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린 용사는 빛의 사랑을 받는다
나는 탑으로 돌아온 뒤 가져온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소년의 뒤를 좇았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있었던 공부를 하려니 재미있기도 했다. 역시 주어진 시간이 짧아야 최선을 다해 즐기고 또 즐거울 수 있는 거였다.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내게 죽음이란 크나큰 축복이 된 지 오래였다.
내가 어린 용사에게 가르쳐 줄 지식을 쌓는 동안 소년 역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강해질 수 있다는, 괴물이 아니라는, 세상을 구해낼 용사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데 보내던 소년은 열심히 움직였고 최대한 먹었다. 살아갈 의욕이 생겨난 듯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을 드나드는 소년을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경멸했지만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물론 상처받고 아파했지만 그래도 털어냈다. 그들이 결국 미안해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때까지 참으려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무언가 달라지자 당황스러운 건 마을 사람들이었다. 죽어 있던 소년에게 생기가 돌고 또 휘두르는 대로 이리저리 상처받던 소년이 덤덤하게 털어내니 무언가 불안해진 듯했다.
나는 시간이 촉박함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탑에 머물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소년에겐 기회가 필요했다. 무사히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해 줄 뒤가 있어야 했다.
마녀는 용사에게 희망과 평화라는 왕관을 씌울 생각이지만, 그 왕관이 마녀 덕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즉시 날카롭고 볼품없는 가시왕관이라는 족쇄가 되어 용사를 조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녀는 그림자여야만 했고, 용사의 밝은 빛을 지켜줄 울타리는 따로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리며 참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바쁘게 지내던 소년이 탑에 찾아왔다. 마을에 들르는 상인이 다시 먼 길을 떠날 때, 그때가 탑에 올 수 있는 시기였다. 그 전까지는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숲에서 이것저것 가져다주며 근근하게 생활했다. 만약 상인이 없다면 소년은 굶어 죽을는지도 몰랐다.
“이게 다 뭐야? 원래 없었잖아.”
소년은 탑 안에 새로 생겨난 물건이 신기한지 기웃거렸다. 처음 오자마자 하는 말은 인사가 아니었다. 그 묘한 거리감이 거슬려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겨주지 않았다. 반겨주지 않는 이에게 인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년은 언제나 내게 먼저 다가왔는데, 나는 그런 소년을 밀어내기만 했다. 달라져야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내 인사에 소년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도 서둘러 책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앞으로 계속 오게 될 장소니 반겨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건만 어쩐지 어색했다. 얼마 전에 기억 속의 세상을 마주했더니 나도 모르게 과거의 나로 착각한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년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갑자기 걸음을 놀려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들고 있는 책으로 얼굴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년은 책을 빼앗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씻었네? 깨끗해졌어.”
서둘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뒤덮은 끔찍한 흉터가 새삼 부끄러웠다. 청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 소년이지만 나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청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될 그 청년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이곳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 텐데 가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소년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청년과 다르다. 언제고 그러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내게 죽음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욕심이란 끝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나는 겨우 진정한 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소년이 빼앗은 책을 다시 가져왔다.
“마녀가 뭐 이렇게 젊어? 엄청 오래 살았다고 들었는데.”
“마녀니까.”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이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년이나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나를 훑는 소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다행히 침착한 모습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소년은 한참을 그렇게 나를 훑었다. 마녀의 본모습을 보게 되어 신기한 건지, 아니면 그저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른 모습이 생소해 연신 시선이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상처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를 입힌 건가?”
“그래.”
소년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지만 모른 척했다.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청년은 내 상처를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시야를 가렸다. 본인도 인간이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
그래서 혹시 소년 또한 그런 죄책감을 가진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자그마한 입새로 한숨이 새어 나오나 싶더니 제 스스로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금세 사라졌지만. 소년은 표정을 감추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픈데.”
“뭐?”
“나는…… 주먹만 한 돌에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은 적도 있고, 헷갈리는 바람에 독버섯을 잘못 먹어 일주일 내내 끙끙 앓은 적도 있어. 나무 밑동을 파다가 손톱이 빠진 적도 있고, 화살에 맞아 한동안 다리를 쓰지 못한 적도 있고.”
나는 소년이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가만히 들어주었다. 저 자그마한 몸으로 참 많은 고통을 받았다. 여느 소년이라면 평생을 가도 겪어보지 못할 고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인간들로 인해 아팠던 것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몽둥이로 맞아 손가락이 부러진 적도 있고, 내가 머무는 곳을 태우는 바람에 뛰어나오다가 살이 조금 그을린 적도 있어.”
