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용사의 각성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드디어 천자가 움직였다. 지금껏 그 어떤 일에도 꼼짝하지 않던 천자가 소문 하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를 찾아내어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천자가 움직였다는 소문이 돌자 절망만 가득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그저 소문일 뿐이던 그것들이 사실로 밝혀졌다는 듯 모두들 단단히 신뢰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마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그런 마녀를 죽일 수 있는 용사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믿자 그것은 대여섯 명으로 늘고, 또 그것은 열댓 명으로 늘었다. 단순히 소문에 멈추었던 그것은 어느새 사실로 변해, 모두들 힘을 합쳐 용사를 찾고 또 용사로 추정되는 이들을 지켰다.
그들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밝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자, 다른 이들 사이에서 유독 밝은 자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황제의 명을 받아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니는 자들 또한 밝고 찬란한 이들만 끌고 갔다.
일이 그렇게 되자 에반 역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단장님!”
에반이 소리를 지르듯 외치며 천막으로 들어서자, 요안은 눈썹을 가만히 찌푸리며 쳐다봤다.
“왜 그러지?”
“단장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요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에반은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되물었다.
“알고 계셨던 거군요. 그래서 그렇게…….”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금 자리에 누우려는데, 에반이 성큼성큼 다가가 침대에 두 팔을 올리고 상체를 숙였다. 이런 건방진 행동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요안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에반은 여느 수련생과 달랐고 특히 요안과의 관계는 직급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존재했다. 마치 정말 가족처럼 친밀하고 닮은 두 사람이었기에 아마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었다.
에반은 요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을 보고 다시금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빛을 찾고 있답니다. 천자께서요. 그 빛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저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반은 아예 대놓고 물어보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요안이 픽 웃으며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너는 어찌하고 싶은 건가?”
설마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 건지 에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저, 저는…….”
그런 에반을 바라보던 요안은 입술을 더욱 비틀어 웃으며 무언가를 휙 집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에반이 의문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요안은 턱짓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 그걸 뒤집어쓰고 다녀라.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너무 눈에 띄니까.”
에반은 손에 들린 것을 펼쳐서 살폈다. 옅은 색 천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냥 천이 아니라 머리에 둘러쓸 수 있도록 이리저리 꿰매어져 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 절반을 가릴 수 있도록 만든 장식용 천인 듯했다.
에반이 그 천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헤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요안이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너는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 거 없다. 이렇게 놀 시간 있으면 가서 수련이나 더 해라. 빛이라고? 빛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이 무슨 그런 자만을 하고 있나 모르겠군.”
에반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천막을 나섰다.
요안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그가 빛이라고 한들 지금의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는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요안이 그를 곁에 두고 지켜보고자 했던 거였다. 혹시라도 적이 찾아온다면 에반 혼자서는 턱도 없을 테니까.
아마 요안이 말하는 ‘때’라는 것은 마녀가 생각하는 ‘때’와는 조금 다르겠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에반을 거두고 보호하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에반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에반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꿀 건지, 그 계획이 뭔지는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은, 혹은 그 ‘때’가 오지 않는 한은 알 수 없을 터였다.
나도 천막을 나서 에반의 뒤를 쫓았다. 에반이 지나가자 주위에 몰려 있던 수련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슬쩍 다가가 소곤거리는 것을 엿들으니 그들도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에반이 제일 밝은데.”
“그치? 하얀색보다 더 밝은색은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해?”
“그리고 종종 전투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에반 주위가 조금 밝지 않냐? 내 착각이냐?”
“음,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넌 참 여유롭나 보다? 싸우다가 에반 쪽을 볼 수도 있고.”
“몰랐냐? 얘, 에반 엄청 좋아하잖아. 가끔 보면 에반 뚫어질까 봐 불안하다니까?”
“야,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반을 뚫어져라 본다는 것을 들킨 애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러자 소년들은 그런 얼굴을 보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넌 뭐 다르냐? 너도 에반은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며!”
“내가 언제!”
“그리고 너도 에반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야…… 그야 에반은 강하고 멋있으니까 그렇지! 솔직히 에반 녀석이 검 휘두르는 거 보고 반하지 않을 녀석이 어디 있어?”
“그건 그래. 뭔가 신기하달까? 아니, 신비롭달까? 분명 같은 검이고 같은 움직임인데 묘하게 다르단 말이지. 꼭 빛나는 것처럼.”
“거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니까? 역시 에반은 천자께서 찾으시는 용사? 빛? 뭐 그런 건가?”
수련생들은 다시금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대화를 하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소년이나 청년이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리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반이 머물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그는 어느새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빛을 느끼고 있었다. 수련장과 달리 이곳은 임시로 세워둔 천막 따위가 전부인 터라 수련을 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것은 토벌을 마치고 요안의 사저로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그럴 터였다.
나는 그의 주위로 부서져 내리는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작은 빛 무리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자태를 뽐냈다.
그것들은 에반의 밝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가 코를 타고 미끄러지기도 하고, 길고 커다란 손가락 위에 머물렀다가 또 풍성한 속눈썹 위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그의 밝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나 싶더니 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했다. 두어 번 깜빡거리자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조금 보이던 눈동자는 어느새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그 눈동자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던 수련생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아름답고 신비로운 남자였으니까.
