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사는 죽어 있는 마녀의 심장을 깨운다
소년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낑낑거리며 계속 옮겼다. 한동안 왔다 갔다 반복하며 옮기던 무언가는 다름 아닌 물이었다. 물을 담은 통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나 정도는 우습게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커다란 통도 하나 놓여 있었다.
소년이 내게 마른 천을 건넸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서 찝찝했을 텐데 마음껏 씻어.”
티는 안 냈지만 내 더러움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소년은 금방 떠나갔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통들에 닿아 있었다. 작은 탑, 모든 것이 썩어 사라진 공간에 생명을 일구는 물이 담겨 있다니, 이질적이었다.
소년은 그랬다. 태양 같은 눈동자와 하얀 눈 같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짧게 살아가는 인간답게 매사 아낌없이 타올랐다. 그리고 내게 살아 있음을 알려주고, 자꾸 세상과 이어주고 있었다. 소년에게선 흙 내음과 햇살의 따스함, 청량한 바람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다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둠이 가라앉기 전의 세상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당시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긴긴 세월을 다시 보낼 수밖에 없으리라.
물은 썩지 않았다. 다른 것들과 달리 죽기는커녕 새로운 생명을 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작은 씨앗이라도 하나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뿌리를 내리며 점차 성장해 갔다.
하지만 식물 또한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 분명했다. 남은 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동안 소년은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소년은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날만 해도 꽤 되었다. 올 때마다 자라 있었고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올 때마다 빛을 잃어갔다.
나는 카드를 뒤집었다. 여전히 빛이 나타나 어둠을 몰아낸다고 말하고 있었다. 점괘가 말하는 빛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은 점차 어둠을 닮아가고 있었으니까. 어린 용사는 마녀를 동정해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뭐래? 여전히 내가 죽는대?”
카드를 빼앗는 팔은 온통 흉터투성이였다. 상처는 시간을 잡아먹으며 아물어 흔적만 남긴 모양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었고, 예전과 달리 낮은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고여 있는 물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다가 점차 죽어가는 사이, 소년은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다.”
“내 점괘를 계속 봐주는 거야? 왜?”
“내 점괘를 보기 위해서.”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계속 질문을 건넸지만 무시했다. 나는 나머지 카드들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청년이 된 소년은 내 키를 넘어섰다. 그리고 성격 또한 많이 변했다.
“너 왜 안 씻었어?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워?”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사람이 호의를 보여줬으면 적어도 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누구를 위해서?
나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도리어 꽉 쥐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강하게 잡아당겨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청년의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청년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황홀할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청년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속을 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지는 머리카락은 점차 날카롭게 변해 나를 찔렀다.
“오랜만에 보는데, 반갑지 않아?”
청년은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너를 볼수록 괴로워지는데.
“원래 이렇게 작았나? 그리고 이렇게 말랐었나? 내가 오지 못하는 동안에도 계속 스스로를 죽인 건 아니겠지?”
청년은 자신의 성장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나와 계속 흐르고 있는 자신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내게 기다림을 가르쳐 주려는 건가. 시간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부족했나. 과거를 떠올리게 해놓고, 현재를 깨닫게 해놓고, 이제는 미래마저 기다리게 만들려는 건가.
너는 내가 만난 인간 중에 가장 잔인하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는데. 빨리 오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는데.”
너는 나를 너무 아프게 만든다.
* * *
청년은 한참이나 투덜거리더니 물통 속에서 자라난 식물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거 네가 키운 거야?”
“아니다.”
“그럼 딸려 들어왔나 보네. 이렇게 컸는데 버리기는 아까우니까 따로 키워야겠다.”
그러고는 식물을 담을 통과 새로운 물을 길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탑 구석에 자리 잡은 식물을 보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죽어가는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생명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빛도 없고 물도 부족한데도 안간힘을 쓰며 몸을 키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데도 잎을 만들어내고 줄기를 뻗었다.
“이번에는 꼭 씻어.”
