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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녀는 끝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17/45)

  16. 마녀는 끝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에반은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녀의 곁에 있으려고 애를 썼다. 결국 나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고, 그가 고통스러워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녀의 탑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에반은 어렸을 때와 달리 마녀의 탑에만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그는 밤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갈 채비를 마치고 또 오겠다는 인사만 남긴 채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꽤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마녀의 탑에 머물렀던 소년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그는 마녀의 탑에 왔다 간 이후로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네리아토가 주술사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는 정도였다.

그는 굉장히 오래 산 인물이었고, 아주 어렸을 때였기는 하나 주술을 사용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은 참 값진 것이었다. 그래서 에반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리아토는 그걸로 부족했던 모양이다. 부모가 주술사였거나, 혹은 조부모가 주술사였거나 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와 주술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에반의 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간간이 시선을 돌려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루아단을 만나 현재 진행 상황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계획 또한 조율해 나가야 했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낼 수는 없었기에 보통 에반이 잠자리에 들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시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자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지 어차피 내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쯤에서 탑으로 돌아왔다.

에반은 의외로 한동안 마녀의 탑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별 문제없이 그간 많이 줄어든 귀족들을 살피며 균형이 크게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길어지는 싸움에 귀족들은 조금 지친 모습이었고, 나는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 식량이 부족한 이들에겐 식량을, 병사가 부족한 이들에겐 병사를 조금씩 떠안겨주며 결국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심어줬다. 이미 마녀의 인형과 다름없는 그들은 실에 따라 움직이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영지들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황제는 자신의 땅에서 귀족들이 영역 싸움을 벌이는데 아직까지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라면 그래봤자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므로 영지의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들이 알아서 타협을 하면 좋을 것이요, 아니어도 나중에 반란군만 해결하면 되리라.

어쩌면 그게 가장 현명한 걸지도 몰랐다. 지금 귀족들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물론 마녀의 속삭임에 넘어가 탐욕에 미쳤기 때문이지만.

오늘도 에반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 탑으로 돌아온 나는 신음하고 있는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이제 정말 마녀에 대해 믿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녀의 짓이라고 입을 모아 외치고 있었다.

귀족들이 미친 것은, 탐욕에 눈이 멀어 계속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고, 또한 목격한 이들도 많았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공격하는 그림자를 봤다는 사람, 필레토 백작이 허공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봤다는 사람, 분명 승리가 코앞에 있었는데 눈 깜짝하는 사이 방어선이 견고해지거나 무너졌다는 사람……. 심지어 괴물들을 움직이는 것이 마녀라며 확신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세 명만 모여도 그 소문은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상황이 이런데도 황제가 움직이지 않으니 더욱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녀가 무서워 천궁에 숨었다느니, 마녀와 손을 잡고 귀족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돌았다.

그와 동시에 용사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져 나갔다. 용사의 빛을 본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그것 또한 분명한 진실이었다.

진실은 소문보다 무게가 있었고, 더욱이 그들에겐 희망이 되는 진실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용사에 대해 떠들었다. 대부분 그가 이미 황궁에 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천자가 그의 힘을 두려워해 가뒀다는 소문이나 때를 기다리며 수련하고 있다는 소문 따위가 쉬지 않고 돌았다.

그 소문의 중심지인 카토 주점은 연일 대성황이었다. 비록 귀족들이 끊임없이 싸우는 통에 주 손님이었던 용병의 수는 많이 줄었지만, 황제의 영역인 중앙에 자리 잡은 그곳은 전쟁과는 약간 비껴있었기에 어떻게 운이 좋아 다른 영지에서 몰래 도망친 이들 등으로 가득 들어찼다.

그들은 황제가 이 일을 어서 해결해 주길, 굳이 황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 절망을 끝내주길 바라며 소문을 주워들었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용사에 대한 관심은 커져만 갔고, 그가 괴물들을 몰살시켰듯 이 모든 일을 눈 녹이듯 해결해 주길 바랐다. 어서 이 모든 절망의 원흉인 마녀에게 검을 겨누길 바랐다.

