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용사를 위한 동화는 이제야 시작되었노라
눈을 뜨자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순간 눈 쌓인 들판에 와 있는 기분이 들어 잠시 넋을 잃었다. 차가운 공기도, 속까지 스며들어 오던 눈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똑같았다.
슬며시 시선을 내리자 길게 드리워진 새하얀 속눈썹이 보였다. 곧이어 태양과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눈동자를 가려 마치 구름이 태양을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닮은 에반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또렷한 시선이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아 다시금 눈을 감았다.
“왜 그래? 점괘가 좋지 않아?”
나는 에반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는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에반의 머리카락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테로르의 점괘였다. 이제 곧 실현될 터였다. 카드를 뒤집은 뒤섞었다. 에반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손을 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기회였다. 에반을 용사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에반의 울타리로 그보다 더 적격인 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얼른 말을 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닉스, 표정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야?”
나는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던 눈썹을 바로 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들키고 말았다.
에반은 그동안 마녀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아 주었다. 감정도, 표정도 돌아왔다. 그래서 더욱 힘들다. 에반을 떠나보내는 것이.
다시 혼자 남는 것이.
마구잡이로 섞었던 카드를 일정한 배열로 내려놓고 뒤집었다. 내 이런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반의 곁에는 여전히 죽음의 신이 머물고 있다. 죽음의 신이 내게 속삭인다. 용사를 내게 넘기면 네겐 영원한 삶을 선사해 주지.
그것은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나 내게는 쓰디쓴 독일 뿐이다. 나는 영생 따위 필요치 않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죽음이다. 용사를 죽음의 신에게서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품에 안겨야 한다.
그래, 용사를 구해내고 내가 죽어야 한다. 지금 그 길이 열렸는데 무얼 망설이고 있는가. 만약 미래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영원히 혼자 남을 텐데. 그 잠깐의 헤어짐이 무어라고.
나는 카드를 내려놓고 에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반.”
“응, 말해.”
무슨 말을 하든지 들어주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붉은 눈동자가 감격스럽다. 세상이 어떻든 간에,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건 간에 한결같이 따스하게 밝혀주는 태양과 같다.
날 버렸다고, 외면했다고 생각했던 태양이 이곳에 떠올라 나를 바라봐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그 눈을 잠시 응시하다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에반에게 건네주었다. 에반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들며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뭐야?”
에반은 그렇게 물으며 물건을 살폈다. 정교하게 조각된 그 물건은 목걸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옷에 매다는 장신구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에반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는 거였다.
내 손에 있을 땐 은색에 가까웠던 그 물건이 에반의 손에선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바람에 가운데 새겨진 문양이 제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네가 지니고 있어라. 앞으로 이것은 네 것이다.”
“이게 뭔데?”
“너를 지켜줄 물건이다.”
아직 에반은 몰라도 된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거였다. 그보다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두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에반, 너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내 말에 에반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곧이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에반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곤 울상을 지으며 날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에반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을 일부러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반은 슬픔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꼭 그래야 해?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안 된다. 언제까지고 마녀의 품에 있을 순 없다. 에반을 지켜줄 무리로 들어가 그 속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 배척당하는 대신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마녀의 탑은 에반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마녀의 탑을 찾아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마녀가 에반을 숨기며 지켜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나는 죽지 않지만, 에반은 죽는다. 또다시 에반의 죽음을 마주할 순 없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에반은 기어코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난 가고 싶지 않아. 닉스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 역시 헤어지고 싶지 않다. 에반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내고만 싶다. 하지만 결국 에반은 죽을 테고, 난 추억이라는 무기로 난도질당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지금의 에반은 날 절대 죽여주지 못할 테니까.
에반은 세상의 편에 서서 내 심장에 검을 겨누어야 한다.
“네가 네 운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 역시 네 곁에 있을 이유가 없지.”
에반이 날 죽여주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에반을 밀어내는 편이 나았다. 이미 늦었지만, 그리고 겪어본 바로는 밀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더욱 아파질 수는 없었다. 더 많은 추억을 쌓아 더 많이, 오래 아프고 싶지는 않았다.
