붉어진 그 손이 뿌연 시야로 스치듯 보였다.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운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죽여줘, 제발. 나를 죽여줘.”

“하……. 닉스.”

그는 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묻은 피는 분명 내 것이건만 고통스러운 표정 때문에 그의 피로 느껴졌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고통일 뿐인데, 너는 왜 자꾸 나를 붙잡는 건가. 왜 놓지 못하는 건가. 내가 뭐라고. 대체 내가 뭐라고.

한참이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옆으로 내려와 비스듬히 누웠다. 그러곤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뺨과 팔 등에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의 맨살이 닿는 것을 느끼고 피하고자 했지만, 그는 목 뒤를 감싸 안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수리 부근에 입술을 가져다 댄 듯 거친 숨이 간지럽혔다. 반복해서 입술을 짓누르던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지 말라고 해도, 죽일 수 없다고 해도 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지.”

살짝 떨어져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슬펐다. 그는 내 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나 정말 미칠지도 몰라. 그러니 자꾸 그런 짓 하지 마, 닉스. 그래도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버릴 수도 없어. 왜 몰라주는 거야.”

에반은 자신의 말이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롭고 아프며 괴롭고 두렵다는 사실을 몰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너를 몰랐더라면.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네가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또다시 수많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재우듯 토닥거리는 그의 손길에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그냥 그렇게.

* * *

에반은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따뜻한 물에 담그고 씻겨주었다. 여기저기 뜯기고 피로 인해 흠뻑 젖은 옷은 중간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졌다. 옷을 벗기고 몸을 닦는 그의 손은 미약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칠 길은 없다. 아니, 그 전에 생각하는 자체가, 반응하는 자체가 힘겨웠다.

그럼에도 에반은 나를 가지지 않았다. 강제로 안지 않았다. 그저 어디선가 가져온 새 옷만을 입히고 역시 새로 이불을 깐 침대 위에 눕혀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리뿐 아니라 팔도 묶였다.

그 뒤로 한동안은 별다를 것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내가 꼼짝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지 에반은 웬만하면 내 곁에 있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다정하게 속삭이며 챙겨주려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받아주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외면했다. 가슴속은 텅 비었다가 끓어올랐다가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다시금 텅 비는 것을 반복했고,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성숙해지는 에반의 모습에 불안함만 커졌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차라리 고통스럽고 싶었다.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결국 도피의 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하는데, 지금의 내게도 그것밖에는 없지 않은가.

천사의 깃털처럼 아름다운 눈이 쉼 없이 내려 소복소복 쌓이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 내려앉는 눈처럼 탑 안에도 하얀 나비로 가득 들어차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비끼리 치이고 한곳에 엉키고 커다란 빛무리가 되어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릴 때쯤 돼서야 그는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간 에반 또한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억지로 웃고자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능청스럽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넘겨 올렸고, 눈 밑은 어두웠다. 어깨에는 힘이 없었고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묻어났다.

그는 힘겨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발도, 팔도 묶여 있으니 닿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침대에 눕히고 꼼짝할 수 없게 만든 뒤 베개와 이불마저도 멀리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짧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래.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포기시키면 되겠지. 달래는 것도, 애원하거나 협박하는 것도 모조리 지쳐서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만들면 결국 언젠가 나처럼 체념하는 때가 오리라. 그 어떤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오리라.

“금방 갔다 올게, 닉스.”

그가 사라지자 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비들도 사라졌다. 순식간에 텅 비어 고요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에반이 곧바로 오는 일은 없었다. 끝없이 생겨났던 나비만큼이나 황제는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니 아마 쉽게 오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나는 혀를 깨물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함께 온 세상이 비릿한 피 냄새로 물들었다.

누워 있는 탓에 넘쳐흐르는 피가 목 뒤로 넘어왔다. 마치 피로 이루어진 물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아픔보다는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것이 더욱 괴로워져 버리고 말았다. 헐떡거려 보지만 그만큼 넘어오는 피만 많아질 뿐이었다.

점차 멀어져 가는 의식 덕분에 날 괴롭히던 생각도, 감정도,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자리 잡았다.

결국 죽는다. 죽게 된다.

어차피 사신은 나를 반겨주지 않으니 다시금 깨어나겠지만 그래도 또 한 번의 끝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럼에도 에반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없었다. 이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이번에 에반은 어떤 반응을……. 화를 내겠지?

차라리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나 나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지쳐서 떠나주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는 거겠지만.

나는 무거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원치 않았지만 나는 다시 깨어나고야 말았다.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자 무거워진 몸이 느껴졌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귓가는 먹먹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누군지는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닉스.”

에반은 쥐어짜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잔뜩 찌푸려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울고 있었다. 아니, 눈물은 흐르지 않았고 그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 축축한 속눈썹, 흔들리는 눈동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목울대. 그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억지로 삼켜내고 있었다.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다. 피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는지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더러웠고, 드러난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제복 단추는 마구잡이로 풀려 있다 못해 뜯어진 것도 있었고, 역시 붉은색으로 덕지덕지 더럽혀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닉스, 심장이 멈췄었어. 숨도 끊어졌었고, 몸도 딱딱했어. 알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고통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치료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 네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정말, 두려웠어.”

