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

6장. Deceived

틈새에 걸쳐져 있던 계절이 예사로이 넘어갔다.

세상의 북쪽에 위치한 벨리움은 봄과 여름이 짧고, 반대로 가을과 겨울이 긴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제국 전역을 감싸는 바람은 사시사철 냉랭하게 다가왔다.

잃어버린 봄과, 무수히 찾아 헤맨 여름을 지나, 마침내 쓸쓸하게 물든 가을에 도달하였다.

보다 찬 기운을 담은 바람이 몰려오기 시작할 즈음, 세실리온 공작저는 가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분주했다. 공작이 저 먼 이국의 땅, 티그리스로 향한 지 다섯 달 만의 귀환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위하여 그럴듯하게 둘러대긴 하였으나 저택 내부자들은 그가 봄에 놓쳐 버린 것을 찾기 위하여 그 길을 떠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혈투가 난무하는 전장에 다녀온 경우가 아님에도 기다리는 이들은 유독 긴장을 하였다.

이윽고 거대한 대문이 열리며, 세찬 바람이 밀려와 깃대에 걸린 검은 깃발이 펄럭거렸다. 집사를 포함한 사용인은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화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체데프는 말에서 내렸다.

“주인님, 무탈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고개를 들던 집사는 코앞에서 맞닥뜨린 주인의 분위기에 움찔했다. 체데프는 그런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집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이 공자였을 시절부터, 이렇게 깍듯하게 그를 마중한 일이 세기도 벅찰 만큼 잦았다. 특히나 고된 원정을 치르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 맞닥뜨린 체데프의 기색은 그 힘겨운 순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 집사는 그가 애첩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체데프가 가로지르는 복도가 왠지 모르게 한랭했다. 오직 그가 내뿜는 숨 막히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사용인들은 목 끝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은 불편함을 체감했다.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 위를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 어느 하나 살피지 않고 곧장 침실로 향하였다. 쿵, 하고 닫힌 침실 문을 앞에 두고 집사는 뒤늦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로하여 주름이 자글자글한 낯에 염려가 물씬 배었다.

이국으로 떠나 있던 다섯 달간의 일정으로 지금, 공작이 침실에서 편히 쉴 시간조차 없음을 잘 안다. 그 때문에 공작의 보좌관인 오닉스가 하루가 남다르게 야위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걸 알지만 재촉 하나 입에 올릴 수 없는 건 말에서 내리던 주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 때문이었다.

노크를 하기 위해 들어 올려진 손이 결국엔 바닥을 향해 떨궈졌다. 집사는 조용히 발을 돌렸다.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하여 하루는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다고, 보좌관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닉스의 절망 어린 아우성이 벌써부터 들리는 기분이었다.

한편.

침실로 들어온 체데프는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제가 없어도 상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침대를 바라보는 눈길이 바닥없는 저 아래까지 가라앉은 채였다. 라샤가 늘 보석처럼 빛이 난다고 일컬은 금안은 마모된 양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시트를 쓸었다.

‘고작 애첩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처녀 시절 벨리움에서 함께 자라다가 티그리스 황족과 결혼을 올려 그곳에 정착하게 된 인척, 카밀라가 저를 보고 지었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제 행보에 기막혀하는 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그게 다섯 달 전의 일이었다.

티그리스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체데프는 괜찮았다. 폭삭 내려앉은 마음 위로, 라샤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새싹처럼 자라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을 거다. 벨리움에 없었으니까, 소매치기가 이리로 향하려던 승선표를 보았다고 했으니까.

그 와중에도 자그마한 손으로 고작 몇 개 챙겨간 보석을 전부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초조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어딘가에서 하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애가 바짝바짝 타는 심정이었다.

데려온 기사들로 모자라 체데프마저도 매일같이 꼭두새벽부터 나갔다가 자정을 넘겨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라샤와 같은 흑발이나 그녀의 옆태를 닮은 여자라면 모조리 세운 뒤 살펴보고 허탈해하는 짓만 골백번도 넘게 반복했다.

‘이제 보니 예전의 그 애구나.’

그 과정에서 신세를 지게 된 카밀라는 그가 맹목적으로 찾아 헤매는 이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숙부님께서 그리도 내치시려고 애썼던 그 평민.’

‘…….’

‘너에게서 도망이라도 쳤니?’

예전부터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결혼 후에도 여전했다. 그녀 못지않은 성격을 지닌 체데프였으나 그 말에 쉬이 반박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라샤가 정말 이곳에 있다면, 제게 붙잡히지 않기 위하여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발견되기만 한다면 다행이었다.

