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1)

5장. As being

세실리온 공작가의 수석 보좌관, 오닉스 브라이언은 노크를 하기 전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래 봐야 결국 상관 앞에 서면 육식 짐승 앞에 선 토끼처럼 잔뜩 쪼그라들 게 뻔하지만. 그래도 그를 대면하는 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예전엔 이런 걱정 따위 없었다. 오닉스의 근심은 최근 들어 생긴 것이었다.

오닉스는 굳은 결심을 내세워 노크한 후 문고리를 돌렸다.

“각하.”

집무실 안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너구리굴이 따로 없었다. 간밤 대체 얼마나 피워댄 것인지 재떨이에는 새까만 재와 함께 나뒹구는 시가 꽁다리가 수두룩했다. 그 광경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오닉스는 연기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에 흠칫 놀랐다.

그는 도망치듯 얼른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서야 숨이 좀 트였다. 고개를 돌리니 깃펜을 쥔 손으로 눈자위를 꾹꾹 주무르는 상관이 보였다. 이제야 스며드는 빛에 드러나는 수려한 낯이 영 까칠했다. 오닉스는 상관의 퀭한 눈 밑 그늘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또 밤을 새우신 겁니까?”

상관의 애첩이 사라진 지 약 한 달이 되었다.

일주일은 잘 버티는가 싶던 상관은 이 주째부터 속절없이 휘청거리더니 한 달에 가까워진 지금은 볼품없는 꼴이 다 되었다. 특히나 감금이라도 당한 것처럼 스스로 이곳에 처박혀 격무에만 임하는 사태는 제법 심각한 편이었다.

“오전 회합 전까지 시간이 좀 있습니다. 그사이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십니까?”

“됐다.”

“하지만…….”

“어차피 잠들어 봤자 자꾸 깨서.”

체데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마른세수를 했다. 고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서랍에서 시가를 하나 빼 물었다. 이거라도 물지 않으면 정신이 정말 혼탁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요 며칠 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닉스에게 말한 대로,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건 불면과는 양상이 달랐다. 몸이 고단하고 정신이 피로하니 당연히 잠은 왔다. 그리하여 침대 위에서 잠이 들면, 어느 순간 깨어나 옆자리를 쓸어보고는 소스라쳤다.

차가워진 시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이다. 더럽혀진 손수건이 제게로 돌아온 후부터, 이제 다시는 그녀의 온기를 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시시각각으로 그의 안정을 좀먹어갔다.

그 때문에 잠들지 않았다. 잠들 수가 없었다. 자다가 깨어났을 때가 바로 그녀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라서.

오닉스가 얼른 다가와 시가에 불을 붙여 주었다. 체데프는 그 독한 향을 폐부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저 밑바닥까지 푹 가라앉은 이성은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다. 라샤가 제 곁으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주 소름 끼치는 상상이 현실감을 가진 이후부터 내내 이 상태였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그녀가 사라진 당일만 하더라도, 체데프는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랐다. 권태로운 관계에서 스며 나온 익숙함이 위기감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런 그를 벌주듯 라샤의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허름한 빈민촌, 수도원, 그 외에 여객들이 주로 머무는 외곽을 포함하여 평민이 의탁할 만한 곳은 샅샅이 뒤졌다. 혹 일찍이 영지로 내려갔을 것을 고려하여 각 영주에게 공문을 돌린 지도 오래였다. 그러나 여전히 라샤에 관한 건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이곳에 있긴 한 건지. 그런 건 다 됐으니 무사한지라도 알고 싶었다. 저를 보며 말갛게 웃던 그 어여쁜 얼굴이 끔찍한 일로 울고 있는 건 아닐지……. 제 손에 쥐어졌던 손수건만 떠올리면 가슴이 가뭄인 양 바짝바짝 말라 갔다.

체데프는 이마를 감싸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닉스는 쩔쩔매면서도 동시에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그러게 곁에 있을 때 잘해 주지, 떠나고 나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람. 오늘도 여전히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말할 수 없는 본심은 돌연히 들려온 노크 소리에 날름 삼켜졌다.

“각하.”

다급히 문이 열리며 베르히네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여태껏 나른하게 굴던 체데프가 그녀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라샤를 찾았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대신 라샤 님께서 사라지신 그날, 접촉했던 자를 찾았습니다.”