청년은 조금 더 많은 물통을 가져왔다. 나보고 식물을 키우라는 의미로 보였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청년이 떠난 후 커다란 통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진득하게 눌어붙은 것들을 닦아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머리카락들이 점차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새카맣던 몸 역시 점차 하얘졌다.
더러워진 물을 한 번 버린 뒤 다시 부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가져다 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세 번은 씻어낼 수 있을 듯했다. 가득 채운 통에 잠겨들었다.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너무나 깨끗해 그 속이 들여다보이던 푸른 빛 바다,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했던 물놀이, 잠자기 전에 따뜻한 물로 하던 목욕, 하얀 눈 사이로 드러나 있었던 온천, 하다못해 컵에 담겼던 물까지도 떠올랐다.
수많은 기억들이, 그 그리움들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냥 두었다.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 행복한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 자상한 나의 아빠와,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함께하는 시간마다 카드 점을 알려주며 사랑스럽다는 듯 시선을 던지던 엄마가 있었다.
나는 그때 무척 어렸고, 많은 것들이 떠오르진 않지만 같이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 주위엔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웃음기가 지워지질 않았다.
어둠이 세상을 삼켰던 그날이 오기 전까지.
마녀로 몰린 뒤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발에 커다란 돌을 묶은 다음 강에 버려졌던 것도, 얼굴을 물속에 담근 채 버둥거리는 몸을 마구 유린했던 것도, 토하고 또 토해도 억지로 물을 먹였던 것도 떠올랐다.
몸을 내려다보니 온통 끔찍한 상처투성이였다. 불탔던 흔적, 못이 박힌 상자에 갇혔던 흔적, 검으로 난도질된 상처.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나를 괴롭혔다. 당시의 고통들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이래서 모든 것을 깊은 곳에 묻어두려 애썼다.
나는 물속에 잠겨들었다. 고요해지도록.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청년이 가져다준 물은 옷까지 대강 빨고 나니 온통 핏물로 변해 있었다. 오래되어 썩었기 때문에 심한 악취가 났다. 그래도 나는 조금이마나 깨끗하고 개운해졌다. 물을 쏟아 버린 후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청년이 오기를. 다시 찾아와 주기를.
이번에도 조금 오래 걸렸다. 다시 찾아온 청년은 여전히 하얗고 붉었다.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이전과 달랐다.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끔찍하게 길게 느껴졌다.
청년은 깨끗해진 내 모습을 보고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내가 주는 것을 받아줬네.”
이전에 비해 수척했다. 늘 밝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나 또한 괴로웠다. 청년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힘들어했다. 시간을 잊었던 마녀에게 기다림을 알려주면 어떻게 하나.
소년을 만나기 전에 보냈던 기나긴 시간보다 소년을 만난 후의 짧은 시간이 더 느리고 지겹게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죽어 있던 나를 깨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쳤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나는 청년에게 다가가 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이제 그만 나를 죽여줘.”
천사 같은 그는 마녀를 죽이기에 알맞았다. 어린 용사는 어느덧 성장했고 이제 그만 어둠을 몰아내야 했다. 내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 주어야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넌 나를 죽이러 왔었다.”
“안 돼. 죽일 수 없어.”
그는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검을 쥐어주었다.
나를 죽여줘, 제발. 이제 그만 끝내줘.
나는 말없이 청년의 손을 감싸 쥔 채 그대로 내 심장에 꽂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꽉 다문 잇새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커다랗게 뜬 붉은 눈동자에 끔찍한 마녀의 형상이 담겼다. 화형을 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옥에서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야…… 야! 야!”
청년의 손을 붙잡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급한 청년의 부름이 들려왔지만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만약 네가 어둠을 몰아낼 빛이라면 나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겠지.
제발 나의 시간이 이대로 끝나기를.
*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둠이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어둠. 이 어둠은 세상을 삼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삼켰고, 이윽고 나를 삼켰다. 저주받은 나는 어둠에서 벗어나려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빛이 찾아와 몰아내줄 때까지 홀로 어둠 속에서 끝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먼 옛날에 떠나갔고,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언제나 나보다 먼저 떠났으며, 전쟁과 괴물의 침략에 지친 세상은 내게 화살을 돌렸다.