“……언제쯤.”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에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랐지만 그는 그저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언제쯤 내가 원하는 대로 될까?”
빛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 내심 속상한 모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제자리에서 맴돌았으니 답답할 법도 했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나는 에반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것밖엔 없었다.
* * *
요안과 단원들, 수련생들은 토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괴물이 침략을 한 거고 그들은 그저 막아설 뿐이지만, 잘 싸우다가도 금세 도망쳐 버리는 괴물들 탓에 이리저리 쫓아가다 보면 거의 토벌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들이 승리를 거머쥘수록 사기는 높아져 갔고, 영지민들 또한 더욱 힘을 내어 괴물 사냥에 열을 올렸다.
에반도 그 틈에서 열심히 싸웠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요안은 그의 곁이 아닌 선두에서 싸운다는 것과 에반의 밝은 머리카락과 얼굴의 절반이 옅은 천으로 가려졌다는 점이었다.
단원들과 수련생은 에반의 본래 색을 이미 알고 있지만 눈치껏 입을 다물었고, 계속 쫓아다니며 싸우는 소수의 영지민들을 제외하곤 에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였기에 큰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이 설마 바로 앞에 있는 수련생일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어느새 빛이니 용사니 하는 것은 정말 한눈에 보기에도 다르고 확 와 닿는 것으로 변질되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사를 찾는 천자 무리나 마녀 무리나 모조리 혼란을 겪었다. 애꿎은 사람만 끌고 가고 죽이다 보니 조금 자제하는지, 아니면 신중해진 건지 그 수가 줄기도 했다.
중앙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중에는 에반만큼은 아니어도 밝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널려 있었다.
에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적어도 외곽에서 괴물을 상대로 싸우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까.
요안이 선두로 빠지자 에반은 자신의 전투 방식대로 싸웠다. 하지만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꼭 크든 작든 다쳤으니까.
요안의 말대로 에반은 조금 여유를 부리는 듯했다. 일부러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위험에 처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해도 힘들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때마다 내가 조금씩 도와주었다. 그래도 꼭 에반의 몸에는 상처가 한두 개씩 생겼다. 그는 그것이 꽤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또 안타까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마을 언저리까지 쳐들어온 괴물을 소탕하던 중이었다. 괴물과 싸우는 자들의 수가 조금 많았다.
이곳이 무너지면 중앙까지 쳐들어오는 길이 무척이나 한산했기에 징병의 수를 줄이는 대신 토벌로 돌린 상태였고, 그들도 자신의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에 나서서 싸우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평상시보다 사람이 많아지자 단원들의 행동에 제약이 걸렸다. 원래 같았으면 해치운 뒤 바로 달려들어 또 해치우고 하는 게 되었을 텐데, 길목을 막아서고 있거나 행동반경 안에 들어서 공격을 멈칫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싸우거나 혹은 영지민들을 도와 같이 처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단원들은 몰라도 수련생들은 괴물 하나에 여럿이 달려들어 싸우곤 했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에반은 멀찍이 떨어져 싸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수련생에 불과했지만, 정식으로 단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뿐이지 실력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는 실수가 잦은 그가 걱정되어 그 곁을 머물며 조금씩 도와주던 참이었다.
괴물 한 마리를 상대하고 있던 에반의 등 뒤로 또 다른 괴물이 다가섰다. 괴물의 팔과 다리에 자잘한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른 사람이 상대하고 있던 것 같은데 왜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반은 이미 괴물이 다가선 것을 눈치챈 듯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등 뒤를 살피려 애썼다. 하지만 앞에 있는 괴물이 그의 검을 쥔 채 놓아주질 않아 쉬이 몸을 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결국 검을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 두 개를 꺼내 쥔 뒤 달려들던 또 다른 괴물을 상대했다.
그는 길고 단단한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여 괴물을 발로 차고 검을 꽂은 다음 다시 뒤로 빠지는 식으로 괴물 두 마리를 상대했다. 당장 큰 상처는 낼 수 없지만 기회를 엿보다가 괴물에게 빼앗긴 검을 되찾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싸울 생각인 듯했다.
나 또한 괴물이 에반의 검을 버리기만을 노리며 계속 지켜보았다. 괴물이 검을 버리는 즉시 조심스레 에반의 근처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괴물은 계속 검을 놓지 않았다. 의아함이 커져갈 때였다.
에반이 다른 괴물에게 관심이 쏠린 그 틈을 타 그의 등 뒤로 검을 던졌다. 괴물의 괴력으로 던져진 그 검은 무척 빨랐고, 에반이 눈치채고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림자를 날려 그 검을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안에 잡아두려 애썼지만 그 속도와 힘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검은 내 그림자를 찢어발기고 등 뒤에 서 있던 에반에게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크헉! 컥!”
눈을 뜨자 새카만 어둠이 보였다. 마녀의 탑이었다. 나는 아릿하게 치미는 고통에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후드득 떨어진 핏물은 내 몸과 옷을 적셨다.
