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3장. To lose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라샤는 침대 위에 혼자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는데, 척추 하나하나를 타고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목덜미 부근 또한 만만치 않게 쓰라려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니 얼얼함이 한층 더 심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 놓인 커다란 거울이 불쑥 눈에 밟혔다.

정확히는 그 위로 비치는 자신의 몰골이.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이어지는 상반신에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꼭 밤새 야수에게 잘근잘근 씹히기라도 한 것처럼 울혈 자국이 빼곡했다. 특히나 젖가슴 부근은 절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사가 끝난 지 오래인데 유두는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으며 젖무덤 주변엔 벌건 순흔이 낭자했다. 체데프의 입술이 간밤 그녀의 가슴을 유린한 결과였다.

더하여 납작한 아랫배와 그 아래 불두덩, 허벅지 사이에는 말라붙은 정액 자국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는 어젯밤 그녀의 몸 곳곳에 제 씨물을 뿌리지 못해 안달 내던 색마가 따로 없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던 라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발 내디디기 무섭게 그대로 쭉 미끄러졌다. 간신히 침대를 붙잡아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무리하여 일어나는 대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야…….”

함부로 움직이니 가랑이 사이가 얼얼했다. 안 봐도 뻔했다. 격한 삽입으로 연약한 음부 주위의 살점이 벌겋게 부어 있으리라. 간밤의 섹스는 그런 부작용을 낳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칠고 고되었다.

라샤는 배를 감싸 쥔 채 망연히 허공을 응시했다.

어젯밤의 체데프는 진정 미친 것 같았다. 그간의 밤 동안 그가 얼마나 인내해 왔는지를 피부 끝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토록 흥분한 모습은 몇 년의 밤을 함께 보낸 라샤조차도 생경할 정도였다. 물론 라샤가 자꾸만 이성을 찾으려는 그를 자극한 탓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간밤 폭발했던 그의 욕정은 결코 꾸며내거나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이제 라샤가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섹스뿐인데, 그마저도 그를 만족스럽게 해 주려거든 이토록 극심한 뒤탈을 겪어야 했다.

앞으로 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렇게 애쓰고 기를 써야지만 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거라면, 라샤는 차라리 포기하고 싶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문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배 속에 심어진 생명이 떠오른 건 이미 그와 한바탕 뒹군 후였다. 자신이 버겁고 힘들었던 만큼 이 아기도 지난밤을 이겨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제 이기심에 아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진물처럼 스며 올라온다. 양심도 없는 죄책감이었다. 불안과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저 좋을 대로 굴 땐 언제고 이제 와……. 아직은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 배를 어루만지는데 무릎 위로 무언가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물줄기를 이루며 후두둑 쏟아졌다. 라샤는 침대의 구석 아래에서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고요하게 울었다. 속에 멍울처럼 맺힌 울컥함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어젯밤 라샤는 그에게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의 격정을 끌어내기 위해, 또 예전의 기억을 회상하며, 그리고…… 같은 감정의 응답이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품은 채.

그러나 체데프는 한 번도 그 기대를 충족해 주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려도, 그토록 애가 타게 속삭여 보아도 답은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사를 마쳤을 때.

육욕과 열감이 사그라든 눈동자는 예의 무미건조하게 돌아왔다. 사랑은커녕 그 어떤 따스한 말조차 기대할 수 없는 눈. 심장이 저절로 움츠러들며 차곡차곡 쌓아온 7년의 시간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라샤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그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

나 좀 잡아 줘.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줘.

그런 신호나 마찬가지였음에도, 권태의 늪에 발목이 잠긴 체데프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마음이 식어갈 테고, 그 늪에 서서히 잠식되어 갈 텐데 그 변화를 끝까지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애초 지켜보기도 전에 내쳐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그런 꼴로 내팽개쳐지느니 이쯤에서 접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게 나았다.

“……흑.”

그 뼈아픈 결론에 다다른 순간, 라샤는 몸을 옹송그린 채 오열했다. 삐거덕거리는 몸 여기저기가 아팠으나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뿐이었다.

