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By familiarity
“세실리온 공작의 파혼 건 말인데.”
볕 좋은 정오, 오찬이 한창일 때였다.
나이프와 포크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썰던 라샤의 손길이 멈칫했다. 원래 육식보단 채식과 과일 위주의 식사를 선호하는 라샤지만, 임신을 하게 된 이후로는 자꾸만 고기가 당겼다. 그건 분명 제가 아니라 아기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일 터였다.
라샤는 그 상태로 고개만 들어 상석을 향해 빤한 눈길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모른 체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지, 카임은 태연하게 손을 움직이며 덧붙였다.
“듣자 하니 세실리온 공작이 로베니 후작에게 일방적인 무력을 행사해서 벌어진 일이라더군. 뭐랬더라, 찻잔으로 머리를 내려쳤다나, 주먹질을 했다나…… 어쨌든.”
“…….”
“이런 연유로 요즈음 아주 난리도 아니야.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 화제로 입방아를 찧느라 난리라니까.”
적어도 라샤의 눈엔 제 이부 오라비가 그러한 호사가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제 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좀 편해진 것인지 반응 하나 해 주지 않는데 혼자서 곧잘 말을 이어갔다.
카임이 체데프의 소식을 꺼낸 건 최근 들어서의 일이 아니었다. 잘 지내다가도 그녀의 반응을 살피려는 것처럼 한 번씩 툭툭 끄집어 내놓고는 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라샤는 그가 티그리스로 떠났다는 것도, 그리고 무사히 돌아온 지금 공작의 업무에 임하고 있음도 알았다.
처음 티그리스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나려고 했던 이국이지 않던가. 혹 그가 저를 찾으러 그 먼 곳까지 걸음 한 건가 하는 의심이 잠깐 들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제국 중 티그리스를 콕 집어 향한 걸 보면, 조금은 타당성이 있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국무를 위해 그곳으로 떠난 것이며, 티그리스뿐 아니라 그 인접국까지 들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 제가 또 크나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하긴.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그가 저를 찾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이니만큼 저 같은 건 금방 잊었으리라.
라샤는 잘게 썬 고기를 씁쓸함과 함께 씹다가, 꿀꺽 삼키고야 그에게 답했다.
“제게 왜 자꾸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흐음, 하고 숨을 들이켜며 저를 주시하는 태도는 결코 ‘그냥’이라는 답과 일맥상통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떠보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라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는 체데프가 정말 이곳으로 난입할까 두려운 느낌이었다면 이제 반쯤은 장난 같았다. 정말 제가 편해지기는 했나 보다.
손에 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녀는, 어느덧 동그란 곡선의 형태를 띠는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야, 네 외숙부님이 엄마를 놀리고 싶은가 봐.”
“내가 언제 놀렸다고……. 그보다 애한테 괜히 험담하지 말지? 좋은 얘기만 해 줘도 모자랄 마당에.”
“백작님께서 그분의 화제를 꺼내지 않으시면 자연히 그럴 텐데요.”
라샤의 직선적인 대답에 할 말이 없었는지 카임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져 나가고서야 라샤 또한 한숨을 돌렸다. 며칠 전의 식사에서는 그의 파혼 소식을 전해 준 카임이 오늘은 그 파혼에 딸린 이런저런 추문을 끄집어 내놓았다.
파혼…….
무슨 영문인지 체데프와 로베니 영애와의 혼담이 깨졌다. 그리고 확실한 진위 여부는 모르나 그 귀책 사유가 공작인 체데프 쪽에 있다는 군말도 도는 모양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머리는 금세 혼잡해진다. 라샤는 이럴 걸 짐작하고 일찍이 이곳에서 떠나려고 한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체데프의 소식이 들려오는 이런 상황. 물론 그 소식이 설마 성사된 결혼이 아닌 파혼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참, 후원에 드디어 꽃이 폈다며.”
카임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돌연 주제를 바꾸었다. 라샤는 이번만큼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입적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저택을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카임에게 민폐가 될 듯하여 최대한 침실에만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금은 답답해졌다.
그러던 중, 라샤는 화려한 정원에 비하여 황량한 기운이 감도는 후원을 발견했다.
