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용사는 마녀를 새하얀 탑에 가둔다 (21/45)

  20. 용사는 마녀를 새하얀 탑에 가둔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따스했다. 특히 황궁은 얼마 전까지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시체로 강을 이루었던 바닥 역시 싱그러운 식물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유달리 어두웠다. 마치 그 황궁이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 혹은 나를 등지고 있는 듯,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을 어둑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그 화사한 햇살 속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밝았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세상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 해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새로운 황제와 그의 뒤에서 세상을 정리하는 황궁 주술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황제폐하께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 사실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황궁 주술사가 부활할 수 있겠어? 황궁 주술사는 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던데.”

“어쨌든 뭔가 달라진 것은 확실해. 왜, 황궁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고. 이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지 않니?”

“너도 느꼈구나? 이게 다 그 황궁 주술사님의 힘이래.”

그녀들의 말대로 황궁은 찬란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이미 빼곡하게 새겨져 있던 신성 주술진이 현 황궁 주술사의 힘에 반응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 하나하나가 커다란 조각상과 다름없었는데 거기에 주술까지 더해졌으니 모두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도 했다.

황궁에서부터 시작된 신성한 빛은 수도를 밝히고, 나아가 나라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힘을 직접 본 사람들은 다들 경이로움에 무릎을 꿇었다더라. 그야말로 신의 빛이었대.”

“나도 그 처형식에 가고 싶었는데…….”

요안은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즉위식을 치렀다. 즉위식은 그다지 거창하게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보다는 엉망이 되어버린 나라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리라.

그에 반해 반역자들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크게 거행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둠과 손을 잡고 온 나라를 피로 적셨으며, 결국은 황궁까지 밀고 들어가 황제를 죽였다.

죄목이 수없이 나열된 그들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앞으로 황제의 곁에서 영광의 시대를 재현시킬 황궁 주술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처형이 되던 날, 전에 받은 고문으로 두 눈이 멀고 혀가 잘린 필레토 백작 또한 황제를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반론조차 하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에반이 신의 축복이 아니고선 가질 수 없다는 신성한 빛으로 그들을 태워 죽이자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여신을 부르짖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반역 죄인들은 태워 죽이지만, 반면 그곳에 모인 이들은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그 빛은 그간 고생했다는 여신의 손길 같았다. 하늘이 열리고 그들을 향해 내리비추는 희망 같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희망에 눈물을 흘렸다. 새로 떠오른 태양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역자들을 공개 처형한 것은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에반에게 맡긴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민심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두 번 다시는 끔찍한 일을 겪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그들 마음속에 가득 들어찼다. 모든 원인은 없앤 황제와 용사를 아낌없이 찬양했다. 특히 에반은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라니, 정말 아름답지 않니?”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 정말 신이 세상을 위해 내려 보낸 천사가 아닐까 의심했다니까? 어쩜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그 머리카락이 빛이라도 머금으면 그대로 깃털로 변해 흩날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게다가 검은 또 어찌나 잘 다루시는지, 몰래 수련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기절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래.”

“하긴, 멀리서 보아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키도 크시잖아? 그 길고 단단한 팔로 검을 휘두르면 어설퍼도 기절하고 싶어질 것 같아.”

“그런 줄 알았으면 그분께서 처음 황궁에 들어오셨을 때 그곳에서 일하겠다고 나서보기라도 하는 건데. 지금은 천궁에 머물고 계시니 갈 수조차 없잖아.”

“내 말이.”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비릿한 웃음이 치고 올라왔다.

저들은 알까. 지금 천사라 칭하는 용사가 과거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사실을. 당시와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럼에도 저주받았다며 무리에서 버림받았던, 흰 털과 붉은 눈을 지닌 사내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란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단순하고 또 단순하다. 만일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그는 내 기억 속 청년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이토록 세상을 아름답게 밝힐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작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 와서 빛이라 칭송한들 뭐 하리.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피를 닦아내고 새 흙을 덮고 식물을 키우는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황궁과 달리,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흉터가 남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기에 나의 가슴 역시 아려왔다. 나는 그에게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상처를 입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런 상처를.

