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실에 묶인 인형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황궁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타이란 후작은 가렌스 후작가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버린 젠나디오 백작가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밝혔으나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벌어진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은 모든 귀족들의 머릿속에도 떠올랐는지 회장 내엔 침음만 흐를 뿐, 아무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만 그들 틈에서 웃음을 참기 위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필레토 백작이었다.
그는 지하실에 갇힌 채 고통으로 울부짖는 젠나디오 백작을 바라볼 때처럼 광기 어린 눈동자로 킬킬거렸다. 모두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이미 반쯤 미쳐 버린 그는 눈치도 못 챘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왜 그리 웃소이까? 지금 이 상황이 웃기오?”
참다못한 타이란 후작이 한 소리 했지만, 필레토 백작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웃기지 않은 것은 또 뭐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이나 했소?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재밌는 일이오. 그렇게 인상 잔뜩 찌푸리지 말고 좀 웃으시오. 그러다 주름 생기겠소.”
“뭐, 뭐요?”
타이란 후작은 할 말을 잃어버린 채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에 다른 귀족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재밌다니, 제정신이오?”
“게다가 이 무슨 건방진 짓이오. 당장 타이란 후작께 사과하지 못하겠소?”
그는 여전히 킬킬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굉장히 건방진 눈빛으로 모여 있는 귀족들을 훑으며 말했다.
“싫소만.”
“필레토 백작!”
“난 이런 시답잖은 회의 따위 관심 없으니 앞으로 귀찮게 오라 가라 하지 마시오. 모여서 쑥덕거려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소? 그럴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병력이나 잘 관리하시오. 언제 누구 차례가 될지 모르니 말이오.”
“이, 이……!”
“이 건방진 작자가……!”
필레토 백작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는 다른 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몇은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듯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혀를 찼다. 그게 꽤나 재미있는지 그는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게 하찮을 수가. 왜 내가 지금껏 저런 것들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군.”
그는 마차를 타기 위해 내려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가 킬킬 웃었다가 또 생각에 잠겼다가 반복하며 여러 표정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탐욕이 서렸다. 그리고 자만으로 얼룩졌다. 그는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 고개를 치켜 올렸다.
“지금 내 곁에 있소?”
“그래.”
내가 대답하자, 그의 얼굴은 더욱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크게 웃나 싶더니 곧 살벌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어제 재미있기에 나를 돕는다고 하였지. 혹시 더 재밌는 일이 있는데, 해볼 의향이 있소?”
그의 말투는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은연중에 나를 하대해선 안 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재미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하지.”
“아주 재미있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황궁을 훑는 그의 시선은 마치 뱀처럼 번들거렸다. 인간에게 힘을 쥐어주면 어떻게 변하는지 직접 겪어보니 참으로 역겨웠다. 악마와 거래를 하면 악마의 힘을 지니게 된다 하였던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은 악마와 닮아 있다.
하지만 필레토 백작이 이렇게 변한 것은 내게 좋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군말 없이 그의 탐욕을 바라보았다. 그가 더욱더 미쳐 날뛰어 줄수록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부르고 나를 잔혹하게 만들지 잘 알고 있더라도.
* * *
“괜찮습니까?”
나는 루아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의 회갈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인해 더욱 따뜻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보고 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말해 주시겠습니까?”
“피곤해 보입니다. 많이 힘드시면 쉬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역시 제가 나설 걸 그랬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실 줄은…….”
“제 일입니다. 제가 짊어질 죄업입니다. 루아단은 지금도 충분히 제 짐을 나눠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그저 죄스러울 뿐이니, 이 이상 손을 뻗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부탁입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얼굴과 달리 그 한숨은 무척이나 따뜻해 하마터면 기대고 싶어질 뻔했다. 힘들고 지친 내 몸과 마음을 털어놓을 뻔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눈동자와 바닥을 물들인 피,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의 희생 등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간신히 잠이 든다 해도 꿈을 꿨고, 일어나서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내게 크나큰 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나는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하늘이 공평하다면 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썼던 사랑하는 내 가족과 달리,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지하 깊은 곳으로 가게 될 거라고 말이다.
