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1)

2장. Not

체데프가 일컬은 ‘조만간’은 고작 사흘 후였다.

라샤는 찻잔을 든 채 햇살이 내리는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빛이 한 움큼 고여 든 보랏빛 동공이 유난히 공허했다. 그리하여 꼭 죽은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에는 단란한 두 남녀의 모습이 비쳤다.

체데프, 그리고 로베니 후작가의 영애.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정원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다. 라샤에겐 의복을 입은 것보다 벗고 있는 쪽이 더 익숙한 체데프는 단정히 성장한 채였다. 그 상태로 뒷짐을 진 채 여인의 보폭에 걸음을 맞춰 주는 모습은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어 보였다.

그런 그의 곁에 선 영애는 아이보리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체데프의 검은 제복과 몹시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라샤는 문득문득 자신이 현실감 없는 명화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혼담 상대라는 로베니 후작 영애는 저평한 들판에 자리 잡은 아름드리나무 같았다. 라샤와 달리 키가 제법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편이라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 없는 미인이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피하는 법 없이 그것을 제 후광으로 삼으며 해사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인. 태어나 받아온 건 타인의 사랑뿐인 양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가 체데프의 옆자리에서도 가감 없이 빛을 발했다.

체데프는 그 태도가 썩 거북하지 않은지 곧잘 입을 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요 며칠간의 라샤와 그보다, 지금 정원을 거니는 저 둘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듯싶었다.

거리가 먼데도 그의 입가에 남은 미소의 여진까지 속속들이 눈에 박혀 들었다.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걷는 모양새가 그녀의 가슴속에 따끔한 자상을 그려냈다.

기사들까지 몇 발짝 뒤로 물린 채, 무슨 담소를 저리 나누는 걸까.

“…….”

라샤는 고개를 숙였다.

신을 신지 않은 자신의 두 발은 햇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 어두움에 잠겨 있었다.

저들은 저렇게 함께 있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반면 라샤는 찬연한 햇살 아래에서 손발 하나 내놓을 수가 없었다. 체데프와 관련해서는 늘 가려지고, 숨겨지는 삶을 살게 된 지 오래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라샤는 순간 눈매가 비틀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일정 거리를 지키던 로베니 영애가 돌연 그의 두툼한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모습이 친밀하면서도 다소 은밀해 보였다. 그들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때쯤 체데프는 라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로베니 영애의 팔을 치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행동을 용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거부하지 않아…….

왜 밀어내지 않아?

영애의 붉은 입술이 그의 귓가에서 살랑거리듯 움직였다. 휘어지는 입꼬리가 요염한 마녀 같았다. 아마도 그녀에게서는, 라샤가 이젠 너무 자주 맡아 머리가 아플 지경인 향수 냄새가 폴폴 풍기겠지. 매번 만날 때마다 저렇게 딱 달라붙으니 그의 옷깃에서도 저 내음이 났을 테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이 순간 라샤가 떠올린 건 체데프의 섹스 취향이었다.

그녀는 그가 권태에 빠진 순간부터 제가 그의 전용 창부가 된 기분이라 했으나, 사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체데프는 한 번도 그녀와의 잠자리에서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지쳐 혼절할 때까지 몰아간 후에도 풀리지 않는 발기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머리맡을 짚은 손을 번번이 꽉 말아쥐는 걸 보며 그가 늘 참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실, 첫 섹스를 한 날에는 그녀 대신 움켜쥐고 있던 베개를 찢어 버렸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는 힘이 넘치는 편이었으나 반대로 라샤는 너무 약했으니 언제나 그가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저 영애라면.

그런 체데프의 취향을 견뎌낼 수 있을지도…….

라샤는 음습함의 끝으로 치닫는 상념을 깨닫고 몸을 뒤로 물렸다. 발을 옮길수록 그녀는 점점 더 시궁창 같은 그림자 속으로 침윤했다.

태양이 하늘의 중점에 뜬 정오에는 이곳 침실에 드나드는 햇살의 양이 적었다. 통유리창 앞만 선명할 뿐, 실내 안쪽은 어느 때보다도 짙은 음영으로 가득했다. 그 어둠이 자우룩한 공간에서 라샤는 자신이 시들어가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침실 테이블에 그녀를 위하여 마련된 식사가 놓여 있었다. 저택에 있을 때는 늘 함께 식사를 하던 그가 오늘은 저 영애를 챙긴답시고 저를 뒷전으로 미뤘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식사가 아닌 사식 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은 이곳에 갇힌 게 아닌데 왜 그런 걸 느끼는지.

‘정말 아닌가.’