체데프는 지체하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베르히네가 그를 이끈 곳은 광활한 저택의 지하실이었다. 주로 가문과 관련된 죄인을 심문하거나 가두기 위하여 사용되는 곳이었다. 고문실로 사용되는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서니 무릎 꿇린 남자 하나가 덜덜 떨고 있었다. 추레한 몰골의 낯선 이를 본 체데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라샤 님께서 저택을 나가신 그날, 소매치기를 당하신 모양입니다. 그 소매치기범이 바로 이자고요.”

이미 한차례 고문을 당했는지 맨몸에 속옷 하나만 간신히 걸친 남자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입에 물려놓은 재갈 때문에 웁웁대는 뭉친 신음만 터뜨렸다. 베르히네는 그 처량하고 눈살 찌푸려지는 모양새를 앞에 둔 채 깍듯하게 보고했다.

“수색하던 중 만드리안 항구 근처 골동품점에 세실리온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보석이 입수됐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이자가 라샤 님께서 사라지신 그날, 그곳에 방문하여 넘긴 것이더군요. 빈민촌 출신의 소매치기범이었습니다. 라샤 님께서 소지하신 가방을 훔친 모양인데, 아무래도 손수건 또한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단순히 소매치기만 당한 거라면, 라샤 님께서는 무사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그 희박한 가능성에도 정신이 조금쯤 맑아지는 걸 보니, 제가 정말 암담함의 수렁에 빠지긴 했던 모양이었다. 체데프는 적발을 쓸어올리며 덜덜 떠는 남자를 응시했다.

“라샤의 행방에 대한 건.”

“아직입니다.”

“내가 직접 하지.”

체데프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입에 물린 재갈을 빼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아, 아무것도 모릅, 컥!”

입이 자유로워지자 애타게 빌기 시작한 남자는 목숨을 제대로 구걸하기도 전에 구석에 처박혔다. 자비 없이 뺨을 후려치는 손길로 인해서였다. 체데프는 그런 남자의 짧은 머리칼을 쥐어 억지로 일으켰다. 힘이 어찌나 센지 고작 한 대 후려 맞은 건데도 입가가 터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두 발로 무사히 걸어서 나가고 싶다면.”

“흐으으, 흐으, 사, 살…….”

“지금부터 혀를 잘 놀려야 할 거다.”

이 개 같은 자식 때문에 라샤가 큰일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걸 떠올리면 당장 휘둘러 패도 모자랐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놈이 감쪽같이 증발해 버린 라샤의 마지막 행방을 알 가능성이 가장 큰 자였으니 말이다.

“네게 그날 소매치기를 당했던 여자는 어디로 갔지?”

“모, 모릅니다. 몰라요. 가방을 훔치자마자 바로 도망쳤는데 그걸, 콜록, 어떻, 컥!”

커다란 손바닥이 뺨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분명 따귀를 후려친 건데도 그 소리는 찰싹, 이 아니라 퍽, 에 가까웠다. 남자는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와중에, 신이 내려 준 동아줄처럼 순간 스쳐 지나간 기억을 떠올렸다.

“아, 표, 표를 구매했었어요!”

“표?”

“스, 헉, 승선표를…….”

승선표. 그러고 보니 이자가 보석을 내다 판 것도 항구 근처의 골동품점이라고 했었다. 라샤가 항구로 향했던 건, 아예 이 나라를 뜨기 위해서였나. 체데프는 입 안쪽 살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가 놓으며 빠르게 뇌까렸다.

“어디로 가는 표였지?”

남자는 눈이 빠지도록 머리를 굴렸다. 안압이 뜨겁게 상승하고 머리통 여기저기가 쑤셔오는 게, 한 대라도 더 맞았다가는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간절함을 담아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머지않아 남자는 승선표에 조그맣게 적혀 있던 제국의 이름을 가까스로 상기해냈다.

“티, 티그리스였습니다!”

티그리스.

이곳, 벨리움의 바다 건너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였다. 라샤가 그곳행 승선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만약 소매치기를 당한 이후 곧장 그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났다면 지금까지 그토록 뒤지고 들쑤셨는데도 머리카락 한 터럭 보이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체데프는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는 듯 사내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발을 돌려 고문실을 빠져나갔다. 제 뒤를 따르는 보좌관의 존재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대략적인 업무 일정이 어디까지 잡힌 상태지?”

오닉스가 빠르게 답했다.

“세부적으로 정해진 건 한 달 정도입니다.”

“오늘부터 사흘 내에 전부 처리할 테니 무리가 없도록 조정해.”