리페 백작저의 정원은 꽤나 운치 있고 아름다운 편이었다. 그러한 정원의 뒷면이나 다름없는 후원이 그렇게 버려진 게 안타까워서 한 번 꾸며보자 마음을 먹었다. 대로나 다름없는 정원과 달리 후원은 인적이 드물었기에 용케 든 생각이었다. 물론 카임에게 허락을 구하고 행한 일이었다. 그는 임신을 이유로 모쪼록 안정을 취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너무 가만히 있는 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의사의 말에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게 두 달간 열심히 쏟아부은 노력에 결실을 맺었다. 꽃이 하나둘씩 피기 시작한 것이었다.
라샤는 자신이 좋아하는 리시안셔스를 시작으로 형형색색의 꽃으로 가득 찬 후원을 떠올렸다. 푸석푸석하게 메말라 있던 잔디가 소담한 숲의 전경으로 조금씩 탈바꿈했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싹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마법의 재료 덕분에 후원은 금세 풍성해졌다.
그녀의 침실에는 그곳에서 재배한 꽃이 담긴 화병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카임의 집무실에도 하나 놓아준 참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라샤는 오늘도 역시 후원으로 향하였다.
자연의 내음과 다채로운 꽃으로 가득 찬 후원은 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푸릇푸릇한 잔디를 밟으며 라샤는 이제 습관처럼 배에 손을 올렸다. 본격적으로 배가 나오기 시작하며 카임이 임부를 위한 머터너티 드레스를 마련해 주었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부른 배도 큰 편이 아니라서 어두운 빛깔로 골라 입으면 알지 못할 정도였다. 바로 오늘 그녀가 입은 짙은 감청빛의 드레스처럼 말이다.
안정기에 들기 전, 무척이나 불안정한 감정선을 보였던 것치고 아기는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자라 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입덧을 포함한 여타의 증상을 일으키지도 않아서 라샤는 상당히 평탄한 임신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생명은 아주 온순하게 자리한 채로 그녀를 조금도 괴롭고 힘들게 구는 일이 없었다.
‘아빠랑은 다르게 말이지.’
라샤는 그것을 칭찬해 주듯 혹은 애정을 더해 주듯 배를 쓰다듬으며 카임이 오찬 때 꺼낸 ‘파혼’을 곱씹었다.
……저를 외면하면서까지 치르려던 결혼 아니었나.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로베니 후작에게 해를 가했다는 석연치 않은 소문은 또 무엇이고.
라샤는 막 이곳으로 왔을 무렵만 하더라도 간간이 불안감을 표출하던 카임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걸 보며 상황이 제 짐작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유추했다. 체데프가 드디어 저의 공백을 인정하고 추적을 포기했노라고.
권태에 젖어 식어 버린 그의 마음은 딱 거기서 그친 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일궈낸 사랑 역시도, 그 자리에 무덤처럼 가라앉아버렸다.
그러한 확신이 마음에 뿌리를 박은 날, 라샤는 오래도록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겼음에도 심장에 커다란 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건 저를 잊은 그와 달리, 제 사랑은 아직도 건재함을 나타내는 증표와 같아서 스스로를 향한 자조가 넘쳐흘렀었다.
금방 그쳐 주길 바란 싱숭생숭함은 꽤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표출하는 순간, 그것을 너무도 뼈저리게 체감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저와 그의 이별을. 아기에게 좋지 않으니 생각하지 말자고 했지만 사실 라샤는 이보다 더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회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역시도.
체데프에 대한 생각을 부러 저 한편으로 몰아낸 뒤 상체를 기울였다. 리시안셔스의 은은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로 닿았다. 선선하게 부는 약풍에 길게 내리뜨린 라샤의 흑발이 흩날렸다.
그때였다.
쾅―!
별안간 저택 저 너머에서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평화로운 리페 백작가 전체를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라샤의 등줄기가 꼿꼿하게 펴졌다. 후원의 전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보니 소음은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정원 쪽에서 일어난 듯했다. 잠시 후, 백작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잠잠한 걸 보니 별일 아닌 모양이었다.
라샤는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리고 사박사박, 다시 잔디밭을 거닐던 찰나였다.
쿵!
다시 움찔하며 멈춰 섰다. 소음은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일었다.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굉음에 솜털이 쭈뼛 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만약 이 백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제가 발견되는 게 카임에게 썩 유쾌한 일이 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입적도 되지 않은 상태이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수 있다.
