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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녀는 용사를 기다린다, 용사를 위해서 (9/45)

  8. 마녀는 용사를 기다린다, 용사를 위해서

에반이 돌아갈 때가 이미 지나버렸다. 그럼에도 에반은 미루적거리며 시간을 잡아먹는다. 나 역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다. 세상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데, 아직은 그 속에서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어느새 에반이 없는 탑은 삭막하고 스산하게 느껴진다. 이리 보내고 싶지 않다.

이 또한 욕심임을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있지…….”

붉은 눈동자를 연신 도르르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에반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하지만 쉬이 내뱉지 못하고 한참이나 우물거렸다.

“나 그냥 안 가면 안 돼?”

내 마음도 에반과 같지만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릴 수는 없기에 안 된다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에반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 울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울고 싶어질 정도로 간절하니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난 여기가 좋은데.”

혹시라도 내가 대답을 할까, 에반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닉스의 눈은 따뜻해. 아프지 않아. 여기 있을 때는, 닉스와 함께 있을 때는 아프지 않아도 돼.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나는 가슴속 어딘가가 미어지는 고통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에반은 지금 내 앞에서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내보이며 밀어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뭉개졌을까. 저 작은 소년의 마음엔 얼마나 많은 상처가 존재할까.

에반이 탑에 갇힌 마녀를 보며 위로를 받았을지 모르겠다고는 생각했다.

세상에게 손가락질당하며 몸과 마음이 난도질당해 스스로 갇히길 자처한 마녀를 바라보며 공감을 하고, 또 자신보다 더욱 만신창이인 존재가 있다며 안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에반은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도피처로 삼고 있었다. 마녀를 울타리로 여기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피할 곳이 없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세상이 욕하는 마녀에게 마음을 열까.

그렇지 않아도 에반의 뒤를 따라다니며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는 모습에 나 역시 가슴 아파했다. 내 곁에 머물며 그 고통을 더 이상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곁을 내어줄 수 있는데.

그게 과연 에반을 위한 길일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 머물다가 때가 되면 세상으로 나설 수 있을까. 사람과 멀어져 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혹은 사람에 대한 원망과 증오만 키우면 어떻게 하지.

마녀의 탑은 에반에게 행복한 삶을 줄 수가 없는데.

“나 가고 싶지 않아. 그냥 여기 있고 싶어.”

잔뜩 흐려진 에반의 얼굴에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청년이 생각났다.

‘날 밀어내지 마.’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던 청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를 이해하니 곁에 머물게 해달라던 애원이 들렸다.

어린 소년을 절벽 끝까지 밀어붙인 세상이 너무 무서웠다. 그토록 아프게 만드는 세상이 너무 미웠다.

“그래.”

“어? 나 여기 있으라고? 아니면 안 된다고?”

나는 어리둥절함과 기쁜 기색이 함께 퍼지는 에반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이곳에 있으라고. 단, 오래는 안 된다. 네겐 주어진 운명이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허락하고 말았다. 밀어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에반을 더 이상 밀어낼 수가 없다. 기회를 얻기 위해선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고 마녀의 탑이 울타리가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에반은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려다가 곧 눈썹을 찌푸리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확 웃는 것은 어색한지 웃는 듯, 아닌 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웃음을 참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바람에 나 역시 기쁜 마음이 들어 중요한 것은 외면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만이라도 에반을 보듬어줄 수 있도록.

그래, 잠시만이라도.

* * *

카드를 뒤집자 미래가 바뀌어 있었다.

인간에게 떠밀려 마녀를 죽여야 했던 용사가 결국 마녀를 택했으니 인간에 의한 죽음은 조금 멀어진 거였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마녀의 탑에 머물지 못하게 막았었다. 어차피 죽음이 멀어졌다고는 하나 죽음의 신은 계속 곁에 있으므로.