“아팠겠군.”
“아팠어. 많이.”
어느새 쭈그리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걸친 소년은 다시금 슬쩍 책을 들고 있는 내 손을 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아팠는데 그래도 흉터는 거의 남지 않았어.”
“…….”
“그 정도로 흉터가 남으려면, 대체 얼마나 아파야 하는 거지? 상상도 안 가.”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애썼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내 상처를 보고 언뜻 공감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공감은 결국 마녀를 이해한다는 뜻이었고 나아가 동정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소년의 상처를 가여워하듯, 소년 또한 마녀의 상처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너도 정말 밉겠다. 널 아프게 만든 사람들이…….”
소년은 마녀의 흉터를 보고 징그럽다, 끔찍하다 여기는 대신 그게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덧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청년과 달리 소년은 자신이 마녀를 괴롭힌 무리에 속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소년은, 세상을 밝힐 어린 용사는 마녀에게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속마음을 얼핏 비추고 말았다.
* * *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소년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 바닥에 내려져 있는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탑 바닥은 워낙 더러웠기에 고운 천을 깐 다음 그 위에 올려둔 책이었다.
내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다행히도 소년은 그 책을 조심스레 다루어주었다.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었다.
“읽을 줄 아는 건가.”
“아니, 전혀.”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욱 막막했다.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았다. 소년은 알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가게 될 길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세계 역시 가진 능력만으로, 타고난 운명만으로 인정받기에는 너무 썩어 있었다. 밟을 수 없는 위치가 되어야 했다.
“안타깝군.”
“내가 모르고 싶어서 모르는 게 아니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렇지.”
무시한다고 생각한 건지 소년은 투덜거렸다.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사람과 대화한 지 오래되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가르침을 주지 않는 세상이 안타깝다고 말한 거다.”
누구나 배워야 하는데,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가 있는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는 자의 밑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내 말에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그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네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래야지.”
그럴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알려줄 생각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다.
소년은 내 곁에 앉아 책을 훑어보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이거 어디서 가져온 거야?”
대답을 하지 않자 질문을 바꾸었다.
“역시 탑을 벗어날 수가 있는 거지?”
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은 이어졌다.
“근데 왜 벗어나질 않는 거야?”
나는 답하지 않았지만 소년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빼앗기도 하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추궁하기도 하며 괴롭혔다. 어째서인지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보다 더 집요했다.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
“벗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왜?”
“벗어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벗어나면 이보다 더 괴롭다. 차라리 탑이 낫지.”
내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에 도리어 내가 의아해졌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어째서인지 이곳이 더 나아. 여기가 더 편해.”
나는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소년도 알고 있을지 몰랐다.
이곳은 시선이 없었다. 욕하고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이유 때문에 탑에 갇히는 것이 좋았다. 내 곁을 떠나갈 이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욱 큰 것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욕하지 않았다. 상처 입히지 않았다.
이곳은 나를 가둔 탑이자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였다.
그것을 이해하는 소년이 가여웠다.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를 찾아 헤맸을 소년이 안타까웠다.
“그러면 마녀는 세상이 좋아지면 나갈지도 모르겠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다. 죽을 테니까. 나는 세상을 나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죽음을 택하는 편이 좋으니까. 삶을 끝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하지만 소년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죽지 못하게 하거나 죽음을 선사해 주지 않을까 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 기억 속의 소년은 내게 죽음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소년도 내가 죽지 않으며 내 곁에 있는 이들이 모두 떠나가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죽을 자신과 죽지 않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던 슬픔은 용사인 자신과 마녀인 내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쯤 알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 * *
나는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내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힘든 길을 찾아온 소년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다고 볼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자 소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일단 확인부터 해보기로 했다. 내가 느낀 게 맞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없다. 혹시라도 겁을 먹거나 역시 마녀라며 도망을 칠까 봐 걱정이 앞선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녀를 믿지 못하는 용사의 모습에 상처를 받거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스스로가 한심하다. 당연한 일에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을 하다니.
소년은 내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아예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앉았다. 어둠 속에서 마주 보고 있자니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소년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하며 입이 열리길 기다려주었다. 그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면 평범한 소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마녀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인 듯 보였다.
나는 소년의 눈빛에 용기를 내어 손바닥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소년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었다.
“뭐가 보이나.”
탑 내부는 진득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속에서 무언가를 구별해 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언제나 어둠을 꿰뚫었다.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애썼다.