그 생각에 그녀는 그쯤에서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틀었다.
일렬로 놓인 백색의 조각상을 지나 본관으로 통하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짙은 그늘이 져서 그런지 햇빛 아래에서는 살랑거리게 느껴지던 바람이 돌연 시리게 다가왔다. 그것이 라샤의 흑발을 흐트러뜨렸다.
시야를 가로막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제게로 닿는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도무지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인, 혹은 맹목적인, 한 번만 이곳을 봐달라고 애걸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바닥을 향해 있던 라샤의 눈길이 자연히 정면을 향해 들렸다.
“…….”
길목의 끝자락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햇살 줄기에 역광이 드리워 무심코 미간을 찌푸린 라샤는 얼마 안 가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체데프……?’
순간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도 아니면 헛것을 보거나. 그만큼 제 앞에 나타난 인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부는 바람에 너울 치는 라샤의 것처럼, 체데프의 적발 역시나 잔잔히 물결치고 있었다. 싸아아. 갈바람이 길의 끝과 끝자락에 선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억겁 같은 일각이 흘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 돌아온 후원 쪽으로 부리나케 달아났다.
후원은 그리 넓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문도 부재했다. 그럼에도 라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당장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임신한 상태라 몸이 무거워 전력으로 도망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추격전이 아닌 술래잡기라고 봐야 했다. 그 방증처럼,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덮쳐오더니 라샤를 확 끌어안았다. 그 기척은 거대한 짐승이 달려드는 것과 비슷하여 라샤는 순간 휘청거렸다. 물론, 제 몸을 단단히 틀어 안은 악력 덕분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시각으로 인지했음에도, 후각으로마저 스미는 그의 존재에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
“놔, 놔요. 이거 놔……!”
라샤가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팔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제게 등을 보이는 라샤를 너무도 손쉽게 제 쪽으로 돌렸다. 한쪽 팔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자연히 라샤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쪽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라샤에게 닿는 모든 손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허상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이것 좀…….”
그를 뿌리치려던 라샤는 코앞으로 다가온 얼굴에 일순 놀라 말문이 턱 막혔다.
제가 알던 얼굴인데, 제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실핏줄이 터져 엉망인 눈자위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꺼칠한 얼굴빛, 잔뜩 부르튼 입술에 체중이 감소했는지 강건한 턱 선은 날붙이처럼 날카로웠다. 대강 훑어만 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췌해졌음을 알 수 있는 안색이었다.
그녀가 넋을 잃은 사이, 체데프 역시도 믿을 수 없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부단히 시선이 흔들렸다. 이게 정녕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 하는 이처럼 그는 라샤의 뺨과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라샤.”
간혹 확인을 요하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머금기도 하였다. 그 태도가 퍽 애절하여 라샤는 당혹스레 눈을 깜박거렸다. 뺨에 스치는 꺼칠꺼칠한 붕대의 감촉이 얼떨떨한 정신을 가까스로 깨웠다.
이별을 결심했을 때, 한 번이라도 재회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이 경우는 그녀가 상상한 어느 장면 중에도 속하지 않았다. 만약 달라진다면 연인이 되기 전의 그처럼 약간은 무뚝뚝하고 약간은 오만한 상태일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이렇게 나약하게 흐트러진 채로일 줄은.
체데프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 그녀를 강한 힘으로 껴안았다. 이제야 맞닿은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를 되찾았다는 환희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 반대로 정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는 집채만 한 두려움 또한 물씬 느껴졌다.
라샤는 저를 껴안은 그의 어깨 너머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카임과 이곳 사용인들, 더하여 체데프의 기사들까지 하나둘씩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선 베르히네와 그 외에 눈에 익은 기사들을 보니, 제 눈앞에 있는 게 정녕 체데프임이 실감 났다.
그리하여 다시 그를 밀어내려는데, 체데프가 먼저 몸을 떼었다. 그의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질거렸다.
“…….”
희한했다.
헤어지기 전만 하더라도 식은 물처럼 무미건조함밖에 읽히지 않던 동공에는 어느새 다시 격정이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파도치는 듯한 감정으로 다채롭게 물든 금안. 라샤가 좋아하던 눈, 라샤가 사랑하던 이채였다. 그것이 오붓한 연인이었을 적으로 회귀한 듯 생기 있게 반짝였다.
