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마녀는 기억 속의 세상을 마주한다 (6/45)

  5. 마녀는 기억 속의 세상을 마주한다

어느 날 공표가 내려왔다.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자들을 잡아들여라. 모든 일의 원흉인 그자들을 죽인다면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유난히 하늘이 흐리던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언제나 태양의 축복을 받던 곳이었음에도 그날만큼은 구름에 가려져 온 세상이 어두웠다. 검은 안개로 뒤덮이고 괴물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그때처럼.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려던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 언저리에는 나라의 표식이 달려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내겐 무슨 일인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붙들렸다. 그대로 끌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끌려가는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느라고 바빴다. 간간이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괴물이라는, 저주받았다는, 이제야 그 죗값을 치르겠다는, 재수 없으니 쳐다보지 말라는 익숙한 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내고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게 하던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던 중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린 테네라 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나올 틈이 없었다.

“마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니 보상금은 확실히 주시는 거겠지요.”

“그럴 거다.”

크게 뜨인 내 눈이 안도하는 테네라 부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뒷모습이 익숙했다. 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뒷모습이었다. 괴물도 아니고 마녀도 아니고 이 아이 탓도 아니니 더 이상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언제나 외치던 테네라 부인이었다.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 부인은 시간이 흘러 옅은 회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내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던 여인이 내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던 여인이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마음껏 비난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참느라고 힘들었다는 듯 거세게 화를 냈다.

“역시 전부 너 때문이었어! 네가 원흉이야!”

“저 괴물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당신들도 그걸 알고 있잖아.

“난 지금껏 저 징그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겨워 죽는 줄 알았어. 끔찍해. 어둠에서 태어난 마녀야.”

나도 이 모습이 싫어. 그래서 언제나 숨기고 다녔잖아. 단지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싫어하는 게 싫어서 감추고 다녔어.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날 보지 마. 보지 않으면 되잖아.

“저년 때문에 내 남편이 죽었어! 저년만 아니었어도!”

아니야, 당신 남편은 전쟁 때문에 죽었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그 전쟁은 내가 일으킨 게 아니야. 내가 당신의 남편을 끌고 간 게 아니야. 근데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새카맣고 음침해. 더러워.”

내가 준 옷을 입고선 더럽다고 욕하지 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선 이제 와 내게 손가락질하지 마.

“우리는 이렇게 늙었는데 저걸 봐. 아직도 그대로야. 역시 인간이 아니라고.”

“저 괴물의 힘이 두려웠어. 언젠간 나를 죽일 거라 생각했어. 이제라도 잡아들이니 다행이야.”

내 힘을 마음껏 이용했잖아. 마을을 위해 사용하라며 쉬지도 못하게 했잖아.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야?

나는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들고 있는 것들을 던져대는 마을 사람들을 훑었다.

그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지만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되어버린 베나리스 자매도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팔아 빚을 갚아주었던 조디아 부인도 있었고, 내가 가진 능력을 탐내기에 틈 날 때마다 가르쳐 주었던 카네드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원망하고 있었고, 경멸하고 있었고, 또 비웃고 있었다.

모두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불행은 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삶이 괴롭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가난이 벅차고,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은 괴물이 나타난 이후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는 지배자 때문이라는 사실을.

단지 그 지배자를 원망할 수는 없으니 모든 화살을 내게 돌렸을 뿐이라는 사실도.

세상은 원망해도 달라지지 않지만 나는 어떻게든 망가트리고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 테니 어쩌면 가장 손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아낸 걸지도 모른다.

그대로 끌려간 나는 높은 곳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지배자와 마주했다. 하늘이 내려준다던 그 왕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게 될 작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세상의 관심과 모든 이들의 원망을 받게 될 마녀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마녀는 진정한 괴물을 마주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뒤 대대적으로 마녀 사냥이 시작되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의 불만을 풀어줄 희생자가 되어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내게 내려진 진정한 저주를 깨달았다. 단순히 겉모습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내 몸은 진정한 괴물이었다. 새카맣고 어둠의 힘을 사용하며 불멸의 생명까지 지니고 있으니 이보다 더 제격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자 죽이면 다시 평화로워지리라는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운명이 내게 주어졌다.

그렇게 세상을 구해낼 용사들에 의해 끊임없이 죽임을 당하던 어느 날, 찬란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발끝은 사람들이 붙인 불로 인해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고, 무척 오랜만에 보는 태양은 그런 나를 삼킬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를 거두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나이까.