그를 떠올리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덩달아 떠올라 끔찍한 감정이 나를 옥죄었다. 그것은 죄책감이었고, 절망감이었다. 수많은 죄를 지었다. 돌이킬 수 없었고, 갚을 길도 없었다.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조차 죄스러울 만큼.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끝없는 절망감에 숨이 턱 막혔다. 답답하고 괴롭고 슬프고 화가 났다. 그래서 그간 울어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고 정신이라도 잃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해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쯤 되니 모든 것을 놓고 싶어진다. 생각도, 감정도 모조리 외면하고 싶어진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가늘게 내쉬며 창문에 손을 올렸다. 덜그럭. 내 양손목을 묶고 있는 금속이 유리에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바깥에서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래. 지금의 모든 것은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회생할 수 없던 더러운 것들은 밀려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고대하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자신보다 못한 이를 보고 위로받던 국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용사는 영웅이 되어 그들의 찬양을 받는다.

모든 것이 마녀가 원하던 대로 되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닉스.”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용사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는 여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들은 알지 못하겠지. 이곳에 모든 어둠의 근원인 마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녀를 죽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용사라는 것을.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등 뒤에서 뻗어진 단단한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귓가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닉스?”

그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창 너머 햇빛 아래인데,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야?”

나는 공허한 시선으로 활기 띤 세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절망.”

이 모든 것은 내가 죽고 난 후 벌어질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죽지 못한 채. 죽지 못한 마녀에게는 세상에 들어찬 희망마저도 그저 절망일 뿐이었다.

* * *

에반은 무척이나 바빴다.

새로운 황제의 곁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도 하고, 망가진 황궁 주술진을 보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도를 정화한 뒤 축복을 내리기도 했으며, 다치고 신음하는 이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의 힘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이자 최초로 황궁에서 일했던 황궁 주술사의 기록을 계속 뒤적거렸고, 그 수많은 업무 중 현재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들부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힘을 쏟아붓는 것은 단연 농작지 정화와 축복이었다. 땅이 메마르고 벌레가 들끓으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신성력이 닿는 곳은 그렇지 않은 곳과 확연히 차이가 나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의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온 농작지를 누비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황궁 안과 밖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에반이었지만, 그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왔다. 그러곤 나를 바라보거나 쓰다듬고 종종 혼잣말을 내뱉은 뒤 다시금 일하러 나서곤 했다.

반응이 있든 없든 그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걸친 채였다. 어쩌면 그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고,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걸지도.

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그가 어떤 감정으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나는 멍청하게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가 쳐둔 거미줄에 발을 디뎠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꽁꽁 묶여, 이윽고 내 목마저 조를 거미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내 발아래 투명하고 가느다란 거미줄을 쳐두곤 능청스럽게 눈을 가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나 몰래 거미줄을 쳐둘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내가 알던 그는 아주 일부분이었다는 점이다. 혹은 내가 알던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속았던 걸지도.

그의 표정과 목소리, 태도는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언뜻 능청스러움이 묻어났고, 찌푸린 채 웃는 어설픈 미소도 그대로였다. 손길은 다정했으며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그리하듯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붉은 눈동자 뒤에는 진득한 어둠이 숨을 죽이고 있었으며, 소년의 천진난만함이 남아 있는 웃음은 때때로 잔혹할 정도로 비틀리고 건조하게 변했다. 다정한 손길로 조심스레 거리를 두지만 실은 그 이상 거리를 좁혔다간 스스로도 인내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는, 나조차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뜨거운 욕망이 간혹 묻어 나왔다.