나는 밤이 깊어진 후에야 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조금 쉬려는데,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니, 닉스 님.”

나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그것도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당혹스러워하는 루아단의 행동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아단은 쉽게 동요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서늘하고 건조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 날카로운 눈매와 그것을 더욱 차갑게 보이도록 만드는 안경, 차분한 말투와 행동까지. 물론 겉으로 보이기만 그렇지 실상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지만, 어쨌든 이런 행동은 그답지 않았다.

서둘러 계단으로 다가가니 예를 갖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한 그가 균열이 가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급했던 건지, 아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 건지 그는 안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일이라.”

“무슨 일입니까?”

“마르가리토가 붙잡혔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바라만 보는데, 그는 자괴감에 빠진 듯 어둡고도 흔들리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르가리토가……. 그가 용사를 찾아가 공격했습니다.”

순간 나의 시간이 멈추는 착각이 일었다. 그는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는 나의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충 묶은 듯 얼굴로 조금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루엘라가 꾸민 일 같습니다. 그녀는 황궁에서 머물며 용사의 동태를 살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게 달려와 이 일을 알린 것도 루엘라였습니다.”

“그, 그래서? 에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비명처럼 되물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고 나니 에반에 대한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워낙 심상치 않다 보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이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며 감정을 죽여 왔기 때문이리라.

나의 질문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좌절감 따윈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방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오던 마르가리토를 뒤늦게 발견하고 공격을 한 모양입니다. 루엘라의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그는 용사에게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간 후였습니다. 용사가 머물고 있는 궁의 경비는 무척이나 삼엄해졌고, 날카로운 긴장감만 가득 차 있습니다. 더 알아보고 싶어도 제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단 에반은 무사하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몰아닥치는 안도감에 도리어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아 벽에 몸을 기댔다. 루아단이 서둘러 내 어깨를 붙잡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 아닙니다. 일단 상황을 조금 살펴봐야겠습니다.”

조금 진정하고 나니 더욱 큰 문제가 나를 짓눌렀다. 마르가리토가 잡혔다. 그는 어둠의 힘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그래봤자 배운 지 얼마 안 된 수련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녀와 달리 죽이면 죽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를 대체 어떻게 구해내야 하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마 황제는 그냥 죽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배후를 캐내야 하니까. 용사를 죽이려들었다, 그것도 황궁까지 와서. 어쩌면 어떻게 용사가 머물고 있는 황궁을 알아냈는지 또한 털어놓게 만들지 몰랐다. 그러면 루엘라도 위험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모든 배후가 마녀, 즉 나라는게 밝혀질 가능성이 컸다. 너무 일렀다. 아직 모든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황궁을 바라봤다. 최대한 빨리, 마르가리토를 구해와야만 했다.

* * *

하지만 나는 마르가리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루아단의 말대로 에반이 지내던 궁의 경비가 무척이나 삼엄해져 있었다. 그래봤자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나를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 틈을 파고들어 여기저기 살필 수가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궁 안에는 마르가리토도, 에반도 없었다. 단지 조사를 받고 있는 시녀들만 존재했다. 그녀들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진실을 털어놓게 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단연 공포와 고통을 이용하는 거였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그중 한 여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인이 에반의 침실을 드나들던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곱고 가녀리던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래도 에반과 가깝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여인이기에 제일 많은 의심을 받은 모양이었다.

“전, 아무것도, 아무, 것도…….”