어쩌면 용사가 내 곁에 머물렀던 것부터가 그 시작일지도. 그의 검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면서도 슬프고 괴로운 일이니까.
“정말 괜찮으십니까?”
내 심정이 그리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루아단이 다시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면 정말 괜찮아질 것처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나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이 정도로 지치고 힘들면 안 되었다. 이제 시작인걸.
그래, 이제 시작인데.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가 묻자 잠시 망설이며 내 눈치를 살피던 루아단이 체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닉스 님께서 명하신 대로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미 필레토 백작 저택에서 젠나디오 백작을 목격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소문은 더욱 빨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필레토 백작이 사신이나 혹은 악마와 거래를 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다른 귀족들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용병들은 필레토 백작과 계약을 맺지 않지만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믿고 있었으니까.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수많은 용병이 있다고 한들, 오래전 사라져 버린 힘을 사용하는 나와 다른 일행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을 더욱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타이란 후작가에서 기사로 활약했던 마르가리토는 그 검을 쥐고 다른 귀족가에 쳐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그저 소란만 피웠을 뿐, 금세 도망치게 했지만 그 덕분에 타이란 후작가 역시 마신과 계약했다는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필레토 백작이라는 산 증인이 있으니 결백을 주장해도 믿는 자는 없을 겁니다. 가렌스 후작가를 그렇게 만든 게 타이란 후작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천자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황궁에 식재료를 납품하며 조금씩 소문을 퍼트리고 있으니 황궁 전체가 들썩이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가렌스 후작가에서 시녀 일을 하던 루엘라도 혼잡한 틈을 타 황궁 안에 스며들었습니다. 천궁은 힘들겠지만 다른 곳은 그녀의 입김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곧 전쟁이 벌어지겠군.”
“네. 필레토 백작은 지금 야심에 눈이 먼 상태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전쟁을 일으킬 계획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타이란 후작가를 노리던 다른 가문들도 기회를 틈타 삼킬 계획인 것 같습니다. 카토 주점을 드나들던 용병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균형이 깨졌다.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던 관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이들은 집어삼키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싸울 터였다.
나는 필레토 백작을 도와 싸우는 척하면서 귀족 간의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서로 더욱 많은 힘을 빼도록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더욱 처참하게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도록. 그리고 용병의 수가 많이 부족해 평범한 사람들까지 전쟁에 투입되도록. 그리고 그 수마저 부족하도록.
“괴물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루아단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걱정과 안쓰러움, 불안 등이 뒤섞여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내게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라고 묻는 듯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이 세상인지, 고통 속에서 신음할 사람들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을 그렇게 조종하면서 결국 괴로워할 나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끝끝내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내 뜻을 전했다.
“……네, 알겠습니다.”
더욱더 일을 키워야 했다.
세상이 마녀를 눈치채도록.
그리고 용사 에반이 마녀를 의심하도록.
* * *
결국 전쟁은 시작되었다. 타이란 후작은 도망치거나 굴복하는 대신 싸움을 택했다. 승리를 거머쥘 가능성은 무척 낮았지만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건 상관없었다. 그는 패배할 테고 남은 이들이 타이란 후작가를 먹기 위해 또 싸울 테니까. 이왕이면 더욱 오랫동안, 최대한 처절하게 버텨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필레토 백작은 나를 등에 업고 위세가 등등했다. 닥치는 대로 싸움을 벌였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모조리 해주었다.
다만 이전처럼 저택 내부를 텅텅 비게 만드는 대신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나는 귀족들이 자멸하는 것을 원했다. 서로 자금과 식량, 병력을 마구잡이로 쏟아붓기를 원했다.
그래서 타이란 후작가를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한눈팔고 있는 지금, 작은 세력부터 흡수하라고 일렀다. 이미 눈이 멀어버린 그를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역시 덩치를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주위를 흡수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방어 세력이 강하다 싶으면 무너트리고 병력이 많다 싶으면 그 수를 줄이는 등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그 기세를 몰아 끊임없이 승기를 거머쥐었다.
그는 점점 많은 것을 얻었고 더욱 얻고자 했다. 귀족의 수가 줄어들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필레토 백작이 쉬지도 않고 거침없이 전쟁을 일으키자 그에 불안해진 다른 영지들 또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 전쟁을 벌일 만한 자금과 병력이 부족한 작은 영지들은 서로 손을 잡고 연맹을 맺었으며, 필레토 백작과 비슷한 영지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다.