에반은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연신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 상처받은 눈동자가 내 마음을 할퀴었다. 에반이 애써 어르고 달래주었던 내 가슴속 상처가 또다시 벌어져 진득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진 서로만이 서로의 상처를 다독일 수 있었는데, 상황이 변하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에반이 무얼 두려워하는지 알면서, 에반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럴 수밖에 없는 내가 싫다. 에반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싫다.
하지만 내 세상을 끝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에반, 네게도 이건 어린 시절의 곰 인형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너무 좋아해 늘 품에 안고 다니던 곰 인형과 헤어지게 되면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슬프지만 곧 새로운 인형에 눈을 돌리며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반.”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에반을 불렀다. 에반은 내 부름에 고개를 들어 나와 마주했다. 눈썹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어느덧 그 어리던 소년이 이만큼이나 자랐다. 인간의 시간이 빠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낯설다. 너는 곧 청년이 되겠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그 청년처럼.
그때가 되어도 넌 날 떠올려줄까?
가슴이 쓰려와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데, 에반이 손을 뻗더니 그런 내 품을 껴안았다. 마치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그 속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나를 안아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에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게.”
“뭐?”
내가 되묻자, 에반은 내 품에서 떨어져 곧바로 뒤로 돌았다. 나는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되물으려 했지만 그의 말이 더 빨랐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날 바라보는 에반의 눈동자는 굉장히 진지하고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 * *
다시 회색빛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림자로 보는 세상은 참혹했다.
기사들은 온통 상처투성이였으며, 괴물들을 상대하다가 지친 모양인지 거친 호흡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바닥에는 그들이 처리한 괴물의 사체와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된 지 오래인 테로르가 나뒹굴고 있었다.
테로르는 처참하게 찢겨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피가 주위를 적시며 흘러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구슬 하나에 닿았다.
나는 그 구슬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날 남작이 테로르에게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거면 언제든 영주 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주술이 걸린 물건이라며 테로르를 안심시켰다.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모양인지, 혹은 설마 아비가 자신을 죽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테로르는 저 가짜 구슬 하나만 믿고 마녀의 숲까지 들어왔다. 욕심을 위해선 제 가족을 버릴 인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젠장, 망할 자식들 같으니.”
“단장님,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벗어날 길이 없군.”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괴물의 수는 엄청났다. 서로에게 가로막혀 한 번에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괴물을 거침없이 죽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지만 그만큼 괴물은 짐승보다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되기도 하기에 더욱 상대하기가 벅찰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사들은 뒤로 밀리고 서로에게 등을 기댄 채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마녀의 탑이 있는 곳을 계속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너무 늦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까 봐 연신 괴물들의 발을 붙잡으며 방해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에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세상에 햇살만큼 밝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치 진득한 어둠을 밝히고자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굉장히 신비로우며 이질적이어서 피로 물들어 있던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눈앞에 있는 먹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괴물들이었기에 조용히 파고드는 에반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와 유독 튀는 모습을 드러내니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괴물들의 시선마저 그리로 향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뒤늦게 잡기 편한 먹이를 발견한 괴물 몇몇이 에반에게 달려들었다. 좁은 곳에서 서로 부딪치며 몸싸움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한 마리가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곤 망설이지 않고 에반에게 입을 쩍 벌리며 몸을 날렸다.
에반은 자신의 몸쯤은 우습게 관통할 만한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들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그저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에반이 다칠까 봐 서둘러 괴물의 다리를 붙잡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장이라는 남자가 주저 없이 몸을 날려 괴물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머지 단원들이 위험에 처했지만 그는 괴물의 이빨을 막아낸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에반을 향해 외쳤다.
“어서 도망가!”
괴물은 식사를 방해받았다는 사실이 화가 나는 모양인지 포효를 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아무리 수많은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남자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몇 배는 크고 강한 괴물의 힘을 정면으로 받아내기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힘주어 버텨보지만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발이 끌리는 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등 뒤에 숨게 된 에반은 두 눈을 껌뻑이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에반의 입장에선 난데없이 끼어든 단장이 어이가 없을 만도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단장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에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에반은 남자와 괴물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잔뜩 일그러져 고통까지 느껴지던 남자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장의 빈자리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괴물들을 막아내던 나머지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곧 그들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몇몇은 괴물의 송곳니를 막아서던 검까지 천천히 내려놓으며 멍하니 한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회라고 여기며 달려들던 괴물들 역시 어디선가 느껴지는 빛 무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빛 무리의 가운데에 에반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에반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라 여겨질 정도로 희미하던 빛은 점차 밝아지더니, 이윽고 에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게 강해졌다.