대체 왜.

원망하고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마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는 없으니까.

“마녀.”

“마녀 맞아?”

“너는 단지 저주의 피해자일 뿐이야.”

“네가 죽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끝을 알 수 없는 지독한 어둠이 나를 반겼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봐온 광경이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볼 광경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내 저주받은 삶을 끝내줄 용사를 만났으니.

새하얀 머리카락과 태양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용사에게 내 마지막 삶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비록 그 어린 용사 때문에 애써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그토록 외면하던 세상을 다시 마주했지만 참을 수 있다.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리도 행복하게 느껴질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그래. 소년은 어린 용사였다. 마녀를 죽이고 세상을 어둠에서 구해낼 영웅이었다. 마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 줄 빛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어린 용사의 뒤를 따라다니며 봤던 광경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장면은 곧바로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소녀와, 그런 소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마을 사람들로 바뀌었다.

이런 꿈을 꾼 것은 용사 때문이었다. 나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특이하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당하고 배척당했으며, 나아가 괴물로 몰려 사냥을 당한다. 태어나선 안 되었고 당장이라도 죽여버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이는 그 곁을 하나씩 떠나가고 모든 화살이 꽂히기 시작한다. 일이 잘못되면, 문제가 생기면, 어디가 아프면, 누군가 죽으면, 나아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괴로우면 그게 전부 저주받은 괴물 때문이라며 화풀이를 한다.

그들에겐 단지 불만 해소용 장난감일 뿐이다. 정작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자가 누군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자신들이 이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자가 누군지 알지 못한 채, 어쩌면 그게 누군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차마 대항할 용기는 없으니 나약하고 만만한 이를 괴롭히며 풀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그들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이미 마녀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또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자신들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

더욱이 이번에는 세상을 구해낼 빛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있었다.

안 된다. 소년에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소년을 빛으로 만들어 세상을 밝힌 다음,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게 만들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마녀의 시간을 끝내게 할 것이다. 소년과 달리 나는 정말 저주받은 것이 맞으니까.

죄가 있든 없든 이제는 상관이 없다. 내가 죽어야 끝이 난다. 아니, 내 목숨으로 인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끝을 낼 것이다.

나를 이해해 주는 용사를 만난 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지금까지의 참혹했던 시간은 위로받았다. 앞으로도 달라질 용사의 삶으로 인해 또 한 번 위로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런 용사가 죽기 전에, 용사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눈을 감을 수 있기를.

또다시 혼자 남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동화 속 이야기처럼 ‘용사는 마녀를 죽인 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기를.

* * *

한참이나 오지 않던 어린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소년의 뒤를 따라다니며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아직 어린 용사를 어떻게 내 곁에 둘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였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소년은 청년으로 커가는 시간 동안 마녀를 지켜보며 의문을 품고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지만, 현재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직 어렸으며 어떻게 마녀를 이해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는데,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모양인지 벽에 기대어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소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빛나는 소년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지만 곧 새로 생긴 것이 분명한 상처로 시선을 돌렸다. 길게 그어진 상처는 아무래도 이곳에 들어올 때 가시에 할퀴여 생겨난 듯 보였다. 회색빛의 시선으로는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았지만 붉게 피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상처가 더욱 크고 아프게만 보였다.

그리고 군데군데 찢어진 상처는 대강 아물어 흉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곪거나 썩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이리 깨끗하게 아물 수 있는 건지 신기한 마음도 든다.

“너 말이야.”

소년의 입이 벌어지자 다시 시선을 돌려 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년은 머뭇거리며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토록 평범한 소년일 뿐인데 성벽만 들어서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니. 소년을 그렇게 변하도록 만드는 것은 괴물이 아닌 같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간혹 너무나 악독하고 잔인하다.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던 소년은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탑 내부를 구석구석 살폈다. 하지만 볼 게 없다. 대부분 썩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도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다는 듯 구경을 하다가 이윽고 썩은 탁자 위에 정리해 둔 카드를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낡은 카드들은 소년의 손에 의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소년은 카드를 들고 오더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나는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소년이 내려놓은 카드를 바라보았다. 내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년과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카드는 죽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 카드를 뒤집자 소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뒤집어 그림을 살폈다.

“이건 왜 갑자기 뒤집은 거야?”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미래를 다시 볼 자신이 없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카드를 모두 모아 정리했다. 소년이 관심을 둔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로 쌓아놓은 열 장의 카드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자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내 미래를 봐줘.”