이게 갇힌 꼴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

라샤는 낙엽처럼 버석하게 마른 표정으로 찻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찻물의 맛이 지나치게 썼다. 차가 쓴지 입맛이 쓴지, 아니면 속이 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라샤는 로베니 영애가 당연히 오찬만 하고 돌아가리라 예상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체데프와 함께하는 한 끼를 포기하고 이곳에 얌전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낮에 본 광경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체데프를 만나고 싶었다. 저번처럼 대거리 아닌 대거리를 하든 격렬하게 섹스를 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온기를 되찾아 안정감을 취하고 싶었다.

땅거미가 슬슬 몰려오는 저녁이 되었을 즈음,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성급하게 구는 탓에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은, 이 침실의 주인인 체데프라면 굳이 노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은 투정이 섞인 어조가 나가기도 전에 말문이 턱 막혔다. 열린 문 너머로 등장한 건 기다리던 사내가 아닌 집사였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는 식사가 차려진 금반이 들려 있었다.

“주인님께서 당부하신 저녁 식사입니다.”

라샤의 눈길이 금반으로 향한 걸 눈치챘는지 집사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저녁마저 이 너른 침실에 콕 박혀 홀로 해결해야 한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그 영애와 만찬까지 함께할 생각인 것이다.

라샤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오른 덩어리가 그대로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 그녀를 지나쳐 테이블 위에 금반을 내려놓은 집사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발을 물렸다.

그가 빠져나간 침실 속에서 라샤는 멍하니 테이블을 응시했다.

입맛이 없어 오찬으로 차려진 식사도 거의 그대로였다. 그 상태로 저녁 식사가 차려진 걸 보니 꼭 속이 얹힌 것처럼 욕지기가 치밀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라샤는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곧 속에서 치미는 게 욕지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까 전 가라앉히려 노력했던 울컥하는 마음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정원 속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오찬도 함께, 만찬도 함께. 당연한 수순처럼 짜여진 과정을 헤아리니 상상력은 멋대로 몸집을 부풀렸다.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또 함께 침실로, 침대로…….

못되고 허황된 상상이 거기까지 치달았을 때, 라샤는 내내 억누르던 충동을 이겨내지 못했다.

쾅!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 복도로 나섰다. 그녀를 알아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하녀들을 외면한 채 라샤는 계단을 밟아 서둘러 내려갔다. 막 일 층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들어서는 이들을 딱 맞닥뜨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무리 중 라샤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체데프의 기사였다. 그가 주인에게 작게 속삭이고서야 체데프는 고개를 돌렸다.

“라샤?”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의 호명에도 라샤는 망연히 굳어 있었다.

지금 막, 응접실로 들어서는 로베니 영애와 눈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리따운 은발에 다홍빛 눈동자.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에 섬세한 얼굴선. 가까이서 본 여인은 먼발치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었다.

로베니 영애는 그 자체로도 완벽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존재가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그녀를 지키고 선 기사, 정중한 태도의 사용인. 특히 적당한 키 차이로 보기 좋은 남녀의 모습을 선사하는 체데프가 가장 그러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하니, 속이 뭉그러지는 느낌이 한층 더 심하게 일었다.

라샤의 난입으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해졌다. 오로지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등장해서는 안 될 이가 등장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들어가 있지.”

체데프가 로베니 영애에게 말했다.

라샤가 막 나타났을 때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로베니 영애는 곧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지고는 웃으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의 시야에 놓인 라샤는 꼭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이가 된 심정이었다. 완벽한 대비를 통해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임이 까발려진 듯해서.

문이 닫히고, 체데프가 라샤 쪽으로 다가왔다.

“문제없이 식사를 챙기라고 지시를 내려뒀는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내려와 일을 번거롭게 만드냐는 어투다.

로베니 영애는 이미 사라졌는데 그 잔상이라도 좇는 것처럼 응접실만 응시하던 라샤의 눈길이 더듬더듬 체데프에게로 향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체온으로 말미암은 온기가 느껴지는데도, 라샤는 희한하게 그 손길이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올라가 있어.”

“…….”

행동은 자상하지만 그 저의는 어떻게든 저를 이곳에서 배제시키려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라샤가 등장하여 분위기가 복잡미묘해졌으니, 그녀를 도려내어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으려는 의도였다. 지금의 체데프는 그 태도를 딱히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미동 없는 라샤의 뺨에 입을 맞춘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응접실 쪽 방향이었다. 자신이 아닌 로베니 영애가 있는, 응접실.

어떠한 판단을 조리 있게 내리기도 전에 라샤는 그를 덥석 붙잡았다.

“가지 마요.”

