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

8장. Eternally

희한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기실 라샤는 처음에 그것을 ‘감금’ 혹은 ‘가두었다’고 표현했으나 그 말에는 조금쯤 어폐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대상이라기에는 너무도 극진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으니까.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식사가 대령되었고 임부임을 고려하여 주치의의 정기적인 진찰 역시 빠지지 않았다. 장소만 바뀌었다뿐이지, 백작저에서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체데프는 정무를 위해 나선 와중에도 분리 불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몇 번이고 침실로 돌아왔다. 와서 특별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라샤가 무사히 있는지만 보고 돌아갔다. 그걸 하루 종일 반복했다. 순조롭게 진행하던 업무도 삐걱댈 듯 여러모로 쓸데없이 분주한 태도였다.

그리고 밤 역시도 그는 평안하지 못하였다.

라샤는 그가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응접실의 소파에서 잠들고는 했다. 저녁만 먹으면 이미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버티는 데에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잠이 들었다가 왠지 모를 기척에 깨어나면 늘 침대 위였다. 그녀의 뒤에는 체데프가 누워 있었다. 그는 이전처럼 등 뒤에 누워 굵직한 팔로 라샤를 꽉 끌어안은 채 잠들고는 했다.

그럼 라샤는 그의 팔을 치우고 꾸물꾸물 일어나 다시 응접실로 나갔다. 그리고 너른 소파에 누워 다시 새우잠을 청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얼마 안 있어서 깨면 또 침대였다. 이런 이상한 기행이 며칠이나 반복되어 벌어졌다. 그야말로 밤중의 소리 없는 사투가 따로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샤는 그와 함께 잠들기 싫었고, 체데프는 라샤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 다 응접실의 소파에서 자기에는 체데프의 몸이 여간 큰 게 아니라 무리였다. 그런 관계로 서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면서도,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별하기 전만 해도 매일 일찍부터 나가 밤중에야 돌아오던 체데프의 일과는 조금 변하였다. 이전엔 쉬는 날이 없던 그가 일주일에 두세 번은 라샤와 함께 침실에만 박혀 있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쉬는 것도 아니고, 라샤의 곁에 달라붙어 그녀만 졸졸 쫓아다녔다. 피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라샤는 이제 제가 지쳐서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침실에 갇히며 할 게 없어진 라샤는 다시 자수를 손에 잡았다. 예전엔 체데프를 위하여 놓았다면, 이젠 태어날 아기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책도 읽지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취미에도 조예가 전무하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하루는 비가 왔다.

라샤는 푹신한 벨벳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누워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체데프는 어느덧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밤마다 그 난리를 피우고 낮에도 정무를 보느라 쉴 시간이 없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라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가 돌아온 이후로도 편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님을 증명하듯 그의 눈 밑 그늘은 여전히 짙었다. 묘하게 날카로워지고 정제되지 않는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뾰족하고 사나운 분위기를 한 번도 제게 내보인 적은 없지만.

라샤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그의 오른팔에 닿았다.

“…….”

재회한 그 순간부터 그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등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체데프는 그녀 앞에서 저 환부를 한 번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매일 깔끔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침실 바깥에서 꼬박꼬박 붕대를 가는 모양이었다. 가끔씩 그는 습관적으로 저 팔을 사용했다가 인상을 찡그리고는 했다. 환부로부터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원정에 자주 나서던 시절에도 그가 저렇게 오래도록 부상을 입었던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원치 않음에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라샤는 제 곁에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그의 태도에 빠르게 적응했다. 돌이켜보면 그건 그가 갑자기 보이는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권태에 젖기 전, 함께 보내온 많은 시간 동안 그의 태도는 저러했다. 오히려 데면데면하거나 무심하게 굴던 이별 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가 무얼 하든 옆에 와 꼭 붙어 있고, 어딘가가 닿아 있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처럼 피부를 맞대고, 습관적으로 입술을 들이대며 키스를 조르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꼭 제 무릎 위에 그녀를 앉히고. 이 관계에 익숙해지기 전의 체데프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다. 라샤가 너무나도 잘 아는, 7년이라는 시간 속의 그 말이다.

그러니 저건 달라진 게 아니라, 돌아왔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라샤는 그것에 견딜 수 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하아.”

그 심정 그대로 옅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문가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제법 익숙한 얼굴의 주인공은 기사, 베르히네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산책을 하고 싶어요.”

“각하께서는…….”

“잠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베르히네가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라샤가 외출을 할 수 있는 건 체데프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와 있을 때는 아무것도 청하고 싶지 않아 입을 딱 다물어 버리니, 부탁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 형국이었다.

“부탁할게요.”

“죄송합니다, 라샤 님.”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베르히네의 어깨가 미약하게 움찔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우울병에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

“우리 아기도 그런 내 상태에 영향을 받을 텐데…….”

“각하께 여쭤봐 주시면…….”

“오랜만에 잠이 들어서요. 깨우고 싶지 않아요.”

베르히네는 갈등에 휩싸인 표정을 지었다. 기사에게 주인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이성은 당연히 안 된다고 결론 지었지만, 라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남긴 여운이 양심을 흔들었다. 더구나 라샤의 말을 함부로 흘려들을 수 없는 건 그녀가 홑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배에는 가주의 아기까지 있었다.

“내가 도망갈까 봐 그런가요?”

베르히네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건 긍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샤는 이전보다 조금 더 윤곽을 뚜렷이 그리는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런 상태로 도망가 봤자 얼마나 가겠어요, 게다가 날씨도 이런 마당에.”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임신을 하여 몸이 무거워진 라샤는 최근 들어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다. 이전 백작저에서도 그랬기에 체데프에게 금방 붙잡히지 않았던가.

그렇잖아도 공작의 지시로 이곳뿐 아니라 저택 전체의 경비가 강화된 참이었다. 베르히네가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붙잡을 기사는 천지에 깔려 있었다. 이전처럼 쉽사리 빠져나가는 건 꿈에도 꿀 수 없으리라. 더군다나 오늘은 비까지 오고 있어서 시야가 좁고 어두웠다. 설령 도망을 간다고 해도, 여러모로 용이치 않을 터였다.

“……그럼 가까이서의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사님이 따라오실 건가요?”

“예.”

라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물러나 줄 수 있는 선이 거기까지임을 알아챈 것이다.