나는 마녀였으니까.
끔찍한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홀로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죽이러 왔던 용사들도 결국엔 나보다 먼저 죽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
“이, 일어났어? 괜찮아?”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눈앞에 빛이 흐트러졌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햇살 같았다.
청년의 눈동자가 일렁이나 싶더니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모양인지 거의 오열을 하다시피 했다.
“죽는 줄 알았어. 죽을까 봐 무서웠어. 나 때문에 네가 죽는 줄 알고, 내가 너를 죽인 줄 알고.”
청년의 눈물이 내 얼굴 위에 떨어졌다. 닿는 순간에는 미지근했지만 곧 차가워졌다. 내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꼭 내가 울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운 것이 언제였지. 생각조차 나질 않는다.
아, 이 청년이 어둠을 몰아낼 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나를 죽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또 살아났으니까. 실수로, 혹은 망설임으로 심장을 찌르기 전에 멈추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가슴속을 후벼 파던 검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실수할 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내 심장에 검을 꽂았고, 비록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검을 쥐고 있던 것은 청년의 손이었다.
이 청년이 빛이 아니라면 나를 죽여줄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서럽게 울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많이 컸지만 여전히 어렸다. 아니, 어려 보였다. 울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약하고 착해빠진 청년에게 이런 짓을 시켜서 미안했지만, 짧은 생을 사는 청년과 달리 나는 또다시 억겁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내게 희망이나 빛을 떠올리게 만든 것만으로도 원망스럽고 또 절망스러웠다.
나를 잔뜩 뒤흔든 것으로도 모자라 구원해 주지도 못했다. 나를 죽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시간이 이제야 멈추겠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시간의 흐름만 더 느끼게 해주었다.
빠르게 성장하는 이 청년은 틀림없이 나보다 일찍 죽을 터였다. 이제 그 모습은 그만 보고 싶었다.
“돌아가.”
“뭐?”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
“왜, 왜 그래?”
청년은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죽을까 봐 울어주다니, 낯설다.
한편으로는 울컥하며 치밀어 오른다. 이 청년은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죽을 거면서, 또 날 두고 떠날 거면서 왜 나를 뒤흔드나.
“넌 이제 필요 없다.”
마녀를 죽일 용사만을 기다린다.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를 바꾸지 못했으니 미래 또한 바뀌지 않겠지. 너는 나 때문에 죽는다. 내가, 너를 죽인다고.”
그러니 꼭꼭 숨어서 나오지 마. 두 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안전한 곳에서 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 잊혀가는 마녀는 찾아오지 마.
* * *
곧 부서질 것 같은 식탁 위에 종이 열 장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전과 달리 쌓여 있던 먼지가 없어져 있었다. 소년이 털어냈기 때문이었다. 식탁 아래로 길게 매달려 있던 거미줄 역시 없었다. 소년이 치웠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날 죽여줄 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그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다시 헤아리게 된 내가 끔찍할 뿐이었다.
종이 한 장을 뒤집자 죽음을 의미하는 그림이 드러났다. 현재를 바꾸지 못했기에 미래 또한 바뀌지 않을 터였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지만 바꿀 수는 없었다. 청년이 스스로 바꾸는 수밖에는 없었다.
내 미래는 언제 다가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 줄 빛은 언제쯤 올지.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이렇게 끔찍한 시간을 반복해야 하는 건지.
카드를 정리한 뒤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소년을 만나기 전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잊은 채 그렇게 죽어 있으면 되었다.
나는 바닥에 누워 끝없는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 * *
“왜 자꾸 날 밀어내는 거야.”
내 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청년의 새하얀 얼굴이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벗어나려 했지만 등 뒤로는 벽이 있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청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흩어졌다. 동시에 술 냄새도 맡아졌다.
