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탑에 갇힌 마녀는 어린 용사를 키운다 (8/45)

  7. 탑에 갇힌 마녀는 어린 용사를 키운다

시간이 지나고 소년이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나는 소년을 가르칠 준비를 하면서도 그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보다 자주 온다는 점.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외에도 꾸준히 더 찾아왔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오지는 않았다. 올 때마다 조금씩 자라 있었으니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소년과 눈앞에 있는 소년을 비교하는데, 그런 내 귓가에 소년의 목소리가 스쳤다.

“안녕.”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내게서 시선을 돌린 뒤 가까이 걸어온다.

“오랜만이야.”

소년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줄 수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나야 물론 소년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구를 만나 또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모두 알 수 있었지만 소년은 아니었기에 오랜만이라는 인사가 맞을 터였다.

인사를 끝으로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다. 나 못지않게 소년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마녀에게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는 용사와 그런 용사를 반겨주는 마녀라. 확실히 이상한 그림이기는 하다. 그 어떤 동화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괜히 책을 뒤적이며 딴청을 피우는 소년을 응시했다.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내가 그 곁에 다가가자 쭈그린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본다. 무릎 위에 걸쳐 놓은 두 팔 중 하나는 건들거리며 책을 툭툭 치고 있다. 인간의 시간은 여전히 빨라서 전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기는 하다.

그대로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전에 보았던 것보다 커져 있다. 내가 또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 소년의 시간은 저만치나 흘러간 것이다. 어쩌면 한창 성장할 시기여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이름은 지었어?”

“에스테반.”

“진짜 지었어?”

지으라고 말할 땐 언제고 정말 지어내니 놀라워한다. 그동안 열심히 생각했던 스스로가 어쩐지 바보 같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소년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번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테반, 에스테반…….”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익숙해지려는 건지 계속 되풀이하다가 설핏 웃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금세 사라졌다. 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어보지만 눈가가 붉어진 걸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내 감정이 되돌아온 것처럼 소년도 점차 표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줄여서 에반이라고 부를게.”

내 말에 에반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바로 질문을 건넸다.

“근데 무슨 뜻이야?”

“승리의 왕관.”

내 대답에 에반의 입이 벌어진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아하니 웃음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털어냈다.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를 보면 엄마 미소를 짓게 된다더니 뭔지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들어 올렸다. 슬슬 가르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반의 질문이 내 행동을 가로막았다.

“마녀의 이름은 뭐야?”

이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마녀.”

“이름이 뭐냐고.”

“없다.”

나 역시 오래전에 이름을 잃어버렸다. 에반이라면 이해하리라 생각했건만 또다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다.

“나는 마녀라고 부르기 싫어. 이름을 알려줘.”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닉스.”

“닉스. 알겠어. 앞으로 그렇게 부를게.”

에반은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두길 잘했다고 내심 안도했다. 에반의 이름을 지을 당시 어쩐지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아 내 이름도 새로 지었다. 원래 이름은 오래전에 잃어버렸으니 어린 용사처럼 마녀의 이름을 새로 짓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에반은 이름을 외우기 위해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소년을 마주 보고 앉아 책을 펼쳤다. 이론부터 알려준 후 천천히 익혀가는 방법으로 가르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말은 또다시 에반의 질문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기서 가르치려고?”

“그럼 어디서 가르치지?”

“아니……. 일단 좀 치우는 것이 우선 아닐까?”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머무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둡고 더러운 탑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가 훑는 곳마다 내 시선도 머물렀지만 그저 어둡고 더럽고 진득할 뿐이었다. 책만이 고운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에반의 말대로 이런 곳에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탑에 갇힌 이후로 단 한 번도 청소를 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지다가 결국엔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 나 역시 그리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깨끗이 하고 용사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내 기억 속에는 소년에 의해 대강 청소가 된 탑이 남아 있었다. 거미줄을 걷어내고 잔뜩 고여 썩어 있는 피를 쓸어내고 먼지를 털어내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어본 뒤 새카맣게 묻어 나오는 것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의 집도 그리 다를 건 없었다. 그 주위도 후각을 잃어 맡아지지 않는 대신 악취가 내 눈에 보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곳은 가만히 두면서 이곳은 치우려고 애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청소하자, 청소.”

에반은 몸을 일으키더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바닥에 놓인 책들을 고운 천에 싸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원래 무엇이었을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막대 하나를 찾아내더니 거미줄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도와. 이건 너무 더럽잖아. 앞으로도 계속 와야 하는데 이렇게 더러운 건 싫어.”

앞으로 계속 오겠다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마녀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기쁜 마음이 드는 건지, 밝아지려는 표정을 겨우 붙잡았다.