베르히네는 지나가는 사용인에게 우산과 로브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에게 혹 공작이 깨어나거든 바로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직접 들어가 고하고 싶어도 공작의 침실에는 허락 없이 출입이 불가했다. 정작 허락을 맡아야 할 당사자가 저 안에서 자고 있으니 그들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쐬는 바깥 공기는 가랑비 탓에 수분기를 잔뜩 머금고 있음에도 마냥 상쾌했다. 베르히네가 붙잡으라는 듯 손을 뻗어왔다. 그건 지탱해주려는 의미도 있겠지만 뭣보다 라샤를 어떻게든 붙들어 놓으려는 의도가 클 터였다. 그간 체데프가 보인, 머저리가 된 듯한 태도를 보니 그들의 걱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

라샤는 그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내디디는 그녀를 따라 베르히네가 정중하게 우산을 받쳐 주었다. 처음에는 언제 돌발상황이 생길지 몰라 온몸을 굳히고 있던 기사는 라샤가 정말 도망칠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점차 긴장을 풀었다.

오랜만에 거니는 정원의 풍경이 눈을 다채롭게 적셨다. 잠시간 떠나있었다지만, 마음속에 스며든 익숙함을 떨쳐 버릴 수는 없는지 이곳은 다소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실, 라샤는 리페 백작저에서 지내는 생활이 조금은 불편했다. 카임이 눈치를 준다거나 하는 건 결단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저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그건 저를 대하는 카임의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그곳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여도 남의 집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곳은 잘 아는 장소로 돌아온 것처럼 안온하기만 하다. 비단 정원뿐 아니라 체데프와 함께 지내는 침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무력에 의하여 돌아오게 된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다. 껄끄러움을 느꼈던 건 고작 하루 이틀뿐이었다. 그 후부터는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걸, 라샤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과거와 현재에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저를 향하던 체데프의 마음. 그것이 꼭 원래의 모양처럼 돌아오니 라샤 역시도 이전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침실에서 느낀 그대로, 그 사실은 피할 길 없는 거북함을 떠안겼다. 단순히 거북하다기보다는, 양가적이며 복합적인 기분이었다.

“……날 잊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묵묵히 걷던 베르히네가 고개를 든 건, 라샤가 불현듯 입을 열었을 때였다.

“단편적으로 듣게 된 소식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

“나 같은 건 쉽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

“잘 지내지도 못하셨고요.”

그건 일종의 푸념과도 같았는데 베르히네는 그 위에 확신을 담은 말을 얹었다. 고개를 돌리니 공작의 충직한 기사는 한 점 거짓이 없다는 양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줄곧 라샤 님을 그리워하시며, 지난날을 부단히 후회하셨습니다.”

베르히네는 곁에서 모셔온 몇 년간, 이토록 엉망이 된 상관을 본 게 처음이었다. 공작은 피가 섞인 부모의 타계나, 황제가 큰 기대를 걸었던 전쟁의 패배로도 이만큼의 당혹감과 좌절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꼭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를 겪은 이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엿본 느낌이었다.

이번 일은 라샤가 그에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인지 직접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미처 알지 못한 이는 입을 떡 벌리게 만들고, 이미 알고 있던 이들은 새삼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순애보였다.

“각하의 파혼 소식에 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라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외람된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만…… 로베니 후작께서 먼저 각하의 앞에서 라샤 님을 거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발언에 단단히 화가 나신 각하께서 후작께 무력을 가하셨고요.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파혼에 이르게 되신 겁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라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호사가처럼 제 앞에서 잡설을 늘어놓던 카임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혼이 그가 휘두른 무력으로 말미암아 깨진 것이라던…….

로베니 후작이 저를 거론했다고? 그 말을 들은 직후 체데프가 난폭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라샤는 그 거론이 필히 모욕적인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외에 급한 일만 처리하신 후 티그리스로 향하시고, 그 주변 제국까지 방문하신 것도 모두 라샤 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티그리스로 향하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알고…….”

베르히네는 그녀의 의문에 대해 짧은 설명으로 답을 일축했다. 행로의 전말에 대해 전해 듣고 나서야 라샤는 그간 그가 보내온 시간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더하여 왜 저를 보고 ‘무사해서 다행이다’와 같은 말을 했는지도.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던 건가.’

더러워진 손수건이 발견됐을 때, 그는 크게 좌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매치기범을 붙잡아 티그리스로 향하려던 걸 알게 되어 곧장 그리로 떠난 것이고.

저를 찾자마자 격한 안도감에 잠겼던 지난날의 그가 어른거렸다. 자신을 잊고 멀쩡히 사는 줄로만 알았던 사내의 일상이 사실은 오직 저를 찾는 데에만 꽂혀 있었음을 라샤는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 사람 팔에 붕대는 뭔가요?”

어떤 걸 물어도 선뜻 정보를 내어 줄 양 굴던 베르히네의 입이 웬일인지 딱 다물렸다. 그녀는 지긋한 라샤의 눈길에 이기지 못한 것처럼 입술을 감쳐 물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건 각하께 직접 여쭤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함부로 발설해도 될 사항이 아닌지라.”

베르히네는 그의 최측근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를 오래도록, 충직하게 모셔온 기사였다. 앞서 파혼의 내막까지 말해 준 그녀가 이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봉하는 걸 보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팔에 감긴 붕대, 즉 부상과 관련이 있다 보니 덩달아 심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것만 여쭤볼게요. 그 상처 역시도 나와 관련이 있나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베르히네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연관이 있는 상처, 그리고 수하로서는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할 사안. 그 정도의 단서만으로도 어렴풋 감이 잡혔다. 제 짐작이 정녕 사실이라면……. 속이 꽉 비틀리는 느낌에 라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럼에도 검은 연기처럼 차오른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불현듯 바람의 방향이 비틀렸다.

우산으로 가려진 뒤편에서부터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라샤가 뒤를 돌아보고, 마찬가지로 베르히네가 우산을 앞쪽으로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훅 치고 들어온 팔뚝이 우산을 그대로 쳐냈다. 하얀 우산이 바닥에 고꾸라져 나뒹굴었다.

우산이 사라진 시야에 언제 깨어나 이곳으로 뛰어온지 모를 체데프가 빼곡히 들이찼다.

“체…….”

예기치 못한 등장에 놀라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라샤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의 기온은 싸늘한 편이었다. 그러나 맞닿은 그의 몸은 열탕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후덥지근했다.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왔다는 방증이었다. 어찌나 사납고 맹렬하게 뛰어대는지 요동하는 그의 심박마저 피부 끝으로 느껴질 듯하였다.

“베르히네.”

라샤는 제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그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움찔했다.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씹어먹는 듯 한 자 한 자 내뱉는 목소리가 혈관을 얼어 붙일 듯 냉담했다. 그것은 명백한 위협조였다. 베르히네가 서둘러 한발 뒤로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라샤는 그의 팔을 붙잡고 아니라고, 제가 억지를 부린 것이라고, 그러니 그녀를 야단치지 말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체데프는 잠시도 그녀를 바깥에 두고 싶지 않은 것처럼 지체 없이 라샤를 안아 올렸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얼굴은 재회의 날로 돌아온 듯했다. 여유를 찾아볼 수가 없는, 온갖 불안한 요소가 깔린 세상에 떨어진 사람의 얼굴. 고작 잠에서 깨어났을 때 라샤가 곁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이렇게나 이성을 잃고 경황없이 굴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유리 조각처럼 떠도는 불유쾌함을 극도로 부풀렸다.

