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용사는 마녀의 탑을 드나든다
에반은 차분하게 황궁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황제는 에반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에반은 알아서 스스로의 생활을 챙겼다. 시녀가 챙겨주는 식사도 꼬박꼬박 했고, 그녀들이 준비해 두는 옷도 그다지 어색해하지 않고 잘 받아 입었다.
필요한 것은 모조리 준비해 주겠다고 하더니 그에게 입히는 옷들도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그런 옷을 입은 에반은 그야말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왕자님처럼 보였다. 천사같은 얼굴과 남자다운 몸, 거기에 화려한 옷까지 더해지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처음 입어보는 제복 따위가 불편할 만도 하건만 에반은 군소리 하나 하지 않았다. 그런 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지 옷을 찢어먹거나 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근사한지라, 수련을 할 때면 시녀들이 몰래 지켜보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시녀들의 목욕 시중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처음엔 얼굴도 붉히고 많이 쭈뼛거렸지만 의외로 순순히 그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나는 그것이 조금 충격적인지라 에반이 옷을 벗는 순간까지도 그곳을 벗어나질 못했다. 그의 상의가 내 그림자 위로 떨어지고 나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뒤 욕실을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 외에는 나오는 이가 없었다. 간간이 참방거리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간 수련장에는 여인이 없었기에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에반도 분명 남자였다. 자그마하고 순수하던 소년은 어느새 이렇게나 자라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잊었다. 그가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못해 매혹적이기에 어떤 여인이든 유혹할 수 있음을 망각하고 말았다.
나는 에반을 이곳까지 안내해 주었던 자의 말을 떠올렸다.
“무엇을 하시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허락된 장소인 이곳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셔도 되고, 또 어떤 것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황궁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여태껏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그것은 그저 자유를 뜻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다분히 직설적인 말이었다. 에반의 시중을 들기 위함이라며 시녀들을 보내놓고 그 어떤 것을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는 것은, 또 황궁에 오는 여느 귀족들은 그렇게 해왔다는 말은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뜻이 나오질 않던가.
네리아토는 중앙궁에 틀어박혀 지식을 쌓느라 바빴다. 요안은 단원들에게 돌아가 토벌을 이어가고 있었다. 즉 이곳엔 오로지 에반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엔 내가 보기에도 젊고 매력적인 여인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에반의 곁에 머물러도 좋은가? 그는 내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지금껏 최소한의 사생활은 보호해 주고자 화장실 등은 따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어쩌면 화장실보다 더욱 은밀한 장소일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주술을 연습하고 있는 에반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은 잠시 미루어두자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왔듯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잠시 자리를 피하면 될 터였다.
그래, 그러면 된다.
나는 자꾸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은 끝끝내 외면해 버렸다. 내가 뭐라고 그런 것을 신경 쓴단 말인가.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볼 수 있음을, 그보다 일찍 죽어 이전처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처지인 것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고민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에반이 밤시중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에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언뜻 기쁘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따라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에반이 침대에 앉아 가만히 손짓을 하자 그녀는 덤덤히 옷자락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들리지도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닫힌 문 뒤로 사락거리는 천 소리가 들렸고, 자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으며, 이윽고 삐거덕거리는 침대 소리가 들렸다. 에반이 누운 것인지, 시녀가 누운 것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더욱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예뻐. 긴 속눈썹, 붉은 입술, 그리고 하얀 피부가.”
그 목소리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회색빛으로 밝게 빛나던 황궁 대신 새카만 탑 내부가 펼쳐졌다.
그의 목소리가 뜨거운 불로 변해 다급히 삼키는 침과 함께 내 몸속으로 들어온 듯 가슴 속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이 내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마녀와는 달리 부드럽고 깨끗하며 어여쁜 시녀가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반의 빛 덕분에, 그의 선하고 다정함 덕분에 나의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흉측했던 내 얼굴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바들거리는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작 이런 일로……. 이게 뭐라고…….”
이 무슨 추잡한 짓인지. 감히 누구와 비교를 하고, 누구를 질투하는 것인지. 애초에 마녀는 감히 용사를 넘볼 처지도 되지 못하는 것을. 나는 그의 행복만을 빌어주면 되는 것을.
이런 걸로 상처를 받는다는 자체가 잘못이지 않던가. 아니, 상처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욕심이지 않던가.
내가 언제는 여인이었던가? 감히 여인이길 바랐던 건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청년이 내게서 여인을 보았다고 한들, 지금 에반에게 여인으로 다가가고자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한심하고 또 추잡하구나. 마녀로 기억될, 아니, 이미 마녀임에도 여인이길 바라고 있었다니.