“왜…… 왜 자꾸 죽으려고만 하냐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데 왜 죽지 못하게 하는가. 그리고 사실 청년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으니 죽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청년의 붉은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소름이 끼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곧 내 얼굴과 목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기에 급히 쳐낼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지.”
“나는 네가, 이렇게 어릴 줄 몰랐어. 처음에는 무서워서, 그다음에는 새카만 것들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근데 이제 보니까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내가 마녀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
이 청년은 예전부터 그러했지만 내가 마녀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듯했다. 나의 시간은 어둠이 세상을 삼켰을 때, 즉 내가 막 성인이 되려던 참에서 멈췄다. 하지만 살아온 나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이 청년이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고, 청년의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죽은 후에도 살아갈 터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현재는 번듯한 청년이 되었고, 곧 혼자 늙어가 흙이 될 터였다. 나와는 달리.
“그래, 마녀. 여기는 마녀를 가둔 탑이었지.”
청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청년은 마녀인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살리려 애를 쓰더니 이제는 죽지도 말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죽이려고 하는 마녀를, 한때는 용사였던 청년이 살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정말 가엽고, 애틋해.”
한때 용사였던 청년이 이제는 마녀를 동정하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아무도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영원한 삶을 사는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고, 죽지 않는 마녀를 죽이려고 애썼으며, 현재는 잊어가고 있었다. 그저 저주를 내린 마녀라며 욕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워.”
청년은 심지어 그 마녀를 아름답다 말하고 있었다. 상처로 인해 끔찍하게 일그러진 피부, 세상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어둠을 닮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고 말이다.
천사 같은 청년의 눈동자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모양이었다. 마녀인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라리 고약한 악취가 나는 썩은 피로 온몸을 가리는 편이 나을 정도로 내 모습은 징그러웠다.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봐봐.”
청년이 억지로 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힘을 주며 버텼다. 하지만 곧 들려온 말에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나는 널 사랑해.”
당황스러웠다. 내가 눈에 띄게 놀라자,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새하얀 머리카락 역시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어쩌면 귀가 망가져 버린 걸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 내게 검을 겨눴을 때부터, 그때부터 이어진 상상일 터였다. 어느 순간 미쳐 버린 내가 간절히 원하던 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몰랐던 거야? 정말?”
뭐를? 네가 내 상상이라는 것을? 지금껏 믿어왔냐고 말하고 있는 건가? 한낱 상상 앞에서 무너져 버린 나를 지금 비웃는 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잊을 수가 없었어. 외면하려고 했지만 힘들었어. 나도 모르게 계속 널 생각했고 결국엔 찾아왔어. 너를 만나면 만날수록, 너를 무시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네가 좋았다. 미칠 정도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청년의 손이 내 목 뒤를 붙잡더니 강하게 잡아당겼다. 청년의 얼굴 바로 앞까지 이끌었다. 그의 숨결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눈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건 내 환상이야. 나는 결국 미쳐 버렸다고. 기나긴 시간을 홀로 보내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환상을 만들어내고 말았어. 지금 현실을 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계속 시달리게 될 거야.
하지만 청년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순간,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었다. 뜨겁고 단단했다. 이 청년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내 상상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이해해. 너와 함께하고 싶어. 나를 밀어내지 마.”
청년의 속삭임에 내 몸이 잘게 떨렸다.
이해해? 네가? 용사였던 청년이 마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를 죽이러 왔던 사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끔찍하고 추악하고 더러우며 세상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드는 그런 마녀를!
이것은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저주인가!
“네가…….”
“응?”
“네가 나를 이해한다고?”
나는 청년을 힘껏 밀었다. 온기가 멀어지자 순간적으로 춥다고 느꼈다. 늘 익숙해져 있었는데, 한 번도 춥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냉기를 느껴버렸다. 눈앞에 있는 청년 때문이었다. 겨우 익숙해진 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내 목을 가리고 있는 옷을 뜯어냈다. 두두둑 소리와 함께 서늘한 냉기가 목 부분을 어루만졌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청년은 곧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손을 뻗어왔다.
“상처가…….”