“아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내 손바닥 위에는 탑 내부를 잠식한 어둠과 확연히 구분되는 성질의 어둠이 스르륵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숨 쉬고 있었다. 곧이어 내 의지에 따라 내 팔을 감싸며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조종한 거였다. 보이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기운만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 이 정도는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직접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숲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니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기척과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자연 속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이건?”
내가 소년에게 손을 뻗자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몸을 바로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무심결에 보인 그 행동으로 이때까지의 소년의 삶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늘 긴장하고 몸을 보호해야 했던 그 생활이 보였다.
뻗었던 손을 거두려던 참이었다.
“방금 전엔 깜짝 놀라서 그랬어. 뭐 하려고 했는데? 괜찮으니까 해봐.”
소년은 거두려던 내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나는 내 손을 잡은 작은 손에 시선을 두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 건지 깨달은 소년이 놓아주었다.
참 이상한 소년이다.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상황을 수습한다. 내가 뭘 하겠다며 납득을 시키기도 전에 먼저 허락을 해준다. 나를 믿는 건지,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소년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히질 않는다. 그저 말간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순진무구하면서도 가면 같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억 속에 있던 소년도 감정이 북받쳐 울 때를 제외하곤 거의 이런 표정이었다. 기껏해야 눈썹을 찌푸리는 정도였다. 감추는 것이 익숙한지, 아니면 잃어버린 건지 역시 알 수가 없다.
“왜 그래? 기분 상했어?”
어린 용사가 마녀의 기분을 신경 써주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어린 용사는 나약하고 따뜻하다. 내 앞에 있는 용사도 마녀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니 내가 더 잘해야 했다.
나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작았다. 이렇게 작고 어리던 소년이 나보다 커졌던 것이 새삼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모습을 털어내며 손바닥에 집중하려 애썼다.
“어?”
“왜 그러지.”
“뭔가 느껴져.”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음…….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뭔가 있어.”
확실히 예민하다.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 어렵지 않다. 자신이 가진 기운을 느끼고 다스리기 시작하면 될 테니 다행이었다. 어쩌면 이미 하고 있는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자신이 하고 있는 게 무언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 그저 내 예상이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진에 시선을 돌렸다. 미리 준비해 둔 터였다. 하지만 소년은 바닥에 깔려 있는 그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막 입을 열려던 참에 소년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진짜 뭔가를 가르쳐 주려는 거야?”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의아함을 느낀 건지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난…… 그냥 네가 심심해서 그러는 줄 알았거든.”
“뭐?”
“네게 좋은 일이 아닐 텐데 가르쳐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심심하던 찰나에 어린애가 찾아오니까 놀려주거나 괴롭히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소년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게 오히려 마녀다웠다.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것이 이상한 거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어린 용사를 달콤한 말로 꼬드겨내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웃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마녀의 이미지였다.
소년의 말을 이해하자 이번에는 다른 의아함이 생겨났다. 그러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이곳에 찾아왔다는 뜻이 아니던가.
“자신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여기를 찾아왔다고? 왜?”
소년은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곧이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마녀와 좀 많이 달라서 어쩌면 진짜일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어.”
“그러다가 진짜 나쁜 마녀이면 어쩌려고.”
대화를 하다 보니 이건 용사와 마녀가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락없이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던가. 용사의 나이가 아직 많이 어리니 어쩔 수 없나.
심지어 순수하고 솔직한 소년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속을 숨기지 않게 된다. 정말 이상한 능력을 지닌 소년이다.
소년은 고민하는 모양인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기는 왔는데 자신도 무슨 생각으로 온 건지 알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분명히 걱정이 되었을 터였다. 아무리 강해지고 싶고,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싶다고 해도 쉬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말로 지금보다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녀가 아니라 마신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코 간단하게 찾아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겨우 생각이 정리된 건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그 붉은 눈동자가 너무 말갛고 깨끗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음, 날 죽일 생각이 없잖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죽였을 테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내게 뭔가를 바라고 있는 거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 도와줘서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거든.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테고. 네게 나쁜 일이 아니니까 도와주는 거 아냐?”
아, 그런 거였나.
소년은 나와 자신이 거래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내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세상을 구해내고, 그로 인해 내가 얻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년은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망설였다. 이윽고 입이 벌어지고 소년의 말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넌 내가 듣던 거랑 달라. 내가 지내는 마을 사람들보다도 편하고…… 착한 것 같아. 그래서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
“다르다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얘기도 들어주고, 내가 용사라고도 해주고…… 날 이상하게 보지도 않고.”
