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녀는 세상을 향해 검은 손을 뻗는다
내가 이동해 온 곳은 탑과 마찬가지로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은 용사를 만나기 전 탑의 모습처럼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그야말로 마녀에게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조금 걸어가 문을 열었다. 촛불의 뿌연 빛이 아른거리며 새어 들어왔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이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둠을 원하지 않고 어둠을 두려워하기에 마련해 둔 장치였다.
어둠이 편하면서 불편했다. 내가 어둠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둠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촛대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움직임 때문에 빛이 일렁거렸다. 그에 우리 둘의 그림자도 크게 일렁거렸다.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했습니다.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상체를 일으킨 남자는 전체적으로 날카로웠다. 조금 마른 듯한 몸이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냈다. 하나로 묶은 회색 머리카락과 구김이 없고 정갈한 옷차림은 단정하고 섬세한 그의 성격을 나타내 주었고, 시선을 가로막고 있는 안경과 날렵한 눈매는 사뭇 날카로웠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회갈색 눈동자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동자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다니, 확실히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정하면서 무뚝뚝하고 따뜻하면서 서늘한 남자였다. 나의 계획을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이자, 나를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루아단.”
나는 나를 도와주는 이 남자에게 언제나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정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당신도 위험해지니까.”
“닉스 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 전체에게 문제가 생긴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제가 이미 길을 제시해 드렸잖습니까. 어차피 저는 죽지 않으니 그저 숨어서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루아단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의자에 앉자 그 역시 의자에 앉았다. 마주 보게 된 그의 얼굴은 촛불로 인해 전체적으로 따뜻한 빛으로 변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서늘하던 회색 머리카락과 회갈색 눈동자도 따뜻하게 물들어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루아단.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 단정하게 묶은 이 긴 머리는 엉망진창으로 엉켜있었고 헝클어져 있었다. 안경도 쓰지 않아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대로 멈춘다면 틀림없이 그런 색상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차갑고 슬픈 색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힘이 되어달라고 말한 내게 여전히 생기 없이 푸석한 눈으로 말했다.
“세상을……. 이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을, 그 하늘을 자유롭게 노니는 한 쌍의 새를, 바람에 따라 푸스스 우는 나뭇잎을, 그 아래에서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뛰어다는 아이들을,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아이의 엄마를,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가두었다. 세상을 증오하고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름답던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진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마녀라 밝힌 나를 도와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전에도 이렇듯 죽어 있는 자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처음이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는.
나는 단지 나를 도와줄 이들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꼭꼭 숨어 있는, 마음속까지 어둠으로 갉아 먹힌 이들을 찾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만난 다른 이들은 모두 증오심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간 가슴을 부여잡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사내는 달랐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사랑했다. 그리워했다. 나는 그를 차마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 역시 그러노라고. 나 또한 세상을 바꾸고 싶음이라고.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선사할 새로운 태양을 바라노라고.
그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용사의 힘이란 그랬다. 그의 존재란 이렇듯 죽어 있는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선사했다. 용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갈라진 입술에 핏물이 맺혔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닉스.”
“당신의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루아단은 망설이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바꿀 용사를 위해서.”
마녀의 의도를 모른 채 움직이는 말이 아니라 마녀를 도와 말을 움직일 이가 필요했다. 그 전까진 어떻게든 되게 만들리라 생각했지만 루아단을 마주하니 이것은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또다시 아름다울 미래를 기다리는 이가 나 말고 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나의 꿈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실은 모두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루아단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조금 살아난 눈빛으로 말했다.
“아름다웠던 그날이 또 오게 될까요? 그리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답했다.
“새로운 태양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밝힐 그날을 말입니다. 그는 결국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나는 확신했다. 에반은, 빛을 머금은 그 용사는 세상을 위해 태어났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신께서 안배해 놓은 희망이었다.
그것을 지키고 성장시키고 결국 세상에 드러내려면 내가 필요했다. 더욱 크고 무서운, 세상을 신음하게 만들 마녀가 필요했다.
“제 작은 힘이나마 당신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루아단은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했다. 내가 세상을 지켜보고 계획을 세우는 동안 그는 에반과 마찬가지로, 마녀와 마찬가지로 배척당하고 괴로워했던 이들을 가르쳤다.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어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가르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루아단 또한 애초에 어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나의 가르침을 받아 손쉽게 힘을 다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에반이 성장하고, 그에 따라 안배된 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준비하고 있는 이때, 드디어 모든 이들에게 역할이 정해졌다.