“뭐?”

“내 미래를 볼 수 있잖아. 봐줘.”

“마녀의 점을 믿나.”

내 말이 의외라는 듯 가만히 날 마주하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작게 끄덕인 터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가슴속 어딘가에 파문이 일었다.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는 소년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 조용히 카드를 섞었다. 그저 카드 점을 다시 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혹은 그리 나쁜 말이 아니니 굳이 거짓말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어린 용사가 마녀의 말을 믿기엔 아직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럴 계기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믿을 수 있을 만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 아니었다.

아직은 그 속을 들여다볼 자신이 없다.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이토록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의 속이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알 자신이 없다.

카드를 뒤섞은 뒤 일정한 배열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이 흥미로운지 소년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내가 카드 한 장을 뒤집자 해석할 수도 없음에도 고개를 쭉 내민 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 손가락이 옆으로 이동하자 소년의 붉은 눈동자도 그리로 따라온다. 천천히 뒤집자 잠깐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바라본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보면 아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소년의 빛이 마녀의 어둠을 녹여낸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졌다.

긴긴 시간 동안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과 표정을 끄집어낸 소년의 능력이 신기했다. 그 기나긴 시간을 녹여버린 소년은 정말로 태양과 같았다. 마녀의 탑을 따스하게 밝혀주기 위해 찾아온 빛이었다.

내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자, 당연하게도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이윽고 뒤집혀진 카드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건 아까 네가 뒤집었던 그 카드잖아. 무슨 뜻이야?”

카드의 그림은 하나같이 비슷했고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해했다. 아주 미묘하게 다른 특징들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방금 뒤집은 카드 또한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들고 있는 물건이 단검이라는 점을 빼고는 다른 것과 동일했는데 신기하게도 알아보고 있었다.

“이게 구분이 되나 보군.”

“조금씩 다르잖아. 이건 검, 이건 양초, 이건 종……. 어, 근데 이거 사람인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야? 왜 검을 들고 있어? 그것도 꼭 자기 자신을 찌를 것처럼.”

전체적으로 까맣게 칠해져 있어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여인이라는 사실도 알아보기가 힘들건만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여인이 자신을 찌르기 위해 단검을 들고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해석한 뒤의 소년의 반응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딱딱하게 굳어서는 다시금 카드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자살이야? 아니면 죽음? 죽는다는 뜻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믿지 못하는 모양인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역시 마녀의 말을 쉬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마녀가 아니라고 해도 믿기 힘든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럼 뭔데?”

“네가 들고 있는 카드는 너의 미래다. 어둠을 몰아낼 빛이라는 뜻이지.”

검은 여인이 들고 있는 단검은 용사가 아니라 마녀를 찌르게 될 것이다. 나로 인해서.

내 말에 다시 카드를 바라보며 질문을 건넨다.

“근데 왜 아깐 뒤집은 거야?”

“아무런 이유도 없다.”

“거짓말.”

“거짓말 할 이유도 없지.”

소년은 입을 다물었지만 날카로운 시선은 거둘 줄 몰랐다. 이토록 어린 소년이 순수함 대신 의심을 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소년이 들고 있던 카드를 가져와 다시 마구잡이로 섞었다. 하지만 그 위를 덮는 소년의 손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내 손을 덮은 소년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온기를 느끼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잘게 떨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청년 또한 이토록 따뜻했다.

나는 소년을 바라보는데, 내 눈은 기억 속에 있는 소년의 자라난 모습을 그렸다. 같은 온기 때문에 문득 떠오른 모양이었다.

“너는 전에도 나보고 어둠을 몰아낼 빛이라고 했어. 세상을 구해낼 용사라고.”

“그래.”

“그게 전부야? 방금 네가 뒤집었던 카드는 여러 장인데 왜 하나밖에 알려주지 않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네가 알고 싶은 건 미래가 아니었나.”

“그럼 정말 내 미래가 그거라고?”

“그래.”

소년은 카드와 내 손을 덮고 있던 작은 손을 도로 제자리에 두더니 곧 자신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작은 소년이 더욱 작게만 보였다.

나는 카드를 정리한 뒤 가지런히 놓고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으니 점을 봐달라고 했을 터였다.