흰 털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어쩔 수가 없다. 그리 태어난 짐승은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무리로부터 버림받고, 또 야생에서 숨어 살기엔 너무 눈에 뜨이기에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그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울타리가 필요한 거였다. 세상의 적인 마녀가 아니라 무리로부터 보호해 줄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래서 마녀의 탑이 아니라 인간의 무리에서 숨죽이고 살며 기회를 기다렸지만 일이 이리되었으니 방법은 하나였다.

“기회를 직접 만들 수밖에.”

고개를 들어 올리고 눈을 감자 회색빛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탑도 아니고 마녀의 숲도 아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에반의 집이었다.

찾아올 이가 없는 그곳에 누군가 들어서 서성이고 있었다. 삐쩍 마른 마을 사람들과 달리 윤기가 흐르는 얼굴, 출렁이는 살을 지닌 남자와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이 더욱 비좁게 느껴지게 만드는 장정들이었다.

에반의 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남자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몇 없는 가구와 바닥 등을 툭툭 치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더럽고 냄새나며 마구간보다 못한 이곳이 집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등의 욕설이었다.

“이때쯤이면 집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모처럼 재밌겠다는 생각에 직접 찾아왔더니 헛걸음이 되었잖아!”

“죄, 죄송합니다.”

남자는 자신보다 몇 배는 커다란 호위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화를 내었다. 시근덕거리는 그의 얼굴엔 독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하늘도 무섭지 않다는 거만함도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 마을의 영주인 베헤멘 남작의 차남 테로르였다. 그동안 에반의 뒤를 쫓으며 이 마을에 대해, 나아가 마녀의 숲과 소문에 대해, 더 나아가 내가 갇혀 있는 사이 쉼 없이 변했을 세계에 대해 알아봤기 때문에 굳이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에반의 집에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공문이 내려와 친히 전해주려 찾아왔건만. 건방진 놈. 절망에 휩싸인 그 표정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쉽군. 설마 죽은 건가?”

“마녀의 숲에 들어선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어쩌면 괴물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릅니다.”

“에잉, 재미없게. 그 저주받은 녀석을 살리겠다며 자청해서 전쟁터로 나섰던 놈의 이름이 뭐더라? 말라비틀어진 볏짚 같은 머리카락과 냄새나는 짐승의 배변을 닮은 눈동자를 지녔던 걸로 기억하는데. 버누스? 버나스?”

“보누스입니다.”

“아, 그래. 그랬지. 그 비굴하고 불쌍해 보이던 표정이 잊히지 않는군. 다리 하나를 부러트리자 더없이 절망스러워했지. 제 딴에는 믿는 것이 있었던 모양인데 말이야. 그놈 때처럼 재미 좀 보나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길을 안내받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가 아무리 정신이 없는 전쟁터라고 한들 그 속에서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 리는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서슴없이 나섰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체는 발견조차 되지 않았고, 이들 역시 자신들을 대신해 죽어간 청년에 대해선 잊어버린 듯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했건만.

결국 에반의 형을 죽인 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지금 악마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테로르였다는 말이었다.

“제길. 그럼 도대체 누굴 보내야 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갈 수는 없잖아?”

테로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에반의 집을 나섰다. 그들에게 내려온 공문은 토벌이나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보내라는 내용일 터였다.

보통은 자제를 보내야 맞는 일이었지만 정말로 친자식을 보내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아주 어린아이뿐이었다.

만약 에반을 마을로 보냈다면 테로르의 말에 가슴이 온통 난도질당하고 또 그의 장난감이 되어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몰랐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답답해지기도 했다.

전쟁터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을 터였다.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전쟁터로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 결정으로 인해 달라지고 말았다.

이를 어쩌면 좋나 고민하고 있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눈을 뜨니 언제 잠에서 깬 건지 에반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얌전히 자는 편이기는 했으나 꿈을 꾸는 건지 한 번씩 거세게 뒤척이곤 했다. 그 탓에 에반의 하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카드를 다시 뒤섞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응, 닉스도 안녕. 잘 잤어?”

잘 잘 수 있을 리가.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내 시선은 마녀의 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파와 이불에 닿아 있었다. 에반이 마녀의 탑에서 머물겠다고 말한 뒤로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가져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걸 가져다 놓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같이 자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홀로 떨어져 자야 하는 것인가.