루아단은 안경을 가볍게 치켜 올린 뒤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말투로 읽어 내려갔다.
“가렌스 후작가의 시녀로 들어간 루엘라가 후작가 내의 지도와 경비 활동 범위, 시간을 알아내었습니다. 아직 신뢰도가 낮고 활동 영역이 적은 터라 직접적인 도움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토는 어떻습니까?”
“그는 여전히 타이란 후작가의 기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트루도는 황궁에 식재료를 납품하게 되었답니다. 카토가 운영하는 주점은 입소문을 타 꽤 많은 손님이 드나드는데 닉스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 고객은 용병이라는군요. 그 외 남아 있는 이들은 저를 돕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젠나디오 백작이 새로 들인 첩의 거처를 알아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루아단을 바라보았다. 그도 읽던 종이를 내려놓고 마주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나는 원하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기다렸던 그날이 다가왔음을 나의 미래를 통해 말해 주었다. 이제 나는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나의 말이 이어지길 바라는 루아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하십시오.”
마녀는 세상을 향해 검은 손을 뻗었다.
* * *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했다고. 아니, 단 하룻밤 만에 모조리 없어진다는 게 말이나 되나?”
“내 말이! 건물도, 음식도 모두 그대로인데 사람만 없어졌대. 정말 놀라워!”
하룻밤 새 가렌스 후작가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들이 입던 옷, 먹던 음식, 심지어 요리 중이던 냄비도 그대로인데 사람만 없었다.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그뿐 아니라 세상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피 냄새가 날 듯한 끔찍한 분위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집에 틀어박혔다.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황궁에서 조사 중이었지만 아직도 아무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모두들 이런저런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돈을 만질 수 있는 용병들은 주점에서 술을 퍼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주점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타이란 후작가가 가렌스 영지를 탐냈잖아. 혹시 사람을 보낸 건 아닐까?”
“어떤 사람이 그 짧은 사이 모조리 해치우겠나? 자네라면 할 수 있겠나?”
“아니, 물론 그건 아니지만…….”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이해하겠는데, 이건 도대체 답이 나오질 않는군. 혹시 독약이라도 풀었나?”
“그러면 시체가 있었겠지. 아무리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독약이 있어 모조리 죽여다고 한들, 하룻밤 새 그 많은 시체를 치우는 게 가능할까?”
“이건 정말 말이 되질 않는다니까!”
흥분에 겨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겁에 질려 혹시 사신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괴물의 짓은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괴물이라는 말에 움찔거렸다. 지금까지 여러 괴물을 상대해 왔지만 짧은 시간에 커다란 저택 내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사라지게 하는 능력을 지닌 괴물은 보지 못했다. 그것도 흔적도 없이.
“혹시 새로운 괴물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 말에 주점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몇몇은 애써 웃으며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에도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모두들 내심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마 괴물은 아닐 것이오.”
그의 말을 들은 용병들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그러자 술을 가져왔던 남자는 주위에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내 손님들이 하는 얘기를 살짝 엿들었는데 말이오. 가렌스 후작가에서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고 했소.”
“그, 그게 뭔가?”
그는 허리를 숙여 용병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속삭였다.
“검이오. 피가 묻은 검.”
“거, 검?”
“그렇다는 건 정말 사람이 한 짓이란 말이야?”
“그것도 그냥 검이 아니오. 검 손잡이에 뱀 두 마리가 엉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더군.”
“뱀 두 마리……!”
“타이란 후작가의 문양이 아닌가!”
용병들이 크게 술렁거리며 외치자, 남자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진정시켰다. 그의 행동에 용병들도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였다.
“정말 타이란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낸 것인가?”
“게다가 문양이 박힌 검이라고 하면…… 우리 같은 용병도 아닐 건데.”
“에이, 말도 안 돼.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들, 그 커다란 저택 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해치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게다가 가렌스 후작가라고 하면 타이란 후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 수가 무척 많던 곳이라고.”
“맞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저택 안에 있었을 거란 소문도 있었어. 근데 그걸 정말 사람이 해치웠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시체는 어찌할 건가? 게다가 피 한 방울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던데!”