한동안 침실에는 숨죽인 울음소리만이 들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숨을 들이마신 라샤는 물기로 얼룩진 뺨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몸을 일으켰다.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아마 체데프는 저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황궁에서 주관하는 국무회의가 있는 날이기에. 제국의 개국공신가(家)이자 왕당파의 지도자 격인 그는 이날, 꼭두새벽에 출타하여 자정이 된 늦은 밤에야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하여 라샤는 부러 이날을 골랐다.

오늘은, 그가 최대한 늦게 나타나 주어야 하니까.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 수전을 틀어놓은 채로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곧 피어오른 온수의 김이 그녀를 깨웠다. 세면기에 물을 담아 몸 위로 쭉 흘려보냈다. 체데프가 소유물의 낙인처럼 밤새 남겨둔 흔적이 차츰차츰 지워져 갔다. 짐승의 잇자국 같은 순흔은 물로 닦아낼 수 없었으나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천천히 목욕을 했다. 체데프의 곁에 있으면서 당연시하게 된 이런 호사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

씻고 나온 그녀는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향했다. 지난번 임신임을 알려 준 약병을 숨겨 놓은 서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지막 칸을 열고 덧대어 깐 천을 걷으니 눈이 부실 정도로 화한 이채가 발했다.

이곳은 라샤가 소중한 곳을 모아두는 보물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체데프와 관련이 있었다.

그에게 선물 받은 장신구와 보석이 대다수라 그렇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놓여 있었다. 원정을 떠난 체데프에게서 받았던 몇 장의 서신, 라샤가 좋아하는 리시안셔스를 직접 따 만든 압화. 그가 머리카락이 긴 그녀를 위해 손수 제작을 맡겼던 머리빗. 그 외에도…… 그의 사랑이 온전했음을 일깨워 주는 증거가 가득했다.

“…….”

울적함이 새롭게 치밀어 오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받아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을.

그가 사랑해 주던 때를 알기에 더 슬펐다. 추억으로 남아 버린 과거의 잔상이 심장을 멋대로 들쑤시는 기분이다.

라샤는 아직도 화끈한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무덤처럼 쌓인 보석 아래를 파헤쳤다. 그 밑에 깔려 있던, 가지런히 접힌 손수건이 손에 잡혔다. 그건 이 안에 담긴 물건 중 라샤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세계의 정세가 안정을 찾은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전까지 영토의 확장과 권세의 부강을 위하여 곳곳에서 전쟁이 누차 발발하고는 했다. 이곳, 벨리움 제국도 그 피 튀기는 외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성년이 되며 동시에 기사단장으로 승격한 체데프는 이래저래 출정할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라샤는 도통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며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중 원정을 떠나는 기사를 위하여 직접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건네주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후부터 라샤는 그의 출정이 잡힐 때마다 하얀 천에 자수를 새겨 선물하고는 했다.

‘나도 해 볼까?’

하루는 그가 그 자수에 관심을 가졌다. 아주 간만에 출타를 하지 않고 쉬는 날이었다.

체데프는 라샤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채로 꼼지락대는 그녀의 손을 따라 자수를 힘겹게 한 땀 한 땀 놓았었다. 흉터가 낭자한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천에 자수를 새겨 놓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라샤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었다.

체데프는 낯간지러운 행위라며 고작 하나 만들고 자수를 관두었다. 이런 쪽으로는 소질이 없음을 표하듯 완성된 자수는 엉망진창이었다. 라샤의 자안을 본뜬 듯한 제비꽃이었는데 그냥 보라색 실을 점처럼 뭉쳐놓은 모양새였다.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얇고 날카로운 자수 바늘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피도 한두 방울 묻어나 있었다.

그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손수건은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라샤는 몸을 일으켰다. 옷장의 깊숙한 안쪽에 숨겨둔 아담한 천 가방을 가져와 영롱한 보석을 골라 담았다. 사실 전부 놔두고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서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보석이 너무 많았기에 여기서 몇 개 사라진다고 해도 별로 티 나지 않을 듯했다.

