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4장. Preciousness

라샤는 조금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눈꺼풀 사이를 비집어 파고드는 햇살이 기상을 억지로 재촉했다. 수마에 반쯤 잠겨 있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눈을 뜨니 가물가물한 시야로 보이는 천장이 낯설었다.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킨 라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후에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지나간 며칠의 나날을 반추했다. 그러고서야 체데프의 요새에서 벗어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일주일.

굉장히 오래 보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7일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니.

새삼스러운 사랑의 흔적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라샤는 체데프의 생각으로 깊게 빠지지 않기 위해 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지내던 침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늑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간이 시야에 스며들었다.

이윽고 라샤의 눈은 벽에 걸린, 리페 백작가의 문양이 찍힌 태피스트리에 고정되었다.

공작저를 나설 때만 해도 이곳으로 올 생각은 없었는데. 일주일 전, 그녀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라샤는 이별을 결심하고 막 공작저를 빠져나온 때를 상기했다.

* * *

라샤는 공작저에서 일하던 마구간지기가 제 친부가 아님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남들의 이목이 사라진 밤만 되면 손을 꼭 붙들고 이렇게 말한 까닭이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체 높으신 분의 딸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제가 데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사정?’

‘예. 그러니 나중에 꼭 그분을 찾아가셔야 해요. 하지만 지금은 안됩니다.’

‘지금은 왜 안 되는데요?’

‘지금 가시면 아가씨의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말을 잘 기억하고만 계세요. 아시겠지요?’

그런 그가 어린 라샤의 손에 쥐여 준 것이 하나 있었다. 붉은 루비로 장식된 은반지였다. 라샤가 침실에서 빠져나와 마구간으로 향한 건 그 뒤편에 있는 사용인 전용 출구를 사용하기 위함이지만, 앞서 그 반지를 챙기려는 이유도 있었다. 반지는 체데프와 몇 년을 함께 써 온 침실이 아닌 마구간지기의 전용 숙소에 숨겨놓은 참이었다.

라샤가 그것을 챙긴 건 순전히 보험이었다. 생전 처음 홀로 세상밖에 나서는 제게 어떤 위험이 부닥쳐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일종의 위험 대비용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체데프의 요새에서 빠져나온 라샤가 향한 곳은 항구였다.

처음에는 이 제국을 뜰 마음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같은 땅을 밟고 있노라면 체데프가 반드시 저를 찾아내고 말리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생각에 대한 수긍과 부정은 반반씩 존재했다. 헤어지자는 제 말에 꿈쩍도 하지 않던 체데프를 떠올리면 그럴 것도 같았지만, 이미 제게 마음이 식은 그가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 비참한 의심도 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라샤는 끝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 머나먼 이국의 땅까지 가려는 이유는, 자신이 체데프와 같은 나라에 있을 자신이 없어서라는 걸.

그는 제국의 유명인사이니만큼 어디를 간다 해도 소식이 전해져 올 것이다. 세실리온 공작인 그와 로베니 영애의 결혼 소식, 그들이 낳은 아이의 소식, 그 외에도……. 제가 사라졌음에도 평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그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니 그것이 암담한 현실이 되어 버리기 전에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라샤의 계획은 타 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기도 전에 틀어졌다. 구매한 승선표의 배를 찾기 위해 헤매던 중 다가온 사내로부터였다.

“어디로 가세요?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요. 도와드릴게요.”

라샤는 순진하게 그 호의를 믿었다. 그리하여 승선표에 적힌 배와 향하는 제국의 이름을 막 입에 올렸을 때였다.

“꺅!”

승선표를 보는 것처럼 몸을 가까이 붙인 사내가 순식간에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라샤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원체 몸이 약한 데다가 고된 간밤의 여파로 전신이 날연하여 라샤는 그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였다.

한참을 뒤쫓다 헉헉대며 무릎을 짚었을 때 소매치기범은 이미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후였다. 순간 꿈인가 싶었다. 제게 부닥친 일이 현실감이 없어서였다. 그 현실감은 텅 빈 두 손을 보며 차츰 돌아왔다.

큰마음을 먹고 챙겨온 것들을 한순간의 부주의로 모조리 잃어버렸다. 허망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주한 항만의 소음이 귀를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라샤는 그 순간,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던 햇빛이 일순 너무도 강렬하고 따갑게 느껴졌다. 그건, 그간 지내온 체데프의 그늘이 얼마나 아늑했는가를 실감하게 한 까닭이었다. 그늘 안에서 맞이하는 햇살은 따스하고 정겨우나 그늘 없이 맞이하는 햇살은 매섭고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라샤는 진이 쭉 빠지는 기분에 잠시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럴 때가 아님을 아는데도, 가방 안에 담긴 보석보다 안쪽 깊숙이 숨겨둔 손수건이 더 아까웠다. 그건 체데프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하고 소중한 것이었으니…….

