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실이 끊긴 인형은 마녀를 비웃는다 (20/45)

  19. 실이 끊긴 인형은 마녀를 비웃는다

“에반이 결국 목적을 알아냈나 보군.”

요안이 내게 다가와 앞에 섰다. 하염없이 바닥만을 내려다보던 내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척이나 높은 곳, 마치 천장에 닿아 있는 것처럼 높이 선 채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요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게 뭔지 궁금하지만, 일단 참겠다. 곧 알게 될 테니.”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 어떻게, 된 일?”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멍청하게 물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 또한 누가 들어도 느껴질 만큼 바들거리고 울컥거렸다.

요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에반은 오래전에 이미 나를 주군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

“만일 네가 에반을 왕으로 세우고 뒤에서 세상을 주무를 계획이었다면 틀렸다는 거지. 에반 또한 그것을 막기 위해…….”

“아니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자 그의 얼굴이 미미하지만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금세 사라졌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꼭 쥔 내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띌 정도로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이런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다!”

잠시 멈칫거렸던 그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다급히 쳐내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던 그는 결국 내 턱을 쥔 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강제로 그와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눈썹을 약간 찌푸렸을 뿐,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입을 열었다.

“네 목적은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에반을 왕으로 앉히려고 했다는 거지. 네 입으로 말했듯이 말이야. 근데 왜 일까. 왜 에반을 위해 그리 애썼을까.”

“…….”

“……에반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애써 부정했던, 인정하지 않던 마음을 들켰다. 이 남자는 어떻게 나에 대해 그리 잘 알 수 있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그는 놀란 내 표정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건방지면서도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네겐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겠군. 에반은 네 곁에 있는 것을 택했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아 요안이 내 턱을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무슨…….”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묻자 그는 허무함이 뒤섞인 목소리도 답했다.

“참 멀리도 돌아왔군. 조금 불쌍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에반은 애초부터 왕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가 얻고자 했던 건 왕관이 아닌 마녀였으니. 그리고 이제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걸로 보이고 말이지.”

가슴속이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무언가 끝도 없이 치밀어 올라 가슴께를 꾹 누르며 참아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나는 쓰러지듯 바닥을 짚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바닥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내 눈물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울어도, 울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일어 끝끝내 토해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꾹꾹 눌러 참았던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이럴 순 없어.”

“뭐?”

“이럴 순 없다. 나는 에반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에반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동화 속 용사가 마녀를 죽이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듯, 그렇게. 그렇게 끝나야만 하는데.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가 무얼 잘못한 건가? 왜 나는 죽지 못하고, 왜 이러고 있는가?”

나의 꿈은 이렇지 않았는데.

에반의 진심을 알게 된 것은 기쁘나, 에반의 마음이 그러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나, 지금의 내게는 불행이었으며 고통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선 안 되는 남자였다. 그 마음은 배신감으로, 그리고 분노로 뒤바뀌어 내게 검을 내찔렀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 때문에 희생된 이들이 강을 이루었다. 내가 죽기 위해 죽인 이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죽지 못하다니, 그런 끔찍한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혹시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믿지 않은 걸까. 내가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것을, 내가 모든 일의 원인이요, 어둠 그 자체라는 것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요안은 어느새 걸음을 옮겨 검에 박힌 채 죽어 있는 황제에게 다가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시체를 발로 차 바로 눕게 만들었다. 그리고 과연 정말 죽은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그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는 편이었고, 더욱이 요안은 기사였기에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지만 내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용사는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하염없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요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화라고?”

말을 끊었던 그는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동화와 현실은 무척이나 다르지. 당장 내 앞에서 우는 마녀만 봐도 알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는 마치 혼잣말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동화를 믿었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그 어렸던 시절, 어미를 잃고 나서 내 존재가 발각당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마녀의 숲으로 밀어 넣은 적이 있었다.”

나는 멍하니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바닥을 짚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의 얼굴은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온통 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문 앞에 선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다리가 들어왔다.