보석을 챙긴 뒤 가방의 깊숙한 안쪽에 그가 만들어 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손수건을 넣어 갈무리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두고 갈 수 없었다.

응접실을 나서기 전 라샤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7년의 시간이 고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그와 보낸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달아오르려는 눈시울을 꾹 참아내며 발을 돌렸다.

이윽고 문이 쿵, 닫혔다.

* * *

“후우.”

체데프는 한숨과 함께 크라바트를 신경질적으로 쭉 늘렸다.

미미한 편두통이 일고, 목 뒤는 뻐근했다. 진종일 이어진 국무회의에 기력을 죄다 잡아먹힌 듯했다. 오늘따라 유독 사안을 물고 늘어지는 반대파의 집요함에 피로가 여실했다.

그는 제 뒤를 따르며 보고하는 보좌관에게 손을 내둘렀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라는 의미였다. 보좌관, 오닉스는 두말없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따라올 것 없다. 가서 쉬어.”

제 뒤를 따르는 호위 기사들에게도 지시했다. 그들 또한 깍듯하게 경례한 후 어둠을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혼자가 된 체데프는 그제야 침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멈칫했다.

‘더 세게 해 줘요.’

‘더, 더 세게.’

‘더 계속…… 더 해 줘.’

어젯밤 유난히 이상했던 라샤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7년간 몸을 섞어 온 만큼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나 특징에 대해 몹시도 잘 알고 있었다. 라샤는 원체 몸이 약하여 섹스가 조금이라도 격해지면 바로 버거워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금방 숨넘어갈 듯 껄떡거리는 호흡이나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들이 그 증거가 되었다. 체데프도 그를 알기에 언제나 그녀의 선에 맞추어 정사를 즐기고는 했다.

그는 그 점에 있어 딱히 불만이 없었다. 상황과 조건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함께해 온 시간이 한두 해가 아닌 만큼, 그 점이 문제가 되었을 거라면 진즉 발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문제없이 7년간 잘만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어제의 라샤는, 꼭 그가 그 점에 불만이라도 있다고 믿는 것처럼 애타게 조르고 보채었다.

한두 번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기실 그녀의 자극에 홀라당 넘어가 발정 난 짐승처럼 박고 또 박아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참이었다. 꼭두새벽에 침실을 나서기 전 잠든 그녀를 살펴보고 체데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라샤가 그러기를 원했다지만,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은 강압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심각했다.

그에겐 물론, 좋은 정도를 넘어서서 황홀한 밤이었다. 그러나 라샤의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보니 간밤의 쾌락은 곧장 흐려지며, 역시 제가 참는 게 백 번, 아니 천 번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울혈 자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부가 원체 연약하고 보들보들해서 그런지 치대듯이 주물럭거린 부분에는 옅은 멍까지 들어 있었다. 간밤 황홀경을 거닌 혹독한 대가였다. 차라리 제가 아프면 좀 나았을 것을, 그 수고스러움은 모조리 라샤에게만 남겨진 바였다. 그러니 지난밤의 정사는 고삐 풀린 그의 인내를 다시금 단단히 붙들어 묶는 계기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판단을 다시금 곱씹으며 그는 문을 열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임을 인지하고 발소리를 죽였다. 어젯밤 무리했으니 그녀는 보나 마나 일찍 잠들었으리라. 바로 욕실이 있는 방향으로 직행하던 체데프는 순간 멈칫했다.

그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늦은 밤, 정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보이던 가녀린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체데프는 월광으로 인해 창백한 분위기가 감도는 침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기척도, 실체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침대의 전경이 다소 낯설었다.

멈춰 있던 그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잠시 후였다.

“라샤.”