우뚝 선 체데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팔을 떼어냈다.

“라샤.”

귀찮단 기색이 물씬 밴 태도에 속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일정 마치면 바로 침실로 갈게.”

“…….”

“그때 얘기해.”

또.

또 그는 저를 뒷전으로 미룬다.

일의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그게 무어가 됐든 그녀가 맨 마지막이라는 듯한 무신경하고 배려 없는 태도. 저 영애에겐 보폭도 맞춰 주고 팔짱도 허락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으면서. 나한테는 왜 그래. 나한테는…….

라샤는 안에서 봇물 터지듯 치미는 울컥함을 견디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저 여자에게 가지 마.

“나랑 있어요.”

“라샤.”

그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건 뇌가 아니라 속에 울화처럼 쌓인 감정 덩어리였다.

“가지 말라구요……!”

“애처럼 굴지 마!”

팔을 뿌리치는 손길에 먼저, 다음으로는 그에게서 생전 들은 적 없던 차가운 음성에 라샤는 아연해졌다. 놀라 홉뜨인 동공 안에 체데프가 가득 찼다.

그녀를 향해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자신에게 놀란 듯 그 역시 경직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일이 잘 안 풀리는 사람처럼 투박한 손길로 마른세수를 했다. 매끄러운 입술을 타고 연달아 나오는 한숨이 무거웠다. 그것은 허공으로 퍼지지 않고 라샤의 마음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를 흘끗 살핀 체데프가 눈자위를 꾹꾹 주물렀다. 아까는 귀찮음, 이젠 곤란함이다. 몇 년이 넘도록 그를 지켜봐 온 라샤에게 그의 감정을 읽는 건, 주어진 글자를 읽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가 있어. 세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말고.”

라샤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를 대놓고 성가셔하는 모습을 보니 지난밤의 단호한 어투가 불쑥 떠올랐다. 너와 헤어질 생각 없으니 다신 그따위 말 꺼내지 말라는.

그는 모순덩어리였다.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면서 왜 저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건지. 그가 제게 일말의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굴지 않는다면, 저 또한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굴진 않을 텐데.

요즈음의 그는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관이 따로 없었다. 얕은 희망과 억센 고문을 번갈아 가며 행했다. 그것 하나로 라샤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알아도, 몰라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성싶었다.

식어 버린 마음을 따라 연인 사이의 필수 요소인 배려와 존중은 옅어져만 가니.

체데프는 저를 원망스레 응시하는 라샤에게 기어이 등을 보였다. 하지만 응접실로 향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다시 그를 붙잡아서였다.

“저 영애와 결혼할 거죠?”

라샤의 음성이 물 양동이에 담갔다가 빼낸 천처럼 먹먹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온 체데프의 표정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결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헷갈리는 게 아니라, 이번엔 라샤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럼 나는……?”

라샤는 기어이 이 질문을 입에 올리게 하는 그가 미웠다.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결국 제 위치를 직접 확인하게 만드는 그가 실로 원망스러웠다.

주저앉을 대로 앉았다 여긴 자존심은 그래도 형체 정도는 남아 있던 모양인지 또다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 마음 하나 단속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눈물이 흐르지 않게 참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나는 뭐예요?”

이상했다.

정말 이상한 관계 아닌가?

결혼할 여자 따로, 침실을 함께 쓰는 여자 따로. 한때는 그래도 저를 사랑했고, 그래서 헤어지는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7년 가까이 만나온 연인을 아득바득 숨기려 하고 그 연인은 상처를 받는 이 관계가, 어찌 기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 속에 사랑이 존재하기는 할까.

먹먹함에 잠긴 라샤의 위로 짙은 음영이 졌다. 체데프가 어느새 한 발짝 다가와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 결혼은 내게 있어 완수해야 하는 사업과 같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 내가 결혼한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달라질 건 없어.”

라샤의 흑발을 어루만지고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아까와 동일했다. 정성이나 애정 없이 그럴듯한 형식만 갖추어져 있다. 무성의한 달램에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비비 꼬였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아주 천천히 곱씹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과 같을 거라고, 라샤.”

지금과.

지금과?

오늘처럼 라샤는 숨 한 자락 제 뜻대로 내쉬지 못한 채 침실에 박혀 있고. 그는 공식적으로 혼인한 로베니 영애와 햇살 드나드는 대로를 떳떳하게 누비고.

공작 부인에 오른 그 영애는 모든 게 당당하고, 뒷방의 애첩으로 전락해 버린 저는 남들 시선 피해 숨어서만 지내고…….