“마녀만 만나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마녀의 숲에 들어섰지만, 끝내 마녀의 탑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포기한 걸지도. 깊고 넓은 숲 어딘가에 마녀의 탑이 있을 테니 포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엔 난 너무 순수하지 못했거든. 그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 에반처럼 그렇게 깨끗하지 못했어.”

“…….”

“그래서 돌아왔다. 이 세상에 마녀 따윈 없다고 되뇌며. 내게 동화는 딱 그 정도였다.”

요안은 다리가 다시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찾아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치솟는군. 마녀가 존재하는 줄 알았다면, 동화 속 마녀가 이런 마녀인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먼저 그곳을 찾아내었을 텐데. 조금만 더 내 동심을 믿고 탑에 가볼 걸 그랬군.”

* * *

반란군이 패했다. 에반이 힘을 사용하자 그들은 모든 전의를 잃고 무릎을 꿇었다. 애초에 누구를 지키고자 검을 휘두르던 자들이 아니었으니 목숨을 위협받음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반의 빛은 다친 이들을 상처를 치유했고, 동시에 망가져 버린 그들의 마음을 치유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빛을 찬양했다. 그 따스함에 눈물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탐욕에 눈이 멀어 끝까지 저항하려 들었던 필레토 백작은 붙잡혔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안겨줄 것처럼 굴었던, 아니,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녀를 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나 역시 손이 묶인 채 에반에게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손을 붙들고 있는 물건은 미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섬세하게 새겨진 주술진이 무엇인지는 이미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내 힘을 묶어두었고 나는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마녀가 되어 있었다.

“반란군은 모두 붙잡혔다. 순순히 포기했다. 그래도 끝까지 반항할 생각인가? 필레토.”

“네, 네가 감히! 어디서 한낱 기사 따위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황제는 죽었다! 그리고 모든 영지와 병사들을 쥐고 있는 나야말로 이 황궁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당장 나를 풀어주지 못하겠느냐?”

“이 자가 감히……!”

“됐다, 두거라.”

요안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씩씩거리는 필레토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무언가를 들이대며 속삭였다.

“이게 무언지 알고 있는가?”

그는 눈이 멀어 제 앞에 놓인 물건도 바라보지 못했다. 요안은 혀를 짧게 찬 뒤 말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황제가 죽은 지금, 황녀를 제외하고 그 피를 물려받은 이가 단 한 명 존재한다. 그를 황제로 인정하겠는가?”

필레토 백작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모든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내 곁에서 나를 끌어안듯이 붙잡고 있는 에반만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 점차 술렁일 때쯤, 나긋하면서도 힘이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는 건가요? 감히 황제폐하께 예를 취하지 않다니, 모두들 정신을 놓은 겁니까?”

“고, 공주마마!”

풍성한 금발을 흩날리며 걸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헤레이나 공주였다. 그녀를 발견한 이들이 서둘러 길을 텄다. 사뿐한 걸음으로 그 사이로 가로질러 온 헤레이나는 요안의 앞에 서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몸을 일으켰다.

“폐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헤레이나 공주, 아직 폐하라는 호칭은 과한 게 아닌가 싶소.”

“이제 곧 즉위식을 치루면 모든 것이 정리될 텐데,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그런가? 하지만 즉위식 이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지 않았소? 어쨌든 준비가 모두 끝났다니, 쉽지 않았을 텐데 혼자의 몸으로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주술사 네리아토가 곁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 그 둘이 만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건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머릿속이 복잡해 듣고 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끝을 알 수 없는 실타래에 더욱 엉켜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고, 공주마마?”

“폐, 폐하?”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요안이 에반에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너는 마녀와 그 외 일당들을 처리하라. 그 일은 네게 전적으로 맡기겠다!”

“예, 폐하.”

에반은 그대로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자들은 걸음을 옮기는 요안을 뒤따라 복도 끝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내가 모르는 것이 무척이나 많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에반에게 물었다.

“에반, 일당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비틀리고 싸늘한 미소였다.

“서, 설마…… 설마 다른 이들을…….”