그 빛은 에반의 앞에 서 있던 단장은 물론이고 입을 벌리고 있던 괴물들을 삼키곤 순식간에 터져나가 기사들과 괴물들이 서 있는 곳까지 환하게 밝혀주었다.
순간, 마녀의 숲은 적막에 휩싸였다.
새하얀 빛이 검은 안개를 몰아내며 퍼져 나가자 그 영향권에 들어선 나무와 식물들이 썩은 몸을 드러냈다. 그러고도 점점 더 널리 퍼져 마치 해가 떠 적막을 거두듯 그렇게 마녀의 숲의 어둠을 천천히 몰아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둘러보던 사람들은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다시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을 감싸고 있던 눈부시도록 하얀 빛은 사그라졌지만, 마녀의 숲을 밝히는 것과 같은 뽀얀 빛 무리가 주위를 맴돌고 있어 그의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에반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도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요함으로 뒤덮여 있던 마녀의 숲에 괴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빛에 타들어가며 내지르는 소리였다. 뽀얀 빛 무리는 괴물들의 몸을 태워 재로 만들었으며, 그 빛이 닿지 않은 괴물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
에반의 빛은 마녀의 숲의 어둠뿐 아니라 괴물들마저 몰아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기사들은 물론이고 에반까지 그저 멍하니 굳어 있을 뿐이었다. 그 상황은 괴물들이 재로 변해 불어온 바람에 흩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빛은 천천히 사그라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빛에 의해 물러나있던 검은 안개가 다시 스멀스멀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기사들은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아 그동안 멈추고 있었던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 주위는 온통 피바다였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에반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경악 어린 표정으로 에반을 내려다보던 단장이 물었다.
“방금 그건 뭐지?”
에반은 대답 대신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살펴보았다. 바로 내가 준 물건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에반도 마찬가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물건을 넋 놓고 바라보는 듯했다.
그 물건은 옅은 빛을 뿜는 가루를 뿌려대다가 곧 처음 에반이 들었던 그때처럼 은은하게 바뀌었다. 빛 가루는 허공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괴물의 잔재처럼.
“닉스…….”
에반은 그 빛 가루가 무엇인지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장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건…….”
단장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에반이 물건을 건네주자 얼굴 앞으로 가져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틀림없군.”
역시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 물건에 새겨진 문양을.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남자가 저 문양과 물건, 에반의 힘을 알아본다면 틀림없이 그냥 보내지는 못하리라.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비록 물건에 새겨진 문양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지라도.
한동안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누구인가.”
에반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마을에서 쫓겨나 숲을 떠돌던 숲지기입니다.”
단장이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적어도 단장은 에반의 특이한 겉모습에도, 또 위험한 곳에 갑자기 나타난 소년이었음에도 의아하게 여기고 의심하기보다는 괴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을 정도니 말이다. 생사를 넘나들며 짐승 못지않은 감각을 지녔을 텐데 아마 위험하다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던 걸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방금 그 힘은 뭐지?”
에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빛에서 태어나 빛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에반은 스스로를 괴물이라든가, 저주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을 축복받았다고 여긴다는 뜻이었다.
마녀의 탑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찌 들으면 허황되다 여길 수 있는 에반의 말임에도 단장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밝아졌다. 일견 기쁨과 감동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에 새겨진 문양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빛이라, 굉장하군. 이 세계에는 절망만 가득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남자는 그 물건이 가진 가치를, 그리고 에반의 힘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시선을 돌려 지금의 내게는 짙은 회색으로, 그들에게는 붉은색으로 보일 에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은 것 같군.”
동시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각자 돌아가고 있던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렸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들이 맞이하게 될 미래는 이전과는 다를 터였다.
* * *
그들은 곧바로 영주 성으로 돌아가 베헤멘 남작에게 죄를 물었다.