언제 올지, 또 오긴 올지,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닐지 기다리던 기억 속의 마녀는 여기 없었다. 나보다 먼저 떠날 용사를 밀어내며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는 마녀도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바닥을 쓸었다. 내 힘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반은 거미줄을 치우다 말고 가까이 다가와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안개 같은 것이 바닥에 고인 검은 물을 밀어내는 모습이 무척 신기한지 감탄을 하기도 했다.

“정말 편하다. 이렇게 좋은데 왜 나쁘게만 생각하는 거지.”

“원래 자기의 것이 아니면 아무리 좋아도 좋게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닉스의 눈에는 인간이 참 어리석어 보이겠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한곳에 모이더니 결국 계단까지 밀려났다. 물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문 하나 없이 막혀 있는 벽들로 인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계단은 굉장히 길게 이어져 있었고 언제쯤 내려갈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걱정된다는 듯 에반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난 저 계단으로 나가야 하는데. 맨 아래층에 잔뜩 고여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럴 일은 없다.”

“아, 닉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구나. 근데 저건 대체 뭐야? 비가 샌 건가?”

에반은 바닥에 남아 있는 흔적과 천장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거미줄은 다 치운 건가.”

“맞다.”

에반은 서둘러 거미줄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내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화가 나 뭐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정말 골치 아팠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곧 숨을 들이켰다. 에반이 커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이니까 일단 커튼부터 걷자.”

나는 서둘러 다가가 그 손을 붙잡았다. 커튼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와 에반의 새하얀 얼굴을 비추었다. 그 투명한 머리카락과 속눈썹, 커다랗게 뜨여진 눈매와 붉은 눈동자를 잠시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이 소년은 정말 아름답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왜, 왜 그래? 아니, 그것보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분명 저기 있었는데…….”

에반은 손가락을 들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을 가리켰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 길게 늘어져 거기까지 비추고 있었다. 더럽고 엉망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갈라놓는 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튼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긴 너무 어둡고 눅눅하잖아. 바깥은 굉장히 밝고 따뜻하니까 커튼만 걷어도 훨씬 나아질 거야.”

에반의 말에도 나는 선뜻 꼭 쥔 에반의 손을 놓아줄 수가 없다.

바깥이 밝고 따뜻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림자로 보았던 회색빛 햇살이 아닌 찬란하고 눈부신 햇살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닉스의 속성이 어둠이라서 그래? 햇빛에 약해? 아니면 어둠이 없으면 힘을 쓰기가 어려워?”

나는 걱정을 담은 붉은 눈동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반의 속성은 빛이었고 태양 아래에서 더욱 빛이 났다. 교육에 좋은 것은 물론이고 사실 에반에게 어둠이란 그리 좋지 않았다. 스스로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터였다. 이곳은 빛 하나 없는 마녀의 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부터 걱정해 주는 에반의 모습에 결국 손을 놓아주었다. 생명을 일구고 희망을 느끼게 하는 태양을 죽어 있어야 하는, 죽어야 하는 내가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나를 느끼면 뭐 어떠나 싶었다. 어차피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소년보다 먼저 안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될 텐데.

“아니, 상관없다.”

“그럼 커튼 걷어도 되는 거야?”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반이 커튼을 걷었다.

빛이 스며들어 와 탑 내부를 밝혔다. 오랫동안 어둠으로 뒤덮여 있던 탑 내부가 따스함으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죽어 있던 내부에 생명의 빛이 차올랐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내부에 미래를 일구는 빛이 차올랐다.

나는 그 하얗고 붉고 노랗고 투명한 햇살이 나와 내 공간을 어루만지는 것을 가만히 느꼈다. 눈을 감아도 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태양은 마치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그토록 거부했는데도 결국 스며들었던 어린 용사처럼 그렇게 탑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탑 내부가 밝아지자 그 더러움이 더욱 잘 보였다. 어두울 때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고스란히 드러나니 청소를 해야겠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에반과 함께 부지런히 치워나갔다.

썩어빠진 물건들은 한쪽에 쌓아두었다. 당장 들고 나가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가는 길에 자신이 내다 버리겠다고 말했지만, 드나들 때마다 가시에 긁혀 상처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아직 밝은 세상을 마주하기는 어렵겠지만 밤에 나가는 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탑 내부에 들어찬 빛을 보자 색이 입혀진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는 게 맞았다.

대강 다 치우니 탑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어둠으로 채워져 있을 때는 거리가 잘 느껴지지 않았기에 새삼스러웠다. 언제나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누워 있곤 했기에 사실 넓든 좁든 상관이 없기도 했다.

“이제 끝난 건가.”

“음, 더러운 것을 닦아내야 하지 않을까. 늘 옷이 까매져.”