체데프 또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표정만 가만히일 뿐, 그의 손은 제가 끌어안은 라샤의 허리춤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배가.”
넉넉하고 어두운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만지거나 자세히 보지 않고는 모를, 부푼 배를.
체데프는 이것마저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차오른 배를 더듬더듬 위아래로 짚었다. 부산스러운 손길에 반하여 그의 낯빛은 저 먼 밑바닥을 향해 서서히 침잠했다. 확인의 행위는 제법 오래도록 이어졌다. 라샤는 그의 손이 배꼽 부근을 스칠 때마다 움찔거렸다.
머지않아 아기의 존재를 확인하려 부단히 움직이던 손길이 멎고, 그의 손은 열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때쯤 체데프의 동공은 완벽한 좌절에 휩싸인 채였다.
“그래, 그럼…….”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린 그가 상체를 기울여 라샤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먼저 빨아들이고 윗입술을 잘근 깨문 뒤 쪽,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그의 급격한 심리와 행동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라샤는 키스를 당하는 와중에도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혼란스럽게 떨리는 시선만이 간신히 그를 좇았다.
“눈 감고 있도록 해.”
나지막이 속삭인 후 몸을 바로 한 체데프가 정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샤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방향의 끝에 선 카임도 눈치챘는지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왜, 왜 여기로 오시는…… 초, 총은 왜 꺼내신 겁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
“아, 아니. 잠깐. 잠……! 라샤! 제대로 설명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기겁한 그가 제 기사들로 모자라 기둥 뒤로 몸을 숨기며 간절하게 외쳤다. 그런 그를 향해 발포할 준비가 된 총구는 가는 햇살에 반사되어 서늘한 광택을 냈다. 체데프의 살벌한 오해를 깨달은 라샤는 언제 도망치려 했느냐는 듯 급히 그를 뒤쫓아갔다. 그녀는 분명 좋지 않을 게 뻔한 의도로 총을 꺼내 든 체데프의 팔을 얼른 붙들었다.
“뭐 하려는 거예요!”
“다른 새끼 씨라도 네가 낳은 애라면 내 애와 같아. 그러니 넌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전부 책임지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그는 라샤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아기가 카임의 씨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라진 제가 이곳에 있단 게 밝혀졌고, 기간도 꽤 되었으니 제법 그럴싸한 오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말려야 했다. 카임에게로 향하는 체데프의 태도는 전장 속의 기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감사납고 모질었다. 그가 향하는 어느 곳인들 피가 낭자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유발했다.
“아니에요, 저분은 제, 제 오라버니라고요……!”
라샤는 그의 손목을 그러쥔 채 그의 오해를 싹둑 잘랐다. 그 누가 말려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체데프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고개가 뜸지근하게 라샤에게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고개를 끄덕인 라샤는 다소 복잡하게 꼬인 혈연관계를 어떻게 압축하여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 그건 누구 애지?”
지금, 체데프에게 그건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라샤의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 새끼야, 말해. 라샤. 당장 죽여 버릴 거니까.”
실제로 그렇게 묻는 그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동공 위로 쓰인 첨예한 광기가 맹렬하게 번들거렸다.
제 자식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조금쯤은 속상하기도 해서 라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체데프는 오기에 가까운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선득한 그의 눈동자가 마음을 갈기갈기 헤집어볼 듯 집요하게 이어졌다. 곧 그의 시선은 느릿하게 내려가 배에 닿았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체데프는 무언가 감을 잡은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내 아이인가?”
라샤의 표정이 아주 찰나 흐트러진 것을 잡아챈 그가 곧바로 말의 끝머리를 정정했다.
“내 아이구나.”
“…….”
“내 아이인 거야. 맞지? 라샤.”
“당신과 상관없어요.”
단호한 어투에 체데프가 멈칫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라샤.”
“이제 우리 관계는 다 끝났잖아요. 아닌가요? 당신은 내게 질렸으니까.”
“질린 적 없어.”
“그런 사람이 절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려고 해요?”
남들이 보고 있으니 언성을 죽여야 함을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 내내 그녀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던 감각이 그를 대면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무용하게 내버려진 7년에 대한 아쉬움, 끝내 나를 찾지 않는 그를 향한 원망과 섭섭함, 그리고 구석에 일말 정도는 남아 있던 그리움. 그 감각이 복잡하게 뒤엉켜 속을 비틀었다.