그리고 잔뜩 웅크린 소년에게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해야 믿을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바라만 보는데 소년은 고개만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난 너무 약해. 이렇게 약한데 어떻게? 어떻게 세상을 구해내?”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소년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괴물이 입을 벌린 것처럼 새카맣고 진득한 어둠에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내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이렇게 약한데, 어떻게 어둠을 몰아내.”

나는 말했다.

“내가 도와줄 거니까.”

소년의 크게 뜨인 눈이 내게 향했다. 그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다시 말했다.

“내가 어둠을 몰아낼 수 있도록 만들 거니까 가능하다.”

마녀는 어린 용사를 가르쳐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마녀를 죽일 수 있도록.

남아 있는 소년은 영웅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가르쳐 주마, 어린 용사.”

부디 내 진심이 닿기를.

나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 *

벽에 기대어 앉아 탑 내부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 시선은 그곳에 닿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소년을 그려내고 있었다. 잔상처럼 머물고 있는 그 소년은 내게 입을 열어 말한다.

“좋아.”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탑 내부는 고요하게 잠겨 있을 뿐이다. 그 속을 밝혀주던 어린 용사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그 뒤를 쫓아가 사람들의 독설과 마구 던지는 물건에 상처를 입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 겨우 누운 뒤 잠을 청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후 돌아왔다.

방금 전 내가 떠올린 모습은 어린 용사가 마녀의 탑에 찾아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점을 보며 내게 물었다. 자신은 이리도 약한데 어떻게 세상을 구해내느냐고.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내가 가르쳐 주겠다는 그 말에 어린 용사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의아함을 동시에 떠올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은 마녀가 소년에게 그 어둠을 몰아내 달라고,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하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워졌다. 그리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어떻게 믿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내가 자기를 어떻게 할 줄 알고 곁을 내주겠다고 말하는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정말이냐고 되물었지만, 소년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강해지고 싶어. 날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마녀가 아니라 마신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거야. 그래서 세상을 구해낼 거야.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낼 거야. 내게 미안해하도록 만들 거야.”

상처받은 소년의 마음속을 언뜻 엿본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소년의 의지가 드러났다. 소년은 내가 아니어도 빛이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언젠간 세상을 구해낼 용사였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런 빛을 뭉개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삶의 의지를 잃어버려 빛이 되기를 포기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청년은 그토록 안타깝고 슬프게 눈을 감고 말았다.

괴물을 피해 마녀의 숲을 돌아다닐 수 있는 소년이 고작 마을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리는 없다. 그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과 다름없었다.

영원히 이어지는 목숨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진즉에 그리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내게 내려진 저주임을 알고 나서도 나를 찾아오는 용사를 피해 도망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죽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용사도 그리되기 전에 모든 것을 바꿔놓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의 두 눈이 빛났다. 자신이 강해질 수도 있다는 희망에 들떠했다. 자신이 세상을 구해낼 용사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이렇게 만든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지만, 또 그리될 생각도 없지만 용사는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구해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소년의 그림자가 되어 더욱 밝게 빛나도록 만들고 그 빛이 미처 성장하기도 전에 밟히지 않도록 지켜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움직여야만 한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세상을 마주할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숨어만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조금씩 범위를 넓히면 될 터였다.

괴롭고 힘들더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만, 세상을 구해내고 내게 칼을 꽂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긴긴 시간을 보내오면서 그 정도는 종소리 몇 번 헤아리는 정도로 넘길 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갑갑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깔린 어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츰 검은색 안개처럼 몽글거리며 내 몸을 감싸던 어둠은 이윽고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어둠이 내게서 벗어나 다시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달라진 후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침대였다. 하얗고 보드라운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정리해 본 기억은 없었다. 자고 일어나 대충 구겨 밀어놓아도 자기 전엔 언제나 이 상태였다. 누워서 덮기만 하면 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당시에는 그 자상함을 미처 몰랐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해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줄 알았다면 감사해할 것을. 더욱 느껴볼 것을. 그래봤자 가슴 아픈 것은 똑같겠지만.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이끌어 침대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쓰다듬자 오랫동안 아무도 눕지 않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 안도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내 시간이 멈춰 있던 것처럼 이곳 또한 ‘그날’ 이후로 멈춰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문득 내 손이 무척 더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하얀 이불 위에 내 손길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더러웠다. 발을 내려다보자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려 내가 걸어온 바닥을 보니 옅은 색상의 융단이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나의 소중한 것들을 더럽혔다.