그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죄가 없는데 벌을 받아야 하다니, 이들이 나와 다른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들은 정말 잘못이 없으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이쯤에서 끝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의 죄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다. 이것은 죽음으로 끝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한참을 애꿎은 피해자가 되고 만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에반과 네리아토, 마르가리토는 중앙궁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천궁에 있는 모양이었다. 천궁 언저리도 돌며 찾아보았지만 헛걸음이었다. 만일 황제가 직접 그를 보고자 한다면 아마도 천궁 안, 황제가 있는 곳과 가까운데 있을 터였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몇날 며칠을 황궁 주위를 맴돌았지만 알아낸 거라곤 이 일의 전말뿐, 심지어 에반이 괜찮은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내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가 재만 남았을 무렵, 천궁 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과 네리아토였다. 그의 얼굴은 그 짧은 새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표정도 어두웠고, 눈매는 사나웠다. 그 모습이 낯설기만 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무엇이든 들었을 거라, 그리 생각되었다. 마르가리토도 인간이었다. 고통과 공포에 약하디약한 인간이었다. 그가 제아무리 커다란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한들, 죽음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디까지 말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르가리토를 포함해 다른 일원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단지 마녀가 나타났다. 마녀가 힘이 되어 달라 말했다. 마녀는 귀족들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 이유는? 복수를 위해. 마녀 또한 세상을 증오한다고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일부러 서로의 얼굴도 감췄고, 겉으로 활동한 것도 나 하나뿐이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거든, 아니, 모든 것을 나의 계획대로 무사히 끝마친다고 해도 모든 화살이 내게 꽂히도록.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둘은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복도에는 에반과 네리아토, 그 둘을 안내해 주는 시종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한참 동안이나 이어진 그 침묵은 네리아토의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에반, 이미 너도 알겠지만 나는 요안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같이 가겠느냐?”

“아닙니다. 그 이야기라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이해한다. 설마 황궁까지 올 줄은 몰랐기에 방심하고 있었어. 이번 일로 많이 놀랐지? 그래도 정말 다행이구나. 네가 자리를 비웠을 때 찾아와서…….”

“네리아토 님.”

“크, 큼.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이 말만 느는구나.”

그는 한동안 눈치를 살피는 듯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금 말을 붙였다.

“천궁에서 머문다면야, 더 이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아마 천자께서도 그리 생각하신 걸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주술진을 단단히 만들어놓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마녀가 용사를 노린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지 않던가.

그리고 에반을 찾으며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조금씩 주워들었다. 에반이 마르가리토를 쫓을 당시, 그는 빛을 이용해 공격했다고 했다. 그의 힘을 목격한 자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리라.

아마 황제도 그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겠지. 그를 곁에 두어야 자신에겐 이익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을 것이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달리 더 이상 방치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설마 천궁에 머물도록 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천자께서 네게 의지하시려는 것 같다. 네 능력은 정말 놀랍지. 암, 그렇고말고. 특히 그 치유 주술은 가히 신의 힘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더구나. 상처를 말끔히 낫게 하다니, 그걸로 부족해 정신마저 또렷하게 만들다니 어찌 대단하지 않을꼬. 누구라도 그 힘을 탐낼 수밖에 없어.”

그의 말에도 에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컸고, 싸늘했다. 그 모습만으론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도, 그리고 마녀를 찾아올지, 아니면 두 번 다시 마녀를 찾지 않을지도 도무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에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네리아토만 그의 힘에 대해 찬양을 하는 사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궁은 천궁이나 조금 언저리에 위치한 방을 앞으로 에반이 지낼 곳이라며 내어주었다.

“에반…….”

“죄송하지만, 조금 쉬고 싶습니다.”

“그, 그래. 미안하구나, 많이 피곤할 텐데 푹 쉬도록 해라. 나는 곧바로 나갔다 오마.”

“네. 다녀오십시오.”

네리아토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침대에 눕는 에반을 바라보다가 곧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는 방금 전 말한 대로 금세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황제와 이미 말이 끝난 상태인 듯했다.

에반은 정말 많이 피곤했던 건지 침대 위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제 아무리 토벌을 갔다 와 녹초가 되었다고 한들, 단 한 번도 씻는 것을 거른 적이 없었기에 많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그의 눈이 갑작스레 뜨였다. 나는 깜짝 놀라 내가 보이질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침대 그림자에 숨고 말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그게 무슨 주술인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닉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혹시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닉스.”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내 몸을 누르는 느낌 또한 전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얼굴 옆으로 새하얀 것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귓가에서 한숨이 섞인 숨소리가 들렸다. 어깨 위로 무언가 단단하고 따뜻한 것이 올라와 있었다.