씨근덕거리던 라샤는 더 이상 대거리를 이어갈 생각이 없단 식으로 몸을 휙 돌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도망가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잠…… 뭐, 뭐 하는!”
뒤에서 뻗어진 손이 별안간 그녀를 안아 올린 탓이었다. 파리하게 야윈 안색에 비하여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는지, 체데프의 두 팔이 라샤를 안정적으로 받쳤다. 분명 붕대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는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체데프는 그 상태로 후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라샤가 놓아달라며 거푸 그의 가슴팍을 밀치고 두들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발걸음만 더욱 재촉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했다.
몸짓이 어찌나 날랜지 어느새 두 사람은 저택을 가로질러 백작저의 대문에 도달했다. 하얗고 깔끔한 느낌의 대문은 완전히 망가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제야 라샤는 후원에서 듣게 된 굉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무력을 사용하여 백작저로 진입한 듯했다.
“마차 문을 열어라.”
대기하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마차 문을 열었다.
라샤는 이제 발까지 동원하여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낑낑댔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체데프가 마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그가 들어선 건 마차인데, 눈을 감았다가 뜨니 마차 실내의 전경은 익히 잘 아는 침실로 바뀌었다. 고작 그가 뻗은 한 걸음으로, 라샤는 돌아오기 싫은 그 공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열려 있는 문 너머는 여전히 백작저의 풍경을 비쳤다. 마차의 문이 실내와 바깥의 공간적 차원을 달리하는 경계가 되었다. 부리나케 그들을 쫓아온 카임이 문밖에서 무어라 외치는데, 그 말이 제대로 전해지기도 전에 문이 쿵 닫혔다. 그러자 그 문틀의 흔적 역시도 공작저의 침실문으로 변했다.
체데프는 저벅저벅 걸어 어안이 벙벙해진 라샤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푹신하면서도 차가운 시트의 감촉에 라샤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이, 이게 무슨…….”
얼떨떨하게 중얼거린 직후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가 마차에 마법이라도 걸어둔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문을 열면 바로 이곳 침실로 이어질 수 있도록. 라샤가 스스로 해답을 찾은 사이, 그녀의 위로 올라탄 체데프가 뺨 위에 입술을 비볐다.
“라샤.”
이름을 머금는 음성에는 흘려보낸 지난날의 회한과 안도감이 또렷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다시 이 침실로 돌아왔다는 게 꿈만 같았다. 혹 깨어나면 산산이 깨져 버릴까 두려워 평생 잠기고 싶어지는 그런 꿈. 그 끝에 지옥이 있다고 해도 기꺼이 발을 들일.
라샤는 볼에 잔키스를 뿌리는 그를 바동거리며 밀어냈다.
“잠, 체데프……!”
그는 제 품으로 돌아온 라샤가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자꾸만 몸을 들입다 밀어붙이며 그녀를 체감하고 있었다. 오감으로 그녀를 느껴도 부족했다. 혹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득히 사라져 버릴 허상은 아닌지 의심하듯 넘치는 불안감을 조금도 주체하지 못하였다.
그가 턱을 비튼 라샤의 얼굴 방향을 쫓아가 입술을 포갰다. 발버둥질을 치는 자와 이어가려는 자의 공방전은 꽤나 격했다. 호흡이 다소 엉망으로 뒤섞였다. 제 혀를 성급하게 빨아대는 그의 행위에 라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읏, 자, 하아…… 잠, 체데……!”
키스가 멈출 겨를이 없었다. 그는 마치 작열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이처럼 계속해서 그녀의 점막을 휘저어대며 타액과 숨결을 앗아갔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숨 막힐까 염려할 겨를은 있는지, 다시금 호흡을 불어넣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라샤는 결국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혼이 쏙 빠질 듯한 키스에 응해 주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가 옭아매는 게 더욱 심해진 까닭이었다.
혀가 한참 동안 질척하게 섞였다. 똬리를 뜬 뱀처럼 두 개의 살덩이가 한 몸같이 얽히고설켰다. 기실 그 혼자 안달을 내며 일방적으로 라샤의 입 속을 휘젓고, 들쑤시고, 간지럽힌 쪽에 가까웠다. 라샤는 부디 그가 진정하기를 바라며 어깨를 붙잡은 채 간신히 맞춰주고 있었다.