에반은 내가 탑에 갇혀 있던 마녀처럼 조용히 어둠만을 응시하거나, 쓰러져 눈을 감고 있을 때만 당시의 모습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모든 힘이 묶인 채 황궁 안에 갇혀 있는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그러나 그때마다 에반은 가면을 깨트렸다. 애써 눌러 참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나는 그가 받은 상처를 똑바로 응시할 용기도, 그렇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나에게 죽음을 선사해 줄 수 있도록 만들 방법도 없었기에 이제는 말하는 것마저 포기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다. 이대로 그의 마음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인형처럼 지내게 되겠지. 끝없는 죄책감과 고통스러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몸서리치다가 또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포기하고 외면하는 일을 반복하며.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그때 그냥 그를 죽게 두었더라면.

후회는 끝이 없다. 그것은 욕심만큼이나 끝없이 제 몸집을 불려간다. 차라리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그때 멈추었더라면.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그의 죽음 앞에 서 있게 된다.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멈춘 그의 차디찬 몸을 내려다보게 된다.

그저 그 붉은 눈동자를 다시 한 번만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그때 겪었던 고통은,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 * *

나는 처음부터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던 건 아니었다. 에반은 황궁이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계속 나를 곁에 두고 어딜 가든 끌고 다녔다. 자신의 옷으로 나를 덮고 간신히 바닥만 볼 수 있게끔 정리해 준 뒤 자연스럽게, 마치 내가 그의 조수라도 된다는 듯.

에반이 나를 끌고 다니는 곳은 동쪽과 남쪽에 펼쳐져 있는 농작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이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신전, 반역 죄인들을 비롯한 범죄자들을 처형시키는 형장, 그가 일하고 쪽잠을 자기도 하는 집무실, 많은 책이 유실된 듯 곳곳이 텅 빈 황궁 도서관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장소였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쑥대밭이 된 영지들을 다스리게 된 신생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장도 있었고, 그 회의 결과를 토대로 예산 등을 처리하기 위해 몇몇 주요인사만 모인 집무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에반이 끌고 다니는 나를 눈치챈 듯 불편한 시선을 애써 감추는 자가 있었으며, 또 설마 마녀일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듯 대놓고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는 자가 있었다.

에반은 늘 태평하고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고집했지만, 다른 이의 시선이 내게 닿을 때마다 자신의 등 뒤로 슬쩍 감추는 것으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혹시라도 주춤거릴라 치면 묶여 있는 손목을 강하게 붙잡으며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언뜻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에반의 태도에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갔다 올 때마다 황급히 쫓아와 거리를 좁히던 모습, 어딜 그렇게 자꾸 가느냐며 투덜거리던 모습,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게 탑 안에만 있으라던 모습.

그저 탑을 도피처로 삼고 일찌감치 잃어버린 어미 대신 새로운 보호자로 마녀를 택한 작은 새라 여겼는데, 이제야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만 일찍 알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만 막았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는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의 곁에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깨닫게 된 것은 더 있었다. 에반이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나를 동정하는 주술사 네리아토와 황후가 된 헤레이나를 통해 내 가족이 누군지 알고 있던 것은 요안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챘으니까.

에반과 요안 사이에 어떤 종류의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새롭게 왕관을 쓰게 된 황제, 요안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내가 에반의 그림자라도 된다는 듯, 내가 그의 곁에 있든 없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다른 이들을 다 물리고 에반이나 혹은 네리아토까지만 두고 조금 더 복잡하며 골치가 아픈 이야기를 할 때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희생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해야겠지. 하지만 갑작스레 많은 돈이 풀렸다간 오히려 가치가 떨어져 나라 전체가 휘청일 테고, 무엇보다 그 많은 사람을 모두 챙겨주었다간 빚더미에 앉게 될지도 모르겠군. 아니, 사실 그들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닌 식량이야. 돈이 있다 쳐도 먹을 것을 사지 못하면 대체 무슨 소용이지? 여전히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나는 어쩌면 좋을까? 후, 이 자리에 앉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내가 봐온 그라면 틀림없이 주술사의 재목이었다. 황족은 땅을 다스리는 지력을 타고나니, 주술만 부활시킨다면 온 대륙이 금세 평온을 되찾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요안은 들고 있던 종이를 신경질적인 손길로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그 짧은 새 수척해져 있었다. 눈 밑은 피곤함으로 쑥 꺼졌고, 입매는 잔뜩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상황을 이렇게 만든, 전쟁을 일으켜 많은 이들을 핏물에 잠기게 만든 내게는 책임을 물지 않았다. 거기에는 에반과 요안이 했던 거래라는 것이 엮여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왕이 된 요안과 그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에반을 연결하는 거래가.