머리카락과 옷으로 가려져 있던 내 몸의 상처를 보곤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상처를 입어도 언제나 흔적만 남기고 저절로 아물곤 했었지만, 그 상처가 덧대고 또 덧대어지며 끔찍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어둠으로 감춘 얼굴 또한 비슷했다. 다만 몸보다 덜할 뿐이었다.
“인간이 이렇게 만든 거다.”
내 말에 손을 뻗어오던 청년이 멈칫거렸다. 그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너도 인간이지.”
결국 손을 거두었다. 청년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꾹 다물었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만 보면, 당시의 일들이 생각나. 네 눈동자를 보면 타올랐던 고통이 떠올라.”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인간들의 얼굴과 끝없이 울부짖었던 나날들이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최대한 죽어 있던 나를 뒤흔들어 기억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모든 것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눈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과 태양을 연상시키는 눈동자, 햇살 같은 청년의 얼굴은 행복했던 날들이 생각나게 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미친 듯이 그리워해도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그 행복들을 떠올리게 해 나를 괴롭게 했다.
청년은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건지, 나를 보지 않으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넌 나보다 일찍 죽지. 나는 또 남겨져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해. 기억과 감정을 모조리 떠올리게 해놓고, 끝없이 흘러갈 시간을 느려지게 만들어놓고 넌 떠나. 너만 만족한 채, 남겨질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나를 이해하는 건가?”
청년은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생각조차 없었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자신의 기준에서 나를 생각했기에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계속 찾아와 나를 흔들었으리라.
“나를 이해한다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날 죽여줄, 마녀를 쓰러트릴 용사가 나타날 때까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죽은 상태로 기다리는 게 내겐 차라리 나은 일이다.”
살아 있어선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청년은 결국 떠났고, 비로소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 * *
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꿈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상상인지 기억인지 모를 장면을 계속 떠올렸고, 이제는 가사조차 생각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청년이 무얼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녀를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애써왔던 수많은 시간들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막 탑에 갇혔을 때처럼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럼에도 계속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종소리를 헤아린다고는 하나 전부 듣는 것도 아니고, 또 세다가 잊어버려 다시 세곤 했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내게는 아주 미미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었기에 모래사장의 모래를 세는 것만큼 덧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소리를 세려고 애썼던 이유는, 청년의 시간을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또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고 싶어서 하루하루를 셌다.
청년은 확실히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용사보다도 잔인한 건 틀림없었다. 마녀가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끔찍한 형벌을 스스로 되뇌게 만들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런 용사를 마녀에게 보내준 하늘이 제일 잔인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마녀.”
“넌 왜 그러고 있어?”
“억울하지 않아?”
“넌 애틋하고…….”
“……사랑해.”
꿈인지 환청인지 모를 소리들이 나를 괴롭히고, 나는 눈을 감아도, 떠도 사라지지 않는 잔상 때문에 몸을 웅크렸다. 손으로 귀를 막고 두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어도 소용이 없다.
오랫동안 홀로 동떨어져 있던 내게 찾아온 어린 용사는 견딜 수 없는 형벌이 되어 나를 죄어왔다.
인간이 아니었고, 또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내게서 여자를 본 청년 때문에 내 속에 죽어 있던 수많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언제쯤 가라앉을 수 있을까. 탑에 갇혔던 그날 이후로 긴긴 시간을 보내며 겨우 스스로를 죽일 수 있었는데 앞으로 또 그 시간을 반복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가슴속이 콱 막혔다.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는다. 이 저주는 언제쯤 풀릴까.
“마녀.”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정말 보고 싶어.”
나는 간신히 잠들었다가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눈을 떴다. 하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진득한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뭔가 더 음습했고 차가웠다. 불안함에 손끝이 떨렸다.
몸을 일으켜 나무 탁자로 다가갔다.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카드가 보였다. 청년이 떠난 이후로 일부러 시선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썼기에 어느새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다급하게 들어 올리니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카드를 뽑은 다음 뒤집었다.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다시. 섞은 다음 뒤집었다. 다시. 또다시. 다시. 하지만 이런 행위는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며 속삭이는 듯 뽑을 때마다 같은 카드였다.