온 영지가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휴전을 외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바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감히 넘볼 수 없게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연맹을 맺는 것은 차라리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보통은 영지민들을 모조리 징집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다 싶으면 주위 영지로 쳐들어가 그곳의 병력과 영지민들을 끌어모으는 방법을 택했다.
당연히 영지민들의 불만과 공포는 커져 갔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펼쳐졌다.
그들은 강제로 징병되었다. 마을에서 젊은 청년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영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워야 할 이들은 그들의 목숨으로 뱃속을 채우느라 바빴다. 영지민들이 죽든 말든 그보다는 견제를 위한 병력이 우선이었다.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영지 싸움에 끼어들게 된 영지민들은 끔찍한 현실에 울부짖었다. 비로소 어둠이 아니라 지배층에 원망을 돌렸다. 어둠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없지만 지배자는 아니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외곽부터 괴물의 침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벌인 토벌과 전쟁으로 인해 대륙은 점점 넓어졌고 그만큼 괴물은 뒤로 밀려나 있었으나 갑자기 무리를 지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어둠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마녀의 탑과 숲은 괴물로 가득 들어찬 거였다.
그렇다면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 일부러 어둠을 깔아놓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상황은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괴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으니까. 그저 길만 터주면 될 일이었다.
결국 대륙 안과 밖으로 지옥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갇혔다.
그럼에도 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천궁을 비롯한 모든 궁의 경비를 강화했다.
어쩌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많은 세력을 등에 업은 최후의 귀족이 황궁을 쳐들어갈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이 필레토 백작이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 토벌은 오롯이 국가와 평범한 시민들의 역할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천자는 두 가지 모두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나눠야만 했다.
에반이 속한 기사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괴물 토벌에 나섰다. 애초부터 요안은 외곽에서 괴물 토벌에만 힘쓰던 자였고, 아마 반란군이 황궁에 쳐들어가지 않는 한은 계속 외곽에 있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괴물을 움직인 거였다. 더욱더 괴롭게 만들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반이 전쟁이 아닌 토벌로 빠지길 바랐다.
아직은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괴물을 사냥하고 끝끝내 황궁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그날, 그곳으로 와도 늦지 않았다.
나는 에반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괴물이 나타난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 길목은 참으로 처참했다. 모두의 얼굴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청년, 하다못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를 제외하곤 젊다고 할 만한 남자들이 전혀 없는 마을들을 지나치며 울부짖는 여인들만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것이지, 왜 꼭 애꿎은 사람을 죽이고 난리야?”
“내 말이! 이 사람들이 대체 뭔 죄를 지었다고.”
전쟁터로 몰린 사내들은 살기만을 간절히 바랄 것이고, 이곳에 남아 기다리는 자들은 살아 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생활만을 하던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겪을 일들은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것들이겠지.
그러니 차라리 전쟁터로 몰리느니 괴물 토벌이 나을지도 몰랐다.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괴물을 죽이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요안과 기사단은 앞장서서 괴물 토벌에 힘을 썼다. 지금껏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을 평범한 사람들은 최대한 뒤에 배치했다. 그들이 길을 막아서거나, 앞에서 신경 쓰이게 만들어 괜히 구하려다가 다치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에반은 여느 수련생들과 다름없이 뒤쪽에서 싸웠다.
에반이 누구보다도 밝은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또 누구보다도 찬란한 눈동자를 빛내며 싸우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꽉 쥔 주먹과 알맞게 자리 잡은 팔 근육, 그리고 탄탄한 어깨와 가슴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강인한 턱과 날카롭게 치켜뜬 눈 또한 무척이나 늠름했고 강인했다.
그는 검은 바람을 가르고 괴물을 찢어발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눈빛에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어느새 훌쩍 자라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에반은 그들 앞에서 방패와 검을 자처하는 늠름한 용사의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나, 마치 지상에 내려앉은 지옥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천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유난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빛 하나 스며들어 오지 않는 그 속에서도 에반은 빛의 축복을 받고 있었으므로.