그림자가 산산조각이 났다. 나와 연결되어 있던 어둠이 잘게 흩어져 강제로 거꾸로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의 몸속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내가 미처 다스릴 새도 없이 나의 몸을 휘젓는 바람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 핏물이 고이고, 결국 울컥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였다. 괴롭고 아팠다. 숨이 가빠오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지만 나는 죽지 못하는 몸이니 아마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릴 터였다. 그건 상관이 없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내가 지켜보지 못하는 에반이었다. 내가 모조리 흡수하지 못했으니 에반에게도 큰 상처를 입혔을 터였다. 괴물 틈에 있던 그가 그런 상처를 입는다면 큰 위협이 될 텐데…….
어서 가서 그를 지켜야 하는데…….
“……스!”
점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에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닉스!”
기억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에반의 목소리가 나의 간절한 바람을 듣고 떠오른 모양이었다.
“……에반…….”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나는 이렇게나마 에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기뻐하며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 *
꿈을 꿨다.
에반이 내 앞에 있었다. 에반은 다시 어려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앳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꼭 껴안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오랜 만에 보는 에반이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기뻤다. 그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나는 혹시라도 냄새가 날까 싶어 서둘러 떨어졌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은 떼지 못했다. 그걸 떼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불안감이 나를 뒤엎었다.
그래서 그 상태로 가만히 바라보자 소년 에반은 쑥스러운 듯 눈가가 붉어졌고, 그보다 더욱 붉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웃는 듯 찌푸리는 듯 어설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에반은 자그마한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자그마한 손가락 끝에 내 눈물이 맺혔다.
나는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에반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가느다랗게 휘는 눈과 통통하게 부푸는 볼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에반은 그게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주위가 밝아졌다. 깜짝 놀라 둘러보니 우리 둘은 새하얀 눈밭에 와 있었다. 에반의 머리카락을 꼭 닮은, 하얗고 깨끗하며 예쁜 눈이 가득했다.
에반은 그 눈을 보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달려가려 했다. 나는 서둘러 그 손을 붙잡았다. 의아한 눈빛이 내게 닿았지만 그래도 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손을 놓으면 그대로 영영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린 에반은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에반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우리 둘은 손을 잡은 채 눈밭을 뛰어놀았다. 눈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해서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내게 이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큰 행복으로 와 닿았다. 에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축복이었다. 저주받은 마녀의 삶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따뜻한 눈이었다. 그것들은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내 얼굴 여기저기를, 이마, 뺨, 눈꺼풀, 코 끝, 입가 등 곳곳에 닿아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나누어 준 뒤 떨어졌다.
그것을 손바닥으로 받자 쿵쿵거리며 몸집을 늘렸다 줄였다 반복했다. 그러자 그 소리는 점점 커져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온 세상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나는 세상을 껴안을 듯이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리가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 피부로, 온몸으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심장 소리 같았다.
“……닉스?”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눈을 뜨고 말았다. 그러곤 속상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혹시라도 다시 잠들면 또 꿀까 싶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들었던, 심장 소리 같은 소리가 내 피부를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뭔가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내 뺨에 닿았다.
“닉스! 일어났어?”
내 뺨에 닿은 것이 슬며시 힘을 주어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넋을 잃었다.
에반이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가까웠다. 에반은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닉스!”
이건 꿈인가?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어린 에반과 함께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다. 아니, 에반은 성장한 게 맞았다. 눈앞에 있는 에반이 지금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리 생각했다.
뺨에 닿아 있던 그의 손이 내 뒷머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힘주어 끌어안았다. 내 이마와 뺨에 뜨겁고 단단한 그의 몸이 닿았다. 그리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것이 내 심장 소리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닉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뭐가?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나는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에반의 목소리를 듣다가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에반이 위험에 처했었다. 내가 사과를 받을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지금은? 싸움은 끝났나? 에반은 무사한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의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꿈에서 깰 수가 없다. 깨기는커녕 나를 끌어안고 있는 에반의 체온과 숨결, 목소리 등이 점점 뚜렷해지기만 한다.
나는 무심코 밀어내기 위해 그의 몸에 손바닥을 대었다가 예전과 달리 단단하고 넓은 몸을 느끼곤 그대로 멈추었다. 손바닥 아래로 그의 몸을 감추고 있는 얇은 옷이, 그리고 그 아래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몸에 닿아 있는 내 뺨과 귀로 심장 소리도 계속 들렸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몸속에서도 들려서 먼 곳에서 말하는 듯, 동굴 속에서 말하는 듯 묵직하게 울렸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겨우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에반?”
내가 에반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을 꼭 붙잡아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에반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척 가까운 곳에서, 걱정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소년 에반 때와 다를 것 없는 눈동자였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매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선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깊은 상처가 묻어나던 눈매는 사뭇 날카로워졌고, 작고 올망졸망하던 코는 길게 뻗어 있었다. 잔뜩 찌푸린 눈썹은 굵고 선명해졌으며 우물거리던 입은 크고 야무져졌다. 그리고 동글동글 사랑스럽던 얼굴은 남자다워졌다.
지금껏 에반이 성장하는 모습을 거의 하루도 놓치지 않고 봐왔지만 그것은 늘 그림자의 눈이었을 뿐, 이렇게 선명하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듯 선명한 색상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하얗고 붉은, 이리도 강렬한 색은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태양처럼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감히 내가 우러러볼 수 없기에.