조금 후에야 헐레벌떡 뒤따라온 집사가 그들 위로 우산을 받쳤다. 하지만 체데프는 이미 쫄딱 젖은 상태였고 라샤라고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체데프는 그 우산이 비를 막아 줄 틈도 없이 발을 뻗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나 싶은 걸음새였다. 지금 그에게는 라샤를 안전한 보금자리로 데려가는 것만이 중요해 보였다.

“수건을 가져와라.”

침실로 돌아온 그가 라샤를 침대에 내려놓은 뒤 지시했다. 집사는 소리 없는 걸음으로 물러났다가 나타나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가주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허리를 숙이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라샤는 젖은 제 머리칼 위에 수건을 덮어 조심조심 닦아 주는 그의 팔을 응시했다. 붕대가 물에 젖어 헐겁게 풀려 있었다.

“……이거.”

미약한 음성이었으나 온 신경이 그녀에게 쏠린 사람처럼, 체데프는 손짓을 멈추었다.

“풀어 봐요.”

체데프는 미동이 없었다. 요지부동인 그를 대신하여 몸을 일으킨 라샤가 직접 그의 환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붕대는 축축하게 젖어 헐거워져 있었기에 푸는 데에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몇 번 돌리니 금세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샤의 시선이 그의 손목에 고정됐다. 탄탄한 구릿빛 살갗 아래로 자리 잡은 푸른빛의 혈관. 그것이 가장 선명히 도드라지는 자리에 이제 막 아물어가는 듯, 그러나 아직도 빗금의 흔적이 여실한 환부가 보였다.

자상은 회복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까지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 생겼던 부상의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더는…… 이렇게 못 지내요.”

“라샤.”

“평생 이렇게 지낼 거 아니잖아요.”

“…….”

“나는 이 침실에 갇혀서 내 자의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당신은 그런 내가 언제 사라질까 시종일관 전전긍긍하는…… 이게, 이게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어떤 방식이든 다 괜찮아.”

체데프의 눈동자는 결연했다. 결연하다 못해 그것 말고는 해답 따위 없다는 듯 일견 집요하기까지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혹은 집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라샤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들여다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난 아니야.”

라샤가 그를 피하려는 것처럼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어깨를 붙잡아 돌리는 그의 손길에 제지당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뒤로 더듬더듬 물러났다. 그러다가 침실 한 편의 벽에 등이 가로막혔다. 뒤는 벽으로, 앞은 벽 같은 그로 막힌 상황에 숨이 막혔다.

“놔요, 이것 좀, 놓아달란 말이에요……!”

“왜 내게서 도망칠 생각만 해!”

그의 윽박에 라샤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는 더더욱 놀랐다.

체데프의 눈동자는 여전히 맹렬하게 번들거리면서도 물기가 축축하게 고여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위아래로 몇 번 움직였다. 그러자 동공에 윤기를 더하던 물기가 물방울의 형태로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체데프가…… 울고 있었다.

그게 그 어떤 장면보다 현실성이 없어서 라샤는 그 얼굴을 망연히 응시했다. 저 눈물은 어찌나 은연하고 내밀한지 본인조차도 흘리는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체데프의 뺨에 묻어난 짙은 흔적은 오직 라샤만 제대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완벽히 뒤바뀐 상황을 인지했다.

언제나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며 울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서럽고, 혹은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건 저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대방이 침실에 함께 있어 주길 바라며 눈물을 자아내는 건 다름 아닌 체데프 그였다. 그의 마음이 이전의 농도로 엇비슷하게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사람의 위치는 철저하게 뒤집혔다.

그게 이상하게도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치밀게 했다. 속에서 뭉텅이 진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터지는 느낌이었다. 라샤는 저 또한 우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이제 와서 그래…….”

“…….”

“내가 외롭고 힘들어할 땐 뭐하고.”

“…….”

“나를 뒷전으로 미뤄놓고 창부처럼 대할 땐 언제고. 나를 조금도, 조금도 소중히 대하지 않았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라샤의 두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퍽퍽, 원망스레 두드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눈물을 흘릴 때도 변화가 없던 그의 표정이, 라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너지기 바빴으므로. 그간 그녀가 봐 온 강건하고 단단한 심지는 완전히 부러진 듯, 그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잔바람에도 금세 스러지고 말 등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라샤는 제 얼굴 역시도 그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짐작했다. 눈물 역시도. 잘만 보이던 그가 흐려지기 시작하며 시야가 문댄 것처럼 부옇게 흐려졌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입에서 숨길 수 없는 울음소리가 샜다.

“라샤.”

그녀는 제게로 다가오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체데프는 계속해서 뻗었다. 그것 역시도 이전과 반대의 양상을 띠었다. 제가 손을 뻗어야지만 온기를 전해 주던 그가 이젠 저를 온기로 감싸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그 행동에 실타래처럼 속에 뭉켜 있던 서러움, 섭섭함, 울적함이 폭발하듯 발산했다. 라샤는 그와 함께하는 내내 느꼈던 거북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그건 여전히 남은 사랑의 증거이자 잊을 수 없는 상처로부터 오는 증오였다.

균형이 적절히 뒤섞인 애증이 따로 없었다. 그가 밉지만 상처를 입은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가 싫은데, 온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잊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저를 찾아 헤맸다는 데에 기뻤고, 애초에 왜 떠날 구석을 만들었는지 모를 그가 원망스러웠다. 양가적이며 복합적인 감정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제 맘을 마주하니 진이 쭉 빠졌다. 눈물을 흘리며 헐떡거리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라샤가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놀란 체데프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혔다.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은 그는 라샤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눈물 젖은 뺨을 입술로 문질렀다. 그의 입술이 라샤의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줘.”

“…….”

“그렇잖아. 응?”

그가 아무렇게나 놓인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우며 물었다. 확신에 가까우면서도, 목소리가 마냥 애끓다 보니 그렇게 말해 달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라샤는 입술로 제 볼을 지분거리는 그의 턱을 밀어내며 체데프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사랑해.”

함께한 지가 7년인데 어떻게 고작 몇 개월로 당신을 전부 털어낼 수 있었겠어.

“하지만, 그래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무릎 옆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등 위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고백 뒤로 따라붙는 라샤의 단호한 말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했다.

“사랑해서 두려워…….”

“…….”

“나는 두 번이나… 당신의 마음이 식는 걸 볼 자신 없어요.”