“차라리 마녀의 말대로 동화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났더라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나라와 가난한 왕, 먹을 것이 부족한 백성들은 동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요안은 동화와 다른 현실을 직시하며 허탈하게 중얼거리다가 내 쪽을 바라봤다. 그러곤 말을 걸었다.

“마녀, 네 생각은 어떤가?”

요안이 내게 직접 말을 건 것은 아마도 마녀의 탑에 갔었노라고 말했던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으리라.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에반의 몸도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는 그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려 보는데, 에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물으시는 겁니까, 폐하.”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가 그랬지, 에반. 마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나는 지금 누구라도 좋으니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었으면 싶은데, 이런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샌가 내 앞에 서서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을 막고 있던 에반은 천천히 비켜섰다. 그러자 요안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껏 에반과 움직임을 같이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을 거라 생각된다. 아마 내가 아는 대부분을 너 또한 알고 있겠지. 마녀, 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 같은가?”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실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면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거였다. 국민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대신, 그들의 고통을 미룬 채 망가져 버린 영지들을 보수하고 농작지를 살리는 게 우선시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노역의 의무를 주어 단기간에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나는 그런 방법을 택할 수 없다. 우습게도,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그의 질문을 무시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땅을 주겠지.”

내 말에 한동안 말이 없던 요안은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군. 그러니까 네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땅을 주겠다는 뜻인가? 모든 이들을 영주로 앉히겠다고?”

“아니. 땅을 빌려주겠다는 뜻이다.”

“그거라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설마 모르고 있는 것인가? 영주민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영주의 땅을 빌려 작물을 재배하고 세금을 내고 있다. 하지만 워낙 땅이 메말라 자신들이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이지. 땅을 더 내어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위로금 대신 땅을 지급하고 일정 기간 세금을 걷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먹을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어차피 망가진 건물을 새로 짓고 보수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니 돈을 주고 부릴 것이 아닌가?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버는 걸 테니 결국 돈이 돌 수밖에 없다. 물론 한동안은 거둬들일 수가 없겠지만, 살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돈을 뿌리는 것보다 이편이 낫다.”

“……세금을 걷지 않는다라…….”

“아마 지금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사람이 넘쳐날 텐데, 일단 그들이 제 의지로 일하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식량을 늘리고 경제를 살리려면 부농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각 지역별 작물을 나르고 판매하는 상인이 늘어날 테니 부상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들이 돈을 쓰면 결국 다른 곳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이게 될 거다.”

한동안 말이 없던 요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재배한 농작물의 수가 조금이라도 더 많아진다면 그렇게 되는 시간이 짧아지겠군. 그렇게 돈을 모은 이들은 더 많은 땅을 빌리고자 할 테고, 또 그만큼 더 돈을 벌겠지. 아무리 재배되는 농작물의 양이 적다고 해도 재배하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 지금보다는 덜할 테고.”

그리고 그는 생각을 더듬듯 드문드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대지가 윤택해진다면 식량은 당연하고, 많은 사람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겠지. 대지가 윤택해지기만 한다면. 결국은 이 방법도 땅이 필요한 거니. 땅을, 대지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선, 역시…….”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던 요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엔 목소리에 꼿꼿한 결심이 박혀 있는 채였다.

“내가 천자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 강제로라도 그 힘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그것이 내 목숨을 갉아먹을지라도, 그리고 결국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에반, 네 힘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겠지. 과거, 황궁 주술사처럼.”

요안은 이미 자신이 천자의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도를 해봤거나, 혹은 그 힘 앞에서 깨달음을 얻은 거겠지.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된다는 천자는 대지를 다스리고 안정시킨다. 타고난 지력은 한계를 알 수 없고 가히 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인 터라, 날뛰던 자연의 기운이 안정되어 주술을 부활시킬 수가 있다.