“닉스? 닉스, 괜찮아? 괜찮은 거야?”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에반이 이곳에 있을 수가 있나? 어떻게 이게 꿈이 아닐 수가 있나? 나는 지금 또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또 다른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가슴팍을 짚고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누워 있었다. 내 행동에 놀란 건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아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제야 지금껏 내가 누워 있던 것이 에반의 팔 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삭막한 탑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에반과 내가 있는 곳만이 어울리지 않게 이것저것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린 에반을 보살피기 위해 이것저것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탑 내부가 묘하게 밝아진 것 같다 했더니 커튼이 걷어져 있었다. 스며들어 온 빛이 나와 에반에게 닿아 있었다. 따뜻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하며 밝은 탑은 오랜만이었다. 에반이 떠난 후로 처음이었다.
역시 에반이 있기 때문인가? 마녀의 탑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에반뿐이었다.
“닉스, 괜찮은 거야? 괜찮은 것 맞지?”
내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자, 에반이 몸을 일으켜 나를 살폈다. 밝은 빛이 에반에게 닿아 이리저리 부서져 내리자 눈부심이 일었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빛나고, 붉은 눈동자는 하늘 위에 떠있는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살짝 찌푸린 눈매는 오롯이 걱정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벌어질 때마다 마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때마다 내 가슴은 쿵쿵 내려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다 대자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의 손이, 자그마해 내 손 안에 들어차던 그 손이 내 얼굴을 가릴 만큼 커져 있었다.
그림자의 눈으로, 흑백 세상으로, 촉각과 미각, 후각 등을 잃어버린 그 몸으로 바라봤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렸던 얼굴이건만 창문 틈새로 스며든 빛이 닿자 하얗게 빛나 상아를 깎아 만든 인형처럼 느껴졌다.
순간 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끔찍할 정도로 더럽고 징그러울 나의 얼굴이. 이렇게 밝은 곳에서, 이토록 가깝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얼굴이.
나는 서둘러 그의 손을 쳐낸 뒤 몸을 돌렸다.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이것은 현실인 걸까, 꿈인 걸까. 깨어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그는 내가 쳐낸 자신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만큼 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청년이 떠올랐다. 에반은 어느새 그만큼 자라나 마녀를 압박했다. 그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썼지만, 그는 그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남은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쥐어 올렸다. 나는 하염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닉스, 나 좀 봐. 이제야 왔는데, 이렇게나 오랜만인데…….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보고 싶었는데.
기억 속 청년의 목소리가 겹쳐져 흠칫 놀랐지만 내 앞에 있는 에반의 말은 내게 묻는 것으로 끝마쳤다. 기억 속 청년과 다시 자라난 에반은 많은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늘 이렇게 혼란스럽곤 했다. 잊을 수 없었다.
“응?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다, 무척이나. 늘 보고 있음에도 보고 싶어 했다. 이렇게 내 곁에 두고 봤으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어 그림자의 눈으로나마 볼 수 있음을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것은 꿈인가? 너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에반은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나 싶더니 곧 픽 웃음을 터트렸다. 찌푸리는 듯, 웃는 듯한 그 미소는 그대로였다. 나는 힐끔 쳐다보다가 마주치는 시선에 황급히 바닥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닉스. 이건 꿈이 아니야.”
그의 대답을 믿을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있지, 나 이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어. 이제야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주위로 새하얀 빛이 몽글몽글 모여들었다.
나는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얀 나비처럼, 혹은 새하얀 솜털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던 빛 무리는 에반의 몸을 지나쳐 얼굴로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그 끝에 빙긋 웃는 에반의 얼굴이 있었다.
에반은 내가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한 손으로 쥐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며 그대로 힘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늦게 와서. 조금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미안하다는 것이 그 뜻이었나?
에반은 내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음에도 계속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의 체온과 심장 소리, 또 그 주위로 퍼져 나오는 따스한 빛을 가만히 느끼다가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내게 왔다.
왜! 어째서!
나는 그를 팍 밀어냈다.
“가.”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에반이 무어라 말할 기세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돌아가.”
에반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 틈에서 마녀를 잊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 지금껏 그리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랬는데,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는 건가?
나는 불안해짐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나의 계획에는 없었다.
에반이 이럴수록 마녀의 고통은 커져 간다. 마녀의 죄책감의 무게가 더해져 간다. 마녀 때문에 아플 용사에게 미안해지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워진다.
또한 마녀의 미래가 불안해진다. 마녀의 끝이, 세상의 희망이 불안정해진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그야말로 잔인하지만, 길고 길었던 나의 저주를 끝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삶 내내 먼저 떠난 널 그리워하느니 차라리 마녀가 되리.
“돌아가.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
그러니 에반, 제발 마녀를 잊고 살아가.
* * *
에반이 없는 탑은 공허했다. 이것이 당연하건만 단순히 에반이 잠시 머물렀단 이유만으로 생소해지고 말았다.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있던 나는 내 발 끝에 닿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마치 에반 같았다. 밀어낼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가지고 싶었고 언제나 갈망했다. 가져선 안 되고 가질 수 없음에도.