라샤가 잃은 건 그의 사랑, 고작 그거 하나뿐이었음에도 삶 전체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것이 제 삶을 얼마나 크고, 단단하고, 두텁게 지탱하고 있는지를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잃을까 봐 버티다가 상처를 받았고, 그는 잃고 난 후에야 후회를 곱씹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상대방이 제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지 알게 된 건 라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 말한 대로 7년이나 함께해 온 세월을 어떻게 당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선뜻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건,

그가 저를 애타게 찾아왔으며 끝내 자살 시도까지 했음을 알게 됐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그의 권태를 다시 한번 맞이하게 됐을 때 버틸 자신이 없는 까닭이었다. 고작 한 번으로도 저는 저 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그걸 두 번이나 겪었다가는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 게 자명했다. 재기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또다시 비할 바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불안에 잠겨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샤 역시도 매한가지였다. 서로에게 망령처럼 달라붙은 불안감은 이별의 후유증과도 같았다. 체데프가 라샤를 놓을 수 없는 것처럼, 라샤는 어긋난 그의 마음으로 산산이 부서져 버린 관계를 다시금 이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체데프는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해했다. 제 잘못을 되새길 때마다 속에서 피가 나는 심정이 아니었던가. 그건 권태에 빠진 저를 보는 라샤의 심정과 동일했을 것이다. 그토록 아프고 힘겨웠으니 겁이 날 만도 했다.

그는 라샤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했다. 응접실 쪽으로 걸음 했다가 돌아온 그는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한 채 라샤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라샤의 눈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건 붉은빛을 내는 보석이었다.

“이걸 왜…….”

“우리 관계의 신뢰를 깬 게 오롯이 내 잘못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 너에게 다시 믿음을 주는 것 또한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지.”

“…….”

“그러니 네가 받아 줬으면 해.”

체데프는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 쥐어 보석을 움직이게 했다. 그러자 반질거리는 표면 안쪽으로 무언가 찰랑거리는 게 보였다. 안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들어 있었다. 체데프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라샤와 시선을 맞춘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내 심혈이야. 심장의 피.”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라샤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앞으로 내가 또다시 네 신뢰를 깨는 일이 생긴다면, 그 보석을 부서뜨려.”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체데프는 아무런 말 없이 라샤를 응시했다. 그 결연하고 정적인 표정만으로 답이 유추가 되어서 라샤는 실제로 벌어진 일도 아닌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안에 든 보석은 감싸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으나, 라샤에게는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경직되어버린 그녀의 낯을 응시하며, 체데프는 리페 백작가로 향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체데프는 검술은 발군이라지만, 마법에는 조금도 일가견이 없었다. 그는 범인이었으므로 이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황실 마법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라샤를 바로 침실로 데려오기 위하여 마차의 공간을 실내와 잇는 작업도 그러했지만, 체데프에게는 그 무엇보다 이 작업이 가장 중요했다.

황실 마법사의 의견을 토대로 보자면 이건 명백한 저주에 가까웠다. 심장에서 뽑아낸 혈(血)에 마법을 건 채 틀 안에 넣는다는 건, 제 목숨을 옮긴다는 뜻이나 진배없으니.

처음부터 저주를 염두에 두고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체데프는 그저 목숨을 영원히 저당잡는 방법에 대해 물은 것이므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빼낸 제 목숨을 그녀의 손에 쥐여 준 것이었다.

그 의미를 라샤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녀의 물기 젖은 뺨이 하얗게 질렸다.

“이 사실을 나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

황실 마법사는 정확히 저 작업이 누구에게 행해지는 건지 알지 못한 채로 임했다. 눈이 가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순히 세실리온 공작가와 관련된 중요한 죄인에게, 겁박용으로 행해진 줄로만 알 터였다.

“그러니 내 목숨은 온전히 네 거야, 라샤.”

권태로 상처를 받은 연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목숨을 내걸었다. 극단적이어도 너무 극단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하나 라샤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태도에서 짙디짙은 그리움을 느꼈다. 이게 라샤가 알던 그였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저만 바라보며 모든 삶의 초점을 그녀에게 맞추고, 전적으로 그만을 의지하게 만들던, 체데프 말이다.

그 순간, 아직 완전히 발산되지 못하고 속에 뭉쳐 있던 감정이 고양되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촉촉한 라샤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깜박이는 찰나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것이 손안에 들린, 체데프의 작은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보석 위로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체데프는 마음이 속절없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석을 쥔 라샤의 손을 끌고 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두 번 다시 너를 놓칠 일 없어.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난 죽고 말겠어. 그러니…….”

“…….”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

“줄곧 사랑하고 있다, 라샤.”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

변색이 된 줄 알았지만 그건 권태라는 늪지에 잠겨 겉면에 진흙이 묻은 것뿐이었다. 그것을 닦아낸 그의 마음은 여전히 찬연한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말을 가슴으로 체감한 순간, 라샤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체데프가 눈물을 닦아 주다가 종래엔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라샤는 이번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 * *

두 사람은 그날 밤 빗소리를 벗 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엇갈린 마음과 그간의 사정, 로베니 영애에 관한 숨겨진 이해관계와 라샤의 출생 등. 서로 사랑과 진심, 그리고 어떻게 보면 두려움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아집일 감정하에 묻어둔 것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냈다.

“알고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다고…….”

체데프는 그녀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제 곁에 남아 주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저만을 생각해 주던 그녀의 애정을 깨달으니 후회는 참담할 지경으로 치고 올라왔다. 그 사죄를 몸짓으로 표하듯 뒤에 누운 그가 라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 행동이 간지러워서 라샤는 작게 웃었다. 체데프는 되레 그 웃음소리에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오라비라는 사람이 혹 나를 어떻게 이용하는 건 아닐지…….”

라샤가 봐 온 귀족의 세계는 냉담했다. 물론 성정이야 사람마다 가지각색일 테니 이것은 지극히 일반화겠지만, 그녀에게 귀족의 이미지는 체데프의 부모가 남긴 인상이 너무도 강렬하게 박혀 버렸다. 권력과 지위를 위하여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구렁으로 몰아넣는 무자비함과 잔혹성. 그것이 리페 백작가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몸집째 부풀리게 만들었다.

“물론 백작님은 다행히 좋은 사람이었지만요.”

“친절하게 대해 줬나?”

“응…… 입적에 대해서도 먼저 의향을 물어봐 줬구요.”

라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데프는 그것 다행이라고 속삭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제 품에 쏙 안기는 가량가량한 체구와 보들보들한 피부가 아직도 꿈결 같았다. 체데프는 그녀에게 영원히 잠기고 싶은 것처럼 몸을 딱 붙였다. 저를 밀어내지 않는 라샤의 태도는 몹시도 깊은 행복과 안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간 힘들지는 않았어?”