다시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하에 묻어둔 심중을 토로하게 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각오는 수색이 한 달째에 접어들며 재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벨리움과 같은 제국이지만 땅덩이는 훨씬 더 좁은 편이었다. 타국인이자 이방인인 라샤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죄 뒤졌으나, 여기에서도 그녀를 찾는 일은 도통 진척이 없었다. 진척은커녕 아주 가느다란 실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던 희망은 까맣게 애타는 마음과 함께 잠겨 스러져갔다.

그때쯤이기도 했다. 엉망이 된 손수건이 다시 번민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생각해 보면 라샤가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위험성 담긴 가능성은 도처에 무수히 깔려 있었다. 혹시 이곳으로 향하는 도중 큰일을 당한 건 아닐지, 아니면 이곳에 와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곳으로 오기도 전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그는 미칠 노릇이었다. 애간장이 마른다는 말을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석 달을 채웠다. 그는 그곳에서 그치지 못하고 티그리스 인접국까지 발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수색을 지시했다. 그 일로 예상했던 기간보다 두 달이 넘는 기간이 소모되었다. 라샤를 찾으려 이국의 땅을 헤맨 지 다섯 달이었다.

이제는 정말 자리를 비우는 게 불가하다는 갈급한 전갈을 받을 때조차도 라샤는 야속하게 모습 하나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순조롭지 못한 상황에서 도출된 결론이 그를 좌절과 회한의 경지에 끌어다 앉혔다.

라샤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매치기범을 잡아 억지로 억누른 불안감이 그를 다시금 파도처럼 잠식했다. 그의 심장은 까끌까끌한 모래밭 위를 뒹구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짓이겨지고 추레해졌다. 끝내 티그리스와 인접국에서까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발을 돌릴 때까지,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온 현재도.

“…….”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이내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의 냉기가 그의 온몸을 싸늘하게 감쌌다. 그럼에도 심장은 이미 차디찬 수렁 속에 잠긴 지 오래였기에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라샤와의 보금자리였던 이곳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내보냈다. 그게 부정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라샤는 사라졌고 지금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무사하다는 신호로 여겨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날씨가 더워지면 도통 기력을 찾질 못했고, 날씨가 추워지면 이따금 배앓이를 하여 체데프가 직접 배를 어루만져 주고는 했다. 어쩌다가 감기에 걸리면 일주일 동안은 꼼짝없이 침대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연약한 라샤였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오랜 시간 곁에서 그녀를 보아온 체데프였다.

‘나밖에 없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날 때부터 거의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체데프는 자연한 수순으로 선택지가 많은 생을 겪었다. 그러나 라샤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그와 엮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체데프인 것처럼 그만 보고 살아오지 않았나.

체데프는 그것이 행복하였다.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욕할지 몰라도 그러한 본심은 가릴 수 없었다. 그녀가 모든 걸 뒤로 내버린 채 오로지 자신만을 이정표로 삼고 인생의 길을 만드는 건 흡족함을 넘어 쾌감까지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그녀가 품은 것에 상응하는 사랑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이 관계는 절대로 변치 않으리라는 건 체데프 역시 꿈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는 새에 물든 권태가 그 결심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그 늪 같은 감정은 어찌나 내밀하고 고요했던지 정작 그 본인조차 몰랐다. 발부터 천천히 잠겨 오는데도 시선은 멀쩡하니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눈뜬장님이 따로 없었다. 알아챈 후에는 그 잘못을 꾸짖듯 이미 발끝에 묻어난 흔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더러운 흙은 지금 추레한 마음속에 고이 남아서 그를 고통과 번민으로 몰아넣었다.

익숙함에 젖는다는 건 이토록이나 무서운 일이었다.

반면 저만을 이정표로 삼은 라샤에게는 그게 너무도 훤히 보였다. 그것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으니 모든 건 제 잘못이었다. 팔로 눈가를 덮은 체데프는 그 상태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라샤의 부재, 더 나아가 몹쓸 상상과 후회가 그를 무력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만이 남겨진 침실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는 양 궤궤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 * *

보좌관, 오닉스는 다섯 달 만에 만나게 된 상관을 긴장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어제 집사에게 대강 전해 듣기로는 다섯 달 전보다 수척해지고 안색 또한 영 좋지 않다고 하였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이 마를 만큼 살벌한 분위기도 내풍겼다고 했지. 그것 때문에 덜컥 겁이 나 확인받아야 할 정무가 쌓여 있었음에도 미처 찾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오늘, 드디어 마주하게 된 상관은 예상외로 멀쩡했다.