파르르 떨리던 손은 결국 카드를 놓쳤다. 뽀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바닥에 떨어진 카드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몸을 돌렸다. 후회할 걸 알면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뒤집힌 카드는 백지였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무 미래도 없었다.
* * *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얼마 만에 보는 달빛인데, 또 얼마 만에 느끼는 바람인데 미처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 눈동자는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며든 달빛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온통 피로 뒤덮여 있어 이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퉁퉁 부은 눈을 뜨려고 애를 쓰더니 결국 성공한 모양이었다. 찢어진 입술 끝을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부름을…… 들은 거야?”
한마디, 한마디가 거친 숨과 뒤섞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 목소리로 힘겹게 계속 부르고 있었을 청년을 생각하니 가슴속이 온통 따끔거려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에 먹었던 독약이 떠올랐다. 몸속이 뜨겁고 쓰렸고 뒤흔들렸고 녹아내렸다. 딱 그 느낌이었다.
청년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순간, 한 걸음 내디뎠다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추었다. 웃다니? 웃을 수가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습이어서 혼란스럽다.
“이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데…… 가뒀다며 좋아했겠지……. 스스로 갇힌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게 웃긴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 내뱉는 말이 고작 그런 것이라니.
힘에 부치는지 기침을 하던 청년은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익숙할 정도로 새카만 핏덩어리였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하던 청년이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웠겠구나…….”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져 결국 입을 열었다.
“넌 나 때문에 죽는다고, 그러니 더 이상 엮이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넌…… 이미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알고 있었다. 청년의 미래는 어린 용사로 찾아왔던 그날부터 보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가라고 했다. 날 찾아오지 말라고, 날 생각하지 말라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라고 계속 말했다.
청년은 나 때문에 죽으니까.
하지만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나만 아니었어도…….
“괜찮아. 내 선택이니까.”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너 때문에 괴로웠던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힘겨워지라고 이런 짓을. 대체 왜.
“보고 싶었는데…… 보러 와줘서 고마워.”
청년은 나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헐떡거리면서도,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내가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좋았을 걸. 네 곁을 떠나지 않고.”
청년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울음을 꾹 참는 듯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끝까지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그래도……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난 너를 만나러 올 거야. 그러고 싶어.”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 만에 느껴지는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뜨거웠고 축축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아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내가 널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청년의 미래를. 그래서 억지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나 또한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빛은 어둠을 몰아내야 했지만 어둠이 빛을 삼키고 말았다. 노력했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운명은 내게 너무나 잔인했다.
“내가, 내가 죽어서 정말 저주를 풀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죽어줄 텐데.”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스스로를 죽이지 마. 나는 널 만나서 행복했으니까…….”
왜? 넌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는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마녀이고, 청년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 간 마녀이며, 끔찍한 모습과 악취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마녀인데.
정말로 운명이라면 이것 또한 신의 뜻인가. 나와 너에게 선택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신은 어린 용사와 마녀의 마음을 쉽게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인가.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새, 운명의 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가.
희미하게 웃던 청년이 크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쥐어짜듯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거친 숨을 쉬지 않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그제야 서늘한 바람이, 스며든 달빛이 느껴졌다. 청년의 시간이 멈췄고 앞으로의 내 시간 역시 또다시 멈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멈춰진 시간 역시 내게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노력했는데, 소용이 없잖아.”
나는 이미 고요해진 청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흰색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얀 얼굴과 속눈썹도 붉은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붉은색은 그게 아니었다. 찬란하고 따스한, 날 삼킬 듯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빛을, 태양을, 희망을, 사랑을, 찬란한 그 색상을 품고 말았다.
인간의 삶은 덧없다. 너무 쉽게 으스러진다. 그걸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눈부신 붉은 눈동자가 다시 보고 싶어져서, 이럴 줄 알았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마주해 줄걸, 또다시 후회하고 말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 왔으면서 그 노력들마저 후회가 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만약 신의 뜻이라면, 신이시여. 당신은 내게 무얼 원하고 계신 겁니까.