소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잖아,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
“아니, 아름답다.”
내 말에 소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상하다고? 그렇지 않다. 소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아름답다.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색상보다도 찬란했다. 태양의 축복을 받고 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것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상한 거였다.
“새하얀 눈과 붉은 태양을 닮았다.”
소년은 내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 세게 문지르는 바람에 볼이 이리저리 뭉개졌다. 눈썹도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혹시 우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붉어진 뺨과 귀만이 부끄럽다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리 아름다운 색상을 보고 저주받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불쌍했다.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과 햇살을 외면하는 그 무지함이 안타까웠다. 언제나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과 귀를 막은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근데 눈이 뭐야?”
소년의 물음에 절로 새하얀 머리카락에 시선이 빼앗겼다. 소년의 머리카락만큼 하얗고 깨끗한 거였다. 나도 아주 어렸을 적에 딱 한 번 보았지만 그 신비로움에 매료되고 말았다.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강렬히 각인되었다.
“본 적이 없나 보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고 깨끗하고 차갑다. 체온에 닿으면 사르륵 녹아 사라지지. 꼭 환상처럼. 세상의 더러움을 자신의 몸으로 뒤덮어 가려주고 녹으면서 생명을 일깨워줄 물이 된다.”
“그런 게 있어?”
소년은 신기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그 두 눈이 처음으로 빛을 품었다. 빛을 머금은 붉은 보석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생겨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마 품을 수 없는 태양 같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담은 소년은 굉장히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보여주지. 네 머리카락과 꼭 닮은 눈을.”
소년은 기쁘다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탑을 벗어나 눈을 보러 가겠다니, 대체 무슨 용기로 그런 약속을 하고 만 것인가. 하지만 눈앞에서 흐트러지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 역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눈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 보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두 번 다시 그리워할 일이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얼굴 앞으로 끌고 와 엄지와 검지로 집은 뒤 살펴보려 버둥거리는 소년을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가까이에 있는 머리카락을 보려 애쓰고 있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였지만 표정은 밝았다.
저 소년과 함께 눈을 보게 된다면 즐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년을 이끌고 미리 준비해 둔 진 앞으로 걸어왔다. 소년의 타고난 속성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속성력을 높여주는 진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그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은 책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천천히 그려내었다.
탑 내에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소년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손을 대려고 하기에 서둘러 막았다. 조금만 달라져도 아예 다른 내용이 되어버리기에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무언가를 느낀 건지 한 걸음 물러서 눈으로만 훑어봤다. 굉장히 영리했다.
어쩌면 눈치가 빠른 걸 수도 있다. 소년을 야생동물로 만들던 환경을 떠올리자 얼굴이 굳었다. 가여웠다. 살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어야만 했던 소년이.
하지만 그것은 소년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이건 뭐야?”
“확인할 것이 있으니 저 가운데에 앉아라.”
“이걸 밟지 않고 어떻게 넘어가지.”
소년은 난감한 듯 진 주위를 서성였다. 진은 굉장히 넓게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만 제외하곤 복잡한 무늬가 가득했다.
그 위에 놓여 있는 종이들이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작은 바람만 불어도 움직일 터였다. 아무리 소년이 민첩하고 작은 몸집을 지녔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쉬이 다가서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넘어갈 만한 자리를 찾았다. 그 모습이 꼭 냇가를 만난 어린 동물 같았다.
나는 건너가야만 하는데 건너가지 못해 그 주위만 맴도는 어린 동물을 도와주기로 했다. 어둠을 일으켜 바닥을 가렸다.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몽글거리며 생겨나자 소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신기한 듯 다시 쭈그리고 앉아 검은 구름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찔러보는 소년의 모습에 도리어 내가 신기해졌다.
보통은 무서워하지 않던가. 소년은 분명히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고 없었다. 능력이 걸린 물건도 모조리 황족과 귀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옛날 동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임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낸다.
“이게 마녀의 능력이야?”
“그래. 그 위로 걸어가 가운데에 앉도록 해라.”
“우와, 이상해. 이게 뭐야.”
소년은 조심스레 발을 올려놓고 그 느낌이 이상하다며 제자리에서 잘근잘근 밟았다. 하지만 재미있는지 곧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이상해. 구름을 밟는 게 이런 느낌일까?”
나는 그토록 순진무구한 웃음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곱게 휜 눈이 연신 반짝거리고 활짝 벌어진 입 탓에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운데에 가서 앉고도 만져지는 듯, 만져지지 않는 듯 이상한 어둠을 툭툭 치며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마 없앨 수가 없었다. 없애기가 미안했다.