들은 대로 얼굴이 상한 건 확실했다. 원래도 짙어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던 턱 선은 더더욱 날카로워졌고 눈 밑 그늘 또한 더욱 진한 음영을 그려냈다. 그토록 초췌해진 얼굴빛과 다르게 표정은 무료했다.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던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해 보였다. 표백된 양 무감함이 층층이 깔린 표정은, 말한 그대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체데프는 그러한 상태로 미뤄둔 일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솔직히 라샤를 찾지 못해 또 예기치 못한 식의 난동을 부리는 건 아닐까 염려하던 많은 측근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객이 찾아든 건,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세실리온 공작 각하!”

그는 바로 세 달 전, 잡아둔 여식의 결혼식을 보기 좋게 무시당한 로베니 후작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귀를 찢는 우렁찬 고함에도 체데프는 인상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시선을 물끄럼 던질 뿐이었다.

로베니 후작은 이제야 제국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따질 게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그럼에도 일단은, 상하 간의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그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식 날짜까지 다 잡힌 마당에 모조리 보류시킨 후 갑자기 티그리스행이라니요!”

“후작님, 부디 진정해 주십시오. 이전에 고한 대로 공작님께서는 교역 협정과 관련한 일로 다녀오신 것입니다.”

보좌관, 오닉스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했다.

알기로 로베니 후작은 제법 신실한 신전의 신도였다. 그런 만큼 특별히 대신관에게 부탁을 드려 점지해 놓은 결혼 날짜를, 공작이 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미뤄 버렸으니 이리 찾아와 길길이 날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 분노를 짐작게 하는 건, 오닉스의 설명을 향한 코웃음이었다. 광산업 하나로 요즈음 가문의 위신과 평판이 하늘까지 치솟았다는 걸 감안해도 거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태도였다.

체데프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손을 들어 오닉스를 내보냈다. 잠시 후 집사가 들어와 막 우려낸 차와 티팟을 마련해 주고는 눈치껏 물러났다.

로베니 후작이 침까지 튀기며 이것저것 따져 묻는 동안 체데프는 가만히, 티팟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뻐요.’

라샤가 저것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발그레 웃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녀는 고풍스러운 금박 무늬가 박힌 찻잔과 티팟을 유독 좋아했다. 내리쬐는 햇살에 비치면 반짝거리는 게 꼭 체데프의 눈동자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으로 차를 내려 마시면 그가 없어도 그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고.

그 말을 하던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체데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끔은 제가 앞에 있는데도 찻잔만을 볼 때가 있어서 질투심을 여과 없이 비친 적도 있었다. 갸름한 턱을 잡아 제게로 고정시킨 후 입술이 닳도록 빨아댔었다. 결국 그 행동이 침대행으로 이어진 적 또한 빈번했다.

고작 찻잔 하나에도 떠오르는 기억이 이리 찬연하고 눈이 부시다. 요즈음 그 어떤 것으로도 감흥을 느끼지 못한 데에 반하여 라샤와의 추억은 그를 손쉽게 자극했다.

그걸…… 이제 다시 느낄 수나 있을까.

“……지 않습니까? 아니, 각하. 아까부터 대체……. 제 말을 듣고 계시긴 하는 겁니까?”

찻잔에만 쏠려 있던 체데프의 눈길이 느릿하게 이동하여 로베니 후작에게 가 닿았다. 하지만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머지않아 다시 다른 곳을 응시한다.

관심이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알리는 태도에 로베니 후작은 속에 열불이 치미는 것만 같았다. 제가 아득바득 끌어모은 돈을 상납금으로 받쳐 얻어낸 길일을 보기 좋게 날려놓고 선보이는 태도가 말도 안 나올 만큼 뻔뻔했다.

아무리 그가 윗사람이지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로베니 후작의 입장에서는 사과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그런 마당에 이런 무성의한 대우라니. 그의 마음은 금세 불퉁한 방식으로 비틀릴 수밖에 없었다.

“각하께서 티그리스로 향하신 새에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만.”

그리하여 두려움을 이유로 꾹 참고 있던 그 화제를 무심코 입에 올렸다.

“요즈음 벌이시는 불가해한 행보가, 예전부터 소문 자자한 애첩과 연관이 있다고요?”

로베니 후작은 그제야 제게로 돌아오는 시선을 눈치채고 짙은 만족감을 느꼈다.

“저는 각하께서 저희 가문의 혼담을 받아 주신 이상 그 애첩을 어련히 잘 정리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굳이 군말을 보태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기도 하고요. 한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변변찮은 애첩 하나로 지금, 저와 제 딸, 아니, 로베니 후작가 전체를 우스운 꼴로 만드는 것 아니십니까!”

“…….”

“건너건너 듣자 하니 하잘것없는 평민이라던데…… 이런 말은 제 긍지를 이유로서라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만, 제 딸아이가 그딴 평민과 비할 바가 됩니까? 우선순위는 분명히 하라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하.”

“…….”