에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뒤바뀐 상황에 바짝 긴장했다. 잘 싸우고 있던 에반이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읏…….”
괴물 두 마리 틈에서 검을 휘두르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만 것이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괴물이 긴 손톱이 박힌 팔을 그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에반은 서둘러 몸을 돌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괴물의 손톱이 에반의 얼굴을 길게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 공격을 하는 괴물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완전히 막아설 수는 없었지만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한 괴물의 손톱은 에반의 뺨을 살짝 긁고 지나가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손톱이 지나간 자신의 뺨을 바라보았다. 그 탓에 내리깔아진 새하얀 속눈썹이 내 눈을 사로잡았지만 그는 재빨리 다시 눈을 치켜뜨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살짝 찌푸린 눈썹과 날카로운 눈빛, 비틀린 채 올라간 입꼬리까지. 묘한 표정으로 검을 쥐고 달려드는 에반이 꼭 나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아 괴물을 붙잡고 있던 것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지만 스스로에게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피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어서 피하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말았다.
내가 숨어 있는 땅 위로 괴물의 피가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어느새 가뿐히 처리한 에반은 주위에 늘어져 있는 괴물들의 사체를 둘러보며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땀으로 젖은 탓에 그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살짝 고정되어 하얀 이마를 반쯤 드러냈다. 하지만 금세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큰일 날 뻔했네.”
그는 방금 전 공격에 많이 놀랐는지 조금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뺨을 건드렸다. 그러고는 많이 쓰린 듯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게 무척 안타까웠다. 어느새 상처가 조금 갈라져 피를 비추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흉이 질까 두려웠다. 그래도 조금만 더 늦었어도 더욱 크게 다칠 뻔했으니 이 정도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에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도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니, 손톱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아닌가. 분명 내 얼굴에 닿을 만한 거리였는데.”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통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주위는 여전히 참혹했고 달려드는 괴물의 수는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금 검을 고쳐 들며 달려들었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라 전쟁터로 스며들었다.
에반은 분명 실력이 좋았고, 타고난 감각과 민첩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수련장에서는 그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거의 없건만 유독 실전에선 약한 모습을 보였다. 요안도 그걸 알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다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인지 그를 뒤에 배치하는 듯했다.
에반의 역할은 선두에서 괴물을 처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괴물을 마무리하거나,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괴물을 처리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종종 이처럼 실수를 하곤 했다. 그답지 않게 빈틈을 내어주거나 여유를 부리다가 균형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나는 재빨리 그를 돕거나 막아섰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나를 이 어둠 속에서 구별해 내는 자는 있을 리가 없으니 그는 그저 운이 좋았거나 자신의 실력이 좋거나 괴물의 실력이 나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에반을 보조하며 싸우다 보니 어느덧 괴물의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나는 괴물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루아단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의 어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괴물 또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괴물이 도망친다고 여겨지는 모습이었다.
“괴, 괴물이 도망간다!”
“와아! 우리가 이겼어!”
“도망가는 놈들을 끝까지 처리하라!”
수도 적은 데다 뒤로 물러나느라 등을 보인 괴물들은 그대로 꼼짝없이 당했다.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어느새 자잘한 상처를 가득 입은 에반 또한 그런 사람들을 둘러보며 슬쩍 웃었다. 금세 사라져 버린 웃음이기는 하나 그것은 분명 어리던 그때, 나의 구름을 처음 보던 그날처럼 밝고 순진하며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 * *
어둠이 가라앉아 있던 세상에 피 냄새가 덧씌워졌다. 그리고 방울져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피만큼 수많은 추측과 소문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믿기지 않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다. 이것은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느니, 신이 버린 이곳엔 더 이상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느니 까맣게 죽은 얼굴로 속닥거렸다.
그 틈새로 사람들의 두려움이 형상화되어 떠돌기 시작했다.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녀가 나타났어.”
“필레토 백작가에서 마녀를 봤어!”
“이 모든 것이 마녀의 짓인 게 틀림없다고!”
악마의 속삭임은 사신으로, 사신의 놀이는 마녀의 복수로 뒤바뀌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에 떨던 사람들 마음속에 깊은 공포가 자리 잡았다. 이미 암흑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은 죽은 지 오래요, 마녀에 대한 소문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처럼 큰 파문이 일며 퍼져 나갔다.