나는 몸을 일으켜 커튼을 쳤다. 그러자 탑 안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나는 그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에반의 손이 닿았던 곳이, 에반의 목소리를 들었던 귀가, 에반의 찬란한 색상을 담았던 눈이 모조리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에반은 돌아가라고만 하는 나를 설득하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한 듯 탑을 나섰다. 소년 때처럼 계단을 내려가 가시넝쿨을 헤치고 괴물을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니라 새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그는 빛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그 힘을 이용해 내게 온 모양이었다. 내가 그러하듯.
한 번 사용할 수 있게 된 힘은 앞으로 더욱 능숙해지면 능숙해졌지 결코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는 건 에반이 이곳에 오는 일을 내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만일 내가 이곳에 없을 때 나타나거나 하면 마녀의 계획을 너무 일찍 눈치챌 가능성이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니 남들의 시선이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오지 마.”
돌아가기 전 그의 눈빛은 틀림없이 상처가 깃들여 있었다. 고작 이런 것에. 그가 앞으로 받을 상처는 더욱 클진대. 나를 잊을수록, 내게서 멀어질수록, 나와의 일들이 꿈처럼 흐려질수록 그가 받을 상처는 적을 건데.
에반은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것이 애석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그럴수록 나 또한 괴롭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마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이곳에 온 걸까. 에반은 내게 칭찬받기를 원한 걸까? 내게서 배운 힘을 이렇게나 키웠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탑에 혼자 있을 내가 가여웠나?
그는 너무나 여리고 순수했다. 마녀를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겼다. 그는 어쩌면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혼자 있게 될 내가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만일 에반이 마녀의 숲에, 그것도 마녀의 탑에 왔다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된다면……. 그것이 마녀가 존재함을 알고 있는 황제가 된다면……. 그리고 마녀를 믿고 따르는 움브라의 신자들이 알게 된다면…….
끔찍했다. 너무나 끔찍해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촛불 하나 앞에 앉아 있던 루아단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니, 닉스 님.”
그는 잠시 쉬고 있었던 모양인지 안경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상태였기에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눈을 흐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손으로는 연신 탁자 위를 더듬고 있었지만,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더 길게 끌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안경을 쓸 틈도 주지 않은 채 다급히 물었다.
“이것은 분명 꿈이 아니겠지요? 지금은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닉스 님, 혹시 또 꿈을 꾸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 지금이 현실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루아단은 나의 꿈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에게 내가 본 미래를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번 실패했던 과거와 그걸 되돌려 지금의 상황을 있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다가 곧 조심스레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진정하십시오.”
나는 그 따뜻하고도 서늘한 눈동자에 조금씩 진정됨을 느꼈다. 이전에는 꿈과 현실을 구별할 길이 없어 한참을 헤매곤 했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 그것은 분명 큰 힘이 되었다. 내게 루아단은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자 미안한 사람이었다.
“루아단, 에반이, 용사가 내게 찾아왔습니다.”
루아단은 무척 놀란 듯 그답지 않게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기에 도리어 내가 놀라 되물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러자 루아단이 조금 놀랍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닉스 님께서 이 일에 대해 모르시다니,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괴물에게서 공격당해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루아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때였으면 괴물들을 돌려보내도록 신호를 주었을 내가 이번에는 자리를 비웠으니 조금 당황했을 법도 했다.
“그랬군요. 지금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에 대해 정리하던 참이었습니다. 이 일이 닉스 님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혹시 내가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이 조금 길었던 건가?
나는 에반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그림자가 산산조각 난 후 정신을 잃었고, 그 뒤의 상황은 알 길이 없었다.
보통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다시 정신을 차리는 데 조금 시일이 걸리곤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럴지 몰랐다. 게다가 정신을 차린 후 몸 상태가 너무나 멀쩡했다. 다친 것은 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불안함이 발끝까지 내달렸다.
나의 조급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다시금 눈을 잔뜩 찌푸리며 초점을 잡으려 애쓰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있던 괴물은 전멸했습니다. 하마터면 저도 그 속에 휘말릴 뻔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무리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고 한들, 그 많은 괴물을 모조리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나의 의문은 이어진 루아단의 말에 모조리 사그라졌다.
“빛이었습니다. 닉스 님께서 말씀하셨던 빛이 그곳을 뒤덮었습니다. 그 빛은 분명 용사 에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으며 순식간에 괴물을 전멸시키고 사라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에반 역시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빛이라니.
나는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에반이 빛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와 마녀가 용사를 찾고 있는 이 와중에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렇게 정확히 힘을 내보이게 된다면…….
“에, 에반은 아마 지금쯤 다시 그리로 갔을 겁니다. 에반에게 가 봐야겠습니다.”
“아뇨, 그곳으로 돌아갔다면 그리 급하게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독사처럼 번들거리던 그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금세라도 입을 쩍 벌리며 에반을 물어뜯을 것만 같던 그 시선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에반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요?”
“기사단장 요안이 이상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반이 빛과 함께 사라지자마자 주위를 정리하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 근처에 갈 수조차 없더군요.”
그게 무엇인지 살필 필요성은 있으나 루아단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급해하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루아단이 들어설 수 없다면 다른 마녀들 또한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테니.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빛이 있는 곳을 대대적으로 밝힌 셈이니 아마 천자가 움직일 터였다. 에반을 숨길 것인지, 천자에게 보낼 것인지는 요안의 손에 달렸다. 그의 계획을 알 수 없으니 어찌 될지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빨리 밝혀져 조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닉스 님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마 괜찮을 겁니다.”