나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날이 밝아 새가 지저귈 때까지 에반에게 가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그날을 제외하곤.
* * *
그 뒤로도 에반은 밤마다 시중을 침실로 끌어들였다. 왜인지 같은 시중만을 고집했다. 그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듯 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처음처럼 가슴이 타들어가지는 않았다. 조금은 덤덤해졌다.
애초에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에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쫓고 그를 바라보고 그를 지키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는 시녀에게 마음을 주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아니, 마음을 주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조금 곤란했다. 에반은 어둠을 몰아내고 왕관을 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황제의 피를 이은 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에반과 시중의 사이를 막아설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조금 불안해할 뿐이었다. 얼른 이 사실을 네리아토나 요안이 알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들은 아마 막아설 터였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영광의 시대를 재현하려면 에반의 힘뿐 아니라 천자의 그릇이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좋은 것은 에반이 황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는 거였다.
에반은 시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을 제외하곤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전히 남는 시간마다 틈틈이 수련을 했고, 종종 네리아토가 틀어박혀 있는 황궁 도서관으로 가 책을 읽기도 했다.
에반은 원래부터 지식을 쌓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간 배우지 못했던 것이 한이라도 맺힌 듯 궁금한 것도 많았고, 더욱 배우고자 하는 욕심도 많았다.
그런 그가 많은 책이 있는 그 장소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엔 주술과 관련된 책도 굉장히 많았고, 그것은 주술사인 네리아토와 에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에반은 주술진이 나와 있는 책을 들고 중앙궁 복도를 돌아다니며 신성주술진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가 빛을 다루는 실력은 더욱 섬세해져만 갔다.
네리아토도 스스로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보단 에반의 실력을 키운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거의 신성주술과 관련된 책만 읽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신성주술보다는 그 힘을 사용하던 황궁주술사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에반의 뿌리를 찾고자 함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궁주술사에 대해선 거의 밝혀진 것이 없었고, 아마 개인적인 내용은 찾기가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그는 신성주술사가 황궁에 머물 당시를 기록한 책이라든가 그가 해왔던 일, 그가 만들어낸 주술 등을 꼼꼼히 살폈다. 어찌되었던 그의 주술 해석 능력은 대단할 정도였기에 틀림없이 에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에반이 나날이 성장해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웬일로 에반은 시중을 방에 들이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던 그였기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지금 에반의 나이는 기운이 한참 강할 때였기에 혹시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 이유는 모든 시녀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에반의 주위로 새하얀 빛이 몰려드나 싶더니 곧 모습을 감췄다. 나는 에반이 이동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가 곧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나는 그를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 요안에게 간 것은 아닐까. 에반이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에게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동해 가려는데 생소한 간질거림이 뺨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무심코 내 뺨에 손을 대려다 지금 내 상태가 그림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림자는 시각과 청각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느끼는 것은…….
“뭐야, 벌써 깼어?”
눈을 뜨자 절대 있어선 안 될 이가 말을 걸었다. 어두운 탑 내부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지닌 그는 다름 아닌 에반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멈춰선 하염없이 바라만 보자 그는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웃었다. 여전히 조금은 비틀린 미소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잠깐 시선을 내려 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마주하며 말했다.
“닉스, 나 왔어.”
그의 시선이 닿았던 곳이 간질간질했다. 아무래도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듯했다. 뺨을 통해 느껴지는 간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짐, 정반대의 느낌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에반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무척이나, 눈 주위가 시큰거릴 정도로 기쁜 일이었지만
용사가 마녀를 찾아온 것은 정말이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슬펐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것은 용사가 이곳에 찾아온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 동시에 마녀는 결국 그를 쫓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 * *
“닉스.”
한참을 멍하니 에반을 바라보던 나는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내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엄지만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생소한 감각은 내 몸속을 헤집었다.
내가 그의 손을 붙잡자 그는 조금 기쁜 눈빛으로 붙잡힌 손을 돌려 도리어 내 손을 꼭 감쌌다. 길고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손인데 의외로 마디가 굵고 전체적으로 커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서와, 라고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에반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친근한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많이 낮고 굵어져 내가 받는 느낌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천진난만함과 어미의 애정을 갈구하는 묘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꼭 연인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친근하고 다정했으며 어딘가 모르게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깃들어 있었다.
겉모습만큼이나 성숙해진 그의 목소리는 묵직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고, 그건 소년 때와 달리 내 자신이 한없이 약하고 작은 존재같다는 착각을 일게 했다. 지켜주고 보호해 주어야 했던 소년이 아니라,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싶게 만드는 청년은 정말이지 위험한 존재였다.