천자가 부재하면 땅이 피폐해지고 역병이 돌며 주술을 사용할 수가 없었으니 지금껏 천자의 그릇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엔 선택지가 두 가지였다. 천자의 그릇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강제로 천자를 만들거나.

후자의 경우, 지력을 타고난 이, 즉 황족이라면 강제로 천자로 만들 수가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인간이 강제로 받아들일 만한 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지력을 타고 난 황족이라고 해도 힘을 담을 그릇, 즉 육체는 타고난 천자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폭발적인 힘을 견디지 못한 육체는 서서히 금이 가고, 끝내 부서지기에 대부분 단명했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황궁 주술사가 존재하던 영광의 시대에는 신성주술로 치료와 축복 등을 반복할 수 있었으니 가능했으리라.

나는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으며 평화를 이루어냈던 황제를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요안 역시 천자의 그릇이 태어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희생을 택했다.

어쩌면 요안은, 에반을 만나자마자 이런 미래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에반을 보고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칭했던 것은, 그의 힘으로 자신이 강제로나마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황제와 지금 앞에 있는 요안이 겹치는 것을 느끼며 처음으로 어쩌면 왕관이 제 주인을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에반이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들 지력을 타고난 황족이 아니었기에 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빛으로 세상을 감싸 안고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있어도 지력으로 순식간에 대지를 안정시키며 주술을 부활해 내는 천자와 같을 수는 없을 터.

그러나 나는 그가 결국 시도를 했는지, 과연 성공은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이후로 에반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황궁 중에서도 유독 어둡고 외딴 방에 나를 가둔 뒤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 곧 너와 내가 살 곳이 완성될 테니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그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만드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네. 아무래도 꾸미는 건, 조금 나중에 해야겠어.”

예전의 나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알 수 있었다. 에반이 말하는 ‘아무도’와 ‘누구도’에는 황제인 요안 역시 속해 있다는 것을.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가 이렇게 된 이유만은 알 길이 없었다.

* * *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나는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에반이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탑에서 그러했듯 벽에 기댄 채 어둠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거나 혹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차차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안은 내가 말한 대로 위로금 대신 땅을 지급했다. 또한 망가진 마을들의 재건을 시작했고, 그것 외에도 신전 건설 등 수많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당장은 국고가 바닥을 치고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겠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것보다 내실을 다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이 일을 꾸민 마녀는 이미 죽었다고 공표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마녀를 죽인 영웅 에반을 더욱더 우러러보았다. 마녀가 죽었으니 더 이상 떠올리는 사람은 없으리라. 정말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옛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다른 마녀 일행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을지언정 무사히 살아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에반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모두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자신들이 살아갈, 자신들의 아이가 살아갈 나라를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과 그 속에서 활기차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상황이 어떻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홀로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또다시 혼자 남게 될 미래라도 떠올리게 되면 지금껏 겪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 끔찍한 것을 맞닥뜨리게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 속을 비우도록 만들었다. 포기. 체념. 내겐 그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

노력해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 무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것은 어둠이 세상에 휩싸였을 때, 가족을 눈앞에서 잃던 그 기분과 흡사했다. 내가 무엇을 해도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무력함.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 그게 지금의 내 상태였다.

머릿속도 가슴속도 텅텅 빈 채, 그저 보고 듣는, 내 속으로 들어오되 그것은 얼마간 머무르지 않고 다시금 빠져나가는, 실이 끊어져 그 어떤 의지에도 따르지 못하는 그런 인형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저 가만히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이었다. 한동안 잠깐 얼굴 비치는 것조차 벅차하던 에반이 모처럼 짙은 웃음을 띤 채 다가왔다.

“닉스, 같이 갈 곳이 있어.”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건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나와 그의 주위가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였다. 금방이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나를 태워버릴 것 같았던 그 빛은 생각과 달리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 생소한 느낌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주위 풍경이 달라졌나 싶더니 곧 냉기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온 세상이 새하얬다. 순간 에반의 빛으로 세상을 물들인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빛 속에 잠겼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스치는 냉기만 아니었더라면 계속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을 터였다.