그리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소년이 고마워서 없애고 싶지가 않았다.
불길한 어둠의 힘을 사용하기에 모두들 무서워하고 꺼림칙해했다. 쓸모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불쾌해했다.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서워했다.
이윽고 마녀로 몰려 끌려가게 되고 나서야 역시 저주받은 힘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사용하는 힘은 그런 거였다.
하지만 소년은 밝게 웃으며 가지고 놀았다. 마녀의 어둠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재미있어했다. 참으로 이상한 소년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놀던 소년이 흥미를 잃은 건지 내게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뺨도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더욱 어려 보였다.
문득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라 서둘러 어둠을 없애버렸다.
소년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내게 물었다. 어딘가 들떠 보이기도 했다.
“내게 이걸 가르쳐 준다는 거야? 나 이런 걸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런 능력을 배운다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건 타고나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타고난다고 해도 사용할 수가 없는 능력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은 어둠뿐이지만 만약 소년이 어둠의 힘을 사용한다면 나처럼 탑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능력을 사용하는 이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은 다 죽었고, 다른 속성은 사용이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사실 어둠 외에도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이 하나 더 존재했다. 그거라면 이렇게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소년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터였다. 물론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야 함과 동시에 타고날 수 없는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소년은…….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눈을 감고 그 주위에 느껴지는 기운에 집중해라.”
소년은 표정을 지우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게 더 중요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소년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진에 내 기운을 밀어 넣었다. 부디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봤던 것이 환상이 아니었기를. 내가 느낀 것이 진실이기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은 소년의 기운에 반응을 보였다. 일단 타고난 기운이 있다는 건 밝혀졌다. 문제는 그 기운의 속성이었다. 나와 같은 어둠이라면 영원히 봉인을 해두어야 하고, 다른 일반적인 속성이라면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내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마녀, 이거 왜 이래?”
진 위에 놓여 있던 종이들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소년은 자신의 주위에 떠오른 종이에 당황스러워했다. 곧이어 그 종이의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이 아니었다. 불로 타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처럼 보였다.
소년의 얼굴이 빛에 의해 하얗게 드러났다. 언제나 어둠 속에서만 봐야 했던 그 눈부신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상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상을 지닌 소년은 자신의 앞에서 빛을 뿜으며 흩어지는 종이가 신기한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 했다.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부서진 태양이 소년의 주위를 맴돌고, 축복이라도 받듯 더욱 찬란하게 빛나던 소년을 바라보면서도 세상 속에 녹아든 소년이 아름다워 내가 무엇을 잘못 본 거라 생각했다.
제발 맞기를 바라면서도 그럴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했건만.
“밝은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리라.”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소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진이 빛을 내뿜었다. 곧 탑 내부로 뻗어나간 그 빛이 늘 어둠에 휩싸여 있던 곳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너무 밝아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속에 앉아 있는 소년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소년이 다가왔다. 빛은 금세 사그라져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욱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겁을 먹은 건지 불안에 떠는 그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태양 아래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던 소년으로 보였다. 빛의 축복을 받던 작은 소년이 떠올랐다.
어린 용사는 하늘이 내려준 신의 선물이었다.
어둠을 몰아내게 할 신의 빛이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리라.
마녀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어린 용사의 힘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기억 속의 용사는 왜 자신을 죽이지 못했던 것인지, 또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 * *
“너는 빛을 타고났다.”
“빛?”
나는 내 앞에 앉아 얌전히 이야기를 듣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빛이었다. 보이는 모습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어린 용사를 모른 채 죽이려 드는 인간이 어리석었다. 아니, 알게 된다고 해도 죽이려 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녀를 죽인 뒤 영웅이 되어 행복하게 살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름 없는 떠돌이 용사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위협을 느끼는 몇몇 이들이 손을 뻗을 터이고, 겨우 마녀를 없애 어둠을 몰아낸다 하여도 그 공을 인정해 주려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필요한 거였다. 소년의 그림자가 되어 지켜야만 하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 자연을 이루는 기운을 이용할 수 있는 주술사라는 존재가 있었다. 각자 타고난 속성의 기운을 자연 속에서 빌려 쓰는 이들이었는데, 거의 대부분 불, 물, 바람, 금속, 어둠이었다.”
“자연 속의 기운을 빌려 쓰다니…….”
곧이어 소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나보고 빛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난 빛을 빌려 쓸 수 있다는 거야?”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갸웃거렸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을 테니 당연했다.