임신과 동반되는 고역에 대해 묻고 있음이 명확했다. 그동안 제가 곁에서 챙겨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주치의를 불러 라샤의 상태를 확인한 바였다. 그리고 산부에 대한 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다.

물론 그가 묻고 대답을 들은 건 주로 건전한 쪽은 아니었다.

“힘들지는 않았, 는……데. 체데프…….”

“응.”

“읏, 가…… 가슴 좀 그만 만져요.”

오래도록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체데프의 손은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누볐다. 개중에서도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꾸준히 주무르고 어루만졌다. 단순한 접촉이라기에는 일부러 한 번씩 손가락을 세워 유두를 살살 문질러대는 바람에 라샤는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에 젖은 옷 대신 갈아입은 얇은 네글리제가 그의 손길을 더욱 음밀하고 자극적으로 느끼게 했다.

“으응, 나 좀 예, 민해져서…….”

서서히 막달에 다가오며, 아기를 위한 모유를 뿜어낼 준비를 하듯 그녀의 유방이 민감하게 달아올랐다. 내부의 젖줄이 부풀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가끔씩 옷자락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젖꼭지가 돌올하게 솟구칠 때가 있었다. 이곳에 감금되며 체데프와 함께 지낼 때도 종종 그러하여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하지 말라는 만류에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거두기는커녕 이번엔 검지를 세워 불그스름한 유두를 네글리제 위로 까득까득 긁어댔다. 그의 손가락에 뭉그러진 알갱이가 젖가슴 전체를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흣…….”

라샤가 등을 새우처럼 굽혔다.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했으나 체데프는 악착같이 달라붙어 뭉근하게 자극을 더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반투명한 네글리제 위로 주름이 마구 졌다.

“나랑 떨어져 있을 때 혼자 한 적 있나?”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희롱했다. 라샤는 움찔하며 베개에 뺨을 비볐다. 저속한 질문에 배 속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몇 개월간은 잊고 살던 격렬한 밤이 속수무책으로 떠올라 이성을 홀라당 집어삼킬 태세를 보였다.

“흐, 그, 그만…….”

“난 있는데.”

“흐응…….”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은 되지.”

“잠, 아……!”

“깊게 찔러 줄 때마다 너 앙앙거리던 거 떠올리면서…… 하아, 내 거 아랫구멍으로 삼켜 줄 때의 감각만 떠올리면서 고환이 텅 빌 정도로 싸댔다고. 라샤.”

며칠간 라샤와 지낸 밤은 그에게 기쁘고 힘겨운 두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몰고 왔다. 함께 하여 행복하나 그녀의 체취로 인해 반사적으로 벌떡 선 아랫도리를 말리느라 부단히 애를 써야 했기에.

가끔 정염을 이기지 못해 잠든 그녀를 응시하며, 치기 없는 시절의 소년처럼 꿈틀대는 좆을 붙잡고 맹렬하게 흔들었던 밤 또한 있었다.

라샤가 없을 때는 그래도 제법 이어지던 사정이 그녀를 코앞에 둔 채로 임하니 조루처럼 맥없이 뿌연 액을 싸질러댔다. 쿡 찌르면 파일 듯한 말랑한 볼살이나 풍성하게 감긴 속눈썹, 가끔씩 오물대는 입술은 그를 속수무책으로 사정에 이르게 만들었다. 혹 잠든 그녀가 깰까 봐 지분거리지도 못한 채 그는 며칠간의 욕정을 그런 식으로 풀었다. 그래도 부족하고 또 부족한 밤이었다.

지금 역시도.

라샤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순간부터 아랫배가 뻐근하게 저리더니 좆대가리가 또 채신머리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무례하고 경거망동할 따름인 성기였다.

그의 팔을 움켜쥔 라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주저주저했다.

“……나도.”

“응?”

“나도 했……어요.”

껍질 깐 과육처럼 탐스럽게 익어 발기한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비던 체데프가 멈칫했다. 라샤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새빨개졌을 게 뻔한 얼굴을 베개에 숨기려고 했으나 그의 손길이 더 빨랐다. 고집스레 정면만 응시하는 라샤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너도 혼자 했다고?”

라샤는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처럼 암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옥처럼 달아오른 얼굴은 야릇한 행위에 대한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체데프는 숨길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체감하며 그녀의 입술을 쪽 빨았다가 놓았다.

“어떻게 했는지 말해 봐…… 밑에 손가락 넣고 휘젓는 식으로?”

“아, 아니.”

“그럼. 음핵만 문질렀나? 아님 주변만?”

질문이 다소 파렴치했다. 라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다시 훽 돌렸다. 체데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색을 따라 목덜미까지 불그스름해진 게 딴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귀여운 걸 내가 무슨 정신으로 놓칠 뻔했던 걸까. 과거의 스스로를 향한 비아냥거림과 원망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내가 박아 줄 때 생각하면서 했단 거지……? 응?”

그가 그녀의 머리통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뇌까렸다. 라샤는 계속되는 그의 집요한 질문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은 정말이지, 라샤조차 왜 그랬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문득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홀로 누운 침대 위가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고 이럴 때마다 저를 만져 주던 그의 손길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가 밤중 저를 만지던 행위를 상기하니 몸이 자연스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베개만 붙잡은 채 꼼지락대던 라샤의 손가락은 이내 살금살금 내려가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꾹꾹. 달래듯 문질렀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이따금 목이 말라 절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는데 갈수록 감질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라샤는 정자세로 누워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린 후 가랑이 사이를 뭉근히 비비적대고 있었다. 주변만 맴돌다가 체데프가 늘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음핵을 스치는 순간 찌릿찌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아래가 왈칵 젖어 드는 게 몹시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가 제 안을 쑤셔 줄 때의 쾌락을 복기하니 벌름대는 구멍에 무어라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가락을 떠올렸지만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클리토리스가 퉁퉁 부을 만큼 비비고 또 비벼대 옅은 절정에 다다랐다. 그날 밤 물줄기는 창밖뿐 아니라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도 쏟아져 나왔었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밤중의 비밀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체데프의 앞에서는 절로 흘러나왔다. 아마도 저를 애타게 그리던 그의 노골적인 고백이 그녀의 본능을 날 것으로 자극한 이유일 터다.

“물 많이 나왔겠네.”

체데프는 상스럽게 뇌까리며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것은 입술을 축이기 위한 행동이 분명할진대 한편으로는 목이 마른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그날 밤 내밀한 자극에 의해 쏟아진 그녀의 음액이 아까웠다. 저와 함께 있었다면 그것들이 흥건하게 흐르기도 전에 싹싹 핥아 줬을 텐데.

그것을 몸짓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여태 젖꼭지를 유린하던 그의 손이 차츰 밑으로 향했다. 봉분처럼 부푼 배를 지나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쓰다듬었다. 라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성적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방증이었다.