“닉스, 여기 기억나?”

에반이 내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살짝 붉어진 뺨이 미소 탓에 부풀어 있었다. 눈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휘었고, 붉은 눈동자는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어느 날 들었던 이야기처럼 천사의 깃털과 같이 가볍고 아름다웠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청년은 기억 속 소년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눈을 보러왔던 그때처럼.

“이곳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야. 조용하고 평화로워. 때 타지 않은,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만 같은 그런 곳이야.”

그는 여전히 내 한쪽 팔을 잡은 채 주위를 서성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생기는 발자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바닥을 툭툭 차며 눈을 가지고 놀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의 입 주위로 서리는 하얀 입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온통 새하얀 세상 속에 있는 새하얀 에반의 새하얀 입김은 묘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것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 생각했어. 이곳에 집을 짓고 싶다고.”

에반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닉스와 함께 살고 싶다고.”

그런 에반의 등 뒤로 무언가가 얼핏 보였다. 지금껏 멀리 빙 둘린 하얀 나무들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설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이 쌓여 있는 하얀 탑.

내 시선이 거기 닿아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그는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야, 닉스.”

새로이 마녀를 가둘 곳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말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 * *

탑 안은 꽤 넓었다. 적어도 마녀의 숲에 있는 탑보다는.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빛 덕분에 밝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주술이 걸린 것으로 보이는 등도 있어 어두워지진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주술력이 빛이기 때문인지 마치 탑 안에 작은 해가 하나 떠 있는 듯 보였다.

‘집’이라고 표현하더니 내부는 그 말에 딱 어울렸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융단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침대, 그리고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욕실로 추정되는 분리된 방이 하나 있었으며, 바깥과 달리 온기가 가득했다. 겉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통나무로 만든 아담한 집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하지만 이곳은 마녀를 가두는 탑이 맞았다. 그걸 증명하듯 잠깐 훑어봤을 뿐인데 수없이 많은 주술진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창문에는 풀어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주술진이 빼곡하게 겹쳐져 있었다. 내가 창가로 다가서자 에반이 성큼 다가와 벽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채 내려다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자 그 역시 따라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설원이 마치 얼어붙은 바다처럼 보였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얗고 앙상한 나무들이 아니었더라면 더욱 아득한 기분이었으리라.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탑 바로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고개를 조금 더 내밀었다. 그 바람에 이마가 유리에 닿아 서늘한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무래도 이곳은 추우니까 필요할 것 같았어. 식물도 키우고, 원한다면 꽃도 키우고. 아, 동물을 키워도 좋을 것 같아. 차차 더 넓히면 되니까. 아직까진 아무것도 없지만……. 보여줄까? 이쪽 계단과 이어져 있어.”

에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눈과는 다른 반짝임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얼음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한 그 찬란한 것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유리로 만들어진 그곳은 온실과 비슷했다. 안에 어떤 장치를 해둔 것인지 눈이 닿으면 물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하얀 탑과 유리 온실이라. 정말이지, 마녀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아닌가.

여전히 햇빛을 반사해 눈부심을 만들어내는 유리 온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에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유리에 닿아 있는 내 이마를 감쌌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던 곳이 에반의 온기로 데워졌다.

그는 힘없이 서 있는 나를 품으로 이끌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일정하게 와 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의 얼굴은 너무나 가벼웠다. 조심스레 걸쳐진 그의 얼굴이 왜인지 힘겹고 괴롭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에반은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걸음을 옮겨 탑 안을 서성거렸다. 순간 스치듯 본 그의 표정이 조금쯤 밝았다. 그리고 목소리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변해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꾸미진 못했어. 일단 필요한 것만 가져다 놓았는데, 혹시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이전의 나였더라면 에반의 저런 표정과 목소리를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무겁게 가라앉고 힘없이 느껴졌던 것이 착각이었다고, 그냥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봐버린 그의 본 모습은 뇌리에 박혀 쉬이 잊히지 않았다. 언제나 웃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착하디착한 용사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전까지는 몰랐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애써 밝은 척하는 것도, 딴청을 피우는 것도 모조리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숨기고자 하는 속마음이 무엇인지는 그저 추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그는 상관없는 듯 말을 이었다.