“혹 함께 밤을 보내온 몸뚱어리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단순히 그걸 잊지 못해 그러신 거라면 이 제국에 널린 게 창부 아니겠습니까. 한철의 욕구 따위야 닮은 이를 찾아 풀면 그만…… 아악!”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체데프는 티팟을 들고 일어나 그대로 후작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후작의 머리가 단단한 건지, 체데프의 힘이 센 건지 고급스러운 티팟은 날카로운 파열음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고고하게 앉아 있던 후작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볼품없는 모양새로 나동그라졌다. 체데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악! 무, 슨, 컥! 살, 살려…… 이봐, 이, 헉, 이봐! 누, 누구 없, 아악!”

고작 주먹질 몇 번에 이목구비 어딘가에서 피가 터져 후작의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소란을 들었는지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닉스는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머지않아 저를 밀치고 들어서는 기사들로 말미암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허둥지둥 달려가 가차 없이 팔을 휘두르는 공작을 붙잡았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각하! 각하께서 진심으로 때리시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발!”

그 말대로 로베니 후작은 이미 신음을 흘리며 반쯤 실신한 상태였다. 특히나 재잘재잘 돼먹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던 입가는 이미 곤죽이 되어 있었다. 얼마 안 가서는 억억대던 신음조차 희미해졌다. 기사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장정 다섯이 달라붙고서야 그를 간신히 후작에게서 떼어놓았다.

체데프의 허리를 얼싸안고 말리던 오닉스는 잠시 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알 같은 소름이 끼쳤다.

그는 사람을 반실신에 처하게 만들 만큼 두들겨 패놓고도 여전히 무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타인을 구타하는 행동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으로 튄 후작의 핏방울이 그의 뺨에 선득히 묻어 있는데도.

그제야 오닉스는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깨달음을 얻었다.

돌아온 체데프는 멀쩡한 게 아니라, 감정을 가다듬고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낼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무력해진 속내가 표백된 양 모든 감정을 지워 버리고 그럴싸한 껍데기만 겨우 갖춰 있게끔 했다. 그러니까 꼭, 신경계와 오감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것처럼.

결코 괜찮은 게 아니었다.

들이닥치는 파도에 서서히 부서지고 망가지는 모래성의 잔해처럼, 그토록 무기력하고 불안정하게, 그는 차츰차츰 흐트러지며 무너지고 있었다. 공사 구분이 철저하여 이런 소란 한 번 만든 적 없는 그가 정신 못 차리고 냅다 주먹부터 휘두르는 것만 봐도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한차례의 소란은 로베니 후작이 실려 나가고서야 그쳤다.

“주인님, 손의 상처가…….”

체데프는 치료를 주장하는 집사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발은 마치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주저 없이 움직여 침실로 향했다. 라샤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해 둔 서랍의 마지막 칸을 열었다. 그 안에, 티그리스로 향하기 전 넣어둔 그녀의 네글리제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댔다. 이전보다 덜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느껴지는 그녀의 향을 안정제라도 되는 양 듬뿍 들이켰다.

‘함께 밤을 보내온 몸뚱어리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단순히 그걸 잊지 못해 그러신 거라면 이 제국에 널린 게 창부 아니겠습니까. 한철의 욕구 따위야 닮은 이를 찾아 풀면 그만…….’

어디서 감히.

어떻게 감히 그따위 망발을 지껄일 수가 있지.

라샤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다. 그녀 대신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설령 존재한다 한들 무용할 뿐이다. 그러니 그딴 헛소리를 너무도 쉽게 지껄이는 후작의 입을 당장 찢어 버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다시는 그 세 치 혀를 놀리지 못하도록 혓바닥을 아예 잘라 버리고 싶었다.

적어도 라샤를 잃었다는 사실이 속에 멍울처럼 자리잡힌 그의 앞에서는 꺼내면 안 될 이야기였다.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체데프는 하얀 네글리제 위로 번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제야 제 손에 깨진 티팟 조각이 들려 있음을 알아챘다. 이것을 쥐고 주먹을 휘둘러서인지 손바닥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피로 물든 채였다. 해백해진 상태로 저를 보던 사용인들의 표정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환부를 인지하니 따끔거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하나 그걸 응시하는 체데프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감했다.

이 아픔이 라샤가 겪었을 것에 비할 바가 되나.

그녀는 익숙함에 젖어 들어 저를 홀대하는 그에게서, 이보다 더 지독한 고통과 허망을 느꼈을 텐데.

그녀를 잃고 나니 알겠다. 이딴 신체적 아픔은 마음을 난도질당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자는 따끔하고 그만이지만 후자는 얼얼하고 지끈거렸다. 그뿐 아니라 스산하기도 하고 철렁하기도 하고, 그냥 온 감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만큼 강력하고 여운이 강했다.