에반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나는 까맣게 더럽혀진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길어 와 닦아내야 했다. 피가 고여 있던 자리 외에도 온 바닥이 더러웠다. 악취도 여전했다.

하지만 당장 치우기는 곤란했으므로 이건 내가 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반이 마을로 돌아가 있는 동안 치워두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열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밀어냈던 썩은 피가 아직 남아 있었나 싶어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한참 전에 다 내려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또 한 번 들려왔다. 어디 고여 있는 것 같아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왜 그러지.”

에반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는데 붉어진 얼굴은 감춰지지 않았다. 의아함에 다시 한 번 물으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계단 쪽이 아니었다. 바로 내 앞에서 나고 있었다.

“가지 않아도 돼.”

에반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뺨만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 흘러가는 소리는 에반의 배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제야 식사라는 것을 떠올렸다.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아니, 탑에 갇힌 이후로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없었기에 내 앞에 있는 에반은 식사를 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역시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결국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해 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마녀의 숲에서 간간이 열매 같은 것을 주워서 먹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마을에서도 상인들에게 뼈나 약초 등을 팔고 얻은 빵이나 간단한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나마도 먹지 못하고 굶는 일도 허다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있는 청년도 타고난 체격이 좋음에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었다. 몸이 많이 말라 팔다리는 휘청거리게 길어 보였고, 대충 길러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도 푸석했으며, 얼굴은 수척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잘 먹이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뭔가를 먹어야겠군.”

“여긴 먹을 게 없잖아. 닉스는 아무것도 안 먹는 거지?”

“난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 나도 괜찮아.”

익숙하기도 하고.

에반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배고픔이 익숙해진 어린아이라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던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는 바람에 가슴 한구석이 철렁했다. 그 소중한 음식을 내게 나누어주었다는 고마움과 그런 음식을 먹지 않고 버렸다는 미안함이 공존했다.

“이번에는 내가 나누어줄 차례야.”

“뭐? 무슨 소리야?”

“금방 갔다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어리둥절해하는 소년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곧바로 어둠에 휩싸였다. 내가 온 곳은 이전에 살던 집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멈춰 있기에 당시의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선했고 맛있었다. 재료도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일단은 보이는 대로 챙겼다. 전부 가져갈 여유는 없었다. 여유로울 때 다시 찾아와 천천히 챙기기로 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품에 안았다.

먹고 나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과거의 추억보다 현재의 어린 용사가 더 급했다.

탑으로 돌아오자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에반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디 갔…….”

하지만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내 품에 안긴 음식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화려하던 그 붉은 눈동자가 빛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꽂혔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음식을 건넸다. 하지만 필요한 건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내려놓을 곳이 없군.”

“어? 어? 자, 잠깐!”

에반의 품에 모조리 안긴 뒤 다시 집으로 이동했다. 탑에는 썩어빠진 탁자밖에는 없었다. 그 위에 올려놓고 먹을 수는 없기에 작은 탁자를 찾아 다녔다. 겨우 1인용 식탁을 찾아낸 뒤 다시 탑으로 돌아왔다.

내가 자꾸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니 에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식탁을 놓은 뒤 에반의 품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많이 배고팠던 모양인지 에반의 배 속이 아우성을 쳤다.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식은 굉장히 먹음직스러웠고 곧 맛있는 냄새도 풍겼다. 그걸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윽고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이 귀여웠다. 동물 꼬리라도 달려 있었다면 틀림없이 마구 살랑거리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비해 표정은 태연했다. 곧바로 달려들어 먹지도 않았다. 음식과 낮은 식탁을 살피며 질문을 건넬 뿐이었다.

“대체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게다가 뭐야, 이 탁자는. 굉장히 비싸 보이는데?”

에반의 말에 그제야 내가 들고 온 탁자를 살펴보았다. 작고 간편한 탁자를 찾다보니 대강 비슷한 것을 발견하자마자 들고 오게 되었다. 이제 보니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가장자리와 곳곳에 박혀 있는 자개, 광택이 나는 표면 등 식탁이라기보다는 장식품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값어치가 상당할 터였다. 선물받은 물건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식사나 해라.”

나는 궁금증을 한가득 담고 있는 에반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 떨어져 앉았다. 내 모습은 밥맛을 돋우기보다는 떨어트릴 가능성이 높았다. 어둠 속이었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지금은 너무 밝았다. 내 흉측함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은 탁자를 들고 와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슬쩍 도망가려 하니 단호하게 붙잡는다.

“혼자 먹기 싫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았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 나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에반의 앞에 앉아 책을 읽는 척 얼굴을 가렸다.

에반은 그제야 식사를 시작한다. 나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넋을 잃었다. 어느새 들고 있던 책까지 내려놓은 채.