마침내 쪽, 하는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라샤는 곧장 고개를 비틀어 타액으로 번들번들해진 입가를 닦았다. 체데프는 달아오른 짐승처럼 씨근덕대는 숨소리를 내며 라샤의 귓바퀴에 입술을 비볐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어디 다친 게 아니라면 됐어.”
애가 타다 못해 절절 끓는 음성이 귓가로 쏟아졌다. 라샤는 항변하는 것처럼 입을 딱 다물고 어떤 답도 꺼내놓지 않았다.
체데프는 그런 그녀의 목덜미에 콧대를 문지르며 이제야 현실감을 지닌 체취를 담뿍 들이마셨다. 그것은 몇 번이고 폐부로 가득 밀어 넣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도통 사그라들지가 않아서, 들개처럼 그녀의 살갗에 코를 처박고 문질러대기를 반복했다. 몇 달간 죽은 듯 미동 없던 심장이 이제야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펄떡펄떡 뛰어댔다.
“놔줘요. 난…… 돌아갈 거예요.”
라샤가 바르작거리며 꺼낸 말에 안도는 차오를 새도 없이 당장 바닥을 보였다.
“돌아가? 어딜.”
“리페 백작가로…….”
“네가 돌아갈 곳은 여기뿐이야.”
그윽한 음성에 바닥없는 소유욕과 집착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약에 중독이라도 된 사람처럼 그녀의 체취를 병적으로 흡입하던 그가 이내 혀를 내어 보드라운 살결을 할짝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축축한 촉감에 라샤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의 유려한 콧대가 쇄골뼈를 쓸더니 서서히 앙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 고개를 처박고 또 한참이나 킁킁대기를 반복했다. 까칠까칠해진 입술 사이로 언제든 붉은 혀가 빼꼼 빠져나와 살결을 유린할 것만 같았다.
돌아오자마자, 이 침대에서, 그와.
본능적인 거부감에 라샤가 고개를 저었다.
“싫, 어요. 체데프! 하지 말……!”
라고,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그녀를 밧줄처럼 꽁꽁 옭아맨 상태에서도, 은연중에 부른 배에 압박을 가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체데프가 돌연 무게를 실었다. 그의 체중으로 배가 눌리며 화들짝 놀란 라샤가 이전과는 판이한 힘으로 그를 밀쳤다.
체데프는 웬일인지 그녀가 미는 방향대로 손쉽게 밀려났다.
“…….”
라샤는 숨죽인 채 크게 뜬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시트 위에 늘어진 그는 미동이 없었다. 곧 숨을 일정하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호흡이 들렸다. 안정적인 숨결이었다.
“잠…….”
들었어……?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넋이 나가 한참 동안 그를 응시했다. 잠시 후 터져 나온 건 허탈한 실소가 전부였다.
* * *
근 몇 달간 제대로 잠들었던 건 거의 하루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깨진 티팟 조각으로 손목을 찔렀던 그날 말이다. 그러나 그건 당시 치료 시 사용된 진통제의 여운이었던지라 그의 의지로 잠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후로도 체데프의 불면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그는 홀로 남겨진 침실을, 저만 존재하는 서늘한 침대 위를 견디기 버거워하였다. 그것에서부터 파생된 불안, 염려, 두려움 등등 각종 좋지 못한 감정들이 그의 심장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드디어 라샤를 찾았고, 그녀가 제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이 모든 염려를 휘발시켜 버렸다. 불안이 가신 자리엔 당연히 따스한 안도감이 밀려들었고, 그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 결과로 가장 먼저 고개를 든 건 수면의 욕구였다. 몇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제대로 눈을 감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는 손쉽게 수면에 먹혀 버렸다.
그야말로 라샤가 주는 안정감에 취한 꼴이었다.
“…….”
체데프는 막 눈을 떴을 때, 오래간만에 머리가 제법 맑은 것을 느꼈다.
인간의 기본 욕구나 마찬가지인 수면이 방해를 받으며 내내 편두통이 가시지 않던 차였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하던 단잠은, 고작 한 번으로 예민하게 돋아난 신경을 살살 어루만져 가라앉혔다.
그는 가물가물한 시야로, 또다시 습관처럼 손을 뻗었다. 여전히 옆자리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그 혼자였다.