막연한 공포에 참혹한 현실이 더해져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보다 더욱 큰 마녀를 만들어냈다.
중앙에서부터 퍼져 나간 소문은 황궁을 덮치고 나아가 외곽에서 괴물 토벌에 힘쓰는 기사단에 닿았다. 아직 정식 단원이 되지 못한 수련생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쑥덕거리기 바빴다.
“야야, 그 소문 들었냐? 마녀가 나타났대.”
“에이, 설마. 마녀가 있을 리가 없잖아.”
“본 사람이 여럿이라는데?”
“진짠가? 그럼 중앙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은 전부 마녀의 짓인 거야?”
“사실 조금 의심스럽긴 했어. 솔직히 마녀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을 저지를 수가 없잖아. 만약 괴물이라고 해도…… 그런 괴물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싸울 수 있을 리가 없고.”
“마녀는 정말 강하다고 했는데…….”
“나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단순히 동화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거야?”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 속에서 에반은 가만히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조금 불안한 눈동자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채 소곤거리는 이들은 그런 에반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목소리만큼 힘 있는 걸음걸이로 나서는 이는 기사단장 요안이었다.
수련생들은 하나같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흩어졌다.
각자 자리로 돌아간 이들은 조용히 식사를 마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동 중 휴식 시간은 짧았다. 이렇게 이야기꽃을 피울 시간 따윈 없었다. 어쩌면 밥을 다 먹지도 못했는데 다시 이동하자는 외침이 들릴지도 몰랐기에 숟가락을 놀리는 그들의 손이 제법 다급했다.
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어린 수련생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단원 중 하나가 슬그머니 물었다.
“단장님. 단장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가 말인가?”
“아니, 마녀 말입니다.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저도요. 직접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전에 마녀의 숲에 갔을 때, 탑에도 한번 가볼 걸 그랬습니다.”
수련생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단장과 단원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밥을 꾸역꾸역 먹는 게, 자칫하면 밥알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에반 또한 먹던 것을 멈추고 요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요안은 단원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다가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을 텐데? 그건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실제로 마녀라는 여인이 존재하고 또 대단한 주술사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봐라. 과연 사람이 그리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나? 제일 오래 살았다는 천자도 이젠 힘이 다했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고, 주술사 네리아토도 힘을 잃은 지 오래다. 그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지. 한데 마녀는 다를 것 같은가?”
“물론 그건 아니지만…….”
“마녀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달리 마녀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에 요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막 입을 열던 참이었다.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에반에게 꽂혔다. 그는 다시 한 번 말을 이었다.
“마녀는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마녀를 믿고 있는 에반이 가여웠다. 무엇보다 자꾸 그런 식이면 다른 이들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가슴속을 휩쓸었다.
요안 역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인지 그의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전부터 마녀는 아니라고 확신하던데. 이유가 있나?”
에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요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림자로 그의 입을 꾹 막아버리고 싶었다. 마녀에 대한 그 어떤 얘기도 하지 못하도록 말리고 싶었다.
그것은 그에게 독이 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릴, 그런 일이었다.
“그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꾹 다물고 있던 에반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가지런한 치아가 보이게 약간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던 에반은 이윽고 대답을 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뭐?”
“마녀의 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녀도, 마녀와 관련된 물건도.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빈 채 서늘함만 감돌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위가 술렁거렸다. 수련생들은 물론이고, 단원들까지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요안도 잠시 놀란 듯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크게 떴다가 곧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마녀의 탑에 가보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네.”
“분명 마녀의 탑을 보지 못했다고…….”
“아니, 있었습니다. 단지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을 뿐. 그것은 결국 마녀의 탑의 존재 의미 자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저는 그것을 아예 없는 거라 여겼습니다.”
수련생들 사이에서 비명과도 비슷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마, 말도 안 돼!”
“마녀의 숲엔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무서운 괴물들이 산다고 했는데?”
“마녀의 탑은 가시넝쿨 때문에 찾는 것조차 힘들다고 했다고!”