“그래.”
“난 이상하게 태양이 좋았어. 밝은 곳에서 햇빛을 쬐고 있으면 뭔가 따뜻하고 만족스러웠어. 이거랑 연관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태양 아래에서의 소년은 확연히 편안했다. 더욱 찬란하게 빛이 났고 소년을 어루만지는 햇살이 느껴졌다. 소년은 굉장히 예민하니 자신도 모르게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을 살피기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다가, 또 뿌듯한 표정을 짓고 이내 웃음을 참는 소년을 바라보며 나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설마했지만 정말 빛의 속성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장 뛰어나며 지금껏 단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아 신의 힘이라 불리던 속성이었다. 타고날 수가 없으며 신의 축복을 받아야만 지닐 수 있다던 속성이었다.
내 앞에 있는 어린 용사는 신의 축복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근데 왜 지금은 없어? 그 주술사라는 존재들 말이야.”
“세상이 어둠에 뒤덮인 이후로 어둠 속성을 지닌 주술사 외에는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어둠의 힘을 지닌 사람만 남았지만 그마저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결국엔 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마녀의 속성은 역시 어둠이구나.”
“그래, 암흑이라고도 하지.”
“음, 잘 어울린다.”
소년이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얼굴이 굳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둠하고 잘 어울렸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어둡고 삭막한 분위기. 저주받았다며 손가락질하는 것이 당연했다. 세상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어둠과 닮았으니.
“마녀는 꼭 밤하늘을 삼킨 것 같아. 마녀를 보면 긴장이 풀리고 나른해진다고 생각했는데 밤을 품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마녀와 함께 있는데 긴장을 풀고 심지어 나른해지는 어린 용사라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밤이라니.
언제나 괴물을 불러내는 어둠만을 연상하던 사람들과 달리 참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을 떠올려주는 어린 용사가 고마웠다. 소년은 늘 그랬다. 태양처럼 밝은 눈을 지녔기 때문인지 볼품없는 나를 한 여인으로 봐줄 정도였다.
나는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란한 햇살로 세상을 밝히는 용사와 고요하게 덮는 마녀라. 밤이 있기에 아침이 더욱 기다려진다. 어둠을 몰아내기에 더욱 밝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거였다. 소년이라는 태양을 인도하려는 마녀니 밤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여기가 너무 어두워서 별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워.”
“별이라고?”
“응, 별.”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지 바닥에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운다. 그러더니 곧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근데 왜 어둠의 힘을 지닌 사람을 다 죽인 걸까. 그저 자연의 힘을 빌려 쓸 뿐이잖아.”
불안했던 거겠지.
나를 내려다보며 웃던 지배자를 떠올렸다. 아무도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데 어둠만은 예외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 위협적이고 두려운 힘이다.
그것은 기운을 잃어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황제도 마찬가지다. 가진 권력과 병사들로 나라를 지배하고 전쟁을 일으켜 점차 그 힘을 불려가고 있지만 언제나 불안했을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우리가 자신의 자리를 넘볼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비록 주술이 걸린 물건들을 긁어모아 자신의 몸을 지키고도 남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을 테고, 때마침 잦은 전쟁과 역병, 식량부족 등으로 고통과 가난,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의 원망을 받아낼 희생자도 필요했으니 안성맞춤이었으리라.
하지만 소년에게 이런 얘기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소년은 마녀를 이해하거나 동정심을 품는 대신 칼을 꽂아야 했다.
“마녀기 때문이지. 어둠의 힘을 지닌 자들로 인해 괴물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다 죽고 마녀밖에 남지 않았다며. 널 죽이면 괴물이 없어지는 거야?”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내 말에 소년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새삼 궁금해졌다. 지금 바깥세상에선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내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지. 나를 기억하기는 할지.
“너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군. 세상은 마녀에 대해 잊어가고 있는 건가?”
“옛날 옛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너는 정말 죽지 않아? 굉장히 오래 살았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군.”
소년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소년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분명 앞에 앉아 있던 마녀가 어느 순간 검을 빼앗아 들자 소년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걸 보니 떠올랐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청년도 내가 이렇게 검을 빼앗아 찌르자 표정이 크게 일렁였다. 심지어 죽을까 봐 걱정하며 울기까지 했었다.
나는 단검을 거꾸로 쥐어 내 심장을 향해 둔 뒤 힘껏 내찔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만둬!”
소년은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등과 머리가 돌로 된 바닥에 부딪혔다. 그 충격에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너 미쳤어?”