“예? 사, 사흘요?”

“사흘 후에 곧바로 티그리스로 간다.”

오닉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닉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상관을 서둘러 쫓으며 다급히 설명했다.

“세부적으로만 한 달인 것이지, 적어도 세 달간은 일정이 채워져 있어 당장 조율은 버겁습니다, 각하!”

애타는 보좌관의 설득에도 체데프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곳에 라샤가 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얻은 이상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기실, 사흘의 유예 기간을 주는 것도 오닉스에게는 굉장한 아량을 베푸는 셈이었다. 그가 그나마 공작으로서의 직무를 잊지 않아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껴야 할 만큼 큰 배려심이었다.

며칠간의 상관을 봐왔기에 그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오닉스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티그리스가 무슨 옆 동네도 아니고. 왕복하는 시간에 더하여 그곳에서 라샤를 찾아 헤매는 기간까지. 넉넉잡아 두 달에서 세 달의 시간이 소요될 게 자명했다.

“결혼식은 어떻게 하시고요!”

그 말에 거침없이 나아가던 체데프가 우뚝 멈춰 섰다. 오닉스는 혹 변명이 먹힌 건가 싶어 조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시지 않습니까? 두 달 뒤에 당장 결혼식입니다. 로베니 후작께서 직접 신전에서 점지해 준 길일로 잡은 만큼…….”

“미뤄.”

“로베니 후작께는 무어라 말씀을 드리고요! 분명 난리를 칠,”

오닉스는 돌연 제게로 돌아온 흉흉한 안광에 말을 하다 말고 힉,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말하게 할 셈인가?”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저를 갈가리 찢어 버릴 기세라서 그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번복은 없다는 듯 체데프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엄중하게 굳은 미간은, 지금 당장 티그리스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을 꾹 참느라 힘든 것처럼 보였다.

오닉스를 생지옥으로 밀어 넣은 그날 밤.

체데프는 오래간만에 주인 잃은 침실을 찾았다.

월광을 머금어 시린 느낌을 내는 시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이제는 저조차도 잘 눕지 않아 사람의 온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둑하게 물든 체데프의 망막은 현실이 아닌 그 너머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침대 위에 누운 라샤가 저를 올려다보던 순간이었다. 그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주면 라샤는 수줍게 웃고는 했다. 당장 입을 맞추고 싶어질 만큼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두 달 뒤에 당장 결혼식입니다.’

오늘 일정이 진행되는 내내, 오닉스는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로베니 후작가와의 결합으로 세실리온 공작가가 얻을 이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체데프는 라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로베니 후작가와의 혼담에 임하는 태도는 여타의 사업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사무적이었다.

그가 아무리 낮고 낮은 존재인 라샤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수그린다지만, 태어나길 귀족인 건 변함이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세상에서 사랑 없는 결혼은 발에 차일 만큼 흔했으며, 애당초 그들에게 결혼이란 사랑의 결실보다야 ‘장사’라고 보는 게 옳았다.

로베니 후작가는 본래 이 바닥에서 큰 두각을 보이는 가문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이 가진 광산에서 희귀한 광물이 채굴되기 시작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땅에서 나온 광물은 여타의 것들에 비하여 마법 흡수력이 빨라 굉장한 이점을 가진 것이었다. 변변찮던 가문의 이름은 광산 하나로 우뚝 올라섰으며 로베니 영애는 금세 일등 신붓감이 되었다.

체데프가 그들과 손을 잡은 건 그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을 신식무기인 총과 결합시켜 마법적인 무기로 진화시킬 수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이곳, 벨리움의 군사력은 타 제국에 비하여 월등히 높아진다.

왕당파의 대표 격인 세실리온 공작가는 그만큼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으며 더하여 이전까지만 해도 중립파인 로베니 후작가를 왕당파로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정치적 기회이기도 했다.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자 나라의 중추 역할을 맡는 이로서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이득이 많은 혼담이며 장사였다.

‘오랫동안 곁에 둔 애첩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혼담에 응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아끼는 애첩이 있어서. 되도록 나에게 신경 안 쓸 꼭두각시 남편을 맞이하고 싶어요.’

로베니 후작 영애, 이자나 로베니가 제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는 걸 잘 알아서였다.