“맛있어! 진짜 맛있다. 이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어. 다 처음 보는 음식이야.”

우물거리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가 어려웠지만 어쨌든 맛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모양새가 평소와 달리 거칠었다. 지저분했다.

나는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정리했다. 식사 예절은 또 언제 가르칠지 막막했다.

어린 용사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았다.

“닉스. 닉스도 먹어봐.”

에반이 무언가를 내 입가에 들이밀었다.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음식을 받아먹었다.

“맛있지?”

맛있었다. 여전히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먹는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맛있는 음식 덕분에 행복한지 에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마녀는 어린 용사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식사를 마친 뒤, 드디어 가르침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글자나 예절은 천천히 알려주기로 하고 일단 가장 급한 능력부터 키우기로 했다.

일단 에반이 배우게 될 힘에 대한 간단한 이론부터 알려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설명을 해주었는데 의외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전에 내가 사용하는 힘을 탐내던 소년에게 틈틈이 짬을 내어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는 자연 속에 있는 기운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바람은 바람이고 물은 물인데 그 속에 무슨 기운이 있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에반은 이미 자연 속에 있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물을 이루고 바람을 이루고 나무를 이루고 불을 이루고 땅을 이루는 그 기운을 알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이나 멀리 있는 괴물의 기척을 느끼는 것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챈단 말인가.

물론 남들보다 무척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게다가 생사를 오가는 지독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인 것도 있을 터였다.

자칫 방심하면 바로 달려들 괴물이 사는 마녀의 숲을 돌아다니고, 지친 몸을 누일 집조차도 그리 편안한 장소가 되지 못하니 누구보다도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숲에서 무언가를 찾거나 휴식을 취하는 일은 결코 혼자 해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감각만으로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마녀 때문에 죽었다던 소년의 형을 떠올렸다. 상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원래 숲을 드나들던 사람은 아무래도 그 형이라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아마 그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내가 해준 이야기를 조용히 정리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던 에반의 입이 열렸다.

“형이 말했었어. 모든 것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눈을 감고 바람이, 나무가, 땅이, 물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고. 그러면 네게 길을 알려줄 거라고 말했어.”

“대단하군. 주술의 기본을 스스로 깨우치다니.”

“그치?”

살짝 흐려졌던 에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재잘거리며 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형은 숲지기였어. 아무도 가지 못하는 마녀의 숲도 자유자재로 드나들어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했어. 내게 숲을 돌아다니는 방법과 그곳에서 먹을 것을 찾고 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형이야. 자연이 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잘 알아들었어. 나는 따라가려면 멀었어.”

“아마 능력을 타고났던 모양이다. 만약 주술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대단한 주술사가 되었겠지.”

나는 안타까움에 눈썹을 찌푸렸다. 능력을 타고나면 굉장히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숲을 인도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이 세계에 내려진 진정한 저주는 괴물도 아니고 욕심에 눈이 먼 왕도 아니었다. 자연의 힘을 빌려 쓰지 못하게 막아둔 것. 그것일 터였다.

인간의 자만심을 깨우치려는 신의 안배였던 것일까.

문득 내게 닿아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꽂혀 있었다. 나는 가르침을 주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가 되었든 소년이 그토록 예민하다는 건 내겐 잘된 일이었다. 가르치기 좋았기 때문이다.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에반의 예민한 감각이 내가 곁을 맴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무리 괴물의 기척과 바람의 방향을 느낄 정도로 뛰어나다고 해도 그림자를 느끼거나 맡거나 들을 수는 없으니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앞으로 더욱 예민해진다면 혹시 몰랐다. 더욱 조심해야 한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라.”

“전에 어둠 외에는 힘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럼 나는? 나는 빛이라며. 그것도 쓰지 못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빛은 인간이 타고날 수 없는 속성이다. 애초부터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 많던 주술사 중에서도 신성은 두 명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내 말에 에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늘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눈만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가득 담겼다. 그래서 더욱 다채로웠다. 갈수록 표정도, 감정도 많아지니 앞으로는 또 얼마나 화려하게 빛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던 에반이 다시 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타고난 건데?”

“신의 축복이다. 그래서 신성은 신의 힘이라고 불리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탑 내부를 밝히던 빛을 잊지 못한다. 그 따스하고 찬란하던 빛이 어둠을 몰아낼 힘이었다. 하늘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위해 용사를 내려준 거였다.

“신의 축복이라니…… 믿기지 않아. 나는 괴물이라고 했어. 저주받았다고 했어.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했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괴로움이 공존하는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태양을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인간이 가여웠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안타까웠다. 자신을 구해줄 동아줄을 자신들의 손으로 내치는 어리석음이 안타까웠다.

“너는 세상을 구해낼 용사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그런 거지.”