라샤는 순간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그게 뭐야, 그게 대체 뭐야…….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에 이제껏 잘만 열리던 목청이 딱 다물렸다. 속에서 잔뜩 엉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자리 오래 비우기 힘들어.”

“…….”

“그러니 너도 그만 침실로 돌아가.”

그녀의 심정이 엉망으로 짓이겨진 이런 상황에서마저 그는 로베니 영애와의 자리를 우선시했다.

그의 팔을 구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라샤의 손에 점점 힘이 풀렸다. 응접실로 향하는 체데프는 뒤를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태도에 숨이 막혔다. 그의 판판하고 너른 등은 그녀에게 피할 길 없는 참담함만을 떠안겼다.

“라샤 님, 괜찮으십니까?”

체데프의 호위인 여기사, 베르히네가 다가와 물었다. 기사 특유의 딱딱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사뭇 조심스러웠다.

그의 기사들은 공작의 허락 없이 함부로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접근할 수 없다는 쪽이 옳았다. 7년이란 시간 동안 라샤가 그의 주변인들로부터 당한 수모가 잦다 보니 자연히 그가 그런 쪽으로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관의 곁을 우직하게 지켜온 베르히네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가온 것을 보면 제 꼴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침실까지 모시겠습니다.”

필요하면 잡으라는 듯 베르히네의 손이 내밀어졌다. 그 손을 보며, 라샤는 제 안색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이 체감한, 발바닥을 통해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선득한 느낌이 그 짐작에 힘을 실었다.

라샤는 고개를 저었다.

베르히네가 불안한 눈길을 던졌으나 그녀는 아득바득 홀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비척거리니 기척은 곧장 뒤로 따라붙었다. 그 기척이 가까워지기 전에 라샤는 어떻게든 버텨 복도를 벗어났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사라지고서야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베르히네 앞에서 보인 태도가 오기에 가까웠음을 나타내는 방증이었다. 그리하여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잠시 기대서 있을 때였다.

“그런데 말야. 주인님이 정말 결혼하시게 되면 라샤 님은 어떡해?”

별안간 귀를 울리는 공음과 함께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거론했다. 라샤는 저도 모르게 계단 옆 기둥에 몸을 숨겼다.

“이 저택에서 쫓겨나시려나?”

“에이, 설마. 주인님과 엄청 오래 만나셨다고 들었는걸.”

“그래도…… 로베니 영애가 라샤 님을 가만 놔두실까?”

“글쎄, 나야 모르지.”

그들은 바로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이었다. 설마 라샤가 기둥 뒤에 서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하녀들은 연신 입방아를 찧었다.

“솔직히 놀랐어. 주인님께서 정말 혼담에 응하실 줄이야.”

“누가 아니래. 오늘 로베니 영애가 방문하기 전까지는 다들 믿지 못했을걸. 주인님이 라샤 님을 오죽 예뻐하셨어? 전 주인님과 주인마님의 반대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셨잖아.”

“세기의 사랑이 따로 없었지.”

“라샤 님은 혼담에 대해 알고 계시려나?”

“모를 리가 있을까? 오늘 아예 대놓고 산책하시던데.”

수다 삼매경에 빠졌는지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가 참 느렸다. 그 시간 동안 라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말 이번에 마님이 생기게 되면 관계 한번 볼만하겠다. 부인 따로, 첩 따로라니.”

“귀족 나리들이 애첩을 따로 두는 건 비일비재하다지만…… 진정한 난장판은 역시 후계 문제가 되겠네.”

“후계?”

“생각해 봐. 라샤 님이 주인님의 씨라도 배면 어떻게 되겠어? 본처에게서 난 게 아니니 적자는 당연히 무리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생아로 키우기도 좀…….”

“하긴. 그러네. 그때 돼서는 마님께서도 가만 두고 보진 않으시겠지?”

그들의 대화를 귀에 담던 라샤는 무심코 제 배를 감싸 쥐었다. 은밀하게 깃든 이 생명을 꼭꼭 숨기고 싶은 것처럼.

두런두런 이어지던 말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그녀는 그들이 사라지고서야 기둥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내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찼다. 머리는 몽롱하고 몸은 무거운 게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았다.

난간을 붙잡고 어찌어찌 침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먹지 않아 모조리 남겨진 두 끼의 식사가 싸늘히 식은 채로 끔찍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라샤는 테라스의 문을 열어놓고 소파에 가 앉았다.

바로 앞에 놓인 거울 위로 피죽도 못 먹는 양 허옇게 질린 낯이 비쳤다. 짐작대로 형편없는 얼굴이었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 몹시 잘 어울리는 낯빛이기도 했다.

‘내가 결혼한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달라질 건 없어.’