오래지 않아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곧 배가 출발한다는 신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샤는 제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들른 잡화점에서 작은 헝겊 주머니를 샀다. 반지를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반지와 함께 보석과 맞교환한 돈 중 소량을 함께 넣어두었다. 다행히 그건 지금 라샤의 로브 안쪽에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걸로 타 제국에서 생활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라샤는 제 손에 들린 승선표를 망연히 응시하다가 이내 꾹 그러쥐었다. 그녀는 승선하는 대신 지나가는 삯마차를 붙잡았다. 다가가기 전 로브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써 얼굴을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리페 백작가로 가 주세요.”

마부가 삯을 건네받고는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라샤는 조금씩 움직이는 차창 너머를 응시하다가, 품에서 빼낸 반지를 내려보았다.

루비의 과한 광채에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 * *

그녀의 아비 역할을 해 주던 마구간지기는 약 3년 전에 이생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 그간 속에만 꾹 담아둔 이야기를 라샤에게 풀어놓았다.

‘아가씨는 제가 예전에 모시던 리페 백작 부인의 따님이십니다. 다만, 리페 백작님과의 사이에서 난 정통이 아니라 부인께서 아끼시던 이국의 음유시인의 씨로 난…….’

즉, 사생아라는 뜻이었다.

마구간지기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남은 사정을 털어놨다.

리페 백작 부처는 사이가 다소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리페 백작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은 툭하면 오입질을 하여 바깥에서 사생아를 만들어오는 남편에게 질릴 대로 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데려오는 사생아를 전부 은밀하게 처리했다. 이유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야에 잉태하여 낳게 된 하나뿐인 아들의 입신을 위해서였다.

리페 백작이 손을 뻗는 여자들이 대다수 창부나 평민인지라 뒤처리는 쉬운 편이었다. 그런 식으로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부부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지기만 하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 또한 가끔은 외로움을 느끼고, 가끔은 사랑을 바라게 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건, 우연한 소개로 저택에 방문한 이국의 음유시인이었다.

백작 부인은 남편과는 다른 감미로운 음색과 나긋나긋한 말투의 음유시인에게 홀딱 빠지게 되었다. 예술가 특유의 처연하면서도 준수한 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 남몰래 가지던 만남은 자연히 잠자리로 이어졌고 리페 백작 부인은 피임약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그의 아기를 가져 버리고야 말았다.

그게 바로 라샤였다.

백작 부인은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이 아기를 숨겨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제껏 제가 남편의 사생아를 처단해 온 걸 생각하면, 남편 역시 그러하리라는 추측이 든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래전부터 저를 섬겨 온 하인에게 아기를 숨길 것을 당부하였다.

과거 백작 부인에게 거두어져 그녀에게 큰 빚을 진 하인은 혹여나 의심받을 일을 피하기 위하여 때마침 자리가 비게 된 세실리온 공작가의 마구간지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라샤도 함께였다.

그가 반지를 건네받은 건, 출산 당시의 산욕열로 심약해진 백작 부인이 내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코앞에 두었을 때였다. 후일을 위하여 라샤의 신분을 입증할 수 있는 반지 하나를 챙겨 주고 백작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구간지기는 당시에 리페 백작이 타계하고 드디어 그의 외아들이 가주의 자리를 넘겨받았다는 소식 또한 전해 주었다. 백작 부인이 반지를 건네준 건 아마도 이때에 백작저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리라.

하지만 라샤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 체데프의 품에서 그 누구보다도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의 곁이 바로 제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설마 제가 체데프에게서 먼저 벗어나 제 발로 이곳으로 가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고 마침내.

라샤는 아마도, 호적상 제 이부형제일 오라비를 마주하게 되었다. 리페 백작, 카임 리페. 나란히 어미의 배를 빌려 태어난 오라비는 그녀와 머리색도, 눈색도 달랐다. 라샤의 흑발은 어미인 전 백작 부인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카임은 아버지의 머리색을 닮았다. 반대로 카임은 백작 부인의 청명한 녹안을 이어받았지만 라샤의 눈동자는 보랏빛이었다.

그럼에도 마주한 남녀는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네가 정녕 내 이부 누이라는 말인가?”