어딘가에 있겠지, 그런 생각을 품은 양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욕실로 향하려던 그의 걸음이 침실 여기저기로 뻗쳐나갔다. 그와 그의 연인이 몇 년이나 써온 침실은 무척이나 넓었으며 라샤의 작은 체구가 가려질 만한 곳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그녀의 흑발 한 올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 욕실까지 확인했으나 그곳 또한 냉기와 공허만 여실할 뿐이었다.

“라샤?”

아직도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정처 없이 침실을 떠돌던 발은 이내 응접실로 옮겨갔다. 침실보다 두 배는 넓은 곳이었다. 그녀가 바깥을 내다보는 걸 좋아하는 통유리창 앞 소파를 중점으로 돌아보았으나 이곳 역시 그를 허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는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체데프는 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나섰다.

“라샤.”

“여기 있나?”

“라샤?”

그들의 침실과 밀접한 방의 문을 하나하나 차례로 열며 그녀를 찾았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던 걸음이 그도 모르는 새에 조급한 모양새로 탈바꿈했다. 이슥한 분위기가 감도는 복도에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라샤의 이름을 머금는 그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야밤의 소란을 들었는지 얼마 안 가 집사가 위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라샤는 어디 있지?”

“예? 침실에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없는데.”

평소 감정을 감추는 데에 숙련된 노집사지만, 단호한 주인의 대답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체데프는 주름이 지긋한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 눈을 넘어 오감으로 라샤를 찾아 헤매면서도, 체데프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침실에만 없다뿐이지, 반드시 이 저택 내에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안이 벙벙해진 집사를 보니, 그 믿음은 애초에 명제부터가 잘못되었음을 깨우친 듯 속절없이 휘청거렸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요?’

‘그럼 이제 그만해요, 우리도.’

왜 이 순간, 그 말들이 떠오르는지.

별것 아닌 투정이라 치부하며 손 틈새의 모래처럼 흘려보낸 지난날의 기억이 불시에 뇌리를 침범했다. 그 말을 할 때의 분위기와 라샤의 표정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상기됐다.

체데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꼭 껄끄러운 것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불편해진 이유에서였다. 잠깐의 침묵 후 낯을 일그러뜨리는 주인의 모습에 집사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지금 바로 고용인들을 집합시켜 알아보겠습니다.”

저무는 밤을 따라 서서히 소등되던 세실리온 공작저는 다시 하나둘씩 불이 켜지더니 이윽고 한낮처럼 밝아졌다. 일찍이 퇴근했던 사용인부터 조금 전 물러간 공작의 기사들까지 한낮과 다를 바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닌 밤중의 난리가 따로 없었다.

집사가 일 층 홀에 사용인들을 모아놓고 조사를 시행하는 동안 체데프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 괜히 깔려 있는 이불을 들춰 보았다. 그 안에는 라샤를 대신하여 그녀가 지난밤 입었던, 그가 갈기갈기 찢어 넝마가 되어 버린 네글리제가 놓여 있었다.

체데프는 그것을 쥔 채로 망연히 서 있었다.

‘침실에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집사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만큼 저택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용인 또한 마찬가지리라. 그리고 어쩌면 체데프 본인도. 그 또한 텅 빈 침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라샤가 이곳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짐작이었다.

약 7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내왔으니까. 자신이 출타했다가 돌아온 침실에 라샤가 없었던 적이 전무했다. 그녀는 늘 안전한 그의 보금자리 안에서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렸다. 그게 체데프가 잘 아는, 익숙하고 친숙한 밤의 모습이었다. 그것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모양인지 아무도 없는 침대를 보자마자 넋이 나가 버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온기 하나 없는 썰렁한 침대가 여전히 얼떨떨했다.

“주인님.”

불현듯 어둠을 가르며 기척이 다가왔다. 일 층으로 향했던 집사가 어느새 돌아왔다.

“오늘 낮에 라샤 님을 목격했다는 하녀가 둘 있습니다. 한 명은 사용인들이 쓰는 계단에서 마주쳤답니다. 찰나였고 또 인사를 건네느라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나 얼핏 느끼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셨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마구간 쪽으로 향하시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집사가 보고를 하는 동안 호위기사 베르히네가 잇따라 침실로 들어서 말했다.