알아도 마찬가지겠지만. 굳이 그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알아도 어찌할 수 없게 만들면 되니까. 이 어린 용사는 그저 세상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에반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는 마녀의 숲에 버려져 있었대.”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다.

“어두운 숲 속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오고 있었대. 그 빛이 갓난아기를 비추고 있었는데 홀리듯이 다가간 형이 나를 품에 안으니까 거짓말처럼 빛이 사라졌대.”

에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울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저주받았다며 손가락질할 때도 엄마와 형은 아니라고 했어. 나는 저주받은 게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이라고. 빛에서 태어나 하얀 것뿐이라고 그랬어.”

결국 에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 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결국 죽었어. 엄마도 형도. 나 때문이야. 내가 없었으면 엄마가 그렇게 끌려갔을 리가 없고, 형도 전쟁터로 내몰리지 않았을 거야. 이런 내가 축복을 받은 거라고? 아니야, 이건 저주야. 난 용사가 아니라 괴물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지만 눈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거라고 그리 믿고 싶다며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와 형처럼 자신을 숨기고 그 비난을 막아줄 울타리가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화살을 돌릴 마녀를 찾아왔고,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은 마녀와 같은 괴물인 건지, 아니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녀는 괴물이 아닌 건지.

세상은 모두 괴물이라고 말하니 아니라고 외치고 싶어도 스스로 잠식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언뜻 드러내는 에반의 모습이 가여웠다.

나는 손을 뻗어 에반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올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대신 여느 엄마가 아이에게 그러하듯 조심스럽고 또 사랑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아니야. 너는 괴물도 아니고 저주받은 것도 아니야. 사랑하는 이를 잃은 건 네 탓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세상이 너무 강해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 앞으로 강해져야 해. 그러면 되는 거야.”

나는 에반이 내게 그러했듯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보듬어주려 애썼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 진심을 전했다.

“어쩌면 신께서 네 어머니와 형에게 특별한 임무를 내려주신 걸 수도 있어. 그리고 결국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를 구했으니 네 어머니와 형은 틀림없이 천국에 갔을 거야. 천사가 되어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너를 감싸고 어루만지는 빛은 그 시선일지도 몰라.”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나를 올려다보던 에반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터져 나온 건 울음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당황스러워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에반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알까.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마녀가 신을 믿고 있으며, 마녀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인간들에게 천사가 될 거라는 축복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찌푸려진 눈썹을 펴기가 어려운 것을 보니 나도 에반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듯했다. 울 듯, 웃을 듯, 화를 내는 듯, 어이가 없는 듯, 수많은 표정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닉스, 너는 너무 자상해. 나보다 더 힘들고 아팠을 텐데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 거지?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는 거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내게 그토록 모질게 굴었는데, 그리 많은 상처를 입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가엽게 여긴다.

나로 인해 그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 수 있다면, 내가 죽어 세상을 구해낼 수 있다면 몇백 번이고 죽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바라보던 에반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몸을 잘게 떨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내 품에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내 품에 들어차는 에반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마녀는 닉스가 아니야. 괴물은 우리가 아니야. 세상이야. 너도 알고 있는 거지?”

에반의 목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질 뿐이었다.

* * *

나는 에반을 돌려보냈다.

에반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 한참을 버티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무척 가여웠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용사가 마녀의 품에 있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를 쫓아 사람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을 피해 집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미안했다. 아직 작고 어린 에반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일투성이인데 막아주지도, 그렇다고 나서주지도 못하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차라리 에반이 가진 힘을 드러내 세상을 밝힐 빛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만 내가 탑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왜 마녀인가. 왜 빛을 지켜주고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도와줄 울타리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이곳이 동화 속이라면 강하고 정의로운 것을 동경하고 따르리라. 용사, 네가 가진 경이로운 힘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니.

혹여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을까 봐 미처 뽐내기도 전에 밟아버리고, 힘 있는 자들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어 결국 세상은 등을 돌리리.

그러니 그 힘을 지켜줄 울타리를 만날 때까지는 숨죽여 기다려야만 한다, 어린 용사여.

세상에 맞서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고 나약하니, 방패가 나타날 때까지만 기다려야 한다.

작게 웅크리고 있는 에반의 모습이 가여워 그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결국 도망치듯 벗어나고 말았다.

그러곤 마을을 돌며 쉼 없이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보았다. 언제쯤 에반에게 기회가 주어질는지 알아보려는 의도였지만 아직 조용했다.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돌아오자 지독한 어둠 대신 따스한 탑 내부가 나를 반겼다. 노을이 스며들어 와 아름다운 빛깔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끝도 없는 늪처럼 빠져들 것 같던 바닥도 치워져 있었다.