정숙한 외양과 바른 몸가짐 뒤에 가려진 이면은 제법 문란한 편인 여자였다. 자제들 사이의 난잡한 사교모임을 주관하며 노는 게 취미라고 하였던가. 그를 증명하듯 이자나에게서는 늘 역겹고 지독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굳이 가까이하지 않아도, 한 공간에 있다 보면 자연히 냄새가 밸 정도였다. 그걸 맡을 때마다 체데프는 라샤의 은은한 체향이 간절해지고는 했다.

그녀가 일컬은 애첩은 바로 그녀의 곁을 24시간 지키는 기사였다. 이자나는 제 애첩이라는 기사와 참 재밌게도 놀았다. 흐르는 세월 동안 서로 좋아죽기 바빴던 라샤와 그와는 달리, 그들은 이따금 티격태격하였다. 가끔 이자나가 제게 찰싹 달라붙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행동은 모두 애첩이라는 기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굳이 끼고 싶지도 않고, 엮이고 싶지도 않아서 체데프는 늘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기실 사랑이 부재한 결혼이니만큼, 종종 만나 관계를 쌓는 데에 공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로베니 영애와 주기적으로 자리를 가지게 된 건 이 역시도 사업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로베니 후작은 영리한 건지, 아니면 그저 얻어걸린 것인지 제 여식을 통하여 공작가와 결탁하려는 사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니 체데프와 로베니 영애가 가진 자리는 공적 대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부상조하는 걸로 하죠. 어때요?’

그렇지 않아도 미혼의 가주로서, 가문의 가신과 원로들에 의하여 꾸준히 혼담 압박을 받던 차였다. 명백한 상하 관계로 눈치를 보느라 선대 공작 부처보다는 덜하다지만, 그들 역시 라샤를 탐탁지 않아 함은 분명했다.

이 혼담에 응하면 그들은 더 이상 결혼과 관련하여 라샤를 함부로 논하거나 혹 애꿎은 일은 만드는 법이 없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임했다. 그에게 있어서 결혼은 단지 라샤와의 안온한 생활을 위한 도구, 혹은 아늑한 미래를 위한 청사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체데프에게 결혼이 한순간에 그런 의미로 전락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걸 정론처럼 여기고 당연시하는 환경과 세상에서 자랐으니까. 체데프의 부모조차 사랑 없이 이뤄진 결합이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결혼이란 라샤와 올리는 게 아니라면 하등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 나는 뭐예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샤는 그 일로 상처를 받았다.

체데프는 그녀가 제 결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논하자면, 뭐든 이해해 줄 거라는 권태에서 오는 익숙함이기도 했고 또 그녀에게 굳이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한때는 그에게도 ‘결혼’의 의미가 다채롭고 아름답게 정의되던 시기가 있긴 하였다. 바로, 라샤와의 결혼을 꿈꾸었을 때였다. 그녀를 온전히 제 부인으로, 제 가족으로 삼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행복에 겨운 일이었다. 체데프는 실제로 그 일을 행하려고도 하였다.

그러한 각오로부터 말미암아 벌어진, 끔찍한 과거의 일이 아니었다면.

체데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지금은 타계한 전 공작 부처가 라샤를 몰래 노예상에 팔아 버리려 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리 언질을 받고 주의를 기울이던 체데프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라샤는 영락없이 노예로 타 제국에 팔릴 뻔하였다.

그 사건으로 크게 놀란 라샤는 며칠간 침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후 돌아온 체데프가 그녀를 며칠간 안고 보듬어 주고서야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라샤는 결혼 얘기만 나오면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듯했다. 그녀가 ‘결혼’에 관해 떠올릴 때마다 불상사와 같던 그날의 사건까지 상기하는 듯하여 체데프는 갈수록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사이의 결혼 역시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함께한 세월이 긴 만큼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다.

너무도 잘 알아서, 쉽게 회피하고 또 쉽게 간과해 버린 것 역시도 무척 많았다.

‘결혼 얘기 들었어요.’

바로 이 침대에 앉아서 라샤는 그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땐 사위가 어두워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라샤의 표정이 그렇게나 어두웠었다. 당시엔 더 말을 잇는 게 불필요한 소모가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라샤가 결혼을 일종의 수단으로 여기는 제 세상의 섭리를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것이 ‘의례적인 결합’일 뿐이라고 이미 말한 바였으니.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다 알아줄 거라고.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니, 그러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수단에 치중되어 목적을 잃어버린 꼴이 따로 없었다. 결혼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과,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엔 제 심정을 이해해 줄 거라는 아둔한 믿음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라샤.”