에반이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키가 훌쩍 커진 그는 무릎을 땅에 대고 허리를 숙인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양팔이 내 목뒤로 둘러져 뒷머리를 감쌌고, 그런 자신의 팔 위에 머리를 기댄 것인지 숨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그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귓가로, 목뒤로.

“……에반.”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에반의 행동이 무얼 뜻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러나 곧 맞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그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안쓰럽다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표정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몸이, 크고 남자다운 그 몸이 생각보다 너무 가볍고 힘이 없었다. 그가 기대고 있는 내 어깨는 하나도 무겁지 않은데, 그 모든 무게를 내 마음이 지탱하고 있다는 듯 한없이 무거워졌다.

나는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을 올려 에반의 등 뒤를 감싸 안으려다가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에반을 이렇게 흔든 것은, 이토록 힘들어하게 만든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나는 그를 다독여줄 자격조차 없었다. 그가 진실을 알았든, 알지 못했든 간에.

* * *

한동안 그렇게 나를 끌어안고 있던 에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게서 떨어졌다. 내 어깨 위에 올려 기대었던 팔을 떼는 대신 손으로 살짝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해 왔다. 너무 가까워 몸을 틀려 하자 그는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고개만 살짝 내린 채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내 눈높이에 맞추려 애썼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의 얼굴은 예상과 달리, 조금 밝았다. 아니, 평소보다 밝았다.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어딘가 모르게 개구쟁이 같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웃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미소를 짓고 있어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게 만족스럽다는 듯 그의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동시에 눈썹도 조금 찌푸려져 평소와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말을 할 처지도 못되었고, 너무 감춰야 할 것이 많아 함부로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에반은 내가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니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없어야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지금껏 그래왔듯 그저 탑에 갇혀 있는 마녀의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부 다 알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에반은 그런 내 얼굴을 살피기라도 하듯 한참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안도하기는 많이 일렀다. 그가 내 무릎을 베고 털썩 누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꾸 고개를 숙이는 나를 아예 아래에서 올려보겠다는 듯 그대로 누워서 시선을 마주쳐왔다. 멍하니 굳어 있던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자, 양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싼 채 다시 내렸다.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내 새카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에반의 머리 옆으로 드리워졌다. 그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좁은 탑 안인데, 더욱 은밀하고 가까이에서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그 느낌이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너무, 떨렸다. 그래서 얼굴에 힘을 줘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데, 지금껏 아무 말하지 않던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닉스,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알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내가 꼼짝없이 얼어붙자 그는 내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내리면서 내 뺨을 쓸어내리는 손가락 때문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욱 신경이 쓰여 스스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은 여전히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게서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 듯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 큰일 날 뻔했어. 나 많이 힘들었다고. 그러니까 자꾸 피하지 마. 피하지 말고 나 좀 위로해 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참 낮고 묵직했지만, 일부러 과장해서 처연한 말투와 표정을 짓는 바람에 그 마저도 익살맞고 어리광부리는 소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의아했다. 에반이 이토록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내게 기대온다는 것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아도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어둠에게 습격당했다는 자체가 이리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도는데, 마녀가 용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정말 습격을 당했다면 나를 의심해야 정상이 아닌가?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걱정되지 않아?”

나는 에반의 질문에 한없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궁금해하고 걱정해야 맞는 일이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나?”

“무슨 일 정도가 아니야.”

그는 또다시 일부러 과장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넓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푹 꺼졌다. 정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괴롭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린 채였다.

“하마터면 영영 닉스를 못 만나게 될 뻔했어. 자고 있는 틈을 타 몰래 숨어들어온 밤손님이 나를 습격했거든.”

“……그래서?”

“그건 뭘 묻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아니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무엇을 더 궁금해 했을까? 짧은 고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거다. 다친 곳은 없는 거겠지?”

에반은 대답 대신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인지 그렇게 올려다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던 그는 이내 쌜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 다행히도 밤손님이랑 마주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거든.”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다. 나는 분명 에반이 시중과 함께 방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난 후 탑으로 돌아왔는데, 어째서 그곳엔 아무도 없었을까.