하지만 곧 내 위에 올라타 검을 든 내 손을 움켜쥔 채 시근덕거리는 소년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소년의 붉은 눈동자를 이토록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기분이었다.
겨우 진정하곤 입을 열었다.
“왜 말리는 거지. 내가 죽으면 괴물이 사라진다는데.”
“그, 그래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년이 겨우 찾아낸 변명을 내뱉었다.
“넌 날 가르쳐야지! 이렇게 죽으면 어떻게 해!”
소년은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어린 용사였다. 마녀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으면서 또 이렇게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다니.
내 기억 속에 있는 청년도 이렇게 나를 내려다보며 울었다. 그래서 청년의 눈물이 내 얼굴을 적셨다.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닦아냈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내 얼굴이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내가 이끄는 대로 내 몸 위에서 내려와 바로 앞에 앉았다.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였다. 작은 손으로 어찌나 꼭 붙잡고 있는지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검을 돌려주었다.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검을 챙겼다. 혹시라도 또 빼앗길까 봐 한 손으로 꼭 쥔 채였다.
“어차피 난 죽지 않는데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내 말에도 가만히 노려만 보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
무슨 뜻인가 싶어 그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소년이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마녀가 맞는지 모르겠어. 아니, 내가 들었던 그 마녀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스러워. 넌 별로 사악해 보이지도 않고 괴물을 불러내 세상을 괴롭게 만들 이유도 없어 보여.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던 그 마녀로 보이지 않아. 너 정말 마녀 맞아?”
내가 마녀든 아니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그대로인데.
어린 용사는 나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막아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소년이다.
그리고 그런 어린 용사의 말과 행동에 가슴속 어딘가가 지끈거리는 나도 참 이해할 수가 없는 마녀다.
* * *
소년은 기분이 나쁜 모양인지 벽에 기댄 채 쭈그려 앉아 있었다. 가르치려고 해도 반응이 없고 이만 돌아가라고 해도 무시했다.
소년은 오가는 데만 해도 며칠이 걸리니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되었다. 마녀의 숲에서 그리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진다면 더더욱 끔찍한 시선을 받게 될 터였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팔에 파묻고 있어 코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유난히 저 자세를 좋아하는 듯했다. 쭈그리고 앉기. 쭈그리고 앉아 팔을 걸치고 얼굴을 묻기. 혹은 턱만 살짝 걸치고 쳐다보기. 어쩐지 안쓰러워 껴안아주고 싶은 자세를 고집했다.
나는 책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시선이 계속 소년에게 향했다. 결국 책을 덮고 내려놓았다. 일부러 저리 앉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소년.”
“내 이름은 소년이 아니야.”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는 황당함에 말을 잇질 못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팔에 턱을 묻고 어둠만 응시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딱 한 번,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서로 이름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마녀라 불리고 있었고, 소년 역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다는 이유였다.
“소년이라고 불리기 싫다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려주어야지.”
“없어. 내 이름은 형이 죽으면서 같이 죽었어. 모두들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거든.”
나는 씁쓸함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빛과 어둠이라는 정반대의 두 사람이 이리도 닮을 수가 있다니, 겪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같은 세상이라서 그런 건가. 그래, 우리를 이토록 몰아붙이는 세상이 같기 때문일지도.
“그러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야 하는 건가.”
내 말에 소년이 드디어 나를 바라본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기쁨이라는 감정을 본 것 같아 의아해졌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이 기쁜 일인가.
어찌 되었건 나를 바라보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이으려던 참이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달은 소년이 고개를 재빨리 돌리더니 다시 팔에 묻었다. 나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결국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소년은 얼굴을 파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알고 있을 텐데.”
소년은 내가 자신의 검으로 스스로를 찌르려고 한 이후로 계속 이러고 있었다. 그러니 기분이 상한 이유라면 그거밖에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소년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일부러 말투도 신경 썼다. 소년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뭐를.”
이 무슨 난감한 질문이란 말인가. 여느 연인, 그것도 남과 여의 역할이 바뀐 듯한 대화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겨우 삼킨 뒤 대답을 했다.
“죽으려고 했던 것.”
그제야 소년은 나를 향해 몸을 돌린 뒤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스스로를 죽이려고 해? 그것도 내 앞에서!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 앞에서 죽으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 그리고 심지어 내 검이잖아.”
용사에게 혼나는 마녀라, 그것도 죽으려고 했다는 이유로 혼나고 있는 중이라……. 너무 황당해서 눈만 껌뻑거리다가 변명을 내뱉었다.