나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섰다. 내가 가는 곳마다 이리될 것이 당연했다. 씻을 생각은 없었지만 내 발길, 내 손길이 닿는 것마다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더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은 시간을 멈추었던 그날,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어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도 못 하고 바라만 볼 뿐이었지만, 지쳐서 헐떡이면서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중요했다는 건 알고 있다.

금세 따뜻한 물이 나왔다. 옷을 모두 입은 채 욕조에 쭈그리고 앉았다. 더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은 물론이고 내 마음속도 더러웠다. 전부 깨끗해지길 바라며 쏟아져 내리는 물 아래에서 몸을 웅크렸다.

검은색 물이 흘러내려 막지 않은 구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된다. 벌써부터 이리 약해지면 안 된다. 하지만 내 눈물이 쏟아지는 물에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따뜻한 물을 뿌리는 것을 좋아했다. 언제나 하염없이 뿌리곤 했다.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속에 잠겨 깜빡 졸기도 했다. 그때마다 또 조느냐고 깨워주던 이도 있었다.

그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해 줄 이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 나오느냐고 혼을 내는 이가 있을 것 같은데 없었다. 이미 옛날에 나를 떠나갔다.

나만 멈춰 있는 이곳처럼 흘러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맴돌 뿐이다.

내게 이렇게 끔찍한 저주가 걸린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나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직 어린 나는 살아가야 할 날이 많다고 늘 밀어내던 것이 생각난다.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내겐 너무 끔찍하게 긴 시간이다. 보지 못하는데 혼자 살아가봐야 뭐가 좋겠는가.

여러 번 죽임을 당하던 고통보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슬픔이 더욱 컸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만나러 가지 못한다는 것이, 그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다 지쳐 잊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두려웠다.

모두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그리 말한다. 곧 따라갈 테니 기다리라고. 나 역시 그리될 줄 알았다. 헤어짐은 잠시라고 생각했다. 너무 슬프고 괴로워 금방 다시 만날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내게 내려진 저주는 그것을 막았다. 이보다 더욱 끔찍한 저주가 과연 있을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주지.

결국 포개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물이 내 울음도 같이 흘려보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은 씻어내지 못했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은 흘러가지 않았다. 내 이 고통을 끝내줄 이는 이제 소년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이 괴로움을 끝내게 만들어야 했다.

과거에 갇혀 있는 마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어린 용사밖에 없었다.

* * *

내 몸에 닿은 물이 투명한 그대로 흘러내릴 때까지 하염없이 울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욕실을 빠져나왔다.

욕실을 비롯해 방 안에도 큰 거울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보고 싶지 않아도 내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그 앞에 섰다.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살짝 하얗게 서렸던 거울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내 모습을 가감 없이 비추었다.

나는 그 끔찍한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려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얼굴은 더욱더 괴기해졌다. 온통 흉터투성이. 피부가 찌글찌글하게 일그러져 있었기에 그야말로 동화책에서 묘사했을 법한 징그러운 노파처럼 보였다.

이런 얼굴을 용사에게 드러내 보였다. 심지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청년은 이 모습을 보고도 여인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해주었다. 당시에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더 힘든 이야기였다. 이 얼굴은 내 스스로도 아름답다, 여인이다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거울을 향해 손을 뻗어 그 안에 담겨 있는 끔찍한 마녀를 쓸어내렸다. 손끝에선 차갑고 매끈한 거울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지만, 축축하게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새카만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불길한 검은색 눈동자, 일그러진 피부와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코, 수없이 내려앉은 딱지로 인해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진 입술까지. 눈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차갑고 매끈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된 상처로 인해 피부가 괴상하게 변형된 거라 흉터만 봐서는 언제 어떻게 생긴 건지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칼로 베이고 찔리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으며 못이 한가득 박힌 상자에 갇히거나 가시넝쿨로 만든 채찍에 맞아 피부가 이리저리 찢겨나간 적도 많았다. 살점이 뜯어져도 시간이 흐르면 차차 새살이 차올랐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바람에 온통 울퉁불퉁하고 제각기 다른 느낌의 살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도리어 얼굴은 양호하다 싶을 정도로 목 아래는 더욱더 끔찍했다.

