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

9장. To my long-time lover

볕 좋은 오후.

흠잡을 데 없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응접실 속.

카임은 어깨너비만큼 벌린 다리를 덜덜 떨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정하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으나 불안하게 울렁거리는 심장은 도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준비된 차를 입에 전부 털어 넣었는데도 이따금 목이 말랐다.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아직도 약 한 달 전의 기억이 훤했다.

별안간 큰 굉음이 들리며 흑사자 문양의 제복을 입은 공작가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무리를 가르며 등장하던 사내의 존재감은 그의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임도 귀족이니만큼 종종 사교장에서 세실리온 공작을 마주쳐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명성 자자한 공적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핏줄에 뒤처지지 않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내였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여인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따라붙고는 하였다. 어쩌면 여인뿐 아니라 사내까지도. 물론 후자의 경우는 이성적인 호기심보다는 선망 혹은 두려움이겠지만 말이다.

카임이 놀랐던 건 그날 목격한 공작의 분위기가, 여타의 사교 모임장에서 보던 것과는 판이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자리 속에서 그는 지루하고 따분해 보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권위자다운 여유로움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느닷없이 백작저로 난입해온 그날은 완전히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임은 좀 미친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에 총을 들고 눈은 벌게진 채 멀쩡한 대문을 완전히 박살 내고 들어오는 백주대낮의 무법자를 어찌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들소처럼 뿜어져 나오던 대찬 기운은 라샤를 마주한 순간 무용해져 버렸다. 마치 이 세상에 군림한 신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떨칠 수 있을 것만 같던 공작은 라샤같이 가녀린 여자 앞에서 쩔쩔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되레 기죽지 않고 차분히 반응하던 라샤가 그보다 더욱 커 보이는 순간이었다.

카임은 그날, 깊은 감정의 골이 언뜻 엿보이는 그들의 대화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 진정 연인이었음을 인지했다.

더하여 자신이 얼마나 좆된 건지도.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카임은 조건반사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힘이 꼿꼿이 들어갔다.

당장 총을 난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던 지난번과 달리, 오늘 마주한 세실리온 공작은 엄숙하며 침착했다. 이것이 카임이 잘 알던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난날 목격하게 된 모든 상황이 꼭 신기루 같았다.

그러나 부모가 타계하고서야 알게 된 이부 누이의 일로 생전 연이 없던 세실리온 공작저에 오게 된 것만으로도, 이 모든 일은 피할 길 없는 현실이었다.

“공작 각하.”

마땅한 인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는다고 하기엔 괜히 지나간 일을 들추어 위험을 앞당기는 느낌이고 그렇다고 처음 뵙는다기에는 지난번 분명 마주치지 않았던가. 물론 통성명이나 제대로 된 대화 하나 나누지 않았지만, 어쨌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카임과 달리 체데프는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에게 앉기를 종용하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맞은편에 가 앉았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제가, 저, 오히려, 아니, 예…….”

머리끝까지 차오른 긴장감에 되는대로 지껄이던 카임은 제가 말주변이 이렇게 없었나, 자조하며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곧 체데프를 위한 찻잔까지 대령되고서야 그럴듯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제발 차가 나오기 전에 라샤 또한 이곳에 와 주기를 바라던 카임은 아무래도 오로지 둘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듯한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공작 앞에서 혀를 함부로 놀렸던 사내의 비참한 말로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라샤가 어련히 잘 설명해 두었을 테니, 제가 그 영식과 같은 꼴이 되지는 않을 터.

“저, 라샤는…….”

그러나 카임은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에 라샤를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뭣보다 둘만 놓인 이 자리가 가시라도 삼킨 양 사람 환장하게 불편한 것도 있었다.

“라샤는 오늘 자네가 이곳에 온지도 몰라.”

“…….”

“내가 부르기 전까지 이곳으로 올 일이 없다는 뜻이지.”

카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라샤가 동석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이 가시방석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납작 수그리는 수밖에 없는 듯하였다.

“그래. 그간 그대가 라샤를 보살펴 주었다고.”

“예. 그, 사정은 들으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라샤가 그대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 들었네.”

그래도 숨 쉴 구멍은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카임은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잠깐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래서.”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라샤가 나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걸 그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부터?”

“…….”

“아님 알면서도 간 크게 내게 기별 하나 전하지 않았던 것부터?”

차를 한 모금 삼킨 체데프가 다음으로 꺼낸 말이 다시 그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인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찻잔을 들어 올리던 카임은 그대로 쩍 굳었다.

역시나 오늘 저를 초대한 건 지난날 라샤를 숨겼던 죄를 이유로 조지기 위해서였던가!