“그리고 검이 발견된 것도 이상해. 시체는 숨기고 검은 두고 왔다? 일부러 타이란 후작가라는 걸 티내고 싶어 했던 거야, 뭐야?”
용병들은 점점 헛소리로 치부하는 듯했지만,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뭐가 더 있나?”
“어서 말해 보게나.”
그가 쉬이 말하지 못하고 질질 끌자, 답답해진 용병들은 계속 재촉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타이란 후작가가 사신과 손을 잡았다는 얘기가 있소.”
그의 말에 용병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피식 웃었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남자는 그들의 반응 따윈 신경 쓰이지도 않다는 듯 다만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난데없이 사신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도 그렇고,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도 무척 두렵소. 게다가 왜인지 불안한 느낌이 드오. 이게 시작인 것 같다는.”
그의 진심 어린 한탄에 용병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애써 비죽거리는 웃음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두려움이 퍼졌다.
하룻밤 새 사라져 버린 대저택 내 사람들, 그곳에서 발견된 견제 세력의 검, 괴물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에 사신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안함과 두려움의 씨앗을 심은 장본인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용병들에게 술을 건네주고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며 소문을 듣고 또 소문을 퍼트리는 그자의 이름은 카토. 그림자의 지배자인 움브라의 신자이자, 이 세상을 뒤흔들기 위해 마녀와 손을 잡은 일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몸을 숨긴 곳을 바라보며 은밀히 미소 지었다.
* * *
세상 밖이 흉흉한 소문으로 들썩이는 그 시각, 황궁 또한 분위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중앙궁에 있는 회장으로 이동해 귀족들의 동태를 살폈다. 모두들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무엇보다 탁자 가운데 놓여 있는 검이 문제였다. 진득한 피로 인해 언뜻 불길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검 손잡이에는 타이란 후작가를 뜻하는 뱀 두 마리가 서로 엉킨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에 난데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 타이란 후작은 길길이 날뛰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건 분명 모함이오! 그러지 않고서야 그곳에서 내 검이 발견될 이유가 있겠소?”
모두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에 타이란 후작은 더더욱 날뛰며 자신이 범인이 아닌 이유를 외치고 또 외쳤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나는 타이란 후작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대신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누구라도 눈앞에 있는 검을 믿지 못하리라. 하룻밤 새 대저택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사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런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검을 두고 오는 실수를 저질렀을 리는 없을 터.
그렇기에 모두들 타이란 후작을 범인으로 지목해 감옥에 가두는 대신 긴급히 회의를 여는 쪽을 택한 거였다.
과연 어느 누가 가렌스 후작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 그걸로도 모자라 타이란 후작가의 검을 두고 왔을까. 과연 어떻게? 그리고 왜?
“가렌스 후작이 정말 죽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럽소이다.”
“혹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작정하고 몸을 숨긴 것은 아닐는지.”
“그것 또한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오. 하룻밤 새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숨긴단 말이오? 그것도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서. 게다가 이 검은 대체…….”
“그건 나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소. 저 검은 분명 벽에 걸려 있던 것이오. 과거 천자께서 친히 하사해 주신 검이란 말이오. 누군가가 작심하고 나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훔친 것으로 생각되오. 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확인되었소. 일단 저택 내 모든 사람들을 조사 중이니 곧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싶소이다.”
아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였다. 이미 그 검을 훔친 자는 유유히 사라졌을 테니까.
타이란 후작가의 기사이자 마녀의 일원인 마르가리토는 상황을 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아예 감출 계획이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타이란 후작가의 기사라는 직위로 이 모든 일에 대한 진술을 할 터고, 그게 아니라면 꼭꼭 숨어 있다가 그의 힘이 필요할 때 나타나면 되었다.
“저택 내에서 물건을 훔칠 만한 간 큰 자가 있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구려.”
“그 정도는 되어야 가렌스 저택을 야습하지 않겠소?”
“그럼 정말 가렌스 후작은 죽임을 당한 거요?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지만 시체가 없잖소? 그보다는 도망을 친 거라고 생각되오. 물론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대화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가장 중요한 ‘왜?’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가장 유력한 범인은 단연 타이란 후작이었다. 가렌스 후작과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의 영지를 탐냈기 때문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그를 압박하며 어떻게든 집어삼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아는 이들이기에 그를 의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도무지 믿기질 않아 의심하는 것조차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타이란 후작이 가렌스 후작을 견제하고 집어삼키려 애썼던 것처럼 타이란 후작을 견제하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터. 내 예상대로 그들은 타이란 후작을 범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은근히 대화를 이끌었다.