나는 주저앉아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이렇게 그대로인데, 너는 왜 이렇게 달라졌는가. 왜 나는 너의 죽음을 바꿀 수도, 그렇다고 나 역시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청년의 죽음을 봐주는 이는, 그 때문에 슬퍼해주는 이는 없었다.
죽기를 바라며 가둬두었던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늘 이렇게 쓸쓸하고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 없이 슬펐다.
나는 결국 청년의 몸 위에 쓰러져 끝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 * *
탑으로 돌아온 뒤로도 무너져 버린 내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무너지고 말았다.
탑에는 청년의 흔적이 가득했고 어느덧 어둠 속에서 홀로 꽃을 피운 식물도 있었다.
널 가져다 놓은 청년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니. 이곳은 널 내리쬐는 태양도, 어루만지는 바람도, 깨끗한 물도 없는데, 왜 모든 것을 쥐어짜 꽃을 피우는 거니.
어차피 덧없는 것을. 얼마 안 가 스러질 것을.
마치 청년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토록 쉽게 스러질 거였으면서 모든 것을 내보여줬던 그가 떠올랐다.
이제 남은 물은 얼마 없었다. 그동안 어울리지 않게 식물을 키워오던 나는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청년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꽃 또한 이렇게 보낼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사실 그게 정상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거니 신경 쓰지 말아야만 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내며 이젠 어떤 일을 겪든 별 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홀로 지내온 그 긴긴 시간들은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눈과 같았다. 어린 용사라는 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차츰차츰 녹아 사라지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탑 안에서 꽃을 피운 씨앗처럼, 용사는 마녀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고 결국엔 피워냈다.
나는 막 탑에 갇혔던, 용사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나를 죽여대던, 어둠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앗아가던, 어둠에 휩싸이던 그때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제발 나를 죽여달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나를 뒤흔들던 청년이 죽었으니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또다시 시간을 보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저주를 내릴 수 있다면 날 이렇게 만든 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차라리 세상을 멸망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내게 뭘 원하길래.
더 이상 내 미래는 없었다.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선물해 준다고 했는데, 그 빛이 정말로 청년이었던 모양인지 그의 미래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신이 정해둔 운명에 따라 흘러갔을 뿐인데 나보고 어찌하라고.
청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토록 밀어냈고, 어둠에 삼켜지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결국 그의 손에 검을 쥔 채 내 스스로를 찔렀다.
그럼에도 운명은 바뀌지 않았고, 청년의 미래도 그대로였으며, 결국엔 어둠에 삼켜져 영원한 안식은 그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점괘가 말한 빛이 정말 그였다면 그가 휘두른 검에 내가 죽었어야 정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는 살아남아 어둠을 몰아냈어야 정상 아니던가. 그게 안 되었는데 죽음으로 예정된 미래를 어떻게 바꾸고, 내게 영원한 안식은 어떻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들고 처음 만났던 그 빛 그대로 존재하게 만들어 나를 죽였어야 했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나는 미칠 것 같았지만 신은 미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지내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자거나 깨어 있거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언제나 어둠 속이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종소리만이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곤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누워 나를 죽이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마녀! 어디 있나, 마녀!”
찾아온 용사를 맞이해 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인지 큰 소리로 외쳤다.
“마녀! 널 죽이고 저주를 풀겠다!”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떠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실소를 흘렸다.
드디어 내가 미친 모양이군.
하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어린 용사는 단검을 내게 겨눈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생생한 환각에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자, 상상 속의 용사님은 기분이 많이 나쁜 모양인지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느냔 말이다, 마녀!”
“그냥 조금 기뻐서.”
“뭐?”
“이제야 미치는 것을 허락해 주다니, 기뻐. 비록 상상일지라도 어린 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기뻐. 앞으로 죽지 않고 계속 내 곁에 있어줄래? 내가 죽을 때까지, 날 죽여줄 용사가 나타날 때까지 쭉 말이야.”