체데프는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허리춤에 걸린 속옷을 끌어 내리고 허벅지를 벌리자 아까부터 젖가슴을 희롱당하여 그런지 아랫구멍이 촉촉하게 여물어 살그미 벌어져 있었다. 체데프는 본능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군침이 도는 모양새가 따로 없었다.

그는 곧 염원을 달성했다. 손가락으로 날개를 젖힌 뒤 물기가 촘촘하게 배어난 살점을 끈적하게 핥아 올린 것이다.

“흣……!”

라샤의 발등이 곧장 둥그렇게 곱았다. 체데프는 긴장 풀라 종용하듯 그녀의 종아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슬쩍 눈에 들어온, 곱아든 발가락마저도 사람 미치게 귀여웠다. 이따 저기도 빨아 줘야지. 도대체가, 안 예쁜 구석이 어딜까.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그는 갈라진 음순 사이로 혀를 휘휘 저었다.

“응, 아아…….”

물컹물컹한 살덩이가 예민한 입구를 잘착거리며 핥아오는 건 너무도 자극적인 일이었다. 특히 라샤는 그가 혀로 아래를 애무하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7년동안 익힌 커닐링구스 솜씨를 드러내듯 그가 워낙 혀를 유연하게 잘 돌리는 탓이었다. 특히 오직 라샤만을 위해 행하는 애무다 보니 어느 정도의 강약으로 어디를 살살 긁어 줘야 그녀가 자지러지는지 그는 몹시 잘 알고 있었다.

“아, 하아…… 앙……!”

벌어진 음순을 따라 푹 젖은 클리토리스에 꺼끌한 미뢰가 닿았다. 그가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불거진 돌기만 빙글빙글 문질렀다. 제가 어설프게 만지던 밤중의 손놀림과는 차원이 다르게 능숙했다. 벌어진 라샤의 잇새로 쾌락 어린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보랏빛 눈동자는 혼몽하게 풀려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의 이가 클리토리스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것은 내내 뭉근하기만 하던 자극을 짜릿하게 뒤바꾸었고 라샤의 아랫배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질구에서 물이 또 한 움큼 왈칵 쏟아졌다. 체데프는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오므려 쭙, 하고 애액을 들이켰다.

머리를 돌게 만드는 맛이었다. 그간 체데프의 속내에 숨겨온 저속한 욕망이 폭발적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그는 땅굴을 파는 수캐처럼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졸졸 새는 물을 정신없이 탐하였다. 어느새 내려간 한쪽 손이 바지춤을 젖혀 페니스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이미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돋아난 살기둥을 붙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내가 이게, 하, 미치도록 그리웠다고…….”

“응, 아아……!”

“달아, 라샤.”

“흡…….”

“전부 빨아먹을 테니까 맘껏 싸. 옳지.”

조갈증을 앓는 이처럼 게걸스레 혀를 돌리면서도 그녀를 음란하게 종용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샅에 닿는 눅진한 숨결에 더더욱 열이 올랐다.

“아, 아아……!”

라샤는 진이 빠지도록 그에게 아래를 빨리고 또 빨렸다. 그러다가 눈앞을 부옇게 물들이는 절정도 몇 번 경험하였다. 그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설 정도의 전율이 전신을 후려치듯 내달렸다. 오르가슴을 느낄 때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듯하였다.

구멍이 벌름대며 애액을 후두둑 쏟아내도 아래 깔린 시트가 더러워질 일은 없었다. 모조리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가랑이 사이에 파묻힌 사내의 남성적인 후골이 몇 번이고 꿀렁댔다. 축축한 혀는 덧대어 가려진 음순 아래까지 모조리 쓸고 난 후에야 서서히 물러났다.

비부가 번드르르하게 젖어든 연유는 한껏 쏟아낸 흥분액이 아니라 그의 타액 때문인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하…….”

라샤는 오래간만의 행위에 정신이 나갈 듯했다. 체데프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곧 거칠게 오르락내리락거리던 가슴이 정박자를 되찾으며, 예상치 못한 아쉬움이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의사 말로는 안정기를 지나면 해도 괜찮다고 하던데.”

그리고 체데프는 그런 그녀의 욕망을 모르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 교접을 미치도록 원하는 건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체데프는 먹을 걸 달라 조르듯 뻐끔대는 라샤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주며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할까.”

뻔히 답을 알면서도 종용하는 게 미웠다. 부러 묻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체데프는 유독 정사에 적극적으로 구는 그녀를 좋아했으니까. 이 음탕하고 상스러운 짓에 환장하는 게 저뿐이 아님을 증명받고 싶은 것처럼, 언제나 저만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를 바랐다.

아직은 미운 마음에 뜻대로 따라 주고 싶지 않았으나 그가 달구어놓은 열기가 여전히 속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7년간 보내온 밤으로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의 본능 역시 천박한 욕망의 수렁에서 뒹굴기를 원하고 있었다.

“……해요.”

“…….”

“넣어 줘…….”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채근에도 욕정은 사그라들 일 없이 치솟기만 한다. 체데프는 아까부터 성성하게 발기하여 배꼽 부근에서 꺼떡꺼떡하는 살덩이를 쓱 쓸어내렸다. 하도 흥분하여 쿠퍼액을 오줌발처럼 지렸더니 벌써 기둥 전체가 미끈미끈했다.

그는 음부를 훤히 내놓는 그녀의 다리를 모은 뒤 옆으로 눕혔다. 그리고 아까처럼 라샤의 뒤로 가 누웠다. 주치의에게 이미 성교 시 취할 수 있는 체위에 대하여 답을 들은 바였다. 그는 크림처럼 보얗고 말랑한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귀두로 회음을 쓱 긁어 주었다.

“흐응…….”

그것만으로도 달뜬 신음이 절로 샜다. 라샤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다가 젖은 질구를 벌리며 파고드는 귀두의 촉감에 베개를 꾹 움켜쥐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체데프는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귓불을 핥아 주었다. 귓바퀴와 연골을 샅샅이 핥는 바람에 야릇한 전율이 그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찰나 긴장이 빠진 순간 미끈둥한 좆이 입구를 그악스레 벌리며 쑥 파고들어 왔다.

“아아읏……!”

이미 한차례의 애무로 촉촉하게 젖어 있어 삽입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만의 결합이다 보니 조금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보통 귀두가 크고 기둥부터는 가늘어지는 감이 있는 사내들의 물건과 달리 체데프는 선단부터 고환까지 굵기가 비슷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강직도 또한.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발기했을 때는 마치 몽둥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 것이 속살을 벌리며 파고드니 압박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흐, 으…….”

“하…… 라샤. 아파?”