“아니, 진짜 죽지 않는다니까. 정 그러면 확인을 시켜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소년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검을 꼭 쥐었다.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도 내가 죽으려는 걸 싫어하고 또 걱정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뭐가 달라진 걸까. 기억 속 소년과 내 앞에 있는 소년이 다른 사람인 걸까, 아니면 내 행동의 변화로 인해 달라진 걸까.
내가 난감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데, 소년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그렇게 쉬워?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왔어? 왜? 아프잖아! 어쨌든 아플 거 아니야.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잖아!”
소년의 목소리가 점점 떨린다 싶더니 결국 눈물을 비춘다. 소년은 울기 싫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며 끅끅거렸지만 심술궂은 눈물은 후드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쓰렸다. 검을 꽂지도 않았는데 고통이 번져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소년의 우는 모습은 마녀도 울고 싶게 만들었다.
아프다. 나 역시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아프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마녀니까.
너는 왜 마녀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것인가.
나는 눈을 감고 아픈 가슴을 잠시 진정시킨 뒤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손을 뻗자 작게 움찔거렸지만 피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맡겼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냈다. 미지근했다. 하지만 소년의 뺨만큼은 굉장히 따뜻했다. 그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상처받은 마녀의 가슴을 안아준다. 흉도 지지 말라는 듯 따스하게 덮어준다.
소년은 그랬다. 늘 내게 먼저 다가오고 나를 감싸주었다. 내 상처를 똑바로 봐주려고 애썼으며 보듬어주기까지 했다. 마녀라고 외면당하던 여인을 들여다보았다. 흉터에 갇힌 소녀를 꺼내곤 했다.
나는 이런 소년을 밀어낼 수가 없다.
내가 서툰 손길로 눈물을 닦아내자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소년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다. 닦고 또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우는 소년을 어찌 달래야 할지 몰랐다. 그냥 울게 두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독여 주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는 이유가 나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엉엉, 아기처럼 울어 젖히던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마녀도 죽으면 어떻게 해. 마녀까지 죽으면 어떻게 해.”
히끅거리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연신 눈물만 닦아냈다.
“나 때문에 죽으면 어떻게 해.”
그제야 소년이 서럽게 우는 이유를 알아챘다. 소년이 사랑하는 이는 모두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 탓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자신은 아니라고 외쳐보지만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녀의 탓이라며 떠넘기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 사랑하는 이를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을 벗어던지기가 어렵다.
그 와중에 마녀가 자신의 검으로 죽는다면. 자신의 앞에서 죽는다면…….
나는 내가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지금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사람 취급해 주지 않는 자신을 용사로 대하는 마녀에게 기대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러했듯.
“나 혼자 두지 마. 날 혼자 두고 떠나지 마.”
사람들에게도 꽁꽁 숨기던 소년의 상처와 두려움을 엿보고 말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청년이 떠올랐다. 자신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며 울던 청년의 얼굴이 그려졌다.
이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토록 슬퍼한 거였다. 자신 때문에 죽을까 봐, 자기 혼자 두고 떠날 까 봐. 나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안 그럴게.”
이토록 어린 용사가 정말 마녀를 죽일 수 있을까. 나를 죽여줄 수 있을까.
문득 두려움이 앞섰지만 애써 다잡았다. 용사는 아직 너무 어리고 나약하니 시간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마녀가 아닌 세상의 편에 서서 검을 겨눌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될 일이었다.
한참이나 울던 소년이 겨우겨우 울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내 앞에서 운 것이 부끄러운지 눈물을 닦아내던 내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둠은 마녀의 눈을 가려주지 못한다. 붉어진 눈과 훌쩍이는 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비죽거리지만 아까와 달리 화가 풀렸다는 그 모습이 확연히 보인다.
“나 화 안 풀렸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화 풀렸다고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직도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쑥스럽다는 표정이다.
그 얼굴이 무척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껏 풀린 화를 다시 돋우고 싶지 않아 꾹 참아냈다.
“이름을 지어줘.”
“뭐?”
“내게 새로운 이름을 줘. 저주받았던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세상을 밝혀줄 용사의 이름을 줘. 그러면 용서해 줄게.”
마녀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왔던 소년이 도리어 숙제를 내주고 있는 이 상황이 어이없어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한 사이 소년은 도망가듯 멀어졌다.
나는 새로운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짝이던 소년의 눈은 틀림없이 이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용서라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벽에 가려져 더 이상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올 때까지 지어두도록 해.”
그리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소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녀는 세상을 구해낼 용사의 이름까지 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