하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는데,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그가 말을 덧붙였다.

“다행이었지 뭐야. 그날따라 잠이 오질 않아서 잠깐 산책을 나갔었거든. 아마 그때 온 모양이야. 산책을 마치고 궁으로 들어서는데 때마침 나오던 밤손님하고 정면으로 마주쳤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더라고. 그래서 나도 공격했지.”

“다행이군.”

산책이었나.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에반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의 말대로 큰일이 날 뻔했으니까.

루엘라는 어째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일까. 그녀라면 에반의 거처뿐 아니라 소소한 행동반경까지 모조리 확인 했을 건데. 그녀라고 해서 하필 그날 산책을 나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너무 방심했다.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만약이라도 일어날지 모를 일에 대비해 두어야 하니까 계속 지켜봤어야만 했다. 물론 그녀가 방심한 것은 내게 행운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순간 에반의 얼굴이 딱 굳었다. 그 변화가 크게 다가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조금 깊어진 눈으로 물었다. 목소리 또한 한없이 낮고 건조했다.

“내가 언제 남자라고 말한 적이 있나?”

나는 내 실수를 깨닫곤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린 후에야 간신히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편견이었나 보군.”

“……그래?”

에반은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곧 다시금 샐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하긴 그래. 나 같아도 설마 여자가 습격했겠어? 하는 생각이 들겠다. 그리고 닉스 예상대로 남자가 맞고 말이야.”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차마 한숨을 내쉴 순 없어 조금씩, 천천히 내쉬었다. 그는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마저 얘기하자면 그 남자는 내게 붙잡혔어. 검술 실력이 상당했지만 닉스도 알다시피 나는 주술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상대가 되질 않더라고. 그는 몰려든 병사들에게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어. 그것도 황제가 머문다는 천궁 내에 있는 감옥에. 덕분에 나도 천궁엘 다 들어가 봤지……. 아!”

“왜 그러지?”

“내가 황궁에서 머물고 있다는 말은 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당연히 알고 있어서 그의 얘기를 또 무심코 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머물고 있었던 건가?”

“꽤 됐어. 닉스 조금 당황했겠다. 난데없이 궁이니 병사니 해서. 미안, 나도 정신이 없었어.”

“그건 괜찮은데, 궁에 머물고 있다면서 이렇게 와도 되나?”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것보다 내가 어떻게 해서 황궁에 머물게 된 건지는 궁금하지 않아?”

“네 능력 때문이겠지.”

에반은 눈썹만 까딱거리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를 보였다. 나는 조급함을 애써 숨긴 채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서 뭐라도 알아낸 것이 있나?”

“전혀. 아무 말도 하질 않더라고. 꽤 오랜 시간을 괴롭혔는데도.”

침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뎠을지, 이미 겪어본 터라 예상하기가 쉬워 더더욱 괴로웠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해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니 나의 존재도, 마녀 집단의 존재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에반이 아무렇지 않게 내게 온 것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황제가 나머지 마녀들을 잡으려 움직이지 않는 것도 그래서 그런 거였다.

그래도 한 번쯤 마녀를 의심할 법도 하건만, 이렇게 찾아와 이런 얘기들을 하는 에반이 신기하고 고맙고, 또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일단 다시 감옥에 가뒀어. 얘기할 마음이 들 때까지 조금 기다려보고…….”

“그리고?”

“정 안되면 그냥 죽여야지.”

그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다고 말할 수가 있다니, 한없이 유약하고 순진하기만 한 에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녀와 떨어져 있는 그 시간 동안,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는 동안 달라진 것은 겉모습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아직 죽이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결국 고집을 꺾고 모든 사실을 밝히기 전에 데리고 와야 할 텐데. 천궁에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했기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무튼 참 끔찍한 나날이었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닉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응. 그러려고. 앞으론 잘 때도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해라.”

나도 모르게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말았다. 그는 그 표정을 읽었는지 조금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앞으로도 종종 하소연해야 할까 봐.”