라샤의 사정을 전해 들은 카임의 반응은 제법 침착했다.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는 제법 놀란 기색이기는 했다.

“어머니께서 타계하시기 전 내게 아리송한 전언을 남기셨다. 당신이 살아생전 아꼈던 반지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가 있거든 그자가 하는 말은 전부 믿어 달라고.”

“…….”

“웬 생뚱맞은 유언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널 위해 남겨두신 말이었군.”

그래도 착잡함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는지 카임은 시가를 꺼내물었다. 라샤의 신경은 속수무책 그 시가로 쏠렸다. 순간 체데프가 제 시야 내에 서서 저것을 피우던 모습이 상기된 탓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임으로써 그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었지?”

“세실리온 공작저에 있었어요.”

“사용인의 신분으로?”

라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임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쓱 훑었다. 저렇게나 가녀린 체구를 가진 채로 고된 일을 잘도 버텼다. 꽤나 대단하다는 감상이 듦과 동시에 의문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궁금증을 겉으로 표출하듯, 카임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한데 이상하군. 아버지가 타계하신 건 3년 전인데.”

“…….”

“그 반지의 존재도, 어머니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면서. 왜 이제야 나를 찾아온 거지?”

오늘날에 다다르기까지의 공백이 신경 쓰인 것이었다.

그는 나기를 귀족으로 자라 평민의 삶 같은 건 모르지만, 일꾼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렇게는 못 살겠다 싶은 적이 종종 있었다. 특히 몸을 쓰는 일이 주인지라, 라샤같이 연약한 여자들은 더욱 버티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 백작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3년간 공작저에 붙어 있었던 건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그곳에 있는 게 좋았거든요.”

혹 미천한 신분 행세를 하느라 이제야 아버지 소식을 접했나 싶었지만, 담담하게 흘러나온 대답을 듣자 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어진 라샤의 대답이 그를 더더욱 오리무중 속으로 집어넣었다. 카임은 흐린 연기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씁쓸한 미소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세실리온 공작저에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 거기에 있는 게 대체 무어가 좋았길래…….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카임은 순간 뇌리를 강렬하게 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잠깐.”

“…….”

“그러고 보니 세실리온 공작이 웬 평민 계집에게 반쯤 미쳐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세실리온 공작의 평민 애첩은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한두 해도 아니고 자그마치 몇 년이나 이어져 온 순애보. 더군다나 그 사랑을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저를 낳고 키워 준 부모와 반목까지 해 버린지라 그 유명세가 자자했다.

머리를 굴려 보니 얼추 시기도 맞는다. 카임은 점점 들어맞는 정황에 차츰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지?”

“…….”

“너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묻는 건지 부탁하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라샤는 곧잘 열던 입을 다문 채 카임을 응시했다. 침묵이 대체로 긍정을 표한다는 걸, 카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렬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곁들인 채 물었다.

“그럼 네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공작님이 알고는…… 있는 거지?”

제 눈앞에 나타난 이부누이는 아무리 봐도 ‘잠깐 들른’ 행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삯마차를 타고 왔다고 했었지. 공작가의 도움 없이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부터가 세실리온 공작의 눈을 피해 벌어진 일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른 침묵이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공작은 애첩인 그녀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까, 몰래…….

카임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너 그럼 지금 여기 있으면 어떡해? 어?”

“…….”

“공작이 널 애타게 찾고 있을 것 아니야!”

무려 혈육을 등지면서까지 지키려던 사랑이었다. 제국의 개국공신가이자 저명한 기사 출신인 그의 권력과 두려움을, 이 제국 내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특히나 카임은 몇 년 전, 사교 모임의 일을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술에 취한 영식 하나가 그를 도발하겠다고 감히 겁도 없이 라샤를 거론했던 사건이었다. 간 크게도, 세실리온 공작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애첩의 존재를 논한 자였다. 그것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저급한 성적 희롱에 가까운.

당일, 체데프는 전례 없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가만 내려다보기만 했다.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눈빛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세였다. 연회장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이들에게 더욱 아슬아슬하고 오싹한 긴장감을 떠안긴 기억이었다.

그날의 사교모임은 다행히 아무런 유혈사태 없이 잘 마쳐졌다. 하지만 일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터졌다. 라샤를 거론했던 영식의 가문이 쥐도 새도 모르게 멸문했다. 연이은 부도와 파산으로 사업이 전부 전락하고, 황실 법제에 위반되는 중죄가 닥치는 대로 부과되어 불명예도 그런 불명예가 없을 최후를 맞이하였다. 다들 쉬쉬하였으나 그 모든 결과를 초래한 게 그날 사교모임에서 떤 입방정임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세실리온 공작은 평민이라는 제 애첩에게 그토록 극진한 애정을 선보였다. 그 애정으로 말미암은 칼날이 이번엔 제 가문에게로 향할지 몰라 덜컥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카임과 달리 라샤는 침착했다.