좁은 탑 안에 저런 큰 물건을 두 개나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에반의 곁에서 자기에는 아직 껄끄러운 것이 많았다.

내가 마녀라는 사실이 그러했고, 그 때문에 겁을 먹거나 불편해할까 봐 그러했고, 지금은 어린 모습이라고 하나 성장한 뒤의 모습을 잊지 못하며 또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내가 에반의 곁에 몸을 누일 자신이 없는 것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걸 티낼 수는 없으니 잠이 없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에반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벽에 기대 설핏 눈을 붙여야만 했다.

어차피 그동안 지겹도록 잤으니 굳이 편하게 잘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간에도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누운 채 눈만 붙였으니 말이다.

아직 성장하려면 멀었는데, 내게 아낌없이 마음을 내보이던 그 청년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어린 소년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마음을 감추려고 카드를 내려놓고 다시 점을 치기 시작했다. 카드를 뒤집자 죽음이 드러났다. 에반의 미래가 바뀌었듯이 테로르의 미래도 바뀌어 있었다. 결국 전쟁터로 나서는 건 테로르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건가.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져선 연신 점을 치고 있는데, 에반이 어느새 내 곁에 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점을 그렇게 치는 거야?”

“때를 기다리는 거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인지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에반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고, 난 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전에 아침을 차려주며 입을 막았다.

* * *

“오늘은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응?”

나는 여전히 부스스한 에반에게 시선을 던졌다. 식사를 마친 뒤 에반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창가에 앉아 빛을 느끼려 애쓰고 있었다. 에반의 주위에 머무는 햇살 덕분에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에 시선을 주다가 곧이어 창가로 돌렸다.

변하고 있는 에반과 계속해서 다른 결정을 내리는 나로 인해 미래가 온통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하는데, 정작 에반의 능력은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조급해졌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눈을 감던 청년을 또다시 보게 될까 봐 두려웠고, 그로 인해 홀로 남아 끝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조금은 서두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찾아오는 기회를 바로 붙잡을 수 있도록. 마녀의 탑이 아닌 울타리가 보이자마자 그리로 보낼 수 있도록.

능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 바깥에 나가보기로 했다. 애초에 한정된 빛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 태양의 축복을 받는 에반에게 태양을 보여주지 않은 채 가르침을 주다니 어리석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는 에반의 팔을 붙잡았다. 에반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거부는 하지 않았다.

검은색 안개가 우리 둘을 뒤덮고 이내 청명한 바람과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삭막한 탑 대신 밝은 햇빛과 짙은 풀 내음이 우리를 반겼다.

“어? 뭐야? 밖으로 나온 거야? 이렇게 빨리? 간단하게?”

에반은 순식간에 질문들을 내뱉으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이동해 온 것이 신기한 모양인지 발아래를 살피기도 하고 시선을 돌려 탑을 올려다보기도 하며 감탄을 했다.

곧이어 두 눈을 감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태양을 느끼기도 했다. 그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표정에 나 역시 마음이 가벼워졌다.

부서진 태양이 에반의 주위를 둘러싸며 더욱 밝게 빛내주고 있었다. 이렇게 빠른 방법이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겁나서 나오질 못한 건지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길게 자란 풀잎을 피해 탑에 기댄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오랜만에 맞이하는 태양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서서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리 좋아하니 바로 머리 아픈 교육을 하기보다는 잠시나마 여유를 즐기게 두는 편도 좋을 듯했다.

그리고 에반은 빛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주위에 머무는 빛을 다스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 양이 방대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확연히 실력이 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러고 있던 에반은 갑자기 탑으로 달려와 가시넝쿨을 정리하더니 돌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왜 들어가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을 던지려던 참이었다.

“모처럼 나왔으니까 이것 좀 닦아내야겠다. 여기 있어봐, 금방 갔다 올게. 어디 가면 안 돼! 알겠지?”