만일 에반이 황궁에 들어서게 된다고 하더라도 큰 위험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반길 일이었다.
아직 마녀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는 모험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마녀의 숲이나 탑으로 찾아오지는 않을 터.
조금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며 나의 계획을 가늠해 보고 직접 움직이는 대신 찾아오도록 유인할 가능성이 컸다. 덫을 가득 친 채. 그곳은 황제에겐 무척 안전한 곳이요, 마녀에겐 무척이나 위험한 장소이므로.
무엇보다 에반이 이제 막 각성하여 서툴 게 뻔했다. 황제는 그런 에반을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 못할 것이며, 확실하지 않은 자를 마녀와 대적하게 하는 쪽보다 우선 자신을 치료하고 주위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도록 만들 가능성이 컸다.
에반이 무사히 황제의 품 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야 마녀의 계획엔 차질이 생기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용사를 찾도록 명한 것 자체가 황제가 용사의 존재를 알게 되어 곁에 두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으니. 갑자기 나타난 빛을 의심하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자 루아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그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무래도 괜찮으냐는 걱정일 듯했다. 나는 자꾸 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미안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치웠다. 앞에 있던 촛불이 내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리며 빛 번짐을 만들어냈다.
“어찌 되었든 닉스 님의 말씀이 무언지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둠을 몰아낼 힘을 지녔더군요. 닉스 님께서도 보셨으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빛이 퍼지는 순간, 모든 괴물이 가루로 변해 흩날렸으니까요. 그리고 아파하던 자들 또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 생소하고도 대단한 일을 찬양했습니다.”
나는 이미 본 적이 있기에 그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 천자에게 큰 힘이 될 것이요, 마녀에게 큰 위협이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 앞에 앉은 루아단은 드디어 안경을 찾아냈다. 그는 그 옆에 둔 천도 더듬어 손에 쥐더니, 안경을 조금 닦아낸 뒤 얼굴에 쓰며 말했다.
“근데 어째서 닉스 님을 찾아갔을까요? 사실 갑자기 사라져 저 역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그곳에 찾아갔을 줄은 몰랐네요. 일단 전 조금 더 기다려 보다가 닉스 님께 가볼 생각이었……습니다…….”
나 역시 그것이 궁금했다. 에반은 어째서 마녀의 탑에 온 것일까? 그것도 그리 큰일을 저지르고는.
게다가 하필 그때 힘을 각성하게 된 것도 의아했다. 혹시 내가 사라진 후 큰 위험에 처해 자신도 모르게 힘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보통 위급한 순간에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사용하게 되곤 하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껏 내 존재가 에반의 각성을 막아서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때 에반이 빛을 사용했더라면 괴물이 던진 검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의아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루아단의 말을 듣자니 그 이후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모양인데, 내 몸이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가 있었던가?
나는 무심코 손바닥으로 내 가슴 부근을 지긋하게 누르다가 루아단의 시선을 깨닫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안경을 쓴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서늘하면서도 무미건조한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넋을 잃은 듯 멍했으며 그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번져 있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을 제외하고 처음 보는 거였기에 나 또한 당혹스러워져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그, 그게…….”
루아단은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약간 숙이는 바람에 안경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살짝 걸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정신을 추스르는 듯 그 자세를 고집하더니 곧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닉스 님, 혹시 알아차리지 못하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루아단은 검지로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답했다.
“닉스 님의 상처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나는 무심코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내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온통 울퉁불퉁하고 만지기만 해도 그 징그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피부가 매끈거리는 감촉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뺨을 쓸어내렸다. 손이 닿자마자 그대로 미끄러지는 기분이었다.
이마도, 코도, 말라비틀어져 흉측한 상처만이 가득하던 입술도, 그리고 목까지. 서둘러 옷을 걷어보니 드러나는 팔도 하얗고 매끄러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만져지는 모든 감촉이 이전과 달랐다.
“빛에는 치유 능력이 있으니……. 역시 용사입니까?”
루아단의 질문에 나는 일어나기 전에 꿨던 꿈을 기억해 냈다. 새하얀 세상이었다. 따뜻한 빛이 나를 감쌌다. 온통 눈이 내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무척 따뜻했으며 부드러웠다. 그것은 내 얼굴을, 이마를, 코를, 뺨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기억 속 청년은 끔찍할 정도로 징그러운 마녀의 속에서 여인을 발견해 내더니, 지금의 에반은, 용사는 그 여인을 꺼내주었다. 그러고 말았다.
“……에반.”
내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한 이름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천자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천자의 명을 받은 이들이 에반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달리 한 번에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어둠들은 시시때때로 에반을 노렸지만 루아단의 말대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요안이 꺼내 들었다는 그 물건 때문이었다.
그 물건이 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내가 에반에게 주었던 것이니까. 에반과 요안의 톱니바퀴를 맞물리게 만들 장치로,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안전장치 겸으로.
요안을 비롯한 기사단을 처음 만나던 그날, 마녀의 숲을 뒤덮으며 괴물들을 물리쳤던 그 물건은 두 번 다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건만 왜인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요안이 그 물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그 물건에 새겨진 문양이나 상징적인 것만을 알아보고 에반을 곁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에반이 각성해 결국 용사임이 드러날 때를 대비해 그 물건으로 준비를 해두었다.