이걸, 라샤는 이 마음을 몇 번이나 겪었을까.

때로는 아득히 추락하는 것 같고, 때로는 맥없이 방황하는 것 같고, 때로는 숨 한 번 들이마시는 것조차 고역으로 느껴지는 이 마음을.

대체 몇 번이나 느꼈길래 제 곁을 떠나고자 마음먹었을까.

그리고 아둔한 자신은 그녀를 상처 주고서 뭐 잘한 게 있다고 이리도 뻔뻔하게 숨을 쉬고 있는 걸까. 벼랑 끝까지 내몰리다가 결국, 이곳에서 나가길 택하며 갈 곳이 없어진 라샤는 길바닥을 전전하다가 큰 변고를 당한 걸지도 모르는데.

내가, 내가 그녀를 그런 사지로 밀어 넣은 장본인인데.

체데프는 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티팟 조각으로 손목을 긁고 있었다. 잘 벼린 날처럼 뾰족한 부분이 맥동하는 혈관을 정확히 갉작대었다. 손바닥에서 흐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출혈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체데프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더 세게 해 줘요.’

‘더, 더 세게.’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걸 깨닫고, 그 변화를 인지한 데서 발생한 불안감이 그녀를 그렇게나 한계까지 몰아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그건 제 불안을 달래 달라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모르는데. 병신같은 저는 좋다고 그녀를 탐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이곳에서 사라진 당일 아침, 그가 나선 침실에서 깨어난 그녀는 홀로 침대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길을 잃은 아이가 된 듯 라샤를 반추하는 것밖에 못하는 자신처럼, 그녀 또한 마음이 온전하던 때의 자신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더 세게 해 달라는 라샤의 말에 귓전을 거푸 때렸다.

찰나, 유리 조각이 살갗을 날카롭게 찢으며 깊숙이 박혔다. 그 순간 피가 수전을 틀어놓은 것처럼 줄줄 쏟아졌다. 그 정도는 되니 아픔이 또렷이 느껴졌다. 동시에 시야가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아득하게 점멸했다.

체데프는 이제야 겪는 극심한 고통에 짙은 만족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아주 오래간만에 과거를 더듬었다.

그 기억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는 라샤가 나왔다. 이제는 헤아려 보는 것조차 까마득한 순간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녀와는 달랐다. 조금 더 앳되고, 조금 더 부끄럼을 타던. 마구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라샤였다.

라샤는 첫 만남의 순간부터 체데프에게 변수 그 자체였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국의 공작가, 정통에게서 난 흠 잡을 데 없는 핏줄, 좋은 점만 물려받아 준수하고 말끔한 외모에 처음부터 두각을 보이던 기사의 재질.

축복이라면 축복이라고 봐도 무방할, 온갖 이점만 가지고 태어난 게 바로 세실리온 공작가의 장자인 그였다. 더군다나 외자식이라 치열한 후계 다툼을 벌일 필요 또한 없었다. 공작가의 모든 것이 순전히 그의 소유물로 예정된 보화였다.

체데프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모든 게 빈틈없이 잘 짜여진 하나의 도안 같은 생이었다. 그는 그려진 그대로만 따르면, 아주 멋들어지고 훌륭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그건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편안하니 굳이 벗어날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는 그런 생이었다.

그 궤도를 최초로 이탈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라샤였다.

그녀는 체데프에게 있어 멋들어진 도안 위로 쭉 그어진 강렬한 붉은 선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눈길이 갔다. 체데프는 여인을 앞에 두고 이따금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껴본 게 난생처음이었다.

남루한 옷자락을 걸치고 있는데도 그 위로 살짝 비치는 하얀 피부의 촉감이 궁금했고, 그것을 손끝으로 어루만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칼 뒤 유려한 선을 그리는 목덜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곳은 월광만이 길라잡이가 되는 마구간이라 어둑했는데도, 그녀의 모든 것이 눈동자에 아로새겨졌다.

기실, 은근하게 지펴진 불순한 호기심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온몸으로, 제게 호감이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는 또 처음이었기 때문에.

버벅거리면서도 연신 저를 살피는 분주한 눈길하며, 질문 하나만 건네도 발그레해지는 뺨이 뭐랄까. 속 어딘가를 미묘하게 갉작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원래는 잘 가지도 않는 마구간에 자꾸만 걸음 하게 된 것은.

체데프는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에 거부감을 느꼈다. 누더기나 입고 있는 평민에게 왜 자꾸 이렇게 관심을 가지지. 이게 명백히 적선이나 동정과는 다른 부류라는 걸 잘 알기에 거북함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그도 라샤를 만나기 전까지는, 오만한 귀족적 사고가 뼛속까지 박힌 지배계층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꼴사납게 평민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고 자랄 때부터 몸에 밴 그것을 불순한 호기심이 단번에 억누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혼란은 더욱 배가되었다.