에반은 내게 보이기 부끄러운지 단지를 등 뒤로 숨기며 계속 강조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에반이 숲으로 들어가자 결국 그림자를 보내 그 뒤를 쫓았다. 그런데 냇가에 도착한 에반은 단지를 씻는 대신 근처에 얌전히 내려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에반은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겸사겸사 찾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림자를 없앴다.

그리고 나 역시 한가로이 떠다니는 구름 떼를 바라보며 모처럼 여유를 만끽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상을 구경하는데 에반이 흠뻑 젖은 채 돌아왔다. 하얀 머리카락이 뺨과 목에 착 들러붙어 있고 옷도 덜 말라서 걸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돌아온 건지.

어쨌든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른 천 하나를 가지고 와 머리를 털어주었다. 너무 가늘어 투명하게 느껴지던 머리카락이 물을 머금어 짙은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감촉이 좋아 한껏 집중한 채 물기를 털어주었다. 가만히 서 있던 에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지?”

“아니……. 꼭 엄마 같아서.”

엄마라. 그래, 지금의 나는 엄마에 가까웠다. 여인이 아니라, 연인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청년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년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엄마였다. 그런 소년에게 나는 대체 어떤 감정을 품는 것인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얼굴이 붉어진 느낌이 든다. 용사에게 연심을 품은 것도 우스운 일인데, 아직 한참 어린 용사에게마저 같은 이라며 비슷한 마음을 느끼다니 창피한 일이었다.

현재도 아닌 미래를 바라보다니. 과거에 머물러 있던 마녀가. 아니, 이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청년을 그리고 있으니. 나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엄마도 내가 흠뻑 젖어서 돌아오면 이렇게 털어주곤 했었어.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몸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혼내기도 하고.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 생각했었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쓸쓸해졌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엄마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니까.

“때론 추억이 족쇄가 되어 나를 옭매기도 하지. 그때의 행복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어 기쁘면서도 그때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퍼지고, 그렇게라도 만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지면서도 다시 못 볼 사람인데 차라리 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닉스도 그래?”

에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들릴 듯 말 듯 작은 혼잣말이 이어졌다.

“아, 닉스는 오래 살았다고 했지. 그럼 나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겠네. 그만큼 아프고 슬프겠구나. 기쁜 만큼 슬프고 보고 싶은 만큼 아파지니까……. 괜찮아?”

에반의 질문에 머리카락을 털어내던 내 손이 멈췄다.

마녀를 이해해 주지 못할 거라 여겼던 어린 용사였는데. 기억 속에 있던 청년은 끝끝내 마녀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눈을 감았었는데, 내 앞에 있는 소년은 마녀의 아픔과 슬픔을 알아주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변하게 만든 걸까. 역시 내 행동의 변화가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일까.

나는 찌푸린 에반의 눈썹을 슬쩍 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가득 담긴 붉은 눈동자가 내 마음을 녹여주고 있었다. 이러니 어쩔 수가 없지. 과거든, 미래든, 아니면 현재든 이런 너를 어떻게 밀어낸단 말인가.

상처받은 마녀의 가슴을 이토록 섬세하게 안아주는 너를, 내가 어떻게…….

대강 물기를 털어낸 에반은 햇살 아래에 앉아 따스하게 몸을 말리고, 나 역시 그 주위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언제나 궁금한 것이 많은 에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왜 탑 근처는 이렇게 평화로운 걸까? 마녀의 숲은 저렇게 무시무시한데, 여긴 다른 세상 같잖아. 혹시 닉스는 이유를 알아?”

“어두운 힘을 지닌 것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괴물도, 괴물의 힘을 키워주는 검은 안개도 여기는 들어설 수가 없지.”

마녀를 가둔 탑인데 그저 가시넝쿨만으로 막았을 리가 없다. 덕분에 정작 마녀의 탑 주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풍경을 지니게 되었지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에반이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드나들어? 널 못 나가게 하려고 이렇게 만든 거 아니야?”

나는 오롯한 어둠이 아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에반에게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에반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 * *

하루하루 마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러갔다. 어느덧 마녀와의 생활이 익숙해진 모양인지 에반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으며, 나날이 밝아졌다.