그는 당연히 죽으리라 생각했던 그들을 다시 마주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만 죽어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하지만 곧이어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떠올리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늦게 수습하려 애썼다. 물론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이곳에서 겪은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자세히,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아, 물론 황궁의 지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마녀의 숲은 어떤 상황인지도 말입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어 눈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베헤멘 남작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귀족이었다. 그들의 선에서 함부로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그 시각, 에반은 그들이 타고 온 마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단장이 같이 가자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에반은 아무래도 내가 하는 말을 따를 작정인 모양이었다. 주어진 운명대로 용사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듯했다.
하지만 에반의 표정은 쓸쓸했다. 그 공허한 눈빛에 가슴이 아파왔다. 에반은 내가 준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쉬이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 물건 안에는 부적이 들어 있었다. 에반의 힘에 반응해 더 큰 빛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에반을 지켜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둔 터였다. 아마 에반의 힘에 반응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겠지만 일단 그 역할은 다 했으니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에반을 지켜주는 건 그 부적이 아니라, 그로 인해 울타리가 되어줄 단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에게는 그저 가서 네 힘을 사용하라고, 그리하면 괴물들이 물러날 것이라고 말해 두었을 뿐이었다. 설마 눈을 감을 정도로 내 말을 신뢰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내 계획대로 되었다.
“어서 가도록 하지.”
단장과 기사단원들은 마차로 돌아왔다. 몇몇은 마차에 올라타고 또 몇몇은 말을 타며 마을을 떠나갔다.
그들은 에반에게 마녀의 탑에 대해 물었지만 에반이 내가 일러둔 대로 그런 것은 없었다고 대답하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역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동화라 여기는 듯했다. 마녀의 탑과 죽을 때까지 갇힌 마녀는 그렇게 동화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흔들리는 마차가 어색한지 의자에 몸을 폭 기댄 에반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못내 아쉬운지 그의 시선은 마녀의 숲에 닿아 있었다.
에반은 스스로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네가 원하는 용사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마녀의 탑에서 에반이 나를 껴안았을 때, 작게 중얼거리던 에반의 말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늘 여기 있어. 어디 가면 안 돼.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게.”
네가 그래준다면 난 더없이 행복하겠지.
하지만 에반, 너는 나를 떠나 세상에서 살아야 하며, 결국 그곳에서 동료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리라. 저주받은 마녀는 잊고. 동화 속 마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묻고.
그래도 나는 언제나 네 곁에 머무리.
네 그림자가 되어 너를 지키리.
마지막 순간까지.
마녀는 떠나가는 용사를 지켜보다가 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 * *
용사가 마녀의 탑을 떠난 후,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종소리를 들었다.
용사의 빈자리는 마녀를 괴롭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꿋꿋이 버텼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하면 더욱 괴로워질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여전히 마녀의 시간은 그대로였지만, 나를 제외한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흘러갔다.
그간 에반의 자그마하던 키는 진실을 외면하는 세상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났으며, 품에 들어올 정도로 가녀리던 어깨도 신음하는 자들을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청년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성장했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하리만큼 달라지기도 했다.
창백하고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던 얼굴은 적당히 그을려 혈색이 돌았으며, 여전히 흉터투성이였지만 타의로 생긴 끔찍한 상처가 아닌 고된 훈련으로 생긴 영광의 상처였다.
햇빛이 닿으면 투명하게 빛나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훈련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강 잘라내 조금 자라난 지금도 귀 밑에나 간신히 올 정도였다.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말라 있던 팔과 다리는 단련을 통해 단단하게 변해 있었고, 무엇보다 에반의 눈동자가 죽음이 아니라 희망을 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연신 반짝이며 햇살을 담아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 눈동자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검을 휘두르던 에반은 다가서는 동료들을 느끼곤 숨을 헐떡이며 멈추어 섰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머무르자 에반은 서둘러 훔치며 달라붙은 앞머리 역시 쓸어 넘겼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의 이마, 그리고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하얀 눈썹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가온 남자 하나가 말했다.
“적당히 좀 해라. 넌 지치지도 않냐?”
“아직 멀었어.”
“그래도 에반, 예전보다는 많이 늘었는걸.”
에반은 더 이상 괴물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마을에서 머물며 상처받고 고통으로 신음하던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남자의 말에 에반의 입술이 살짝 비틀리나 싶더니 곧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웃으려는 듯, 웃음을 참아내려는 듯 눈썹은 미미하게 찌푸린 채 입꼬리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어린 용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묘한 안도감마저 자아내었다.