늘 당연하게만 여기던 대답 대신, 공허한 적막이 돌아왔다.

부르면 한결같이 대답을 해 주던 그녀는 이제 제 곁에 없었다. 그때마다 체데프는 속에 깊고 짙은 골이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로 고이는 것은 이제야 깨달은 소중함에 대한 애처로움과 안타까움 뿐.

회한으로 뭉친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이동했다.

그 끝에는 다름이 아니라, 라샤가 사라지기 전날 밤 입었던 네글리제가 놓여 있었다. 체데프가 격정을 이기지 못해 찢어 버린 그것, 말이다. 체데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심코 코로 가져다 댔다. 시가를 피울 때처럼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자 폐부로 익히 잘 아는 향이 미약하게 스며들었다.

라샤의 체향이었다.

그는 그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버린 네글리제를 들고 그것을 뒤집어쓸 기세로 코를 처박은 채 킁킁대는 꼴은 누가 볼까 두려울 만큼 가관이었다. 그럼에도 체데프는 상관없었다. 한 달 만에 느낀 라샤의 존재감이 바짝바짝 마르기만 하던 그의 속에 단비를 뿌렸다.

곧 체데프는 아랫도리로 피가 묵직하게 쏠림을 인지했다. 그녀의 체취가 은근하게 감도는 네글리제의 냄새를 맡으며 급히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천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음모 사이로 성성해진 페니스의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는 병적일 만큼 내음을 찾아 헤매며 기둥을 감싸 쥐었다. 라샤의 한 손으로는 다 감싸지지도 않던 좆이 그의 손바닥에 휘감겼다.

“하아…….”

한동안 싸늘한 기운만 여실하던 침실에 후끈한 공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혈관 돋친 기둥을 쓸어내렸다가 다시 귀두의 홈이 움푹 모일 만큼 위로 당길 때면 끈적한 선액이 방울방울 맺혔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훔쳐 골고루 펴 바르는 모양새가 퍽 능숙했다. 그간 라샤의 안에 들어가기 전에 매일같이 반복했던 행동이었으므로 어설픈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살덩이를 자극하는 손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뒷골이 알알하게 당기며 아랫배가 점차 뻑적지근해졌다. 그는 격렬하게 용두질을 하며 네글리제에 남은 그녀의 잔향을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라샤의 아랫구멍에 입술을 처박고 흘러나온 음액을 흠씬 들이켜던 모습과 흡사했다. 무아경으로 흔들리는 손길을 따라 검붉은 페니스가 파도치듯 꺼떡거렸다.

“후, 라샤, 읏……!”

사내 특유의 저음. 그것이 젖은 채로 방 안을 후덥지근하게 물들였다.

체데프는 라샤와의 섹스를 기억해냈다. 그녀를 이 침대 위에 눕히고, 외음부가 훤히 드러나도록 허벅지를 벌리고, 귀두로 회음을 쓱 긁어 주는 상상을 했다. 실제로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라샤는 얼굴을 터질 듯 붉히며 헐떡거렸었다. 미약하게 떨리던 속눈썹의 가녀린 몸짓 하나하나까지 기억해냈다.

향을 따라 뇌리에 지펴진 과거의 잔상이 그의 성감을 미친 듯이 고조시켰다.

곧 기억은 그녀가 제 좆을 입으로 버겁게 문 채 물기 글썽한 눈을 들어 올리던 때로 회귀했다. 고작 귀두만 간신히 물어 우물대는데도 온몸의 신경이 쭈뼛하게 설 만큼 흥분됐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새 말간 액에 휘감긴 흉포한 살덩이는 압박하여 흔들수록 쩍쩍거리며 젖은 마찰음을 냈다. 그것마저도 관계를 맺을 때의 체감을 상기시켰다.

손은 더없이 분주하게 놀리는 데에 반하여 그의 낯은 사제의 것처럼 정결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시야까지 검게 물들인 채로 라샤를 더듬더듬 그리고 있었다. 제 것을 힘겨이 받아먹을 때의 표정, 뿌리 끝까지 밀어 넣어 자궁구를 간지럽혀 줄 때의 반응, 제 목을 껴안으며 아래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던 교태, 사랑한다고 은밀히 속삭이던…….

“큿!”