물론 그 점을 걸고넘어진다면, 체데프에게 있어서 그는 용서할 길 없는 역적과도 같으리라. 제 연인을 향한 그의 애정은 백작저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만큼 강렬했으니.

그러나 카임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가! 부러, 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단코요!”

“…….”

“라샤가 말하기를, 각하와의 관계는 이미 다 정리가 되었다기에……. 또 저로서는 덜미가 잡힌다면 금방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예상보다 늦어지셔서 라샤의 말이 사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도 각하께 기별을 드려야 할지 여러 번 고민도 해 보고…….”

“농담이네.”

“……예?”

“농담이라고. 그 일로 탓하려고 부른 거 아니니 긴장 풀어.”

아니, 누가 농담을 저런 재미없는 얼굴로 하나…….

긴장 풀라는 그 말조차 쉽게 넘길 수 없는 기백을 풍기는 탓에, 카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옷자락에 가려진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라샤에게 입적에 대한 의향을 물어봤다고 들었다만.”

“아, 예. 핏줄이 같은 걸 확인했으니까요.”

체데프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카임의 얼굴을 물끄럼 응시했다.

혹 라샤를 이용하여 무어라도 챙겨 볼까 하는 의도인가 싶어 골몰히 주시했으나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앞에 두고 바짝 긴장한 건 단지 지난날의 오판으로 인한 것뿐인가. 하긴. 애초에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라샤를 지금껏 숨겨 주고 있을 이유도 없었으리라.

그녀가 미혼인 점을 고려하자면 혼담을 장사로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샤의 배 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좋은 패로 여기기에 배 속의 아기는 너무도 큰 흠이었다. 설령 아기를 지운다고 하여도 처녀가 아니라는 건 혼담 시장에 치명적인 결점이 되었다. 그러니 귀족적인 사고로 판단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 패라 여기며 당장 그녀를 내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리페 백작은 그녀가 임신 중인 걸 알면서도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고 했다. 그 태도를 곱씹자니 라샤를 불순하게 이용해보려는 의도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체데프는 그가 좋은 사람 같다는 라샤의 전언을 떠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라샤와 결혼하고 싶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공연한 긴장감을 느끼기에 여념이 없던 카임은 처음으로 침착하게 굴 수 있었다. 적어도 이건 예상한 바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무시무시한 기세로 쳐들어와 라샤를 금이야 옥이야 조심스레 모셔가던 모습을 떠올리면 짐작하지 못하는 게 바보천치일 터다.

그만큼 눈앞의 공작은 그의 이부 누이에게 맹목적이며 순애보적이었다.

“물론 이건 통보지, 자네에게 허락을 구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

“내가 허락을 구해야 할 만큼 자네보다 라샤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 예에…….”

반박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감 있는 태도가 절로 기를 죽였다. 틀린 말도 아닌지라 카임은 고분고분하게 반응했다. 그의 말대로 제대로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저보다 7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곁에서 봐 온 그가 라샤를 더욱 잘 알 것이다.

“기왕 할 거면 라샤를 백작가로 입적시킨 뒤에 진행하고 싶군.”

신분제의 사회에서 배경이라는 건 써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이었다. 물론 체데프는 그녀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줄로만 알았던 평민 시절에도 결혼하고자 했을 만큼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저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문제였다.

라샤를 공작 부인으로 앉히기 위해서는 과거에 버금갈 만한 역경이 존재할 것이다. 일단 가문의 가신들과 원로들부터 큰 걸림돌이 될 터이니.

체데프는 애초 날 때부터 잡다한 이목과 그에 동반되는 문제를 짊어지다시피 한 삶을 살아왔으니 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라샤는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가 힘들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더하여 주변인들의 개입으로 그녀와의 사이에 오해가 불거져 다시금 위기를 맞는 건 질색이었다.

그를 위하여 배경을 써먹을 수 있다면 얼마든 그럴 용의가 있었다. 마침 리페 백작 역시 그에 대한 이견이 없는 듯도 하니 말이다.

다행히 카임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빠르게 이해했다.

“다만, 라샤의 의향은…….”

소심하게 꺼내 드는 질문으로 말미암아 체데프는 그를 향해 쳐둔 벽을 한 겹 더 벗겨냈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라샤의 의견을 신경 쓰는 걸 보면 확실히 글러 먹은 자는 아닌 듯했다.

체데프는 꽤나 첨예한 탐색의 눈을 거두어들였다.

“라샤는 좋다고 말했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귀족에게 하사되는 작위는 명백히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런 만큼 귀족가의 입적 역시도 필히 황제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었다. 왕당파의 수장으로서 황제와 가깝다는 걸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태도가 오연했다. 그의 불안정한 모습은 오직 라샤와 엮일 때만 발생한다는 걸, 카임은 새삼스레 깨닫는 기분이었다.