분명히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과 같은데 주위의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는 문득 두려움이 앞섰다. 내가 바꾸고 있는 이 현재가 옳은 것이겠지. 내가 바라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여전히 에반의 미래는 죽음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내 미래도 그대로였다. 조금 더 지나야 내가 바꾼 이 현재가 어떤 미래를 부를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기억 속에 있던 소년은 이제야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탑을 치우고 나와 달리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에반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 놓기로 했다.

곧 눈앞이 새카매지더니 주위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이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올 장소가 여기 말고는 없었다. 마녀가 탑을 나서서 시장에 가거나 상인을 만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 여전히 가슴 아프고, 기억 속에 있던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마지막 희망인 에반이 최우선이었다.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게 될 테니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뭘 가져가야 할까 고민하며 주방에 들어서자 온통 지저분해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에반에게 음식과 탁자를 가져다주느라고 정신없이 드나들었더니 바닥이 엉망진창이었으며, 음식도 마구 꺼내져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내 손이 닿은 장소마다 까맣게 흔적이 묻어나 있기도 했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탑이 워낙 지저분하다 보니 다시 더러워져 있었다. 역시 탑을 치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 이곳에 온 김에 손과 발을 대강 씻어내고 내가 더럽힌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 물이 나오는 주술이 걸려 있는 물건과 청소하는 도구 등을 챙겼다.

탑에 다시 돌아온 뒤 한바탕 물을 끼얹었다. 벽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더러웠다. 쓸어내고 닦아내고 밀어내고 바깥에 내다 버리고.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청소를 하면서 내가 지나다니는 자리가 다시 더러워졌다. 하지만 내가 먼저 씻는다 해도 더러운 탑 때문에 다시 똑같아질 것이 분명했다. 뭐가 우선인지 알 수 없었기에 결국 탑을 먼저 청소하기로 했다.

그러는 중에 탑은 점차 어두워졌다. 해가 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계단도 닦고 곧이어 내 몸도 닦아냈다. 대강 씻은 뒤 내가 지나다니면서 더러워진 곳을 다시 닦아냈다. 이제야 깨끗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이동해 제대로 씻고 옷을 빨았다. 옷을 말리는 동안 가져가야 할 물건을 찾아보기로 했다. 음식과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물건, 다양한 재료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도구 등을 챙겼다.

글자를 가르쳐 주어야 하니 종이와 펜, 간단하게 읽을 만한 책도 찾아다녔다. 다행히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동화책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훑었다. 책을 읽어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뽑았다. 그중에는 공주를 구해내는 용사의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마녀를 죽이고 공주를 구해내는 용사의 이야기를 읽은 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또 가져가야 할 물건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챙겨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소를 하고 물건들을 배치했다. 죽어야 하는, 죽기를 기다리며 마녀를 가두었던 탑 안에 살아가기 위한 도구들이 놓였다. 굉장히 낯설고 또 이상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더 이상 마녀를 가둔 탑이 아니었다. 용사를 키우고 보호하기 위한 보금자리였다.

온 세상을 덮은 밤 때문에 탑 안도 다시 어두워져 있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어두움이었다. 가져다 놓은 물건들이 미약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아무것도 없을 때와 달리 뭔가 들어찼다는 사실은 느껴졌다.

이게 에반이 말하던 별인가. 갑자기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내게서 별을 찾던 소년이 생각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별이 보고 싶다.”

그로 인해 문득 밤하늘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탑을 나섰다. 이제 참아야 할, 잊어야 할, 묻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익숙해져야 했다. 조금씩 더 나아가야 했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시원한 바람이었다. 간지러웠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실바람이 가슴속까지 간질이고 있었다. 그리고 향기가 났다. 마녀의 탑을 둘러싼 가시넝쿨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피워낸 꽃의 향기였다. 풀 내음도 가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 향기도 같이 흩날렸다.

천천히 눈을 뜨니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이 보였다. 회색빛으로 바라보았던 세상보다도 더욱 어두웠지만 달랐다. 환하게 비추는 달이 있었고, 질 수 없다는 듯 스스로를 뽐내는 별이 있었다. 그 빛이 내게 내려앉았다. 고요하게 감싸 안았다.

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떠다니는 구름, 조금씩 이동하는 별, 풀벌레 소리 등 지루할 틈이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만 존재했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밤이 물러나고 아침을 맞이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눈이 부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는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며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은 점차 밝아졌다.

이런 광경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고 또 이토록 아름답다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기에 나는 탑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꼼짝없이 세상만 바라보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나 왔어.”

“어서 와라.”

시간이 지나고 에반이 왔다. 계단은 여전히 어두웠기에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탑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다 뭐야?”