하마터면 그의 말대로 ‘어서 와’라고 말해 줄 뻔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에반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금 내 손을 붙잡았다.
“왜?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지?”
낮게 깔린 그 음성은 여전히 다정하고 나른했지만 묘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분명 내게 질문을 건네고는 있으나 의아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 내게 그러지 않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렇게 해주지 않는 내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에반과 꼭 닮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안도하고 말았다. 너무 달라져 버린 모습 때문에, 수많은 일과 싸움을 겪으며 성장한 그는 마녀에게 기댈 정도로 나약하던 소년이, 제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에 낯설게 느껴졌건만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가까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에반이라는 생각에 그간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녹아 없어진 듯 마음이 놓였다. 나는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에반.”
“말해, 닉스.”
“왜 자꾸 이곳에 오는 거지?”
에반은 의외의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러는 닉스는, 왜 자꾸 오지 말라고 하는 건데?”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에반은 용사가 아니더라도 마녀와 함께 있어봐야 좋을 일 하나 없다. 괴물로 몰리는 바람에 고통 받았던 시간을 잊은 걸까?
지금 세상은 잊고 있던 마녀를 떠올리며 불안에 떨고 있는데, 정말 내가 마녀가 아니라고 믿는 것은 잠시 미뤄놓고라도, 그런 존재의 곁에 찾아올 수가 있다니.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바닥만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에반은 상체를 조금 숙여 그런 내 얼굴을 마주보려 애썼다. 살짝 기울여진 얼굴 탓에 이마를 가리고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흘러내렸고, 그의 말갛고 순수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나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눈높이를 맞추며, 아니, 나보다 낮아져 내가 내려다보게끔 하며 말을 이었다.
“난 분명 닉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언제든지 만나러 올 수 있으니까, 난 그것만 바라고 열심히 노력했어. 근데 닉스는 왜, 밀어내기만 하는 거야?”
분명 소년 에반은 상처가 묻어나오는 것 같은 순진무구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에반은 조금 달랐다. 성장함에 따라 얼굴 골격이 약간 달라졌고 눈매도 좀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렇듯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어째서인지 그 시절의 얼굴이 고스란히 배어나왔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아름다우면서도 남자다워져 이전만큼 거리낌 없이 대할 수가 없었지만 차마 내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분위기만큼은 그대로인지라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에반은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에반.”
“물론 닉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닉스, 한 가지만 물을게.”
듣는 이를 안타깝게 만드는 말투와 눈빛이었지만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나를 설득하려는 듯, 혹은 내게 애원을 하려는 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히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더 유리한 입장인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나는 분명 에반을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니 마치 내가 많은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래.”
에반은 내 대답만을 기다렸다는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건넸다.
“아직도 내가 용사이길 바라? 세상을 구하길 바라?”
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내가 왜 그를 밀어내는지조차 잊을 뻔했다. 에반의 말과 행동이,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며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 모든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서 어린 시절 에반에게 그러했듯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에반이 왕관을 쓰길 바라고 그와 동시에 태양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죽여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혼자 남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오랜 시간동안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기억 속 청년이 나를 두고 죽었을 때, 얼마나 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지, 그럼에도 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피에 젖어 쓸쓸히 눈을 감던 청년을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죽지 못한다면, 내 저주는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데.
그러니 나는 에반의 검에 죽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것은 현재 내 삶의 의미요, 목표였다. 내가 지금의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음은, 그것이 끝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음은, 에반에게 향한 마음을 강제로 접지 않을 수 있음은 결국은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중요한 것은 ‘끝’이다.
그러나 문제는 에반이었다. 에반의 검에 죽는 것은 큰 기쁨이요, 행복이지만 그런 나를 죽여야 하는 에반은 아니었으니까.
상처는 내가 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에반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좋은데 그러지 못하는 건 에반이 아플까 봐, 더 많이 고통스러워할까 봐. 나는 그의 검에 죽으면 끝이지만 남아 있는 그가 더 많이 아프게 될까 봐.
단지 그것뿐인데. 나는 분명 그걸 알고 있기에 밀어내려는 건데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눈썹 때문에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에반이 없었다면 그대로 눈을 꽉 감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곧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나는 네가 이 세상을 구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보았던 미래에 한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꿈꿔왔고,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런데 에반, 이곳은 네게 독이 될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면 이곳에 오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너도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던 에반이 물었다.
“내게 바라는 것은 그게 끝이야? 용사가 되는 것?”
“그래.”
“내가 어떻게 해야 용사가 될 수 있는 건데? 닉스가 말하는 용사는 대체 뭔데?”