“내 듣기로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 사신이 나타났다고 하는 소문이 돌더이다.”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는 필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을 거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오. 도망을 쳤든, 하룻밤 새 모조리 몰살을 당했든 이것은 인간이 해낼 수 없으니 말이오.”
“과거, 이런 얘기가 있었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은 악마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혹시 사신이라는 게 그런 것은 아닐까 싶기도…….”
그러면서 타이란 후작을 바라보자, 그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나를 보고 하는 소리요? 애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를 믿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이 짧은 사람이었소?”
“어허,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시오? 혹시 내심 찔리는 것이라도 있소?”
타이란 후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분노와 불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외친다고 한들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을 이들이었다.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도 스스럼없이 죽일 이들이니 서로에 대해선 서로가 더욱 잘 알 터였다.
그리고 나는 타이란 후작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는 없는 천자라는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가장 아끼고, 위협이 되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악마의 힘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타이란 후작은 그에게 무척이나 불안한 존재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타이란 후작은 서둘러 화살을 돌렸다.
“그렇게 말하는 다이노 백작이야말로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이른 아침부터 가렌스 후작가에 간 연유가 대체 무엇이오? 어째서 그 누구도 열어주지 않았을 문을 제 스스로 박차고 들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느냔 말이오!”
“그, 그건…….”
그러자 다이노 백작에게 평소 불만이 많았던 로투리아 백작이 거들고 나섰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이노 백작에게도 충분히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이유가 있었군. 가렌스 후작 부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니 말이오. 혹시 그 후작 부인과 무언가 잘못되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흠흠, 그렇게 말하는 로투리아 백작 역시 이전에 가렌스 후작에게 농지 하나를 빼앗긴 것에 앙심을 품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만. 그게 아니었다면…….”
“가, 갑자기 나는 왜 끌어들이시는 겐가!”
결국 회장 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로를 물고 늘어지는 귀족 탓이었다. 과거, 그리고 그보다 더 과거를 들먹이며 이유를 찾아내었고, 그 때문에 감정이 상한 이들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까지 들먹이며 깎아내리기 바빴다.
나는 꼬리 잡는 식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그곳을 벗어났다. 결국 누군가가 범인으로 몰려 그대로 몰락하거나 혹은 혼자 죽을 수 없다며 전쟁이라도 일으켜 서로 자멸하거나 혹은 도망이라도 치거나,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관심 없었다.
마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바로 이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자리 잡는 거였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지금껏 잊고 있었던 존재에 대한 두려움.
지금껏 안주해 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을 원했다.
* * *
에반이 있는 기사단 또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듣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에 소속된 기사단이었기에 귀족들의 동태에 가장 민감했다.
일단은 중앙이 아닌 외곽에서 괴물 토벌에 주로 힘을 쓰는 기사단이기는 했으나 국가에 소속된 이상, 황제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입장에서 전쟁은 무척이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동료였던 이들에게 검을 겨누고 심지어 돈을 받고 고용된 이들을 죽여야만 하니까.
그 분위기를 접한 수련생들도 모였다 하면 그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까?”
“글쎄. 지금 젠나디오 백작가에도 용병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던데. 아무래도 필레토 백작가와 싸우려는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젠나디오 백작이 필레토 백작의 여인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그러면 필레토 백작이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보다는 타이란 후작이 더 큰일이지.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쪽이 더 클걸?”
“아냐, 필레토 백작가와 젠나디오 백작가가 더 시급해. 그쪽은 가장 유력한 인물인 타이란 후작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으니 그리 급하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가렌스 후작가에서 타이란 후작의 검이 발견되었다며? 그것도 피 칠이 된 채로.”
“근데 생각을 해봐라. 저택 내에는 피 한 방울 없었다더라. 어느 누가 그렇게 몰살시킬 수 있겠냐? 그건 에반이라고 해도 불가능하겠다. 안 그래, 에반?”
에반은 멍하게 앉아 있다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희미하게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맴돌았다. 그는 새하얀 속눈썹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곧 얇게 휘며 말했다.
“거기서 내 이름은 왜 나와?”
“그나마 우리 중에 네가 제일 강하니까 그렇지.”