본론이 끝난 응접실에는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 말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침묵을 깬 건 예상 밖에도 체데프였다.

“고맙네.”

“…….”

“라샤를 챙겨 주어서.”

카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설마 공작에게서 감사 인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누군가 정신머리를 쏙 훔쳐 간 낯이었다.

희한하게도 체데프는 그 표정에서 언뜻 라샤를 보았다. 재회했을 때의 표정이 딱 저렇지 않았나. 피가 섞였다는 걸 들었을 때도 영 찾지 못하던 연관성을 뜻하지 않은 데서 발견했다.

그가 정말 라샤와 한 핏줄이라는 걸 곱씹으니 단단히 쳐둔 벽이 한 겹 더 허물어졌다. 고작 라샤와 닮은 점을 찾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물론 완전히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카임이 넘어야 할 벽은, 아직도 무수히 많았다.

* * *

라샤의 입적 건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카임이 공식적으로 이부 누이의 존재를 알리고 적을 올리는 것에 대하여 황실에 승인을 청하는 서류를 올렸다. 세실리온 공작의 입김으로 본 안건은 평소만큼의 시간이 지체됨 없이 곧바로 승인 처리가 완료되었다.

또한 황제는 일찍이 접수된 로베니 후작으로부터의 정식 고발장 역시 유야무야 넘겨 버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단지 중립파 귀족을 위해 제 뜻을 대변해 주며 정치의 중추를 이끄는 공작을 엄벌에 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면 이 땅의 태양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그 태양의 환한 빛은 오직 저의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만 뿜어져 나오는 것이기에.

더군다나 가문끼리 결탁하여 진행하던 연구 중, 로베니 후작의 광산에서 나온 광물에 예기치 못한 결점이 발견되어 그 결과 역시도 김이 팍 식어 버리게 되었다. 사업의 가치를 더해 줄 최고의 재료가 사실은 그저 그런 자갈이었단 사실이 밝혀지며 나날이 치솟아 오르던 그들의 평판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이러니 황제로서는 그들의 파혼 역시도 모르는 척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라샤의 입적 건이 무사히 마쳐지고 다음은 그들의 결혼이었다. 예상대로 공작가의 가신들과 원로들은 라샤가 실은 백작가의 여식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녀의 배에 이미 공작가의 핏줄을 타고난 아기가 있단 말에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기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난 많이 양보한 것 같군. 그대들이 가장 탐탁지 않게 여기던 출생 문제는 어찌 됐건 해결된 거 아닌가.’

‘…….’

‘하니 불만이 있는 자가 있거든 직접 집무실로 찾아오게. 내 친히 맞이해 주지.’

그건 아무리 봐도,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반대하는 이가 있거든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제 집무실까지 반기를 들고 오려거든 부디 목숨을 걸라는 살벌한 경고였다. 공작의 말대로 그는 양보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걸 그럭저럭 맞춰 주었기에 다들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라샤는 만삭에 가까워져서 결혼 준비는 철저히 체데프의 몫이 되었다. 결혼식은 만삭이란 외관도 그러하지만, 뭣보다 그녀의 건강상 이유로 해산을 한 이후에 진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체데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녀를 최고의 신부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

로베니 영애와 결혼할 때와는 그 태도부터가 달랐다. 그땐 마치 남 결혼식이라도 대하듯 무관심했으나, 지금은 벽에 걸릴 장식의 색부터 곳곳에 놓일 꽃의 종류까지 신경 쓰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모든 걸 라샤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추고 싶었다. 그녀가 결혼식 당일 어디를 보아도 마음이 따스해지고 웃음꽃이 만개할 수 있도록.

7년간의 세월이 헛된 건 아닌지 그는 라샤에 대해 빠삭한 편이었고 준비는 별 탈 없이 차곡차곡 진행되어 갔다.

라샤가 품으로 돌아오고 그녀와의 관계가 회복됨에 따라 체데프의 일상 궤도는 서서히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오닉스나 호위 기사들만큼은 아니어도 가신과 원로들 역시 그가 한동안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익히 체감한 바였다. 그런 만큼 이쯤에서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온 공작의 곁에는 반드시 라샤가 있어야 했다.

“차가워?”

체데프는 그녀의 입에 오렌지 조각을 넣어 주며 물었다. 차갑기보다는 셔서 인상을 찡그린 라샤는 곧 그 맛에 매료되어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입가 가까이에 있던 체데프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쓱 쓸었다.

이전보다는 나아진 수준이라지만, 체데프는 여전히 침실을 잘 벗어나지 못했다. 출타하는 건 고사하고 저택 내에서 정무를 볼 때도 몇 번씩이나 침실로 돌아오고는 했다. 대체로 아직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감이 심장을 함부로 들쑤실 때면 그러하였다.