선단부터 야금야금 물어대고 뜯어먹는 속살의 감각이 기가 막혔다. 한 줌 남은 이성마저 훨훨 태워 버릴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체데프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와의 정사에서 늘 참았던 연습이 좋은 결과를 발휘했다.

“흣, 괜, 찮아요. 들어와도…….”

빠듯함은 잠시뿐, 라샤 역시도 내내 간지럽던 안을 긁듯이 자극하는 성기의 부피감에 달큼한 종용을 했다. 체데프는 둔부를 잡아 벌려 조금 더 삽입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엉덩이와 장골이 맞닿을 만큼 깊숙이 닿았다. 측위로 하여 그런지 평소와는 다른 각도와 방향으로 찔러 들어온 페니스가 라샤의 내벽을 가득 채웠다.

“아프거나 힘들면 바로 말해…… 알겠지.”

“으응…… 아!”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체데프가 허리를 반쯤 물렸다 살짝 짓쳐 올렸다. 이전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수준의 방아질임에도 몸이 무거워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이를 품은 자궁이 울리는 건지 전신이 나약하게 떨렸다. 체데프는 유방을 한 손에 쥔 채 젖꼭지를 꼬집어 비비며 날 선 쾌락을 부추겼다.

분명 조절을 하고 있다 여겼건만 정신을 차리니 체데프는 스스로 처덕처덕 허리를 치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달간 독수공방하며 굶주린 제 것을 꽉꽉 깨물고 조이는 이 안을 어떻게 쑤셔 주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안에 흥분을 부추기는 미약이라도 발라진 게 아닌가 의심이 가는 수준이었다.

“아, 응, 하아……!”

“여기 찔러 주니까 좋지? 손가락도 잘 안 닿을 만큼 깊은 데잖아.”

동그란 귀두가 제대로 감을 잡은 것처럼 그녀가 까무러치는 자극점을 꾹꾹 눌러댔다. 라샤는 손끝 발끝이 다 저릿해지는 쾌락에 내벽을 빠끔히 조였다. 그 연쇄작용처럼, 체데프의 입에서 단 숨이 샜다.

“내가, 이렇게, 마구 쑤셔 주길 바랐잖아.”

“하으, 응! 흣……!”

“아니야? 물소리 장난 아닌데.”

귀를 스치는 희롱에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항변할 수 없는 건 계속해서 뒤에서 치받아오는 힘으로 인하여 신음이 끝없이 나오기도 했거니와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샤는 눈앞이 이따금 점멸하는 쾌감에 침도 잘 삼키지 못하였다. 어느덧 그의 고관절과 엉덩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정말 물 튀기는 특유의 소리로 변했다는 건 그녀 역시 감지하고 있었다.

“읏! 아……! 잠……!”

순간 그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하여 질 어귀까지 빠졌다가 자궁구를 벌릴 만큼 맹렬하게 꽂혀 들었다. 맞닿은 살갗에서 퍽, 하는 마찰음이 났다. 그 자극이 너무 강하여 라샤는 숨넘어갈 듯 굴었다. 그가 안을 자늑자늑하게 휘저어 주는 자극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금세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살살, 흑, 살살 해요…….”

“그래, 살살…….”

체데프는 제게 주문을 걸듯 연거푸 ‘살살’이라 읊조리며 성난 것처럼 날뛰고 싶은 욕정을 억눌렀다. 그녀의 배 속에 제 씨가 있음을 몇 번이고 곱씹어 삼켰다. 불현듯 이게 지금 고문이 아니면 뭘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꾸 제멋대로 정신없이 내벽을 쳐대려는 허릿짓을 말리느라 혼이 쏙 달아나는 심정인데.

“후우…… 라샤.”

“응……! 아, 흐으…….”

체데프의 눈동자가 제 품 안에서 바르르 떨리는 가녀린 어깨에 닿았다. 저것만으로도 몸이 동한다. 측위로는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또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올라서 쌕쌕대고 있으려나. 희한하게 섹스를 하고 있는데도 욕정이 드는 기분이다.

그는 문득 든 의문을 해소하고야 마는 사내였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인 그가 라샤를 일으킨 후 제 허리 위로 올라타게 만들었다. 그녀의 체액으로 물씬 젖어 번드르르한 좆을 붙잡아 다시 구멍에 가져다 대고 차근히 밀어 넣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라샤는 그의 복근을 짚은 채 조금씩 조금씩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자 수직으로 꽂혀 들어오는 굵직한 존재감에 고개는 절로 뒤로 젖혀졌다.

“아하응…….”

“내가 하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 직접 움직여 봐.”

그리 말하니 울멍울멍한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어린다. 체데프는 몇 번째인지 모를 갈증을 느끼며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시야에 온갖 자극적인 것이 뭉쳐져 있는 기분이었다. 라샤의 어여쁜 얼굴은 당연했고 만져 달라 채근하듯 뾰족하게 선 양쪽 젖꼭지, 저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붉은 제 것과 뒤엉킨 칠흑빛의 음모마저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를 꼴리게 하는 건 제 애를 가져 동그랗게 부푼 배였다. 배 속에 뜨거운 불길을 꽂는 눈요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흐응, 응…….”

직접 해 보라는 말에 당황한 듯 한참을 주춤거리던 라샤는 이내 그의 몸을 지지대 삼아 붙잡고 소심하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깔짝대는 움직임에도 내벽은 착실히 조여들고, 얼굴에는 홍조가 더해지니 체데프에게는 황홀경일 따름이었다.

라샤는 수직으로 꽂혀 들어와 마치 목 끝까지 닿은 듯한 거근의 압박에 잔숨을 연신 내뱉었다. 힘든데 그만큼 좋았다. 너무나 오랜만인 희열에 세포 하나하나 전율에 잠겨 바르르 떠는 것만 같았다. 그 쾌감을 좇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엉덩이를 돌리고 있었다. 몸이 의지를 벗어나 쾌락에 통제당한 듯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응, 깊, 어, 아앙…….”

그리고 체데프는 그 모습을 한 치의 깜박임 없는 눈으로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라샤는 그 시선을 인지할 때마다 오싹오싹했다. 시선에서 그가 뿜어낼 정액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 눈이 그립고도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순간부터 섹스를 하면 색욕밖에 느껴지지 않던 눈동자가 숨길 겨를 없는 애정으로 빠듯이 차올라 있었다.

“예뻐, 라샤…….”

그녀의 추측에 힘을 보태듯, 그는 수렁 저 바닥까지 가라앉는 음성으로 소곤댔다. 이상하게도 그게 안을 무자비하게 후벼대는 거근보다 더 격렬한 쾌락을 몰고 왔다.

“하으으응……!”