나는 나를 믿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붉은 눈동자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말았다. 에반이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또 거짓말을 하며 상황을 모면했다.

“피곤할 텐데 조금 자두어라. 이곳은 안전하니.”

내 손바닥에 가려져 눈이 보이질 않는 에반은 입을 살짝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닉스, 날 위해 기꺼이 무릎을 내주는 거야?”

“……그래.”

“그럼 사양해선 안 되겠네.”

그는 고개와 어깨를 틀어 내 몸 쪽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나는 조금 기쁜 듯 보이는 그 얼굴을 힘겹게 쳐다보다가 결국 눈을 꽉 감아버렸다.

에반을 계속 기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그가 믿고 있는 대로 착하고 다정한 마녀로 존재하는 것밖에 없는 걸까?

어쩔 수 없이, 내가 죽음을 포기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그를 그리워하며 살 자신이 없는데.

* * *

에반은 틈만 나면 마녀의 탑을 찾아왔다. 마르가리토를 찾아서 얼른 구해내야 하는데,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틈날 때마다 찾아오니 그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그냥 찾아오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에반.”

“응?”

나는 오자마자 내 무릎에 드러누워 빤히 올려다보는 에반을 불렀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눈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자꾸 이렇게 찾아오면 모두들 의심할 거다.”

그러자 그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 지금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에반의 말대로 그의 방 근처라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꼬리가 길면 언젠가 잡히기 마련이었다. 이러다가 황제가 갑자기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그의 의심을 어떻게 피할 생각인가.

“에반, 그래도…….”

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곤 얼굴을 내 배에 묻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음, 좋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그 때 닉스는 잘 안아주고 그랬는데.”

아니, 그런 적 없다. 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진심으로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린 에반이 내게 안긴 것은 단 세 번뿐으로, 그 당시 에반은 어렸지만 여느 아이들과 달리 상처가 많았고 사람을 믿지 못한 탓에 내게도 거리를 두었다. 제대로 웃는 모습조차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제대로 웃는 걸 보기 힘든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몸을 붙였다. 지금 이 상황이 낯선 것도 낯선 거지만, 도무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밀어내려 해도 천연덕스럽게 달라붙었다.

그는 어린 시절 동안 보호해 준 나를 어미 새처럼 여길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새끼 새처럼 거두었으나 내 기억 속에 나를 여인으로 봐주었던 청년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언제나 내게 남자일 뿐이다.

물론 내 처지를 잘 알고,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도 알고 있으므로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부모의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려 애쓰지만, 그게 잘되지는 않았다. 한번 그가 깨운 감정은 쉬이 내려놓아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죽음을 갈망했다. 그게 아니고선 끝나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어느새 그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결국 그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묘한 두근거림이 나를 뒤덮었고, 에반이 닿아 있는 곳부터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그의 체온이 내 텅 빈 가슴속을 채웠다.

언제 이렇게 성장했나. 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내심 생소해 했다. 분명 성장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게다가 이렇게 성장한 모습은 두 번째 보는 것인데도 낯설고 이상했다. 이렇게 크고 듬직한 사내가 된 것이 묘했다.

정말 인간의 시간은 너무 빨랐다. 그래서 더욱 짧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을 곁에서 볼 순 없었다. 짧지만 이토록 강렬한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그가 참 야속했다. 그 야속함은 그의 손으로 내 삶을 끝내기 전까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 *

어디선가 흘러온 물이 내 발을 적셨다.

무심코 내려다보았던 나는 그 물이 무척이나 붉다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흘러오던 그 물은 어느새 점점 고였다. 내 발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고 이내 허리를 적셨다.

나는 내 허리까지 올라온 그 붉은 물을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피 냄새가 났다. 그건 그냥 물이 아니라 핏물이었다.

어느덧 주위가 피로 이루어진 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물살을 따라 무언가 떠내려왔다. 사람이었다. 아니, 그건 시체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하나같이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차디차게 식었지만 눈에 담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 두려움. 죽음을 앞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나둘 떠내려오던 시체는 어느새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났다. 나는 그것을 피해 뒤로 돌아 도망쳤지만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물 때문인지 너무 무겁고 힘겨웠다. 그사이 빠른 물살을 타고 온 시체들이 결국 나를 둘러쌌다.