쉬지 않고 찾아온 용사들은 내 목에 검을 박아 넣거나 잘라내었다. 반복되어 생긴 상처는 점점 두터워져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밧줄을 목에 건 채 나무에 매달리거나 성벽에 매달린 적도 많아서 얼굴 바로 아랫부분은 기형적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흉터가 있는 곳은 단연 심장 부근이었다. 나의 심장은 몇 번이나 터져나갔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내 스스로 낸 상처도 많았다. 익숙하지 못했을 때에는, 혹은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못했을 때에는 심장을 향해 검을 박아 넣는다고 해도 뼈가 단단히 막아내어 실패하는 일이 잦았고 결국 배를 찌르곤 했다.

일부러 앞으로 넘어져 얕게 박힌 검이 등 뒤까지 관통할 수 있게 만들곤 했으니 등 뒤에도 수많은 상처가 존재할 터였다.

하지만 이런 상처는 모두 자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모든 상처들은 내 기억에 의존해야지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더욱 큰 상처가 온몸과 얼굴을 뒤덮고 있었으니까.

잔뜩 오그라들어 쭈글쭈글한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잡아당겨 쫙 펴져 보이기도 하는 그 상처들은 화형 때문에 생긴 것들이었다.

화형. 가장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나 또한 가장 오랫동안 큰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

하지만 나를 집어삼키는 그 불길보다 무서운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늘에 떠올라 만인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해 주는 태양이었다. 아래에서 치솟는 불길을 피해 버둥거리다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그 또한 집어삼키겠다는 듯 활활 타오르곤 했으니까.

그것은 큰 공포로 다가왔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찬란한 빛이 나만은 외면하는 것 같았다. 죽기 직전까지 또렷하게 들리고 보이는 사람들의 환호성보다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들게 만드는 태양이 더욱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는 거울을 짚은 내 손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쭈글쭈글하며 징그러웠다. 뼈에 덧대진 가죽이 끝이어서 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반복해서 빠진 손톱 탓에 몇몇 개는 아예 자라질 못했고, 손가락 끝이 짧게 뭉뚝한 것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며 감췄지만, 꺼끌꺼끌하고 울퉁불퉁한 손등이 더욱 도드라져 보여 결국 시선을 돌렸다.

내 모습이 변한 후로 이렇게까지 정확히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탑 내에는 거울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용사들에게 반복해 죽임을 당할 때에도 기껏해야 물에 비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내 모습이 이토록 징그럽고 끔찍할 줄은 몰랐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바라보니 와 닿는 충격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전히 젖어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내 얼굴 앞으로 흘러 내려와 조금은 감춰주었다.

이곳은 밝지만 탑 내부는 어두웠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별문제 없이 사물을 구별하는 용사일지라도 내 이 징그럽고 끔찍한 모습을 감춰주는 것이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였다.

탑 내부가 어두운 것을, 그리하여 조금이나마 나를 감춰주는 것을 감사했다. 어둠은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럼에도 내게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 * *

입고 있던 원피스는 무척 낡아 그대로 버릴까도 생각했었지만 그 외에는 입을 옷이 없기에 결국 깨끗이 빨아 널어두었다.

내 소지품은 이미 예전에 다 팔고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기에, 이 모든 것이 다시는 가지지 못할 그리움이 될지 몰랐기에 그토록 어리석은 짓을 한 거였다.

단지 세상을 원망하며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돕고 싶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서 호의를 얻고자 한 일이었는데, 이리될 줄 알았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고스란히 숨겨둘 것을 그랬다. 하나하나 내게 추억이고 기억이고 그리움이 될 줄 알았다면 말이다.

혹시나 싶어서 옷장을 열어보았지만 역시 남아 있는 옷은 없었다. 나는 가운을 꺼내 입은 뒤 나 때문에 더러워진 융단과 이불을 닦아내었다. 닦으면 닦을수록 번져 가는 더러움이 속상해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 나는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소녀였다. 욕심도 많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은 여느 소녀와 다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감정과 표정을 죽이며 그렇게 잊히나 했지만 어린 용사를 만나며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꼭꼭 묻어두었던 기억 속의 세상을 마주하며 원래의 내 모습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의 품에서 사랑을 먹고 꿈을 꾸며 자라나는 그런 소녀였다. 마녀가 되기 전에는,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여 괴물과 전쟁으로 울부짖기 전에는 나만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한평생 그 품에서 살고 싶다고 달콤한 미래를 그렸다.

물론 그 미래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늘 함께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언니는 그게 무슨 꿈이냐며, 너무 당연하고 뻔해서 재미없고 지루하다며 타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밝게 웃으며 너는 그리될 것이라고, 너만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그 품에서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던 다정한 언니였다.