“황제의 곁에서 세상을 밝히는 것. 너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너는 그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희망이 될 거다.”
그 위협하는 존재란 바로 나를 뜻하는 거였지만, 그리고 에반이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거짓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마녀에 대해서 떠들 때, 마녀는 아니라고 외치던 에반의 모습이 생각났다. 작고 순진하던 소년이 이렇게나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녀의 탑이 그의 세상의 전부일 때는 몰라도 지금은 많은 것이 곁에 있었다. 왜 그 모든 것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그가 앞으로 얼마나 아플지, 진실을 알게 된 후 얼마나 아파하게 될지 추측할 수 있는 기준이 될 테니까.
에반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조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 됐어. 어쨌든 닉스가 내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라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가 있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죽음.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네 손으로 검을 꽂아 주는 것.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그의 말이, 그 굳건한 믿음이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웃는 듯, 찌푸리는 듯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닉스,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지.”
내게서 의아함을 읽은 건지 그는 뭘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날 밀어내지 마.”
언뜻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청년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많은 것이 달라졌음에도, 종종 이렇게 같은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곤 했다. 당시의 그 청년으로 착각하곤 했다. 분명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많은 것이 다른데.
“늘 여기 있어.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게.”
“에반.”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너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그가 나와 가까이 할수록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더욱 많이 아파할 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의 말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나의 기쁨을 위해 그의 고통을 키울 수는 없음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말에 따르고 싶었다.
“……네가 힘들어질 거다.”
“난 상관없어, 닉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어. 넌 그저 여기 있으면 돼,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다 해줄게. 나를 통해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게.”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겠지만 그가 허락하고 나니 내 마음의 짐도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어 버렸다.
“……그래.”
나의 기쁨을 우선시 해 용사에게 더욱 큰 고통을 안겨주려 하다니 어느새 나는 정말로 마녀가 되어 있었다.
* * *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반은 탑 내부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이것저것 살피느라 바빴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시선으로만 그를 쫓았다. 묘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탑 내부가 이렇게 낮고 좁았던가?
지금껏 한 번도 좁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은 밑도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늪으로 여겨지곤 했다. 분명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공허한 공간으로 보이곤 했다.
그러나 에반이 그곳에 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저 작고 평범한 탑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탑 내부를 청소하겠다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던 소년은 어느새 훌쩍 커 단 몇 걸음만으로 이곳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의 긴 다리가 몇 번 움직일 때마다 끝에서 끝으로 자리를 옮겼고, 단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천장에 자리를 잡은 거미줄을 발견해냈다.
소년을 보살피기 위해 가져다 두었던 가구들은 지금의 에반에겐 너무나 작아 사용할 수가 없을 듯했고, 오히려 탑을 비좁게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뒤로 돌거나 팔을 휘저을 때마다 그의 동선을 방해하는 가구 때문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의 무릎 위를 꽉 채우던 책도 한 손으로 가뿐하게 펼쳐 볼 수 있었다. 책이 원래 그토록 작았던 건지, 그게 아니면 에반의 손과 팔이 그토록 커진 건지 조금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어둠으로 만들어낸 안개가 신기하다며 방방 뛰던 소년은 탑이 너무 어둡다며 빛을 만들어내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나는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봐 왔는데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대체 무얼까. 왜 이리 낯설기만 할까.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흥미를 잃은 건지 내 앞으로 다시금 걸어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무릎에 팔을 걸친 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자세는 어린 시절과 전혀 변함이 없어 하마터면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껏 너무 많이 달라진 그가 낯설어 이상했는데 이런 사소한 것으로 내가 알던 그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다니.
나는 자신의 무릎을 지렛대 삼아 한쪽 팔을 덜렁거리는 에반을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이 꽤나 노골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제야 에반이 내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반은 끝끝내 내 상처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의도치 않게 치유를 해준 걸지도 모르고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흥미. 그래, 단순히 이런 얼굴이었구나, 하는 걸지도.
“닉스.”
에반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왜 이리 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소년의 얇고 연약한 목소리가 아니라 굵고 조금쯤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목소리는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늘 곁에서 지켜보며 들어왔는데 남이 아닌 내게 향한 그 목소리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닉스?”
“왜 그러지?”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부르는 통에 대답을 해주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답을 해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쳐다보지 않으면 억지로 시선을 맞추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나는 결국 그 고집을 이길 수가 없어 알려주거나 말해 주거나 혹은 해주거나 하는 것들이 많았다.