전혀 다른데,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것이 다른데, 이럴 때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청년이 겹쳐졌다.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위대한 그인데, 내 앞에서는 이토록이나 나약해지고 말았다.

나는 또다시 숨 막힐 정도로 두려운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는 절대, 나를 죽여줄 수 없을 거라는.

“흐으으…….”

그의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오나 싶었지만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참아냈다. 대신 그는 잔뜩 흐려진 눈을 찌푸리며 애원했다. 그 짧은 새, 그의 옷차림과 머리만큼이나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대체 왜 나를 봐주지 않아? 왜 내가 받는 상처는 알아주지 않아? 내겐 너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너를 잃을까 봐 두려운데. 닉스, 제발 내 곁에 있어. 나는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어. 살아갈 필요가 없어. 사는 의미가 없어. 내겐 네가 전부야.”

그러는 너는 왜 나를 봐주지 않을까. 왜 내가 받는 상처는 알아주지 않을까. 나 역시 너와 같다는 사실을, 너는 대체 왜 몰라주는 걸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원망스러워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 나를 두고 먼저 떠나버린 너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결국 후회하고 만 나를 기억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나의 말에 에반은 의아한 빛이 도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잠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대체 왜 몰라주는 거지? 죽지 않는 몸으로, 언젠가는 죽을 너의 곁에 있어야 하는 나를 대체 왜 몰라주느냐고.”

애썼지만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만다. 한번 쏟아진 눈물은 나를 더욱더 격양되게 만들었다.

“너는 정말 너무하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잔인하다. 나는 어떻게 하라고. 홀로 남을 나는 어떻게 하라고. 영원히 지옥 속에서 살아갈 텐데.”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든다.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에반을 눈치챘음에도 멈출 수가 없다.

“나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했나? 그런 네가 왜 내 두려움은 몰라주는 거지? 살 수 없는데, 살아갈 필요가 없는데, 사는 의미조차 없는데. 그런데도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내 고통을 왜 몰라주는 거지? 왜 내가 죽음을 원하는지, 나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이불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분노와 슬픔, 원망이 휘몰아쳤다. 이것은 사실 에반의 잘못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그저 내게 내려진 저주라는 것쯤은, 오래전에 깨달았다. 하지만 그 고통을 끝내줄 수 있는 이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몰아치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토하듯 쏟아내고 말았다. 기억 속 청년이 피에 젖은 채 눈을 감았던 그날처럼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오열했다. 쉬지 않고 속에 눌러 참았던 모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끝끝내 울다 지쳐 정신을 놓을 때까지.

* * *

다시금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땐 주위가 어둑해진 뒤였다. 에반은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과 뺨 등을 쓰다듬고 꼭 쥐고 있는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간신히 뜨자 창가로 스며들어온 달빛만이 탑 안을 밝히고 있었다. 에반이라면 충분히 낮처럼, 혹은 낮보다 더 밝게 만들 수 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달빛을 머금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뺨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의 붉은 눈동자가 처연할 정도로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물기를 눈치챘을 때였다.

그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눈을 감았을 때만큼 어두워졌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리고 얼굴이 간질거렸다. 그의 머리카락이라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닉스.”

에반의 목소리와 숨결이 무척이나 가까이서 들렸다. 워낙 힘이 없고 젖어 있는 터라 금방 꺼져 버릴 것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 울린 것? 혹은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죽여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죽음을 원하는 걸까, 생각해 보았어.”

에반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늘 바라지. 살고 싶다고. 더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다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황제 또한 영생을 바랐어.”

황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이 삶이든, 재물이든 간에.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던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오래오래 쥐고 싶어 한다. 누구나 그렇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이불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 손목이 풀려 있다는 사실을. 양손목을 묶어두었던 무겁고 차가운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한 손은 에반에게 붙잡혀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내 스스로가 마치 구원줄이라도 된다는 양 이불을 그러쥐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죽음을 바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 왜 그렇게 내 곁을 떠나려고만 하는 건지, 나를 혼자 두려고만 하는 것인지. 그것만 생각했지.”

“…….”

“언젠가 그랬지. 추억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 그래, 남겨진 사람의 고통은 모두 똑같겠지. 왜 몰랐을까. 왜 나는 네가 언제나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몰라줬을까.”

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힘에 부치는 모양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닉스.”

무언가 미지근하고 축축한 것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 같은 곳에만 내리 떨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이미 울고 있었기에 흥건하게 젖은 뺨은 누구의 눈물 때문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깊게 잠긴 그의 목소리는 결국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너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하여 네게 미움 받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아.”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가슴이 미어져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약속할게. 나는 네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혼자 남겨두지 않을 거야. 만일 내가 너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땐 내 손으로 너의 삶을 끝내줄게.”