‘지금과 같을 거라고.’

그가 건넨 말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라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혼자 있기에는 버거우리만치 광활한 침실의 전경이 동공 안에 담긴다. 그것을 목도하며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이 침실이, 이별에 대한 그의 대답이나 다름없음을.

* * *

끼익- 하고 울리는 경첩의 소리가 음산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라샤는 조용히 눈을 들었다. 기척을 죽인 채 들어서던 체데프가 그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 이미 잠이 든 줄 안 모양이었다.

“라샤.”

그녀의 뒤로 다가온 그가 밤을 빨아먹은 듯한 흑발을 한쪽으로 넘겼다. 섬세한 목선이 거울과 그의 시야에 동시에 드러났다. 체데프는 상체를 기울여 그녀의 목선에 입을 맞췄다. 라샤는 침잠한 눈동자로 그런 그의 행동을 거울을 통해 지켜보았다.

“아까는…….”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가까워진 그의 옷깃에서 예의 향수 냄새가 났다.

자극된 후각이 보기 싫은 장면을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반복시켜 재생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신혼부부처럼 거닐던 남녀. 제 남자의 팔에 팔짱을 끼던 로베니 영애. 밀접해진 몸의 거리. 은밀하게 휘어 올라간 입꼬리.

라샤는 그 순간 그의 옷깃을 꽉 그러쥐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듯 체데프의 너른 흉곽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는 곧장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꽂아 넣으며 입을 벌렸다.

입술이 격렬하게 맞물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샜다. 체데프는 그녀의 머리를 고정한 채로 자그마한 입 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혓바닥이 호기롭게 입을 맞춰놓고 소심히 구는 라샤의 혓몸을 부드럽게 휘감아 빨아들였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그녀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 말렸다. 그 와중에도 옷깃을 쥔 손은 견고했다.

제가 움킨 그 부분만이라도 향이 가려지길 바라는 마음에.

“입 좀 더 벌려 봐…….”

입 속을 끈적하게 휘젓던 혀를 빼낸 그가 탁한 저음으로 채근했다. 사소한 지시를 내리는 데에도 몸이 다는지 그사이에 라샤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였다가 놓았다.

라샤는 그가 바라는 대로 순순히 입술을 벌려 주었다. 체데프는 며칠 굶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고정시키던 손이 어느새 허리춤으로 내려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곧, 다른 손이 라샤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라샤는 그의 손이 완전히 제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기 전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한 발 뒤로 밀린 체데프에게 곧장 붙어 다시 입맞춤을 졸랐다.

그는 빼는 법 없이 바로 응해 주었다. 그녀의 입술을 정신없이 빨고 타액을 넘겨받으며 네글리제에 가려진 잘록한 허리를 껴안았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은 조금 더 내려가 라샤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턱이 비틀리며 서로의 코가 몇 번이고 긁듯이 스쳤다. 체데프는 그녀의 입 속을 파헤치는 포식자처럼 저돌적으로 혀를 빨고 입술을 깨물었다. 맞닿아 비벼지는 미뢰의 감각이 간지러움을 부추겼다. 손과 발끝으로 번지는 희미한 전류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표백된다.

“밑에, 흣, 잠…….”

라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체데프는 이미 발화점을 넘어선 듯 그녀를 탐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갈급한 키스에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리자 그는 흑발 사이로 소담하게 드러난 귓바퀴를 질겅질겅 물었다. 예민한 부위를 자극당한 라샤의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녀는 흐릿하게 번지는 열기를 무시하며 손을 뻗었다. 목적지는 이미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바지춤이었다. 그곳을 조심스레 어루만지자 체데프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어느새 귓바퀴 속으로 혀를 집어넣어 안을 희롱하던 체데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금안에서 사나운 섬광이 튀었다. 라샤는 욕정으로 범벅된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빨아 줄게요.”

“……뭐?”

“당신 거.”

마치 교태를 부리듯 불뚝 선 윤곽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의 동공에 아지랑이와 같은 더운 기운이 일렁였다. 그는 참기 버거운 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미간을 굳히더니 라샤의 뺨을 감싸 쥔 채 입술을 가볍게 맞부딪쳤다가 뗐다.

“됐어. 다 물지도 못하면서 무슨…….”