에반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해.”
그래, 예전과 달리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아직 부족했다. 마녀에게 배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이전보다 많은 빛을 다스린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하지만 세상을 위한 신의 안배는 용사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용사가 성장하는 동안 세상을 살폈다. 용사와 함께 맞물려갈 톱니바퀴들은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이미 하나씩 제 모습을 갖춰갔다. 그중 하나는 에반을 데려가 이렇게 성장시킨 기사단장 요안이었다.
“에반은 저렇게 열심히 수련 중인데, 다들 뭐 하는 건가!”
“히익!”
“다, 단장님!”
요안이 팔짱을 낀 채 모습을 드러내자, 수련생들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게 못내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것들을 어떻게 데리고 가나.”
그 이야기를 엿들은 에반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어디 데려가주실 생각입니까?”
“그래. 서쪽 외곽에 괴물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이번엔 네 녀석들도 데려갈까 했는데, 지금 이 꼴로는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잘할 수 있습니다!”
에반의 우렁찬 대답에도 요안의 얼굴은 펴질 기색이 없었다. 에반이 어느덧 제 몫을 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영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그리 느낄 뿐, 에반 역시 도움이 되면 되었지, 짐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곧 그리 생각한 건지 조금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에 에반의 표정은 조금 더 밝아졌다. 마녀 앞에서 보였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앞에 있는 단장 요안을 믿고 따른다는 뜻도 되었기에 내 걱정은 한시름 덜어졌다.
기사단장 요안. 그는 가진 바 실력이 뛰어나지만, 솔직하고 냉정하며 무뚝뚝하고 무엇보다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아 일찌감치 황제에게서 미움을 받은 비운의 기사였다.
그에 황궁에서 편히 지내는 대신 사택으로 나와 자신을 따르는 단원들과 함께 전쟁터와 토벌만 드나들었다.
그곳에는 늘 사람이 부족했다. 귀족들에게 말해 봤자 삐쩍 마른 손으로 검 하나 들 수 없는, 하등 쓸모없는 어린애들만 보내니 아예 수련생을 맞이했다.
에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에반은 마녀의 탑을 떠나 요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무사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에반. 수련은 잘 되어가고 있느냐?”
“아, 네리아토 님.”
걷는 것조차 버거운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노인의 질문에 에반은 조금 전과 달리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제자리입니다. 어서 강해지고 싶은데…….”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에반.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니 말이다.”
주술사 네리아토. 그는 황제와 마녀, 둘을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살았다 말할 수 있는 노인이었다.
과거 영광의 시절에는 비록 어렸지만 그래도 주술을 깨우치고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경험은 에반에게 큰 가르침이 될 거라고 생각한 요안이 직접 모시고 와 이곳에서 주술사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다.
물론 빛 속성은 어디 가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리아토 또한 오래전에 힘을 잃었기에 큰 도움이 될 순 없지만 이론적인 거나 이끌어주는 건 가능했다. 그래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은 에반 스스로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그 소문 들었나? 헤레이나 황녀에게 공주 작위가 내려졌다더군.”
“공주 작위라니, 지금껏 혹시 모를 후계자조차 남기지 않았던 황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헤레이나 황녀를 노리고 있는 듯하더군. 들리는 바로는 황제와 달리 욕심이 없어 쉽지 않을 거라곤 하지만…….”
“그들도 참 대단합니다. 대체 얼마나 더 가지려고.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은 괜찮을 거네. 서로 엇비슷하게 가지고 있어 탐만 낼 뿐, 쉽사리 넘보진 못하니까 말이야.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불안해하는 겁쟁이들이 아닌가.”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고 그에 따라 세상도 달라졌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바로 황제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기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아직까진 별문제가 없었지만, 모두들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권리와 의무를 잘 이행했던 과거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권리만을 악용했으며, 더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짓이든 망설이지 않다 보니 서로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서로 맞물려 삐거덕거리기는 하나 어찌 되었던 잘 돌아가고 있던 톱니바퀴는 황제가 헤레이나 황녀에게 공주작위를 내리며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왕관만 가지면 더욱 많은 것을 탐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용사와 별개로 그 전까지 멈추어 있던 마녀의 톱니바퀴 역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용사가 성장하는 동안 세상을 돌며 나와 맞물릴 톱니바퀴들을 찾았다.