“또 뭘 채워놓는 게 좋을까? 일단 식사를 해야 하니까 재료를 가져다 놓는 게 좋겠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작은 창고 같은 걸 만들어야겠어. 여긴 따뜻해서 음식이 상할 거야. 음, 그리고 요리할 수 있는 도구와 음식을 놓고 먹을 식탁을 사야겠다.”

에반은 식탁은 어디쯤 놓는 것이 좋을까, 탑 안을 훑었다.

“차라리 보관이 편하도록 작은 걸로 사는 게 좋을까? 여긴 그다지 넓지 않으니 많이 채워놓으면 불편할 거야. 아! 닉스가 가져다주었던 거! 그런 게 딱 좋은데! 그거 혹시 탑에 그대로 있나?”

에반의 말에 그를 위해 집에서 가지고 왔던 작은 탁자가 떠올랐다. 자개 등으로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던 그것은 사실 장식품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황궁으로 들어서기 전, 만약을 위해 다시금 집에다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탑에 찾아와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문제가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 대답하지 않자 에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가보면 되지. 없으면 새로 사면 그만이고. 그땐 그게 너무 고급스럽고 비싸 보여서 혹시라도 흠집이 날까 봐 불안했는데, 이젠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살 수 있는 걸. 그래, 차라리 더 좋은 걸 사자.”

그러곤 들릴 듯 말 듯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땐 닉스가 날 위해 다 해주었다면 이젠 내가 널 위해 다 해줄 거야.”

에반은 몸을 돌려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있지, 나는 너와 함께 있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그저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좋았어. 나는 그저, 너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어.”

내 앞에 선 그는 여전히 묶여 있는 내 손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곤 깊게 자국이 난 손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눈빛이 어쩐지 슬펐다.

“그리고 강제로나마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어, 닉스. 비록 예전과 달리 나를 봐주지도, 다정하게 불러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됐어.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해왔으니까. 이렇게 너를 내 곁에 두기만을 바라왔으니까. 그래서 기뻐.”

기쁘다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가슴 부근이 싸하게 아려왔다.

나는 그가 미웠다. 미워할 수 없음에도 미웠다. 죽어 있던 마녀의 심장을 깨우고, 외면하던 시간을 헤아리게 해주고,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세상을 마주 보게 만들었으며, 단 하나의 꿈이었던 죽음마저 주지 않았다. 만일 이대로 그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더없는 지옥 속에서 영생을 살게 될 터였다.

그는 기억 속 청년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며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던 청년이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아픈지, 어떤 고통 속에서 살게 될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에반 역시 내 고통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쁨만을 좇고 있었다. 내 속이 얼마나 뭉그러지던 끝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는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간신히 손에 넣게 된 너를 놓아 줄 수 없어. 네가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 줄 수 있어. 그러니 닉스, 내 곁에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네가 해줄 수 있지만 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가면이 깨졌다.

“나는 네가 상처 입을까 봐 모든 것을 참아내려 하는데, 너는 왜 자꾸 내게 상처를 주는 거야?”

그 고통 어린 눈동자와 거칠게 일렁이는 감정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번 겪어보았던 그 미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또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도 내겐 고통이었다. 그가 죽고 나면 이 모든 것은 흉기로 변해 내게 상처를 입힐 터였다. 아마 기억 속, 청년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슬픔과 괴로움이 나를 짓누를 터였다.

어쩌면 이것은 증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에반이 내게 이러는 것은, 이토록 비틀려 결국 자신의 세계에 가두고 만 것은 증오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괴롭게 만든, 아프게 만든 나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은 원망스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죽음을 원하는 내게 죽음을 주지 않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래, 어쩌면 이것은 애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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