에반은 무릎 위에 팔을 걸친 뒤 그 위에 턱을 파묻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냈어?”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이기에 아무 대답도 못 하는데 그가 집요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나를 용사가 되라며 내보낸 이후, 이곳에서 혼자 뭐 하고 지냈어?”
“아무것도.”
에반은 의심스러운건지, 아니면 진실을 가늠해 보고자 하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나는 말을 조금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그제야 에반은 기억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맞아. 닉스는 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지금은 그 때와 조금 달라진 것도 같은데 여전히 아무것도 하질 않는구나.”
날 달라지게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죽어 있던 마녀를 깨운 게 자신이면서, 결국 움직이게 만든 것이 자신이면서.
에반은 그때는 그랬다며 중얼거리다가 시선만 돌려 날 바라보며 물었다.
“있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
궁금한 것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묻는 에반이기에, 이렇게 운을 떼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이것은 내게 중요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이 맞는지 에반은 다시금 말했다.
“꼭 대답해줬음 좋겠어.”
“……뭐지?”
그는 대답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무언지 알아차리자마자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무엇이 궁금한 걸까.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과 함께 그 물건에 깃들어 있는 소소한 추억들까지 모조리.
“이거…… 이게 대체 뭐야?”
에반이 손바닥 위에 놓인 그 물건에선 여전히 미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 안에 들어 있는 부적이 에반의 힘에 반응하기 때문일 터였다. 혹은 물건에 새겨진 주술진이 아직도 힘을 다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황궁 주술사……임을 나타내는 물건이다. 일종의 신분패지.”
각 귀족들은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이 있었으며, 그 문양이 새겨진 물건을 지니고 있거나 혹은 무기를 지니고 있곤 했다. 이 물건은 가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더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황궁 주술사라는 직위 자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에반은 조금 가라앉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깊이가 더해지자 그 자체만으로도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밝고 찬란하던 그의 인상이 사뭇 날카로웠다.
“이걸 왜 내게 줬는지는 알겠어.”
황궁 주술사는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지금껏 단 한 명 존재했으며,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한들, 또한 지금의 황제가 제 목숨과 가진 것에 욕심이 많아 남을 믿지 않는다고 한들, 황궁 주술사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힘이 되어줄지를 모를 리도 없었고, 쉽게 외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과 함께 잊힌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빛의 축복을 받은 에반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방패이자 자신의 혈통을 주장할 신분패가 될 수도 있었다.
황궁 주술사는 거의 모든 것이 비밀리에 부쳐진 인물이었고, 그의 혈육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물건은 세상이 어둠에 휩쓸릴 때 명을 달리한 황궁 주술사와 함께 묻혔으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자체만으로, 심지어 같은 빛을 사용하는 소년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었다.
에반은 아마 천자를 만났던 그날, 요안과 네리아토, 그리고 천자의 반응으로 눈치챘을 터였다. 이 물건이 가지는 의미를, 그리고 힘을.
“내가 궁금한 것은.”
에반의 시선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내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볼 듯이.
“닉스가 어떻게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 이거야.”
“…….”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닉스는 어딘가에 다녀올 때마다 신기하고 귀한 물건들을 한가득 가져오곤 했어. 그중에는 저 책도 있었지. 나는 이제 저 책을 읽을 수가 있어. 저건 황궁에도 없는, 굉장히 어렵고 자세한 신성 주술 책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고.”
그러니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에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반이 성장하면서 나와 있었던 일이 흐려지길 바랐는데 이토록 뚜렷하다니 속이 조금 답답해져왔다. 어린 시절의 일은 거의 기억 속에 묻히기 마련인데. 나 또한 정말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 기억들은 너무 흐려서 언제나 더듬어 봐야 하는데.
종이 위를 스치던 펜 소리,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나른한 햇살, 넓고 푹신한 안락의자. 그곳에서 나는 책 냄새가 좋았고, 그곳에 있는 사람이 좋았다. 나를 사랑해마지 않는 가족이 있어서 행복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잠이 들어버린 나의 옛 공간처럼, 떠오르는 나의 기억들도 깊이 묻어두려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너는.”
“…….”
“내가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던 마녀라는 사실을 또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게 무슨…….”
“황궁 주술사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나는 알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에반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 물건은 그곳에서 가져온 거란 말이야?”
“그래.”
에반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그 얼굴에서 옛 소년의 모습이 언뜻 드러났다. 나는 그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그 물건하고 연관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건가?”
정곡을 찔린 듯, 에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에 시선을 던지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마녀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 삼아 살아가는 존재지.”
그렇게 아름다웠던 사람들이, 이런 마녀 따위와 연관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마녀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가시왕관으로 변하게 될 용사의 왕관과 다를 것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