그 수준은 나아질 겨를 없이 심해지기만 하였다. 마침내 변변찮은 마구간지기의 딸이, 피의 전장을 휘돌면서까지 생각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이게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게 전쟁은 마땅히 승리를 이끌었으나 영 풀리지 않는 찜찜함을 품은 채로 돌아왔을 때.

마구간에서 잠시 선잠이 들었었다. 그러던 중 온기 밴 옅은 숨결을 느끼고 눈을 떴다. 가까이 오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까발려질까 겁이라도 나는지, 늘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던 라샤가 웬일로 코앞에 있었다.

누군가의 눈이 예쁘다고 생각한 건, 그의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 내게 마음이 있나?’

그 보랏빛 동공에 매혹당하기라도 했는지, 질문은 머리를 거쳐서 나온 게 아니라 마음이 제멋대로 꺼내었다. 목전에서 반짝이는 자안은 격렬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깊이 요동쳤다. 그 잔떨림마저도 심히 어여뻐 보였다.

‘……네.’

‘…….’

‘좋아해요.’

체데프는 분명 그녀가 발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영문인지 라샤는 늘 가리기 급급해 보이던 사랑을 먼저 터뜨렸다. 마치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결국엔 감당치 못할 만큼 불어나 왈칵 넘쳐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때 고백을 한 건 분명 라샤였다. 그러나 체데프는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어디까지 추락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아찔한 감각이었다. 혼란이 삽시간 그를 삼켰다. 정의 내릴 수 없는 감각이 속에서 마구 뒤엉켜서, 체데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간을 벗어났다.

그 후부터는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기까지의 혼돈기였다.

혹은 사랑에 대한 인정이라든지.

자신이 고작 평민에게 끌릴 리가 없다는 약간의 부정, 그럼에도 저택으로 돌아올 때면 본능적으로 마구간 쪽을 향해 돌아가는 고개, 제 앞에서 수줍게 웃거나,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예사로운 모습들이 이따금 떠올랐다. 잔상은 세세했다. 미소 지을 때 사붓이 접히는 눈꼬리와 그 안에서 반질거리는 제비꽃색 동공, 하얗고 마른 손가락을 그러모아 꼼질대던 그런 것들 말이다. 더불어 함께 나눈 별 것 없는 밤중의 대화를 자꾸만 곱씹게 되고, 그것을 애써 털어 보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결국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있음을 느끼고.

마침내 그녀에 대한 몽정까지 겪게 되며 그는 치미는 감정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고고한 귀족의 자존심은 제멋대로 요동치는 심장 앞에서 제 주장조차 꺼내지 못하였다.

그날 밤, 체데프는 치솟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라샤를 찾아갔다.

제 팔에 감기고도 남는 허리를 부여잡고 불그스름한 입술을 몇 번이나 빨고 깨물며 지독한 쾌락을 맛보았다. 꿈속에서 저를 보며 요사스레 벌어진 그 요망한 입술이었다. 요망하며 동시에 어여쁜 바로 그것. 저를 보고 놀라 휘둥그레진 눈동자는 이 요란한 감각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듯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실감은 충분했다.

그녀와의 공존이, 살갗이 맞닿아 있는 이 황홀함이 실제인 것처럼.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박거리는 순간 라샤는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실상에서 허상으로 변하는 순간이 체데프는 믿기지가 없었다.

끝내 품 안에 있던 라샤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을 때, 그 허망함이 가슴 안쪽까지 스며들었을 때 체데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인님……!”

집사가 십년감수한 얼굴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하루가 훌쩍 지난 후였다. 그제야 제가 보았던 라샤가 꿈속의 허상임을 깨달았다.

체데프가 깨어나자마자 공작가 주치의가 허겁지겁 달려와 설명했다. 환부의 상태가 어떠한지, 무얼 조심해야 하는지, 그 밖에 어디 불편한 데가 있지는 않으신지. 체데프는 제게로 쏟아지는 염려 어린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저 여전히 꿈에서 깨지 않은 사람처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꿈결을 헤매는 낯이 따로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꿈의 조각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아득함이라든지.

세실리온 공작의 극단적인 시도는 당연히 측근들 선에서 봉해진 비밀이었다.