마녀가 에반의 힘에 반응하는 부적을 넣어두었던 것처럼, 어둠이 다가올 수 없는 일종의 보호막이 생성되는 부적을 만들어놓고 그 물건에 깃든 힘을 이용해 발현시킨 모양이었다.
아마 그 부적은 주술사 네리아토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요안이 그 물건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녀라는 존재가 황제가 만들어낸 희생자라는 것을 꿰뚫어 보던 그는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통찰력이 뛰어났으며, 또한 잊힌 지 오래인 과거에 대한 지식이 대단한 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알고자 한다고 해서 쉬이 알 수 있는 것들도 아니었기에 어쩌면 단순한 기사단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물건은 대체…….”
에반은 자신이 사용하는 힘과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물건이 새삼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바빴다. 마녀에게 쫓겨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상처받은 눈을 감추지 못하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 도리어 내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에반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상처를 받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아야만 했다.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자제하려 애쓰면서도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하니 참 한심한 노릇이었다.
요안은 에반이 의아해하는 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그저 짐을 챙기라고 명할 뿐이었다. 에반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 질문을 무심코 내뱉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사냥은 끝났다.”
에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많이 놀란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요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사냥이 끝났다니요? 아직 갈 길이 멀잖습니까?”
“사냥꾼이 사냥감으로 변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다니, 그렇게 둔해서야 어디 가서 사냥꾼이었다고 말할 수나 있겠나?”
“예?”
곧 에반은 요안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픽 웃으며 말했다.
“뭐가 걱정이십니까? 이제 저도 빛을 움직일 수가 있는데. 이 힘이라면 쳐들어오는 괴물도 모조리 몰살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요안의 얼굴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노리는 사냥꾼들은 어쩌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자들일지 모른다. 그리고…….”
요안은 의아함이 가득 담긴 에반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에반은 설명을 더 원하는 듯, 고개를 휙 돌리는 요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그는 짐을 정리하며 혼잣말만 내뱉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기는 하나 차차 준비해 나가면 될 일이니……. 아무래도 한동안 무척 바쁘게 생겼군.”
나 또한 한동안 바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전쟁이 끊이질 않아 그 상황을 지켜보며 조율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이제 에반뿐 아니라 요안의 뒤도 쫓아다녀야 할 테니까.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아봐야만 했다.
요안은 마녀와 같은 생각인가? 아니면 방해를 할 생각인가?
만일 방해를 할 작정이라면 나는 어찌해야만 하는 것인가?
* * *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다. 요안은 순순히 그들의 마차에 올라탔다. 주술사 네리아토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어리둥절함과 불안한 기색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에반도 올라탔다.
단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니 남은 단원들과 수련생들은 그동안 대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이 배웅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차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요안, 에반, 네리아토와 함께 황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어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물건은 에반의 손에 붙들려 있었고, 그 힘이 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어둠은 이 근방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문제는 황궁에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나는 황제가 있는 곳에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접근할 수는 있으나 한 번 들어서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황제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곳이라면 나를 비롯해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으니까.
그래도 혼란스러운 틈을 타 황궁에 들어간 움브라의 신자 루엘라를 통해 천궁 언저리의 길이나마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천궁이라고 해도 오랜 시간이 흐르며 그곳에 새겨져 있던 주술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황제는 가장 강한 곳에 있으며, 힘이 깃들여 있는 물건은 모조리 곁에 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즉,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루엘라가 다가설 수 있는 곳은 그 영향권 밖이라는 뜻이었다. 그곳은 나 역시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루엘라는 결국 황제가 있는 장소를 추측해 낼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을 표시하며 좁혀간다면 그의 위치가 드러나고 말 테니까.
그러니 나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내가 들어서지 못하는 그곳에서 황제와 요안, 네리아토, 그리고 에반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눌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그것은 에반이 천궁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해졌다.
나는 초조하게 에반을 기다리다가 한참 뒤에야 천궁을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에 따라붙었다. 왜인지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반도, 요안도. 그리고 네리아토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복잡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마차에 올라탔다.
혹시 황제가 에반을 믿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그러나 마차는 성 밖으로 나가는 대신 천궁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궁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에반과 네리아토만 내렸다. 요안을 태운 마차는 다시금 성 밖을 향해 출발하고 남은 두 사람은 안내를 받아 궁 안에 들어섰다.
그곳엔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듯 공허했다. 그제야 나는 기억해 냈다. 이 크고 화려한 황궁엔 예전과 달리 많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제 목숨을 귀히 여겨 다른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황제가 자신의 자식의 목숨 또한 제 손으로 취했음을.
그래서 천자는 천궁에만 틀어박혔으며, 돼지우리와 다름없는 중앙궁을 제외하곤 거의 비어 있음을 상기해 냈다.