내가 가져다 놓은 물건과 음식을 살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과일 하나를 베어 물고는 그제야 아차해서 내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네 거다.”

나는 그런 에반에게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알려준 뒤 내 앞자리를 가리켰다. 에반은 용케 알아듣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들뜨고 경쾌한 걸음이었다. 표정도 미미하지만 밝았다. 햇살 아래에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준비해 둔 거야? 뭔가 많아졌어. 그리고 탑도, 닉스도 엄청 깨끗해졌네.”

“앞으로 계속 여기서 배워야 하니 치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건 너였지.”

“음, 고마워.”

에반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서둘러 책을 폈다.

에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숨기거나 거두려는 기색이 없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차마 바라볼 자신이 없어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단 네가 사용할 수 있는 힘에 대해 알려주지. 빛은 크게 치료와 정화, 공격으로 나뉜다.”

치료는 말 그대로 상처와 흉터 등을 치유하는 능력이고, 정화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 공격은 빛으로 상대를 태우거나 보이지 않게 만드는 등의 능력이다.

그 외에도 빛을 이용해 주위를 밝히거나 이동하거나 하는 것도 가능했다.

내가 어둠을 이용해 다양한 일을 하듯 빛도 마찬가지였다. 사용하는 이에 따라 같은 속성이라 해도 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담을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이 많아질수록 빌려 쓸 수 있는 힘도 커졌다.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도 자연의 기운을 많이 다루고 또 익숙해지고 느끼고 해야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빛 아래에 있는 편이 좋았다. 간간이 탑이 아닌 밝은 태양 아래에서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일단 괴물과 마주쳐도 네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게끔 정화나 공격부터 가르칠 생각이다.”

어둠에서 태어난 괴물이니 빛으로 공격한다면 그 여파가 상당할 터였다. 하지만 내 말에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치료부터야.”

“왜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나는 상처가 많이 생기잖아? 그리고 이 흉터들도 없애고 싶고.”

에반이 자신의 양팔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에반에게 가장 쓸모 있는 능력은 치유였다. 그리고 그 능력이라면 그 누구도 저주받았다고 외치지 못할 터였다. 오히려 누구나 탐낼 터였다.

에반은 장차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 *

에반은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눈을 감고 빛을 느끼려 애썼다. 이미 느끼고는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제 자신의 몸에 내려앉는 빛을 이끌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건만 어느새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꽂혀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탑 구석으로 향하는 내내 그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내가 음식을 꺼내자 기어이 따라오고 말았다. 아직 어려서 호기심이 많은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걸어가는 족족 뒤에 달라붙어 따라오니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아기 새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용케 부딪치거나 내 행동을 방해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뭐 하려고?”

“네 식사를 준비하려고. 가서 하던 거 마저 해라.”

“어차피 곧 먹을 텐데, 뭘.”

에반의 말이 맞았기에 입을 다문 채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먹기 좋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반은 내가 옮겨 담은 음식을 하나씩, 하나씩 가져가 차렸다. 둘이 같이 하니 준비는 금방이었고, 에반은 곧 식탁 앞에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에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만들어져 있던 요리는 거의 다 먹었기에 에반이 마을로 돌아가 있는 사이 재료들을 이용해 내가 요리를 해보았다. 앞에 있는 요리들이 그 결과물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앞서 먹었던 요리보다 어설펐다. 재료도 온통 삐뚤빼뚤 엉망진창으로 썰려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반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심 안도했다. 내가 맛을 보았을 때도 그럭저럭 먹을 만한 요리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맛이 없다고 말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하는 것도 하는 거지만 원래 손재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집안 내력이라고 웃던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른 건 다 특출하게 잘했으면서 유독 손으로 하는 것에 약하던 언니였다. 부모님도 가진 능력을 이용하지,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은 것은 오직 집사 한 명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요리를 만들어 먹여야 한다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요리를 하지 않으면 재료만 먹여야 하니까. 내가 어디서 요리를 사 올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차차 실력이 늘어가겠지, 애써 위안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근데 전에 먹었던 음식하고 다른 것 같아. 내 착각인가?”

기어코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에반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맛이 없나?”

“아니, 맛있어.”

하지만 전과 달리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고 씹을 때마다 맛있다고 외치지도 않았다. 어쩔 수가 없겠지만.

“식사를 할 때는 다른 이와 같이 먹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응? 갑자기 무슨…….”

“입을 다물고 씹어 음식물이 보이거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라.”

내 말에 에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씹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입에 음식물이 있는데 또 다른 음식물을 넣거나 말을 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숟가락을 내려놓거나 그릇에 닿을 때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라. 혹시라도 흘리면 손으로 줍거나 닦아내지 말고, 힘들겠지만 최대한 흘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에반은 커다랗게 뜬 눈만 껌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세는 물론이고 먹는 방법,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일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식사는 당연히 느려졌고 맛을 느낄 겨를도 없어졌다.