언제나 밝고 당당했으며 너무나 멋져 눈이 부시던 언니였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절대 보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아빠도 있었다.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집사와 딸 바보는 어쩔 수 없다며 혀를 차던 엄마도 있었다.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이었다.

엄마.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던 아름다운 엄마를 떠올리자 얼굴이 굳어졌다. 이불을 닦아내던 내 손도 느려졌다.

어둠으로 빚어낸 인형 같던 엄마는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괴물 틈에서 어둠을 지휘하던 엄마의 모습을 전해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은 것은, 괴물을 불러내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나의 어머니라고.

나는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슬피 울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뒤로 볼 수 없었던 엄마도 그 이야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내게 내려진 저주. 신의 미움을 산 것인지, 아니면 엄마의 업보가 내게 내려온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마녀였던 엄마가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그 남은 목숨이 내게 오도록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그 피를 물려받은 나도 죄가 있다는 것.

언제나 어둠이 친숙하고 편안했다.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던 날에도 내겐 안락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모두들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내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 괴물까지도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가 있는 곳은 유독 괴물의 침략이 많았으니 사람들의 고통은 내 탓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녀의 숲이 더욱 울창해진 것도 그 가운데 마녀의 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을 터였다.

죄가 있든 없든, 내가 의도했든 아니든, 나는 마녀가 맞았다.

* * *

내 방에는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었기에 얼마 안 가 문을 나섰다.

여전히 깔끔한 복도를 지나쳐 다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식당으로 들어섰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음식은 모두 썩어 없어졌어야 했지만 그대로였다. 과거에 머물며 모든 것이 죽어가던 마녀의 탑과 달리 이곳은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먹지 않아도 죽지 않기에 음식 역시 그대로 두었다. 그저 식탁 앞에 앉아서 쌓았던 추억이 떠올라서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내가 굳이 여기를 찾아온 것은 추억에 잠기고자 함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 돌아다니려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큰 목소리로 불러보면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데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전혀 변한 것이 없다. 나의 그 시간은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이들 품에 있었던 것이 바로 어제 일만 같다. 이 또한 내게 내려진 저주의 일종일는지 모른다. 잊지 못하도록. 영원히 살아가며 괴로워하도록 망각이라는 것을 사라지게 만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잊는 것도, 흐려지는 것도, 미치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방 앞에 멈춰 선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 안에 가득 채워진 책으로 인해 종이 냄새가 났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읽던 책에서 눈을 뗀 뒤,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다. 내 기억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가슴속 어딘가가 싸하게 타들어간다.

하지만 이제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익숙해지면 된다. 아프지만, 괴롭고 슬프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면, 금방 따라간다던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놀다가 오라던 그 말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고 화내며 때려줄 수 있게 된다.

책상으로 걸어가며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파를 쓰다듬었다. 침대만큼 커다란 소파였다. 손가락 끝으로 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종종 이곳에서 자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러면 아빠도 결국 하던 일을 내려놓고 내 옆에 누웠다. 그렇게 자상하던 아빠였다.

소파 위에 누운 검은색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와 그 소녀를 안고 있는 남자가 그려졌다. 내 기억임에도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너무 오래되어 상황만 떠올리기 때문일 터였다.

책상 앞에 도착했지만 너무 많은 책으로 인해 어떤 것을 챙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아 한참을 서성였다. 하지만 곧 몇몇 개를 꺼내 들었다.

이곳에 있는 책은 어렵다. 무얼 가져가도 소년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읽고 알려주어야 하니 내게 필요한 책을 고르면 되었다.

꺼낸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둔 뒤 서랍을 열었다. 아빠가 늘 지니고 있던 책이 보였다. 사실은 수첩이었다. 떠오르는 의문, 문득 알게 되는 지식,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풀이를 적어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간 쌓아두었던 지식을 정리해 둔 수첩도 찾아내었다. 지금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내 힘은 소년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독이 될 터였다. 어린 용사에게 필요한 건 내 아버지의 능력이었다.

조심히 본 다음,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두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빠 냄새가 남아 있는 듯해 가슴속에 품고 코를 가져다 대었다.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는데 이리 어리광이 심하면 어쩌느냐고 혼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빠의 애정을 받기 위해 일부러 어리광을 피우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세상만 달라졌다. 나를 제외한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어린 용사를 성장시킬 때까지,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이곳에서의 나는 마녀가 아니지만 이제 그만 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마녀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 밖에도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긴 뒤 방을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