라샤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절정에 다다랐다. 온몸에 힘이 정도 이상으로 들어가 파들파들 떨리고, 눈은 크게 홉뜨인 채 깜박거리지도 못했다. 가랑이 사이가 뭉근한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저릿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실례를 한 것처럼 무릎이 절로 모아졌다. 그럴 만도 했다. 요란한 오르가슴으로 음액이 줄줄 새어 나와 그의 살갗을 축축하게 적셨으니까.

체데프는 잔경련으로 제 것을 쥐어짜는 내벽에 맞춰 날뛰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무심결에 동조하듯 슬쩍슬쩍 허리를 쳐올리는 행동은 찰나의 충동에 가까워 그조차도 참아낼 수 없었다.

“응, 이, 입술…….”

위에 올라탄 채로 간신히 절정의 여운을 추스른 그녀가 별안간 웅얼거렸다.

“하아, 뭐?”

“입 맞추고, 싶, 흐읏, 아……!”

사실 그간 체데프가 키스를 하자고 대뜸 입술을 들이댈 때마다 자연히 응할 뻔도 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함께 지낼 때는 입술을 겹치던 게 하루만 해도 셀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버릇처럼 몸에 밸 만도 했다.

그리고 지금, 라샤는 아래가 짜 맞춰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체데프는 당장 그녀의 뺨을 붙잡고 귀여운 말을 종알댄 입술을 빨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러나 자세 때문에 무리가 있었다. 라샤를 내리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제 위에 앉아 어설픈 감탕질에 임하는 게 어여뻐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금방 대안을 찾아냈다. 검지를 제 입 속에 집어넣어 몇 번 할짝댄 후 라샤의 입 가까이로 내밀었다.

“아.”

입술을 벌리라는 종용이었다. 이전이라면 기겁하여 됐다고 했을 라샤는 정사의 흥에 취해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타액이 묻어나는 검지를 조심조심 물었다. 그러더니 쪽 빨고 혀로 핥으며 눈을 감는다. 진짜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주시하던 체데프는 얼마 안 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무리야.”

그가 라샤의 몸을 들어 올려 무릎으로 서 있게 한 후 내내 참고 있던 피스톤질의 속도를 높였다. 이제껏 제 스스로 삼켜 흔들던 것이 속수무책으로 꽂혔다가 빠지는 감각에 라샤는 몸을 덜덜 떨며 울었다. 앞으로든 뒤로든 넘어갈 것처럼 휘청거렸으나 체데프의 두 손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어서 간신히 버텼다.

“핫, 하, 아……! 앙, 응……!”

“흣…… 라샤, 제기랄, 하아……!”

숨이 금세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의 성기가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파고 들어와 자극점을 치고 나갈 때마다 아래에서 물이 울컥울컥 터졌다. 이미 여러 번 절정에 다다른 라샤는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그의 팔뚝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흐으으응……!”

“큿……!”

마침내 체데프가 그녀의 몸을 내리꽂음과 동시에 성기가 배 속 깊은 곳까지 묵직하게 꽂혀 들었다. 그 순간 그녀와 그 둘 다 절정에 이르렀다.

아까부터 살덩이에 쑤셔져 홧홧하게 달아오른 내벽으로 걸쭉한 액이 축추근하게 퍼졌다. 라샤는 다시금 무릎을 그러모으며 몸서리치듯 파르르 떨었다.

체데프가 얼른 그녀를 눕히고 반쯤 박혀 있던 페니스를 빼냈다. 그리고 배가 눌리지 않게끔 상체를 기울여 라샤의 붉은 입술을 쪽쪽대며 원 없이 빨았다. 라샤는 입술이 퉁퉁 부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 흘렀군.”

아깝게.

체데프는 구멍 바깥으로 샌 정액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것을 딱딱한 귀두로 훑어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김에 내벽을 슬쩍슬쩍 문지르다가 힘들다는 라샤의 투정에 마지못해 성기를 빼냈다. 분명 사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꼿꼿하게 선 성기를 보고 라샤는 질색을 표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며 연신 입술을 들이대는 걸 간신히 말렸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가분히 몸을 일으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의 장대한 기골. 그 뒷모습이 라샤의 시야에 빼곡히 들이차는 순간,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별하기 전, 그가 저를 혼자 두고 훌쩍 떠나가 버린 여타의 밤이 떠올라서였다. 그때의 비참한 감각이 여진처럼 남아 가슴을 뒤흔든다. 그의 온기로 산뜻하게 차올랐던 기분이 다시금 한계를 모르고 고꾸라지려는 찰나였다.

밤의 기운으로 물든 휘장이 걷어지고, 사라졌던 체데프가 나타났다. 그는 라샤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땀을 흘려서 찝찝할 테지만, 지금은 씻는 것도 고역일 것 같아서.”

그러고는 손에 들고 온 물 적신 수건으로 라샤의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체데프가 분주하게 손을 놀릴 때마다 조각 같은 근육들이 섬세하게 움찔거렸다. 고작 누군가의 몸을 닦아 주는 데에 저렇게까지 집중을 해야 하는 걸까, 싶을 만큼 표정 또한 사뭇 신중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라샤가 잘 알던 모습과 진배없기에 그녀는 무심코 울컥했다.

쉼 없이 손을 움직이던 체데프는 훌쩍, 하는 소리에 멈칫했다. 고개를 드니 라샤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체데프는 이불 사이에 파묻힌 동그란 뒤통수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아니,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이제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침실에 홀로 남아 열기가 싸늘하게 식은 후의 느낌을 직접 체감해 보지 않았던가.

머뭇거리기라도 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조금은 결연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결혼하자, 라샤.”

시트를 말아쥔 라샤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묻어둔 얼굴을 반만 돌렸다. 마치 훔쳐보기라도 하듯 한쪽 눈만 들어 그를 응시했다. 눈시울이 불그스름해서는, 보랏빛 동공에 물기가 흥건했다. 그 사이로 조금은 모난 듯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내가…… 귀족가의 딸인 걸 아니까?”

“…….”

“아니면… 당신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그건 그들의 관계를 어긋나게 만든 발단에 대한 퉁명스러움이었다. 그를 다시 한번 믿어 보기로 마음먹었다지만 맘속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증오가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증거처럼.

“아니.”

체데프의 손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

“그리고 이제 네가 나와의 결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라샤의 눈꺼풀이 한 번 감겼다 뜨이는 순간 내내 맺혀만 있던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뺨을 타고 흐르기도 전에 체데프의 손길에 의하여 거두어져 갔다. 이상하게도 그 손길 한 번에, 뜨겁게 달아오른 눈물샘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라샤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제 뺨에 닿은 그의 손을 붙잡아 검지 끝을 입술에 비볐다. 키스를 의미하는 몸짓이었다.

이전 청혼에도, 그리고 이번 청혼에도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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