에반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소년이었던 에반이 청년으로 변하는 그 시간 동안 수많은 훈련과 단련이 끊이지 않았기에 그의 여리던 선은 남자답게 굵어졌고, 선하기만 하던 눈매 또한 사뭇 날카로워졌다. 그럼에도 찌푸리듯 조금 어설프게 웃는 그 미소는 어린 에반을 꼭 닮아 있었다.
당시의 에반이 떠올라 가슴이 조금 아렸다. 마녀라고 부르며 쳐다보던 에반은 어느새 이렇게 자라 가깝고도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결코 그래선 안 되었다. 용사의 세상은 이곳이었고, 나의 세상은 에반이 떠난 그날 이후로 멈춰 있는 탑 내였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은, 다시 마주하는 날은 그의 검이 내 심장으로 향하는 날, 그때여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조금 멀리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눈을 감기 전까지 더욱더 많이 봐두어야 마지막 그날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테지.
나는 얼핏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에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라 단장님이라도 그건 불가능할 거야. 아무리 독이라도 써서 모조리 죽였다고 해도 그 많은 시체를 흔적도 없이 치울 방법은 없으니까.”
“그래, 그럴 수가 없지.”
약간은 앳된 목소리 틈에서 무척이나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모두들 저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기사단장 요안이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마차에 실어 이동시킨다고 해도 그 많은 마차를 어디서 구할 것이며, 구한다고 쳐도 이동하는 동안 들키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질 않지. 그 앞에는 수많은 마차 바퀴와 발자국 따위는 없었다고 하니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예상하는 게 있으십니까?”
그는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
“없다.”
그리고 조금 실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뗀 뒤 에반을 불렀다.
“잠깐 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곤 먼저 걸음을 옮겨 앞장섰다.
“……옛!”
에반은 뒤늦게 대답한 뒤 그의 뒤를 따랐다. 에반이 요안을 따라 들어선 곳은 평범한 방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곳엔 이해하기 힘든 그을음 등을 비롯한 흔적이 가득 남아 있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엔 에반의 주술 선생인 네리아토가 있었다.
“왔나?”
에반은 네리아토의 반김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신발이었다.
“이게 뭡니까?”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이 없나 살펴봐 주게나.”
에반은 의아한 얼굴로 신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딱히 별다른 점은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곧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냥 평범한 신발 같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의 대답에 네리아토는 작은 한숨을, 요안은 팔짱을 끼는 것으로 아쉬움을 나타냈다. 에반의 의아함이 더욱 커질 무렵, 네리아토의 대답이 이어졌다.
“너도 그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게다. 가렌스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 말이야.”
“아, 예. 이미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 데 없이 사라졌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이야. 가렌스 후작이 살아 있건, 살아 있지 않건 말이지.”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택 내에 비밀 통로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다.”
요안이 말을 거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건축가와 도굴꾼 등을 데려가 조사를 해본 모양이지만 그런 것은 없다고 하더군. 기껏해야 숨겨져 있던 지하실 정도만 찾아냈다. 그리고 이건 그곳에서 발견한 신발이지.”
에반은 들고 있던 신발을 다시금 살폈다.
나는 그 신발을 보고 무언가 떠올랐다. 지하실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칠 뻔했지만 그곳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문을 꼭 잠갔다고 하더라도 그림자나 연기는 그 작은 틈새조차도 스며들 수가 있었다. 그 속에서 떨고 있는 가렌스 후작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모두를 버리고 지하실에 꼭꼭 숨어 있었다. 언제 어떻게 도망갔는지조차 모르게, 마치 쥐처럼 재빠르고 약삭빠르게 숨었다. 그들의 제 목숨을 부지하는 능력만큼은 정말 인정해 줄 만했다.
그렇게 그를 죽이고 이동시키면서 실수로 신발 하나를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손길이 닿았다고 한들 그곳에서 내 힘이 느껴지거나 뭔가 발견될 리는 없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신발을 주워 온 이유는 너라면 혹시 뭔가 느낄까 싶어서다, 에반.”
에반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금세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주술입니까?”
“그렇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지. 주술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해낼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힘을 잃은 주술사기는 하나 주술을 사용했었던 기억과 경험이 있는 네리아토는 벌어질 수 없는 이 일을 주술과 연관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들과 에반밖에 없었다.