하나 눈치보다 빠른 게 바로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이었다. 대체 어느 경로를 통해 이야기가 샌 건지 정재계(政財界) 간 긴밀하게 얽혀 있는 가문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척,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서신이 앞다투어 도착했다. 더군다나 지난날 공작에게 얻어맞은 로베니 후작이 파혼 통보와 함께 황실에 고발장을 보내는 바람에 사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랫것들이 분주하건 말건 체데프는 나사가 빠진 기계처럼 제멋대로 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건 환부였다. 깨어난 당시 그는 아예 왼팔을 움직이지 못했다. 깨진 유리 조각이 하필이면 신경계를 건드려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는 혼비백산이 되어 치료를 위해 극진히 매달렸으나 체데프는 남 일 대하듯 시종일관 무감하기만 하였다.

다행히도 몇 주간 꼼짝 않고 휴식을 취했더니 왼팔의 상태는 제법 호전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손가락이 움직였을 때 주치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제야 십년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공작, 그 자체였다.

여전히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니 공작은 햇살이 찬연한 한낮에도 얼간이처럼 비몽사몽일 따름이었다. 무기질처럼 녹슨 금안은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듯 흐리터분했다. 기실 작금의 체데프는 제대로 깨어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었다.

자해 시도 후 그는 아예 삶의 의지를 잃은 양 굴었다. 그 무기력한 태도가 측근들에게는 마치 기다란 밧줄 위에 선 듯 실로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졌다. 저러다가 언제 고꾸라져 버릴지, 그러니까, 또 나락으로 떨어지기 위한 시도를 저지를지 몰라서였다. 그리하여 불안한 마음을 빠듯하게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어쭙잖은 설득마저 자극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인지라 예전처럼 누군가를 직접 접대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하루하루, 공작저까지 찾아오는 이가 있어도 예의를 차린 축객령을 앞세워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시가만 내리 피우며 무기력한 감정에 차츰차츰 먹혀가던 체데프는 별안간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허락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드나드는 모습이 부친을 똑 닮은, 로베니 영애였다. 예상했던 대로 제멋대로의 침입이었는지 집사와 오닉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뒤따르며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됐다.”

때아닌 소란에 체데프는 손을 내저었다. 오닉스와 집사는 입을 합 다물고 잽싸게 물러났다.

체데프는 허락과 달리 손님맞이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용건이 있다면 알아서 꺼내고 썩 꺼지라는 듯한 태도였다.

“환대 수준하고는.”

이자나는 그런 태도가 익숙한 것처럼 태연히 굴었다.

“웬일이지?”

“파혼장을 전해 주려구요.”

“그렇게 친절한 성격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며칠 전만 해도 약혼한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빈정거림만 여실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언제나와 같은 태도였다. 만날 때마다 남들의 이목을 생각하여 미소 짓기는 하지만, 오가는 대화는 늘 비딱하고 투박했다. 로베니 영애의 말을 들은 체데프의 반응은 욕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고, 반대로 로베니 영애는 시비를 걸며 이죽거렸다.

이 모든 게 웃는 낯으로만 진행이 되었으니 남들이 보기엔 퍽 화기애애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을 하려고 했던 게 신기할 만큼 상극이었다. 그만큼 체데프가 이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파혼장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자신이 로베니 후작의 머리를 티팟으로 후려치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걸 생각해 보면 당연히 깨질 수밖에 없는 혼담이었다.

잠깐의 생각 후 체데프는 입을 열었다.

“따지기라도 하려고 온 건가?”

입 안에 고여 있던 시가의 알싸한 연기가 한숨처럼 희부옇게 흘러나왔다.

“따져요? 무얼?”

“네 아비에게 손을 댄 것.”

이자나는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따지기는요.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었던걸요.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속 시원했는데.”

그건 체데프가 예상하던 것과는 판이한 반응이라 그의 눈길이 자연히 돌아갔다. 거짓이 아닌지, 이자나는 정말로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버릇이 아주 고약하신 분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내게도 서슴지 않고 손을 올리셨죠. 그런 분이 남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호되게 얻어맞고 왔으니, 내 심정이 어땠겠어요?”

아무래도 이쪽 또한 부녀간의 남모를 고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봐야 체데프에겐 조금도 신경 쓸 게 아니었으므로 반응은 없었다. 이자나는 저를 정물 취급하듯 무심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짝 다가온 그녀가 체데프를 지그시 살펴보았다.

“애첩 잃고 폐인 됐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사실이었네요. 잘생긴 얼굴이 그새 다 상했네.”

“꺼져.”

체데프는 가차 없이 뇌까렸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니 예의 독한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긴 까닭이었다. 이 향을 맡으니 제가 아둔함에 빠져 저지른 실책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예민하게 돋아난 신경이 날카로운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리하여 그녀를 피해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려 주려고 온 거예요.”

“…….”

“우리 강아지가 간만에 아주 재밌는 소식을 물고 왔거든요.”

이자나는 반응 없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휘말았다.

“당신 애첩을 봤다던데?”

우뚝.