오늘 역시 에반은 창가에 앉아 자신의 몸에 부서져 내리는 태양을 느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에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작은 소년이었던 에반은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키도 커졌고, 팔과 다리가 조금 더 길어지고 단단해졌으며, 귀밑에서 살랑거리던 머리카락은 어느덧 어깨에 닿았다.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잘라줄까 생각했었지만 결국 그대로 두었다.

거슬리는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뽀얀 뺨이 고스란히 드러나거나 동물처럼 머리를 마구 털어대는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내 기억 속에 머무는 소년도 점차 머리가 길어져 결국엔 하나로 묶었다. 그 모습도 좋았지만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긴 머리카락은 귀찮아질 뿐이니 나중엔 깔끔하게 정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지금이라도 마음껏 기르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이토록 달라졌듯 에반의 지적 수준도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작게는 조용하고 깔끔하게 식사를 하게 된 것부터, 나아가 동화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된 것까지. 기특하고 또 대견스럽게도 용사가 되기 위한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빛을 흡수하고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에반에게 내려앉는 빛은 더욱 강해졌다. 얼른 모든 빛을 포용해 어둠을 몰아내라는 신의 뜻으로 보여 경이롭기까지 했다.

주위에 가라앉아 있는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에반이 책을 보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곧 다시 시선을 내리더니 아예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용사는 들고 있던 검으로 마녀를 힘껏 찔렀어요. 사악한 마녀는 끝까지 비웃었답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녀가 죽고 세상은 평화를 찾았어요. 용사는 구해낸 공주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끝!”

유난히 잘 읽히지 않는 글자가 몇몇 개 있는 듯 그 부분에서는 말을 더듬기도 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끝까지 읽어내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많이 늘었네. 더 어려운 책도 읽을 수 있겠군.”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이제 이런 동화책은 안 읽어도 되는 거야?”

“읽기 싫은가?”

“재미없어. 이게 다 뭐야. 마녀는 늘 악당으로 나오고…….”

“마녀니까 그렇지.”

“마녀라고 해서 다 나쁜가, 뭐.”

나는 연신 투덜거리는 에반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서둘러 들고 있던 책으로 가렸다. 이곳은 너무 밝기 때문에 금방 들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마녀도 있다는 식으로 마녀를 감싸는 에반의 말에 자꾸 미소가 지어지려고 한다. 애써 표정을 정리하고 있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동화 속 마녀는 늘 공주님을 납치하는 걸까. 그렇게 힘이 강하다면 그냥 다 죽이면 되잖아. 용사가 찾아올 때까지 공주를 얌전히 데리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용사를 기다리는 거지, 용사를 위해서.

나는 이상하다는 듯 책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 하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겨나는 욕심은 점차 많아졌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고, 이대로 영원히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청년이 나이를 더 먹어가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 청년을 꼭 닮은 아이도 보고 싶었다.

이리될 줄 알았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지면 가질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더욱 바라는 게 많아졌다. 그저 용사의 손에 마지막을 볼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 점차 커져 이렇게 다양해졌다.

이룰 수가 없는 꿈임에도 욕심이 났다.

에반은 여전히 동화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마녀는 왜 용사를 죽이지 않는 걸까.”

나는 에반이 건넨 질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떤가.”

“어떤 생각?”

“마녀가 일부러 일을 꾸민 거지. 그리될 줄 알고. 용사가 공주를 구해낼 수 있도록 도와준 거다.”

용사가 행복해지도록.

내 말에 에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럼 마녀는 뭘 얻는데? 결국 죽잖아. 왜 그런 짓을 해?”

사랑하니까.

용사를 사랑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에반에게 차마 그리 말해 줄 수가 없다. 마녀가 용사를 사랑한다는 게 세상에 밝혀지면 그것 자체만으로 저주가 되어 용사를 옥죄게 될 것이다. 마녀의 사랑을 받은 용사라며 행복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건 더 이상 세상을 구해낸 용사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동화 속 마녀는 용사를 사랑하는데 그 마음을 전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용사의 행복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공주님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아닐까. 자신보다는 공주님이라는 존재가 훨씬 아름다우며 용사에게 어울리니까.