하지만 요안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에반을 처음 만난 장소가 마녀의 숲이었으며, 에반이 그곳에서 먹고 잘 만큼 대단한 감각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녀의 탑에 가보았다니…….”
“마녀를 죽이면 괴물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봤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에반은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나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렇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또 그만큼 성장했다고 해도 아예 없었던 일처럼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아주 흐려질지언정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어린 시절 곰 인형, 혹은 동화책처럼 그렇게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에반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마녀가 아니라는, 마녀는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뿐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가라앉아 있던 그곳은 요안의 목소리로 깨어났다.
“들었지? 마녀는 없다. 그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든 이야기다. 헛소리들 할 만큼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바로 출발해도 되겠군. 이동할 준비를 해라.”
“네에?”
“다, 단장님!”
“뭣들 하는 건가. 빨리 준비하지 않고!”
“예, 옛!”
“으아!”
수련생들은 아직 반도 채 먹지 못한 도시락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다만 에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이동할 준비를 할 뿐이었다.
* * *
밤이 깊었다. 점차 짙은 회색으로 물들던 하늘이 결국 검은색에 가깝게 변하고, 에반을 닮은 태양 대신 은은하게 빛을 내는 달이 자리 잡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에반이 자고 있는 천막에 들어섰다. 어차피 그림자는 소리도, 냄새도, 모습도, 촉감도 없기에 들킬 걱정은 없었지만, 워낙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천히 들어와 에반 앞에 섰다.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반쯤 덮은 채 곤히 자고 있는 그는 조금 전까지 괴물과 싸웠던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여리고 순수해 보였다.
분명 누구보다도 남자답고 강인하게 성장했건만, 굵어진 선과 날카로운 얼굴, 이불 위로 드러난 상처투성이의 단단한 팔 등은 그의 성숙함을 드러내고 있었건만, 그럼에도 그의 자는 얼굴은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외모였다.
밝고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속눈썹, 잘생겼으면서도 한편으론 예쁘기 짝이 없는 코, 싸우고 있을 때는 그만치 남자답더니 자고 있는 지금은 소년과 다를 바 없이 섬세한 입술 등 그는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생소하고 오묘한 감정이 다시금 나를 사로잡았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 같았던 소년은 별반 다를 것 없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나는 그런 섬세한 뺨을 가로질러 자리 잡은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에 생긴 상처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언젠가 돌이 튀면서 생긴 눈썹 옆의 상처와 오늘 넘어지면서 팔에 생긴 큰 상처, 그 옆에 자잘하게 나있는 멍까지.
어차피 에반이 가진 빛은 치유 능력 또한 지니고 있어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상처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팠다.
미안했다.
그림자를 뻗어 그 상처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오래전 어느 날처럼 눈을 뜰까 봐 최대한 살살 보듬었다.
그는 많이 고단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잤다. 촉감이 없는 지금, 그의 뺨의 보드라움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내 곁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내 곁에서 그 체온을 나누어 준 적이 있는데.
에반이 마녀를 떠올리지 않게 되는 동안, 나 또한 그 시간들이 많이 흐려졌다. 내게는 망각이라는 축복 또한 함께하지 않았기에 잊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기쁜 일일지도 몰랐다. 여태껏 그것을 저주라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선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에반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그를 떠나보낸 후로 그의 뒤를 쫓지 않은 날이 없었다. 늘 함께했다. 늘 지켜보고 곁에 머물렀다.
내게는 어린 용사를 지킬 의무가 있었기에. 나의 역할은 어린 용사가 무사히 성장해 어둠을 몰아낼 때까지 그를 돕는 거였기에. 그의 그림자가 되어 더욱 밝은 빛을 발하도록, 태양을 이끌어 결국 어둠을 몰아내도록.
그래.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는 에반의 뺨을 쓸어내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겨우 이 작은 상처를 안타깝다 여길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더욱 큰 상처를 입힐 텐데. 그저 에반이 잘 견뎌주기를 바랄 뿐. 부디 많이 아프지 않기를.
나는 한참을 곤히 자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간절히 청하다가 마녀의 탑으로 이동해 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인물들은 이제야 차차 움직이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완성시킬 배경 또한 마련되고 있었다.