“각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걸로 보아 라샤 님께서 현재 저택에 계시지 않는 걸로 확인됩니다. 혹시 몰라 대문을 지키는 근위병에게 물어봤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하는 걸 보니, 대문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나가신 듯합니다.”

가만히 서서 연이은 보고를 듣던 체데프가 네글리제를 내려놓으며 집사에게 물었다.

“마구간 근처에 외부로 통하는 문이 있나?”

그의 질문만으로 감이 잡혔는지, 집사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예, 사용인들이 저택에 드나들 때 이용하는 쪽문이 있습니다.”

체데프의 연인이 된 이후로 그 못지않은 대접을 받아온 라샤지만, 그녀는 본래 마구간지기의 딸이었다. 저택의 일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경로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애초 홀과 이어지는 본 계단이 아닌, 구석에 위치한 사용인용 계단으로 내려갔다는 것부터가 남들의 눈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라샤가 정말 제 발로 이곳에서 나갔다는 걸 전해 들으니 아찔함이 뒷골을 타고 올라왔다. 저만 체감하는 건 아닐 터였다. 설마 그녀가 오늘 이렇게 사라질 줄 몰랐으니, 다들 그녀를 붙잡거나 눈여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황홀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했던 지난밤이 불쑥 떠올랐다. 그럼 평소와 달리 무리를 하면서까지 제게 맞춰 주던 태도는 떠나기 전 베푼 마지막 아량이었던 셈인가.

‘헤어지자구요.’

지난날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귀청을 아득하게 울렸다. 체데프는 아까부터 지끈대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곁에 선 베르히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명 내려 주시면 바로 추적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

“……일단은 찾아서 무사한지 확인하고, 위치만 파악해 두지.”

억지로 결박하여 데려오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묵례한 베르히네가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집사에게도 마찬가지로 축객령을 내린 뒤 체데프는 시가를 꺼내물었다. 필러가 지글지글 끓으며 뿌연 연기가 허공을 가르고 피어올랐다. 그 연기를 응시하는 체데프의 시선이 복잡다단했다.

‘더 계속…… 더 해 줘.’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면서도 저를 계속해서 자극하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이전의 기억도.

‘가지 말라구요……!’

‘애처럼 굴지 마!’

붙잡던 손을 뿌리쳤을 때, 라샤보다 더 놀란 건 바로 그였다. 언제나 그녀를 소중히 대해 주지 못해 안달을 내던 자신이 먼저 라샤의 팔을 내치다니. 그때 저를 올려다보던 라샤의 눈동자는 숨길 겨를 없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상처를 받은 기색 또한 여실했다.

‘들리는 소문과 좀 다르네요?’

그런 라샤를 두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로베니 영애가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가 역겨워 체데프는 부러 몸을 뒤로 뺐다.

‘예뻐서 껌뻑 죽는다더니, 영 그런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에요.’

‘…….’

‘연인이나 다름없다면서. 연인을 그렇게 소홀히 대하시나?’

‘입 다물어.’

응접실에 들어오고서도 눈시울이 붉어진 라샤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상했다. 당장 나가 그녀를 달래 줘야 할 것도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그냥 놔둬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양극단에 서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아님, 질리셨나?’

시가를 입에 물고 보좌관에게서 불을 빌리려던 체데프가 멈칫했다. 로베니 영애는 입가에 흥미진진하다는 조소를 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남 일이라는 얼굴이었다.

‘7년 가까이 만났다면서요? 그럼 질릴 때도 됐지.’

‘…….’

‘흐음? 웬일로 욕을 안 하지? 정곡이라도 찔리신 것처럼.’

질린다.

체데프는 그 단어를 라샤에게 대입하여 생각해 보았다. 질린다, 질린다, 질린다, 질린다……. 질린 적이 있나? 체데프에게 있어 라샤의 존재란, 단언컨대 그런 표현에 빗댈 만큼 진부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만약 그녀에게, 그리고 이 관계에 질렸다면 여전히 등신처럼 라샤만 봐도 발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질렸다기보다는…….’