폐부를 뜨겁게 달군 잔향이 이윽고 그녀의 속삭임마저도 그럴듯하게 재현했을 때 체데프는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성감을 발산했다. 큼지막한 손에 압박당하며 질금대던 귀두 구멍이 벌름대더니 걸쭉한 백탁액을 쭉쭉 흩뿌려댔다. 밤꽃향 비스무리한 비린 내음이 물큰하게 퍼졌다.

체데프는 파정에 다다랐음에도 계속해서 성기를 자극했다. 그 손길의 증거처럼, 단단하게 곧추선 페니스는 여전히 발기가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 후로 침실에는 한동안 헉헉대는 수컷 특유의 신음만이 울렸다. 체데프는 자위에 임하는 내내 라샤가 입었던 네글리제를 절대 놓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구명줄처럼 그것을 쥔 채 연신 정액을 꿀럭꿀럭 토해냈다.

“헉, 하아…….”

한차례의 수음을 마쳤을 때 흉곽이 아파질 만큼 숨이 벅찼다. 마지막 사정은 침대 밑에 무릎을 꿇은 채로 진행이 됐다. 바닥까지 내려오는 침대보를 희뿌연 정액으로 축축하게 적신 체데프는 그대로 침대에 얼굴을 처박았다. 발화하여 그대로 몸을 꿀꺽 삼킬 것만 같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천천히,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이 너른 공간에 오직 저 혼자만 있다는 사실이 유독 께름칙하고 견디기 버겁게 다가왔다. 마치 벼랑 끝으로 내쳐져 고독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 노도와도 같은 쾌락에 잠겼다가 빠져나온 증거처럼, 목덜미에 배긴 식은땀과 축축한 손바닥이 왠지 모를 소름을 자아냈다.

열기에 흠뻑 빠졌기 때문일까, 직후 다가오는 서늘함이 그리도 오싹할 수가 없었다. 체데프는 시트에 박아둔 고개를 슬쩍 틀었다. 정면으로 비치는 전경에 라샤가 이불을 둘둘 만 채 누워 있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런, 기분이었나…….

정사를 마친 뒤, 홀로 이 침대에 앉아 저를 바라보던 라샤의 심정이.

가끔 시가를 피우다가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의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얼추 짐작이 갔다. 멀쩡한 손으로 네글리제를 꽉 틀어쥐는 체데프의 낯빛은 외롭고 쓸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그때의 라샤처럼.

* * *

“이제 10주쯤 되었군요.”

의사의 말에 라샤는 멍하니 제 배를 어루만졌다.

10주, 곱씹을수록 의미가 바뀌는 시간이다.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싶은데, 또 어떻게 보면 벌써 그 정도나 됐나 싶은 감상을 자아내서였다. 뭐가 되었든, 내리막길처럼 낙하하기만 하던 제 부정적인 감정이 아기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적잖이 들었다.

의사는 안정기는 지났다지만 혹시 모르니 몸조심할 것과 그 밖에 당부해야 할 것 등을 알려 주고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라샤는 멍하니 배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판판했다. 의사의 말로는 4개월에 다다를 무렵부터 조금씩 배가 부를 것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할 거지?”

그녀가 진찰을 받는 동안, 나름 오라비랍시고 등장하여 머리맡을 지키던 카임이 불쑥 물었다. 라샤가 고개를 들었다. 카임은 그녀와 눈을 맞추는 대신, 그녀의 손이 얹어진 배 쪽을 눈짓했다.

“낳을 셈인가?”

보듬어 주는 것처럼 배를 어루만지던 라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내내 서 있던 카임은 조금 전까지 의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착석하며 덧붙였다.

“공작의 아이라며.”

카임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체데프의 곁에 있을 때도 사생아라는 건 이미 확실시된 바였다. 이제 그와 이별까지 했으니 아기는 친부의 존재마저도 불분명해진 것이었다.

“…지우는 게 나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그래. 하나 내 의견이 어떤들 무슨 상관이겠나. 네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

카임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내리까는 라샤를 가만 바라보았다.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기실 카임은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마음으로, 세실리온 공작가에 기별을 넣을까 몇 번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 갈등이 오죽했으면 한밤중 세실리온 공작이 이곳으로 쳐들어와 저를 죽이는 넌더리 나는 악몽까지 꾸었다.

하지만 조금 아리송했다.