순간, 아주 달콤하고 아득한 꿈을 꾸었다는 착각을 했다. 이자나에게 우연찮게 정보를 얻어, 마침내 리페 백작가로 향하여, 라샤를 만나는 꿈……. 심지어 꿈속의 그녀는 제 아이까지 배고 있었다.
‘……꿈?’
꿈이라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망막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장면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생동적이고 실존적이었다. 꿈이 아니라, 분명 실제로 보았던 것…… 같은…….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체데프는 벌떡 일어났다. 시선이 급히 돌아갔다. 침대, 가구, 소품, 모든 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긴 그의 침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잠들기 전 이곳으로 데려온 제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낮게 욕을 뇌까린 그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아니, 그보다 라샤는? 무심코 안도에 취해 정신을 잃는 순간 달아난 건가. 사라진 건가. 또, 또 내 곁에서 멀어진 건가.
초조함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체데프는 입 안쪽 살을 피가 날 정도로 잘근잘근 씹으며 침실을 돌아보았다. 이전에 그녀가 사라졌던 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그땐 마냥 차분했으나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쏘다니며 침실을 경황없이 뒤지고 있었다. 아둔한 짓을 두 번 벌일 생각은 없다는 서툰 광기와도 같았다.
‘역시…….’
족쇄를 채웠어야 했다.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해 둔 그것들이 침대 아래에 널려 있었다.
그는 라샤가 다시금 제게서 멀어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되도록, 그런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보루였다.
하나 눈을 뜨니 그녀는 이전처럼, 꿈처럼, 악몽처럼 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진정 미쳐 버려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보기엔 후각으로, 촉각으로, 온몸으로 체감한 감각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녀는 역시 제 곁에 실존했던 게 맞았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 리페 백작가려나. 거기에 무어가 있다고 자꾸만 그곳으로 돌아가는가.
아니, 그건 체데프가 알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라샤를 제 품 안에, 제 가시거리 내에 있게 해야 했다. 그에겐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게 생겼잖아. 그러니 이건 다소 타당한 행동이었다.
다음에 데려오면 족쇄를 채우자.
내 곁에서 멀어지지 못하도록 꼭꼭 묶어두는 거야.
물론 평생 채울 생각은 아니었다. 차분히 마주한 채, 대화를 하고, 못다 한 진심을 바치고, 그리하여 라샤가 제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면 그때 풀어 주면 된다. 그 전까지는……. 라샤가 발버둥을 치다가 발목에 상처가 나면 잠이 들었을 때 연고를 발라 주면 되고, 답답하다고 하면 직접 안아서 정원을 산책하면 된다.
그래, 그럼 되지.
그러니 족쇄를 채워야겠다.
족쇄를, 족쇄를, 족쇄를…….
침실에서 응접실로 나오는 단 몇 발자국 만에 생각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응접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하는 순간 뚝 그쳤다.
통유리창의 전경을 내다보는 걸 좋아하는 라샤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환영이 아닌 실재로. 이것마저도 꿈인가 싶은 아찔함에 체데프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 행동을 심지어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라샤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더듬더듬 걸어갔다.
“……간 줄 알았어.”
그가 라샤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창밖을 내다보던 라샤의 눈동자가 시야를 가로막는 그에게로 가 닿았다. 체데프는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를 응시하던 라샤가 차게 식은 실소를 지었다.
“바깥에 기사를 저렇게 많이 세워뒀는데, 어떻게 가요?”
그의 짐작대로 라샤는 체데프가 잠든 순간, 이 침실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이곳에서 나가기도 전에 불발되었다. 이전엔 한 명도 보이지 않던 공작가의 기사들이 침실문 앞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부탁하고, 애원하고, 끝내 윽박까지 질러 보았으나 그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바깥으로 통하는 테라스는 진즉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라샤는 체데프가 깨어날 때까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어야 했다.
“보내 주세요.”
“안 돼.”
“왜요?”
“말했잖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라샤.”
“그 이유가 뭔데요. 아, 당신이 필요할 때마다 함께 뒹굴어 줄 여자가 필요하니까?”
라샤는 차분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기실 그녀가 힐난한 건 어찌 보면 그녀 자신인데, 체데프는 본인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속내 역시 그렇게 심약하게 으스러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말을 해.”
“틀린 말 아니잖아요. 헤어지기 전쯤에는, 당신이 나를 찾을 때가 그럴 때 아니면 없었잖아.”