중앙궁을 중심으로 수없이 늘어진 크고 작은 궁 어딘가에는 황녀들도 살고 있을 터였지만, 그것은 아마 헤레이나 공주처럼 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거나 나이를 먹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보통은 이렇게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은 궁을 내버리고 중앙에서 머물며 시끌벅적함을 느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먹고 마시며 즐기던 귀족들이 전쟁 때문에 바빠 황궁에는 찾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다시금 그들이 찾아오는 날엔 반란군을 이끌고 올지도 몰랐다. 차라리 이대로 오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에반과 네리아토, 그리고 두 사람을 안내하는 자의 발걸음만 울리길 한참, 그 공허함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시중을 들 수 있도록 시녀들 또한 보내주신다 했으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 웬만한 것들은 시녀들이 챙겨 올 겁니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몸을 돌려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되도록 천궁 근처에는 다가가지 마십시오. 목숨을 귀히 여기신다면 말이지요. 중앙궁에 볼일이 있으시다면 시녀에게 안내를 부탁하시면 될 겁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에반이 생각났다는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이곳에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그는 예의 바른 듯, 건방진 듯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천자께서는 그저 이곳에 모셔다 드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천자께서 무어라 말씀하시기 전까진 이곳에 있으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을 하시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허락된 장소인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되고, 또 어떤 것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황궁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여태껏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그는 종종걸음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그제야 조금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천자는 제 목숨을 귀히 여긴다. 제 자식도 믿지 못할 만큼.
그러니 난데없이 나타난 용사를 믿고 등 뒤를 맡길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누구인지 알고, 또 자신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용사만이 마녀를, 어둠을 없앨 수 있다는 소문에 곁에 두기는 하나 아마 조금 더 지켜볼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오히려 나는 설마 황궁 내에 머물게 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이런 자들이었다. 제아무리 용사고, 빛이어도 자신에게 이득이 아닌 손해를 끼치는 자라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처치해 버릴 그런 자들이었다. 만일 그런 소문이 없었더라면 에반의 힘을 큰 위협으로 여기고 더 성장하기 전에 그대로 파묻어 버렸을 거였다.
황제의 곁으로 데리고 온 요안은 확실히 똑똑한 자였다. 그는 자신이 울타리임을 알고 있었으며, 황제가 더 큰 울타리의 역할을 할 것임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에반을 일단 살려 두겠지만, 만일 다른 귀족이 에반을 눈독 들이거나 불안요소로 여기면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에반을 사냥하려 들 사람은 마녀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뭡니까?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안내자가 모습을 감추고 한동안 침묵이 가라앉아 있던 궁 내부에 에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내가 주었던 물건을 네리아토에게 내밀며 물었다.
“너는 그 물건이 뭔지도 모르고 지니고 있었던 게냐? 그렇다면 그 물건은 네 것이 아닌 게냐?”
잠시 움찔거렸던 에반은 제 실수를 깨달은 모양인지 입술을 깨물 듯이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제 것이 맞습니다. 제게 준 물건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물건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다만 제 것이니 지니고 있으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이 물건은 대체 뭡니까? 황궁 주술사니 신성 주술사니 하는 얘기는 또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내 예상대로 천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저 물건이 큰 힘을 발휘한 듯했다. 지금껏 그 물건이 뭔지 모른 채,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던 에반이 이렇게까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제야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깨달은 것 같았다.
네리아토는 에반이 들고 있는 물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 지금껏 많은 주술사가 있었지만 그중 신성 계열 주술사는 단둘뿐이었다고. 빛을 다루던 그분들은 치유, 축복, 정화라는 놀라운 힘을 사용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물건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네리아토는 축 늘어진 눈꺼풀 때문에 반쯤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바람에 인상 자체가 확 바뀌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는 혀를 찬 뒤 말을 이었다.
“너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느냐?”
“느끼다니, 무엇을…….”
순간 에반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에 네리아토는 혀를 더욱 찼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가 한심하다는 듯 잔뜩 찌푸린 표정도 감추지 않았다.
“과거 영광의 시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그 시대가 계속해서 회자되는 것은 신성 계열 주술사들의 힘이 그만큼 컸다는 뜻도 된다. 너도 분명 느꼈을 게다. 천궁에 남아 있는 신성 주술들을. 신성 계열 주술사 두 분 중 한 분은 모습을 감춘 채 여신의 사랑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으셨지만, 또 한 분은 황궁에 머물며 이곳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을 쓰셨다. 그 물건은 그분의 표식이다. 황궁 주술사임을 나타내는 물건이며, 만일을 대비해 웬만한 주술사는 해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주술을 새겨둔 물건이지. 나 역시 해석하느라 굉장히 애를 썼으니 하마터면 이 세상에 묻힐 뻔한 귀한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많이 놀랐는지 에반의 눈이 크게 뜨여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리아토는 그런 에반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먼 곳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물건을 네게 주었다는 그분은 틀림없이 황궁 주술사님과 연관이 있으신 분이었겠지. 어쩌면 너는 황궁 주술사님의 핏줄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고서야 빛을 다룰 수 있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우니까. 요안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너를 곁에 둔 게지.”
에반은 복잡한 눈빛으로 침을 몇 번 삼킨 뒤 겨우 입을 뗐다.
“왜……요? 왜 저를 곁에 둔 것입니까?”
“네 힘은 과거 영광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재현할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르니까.”
에반은 멍하니 굳어 네리아토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들고 있는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용사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아야 했다. 마녀는 잊어도 마녀가 말했던 것은 잊으면 안 되었다.
어둠을 몰아낼 용사인 것을 잊어선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