첫 번째는 어둠의 힘을 숨긴 채 후작가에서 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 마르가리토, 두 번째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노예로 팔려 이곳저곳 전전하며 몸을 굴리는 여인 루엘라, 세 번째는 역시 어둠의 힘을 숨긴 채 빈민가와 다름없는 곳에서 지내는 카토, 네 번째는 꽤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모두 빼앗기고 현재는 노숙을 하는 트루도.
모두 어둠의 힘을 지니고 있으나 운이 좋아 살아 있는 이들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 지치고 아파했다. 꼭꼭 숨어 신음했다.
나는 그들을 찾아다니며 손을 내밀었다.
“나의 힘이 되어라.”
그들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를 기꺼이 따랐다.
모두 증오했다. 경멸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증오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 삼아 살아가던 이들을 죽이고 결국 어둠 속에 숨게 만든 세상을 등졌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부모를 잃기도 한 그들에게 마녀의 등장은 축복과 다름없었다. 이제야 세상을 바꿀 때가 되었다며 기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과 마녀가 원하는 세상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손을 잡았다. 피에 젖은 채 살던 그들은 피를 원했으며 세상이 울부짖길 바랐다.
나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까웠지만 방법이 없었기에 스스로 마녀를 자처했다. 세상에게 마녀가 되건, 이들에게 마녀가 되건 둘 중 하나였다.
용사를 만들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마녀가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 그들 외에도 세 명의 어둠을 내 품으로 끌어안았고, 마지막 여덟 번째 루아단까지.
“제 작은 힘이나마 당신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결국 어둠의 신수이자 그림자의 지배자 움브라를 따라 아홉 명의 어둠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녀를 중심으로 여덟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린 용사는 성장했고 동화를 이끌어갈 모든 인물들이 준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동화가 시작될, 용사가 빛을 발할 그때를.
마녀의 이야기가 막이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 * *
앞에 놓여 있는 카드를 뒤집자 이전과는 다른 미래가 보였다. 하얗던 단장의 카드는 영광으로, 죽음의 신이 머물던 에반의 카드는 승리로 바뀌어 있었다.
미래를 쥔 열쇠를 찾아내 그들의 운명을 뒤집었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들의 운명이 뒤바뀌며 주위 상황도 다르게 돌아갔고 결국엔 용사의 미래마저 달라졌다.
마녀는 기어코 용사의 현재를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그래서 기회가 오지 않는 한 용사의 영광은 빛바래고 말 터였다.
지금은 단장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어 죽음의 신이 다가설 수 없다지만, 진실을 멀리해 결국 사지로 떠넘기는 세상을 보아하니 에반의 미래도 그리 밝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필요한 거였다. 용사를 영웅으로 만들 마녀가.
나는 입고 있는 옷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뒤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의 통로를 지나 이윽고 커다란 공간 하나를 맞이했다.
마녀의 탑과 다를 바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찬 그곳엔 나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정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걸음을 옮겨 그들을 지나치자 모두들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나는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강단 위에 올라섰다.
그 곳엔 커다란 조각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꼬리 아홉 개 달린 짐승의 모양을 한 조각상은 움브라라는 어둠의 신수이자 그림자의 지배자로, 내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숭배하는 주체였다.
그리고 이곳은 남아 있는 마지막 어둠의 집결지이자, 앞으로 시작될 모든 일의 근원지였다.
“때가 되었다.”
내가 입을 열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이 드러났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이 깊은 원한을 어둠 속에 숨겨왔다. 이제는 그들 차례다. 그들은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 눈동자를 훑어보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방해하는 자는 깊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리라.”
내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어둠에게 삼켜지는 것 같기도 하고, 검은색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며, 또 그림자로 변해 바닥에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사라지는 것은 동일했다.
나는 홀로 남아 움브라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더없는 어둠에 휩싸이리라.”
빛을 갈망하도록.
짙은 어둠일수록 피어오르는 햇살이 더욱 빛을 발하니, 용사를 위한 동화는 이제야 시작되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