그녀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그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그는 결코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그렇게 느낀 거면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체데프는 죄를 시인하는 죄수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양 떨리다가 천천히, 동그란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배에 닿았다.
“……내 아이 맞잖아.”
“…….”
“그렇지?”
그는 차마 배를 어루만져 볼 생각도 못 하고 라샤의 무릎만을 감싸 쥐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왜 아무 말도…….”
“말할 수 있었겠어요?”
“…….”
“당신이라면…… 아무리 봐도 사랑이 식은 남자에게 애가 생겼단 말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느냐구요.”
“사랑이 식은 적 없어.”
“거짓말. 나에게 질렸으면서.”
“아니라고 말했잖아, 라샤!”
“그럼 내게 보인 태도는 뭔데요!”
체데프는 어느새 물기가 촉촉하게 고인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목이 꽉 조여들었다. 울멍거리는 라샤의 눈빛에 마음이 속절없이 조각났다. 그 조각 사이로 스며 올라온 건 지난날 미치도록 곱씹었던 후회뿐이었다.
“당신한테 내가 말 잘 듣는 창부와 다를 바가 뭐가 있었어요, 뭐가 있었느냐구……!”
라샤는 제 무릎을 감싸 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처음의 태도는 침착했으나 갈수록 그와의 대화가 버겁게 다가왔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여긴 속내가 속절없이 뒤집히는 게 너무도 선연히 느껴진 까닭이었다. 다 털어낼 수 있을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것들은 단순히 오기로 가려진 것뿐, 여전히 그녀의 속에 뭉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검은 실타래같이.
체데프의 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라샤는 눈물로 젖은 제 뺨을 닦아 주려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듯 밀어냈다. 그는 외면당한 손을 꽉 움켜쥔 후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네가 사랑이 아닌 적은 없어. 진심이야.”
“…….”
“다만 내가 이 관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래서.”
“…….”
“못 할 짓 한 것 알아. 널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다는 것도 알고……. 네가 사라진 후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병신같은 자책만 골백번도 넘게 반복했지.”
말을 하다 보니 그 또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7년의 시간이 이대로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게 두렵고 무서운 건, 체데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연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큰 일부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라샤는 행여나 그 일부를 잃어버릴까 소중히 여겼다. 반면 어리석은 그는 그것에 길들여져 버려서 너무도 손쉽게 관계를 망가뜨리고 부서뜨렸다.
라샤가 관계를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나 홀로 아등바등하고 있었음을, 그녀가 떠난 이후에야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또한 그 잘못을 알기에 그녀에게 바짝 엎드려 빌고,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은 심정이었다. 라샤의 앞이라면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전부 내던지고 그럴 수 있었다. 이미 7년 전부터 그러고 있었으며, 잠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잃고 난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사랑해, 라샤.”
“…….”
“내가…… 내가 잘못했어.”
라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게 마치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처럼 느껴져 애가 탄 체데프는 그녀를 껴안았다. 입을 맞추려고 해도 라샤가 고개를 비틀어 피했다. 그가 아득바득 쫓아와 입술을 지분거려도 그녀는 호흡 한 자락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나 다정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변심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체데프는 스스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총을 쏠 수 있으면 몇 번이고 그러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못 믿어요.”
“라샤.”
“갈래요, 보내 주세요.”
라샤가 아까부터 요구하던 바를 재차 입에 올렸다. 체데프는 폐부가 욱씬 조이는 감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저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벌써부터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번 역시 그녀를 놓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홀로 남을 침실은 아가리를 쩍 벌린 생지옥이 될 터였다.
“사랑해.”
“…….”
“그러니 안 돼.”
“안 된다니……?”
“넌 이곳에 있어야 해.”
꼭 벽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라샤는 눈을 가물거리다가 침실 문 앞에 세워둔 기사들을 떠올렸다. 묘한 스산함이 맘속에 차올랐다.
“……날, 가두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필요에 의하다면.”
라샤가 백작저에서 보았던 건 결코 과장되거나 엇나간 게 아니었다. 코앞에서 반질거리는 체데프의 눈동자에는 이전엔 찾아볼 수 없던 첨예한 광기가 확실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 곁에 있어 줘, 라샤.”
물론 그 광기에 상응하는 애절함 역시도,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