자신과 함께하면 불행해질 것이 뻔하니, 그보다는 저주받은 자신의 삶을 용사의 손으로 끝내 그로 인해 용사가 모든 이에게서 인정받는 영웅이 되어 한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편이 나으니까.

용사의 손으로 저주받은 삶이 끝난다면, 자신의 목숨으로 용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으니까.

내가 바라듯 그렇게.

네 손에 죽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리라. 내 저주받은 삶을 끝내고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나로 인해 네가 부와 명예, 사랑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그러니 나의 부질없는 욕심은 꾹꾹 눌러 빛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속에서부터 고개를 치켜드는 욕심을 잘라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싫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줄까?”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지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곧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서둘러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에반을 내리쬐고 있던 태양이 따라왔다. 그 포근하고 나른한 햇살의 온도가 내게도 닿았다. 새하얀 에반은 그 자체로 태양이 되어버렸다. 내 주위의 어둠과 싸늘함을 몰아내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은 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정리했다.

에반의 말에 의해 어린 시절 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이곳에선 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왜 동화 속 공주님은 항상 붙잡혀 가기만 하고 결국엔 용사가 구해 주느냐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해주었던 얘기였다.

그러는 중에도 에반은 얌전히 쭈그리고 앉아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기대감 어린 붉은 눈동자가 무척 귀엽다.

“옛날에 평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가 살았다. 그 공주의 이야기다.”

“펴……가앙?”

“평강.”

“펴엉가……앙. 이름이 왜 이렇게 어려워. 발음이 안 되는데?”

“지금은 사라진 옛 언어라서 그렇다.”

실은 이곳의 언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까지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가르쳐 주고 싶어도 나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내 언니는 비밀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왜 사라진 거야?”

“편한 걸 추구해서 그렇지.”

평강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 애쓰던 에반이 다시 물었다.

“가르쳐 주면 안 돼?”

“그건 배울 필요가 없다. 쓸 일이 없을 테니까.”

단호하게 말하자 에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나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이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배우고 싶어졌다. 언어를 배우면서 글을 읽고 또 뜻을 알게 되니 더 많은 언어를 배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말대로 배울 필요가 없는 말이었기에 굳이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벽에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는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평강공주가 사는 마을에는 바보 온달이라고 불리는 남자도 살고 있었다. 노모를 모시며 열심히 살던 남자였지만 아무런 배움도 받지 못해 바보라고 불렸지.”

“아무도 안 가르쳐 줬으면서 바보라고 부르다니 너무해.”

그 말이 맞았다.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바보라고 놀린다. 그건 그 사람이 바보인 게 아니라 세상이 바보로 만드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준 뒤 말을 이었다.

“평강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울었고, 왕은 그런 딸에게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낼 거다’라며 놀려주곤 했다. 그리고 시집을 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정도로 성장한 평강공주는 정말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며 궁을 뛰쳐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 말해 놓고 이제 와 아니라 하면 누가 왕명을 믿겠냐는 이유에서였다. 대왕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며 정말 온달에게 시집을 간 것이지. 듣고 있는 건가?”

나는 반응이 없는 에반에게 물었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목소리에서 나른함이 묻어 나왔다.

“듣고 있어. 닉스 목소리, 굉장히 좋아. 계속 얘기해 줘.”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정말 온달에게 시집을 간 평강공주는 궁에서 가지고 나온 귀중품을 팔아 땅을 사고 집도 사고 말도 샀으며, 온달을 가르쳐 결국 장군으로 만들어 세상을 구했다는 길고 길었던 옛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해주던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이 이야기를 해주며 스스로 능력이 되면 더 잘난 남자에게 시집을 갈 필요가 없이 자신의 남자를 장군으로 만들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더욱 잘나지면 사랑하는 이를 사지로 내몰 필요도 없어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니의 말에 따라 나약하고 어리광밖에 부릴 줄 모르던 내가 공부를 하고 또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언니가 보았더라면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문득 옆이 조용해진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았다. 에반은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햇살도 따뜻한 데다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들으니 노곤해진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꾸벅거리던 에반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싼 뒤 내 어깨 쪽으로 이끌었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자고 있다.