익숙해졌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옳았다.

라샤는 언제건 어느 때건 체데프가 익히 아는 자리에 있었다. 그의 곁이자 그의 품에. 자신이 원정으로 인하여, 공적인 업무로 인하여, 그 외의 연유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보게 되는 라샤는 한결같았다.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그를 기다렸다. 마음도, 태도도 모든 게 순애보를 품은 일관적인 형태로.

그게 1년이 되고, 3년이 되고, 어느덧 7년이었다.

7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 시간은 누군가에게 버릇이나 습관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체데프 또한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위해 주고, 배려해 주는 데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자신이 무얼 하든, 설령 조금은 제멋대로 군다고 한들, 그녀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저를 사랑해 줄 거라는 아둔한 믿음이 자리 잡아버린 것이었다. 안주해 버린 관계 속에서 피어난 오만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조금 전 역시, 굳이 그녀를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고.

“…….”

그리고 현재.

싸늘한 냉기만 감도는 침실이 그런 그의 믿음에 대한 라샤의 대답이었다.

라샤가 떠난 것에 대해 얼떨떨함은 있지만, 결코 ‘왜’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 하기에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녀의 부재는 진즉 예견된 것이었다. 라샤는 제게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만하자고, 헤어지자고. 그러나 체데프는 그 말을 가벼이 넘겨 버렸다. 결국엔 그녀가 저를 이해해 주리라는 어리석은 고집이 뇌리를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단시일 내에 라샤를 찾아낼 테고, 그럼 결국 그녀는 제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아주 위험하고 은밀한 이면이 그의 이성 밑바닥에 그윽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질리는 것과는 또 다른 양상의 권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에 안주할 대로 안주한 관계.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애틋함보다는 단조로움이 앞서는.

뭣보다 당장 그녀를 찾기 위하여 뛰쳐나가지 않는 것만 봐도……. 오랜 연인을 잃어버린 사내치고 그는 상당히 멀쩡한 편이었다. 하지만 속 어딘가가 파도치듯 술렁거리는 건 결코 평소와 같다고 볼 수 없었다.

크라바트는 진작 풀었는데, 자꾸만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체데프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슥해진 밤하늘이 시커멨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했다.

아직은.

* * *

체데프는 희한한 습관 몇 가지가 생겼다.

먼저 첫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몇 번이고 쓸어 보는 것이었다. 꼭 그만 볼 수 있는 허상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 그건 곁에 누운 라샤를 끌어안는 일종의 손버릇이었는데, 그 대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탓에 남들이 보면 영문을 몰라 할 습관으로 둔갑해 버렸다.

기대하고 뻗어진 손바닥에 닿는 건 차갑고 평평한 시트뿐이다. 그때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이 공간이 견딜 수 없이 허하게 다가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심장을 옭아매어 꽉 쥐어짜는 기분. 요상하고 미묘하다. 체데프는 찜찜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느끼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번째.

“……입니다.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다.”

외출 준비를 끝낸 체데프는 보좌관을 먼저 내보낸 후, 무심코 침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꿈나라를 헤매는 라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가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라샤가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없는 침대에 괜히 걸음 하게 되는 희한한 버릇으로 변질됐다. 침대로 다가들다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린 것처럼 우뚝 멈춰 선 체데프는 한숨과 함께 발을 돌리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식사였다.

그는 저택에 있을 때면 되도록 라샤와 함께 식사를 했다. 선천적으로 체약한 라샤에게 식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체데프는 그 시간마다 그녀를 살뜰히 챙기는 편이었다.

체데프는 어렸을 적부터 전장을 누비는 경험이 숱해서 그런지 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육식 위주의 식사를 했다. 반면 라샤는 무겁지 않은 식사를 좋아하여 본 식사보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선호했다. 체데프는 그런 그녀가 먹기 편하도록 매번 과일의 껍질을 손수 까 주고는 했다.