“공작님께서 절 찾으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없다니?”

라샤는 다음 말을 재촉하는 그를 앞에 두고,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듯한 찻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데도 마음은 더없이 식어가기만 했다.

결국, 이 말을 제가 제 입으로 뱉어야 하는 때가 도래했음을 실감한 것이다.

“그분…….”

“…….”

“이제 제게 질리셨거든요.”

카임은 순식간에 어벙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말투가 내용과 상반되게 담담하여, 그게 참으로 오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 *

권태에 젖어 든 연인에게서 쫓겨나듯 내밀린 모습이 가엽기라도 했는지 카임은 흔쾌히 머물 곳을 내어 주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말이지, 일단 네가 우리 가문의 피가 섞여 있는지는 확인할 거다.’

그렇게 말한 그는 백작 부인의 반지와 함께 라샤의 손가락에서 피를 한 방울 채취해갔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라샤는 그간 카임이 내어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체데프와 격한 밤을 보낸 이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저택을 나온지라 여전히 피로가 쌓여 있었다. 더군다나 한 생명을 더 짊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졌다. 잠도 부쩍 늘어나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기 일쑤였다.

여전히 비몽사몽인 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불현듯 저 멀리서부터 급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다소 무례한 침입자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아서 라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

오늘도 여전히 삿대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는 카임은 무슨 일인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그녀의 짐작대로 카임은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황실 마법사에 파견을 청하여 조사해 보았습니다. 반지는 리페 백작가의 고유 문양이 찍힌 진품이 맞으며 채취하셨던 혈액 또한 백작님의 것과 일치합니다.’

막힘없이 말하던 보좌관이 주춤한 건 다음 대목에서였다.

‘저, 한데 지금 그것보다도 중요한 게…….’

‘뭔데?’

자꾸만 망설이는 보좌관에게 따지듯이 물어 얻어낸 답을 듣자마자 카임은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라샤가 있는 침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라샤를 응시하던 카임의 시선이 쭉 미끄러져 그녀의 배 언저리에 가 닿았다.

“너, 너…… 임신했다는 게 사실인가?”

라샤는 기겁한 그를 앞에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의 대면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차분함이었다. 이미 그가 피를 한 방울 받아갔을 때부터 얼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임신을 알게 된 것도 핏방울을 주입해서였으니.

라샤의 긍정에 카임은 이번에야말로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한층 억눌린 음성으로, 마치 소곤대듯 물었다.

“그러니까, 세실리온 공작의 아이가 맞나?”

“네.”

“……좆됐네, 좆됐어. 진짜 좆된 거야, 이건.”

그를 뒤쫓아온 보좌관은 경박스러운 그의 어투에 주의를 주었으나 카임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고!”

“백작님.”

“보좌관, 안 그런가? 지금 이게 내가 돌아 버려도 충분한 일이 아니야?”

“조금 진정을…….”

“난 세실리온 공작이 무섭다고, 젠장 할! 그때 그 등신 같은 영식을 보는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말만 안 했다뿐이지 ‘이걸 어떻게 죽일까’ 하는 표정이 따로 없었다고, 아주 살벌한 게…… 으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니까. 혹여나 내가 자기 애첩에 이어 애까지 빼돌렸다고 오해라도 사면 어떡하나!”

“그분은 제가 임신한 걸 모르세요.”

라샤는 보좌관을 앞에 두고 방방 뛰는 카임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이제 애첩도 아니구요.”

“…….”

“세실리온 공작님은 더 이상 저와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라샤가 지나치게 담담하니 되레 방방 뛰는 카임이 이상한 사람 같았다. 그게 스스로도 잘 인지됐는지, 카임은 언제 난리를 피웠느냐는 듯 조금 진정했다. 그는 먼저 보좌관에게 축객령을 내린 후 라샤를 침대에 앉히고 의자를 끌고 와 저도 엉덩이를 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

여태껏 있는 방정 없는 방정을 다 떨더니 이제 와 체면을 차리듯 다리를 꼬고는 팔짱을 낀다. 그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라샤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가까스로 웃음기를 삼킨 그녀는 어쩌면 제 이부 오라비가 꽤 웃긴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라샤의 마음일랑 전혀 알지 못할 카임이 제법 진지한 투로 물었다.