이 고민이 한 달 넘도록 이어진 건 세실리온 공작이 아직까지 라샤가 이곳으로 온 덜미를 잡지 못했다는 것과 같았다. 그게 정녕 ‘못한’ 걸까? 권세 높은 공작 가문의 정보력으로 보건대 결코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며칠 전 세실리온 공작은 티그리스로 떠났다고 들었다. 제국 간 절충 교역 협상 문제 때문이라고 하였다. 애첩을 잃고 정신없이 수도를 들쑤시던 자의 행보라기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카임은 어쩌면, 라샤의 말대로 그들은 정말 합의된 이별을 하였고 체데프가 수도를 뒤지던 건 다른 용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나서서 라샤의 소재지를 밝히는 게 긁어 부스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연유로 카임은 공작저로 기별을 넣자는 마음을 곱게 접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몇 년이나 쌓아온 상대방에게서 등을 돌려 남이 된 게 맞다면, 다음 문제는 라샤의 배 속에 있는 아기였다.

아기는 변수가 큰 존재였다. 척 보기에도 약해 보이는 라샤의 건강도 그러했지만, 이후에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된 공작가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문제도 있었다. 최악은 아기만 홀라당 뺏기는 것이었는데, 이미 이 바닥에 사생아랍시고 아이만 빼앗아가는 경우가 수두룩해서 결코 기우는 아닐 터였다.

라샤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기는 낳을 거예요.”

잠시 주저한 건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한 게 아니라, 카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임신을 알게 된 이후로 이 아기를 지우겠단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라샤는 멈추어 있던 손을 움직여 배를 둥글게 어루만졌다. 고작 하나 챙겨온 손수건마저도 소매치기를 당하여 잃어버렸다. 이제, 체데프와 연결되었었다는 증표는 오직 이 생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미련이나 다를 바 없음을 잘 안다. 그런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것도.

하지만 마음이 그런 걸 어떠한가.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음에도 그의 부재는 소름 끼치도록 실감이 났다.

자다가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푸릇푸릇한 풍경을 내다볼 때, 형형색색의 과일을 볼 때, 어쩌다가 배앓이를 할 때, 하물며 잠이 들기 전에도.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감는 순간까지 온통 체데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세월을 증명하듯 그녀에게 주어진 일각 한 겹 한 겹에 그의 흔적이 잔향처럼 묻어났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카임이 별안간 운을 떼었다.

“세실리온 공작이 널 그렇게 아꼈으면 부인으로 두고 싶었을 만도 한데. ……결혼하자고는 안 했나?”

지체 높은 귀족 나리가 애첩 하나둘씩 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본디 애첩이란 언제 끈 떨어질 처지가 될지 모르니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체데프가 라샤를 아끼는 방식은, 질리면 언제든 버리는 애첩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떠도는 소문과 직접 보아온 태도로 말미암아 귀족들이 더 잘 아는 바였다.

그리고 라샤의 대답 또한 그 생각에 힘을 실었다. 제가 평민이 아님을 알고 있고, 리페 백작이 일찍이 작고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 걸 보면, 체데프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 주었던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애첩과 그 애정의 소유권을 지닌 주인이라기보다는 온전한 연인에 가까웠다. 그렇게나 예쁘게 사랑을 키워온 것이라면 결혼을 꿈꿀 법도 하지 않은가.

“……하셨어요, 결혼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라샤의 안색이 어두워져서 카임은 저절로 입이 닫혔다.

라샤는 오래전의 과거를 들추었다. 청혼의 발단은 사소했다. 여느 날처럼 체데프와 밤새 뒹굴고 여명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새벽 무렵이었다. 어슴푸레하고, 조용하며, 그래서 더욱 은밀한 시각이었다.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품에 안긴 라샤의 머리칼을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었다.

‘평생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군.’

‘…….’

‘평생 이럴까?’

‘어떻게요?’

‘결혼하면 되지.’

‘…….’

‘결혼하자, 라샤.’

마치 봄바람 같은 말이었다. 나긋나긋하게 다가와 잔잔히 부딪혀 마음을 살랑이게 하는 것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때 라샤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영원히 함께’를 꿈꾸던 건 그녀도 매한가지였다. 잠시 눈을 가물거리다가 말없이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청혼에 대한 그녀의 수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결심이 전 공작 부부에게 발각되면서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당시에 벌어진 사건으로 그녀가 큰 상처를 받은 건 맞다. 하지만 라샤가 그때 무엇보다도 신경 쓰인 것은, 저를 찾자마자 안도하던 체데프의 낯이었다. 허겁지겁 침실로 뛰어와 저를 확인하고 끌어안는 몸짓은 무척이나 조급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제 존재를 확인하듯 정신없이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는 그는 십년감수한 얼굴이었다.