너는 내가 죽기 전까진 죽지 않을 테지. 그러니 기쁠 수밖에.
내가 가엽기는 가여웠나. 이런 선물을 주다니.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힘이 없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천천히 기어가자 어린 용사는 겁을 먹은 듯 검을 휘두르며 거부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나는 조금 섭섭해서 투덜거렸다. 거부해야 할, 어떻게든 밀어내야 할 존재가 아니니 더 이상 딱딱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정말 소년을 다시 보게 되어 기뻤고 들떴다.
“왜 날 거부하는 거야? 날 사랑한다더니.”
“미친 거 아니야? 오랫동안 갇혀 있더니 제정신이 아닌가 봐!”
미쳤지. 날 이렇게 미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너다, 소년.
나는 손을 뻗었다가 어린 용사가 휘두르는 검에 베이고 말았다. 소년은 깜짝 놀랐는지 뒤로 물러났고, 나 역시 핏방울이 맺히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아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소년이 대답했다. 확연하게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네, 네가 가까이 다가온 거야! 내가 가까이 다가오지 말랬잖아!”
나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너무 생생하다. 이것 또한 내 상상인가? 고통 또한 내 상상의 일부일 뿐인가? 미치면 상상의 한계가 사라지는 건가?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소년을 응시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는 태양 같았다.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던, 그 눈동자였다. 너무나 생생해서 꼭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문득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소년이 서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소년이 가져다 놓았던 물통, 책, 썩은 음식들, 식물까지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 또한 상상인가. 소년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가.
“너는 나의 상상인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런 미친 마녀 때문에 우리 형이 죽다니. 우리 형을 돌려줘! 되살려내란 말이야!”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용사를 보며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이 붙잡혔다는 사실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던 소년은 곧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손으로 느껴지는 이 따스한 체온은 뭐란 말인가. 이 부드러움은 뭐란 말인가. 이것도 내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라고? 정말?
“마, 마녀. 왜 그러는 거야.”
겁에 질린 듯 소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전의 강인하고 분노하던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다급하게 소년을 품에 안았다. 순간, 끔찍한 악취로 괴로울 소년이 떠올라 서둘러 떼어냈지만, 소년은 여전히 무섭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꿈을 꿨던 건가. 내 혼잣말에 소년이 대답했다.
“나도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어. 마녀, 내 형이 죽었어.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소년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내 손등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내 속에서도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기에 꿈을 꾸는 건지, 상상인 건지, 아니면 꿈에서 깨어난 건지, 과거로 돌아온 건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고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믿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하지?
내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 * *
카드를 뒤집으니 다시 미래가 돌아와 있었다.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리라.
어린 용사의 미래 또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 상황을 믿기로 했다. 지금껏 꿈을 꾸다 깨어난 것이라고. 종종 예지몽을 꿨듯이 이 또한 미래를 본 것이라고.
끔찍할 정도로 길고 생생한 꿈이었지만, 내가 보내온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것없으니 그 정도는 미래를 본 대가로 지불하자고.
그리고 내게 이런 일을 겪게 한 이유가 분명 존재할 테니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점괘나 예지몽으로 미래를 알려주곤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 선택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 결과가 정확히 어떤 건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미래는 어떠한지 알려준 적은 없었다.
청년이 죽은 후, 내 미래는 사라졌었다. 점괘가 말하는 빛이란 그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어둠에 삼켜지지 않도록 계속 거부하고 밀어냈으나 소용이 없었고, 내 노력에도 미래가 바뀌지 않았으니 방법이 틀렸다는 뜻일 터였다.
그럼에도 미래를 보여준다는 건 그 외에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선택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어린 용사를 지키는 것.
죽지 않도록, 빛 그대로 성장해 어둠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그의 곁에서 보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밀어내는 대신 곁에 두고 그를 지켜봐야 했다.
탑에 갇힌 마녀는 어린 용사를 키우기로 했다.
무사히 성장해 어둠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