그가 왜 만류하는지 잘 안다. 예전에 호기롭게 나서서 그의 성기를 머금었다가 눈물만 쏙 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라샤는 최대한으로 입을 벌렸음에도 그의 것을 반도 삼키지 못했다. 그건 그녀의 입이 작은 편이기도 하지만, 그의 페니스가 터무니없이 큰 탓도 있었다. 귀두를 무는 것만으로도 볼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기서 기둥을 조금만 물으면 곧장 목젖이 찔렸기에 그녀에게 구음은 난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라샤는 만류하는 그를 붙잡고 기어이 침대에 가 앉혔다. 그리고 벌어진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네글리제가 얇은 편이라 그런지 희붐한 월광에도 뽀얀 속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체데프의 시선이 노골적이고 숨 가쁘게 그 위를 누볐다.

라샤는 허벅지 중반까지 윤곽이 도드라지는 페니스를 천 위로 어루만졌다. 체데프는 이걸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단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사이, 라샤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페니스를 바깥으로 꺼냈다. 이미 성성하게 발기한 성기는 옷자락에 딸려 내려갔다가 퉁- 튕겨 올라와 배꼽 근처에서 꺼덕거렸다. 아래로 몇 번이나 받아먹어 본 경험이 있는 물건임에도 그 위용이 새삼스러웠다.

손가락으로 귀두를 감싸자 체데프는 “후우.”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이미 발기해 있는 그것은 핏줄이 형형하게 올라선 채였고 더하여 흥분의 증표인 쿠퍼액이 끈적하게 고여 있었다.

귀두부터 감싸 쥐어 고환 아래까지 쭉 쓸어내리자 그 강직도와 요철이 손끝으로 세세하게 전해져 왔다. 라샤의 손길을 따라 그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은밀하게 드러난 사내의 목선이 야만적이며 관능적이었다.

라샤는 혀를 내어 한 손으로 다 감싸지지 않는 페니스의 끝을 핥았다. 선액의 비린 내음이 훅 올라왔다. 그녀는 선을 그리며 반절로 갈라진 요도구를 파내듯이 핥다가 느릿느릿 귀두를 머금었다.

“하, 라샤…….”

마른 입술을 축인 체데프의 입에서 그것만으로도 흡족하다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역시나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크기는 초장부터 그녀를 버겁게 만들었다. 고작 귀두만 넣었는데도 턱이 뻐근하다. 라샤는 입술을 오므려 음경 끝을 우물우물 자극했다.

체데프는 한쪽 손을 뒤로해 침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말리기는 그른 듯하니 이 어설픈 펠라티오에 동조하겠다는 의미 같았다.

“네 보지에 박고 있는 거 같아.”

“우읏…… 음.”

“비좁고 뜨끈해서는…….”

그의 감탄에 쾌감의 여운이 진하게 실렸다. 잠시 멈칫한 라샤는 용기를 내 페니스를 조금 더 깊이 물었다.

아까부터 혀로 열심히 문대던 선단이 당장 목구멍을 콱 건드리는 바람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럼에도 참고 또 참았다. 그 상태로 엉성하게나마 구음을 이어갔다. 체데프는 이미 그녀가 귀두를 핥아 줄 때부터 반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므로 좋느냐 아니냐 논할 것도 없었다.

대신에 그는 절대로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으려고 조절하고 있었다. 이성을 조금이라도 놨다가는 그녀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흔들어댈 게 뻔했다. 벌겋고 축축한 점막에 좆이 비벼지는 감각은 그 정도로 황홀했다.

하지만 인내심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러다가 정말 멋대로 난폭하게 굴 것 같아서, 그는 결국 라샤의 턱을 붙잡고 강제로 떼어냈다.

터질 듯 부푼 살덩이가 그녀의 작은 입 속을 긁으며 질척하게 빠져나왔다. 귀두와 라샤의 젖은 입술 사이로 은색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그 음탕한 광경에 어찌할 도리도 없이 하복부로 피가 묵직하게 쏠렸다.

“큿……!”

고양된 전율이 뒷골을 울리더니 말릴 새도 없이 파정에 다다랐다. 벌름대던 귀두 구멍에서 정액이 후두둑 쏟아져 그녀의 가슴께로 튀었다. 거의 매일 밤 관계를 가지는데도 내음이 꽤나 비릿하고 양도 제법 많았다. 라샤의 네글리제가 축축하게 젖어 들 정도였다.

체데프는 젖가슴을 넘어 그녀의 턱에도 한 방울 튄 정액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라샤의 허리를 껴안아 순식간에 자세를 반전시켰다.

어느새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고 그가 바닥에 무릎을 댄 채였다. 라샤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네글리제를 걷어 올리며 무릎을 잡아 벌렸다. 행동한 것도 그지만, 이후 멈칫한 것도 그였다. 당연히 속옷이 나오리라 예상한 자리에는 보들보들한 음부가 바로 모습을 내놓고 있었다.

“……오늘 왜 그러지?”