“……저, 주인님?”

“아.”

집사의 부름을 듣고서야 제가 또 아무 생각 없이 과일 껍질을 몽땅 벗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그 자신은 새콤하거나 달콤한 게 싫어 입에 잘 대지도 않는데. 모조리 라샤가 먹기 편하도록 까둔 것이라 이것 역시 의미 없는 행동이 되어 버렸다.

무용해진 습관들을 조우할 때마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헛헛한 것 같기도 하고, 껄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술렁거리는 것도 같다. 그는 뻑적지근한 가슴 부근을 어루만지다가 코 밑을 쓱 쓸었다. 껍질을 깐 과일 특유의 내음이 그새 손가락에 배어 후각을 강렬하게 스쳤다.

“……미치겠군.”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평소엔 몸에 밴지도 모를 행동들이 라샤의 부재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마음이 배로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각하.”

라샤의 추적을 위해 저택을 나섰던 베르히네가 사흘 만에 나타났다. 체데프는 그제야 온종일, 아니 사실은 사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흐릿하던 정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그 반가움에 그러한 스스로의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평소보다 침체된 베르히네의 낯을 단순히 어두운 집무실 전경에 물든 것이라 착각했다.

“그래. 소재는 파악됐나?”

“아뇨, 아직입니다. 다만…….”

베르히네가 로브의 안자락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직이라는 말에 금세 시들해진 체데프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기사가 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손수건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먼지와 발자국이 찍혀 엉망이 된. 그것을 건네받은 체데프는 가장자리에 수놓인 무늬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혹시 몰라 광장 주변을 수색하던 중,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

“이 손수건……. 각하께서 라샤 님께 선물해 드린 것 아닙니까?”

베르히네가 조심스레 여쭈었으나 그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한 박자 후에야 체데프는 다소 조급한 눈길로 손수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손재주가 없음을 표하듯 형편없는 보라색 덩어리 자수, 그리고 그 옆에 오랜 시간이 지난 걸 일깨워 주는 적흑색으로 변한 핏방울.

‘주인님은 왜 만들어요? 저는 어디 가지도 않을 건데…….’

‘주인님 아니고 체데프.’

아직 어색한 이름 대신 습관처럼 호칭으로 부르는 그녀를 나무라듯 입술 위에 쪽, 하고 잔키스를 남긴 체데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네가 하도 내 걱정을 하니까.’

호기롭게 말했으나 체데프는 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손재주가 젬병에 가까웠다. 하지만 라샤를 무릎 위에 앉힌 채로 호언장담했으니 무를 수도 없어서 그는 정확히 일주일간 자수에 전념했다. 그 과정 중 베르히네에게 몇 번이고 조언을 구하려 제가 만들던 자수를 보여 주었었다.

완성된 건 깨끗할 뿐인 걸레짝이 따로 없었다. 제가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끔찍한 수준이었는데, 라샤는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걸 받은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고작 이런 것에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체데프는 일주일간의 노고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런 풋풋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

한데 그게, 왜…….

눈이 빠지도록 손수건을 보고 또 보던 체데프가 불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잡을 틈도 없는 날랜 몸짓으로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각하!”

놀란 베르히네가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체데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침실이었다. 정확히는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서랍의 마지막 칸을 벌컥 열어젖혔다.

라샤가 이곳에 소중한 걸, 정확히는 제게서 받은 걸 보관해 놓는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이 칸이 그러한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을 때는 체데프도 호기심을 가지고 간혹 들여다보고는 했으니까. 시간이 흐르며 그 행동의 빈도수가 적어지고, 최근 일이 년은 이 칸의 존재를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라샤가 이 안에 매우 소중한 걸 넣어둔다는 사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체데프의 금안이 수두룩하게 쌓인 보석 앞에서 한순간이나마 빛을 잃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보석산을 헤치고는 서랍 안을 샅샅이 뒤졌다. 시야에 스치는 물건들은 대다수 제가 선물한 것들이라 눈에 익었다. 내부는 그가 기억하던 몇 년 전의 모습과 대부분 일치했다.