“루아단이라고 했던가. 그자의 이름이……. 그는 끝까지 네 안부만 묻더군. 집요할 정도로 말이야.”

나는 온몸의 털이 비죽 서는 기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마녀의 세상은, 내가 원하던 모든 꿈은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 * *

“그에게, 루아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그가 걱정이 되나?”

“에반, 에반……! 이러지 마, 내게 제발 이러지 마.”

나는 에반의 팔을 붙잡고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더 이상 따뜻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무서웠다. 그런 눈빛을 할 거면, 나를 그렇게 쳐다볼 거면 차라리 죽여줘. 제발 끝내줘.

나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그에게 매달리듯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이 모든 일을 꾸몄어. 사람들을 죽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너 역시 죽이려고 했어. 그러니 나를 죽여. 차라리 나를 죽여, 에반.”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그가 내 어깨를 붙잡더니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힘이 무척이나 사정없고,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손에도 다정함 따윈 엿볼 수가 없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에반은 길고긴 복도 곳곳에 나 있는 문 하나를 벌컥 열더니 나를 밀어 넣었다.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은 그는 검을 뽑는 대신 내 목과 머리를 부여잡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예상치 못한 일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서둘러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묶여 있는 양팔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고개를 틀어보았지만, 그의 한 손은 내 목 뒤를, 또 한 손은 팔을 단단하게 붙잡은 채 더욱 더 깊이 내 입술을 탐할 뿐이었다.

입술을 삼키고 입속을 훑고 서둘러 도망치는 내 혀를 옭아맨다. 무척이나 거칠고 다급하게 내 숨결을 집어삼킨다. 나는 점차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그는 사정없이 나를 짓눌렀다.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조금의 빈틈도 없이, 내 깊은 곳 어딘가를 탐하듯 그렇게 달려들었다.

그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미미하게나마 공간이 생겼고, 황급히 숨을 몰아쉬며 그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숨소리만 새어 나와 그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더욱 날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 입술, 내 입속을 탐하며 그 속에서 무엇을 찾듯이 끈질기게 달라붙던 에반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탓에 서둘러 숨을 들이마시다가 턱까지 차올랐던 울음을 토해냈다. 지금껏 애써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밀려왔다. 한번 툭 깨지자 그것은 거침없이 터져 나와 도무지 눌러 삼킬 수가 없었다.

“흐, 흐윽.”

괴로웠다. 두려웠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이가 에반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에반은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에반은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런 내 눈물을 닦아주곤 다시금 입을 맞춰왔다. 방금 전과 달리 부드럽고 다정했다. 이전에 나를 위로해 줄 때처럼 가볍기 그지없어 섬세한 깃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착각이 이는, 그런 달콤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에반이 맞아. 의심하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해 더욱 더 혼란스러웠다.

그는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댄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죽여달라고?”

평소보다 한껏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담겨 있어 정신없이 흐느끼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내 입술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였다.

“……내가 너를 놓아줄 것 같아?”

그는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키스를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떨어진 그의 입술은 아쉽다는 듯 내 턱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뺨으로 이동해 갔다. 그는 내 눈물을 먹은 뒤 만족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동자가 뜨거웠다. 마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르던 태양을 꼭 닮아 있었다. 그 불길이 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 구석구석이 타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그리 쉽게 놓아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에반.”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깐 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던 것은, 내가 네게 바라던 것은……!”

그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금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거칠고 다급했다.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의 손은 꼭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붙잡힌 손목이 시큰거리고 숨을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때쯤,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졌다고는 하나, 언제라도 다시 맞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그는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리고 더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꾸 자극하지 마.”

말투나 내 목 뒤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내가 아무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 하자, 내 목을 쓰다듬던 손에 힘을 주어 붙잡은 뒤 도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나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에반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그가 놓아주지 않는 한, 나는 그의 품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그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고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탑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참 많이도 만났더군. 내가 움직이면 탑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얌전히 말 잘 들었는데, 원하는 대로 해주면 다른 이를 찾지 않아도 될 거란 생각에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난 이미 너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어. 큰 충격에 이미 한 번 무너지고 말았다고.”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 뒤로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내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바람에 그가 받았을 배신감, 충격, 고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나보다 더 고통스러울 텐데. 믿고 따르던 마녀를 제 손을 잡게 된 용사의 마음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마녀에 비할 바가 아닐 텐데.