나는 그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차피 기본적인 예절은 배워야 하는 거였으니 미리 시작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에, 반. 에, 스, 테, 반. 천천히 따라 적으며 익히도록 해라.”

“닉스 이름은?”

“닉, 스. 이거다.”

“닉스. 닉스 이름이 이렇게 생겼구나.”

나는 에반에게 글자도 알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책을 혼자 보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천천히 시작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라 적고 또 동화책 제목을 따라 적으며 글자를 익혀나가는 에반을 바라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반을 가르쳐 주려면 나 역시 공부를 해야 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에반의 속성은 나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에반은 기특하게도 동화책을 훑어보며 자신이 배운 단어를 찾기도 하고, 또 비슷한 글자를 찾아내 읽는 방법을 익히기도 하며 굉장히 열정적으로 지식을 흡수했다. 이토록 배움을 갈망하던 소년을 가르쳐 주지 않던 세상과 사람들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였기에 오후 햇살은 나른하게 내려앉았고 나와 에반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각자 공부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에반의 표정이 달라졌다.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보는 사람까지 불안해질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왜 그러지.”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선을 내려 다시 공부를 하려 애쓰지만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무슨 일인가 싶어 에반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다. 하얗게 질려서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에반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다급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나 잠깐 숲에 좀 다녀올게.”

갑작스러운 말이 이어지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마녀의 숲은 위험했다. 여기까지 오고 가는 일만 해도 불안한데 왜 또 그곳에 가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얼마 안 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들어서게 될 곳인데.

“숲에는 무슨 볼일이지? 위험하니 같이 가주도록…….”

“아냐! 아냐, 됐어. 혼자 갔다 올게.”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난감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반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외쳤다.

“화장실! 화장실이 급하단 말이야!”

그러곤 갔다 오겠다며 서둘러 계단으로 뛰어갔다. 급하게 뜀박질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메아리쳐서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 내려가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방금 들었던 소리로 인해 그 다급한 발소리는 신경 써줄 겨를도 없었다. 아예 잊고 있었다. 에반은 인간이며 먹으면 배출해야한다는 사실을.

물론 에반의 뒤를 쫓아다닐 때에도 화장실에 가거나 그럴 기색이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일부러 멀리 피해주곤 했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고, 또 그 곁을 지켜야 한다 해도 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도 웬만하면 그냥 돌아왔다.

내가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해서 용납되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기에 더더욱 적정선을 지켜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마녀이기 전에 여자였다. 에반의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지.”

마녀의 숲으로 뛰쳐나간 에반의 뒤를 쫓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탑 안에 화장실을 만들자니 여건이 되지 않는다. 나는 화장실을 만들 만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포기했다.

나 역시 어둠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능력도 사용할 수가 없다. 물을 길어 오기도 어렵고 바닥을 파기도 어려운 이 시점에 어떻게 화장실을 만든단 말인가.

결국 다시 집으로 이동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교육과 음식 외에도 필요한 물건이 또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그 첫 번째가 이거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도 또 얼마나 난감한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문득 불안함이 앞섰다.

온 방을 다 돌아다니다가 겨우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탑으로 돌아오니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온 에반이 나를 반겼다.

다만 그 얼굴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 급하게 갔다 왔기 때문인지, 햇살이 붉기 때문인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자꾸 어딜 그렇게 나갔다 오는 건데?”

나는 대답 대신 내가 가져온 것을 건네주었다. 에반의 얼굴만 한 크기의 그 물건은 꼭 단지처럼 생겼는데, 겉에 새겨진 문양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에반은 이게 뭐냐고 물으며 이리저리 살펴봤다. 안을 확인하다가 손을 넣어보려고 하기에 서둘러 막았다.

“주술이 걸려 있는 물건이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맡아지지 않으며 쏟아지지도 않는다.”

“와, 신기하네. 근데 이걸 왜…….”

단지를 엎은 뒤 흔들며 쏟아지나 안 쏟아지나 확인하던 에반의 얼굴이 굳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걸 이용해라. 종종 씻어주기만 하면 된다. 저기 계단 밑에다가 두고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정 불편하면 탑 밖에다가 두거나. 하지만 숲은 안 된다. 너무 멀고 위험하니까.”

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짧게 내쉰 에반이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들고 있는 단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키더니 계단을 내려간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다시 책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꾹 참고 있던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작게 흘리고 말았다. 몸이 잘게 떨린다. 이게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게 뭐야.”

마녀의 탑에 점차 많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온갖 살아가기 위한, 살아가는 흔적이 다 새겨지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 들어 책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 온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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