“너는 그 관계가 끝났다고 말하기는 했다만, 그게 공작과 합의가 된 건 맞나?”

“합의라니요?”

“며칠 전부터 세실리온 공작의 기사들이 수도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라던데.”

“…….”

“너 찾는 거 아니냐고.”

라샤의 눈동자가 순식간이지만 미약하게 흔들렸다.

체데프가 저를 찾는 건 항구로 향하던 중 떠올린 가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막상 그 소식을 맞닥뜨리니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가 두 눈으로 보아온 체데프의 태도가 상기된 순간, 그 모든 게 별 의미 없게 다가왔다. 저를 침실에 홀로 둔 채 다른 여자와 산책을 하고, 그녀를 챙긴답시고 제 팔을 뿌리치고, 또 그 여자의 향수 냄새를 폴폴 풍겼던 사람이, 이제 와서?

유추는 쉬웠다. 오기인지 뭔지 모를 고집으로 헤어질 수 없다고 어깃장을 놓던 게 생각난 것이었다.

“글쎄요, 제가 아니라 다른 용건일 수도 있죠. 설령 저를 찾으시는 게 맞다고 하더라도, 아마 잠시일 거예요. 지금은 그저 제가 없단 사실이 익숙지 않으신 걸 테니.”

“…….”

“오래…… 함께한 만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드시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빈자리에도 적응하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비어 있는 자리를 누군가가 대신하든지.”

그 누군가는 이미 찾은 걸지도 모른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그의 옆자리를 꿰찬 로베니 영애가 있지 않던가. 무엇보다도 라샤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었던 여자.

카임은 라샤를 물끄럼 응시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막막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샤는 그런 오라비를 응시하며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정 걱정되신다면 이곳에서도 떠날게요. 대신… 돈을 조금만 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소매치기를 당해 가진 걸 대부분 잃었다는 건 이미 일주일 전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카임은 잠시 말을 아꼈다. 생각에 빠진 눈치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지친 게 여실한 라샤의 얼굴과 아직은 티도 나지 않는 배를 분주히 오갔다.

곧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한 그가 제 손으로 단정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제국의 권세를 휘어잡고 있는 만큼, 세실리온 공작가의 정보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제가 얼른 그녀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결국 이곳에 왔다는 꼬리가 잡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혹 자신이 돈만 쥐여 준 채 매정히 내쳤다가 그녀가 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리페 백작가는 진정 공작의 화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기실 그 두려움도 있지만 일단은, 조금 더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앞섰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핏줄이 정녕 이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라 더욱 꺼려지는 것이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지만 결국 그녀는 저와 한 가족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홑몸도 아니었다. 저 여리여리한 체구로 애까지 배고서 바깥으로 나간다면 과연 얼마나 버티겠는가.

이대로 그녀를 내쳐버리면 자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될 것만 같았다.

“여기 있는 걸 허할 테니 나와 약속 하나 하지. 나중에 세실리온 공작이 오해하는 일 없도록 똑바로 설명하도록 해. 알겠나?”

결국 카임은 반쯤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라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 짐작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설명드릴 일도 없을 거예요. 절 찾으시는 건 금방 관두실 테니.”

“글쎄.”

카임은 여전히 제 결정이 옳은 쪽인지 분간을 못 하는 얼굴이었다.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나중에 상황이 진정되면…… 그땐 저도 여기서 떠나겠습니다.”

“리페 백작가의 이름을 얻으려고 찾아온 건 아니란 말이군.”

“…….”

카임의 지적대로 이곳으로 향하게 된 건 도피처로 택한 것일 따름이었다. 당장 몸을 피하기에는 수중에 돈이고 뭐고, 가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간밤 격렬했던 잠자리의 여파로 몸이 고되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소매치기를 막 당했을 때의 허망함이 한 줌 남아있던 기력마저 전부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 라샤가 들고 있던 건 삯마차를 얻어 탈 수 있는 정도의 돈, 그리고 이 저택에 당당히 드나들 수 있는 반지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카임은 이만 쉬라는 말과 함께 침실을 나갔다.

혼자가 된 라샤는 축 처지는 몸을 침대 위로 늘어뜨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청청하고 구름은 평화로운데 어찌하여 마음은 이리도 심란할까. 곁의 공백, 뒤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저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체데프만이 아니라, 자신도.

라샤는 눈을 가물거리다가 어느새 또다시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적응해야만 하는 외로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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