그리고 그의 말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어 큰 당혹감 또한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용사가 되겠다 말했던 것은, 마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스스로가 그걸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던 건가? 마녀를 탑에 가두기 위함이었던 거야?

그는 내 의지와 달리 또 한 방울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속삭였다.

“내가 참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모든 것을 망쳐 버리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느라 얼마나 괴로웠는데.”

에반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한가득 물들어 있었다. 눈썹도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상처받은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날, 홀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 믿었던 내가 진실을 알게 되었던 그날, 이미 한계를 맛봤어. 네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슬픔을 꾹 눌러 참았어.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된 나를 피하게 될까 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네 무릎에 누워야 했고, 끝끝내 거짓말을 하는 널 바라보며 잔인하게 난도질당하는 마음을 꼭꼭 숨겨야 했다고. 네가 그걸 알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말하는 그날이 언제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금세라도 달려와 마녀에 대한 배신감과 상처를 드러냈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던 그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게 안겼다. 나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아 그런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아파 그를 밀어내던 팔로 내 가슴께를 콱 부여잡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고, 심장이 격하게 뛰어 온통 쿵쿵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과연 어떤 기분으로, 어떤 감정으로 내게 웃었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믿었던 마녀가 실은 자신을 죽이라 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만나러 왔을까. 어떻게 산산조각 난 자신의 마음을 꼭꼭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앞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잘게 부서진 그 마음 조각이 연신 속을 할퀴고 찢고 망가트렸을 텐데.

에반은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듯 다급히 내 가슴께를 부여잡고 쥐어뜯고 있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방금 전 엿보였던 상처는 온데간데없는 싸늘하면서도 언뜻 달콤한 유혹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그날 간신히 참아낸 대가로 너를 이렇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너를 따르며, 줄곧 이렇게 될 날만을 기다렸어.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의 진실된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날만 기다리며. 네가 바라는 대로 착한 용사 역할을 그럴듯하게 해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관계가 끝나지 않을 거라 믿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간절히 바라며.”

“……왜? 대체 왜 그렇게까지……?”

신음이 섞인 내 물음에 에반은 씩 웃었다. 눈썹은 잔뜩 찌푸리고 입꼬리만 말아 올린 그 미소는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미소임에 틀림없었지만 느낌은 확연하게 달랐다. 사랑스럽고 언뜻 불안하게만 여겨지던 그 미소는 천천히 나를 옭아매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드는 거미줄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이미 거미줄에 꽁꽁 묶인 사냥감을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어깨 쪽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드러난 내 목에 입술을 가져다대곤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모르지, 탑에 갇힌 귀한 보물을.”

나는 그의 숨결에, 목에서부터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그 생소한 간질거림에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한참이나 지분거리던 그는 결국 내 목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낸 이빨 자국을 느릿하게 핥다가 다시금 내 목을 타고 올라와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댄 뒤 속삭였다.

“나는 신이 내려준 그 보물을, 가시로 둘러싸여 알아보지 못했던 신의 왕관을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을 거야.”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어느새 내 얼굴을 마주보며 시선을 얽매던 그는 두려워 미칠 정도로 예쁜 미소로 말했다.

“진정한 승자는,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될 새로운 황제도, 그의 곁에서 자신이 바라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황후도, 새로운 세상 속에서 숨통이 트이게 될 국민들도 아닌, 바로 나야.”

에반은 넋을 잃은 채 몸만 바들거리고 있는 내 입술을 다시금 삼켰다. 그리고 입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목을 타고 넘어와 가슴속에 들어찼다.

나는 몸속에서 들리는 에반의 웃음에, 엉망진창으로 흔들어대는 그 혼란스러움에 하염없이 감겨 있는 그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 * *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은 아주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헤레이나 공주와 주술사 네리아토 덕분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자신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던 귀족들과 왕을 죽인 새로운 황제를 반겼다.

