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1)

에필로그 2. Seven years ago, seven years later.

“끼고도는 애첩의 맛이 그리 좋다고 들었습니다.”

체데프는 아직도 그날의 역겨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리쬐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마치 한여름의 태양 같음에도 그의 속은 한겨울의 설산처럼 냉랭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몇 번이고 움켜쥐어야 했다.

‘이걸 어떻게 죽일까.’

이전에 카임이 짐작한 대로 체데프는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채로 다가와 인사를 건넬 때부터 꼬락서니가 영 탐탁지 않더라니.

그는 망발을 늘어놓는 취객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뒤에 선 보좌관이나 곁에 모인 무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제게도 느껴지는데, 안타깝게도 이 주제넘은 영식에게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취기가 부추긴 용기 그리고 무식함이 아닐 수 없었다.

공적인 자리임을 곱씹고 또 곱씹어 참아냈다. 요즈음 반대파와 부딪치는 사안이 많아 별것 아닌 일로 트집 잡힐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고꾸라진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체데프는 평소보다 일찍 연회장을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남들 앞에서 라샤를 욕보인 그 돼먹지 못한 놈을 가만 놔두고 돌아가야만 하는 게 몹시도 언짢았다.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다 한들 제 연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유쾌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제 기분을 눈치챘는지 집사와 사용인들은 할 일을 마치고 얼른 물러났다.

체데프는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아 라샤는 대개 잠든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은 꽤 일찍 빠져나온 덕분인지 그녀는 깨어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이상했다. 지금까지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던 기분은 그녀의 사근사근한 음성 한 마디에 쭉 풀어졌다. 그는 자신이 봐도 중증은 중증이다, 여기며 피식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라샤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다녀왔어.”

그녀의 입에 잔키스를 남긴 그가 소파 밑에 주저앉아 라샤의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피곤하세요?”

“조금.”

라샤가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애틋한 손길이 심장을 기분 좋게 뛰게 했다. 라샤가 품은 온기, 제게로 닿는 흔적, 그녀의 존재감이 그에게 있어 위안 그 자체였다.

조금 나아졌던 기분은 연회장에서 들었던 모욕을 상기한 순간 다시 하강했다. 그는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목이 조이네.”

“크라바트를 풀면…….”

차분히 말하다 멈춘 라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 달라는 거죠?”

“그래.”

그가 픽 웃자 라샤도 덩달아 웃었다. 그녀는 선뜻 손을 뻗었다.

정갈하게 묶인 크라바트를 쭉 잡아당기자 체데프의 상체 또한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그 상태로 몸을 맞붙인 그가 입술을 맞춰왔다. 그 정도의 힘도 아니었는데 무력하게 딸려온 걸 보니 처음부터 이럴 의도가 분명했으리라. 거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기에 라샤는 기꺼이 입맞춤에 응하였다.

잠시간의 키스 후 그가 촉,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었다. 격하지는 않아도 끈적했음을 증명하듯 입술 사이로 은색 타액이 늘어졌다. 체데프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나는 네가 소중해, 라샤.”

그러니 역시,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인 놈은 족쳐야 맞겠지.

다시는 건방지게 너를 거론하는 놈 따위 없게 해야겠어.

그래, 그게 옳았다.

라샤로선 알지 못할 살벌한 결단을 내린 체데프는 문득 크라바트에 가해지는 힘에 고개를 들었다. 라샤가 손에 쥔 크라바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가만히 있자니 그녀는 계속해서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쭉, 쭉, 쭉…….

* * *

체데프는 자꾸만 목이 조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제 몸 위에 올라탄 자그마한 인영을 발견했다. 저와 똑같은 색을 가진 금색 눈동자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 주인은 체데프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휘어 빙긋 웃었다.

“아버지!”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7살이 된 아티엔느가 제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목이 조이는 느낌은 아티의 한쪽 손이 그의 쇄골뼈 부근을 짓누르고 있던 탓이었다. 체데프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쳐 안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서 그런지 살짝 비몽사몽이었다. 한 박자 후에야 라샤와의 과거를 꿈으로 다시 보았음을 깨달았다.

아티엔느는 자고 일어나 까치집이 생긴 아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하도 잡혀서 그런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공작의 동의 없이 머리칼에 손을 댈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라샤와 아티엔느, 단둘뿐이었다.

체데프는 나른한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제 품 안에서 꼼지락대는 아기의 기척이 남은 잠기운을 앗아갔다.

“오늘 함께 피크닉을 가기로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체데프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피식 웃었다. 이제 막 깨어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또 그 약속은 기가 막히게 기억이 났다. 아티엔느가 일주일 전,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망울로 늦은 시각까지 저를 기다리며 얻어낸 약속이니 당연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샤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 갔니.”

“쉿.”

“음?”

“어머니 몰래 들어왔어요.”

“왜?”

“어머니는 아버지가 피곤하시다고 깨우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어제 자정을 넘어서 들어온 저를 걱정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아티엔느와 저 외곽으로 피크닉을 가자고 약속한 날이었으나 피로하면 쉬어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던.

체데프는 아티엔느의 말랑한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며 응접실로 나섰다. 간지러운지 제 품 안에서 까르륵대는 딸의 웃음소리가 가슴 속을 행복으로 빠듯하게 채웠다. 두 사람은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라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티! 어딜 갔나 했더니.”

라샤는 남편의 품에 안긴 아이만 보고도 상황을 얼추 짐작한 듯했다. 어머니의 엄한 표정에 아티엔느는 이크, 하며 아버지의 품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행동이 귀여워 입꼬리를 휜 체데프는 아티엔느를 고쳐 안으며 다가오는 라샤의 뺨에도 입을 맞췄다.

“몇 시지? 준비는?”

“지금 집사가 하고 있기는 한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냐, 괜찮아. 아티와 약속했으니 가야지.”

아비의 품에 폭 안겨 알게 모르게 라샤의 눈치를 보던 아티엔느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아버지, 감사해요!”

아티엔느는 신이 나 준비를 하기 위해 부리나케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기 전 고마움의 표시로 아버지의 뺨에 뽀뽀를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둘만 남겨진 침실 속에서 체데프는 라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한 번 이별했던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자다 일어나면 간혹 이렇게 그녀와 꼭 붙어 있으려고 하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라샤는 익숙하게 그를 마주 안으며 헝클어진 그의 적발을 쓸어넘겨 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사근대는 걸 잊지 않았다.

“라샤.”

“네.”

꿈을 통해 아주 오래간만에 기억해낸 과거 속, 제가 건넨 말이 떠오른다. 네가 소중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잠깐 발을 헛디뎌 권태의 늪에 빠지는 바람에 그녀를 소중히 대해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겪은 고통이 불가항력처럼 생각나는 바람에, 그 말을 다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사랑해.”

뜬금없는 고백이었는지 라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그녀는 새삼스럽다는 듯 웃으며 똑같은 답을 속삭여왔다.

열린 창틈으로부터 그의 마음 같은, 그녀의 반응 같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권태의 늪, 完>

권태의 늪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