그건 평소 체데프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라샤는 이곳이 단둘만 쓰는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네글리제 안에 꼬박꼬박 속옷을 챙겨입었다. 사실 벗기는 거야 손짓 한 번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이건 사내의 음험한 본능이 종용하는 갈망이나 다름없었다.

체데프는 음부를 통째로 감싸 쥐어 주물럭거리다가 꼭 다물린 음순을 두 손가락으로 벌려 보았다. 조심스레 드러나는 내밀한 붉은 살점에는 습기가 살짝 차 있었다.

그 물기를 덜어낼 것처럼 그의 중지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질구를 쓱 훑어 올렸다. 읏, 라샤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샜다. 흑발을 닮은 까만 음모가 그의 손가락에 엉키는 게 그리 난잡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 올 때까지…… 이러고 기다리고 있었나?”

라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까지가 체데프의 한계였다. 절제를 곱씹는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그는 어느새 모여든 무릎을 무력으로 벌리며 훤히 드러난 음부에 고개를 처박았다.

“흡!”

라샤는 예민한 질구 주변을 헤집듯이 핥아대는 혓바닥의 움직임에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물컹하고 축축한 살덩이는 입구에 미약하게 고인 애액을 게걸스레 빨아들인 뒤 음순을 섬세하게 갈라 사이를 누볐다.

“흣, 으응……!”

한순간 강해진 자극에 그의 머리통을 붙잡은 라샤가 몸을 비틀었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빼자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잡아 제 얼굴 쪽으로 당겼다. 하얀 허벅지 위로 그의 적발이 흔적처럼 흩어졌다. 음부에 비벼지는 무더운 숨결이 가히 탐욕스러웠다.

“아응, 응……! 흐, 아아…….”

벌어진 질구 사이를 쏘삭거리던 혀가 조금 위로 향하여 불거진 클리토리스를 빙글빙글 문질러댔다. 습기 수준으로만 고여 있던 애액이 금세 넘치도록 흐르기 시작하며 라샤는 발등을 둥글게 휘었다.

체데프는 습윤해진 입구에 아예 입술을 댄 채로 흐르는 음액을 쪽쪽 빨아들였다. 아래에서 샌 물은 전부 그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다디단 감로수를 들이켜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러면서 윗입술로 단단해진 음핵을 뭉근히 비벼 주며 자극을 더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태껏 그녀의 아래를 애무해 준 적이 숱한 그는 커닐링구스에 능숙했다.

“하아아……!”

한참 끙끙대던 라샤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체데프는 아예 그녀의 오금을 붙잡아 침대에 발이 걸쳐지게 했다. 흠뻑 젖은 음부가 더 훤히, 채신머리없이 드러나는 자세였다.

체데프는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긁어 주며 혓몸을 질구 속으로 슬금슬금 밀어 넣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커지며 반대로 라샤의 교성이 점점 가느다랗게 변했다. 어쩔 줄 몰라서 바동거리며 시트를 잡아당기는 모습이 꼭 도망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 표현 그대로 라샤는 정말 달아나고 싶었다. 그가 아랫구멍을 양껏 헤집어대며 안을 혀끝으로 부드럽게 휘휘 저어대는 건 정말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을 부추겼다. 짜릿한 희열로 배 속이 빠듯하게 꼬이며 눈앞이 이따금 점멸했다.

“앙, 아, 아, 그, 그만…… 하으읏……!”

몸 어딘가가 미친 듯이 간질거렸다. 라샤가 익히 잘 아는 절정의 전조였다. 발끝이 저릿거릴 만큼 굽고 허리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라샤는 헐떡대며 급히 손을 밑으로 내렸다.

발정 난 수컷같이 제 가랑이 사이를 빨아대는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교성처럼 내질렀다.

“넣어 줘요, 지, 지금. 흑! 지금, 박아 줘……!”

체데프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당장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오금을 붙잡고서는 아까부터 아플 정도로 발기하여 꺼떡대던 좆을 질구에 비볐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성기가 만나 쯔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전희는 충분했기에 미끈둥한 성기는 무리 없이 입구를 벌리며 진입했다. 어느 정도 밀어 넣었을 때 묵직이 힘을 실어 퍽-! 소리가 날 만큼 허리를 추켜올렸다. 샅과 샅이 빌어먹을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다.

“아아, 흑!”

“제기랄……. 오늘 진짜, 하아, 나 돌게 만들려고 작정했어?”

펠라티오부터 시작하여 네글리제 안에 속옷을 벗고 있고, 더하여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저속한 보챔까지. 체데프는 진정 수렁에 빠지는 기분으로 그녀의 다리를 내리누른 채 제법 사납게 허리를 쳐올렸다. 라샤는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를 간신히 더듬으며 물었다.