그러나 단 하나.

라샤가 ‘이건 소중하니 가장 안쪽에 보관해 둘 거예요’ 하고 말한 손수건은 없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체데프의 손에 들려 있었다.

“…….”

털이범처럼 서랍을 들쑤시던 체데프의 손길이 서서히 멎었다. 이윽고 이동한 그의 시선은 서랍 안에 쌓인 화려한 선물더미에 콕 박혔다.

라샤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그가 여태껏 봐 온 7년이라는 세월이 그를 똑똑히 입증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제 발로 나간 거라면, 무슨 방도를 마련하여 제가 찾을 때까지는 안전한 곳에 잘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더 나아가 그를 위한 수단으로 당연히, 돈이 될 이것들을 챙겨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매번 품에 넘치도록 안겨다 준 수많은 보석과 장신구는 대부분 이곳에 남겨졌다.

라샤가 챙긴 건 고작 이 손수건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하나 그 손수건은 저택에 있는 그에게 돌아왔다. 더군다나 멀쩡한 형태도 아니고 이런 변변찮은 꼴이 되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소름이 끼쳐서 체데프는 순간 시야가 아득해졌다. 무용한 습관이 되어 버린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느꼈던 술렁거림이 불시에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제야 체데프는 이 감각을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불안감.

누가 속을 쥐어짜는 것도 같고, 박박 긁는 것도 같은 이 감각은 바로 불안이었다.

그것은 단지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나 라샤가 결국 제 곁으로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우매한 믿음이 속임수처럼 맘에 덫을 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인지할 만큼 표출되지 못했다. 하지만 베르히네가 우연히 발견하여 주워온, 라샤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그 불안정한 속내를 속수무책으로 까발렸다.

이 손수건은 그녀의 안보에 이상이 생겼음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제기랄.”

베르히네는 음산하게 깔린 주인의 목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주먹을 쥔 체데프의 손이 돌연 서랍을 내리쳤다. 쾅, 쾅, 쾅! 그의 사나운 힘을 이기지 못한 서랍은 오래지 않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튀어 오르는 날카로운 파편에 긁히기를 반복하며 체데프의 손에는 핏방울 맺힌 생채기가 잔뜩 그어졌다.

내내 속에서 검게 뭉쳐 있던 무언가가 제멋대로 끓는 것 같다. 손에 쥔 손수건을 보면 볼수록 더욱 그러했다. 지금 라샤가 잔뜩 밟히고 짓이겨진 이 손수건만큼 엉망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해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탓에 도통 진정할 수가 없었다.

라샤가 만약 잘못되었다면.

그렇다면…….

“각하.”

보다 못한 베르히네가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기사를 최대한으로 풀어.”

그 손길이 몸에 닿기도 전에 체데프는 탁해진 어조로 명했다. 서릿발 같은 기색에 어지간하여 놀라는 일이 없는 베르히네마저 일순 주춤했다.

“내 호위를 설 필요도 없다. 어디든 가릴 곳 없이 라샤가 갈 만한 장소는 전부 뒤져. 사소하게라도 좋으니 라샤의 소식을 아는 자나 목격한 자가 있으면 즉각 끌고 와라.”

“예.”

“그리고 혹 라샤를 찾게 된다면…….”

걸레짝이 되어 버린 손수건을 쥐기 전까지, 이건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연인 간의 술래잡기나 다름없었다. 잡힐 걸 알면서 도망치고, 잡을 줄 알면서 잡지 않는. 오랜 기간 애정과 믿음을 겹겹이 쌓은 그들만이 벌일 수 있는, 유치하면서도 다소 살벌한 술래잡기.

하지만 그녀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를 단서가 발견된 이상, 더는 그런 시시한 놀음 따위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는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내게로 데려오도록 해.”

이 섬망 같은 불안을 해결하려거든 그녀가 제 품으로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그는 몹시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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