에반은 다시금 신발을 꼼꼼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에 네리아토의 얼굴에 실망이 번졌다. 요안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나 보군. 하긴……. 게다가 이렇게 큰 힘을 사용할 만한 주술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스스로 깨우쳐봐야 얼마나 깨우치겠나? 다른 비밀 통로가 있거나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해 봐야겠군.”
“혹시…….”
네리아토가 말을 늘이자, 요안과 에반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마녀는 아니겠지.”
요안과 에반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요안이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건 황제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인데.”
하지만 네리아토는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사신이니 악마니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네. 마녀는 죽지 않는 존재라고 했으니 여전히 살아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던가? 아니, 어쨌든 마녀는 분명 존재하네. 그녀는 대단한 주술사였어. 정말 마녀건 아니건 대단한 주술을 사용하는 건 틀림없었다고.”
오래 산 주술사라고 하더니, 그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전해 들은 이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어린 시절에 겪은 거라고 해도 경험한 것과 어디서 들은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안의 얼굴 또한 사뭇 진지해졌다. 가만히 신발을 들여다보고 있던 에반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녀는 아닙니다.”
“……뭐?”
에반은 의아한 눈초리로 되묻는 요안에게 말했다.
“……마녀는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래,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나는 요안의 물음에 내 감정을 담아 에반을 가만히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확고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말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아닌 건 아닌 거예요.”
나는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처럼, 그런 어렴풋한 책 냄새처럼 잊혔다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마녀를 믿고 있었다. 바보같이. 의아함이 의심으로 바뀌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건만 그래도 그는 끝끝내 마녀는 아니라는 말만 내뱉었다.
마녀는 아니라고.
마녀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나를 믿어주는 그가 무척 고맙고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미안했다. 그의 믿음을 배신하는 것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고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날, 그가 받을 상처가 무척 가엽고 가슴 저미게 아프면서도 그만큼 절망 또한 커져 결국 마녀를 미워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에반이 믿고 따르는 마녀는 오래된 그의 기억 속에만 머물 뿐이었다.
* * *
많은 이들이 눈치채고 있는 것처럼 젠나디오 백작가와 필레토 백작가 사이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만 가렌스 후작가 일이 워낙 크고 말도 안 되는 터라 조금 뒤로 밀렸을 뿐이었다.
그들이 이러쿵저러쿵 수많은 추측을 하는 사이, 젠나디오 백작의 저택에는 그 추측만큼이나 많은 용병들이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젠나디오만큼 용병을 고용할 처지가 못 되는 필레토 백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갖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감히…… 감히 나를 의심하다니. 네까짓 게……!”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뒤엎으며 괴성을 질렀다. 순식간에 방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시녀 등이 달려왔지만 금세 공포에 질려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광기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옛 이야기에 나올 법한 악마와 닮아 있었다.
필레토 백작은 소리를 왁왁 지르며 남아 있는 물건을 부수다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곤 그대로 멈췄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끼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가 보는 것이 내 앞에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와 난장판이 된 바닥에서 무언가를 쥐어 들었다. 그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 닿은 것은 다름 아닌 여인의 장신구였다.
그는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물건의 주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리고 그 범인으로 몰린 것이 바로 필레토 백작이었다.
젠나디오 백작은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레토 백작을 의심했다. 심지어 어느 귀족들은 젠나디오 백작에겐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있다며 인정해 줄 정도였다.
그 여인을 두고 젠나디오와 필레토가 갈등을 벌였으며, 결국 여인이 젠나디오의 첩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필레토 백작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지 예상이 갔다. 애초에 그 여인은 필레토가 먼저 탐을 내던 여인이었다. 사랑하고 아끼었던 그 여인을 젠나디오 백작이 훔쳐 가 숨겨놓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 여인이 스스로 젠다니오 백작을 선택한 거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게도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만일 필레토 백작을 선택했다면 나는 젠나디오에게 찾아가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필레토 백작은 그 여인을 되찾고자 했다. 자신의 여인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필레토 백작은 젠나디오 백작의 권력과 돈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의 인맥 또한 이길 수가 없었다. 두 눈 뜨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었던 여인을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매몰차게 죽임을 당하고 거기에 자신이 죽였다는 누명까지 썼다.