에반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던 감촉이 남아 있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햇빛이 스며드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평강공주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남편이 결국엔 전쟁터에서 죽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사지로 내몰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사지로 내몰더라도 죽지 않게 했어야 하는 건데 그걸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의 교훈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 * *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미처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뜨니 어느덧 해가 진 모양인지 희미하게 스며들어 오는 달빛이 느껴졌다. 그마저도 흐릿하게 보여 한참을 가만히 깜빡이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에반에게 이야기를 해주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이런 평화로움은 무척 오랜만이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

에반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아무도 없다. 이 시간에 어딜 간 건가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언가 흘러내렸다.

몸을 내려다보니 에반이 덮고 자는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두 발 역시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발과 다리, 다리를 감싸고 있는 두 팔과 아직 여린 어깨, 목과 얼굴, 붉은 눈동자와 하얀 머리카락까지.

“일어났네?”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에반의 말이 이어졌다.

“더 자도 돼. 피곤해 보여.”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그러고 보니 에반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편안하게 자본 기억이 없다.

낮과 밤이 없던 마녀의 탑에 시간의 흐름이 생기며 아무 때나 자는 것이 어려워졌고, 평범하게 생활하는 에반 때문에 더더욱 그 움직임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눈을 붙이는 것으로 보내던 지금까지와 달리 거의 내내 깨어 있으려니 조금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자지 않아도 크게 피곤하지는 않지만 익숙하지가 않았다.

에반은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싼 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스며들어 오는 달빛이 보였다. 에반에겐 달조차도 축복을 내리는 모양인지 새하얗게 부서져 주위에 흩어졌다. 달빛을 받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빛나고 어두워진 얼굴 중에서도 유난히 붉게 빛나는 눈동자만이 내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아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바라보자 에반이 작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처음 책을 만졌던 그때처럼 너무나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어서 미처 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반의 손은 결국 내 뺨을 쓸어내렸다.

에반에게 내려진 빛의 축복이 내게도 옮아온 듯 뺨을 통해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는 손을 올려 에반이 쓰다듬고 있는 얼굴을 만져보았다. 울퉁불퉁한 흉터가 느껴졌다. 아, 이걸 말하는 거였나.

이전에도 내 흉터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어둠 속에서였다. 그 이후로 밝은 곳에서 마주하게 된 나의 얼굴은 더욱더 끔찍했겠지. 차라리 악취를 풍기는 썩은 피로 가리는 편이 나을 만큼.

에반은 달빛을 등지고 있지만 나는 그 뒤로 흩어진 빛의 조각을 오롯이 받고 있었다. 아마 또렷하게 보일 터였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이 또한 욕심이겠지. 용사에게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없는 욕망일 뿐일 터였다.

“아프지 않다.”

아주 오래전에 아문 상처다. 이제는 그저 흉터였다. 아플 리가 없건만 에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붉은 눈동자에 아픔이 담겼다. 전에도 그러하더니 왜 자신이 아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나약하고 여린 소년이라니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당시엔 그저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쳤지만 지금은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누구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다. 나라기보다는 세상에게 묻는 것 같다. 마녀를 이렇게 만든, 마녀를 만든 세상에게 화를 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내 상처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을 붙잡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많이 성장했다지만 여전히 앳된 소년이었다. 아직 청년이 되려면 한참이나 더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 눈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청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목에 있는 상처를 건드리며 아프지 않느냐고 묻던, 인간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청년을 말이다.

“괜찮다.”

나는 그때 해주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내뱉었다. 걱정하고 또 안타까워하던 청년에게 해주지 못한 말을 내 앞에 있는 소년에게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족했다. 소년을 다시 만나 그 곁에 머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보고 싶었던, 다시는 보지 못한다며 가슴 아파했던 그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머리카락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지난날의 내 상처는 위로받았다.