에반은 붙잡고 있던 내 손에 다정스레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흐느낌이 섞여들어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그러니 닉스, 나를 밀어내지 마. 그렇게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지 마. 응? 제발.”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에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한 탑 내부에 헐떡이는 내 울음소리와 그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정말 저주를 풀 수 있을까? 아니, 아마도 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정말로 저주가 풀린다면 바랄 것이 없을 터였다.

에반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그의 모습을,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며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의 손으로 나를 죽여주는 건, 그에게 크나큰 고통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이렇게나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 그 고통을 감당하기란 어려울 테니까.

“……정말 그래 줄 수 있는 건가?”

“……반드시.”

나는 꼭 부여잡고 있던 이불을 놓고 대신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쥐었다. 축축하게 젖은 그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자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에반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도통 구별이 되지 않는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닉스가 먼저 내 손을 잡아준 건 처음 아닌가? 언제나 뿌리치거나 반응조차 없거나 둘 중 하나였잖아.”

그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봐도 되는 거지?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지?”

아마도. 끝이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축복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 끝만 있다면.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부드럽게 맞닿아 파고드는 그 입술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로 인해 조금 짠 맛이 났다.

* * *

에반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처럼 능청스럽고 조금쯤 밝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나 또한 이전처럼 그를 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에반.”

“응, 말해.”

내가 의자에 앉은 채 그를 부르자,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만 내 허벅지 위에 기대고 누워 있던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하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리며 선이 고운 이마가 드러났다.

곧은 코와 입술로 이어지는 그 얼굴선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유려한지라 나도 모르게 손을 뻗고 싶었다. 흰 속눈썹 아래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 붉은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황궁에는 안 가 봐도 되는 건가?”

에반은 한동안 황궁에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빛으로 이루어진 하얀 나비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로 휴가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는 것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내 질문에 그는 눈썹을 슬며시 찌푸렸다.

“왜? 갔으면 좋겠어? 또 자살이라도 하려고?”

“……아니, 이제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의 표정이 확 밝아지나 싶더니 곧 퉁명스러워졌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고민하는데,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진작에 그랬으면 좀 좋아? 몇 번씩이나 피로 흠뻑 젖은 제복을 입고 가는 바람에 시종들이 얼마나 놀랐다고. 원래 붉은 제복이라는 소문도 돌았다더라. 그뿐이면 다행이게? 의외로 잔혹한 성정이네, 사람의 피를 좋아하네 하는 헛소문도 돌아서 나만 보면 겁에 질려 떠는 시녀들도 생겨났어. 이게 다 닉스 덕분이지, 뭐.”

걸을 때마다 복도에 피발자국이 생겨났다, 피는 잘 빠지지도 않는데 제복 빠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는 하냐, 그 바람에 같은 제복만 몇 개씩 더 맞추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산이 빠듯한데 자꾸 그렇게 사치하면 월급을 깎을 거라는 협박을 받았다 등등 에반의 투정은 끊이질 않았다. 그간 이렇게 하소연하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근데 그런 에반을 보고 있자니 왜 이리 가슴속이 간질간질한지, 억지로 입을 꾹 다물며 괜히 창밖만 내다봐야 했다. 오래전, 마녀의 탑에서 에반과 함께 보내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 에반은 일부분이거나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럴 때 보면 그때와 똑 닮아 있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는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죽지 않을 거라고 해서. 넌 정말 모를 거야. 피투성이가 된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성이 끊어지는 기분이었어. 화가 나다 못해 울고 싶고, 그러다가 또 너무 아파서 괴롭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다시 화나고.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들까,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그렇게 만들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또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정말 그에게 상처만을 주는구나. 고통밖에 줄 수 없구나.

나를 위해 그를 상처 입히는 이기적인 행동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근데도 이렇게 내게 기대어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를 보니 그저 미안했다.

내 얼굴에 그늘이 졌기 때문인지 그는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 탓을 하는 건 아니야, 닉스. 너도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그는 몸을 돌려 내 허벅지 위에 팔을 걸친 뒤 그 위에 턱을 기대었다.

“이제는 그런 걱정하지 마.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방법을 찾을 거니까. 둘 다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낼 거니까. 그러니 너는 그냥 내 곁에서 이대로 있어주기만 하면 돼. 그걸로 충분해. 나는 너랑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그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깜짝 놀란 듯 잠시 움찔거리던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언제나처럼 듬직하고 남자다운 에반이었음에도 왜인지 모르게 유약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짐을 지게 되었기 때문일까? 내가 해야 할 고민, 내가 짊어져야 할 저주마저 그가 가져갔기 때문일지도.

“나도 네가 그래 주기만 한다면, 이대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니, 너처럼 나도 그냥 이대로 충분할 수 있었다.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해 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미래만 맞이할 수 있다면.

에반에게 모든 고통스러운 것을 떠넘기고 현재를 즐기고자 하는 나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마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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