실에 묶인 인형들은 마녀의 손가락에 따라 움직이며 한 편의 동화를 완성시킬 터였다. 주인공인 용사를 위한 동화를.
* * *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바로 ‘빛이 존재한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전쟁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병사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던 그 소문은 결국 중앙과 황궁까지 덮쳤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리라.”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마녀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용사에 대한 소문이 입을 타고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빛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지 않던 마녀를 죽일 뿐 아니라 지금의 처참한 세상을 과거 영광의 시대처럼 돌려놓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여서.
사람들은 오래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영광의 시대에는 빛이 있었으며, 그 힘을 사용하던 주술사가 천자의 곁을 지켰다는 이야기였다.
그 빛은 어둠이 세상을 덮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였고, 결국 승리를 거머쥘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많은 자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빛은 희망의 상징이자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려줄 태양이었다.
“닉스 님, 모두 모였습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카드로 점을 보던 나는 서늘한 루아단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에반의 미래에 죽음이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내가 있는 한, 그리고 에반의 힘을 알고 있는 요안과 네리아토가 있는 한, 그리고 그 힘을 필요로 하는 황제가 있는 한 에반에게는 죽음이 드리워지지 않을 터였다.
나는 앞서 걷는 루아단을 따라 칠흑 같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커다란 공간에 도착해 움브라의 조각상이 있는 강단 위로 올라가자 어둠 속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각기 다른 어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깊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부러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각자 따로 만나는 것 또한 금지한 상태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빛이 나타났다.”
어둠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그 혼란이 진정될 틈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빛은 어둠을 위협한다.”
그러자 어둠들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눈동자는 시커멓게 번들거렸다. 우리의 일을 방해할지도 모를 이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들의 눈이 독을 품은 뱀의 송곳니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에반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그 불안감이 목소리에 묻어 나올까, 조금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빛은 황제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알고 있는가? 과거 천자의 곁을 지켰던 빛의 존재를. 그 빛은 치유하고 축복하며 정화한다. 만일 빛이 황제의 곁에 머물게 된다면 우리는 황궁에 들어설 수 없을 것이며, 그 빛이 세상에 퍼진다면 우리가 머물 곳은 더욱 적어진다.”
과거 영광의 시절, 천자의 곁에는 빛을 다스리는 주술사가 늘 함께했다. 그는 천자가 나약해지지 않도록 치유했고, 황궁에 축복을 내려 여신이 함께하도록 하였으며, 황궁을 정화해 어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만일 지금의 황제가 빛을 손에 넣는다면 건강을 되찾고 나아가 힘을 되찾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여신에게 버림받은 황제이기는 하나 그래도 쉬이 넘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것을 눈치챈 어둠들은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자 하는 빛이라는 존재에 대해 분노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이곳에 모이게 한 목적을 말했다.
“빛을 찾아라.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용사를 찾아내라.”
“……하지만 어떻게?”
“그자 주위에는 빛이 머물 것이다. 우리의 곁에 어둠이 몰리듯 그자의 곁에는 빛이 함께할 것이다. 밝고 찬란한 자를 찾아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죽여라.”
내 명령을 끝으로 어둠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텅 비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 움브라의 조각상에 몸을 기대야 했다. 루아단이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았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빛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빛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그는 나를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루아단의 안경이 날카로운 코를 타고 조금 내려왔다. 덕분에 진심 어린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는 그의 회갈색 눈동자가 그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일을 진행함에 따라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을. 내 마음속에 쌓이는 짐을.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용사를 위한 길임을.
* * *
요안의 행동에 변화가 찾아왔다.
“에반.”
“옛!”
“앞으로 어디를 가든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예?”
에반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요안은 다시금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강조한 뒤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이 사뭇 불안해 보였다.
그것은 괴물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요안은 선두에 나서고 에반은 뒤에서 싸웠지만, 웬일로 그는 에반을 따라 뒤로 왔다. 덕분에 앞에서 괴물을 막아서게 된 단원들이 힘들어했고, 또 평소보다 더욱 다쳤다.