드넓은 영지를 황제 혼자 다스릴 수는 없기에 빈 영지들에는 새로운 귀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귀족들의 압박에 밀려났거나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중앙에서 벗어난 귀족들, 그간 요안이 돌아다니며 만남을 꾀었던 귀족들이 새로운 주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고도 부족한 귀족의 수는 전쟁이나 토벌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이들로 채웠다.

새로운 귀족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귀족들 역시 새로운 황제를 떠받들었다. 그들은 지금의 황제에게 자격이 있음을 의심치 않았다. 어째서인지 나도 몰랐던 사실인 현 황제의 출생의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안은 전 황제의 수없이 많은 사생아 중 하나였으며, 그 사실이 발각되어 어미는 죽임을 당하고 살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는 것을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늘 에반과 요안,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을 쫓아다니며 지켜봐 왔는데 그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 모든 진실을 공유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새로운 황제를 내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계획을 이미 다 짜놓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요안과 마주치는 것을 단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헤레이나 공주조차 조금쯤 따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르고 있었다.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뒤를 정리했으며, 이미 자격이 충분함에도 자신과의 결혼을 선포해 더욱 그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공주였던 그녀는 황후가 될 예정이었고, 그 혼례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에도 남은 반란군과 귀족들의 잔당을 처리하느라 온 세상은 피바람이 멈출 날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었던 마녀와 마녀 잔당들이 모조리 붙잡혔다. 그들은 천궁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다. 나는 에반이 이끄는 대로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 구더기에 파 먹힌 채 내팽개쳐져 있는 마르가리토의 시체를 보게 되어 한 차례 혼절과 비슷한 것을 했음에도, 에반은 나를 끌고 다니며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에반을 바라보며 용사가 나타났음을 기뻐하는 대신, 오래전 사라졌다는 황궁 주술사의 부활을 기뻐했다. 과거 천자의 곁을 지키며 세상을 밝게 빛냈던 황궁 주술사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큰 희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새로운 황제의 곁에서 영광의 시대를 다시금 열어나가길 고대했다.

새로운 황제와 그의 곁을 지키는 황후, 희망이 가득 찬 사람들과 또다시 같은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싹 뒤바뀐 모든 것들. 이 모든 게 마녀가 원하던 것이니 나 역시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왕관을 쓴 자는 에반이 아니라 요안이었고, 헤레이나 역시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에반에게 왕관을 씌어줌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죽을 수 없다, 영원히.

끔찍함에 몸서리치며 오열했지만, 그토록 여리디여린, 다정하고 따스하던 에반은 온데간데없이 써늘하고 건조한, 어딘가 모르게 비틀리기까지 한 시선을 하고 있는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일 뿐이었다.

“더 이상 자극하지 말라고 했어.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아니, 난 이미 한계를 수도 없이 맛봐서 더 이상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그래도 믿기 힘든 현실에 나를 죽여달라 중얼거리니,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일단, 정리가 모두 끝날 때까진 참아야겠지만 자꾸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너를 가지길 원해? 그리고 난 마녀를 가지기 위해 용사가 되었다! 그렇게 선언하길 원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놀라겠지. 용사가 마녀를 사랑한대! 하고. 정말로 그걸 바라?”

큰 충격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젓자 그는 그런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는 한 품에 들어오는 나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착하네. 그래, 이래야지. 난 그간 죽는 줄 알았다고. 네가 떠날까 봐, 도망갈까 봐 착한 척, 순진한 척 온갖 욕구 다 눌러 참느라 고생했단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 자극하지 마. 알겠지?”

그러면서 나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기댄 채 끌어안은 배 부근을 토닥거려주는 그는, 지금껏 내가 알던 에반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달랐다.

지금껏 내가 알던 에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빛을 위해 어둠을 자처하던 마녀의 동화는 끝이 났다.

그러나 마녀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둠을 숨기기 위해 빛이 된 용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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