그런데 그 시체들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나는 그중 아는 얼굴을 발견하곤 결국 입을 틀어막았다.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그 여인은 내가 죽인 여인이었다. 필레토 백작의 분노를 위해, 귀족 간의 전쟁을 위해 희생된 여인이었다. 루아단에게 죄책감을 떠안길 순 없어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죽고 싶지 않아.

섬뜩한 목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살려줘.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지?

한두 마디씩 터져 나오던 목소리는 어느새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이번 일에 희생된 자들이었다. 나 때문에 죽은, 내가 죽인 자들이었다.

“아니야. 내가 아니었어도 죽었을 거야. 언젠간 벌어질 전쟁이었다. 결국 언젠간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전쟁이든 토벌이든, 당신들이든 당신 자식들이든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였어!”

나는 두려움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변명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억울했다.

“왜? 왜 나한테만 이래? 당신들도 나를 죽였잖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였잖아. 나는 당신들보다 더 아팠어. 더 괴로웠어.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고!”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그만해. 제발 이러지 마.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나도, 나도 정말……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했어. 나 하나로 끝났으면 했다고…….”

갑자기 무언가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확 잡아당겼다. 나는 핏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주변이 온통 빨갛기만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수많은 손이 나를 끌어당겼다.

—원통해, 원망스러워.

어느새 시체들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했다. 그들의 죽음이, 내가 그들에게 저지른 잘못들이 두려웠다. 언젠간 죽었을 거라고, 아니, 사실 그들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외면해 보지만,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들을 죽일 권한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을.

숨이 턱 막혔다. 코와 입으로 핏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애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점 나를 더 얽매어왔다. 무겁고 두렵고 괴로웠다.

“……스!”

그 순간, 핏물 사이로 빛 한 줄기가 내려왔다. 그 빛은 물속을 가로질러 내게 닿았다.

“닉스!”

“허억!”

“닉스, 정신이 들었어? 어디 봐, 괜찮아?”

나는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햇살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 핏물 속에서 나를 비추었던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는 나를 집어삼켰던 피의 강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 내 모습이 담기자 절로 몸서리쳐졌다. 그는 나를 구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닉스, 악몽이라도 꾼 거야? 괜찮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응? 내가 옆에 있어.”

에반은 무척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내 얼굴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그는 마치 갓난아이를 다루듯 나를 살피고 위로해 주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 주위가 시큰거렸다. 눈물을 보여선 안 되기에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았다.

그는 양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울고 싶다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이 감정을 들킬까 봐 눈을 꽉 감았다. 그 어떤 감정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데, 일그러진 얼굴을 필 여력이 없었다.

순간, 무언가 내 눈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금세 떨어졌다.

눈을 뜨자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자 방금 전과 같은 곳에 다시금 무언가가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닿고 떨어졌다.

그게 뭔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내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아서 이것도 꿈인가 싶었다.

그는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의 가슴은 굉장히 넓었다. 내가 안기고도 남을 정도로. 그리고 그의 팔 또한 굉장히 길고 단단했다. 내 몸을 두르고도 남을 정도로.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가만히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잘게 떨리던 몸도 어느새 괜찮아져 있었다.

“닉스도 내가 힘들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었잖아. 이젠 내 차례야. 내가 곁에 있어줄게.”

그의 목소리가 몸속으로 들리자 마치 꿈결 속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흐느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안도되기 때문이 아니었다. 꿈에서 벗어났다는, 나를 보호해 주는 이가 있다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괴로웠다. 가슴이 저몄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죄였다. 결코 없어지질 않을, 갚을 길 따윈 없는 그런 죄였다. 이렇게 쉽게 사라져선 안 되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꾼 꿈이었고, 수도 없이 되뇐 얼굴들인데 단지 에반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다니, 이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마녀는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가시왕관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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