그럼에도 요안은 에반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전투에도 크게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답지 않게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에반은 요안이 주위에 있어서인지 많이 긴장한 채 싸웠다. 실수도 거의 하지 않았고, 요안과 달리 자잘한 상처도 거의 없이 전투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요안이 에반의 곁에 있어주는 덕분에 앞에 나서 다른 단원들이 덜 다치도록 애쓸 수 있었다. 그들은 전투를 끝내고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괴물 상태가 조금 이상하지 않았냐?”
“아, 너도 느꼈어?”
“나도! 나도 느꼈어. 괴물이 자꾸 공격하다 말고 멈칫거렸지?”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긴 하다만. 뭘 잘못 먹었나?”
그들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정도로 크게 다친 이들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만 전투란 무척 고된 일이었고 분명 크게 다치는 이들도 있었기에 그저 평화롭지만은 못했다. 여기저기서 상처를 부여잡은 채 신음하는 이들도 있었고, 오늘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망자 0명, 부상자 52명, 그중 중상은 7명입니다!”
“오늘은 부상자가 많군.”
단원의 보고에 요안이 투덜거리자, 그의 상처에 붕대를 감싸주던 에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장님께서 뒤에 와 있으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의 상처를 툭 치니 요안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의 험악한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반은 조금 넉살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토벌에 나선 이후로 사망한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했다가는 큰일이 나지 않겠습니까? 오늘만 해도 자칫 잘못했다간 큰 상처를 입을 뻔한 사람이 많습니다.”
요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그걸 왜 내게 말하는 거지?”
“단장님께선 앞에 나서주셔야 합니다. 단장님의 괴력은 우리의 사기를 돋우기도 하고, 또 위험에 처하는 일도 줄게 만드니까요.”
“마치 내가 방패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다쳤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에반은 픽 웃으며 말했다.
“방패라니요. 단장님은 기사단의 검이 아니십니까? 검이 뒤로 와 있으니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수밖에요.”
보통 단장처럼 단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는 뒤에서 지휘를 하거나 몸을 사리기 마련이었다. 자칫 잘못해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안은 달랐다. 그는 뒤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할 뿐 아니라 그의 전투 방식도 앞에 나서야 힘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무척이나 예민한 감각을 지닌 그는 에반과 마찬가지로 괴물이 오는 곳, 바람의 방향 등을 금세 알아차리곤 했다. 괴물 여럿을 상대하면서도 미처 잡아내지 못하고 놓친 괴물이라든가 위험에 처한 이들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괴력과 순발력도 예민한 감각 못지않게 뛰어났다. 나는 만일 요안이 영광의 시대 때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뛰어난 주술사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에반은 그러한 요안이 뒤에서 싸운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의아함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오늘은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알 거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실 겁니까?”
“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야겠지.”
“이러다가 화장실은 물론이고 잠도 같이 자겠다고 하시겠습니다?”
“음, 그것도 괜찮군.”
“다, 단장님.”
에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요안은 픽 웃으며 에반의 머리를 툭툭 쳤다.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그의 웃음에 조금 안도한 에반이 불만 서린 눈빛으로 투덜거렸다.
“단장님께서 뒤에 와 계시니 제 마음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제 전투 방식이 있는데 영 불편합니다.”
“그래서 평소엔 그렇게 다쳤나 보지? 네 방식이란 설렁설렁, 여유로움인가 보군.”
그의 말에 에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확실히 오늘 에반은 평소와 달랐다. 더 열심히 싸웠고 다치지도 않았다. 틈을 내보이거나 실수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간 수련과 실전에는 차이가 있어서 그렇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요안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여유를 부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기도 했다.
에반은 꾀 못 부리게 하려고 곁에서 싸우는 거냐고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요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에반은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답했다.
“이, 이걸 빨아 오려고…….”
그의 손에는 피에 젖은 수건이 들려 있었다. 요안의 상처를 닦아낸 수건이었다.
요안은 자신이 예민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천막을 나섰다.
나는 그런 에반의 뒤를 따라가려다 요안의 혼잣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정말 마녀가 존재하는 건가.”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던 요안조차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됨을 느끼며 천막을 나섰다.
황제는 마녀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용사가 존재함은 모른다.
요안은 용사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녀가 존재함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용사로 추정되는 이들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용사를 없애기 위해 애쓰는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밝고 찬란한 이들을 죽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