그때, 라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대를 이기고 결혼하려면 앞으로 체데프가 이런 심정을 겪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겠구나. 이러한 일이 고작 한 번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는 그때마다 이렇게 힘들어할 테고, 고단해할 테고, ……지쳐갈 텐데.

그걸 그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우리는? 우리의 관계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지금처럼, 그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라샤는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좋았다. 저를 감싸 줄 그의 사랑이 온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는 리페 백작이 타계하기도 전이라서 그녀에겐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런 제 맘을 알아챈 듯 체데프는 결혼을 운운하는 빈도가 점차 적어지더니 끝내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당시엔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차츰차츰 키워온 애정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으리라고 여겼다.

설마 권태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찾아올 줄은…….

곁에 앉은 카임이 별안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

“울 정도로…… 민감한 질문이었다면, 사과하지.”

라샤는 그제야 제가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임은 우는 여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허둥지둥거리다가 얼른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라샤가 건네받은 그것으로 눈물을 대강 훔치는 사이, 머리를 긁적인 카임이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입적도 한번 생각해 보지 그래.”

“입적이요?”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너도 차라리 리페의 이름을 이어받는 게 좋지 않겠나? 평민으로서 아기를 키우는 게 여간 벅찬 일이 아닐 터이니.”

라샤에게는 썩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 증거처럼 그녀는 물기 젖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마땅치 않게 여기시는 줄 알았는데.”

첫날부터 시작하여 임신이 밝혀졌을 때도 길길이 날뛰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기억 속에 훤했다. 그녀가 무얼 꼬집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한 카임은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그건 세실리온 공작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와 난동을 부릴까 무섭, 아니, 걱정돼서 그런 거고.”

“…….”

“그보다 널 보면 자꾸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서 말이지.”

턱을 어루만지며 읊조리는 카임의 얼굴이 우중충한 빛을 띠었다.

“난 어머니께 그다지 좋은 아들은 아니었거든. 네가 이렇게 나타난 이상 널 누이로 대해 주는 것이 못다 한 효은을 행하는 방법 같기도 하고…….”

그는 제가 한 말이 쑥스럽기라도 했는지 어쨌든 한번 생각해 보라며 던지듯이 내뱉고는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라샤는 그 자취를 좇다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처음에는 조금 까칠하고 쌀쌀맞다고 여겼던 이부 오라비는 생각보다 정이 많은 성정이었다. 오히려 그 본심을 숨기려고 퉁명스레 구는 것에 가까웠다. 함께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조금 지났지만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입적…….’

카임이 던지듯 내밀고 간 단어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저었다.

이 고민을 오래전, 결혼 운운할 때 했으면 차라리 좀 나았을 것을. 라샤가 진즉 백작가에 입적되었다면 체데프와의 결혼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당시엔 전 리페 백작이 살아 있었기에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령 전 리페 백작이 작고한 상태였더라도 라샤는 선뜻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귀족이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하여 무슨 짓까지 저지르는지는, 체데프의 부모를 보며 똑똑히 깨우친 바였다. 혹 리페 백작가로 향했다가 체데프와 영영 헤어지게 될지도 모를 위험성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떠한 경우로든지 그와 이별하는 빌미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환경 속에서 라샤의 염원은 단순하고 깔끔했다.

체데프의 사랑을 받으며 그의 곁에 있는 것. 단지 그것 하나뿐이면 모든 걸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끝이 이별이었던 걸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 버릴 관계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헌신과 맹목을 다해 바친 사랑이 결국엔 무덤처럼 버려진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씁쓸했다.

이별을 맞닥뜨린 지금, 입적을 하는 게 그녀의 형편에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아니, 있는 게 아니라 필히 그럴 터였다. 가문에 입적되어 귀족의 이름을 얻게 된다면 삶은 윤택하게 변할 테니까. 이제 홑몸도 아니고,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자꾸 망설임이 드는 건…… 그의 곁에서 기껏 벗어났는데 다시 그가 있는 세상으로 발을 들이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생활은 두말할 필요 없이 나아지겠지만 체데프를 조우하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왜 피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결혼하여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체데프를 볼 자신도 없었다. 애초 그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 이 땅마저도 떠나려고 했던 게 아닌가.

라샤는 복합적인 생각을 애써 밀어내고 배를 어루만졌다.

지금은…….

지금은 아기를 위한 안정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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