집무실을 가로지르던 체데프의 걸음이 멈추었다. 한 가닥의 빛줄기에 노출된 등이 딱딱하게 굳은 게 의복 바깥으로도 훤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윽고 체데프는 더듬더듬 몸을 돌렸다. 돌아오는 눈동자는 아주 오래간만에 초점이 잡힌 채였다.

“……뭐?”

“당신 애첩 말이에요.”

무기력하던 체데프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 그러자 집무실 내 공기 역시도 달라졌다. 뒤틀린 듯, 꺾인 듯 묘하게 서늘해졌다. 그는 터벅터벅, 너른 보폭으로 걸어와 이자나의 맞은편에 섰다. 우리 강아지. 이자나가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건 그녀의 애첩인 기사뿐이었다.

“어디서.”

체데프의 커다란 손이 이자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어디서 보았느냐고.”

절로 악 소리가 나올 만큼 강인한 악력이었다. 힘 조절도 안 하는지, 진심으로 뼈가 어긋나도 이상하지 않을 아귀힘이었다. 이자나는 그 고통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인내심이 바짝 자른 심지처럼 짧아진 체데프는 기다리지 않았다. 언제 무료했느냐는 듯 더없이 흉흉하게 돌변한 그가 이자나를 벽으로 밀쳤다.

“당장 말해!”

“윽! 이것 좀 놓고…….”

“네가, 아니, 네 기사가 라샤를 어떻게 알지?”

홉뜨인 동공 속에 광포한 기운이 넘실댔다. 한동안 그녀만 죽을 듯 찾아다닌 그로서는 눈이 뒤집히지 않고는 못 배길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제 품에만 끼고 살아온 라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급해진 마음은 또다시 못된 상상을 그려냈다. 혹 이들이 라샤가 사라진 것에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침착해진다면 이들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얼추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조급함에 눈이 먼 체데프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그저 라샤의 흔적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는 게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좀 놓으라니까요! 후, 아파라.”

이자나는 무자비한 손을 가까스로 떨쳐내며 외쳤다.

“그때 봤잖아요.”

“그때라니?”

“응접실 앞에서.”

체데프는 그녀가 언제를 일컫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녀가 약혼녀의 신분으로 공작저를 방문했던 날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응접실로 이동하려던 차에, 줄곧 침실에만 있던 라샤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당시 이자나와 라샤는 분명히 마주쳤다. 그리고, 이자나 뒤에 서 있던 그녀의 기사 또한.

“며칠 전에 일이 있어서 내 기사를 리페 백작가에 보냈어요. 거기서 봤다고 하더군요.”

“리페 백작가……?”

“이유는 나도 몰라요. 확실한 것도 아니구요. 복도를 지나가다가 언뜻 닮은 사람을 본 것 같다고만 말한지라. 그래도 당신에겐 이런 불확실한 정보 하나라도 간절할 것 같아서 전해 준 건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대하냐며 이자나가 툴툴거렸지만, 체데프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리페 백작가라니.

체데프가 수색 범위에 넣은 장소 중 결코 귀족가는 포함되지 않았다. 벨리움 제국 내에 그녀와 연이 닿은 귀족이라고는 오직 저 하나뿐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평민의 신분으로 갈 수 있는 곳만 뒤지기 바빴다.

하지만 그게 저만의 착각이라면? 그래서 지금 라샤가 그곳에서 무사히 몸을 보전하는 중이라면?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꼴이었다.

당장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 할지라도 정신없이 매달릴 만큼 그는 라샤에 관하여 목마른 상태였다. 몇 달 만에 접하게 된 그녀의 소식이 죽어있던 그의 심장을 마구 펌프질했다.

체데프는 몸을 돌려 곧장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영문을 몰라 바깥에서 대기하던 오닉스와 기사들은 대번 아연해졌다.

“각하?”

“어, 어디 가십니까!”

느닷없이 성난 기세로 뛰쳐나와 걸음을 바삐 옮기는 상관을 뒤따르며 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앞서던 체데프는 곧 홀에 다다르기 직전 멈춰 섰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주인의 행동 변화에 모두들 하나같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서 왠지 모를 조마조마한 분위기가 폴폴 풍겼다. 그건 애첩을 잃어버린 이후 정신이 반쯤 돈 이후부터 쭉 그래온 현상이지만, 집무실을 뛰쳐나온 지금이 유독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침내 기다리던 상관의 반응이 돌아왔다.

“황궁에 기별을 넣어.”

“예? 무슨 연유로……?”

“최대한 빨리 황실 마법사를 파견하라고.”

체데프는 힘줄이 불거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라샤가 그곳에 있는 게 사실이라면, 체데프는 그녀를 두 번 다시 놓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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