장신구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분노로 일그러지고 잇새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도둑 새끼가 감히 누구를 살인자로 몰아?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그의 손에 쥐어진 장신구가 강한 손아귀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깨졌다. 그 탓에 그의 손바닥이 피로 젖고, 뚝뚝 떨어져 내린 핏물에 의해 바닥마저 더러워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이 충혈되었다. 금세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지만 반대로 퍼석해졌다. 마음속 불길로 인해 눈물이 바짝 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불길을 끌 방법은 없다. 어떻게?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내게 힘이 있다면…… 내게 힘만 있다면……! 모조리 다 엎어버릴 텐데…….”
나는 주저앉은 채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필레토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까?”
그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과 경악이 번졌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 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귀를 부여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스스로에게 미친놈이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다시금 속삭였다.
“난 다 알고 있어. 젠나디오가 한 짓을. 원한다면 그를 죽여줄게.”
“누, 누구냐!”
필레토는 결국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검을 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씩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벽이 닿자 조금은 안도하는 눈빛으로 검을 쥔 손을 바로 했다. 조금 떨리던 그 손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던 것이 커다랗게 덩어리진 인간의 모습을 갖추자 그의 입에서 신음 섞인 비명이 흘러나왔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왔으니까. 내 힘을 빌려줄게.”
“다, 다가오지 마!”
그는 서둘러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어느새 그의 검은 물론이고 손과 발까지 모조리 그림자로 꽁꽁 묶여 있었다. 나는 파들거리며 떠는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젠나디오가 증오스럽지 않아? 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훔쳐 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이고는 네게 뒤집어씌웠어.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 네가 가진 것을 탐을 내기 때문인 거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함이야.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
공포로 떨던 필레토 백작의 얼굴이 일견 싸늘해졌다. 젠나디오에게 생각이 닿자 증오가 공포를 이긴 것이다.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렵지 않아. 젠나디오 백작가는 흔적도 없이 모조리 사라질 거야. 젠나디오는 물론이고 그의 기사와 고용한 용병들, 하다못해 시녀와 요리사, 정원사까지도 모조리 사라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필레토 백작은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가렌스 후작가를 그렇게 만든 것이 너였나? 넌 대체 누구지?”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가 없지. 네게 중요한 것은 젠나디오 역시 그렇게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 그거 아닐까?”
“……너는 정말 악마? 아니면 사신인가?”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필레토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의 몸을 칭칭 부여잡고 있던 그림자를 없앴다. 그는 커다란 어둠 덩어리에 불과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내게 무얼 바라지?”
“아무것도. 난 단지 재밌을 뿐이야.”
내 대답에 멍하니 서 있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잘게 떨며 웃던 그는 이내 고개까지 젖힌 채 크게 웃었다. 그리고 곧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과연. 과연 악마로군. 나는 악마와 거래를 하면 되는 것인가?”
“거래가 아니지. 나는 네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
“그러면 대가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따로 말해도 되는 것인가?”
“얼마든지.”
필레토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술만 치켜 올리는 그 웃음은 정말이지 잔혹하고 끔찍한 느낌을 자아냈다. 잔뜩 일그러지고 괴이했다. 시퍼런 눈동자와 그 속에 차올라 있는 불쾌한 감정 때문에 더 그랬다.
그는 탐욕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젠나디오 백작은 살려라. 그리고 내 앞으로 끌고 와라. 그렇다면 내 영혼을 원한다 해도 얼마든지 주마.”
그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봤자 새카만 그림자일 뿐이겠지만 얼굴이 있었다면 내 미소 또한 필레토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멍청한 필레토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지.”
그리고 곧바로 젠나디오 백작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벌일 일은 가렌스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내일이면 이곳은 텅텅 비게 될 테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 터였다. 괴물이든 사신이든 악마든 인간은 상대하지 못할 존재를 믿기 시작하며 더욱더 큰 두려움에 잠식당하겠지.
그러나 제 목숨을 가장 귀히 여기는 천자는 꼭꼭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지금까지 그러했듯 모든 일의 피해자는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되리라.
결국 그들은 가장 두렵다고 여겼던 천자보다도 더 두려운 것을 알게 될 테고, 자신들을 결코 보호해 주지도, 이끌어주지도 않는 지배자인 천자가 아닌, 그 두려움에 맞서 싸우고 나아가 모두를 구해줄 새로운 지배자를 원하게 되리라.
전혀 평온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며 변화할 생각도, 나아갈 생각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큰 파문을 안기리라.
이 잔혹한 발걸음은 그 계기가 되리라, 마녀는 그리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