물론 그도 그지만, 라샤가 걱정되는 이유도 있었다. 만삭에 이르러 혹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프지는 않을까 매 시각 전전긍긍하여 그녀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를 원했다. 그래도 나름 참았다고 여긴 일전의 섹스 후 그녀가 일주일간 앓아눕는 바람에 더욱 애간장이 마르게 되었다.

제가 넣어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다람쥐처럼 볼을 움직이는 라샤를 가만 응시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귀여워…….”

라샤는 별 신경 쓰지 않고 과일 조각을 씹어 삼키는 데에 주력했다. 요즈음 함께 침대에 누울 때마다 볼이나 손가락은 말할 것도 없고, 엉덩이에 발가락까지 잘근잘근 씹어대는 남사스러운 행동이 반복되다 보니 저 정도의 말쯤은 가분히 넘길 수 있었다.

물론 밤중 침대 위에서만 그 난리를 피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처럼 무언가를 먹일 때 제 손가락도 집어넣어 핥아 달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작은 과일 조각 하나도 나눠 먹자고 입술을 들이대기도 하였다. 그럼 늘 결과는 혀만 얼얼하게 빨리는 것이었다.

오늘은 뽀뽀 차례인지 과일을 씹는 내내 제 뺨에 쪽쪽대며 줄기차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라샤는 입 안을 새콤하게 물들이는 과일을 꿀꺽 삼키고 다가온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배불러요.”

“하나만 더 먹자.”

“졸려서…….”

“우리 아기 졸려?”

요즈음 체데프는 습관이 된 건지 이따금 저런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꼭 행동의 주체를 아기로 보는 것처럼.

그건 배 속의 아기를 가리키는 게 분명할진대 라샤는 종종 그가 자신을 저런 낯부끄러운 애칭으로 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괜한 부끄러움이 들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이것마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라샤는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을 까느라 더러워진 손을 손숫물에 씻고 온 체데프는 침대 밑을 힐끔거렸다. 지난날 라샤 모르게 구비해 둔 족쇄는 모조리 치운 상태였다. 그건 라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제 못난 모습이었다. 그것을 들켰다가 혹 그녀에게 또다시 미움을 사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라샤가 잠든 사이 전부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체데프는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기대게 했다. 기울어진 라샤의 몸을 따라 목에 걸린 붉은 목걸이가 광채를 발했다. 그의 작은 심장이나 다름없는 보석을 초소형 유리관에 넣어 목걸이로 개조한 것이었다. 라샤는 잘 때나, 일어나서나, 씻거나, 혹 그와 몸을 섞을 때도 목걸이를 지니고 있었다.

체데프는 흘러내리는 흑발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은 라샤에게 늘 봄바람 같았다. 살랑살랑거리는.

“딸이었으면 좋겠군.”

별안간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즈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왜요? 나는 아들이어도 좋은데.”

“널 닮은 딸이여 봐. 얼마나 예쁘겠어…….”

라샤는 수마에 반쯤 먹혀 가물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상상의 바다에 퐁당 잠겼는지 그는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샤의 입에서 웃음이 샜다.

“아들이어도 예뻐해 줘요.”

“뭐, 네가 낳은 아이라면 성별이 어떻든 다 예쁘겠지.”

“…….”

“그래도 역시 딸이 좋아.”

“치, 그러면 나는 아들이 좋아…….”

“그래? 그럼 나도 아들이 좋아.”

“뭐야, 그게.”

라샤가 터뜨리는 말간 웃음은 꼭 새의 지저귐 같았다. 체데프가 언젠가 미치도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웃음소리였다. 결 좋은 흑발을 쓸어넘기던 그의 손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라샤의 배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내내 얌전하던 배에서 기포가 터지는 듯한 작은 기척이 일었다. 그건 아기를 짊어진 라샤도, 마침 배에 손을 얹고 있던 체데프도 잘 느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굳었다. 먼저 깨어난 건 라샤였다.

“태동이에요.”

작게 속삭인 라샤는 생전 처음 그것을 경험한 사람처럼 얼떨떨한 그의 표정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걸 눈에 담으니, 체데프는 속에 잔뜩 엉기어 있던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꼭 우리에게 대답하는 것 같군.”

“대답?”

“누군들 예뻐해 달라고 말이야.”

체데프는 그 대답에 반응하는 것처럼 라샤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태동이 몇 번 더 일었다. 신기했다. 오묘하고, 희한하면서도…… 행복했다. 어느새 돌아온 봄을 맞이하는 두 사람의 침실에는 따스하게 차오른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잃었던 것을 되찾은 봄은 더할 나위 없이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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