갈수록 밝아지는 표정과 다양해지는 감정, 더욱더 환해지는 빛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내겐 에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지금 이 자체만으로도 행복한데, 존재 자체만으로 축복과 다름없는데.

이전에는 내게 내려진 또 하나의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 마지막 삶, 이제야 끝을 볼 수 있게 된 삶을 짧게나마 즐거이 보내라고, 마지막은 웃으며 눈 감으라고 보내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기에 행복할 수 있다. 끝이 있기에 마음껏 가질 수 있다. 마음껏 바라고 또 즐길 수 있다. 내가 먼저 죽을 수 있으므로. 이제야 끝이 보이므로.

“내가 얼른 힘을 키워서…….”

에반은 혼잣말을 내뱉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세상이 밉지 않아? 닉스를 아프게 만들고 결국 이렇게 홀로 두었는데.”

“뭘 하든지 복수는 되지 않는다. 깨진 접시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생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아니, 아물더라도 흉터는 남는다. 흐려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흉터가.”

“그래도…….”

“그리고 때로는 살아 있는 것이 더 지옥일 때가 있지. 그저 두고 보면 될 일이다. 죗값은 반드시 치를 테니까.”

에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릎에 턱을 대고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에반에게 저녁조차 먹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꽤 오랜 시간을 잔 것이다.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에반은 언제 깨어난 것인지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깨우지도 않고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날 바라보며.

날 바라보며? 어째서 그러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물을 틈이 없었다. 내 팔을 붙잡는 에반 때문이었다. 에반은 쭈그려 앉은 채 팔만 쭉 뻗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에반의 작은 몸이 기울어지고 그 움직임으로 인해 가느다랗게 펼쳐지는 하얀색 머리카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에반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반은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가?”

“네 식사를 준비하러.”

간신히 대답하고 다시 걸어가려는데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표정이 없는 건지, 너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든 건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에반은 내 손목을 놓아주더니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내 뒤를 따라왔다. 탑 내부가 어둡기 때문인지 에반의 얼굴 역시 흐려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는데도.

식사를 대강 다 차린 뒤 마주 보고 앉아 책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들고 있던 내 책을 빼앗는 에반 때문에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 거야.”

“닉스.”

“그래.”

“너는 네가 해준 이야기대로 나를 성장시켜 세상을 구하고 싶은 거야?”

내가 잠든 사이 이야기를 곱씹었던 모양이다. 용사를 위해 일부러 일을 꾸몄다는 마녀와 바보를 가르쳐 장군으로 만든 뒤 세상을 구한 평강의 이야기에 내 의중을 헤아려본 모양이다.

하지만 넌 모르겠지. 마녀와 평강이 그리한 진짜 이유와 네가 그리됨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네가 나를 죽여주는 것이 내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은 끝끝내 알지 못하겠지.

나는 사실은 감춘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용사가 되어 세상을 구해야 하니까. 더러움을 뒤덮고 새로운 희망이 싹틀 수 있는 눈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사람들을 구원해 줄 태양이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그런 너를 가르치고 있는 거다.”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면 계속 내 곁에 있는 거지?”

“그래.”

에반의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에반은 내가 어딘가로 사라질까 봐 불안한 듯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 잠시 갔다 올 때마다 다급하게 달려와 어디에 갔었느냐고 묻곤 했다.

자신의 곁에 있던 이들이 떠나가고 홀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녀라는 울타리마저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나야말로 에반이 다치거나 떠나갈까 봐 불안해하는데 그 사실 역시 알 수 없을 터였다.

에반은 계속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계속 있을 리도 없다.

이곳은 에반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에반을 빛으로 만들어 세상을 밝히긴 위해선 결국 마녀의 탑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야 제대로 된 행복을 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신이 내린 선물을 마녀의 품에 숨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문득 눈이 보고 싶어졌다.

차갑고 아름다우며 시리도록 새하얀 눈은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새카맣게 물드는 마녀의 마음을 가라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왕관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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