“좋아요……? 흑, 좋아?”

“물을 걸 물어. 라샤. 제발…….”

짓이겨지듯 벌어진 내벽이 굵직한 성기에 촘촘히 달라붙어 그의 것을 조여 물었다. 그는 나오기 싫은 안에서 간신히 페니스를 물렸다가 다시 또 철썩대는, 살 치대는 소리가 나게끔 삽입했다. 라샤는 기분 좋은 자극점을 거푸 찔러 올리는 귀두의 방향에 고양이처럼 높이 울었다.

곧 그녀가 체데프의 어깨를 밀어 상체 간 거리를 넓혔다. 그리고 아직까지 걸치고 있던 네글리제 위로 손을 올렸다. 무얼 하든 좁은 구멍을 탐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을 것만 같던 체데프는 그녀의 손가락이 네글리제의 첫 번째 단추를 푸는 순간 허릿짓을 멈추었다.

흔들리던 몸도 멈추고 공기 중에 배는 열락 어린 호흡도 멎었다. 그러자 남은 건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뿐이었다.

라샤는 제 손가락에 꽂힌 그의 시선을 느끼며 단추를 하나둘, 계속 풀어갔다. 움푹 팬 빗장뼈와 그 아래로 조금씩 드러나는 동그란 젖가슴을 따라 그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이동했다. 발정기의 수컷처럼 동공이 꽉 좁아 든 채였다.

이윽고 천 위로 도드라질 만큼 아슬아슬하던 젖꼭지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단추가 꿰어진 채인 네글리제를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무력을 이기지 못한 천 조각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라샤의 뽀얀 나체를 드러냈다.

넝마가 된 네글리제를 던진 그가 다시 내벽 안을 처덕처덕 치받아오며 젖무덤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아흐응……!”

라샤의 허리가 곡선을 그리며 야릇하게 휘었다. 체데프는 먼저 유륜을 전체적으로 핥아 주었다. 그녀가 유난히 느끼는 부위였다. 붉은 혓바닥이 침칠하듯이 보들보들한 유륜을 따라 질척한 궤적을 남겼다. 젖꽃판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유두는 통통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하아, 하…….”

라샤의 호흡이 서서히 달뜨는 것을 인지한 그가 유두를 입술로 휘감아 올렸다.

돌기를 씹듯이 우물우물대다가 불시에 강렬히 흡입하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맡을 짚고 있던 손이 어느새 내려와 반대쪽 가슴을 주물렀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사이로 살이 삐져나올 만큼 강하게 쥐었다.

곧 엄지와 중지가 도드라진 젖꼭지를 꽉 비틀었다. 바짝 발기한 정점이 그의 손가락 안에서 뭉그러지며 쾌감을 호소했다. 방증처럼 그녀의 아래가 왈칵 젖어 들며 동시에 좁아졌다. 아래가 연결된 체데프에게까지 자극이 가해져 그는 야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은 혀에, 한쪽은 손가락에 희롱당하며 라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와중에 매끄러운 안을 출납하는 추삽질은 서서히 재개되어서, 쾌락은 끝없이 범람했다.

“아……! 읏, 응, 하앙……!”

저 원할 만큼 젖가슴을 쭉쭉 빨아댄 그가 상체를 곧추세웠다. 뾰족하게 발기한 양쪽 젖꼭지가 그의 타액으로 노곤히 젖어 있었다. 꼭 잘 여물어 벌어진 과육의 속살 같았다. 체데프는 그것을 살살 문질러 주다가 종래엔 유방을 치대듯이 주물렀다. 아랫도리는 물이 담긴 샘 속을 자맥질하듯 유연하게 놀렸다. 그를 사이에 두고 활짝 벌어진 라샤의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끊어먹겠어. 너무 조인다고, 라샤…….”

“흣, 응…… 아읏……!”

“하, 제기랄.”

꽉 잠긴 음성은,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가까스로 씹어삼킨 모양새다. 그와 함께 쾌락으로 일그러진 사내의 낯은 여인의 음심을 자극할 만큼 야릇했다.

위로부터 떨어지는 그의 호흡이 설익은 양 뜨거웠다. 불현듯 무더운 열기에 별안간 여름날의 시작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밤인 건 매한가지인데 심정은 이다지도 달랐다. 그땐 얼떨떨하면서도 하늘을 날 것처럼 행복했는데 지금은…… 마냥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힌 것만 같다.

쾌감이 모든 신경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도, 낮에 보았던 장면은 제멋대로 치고 올라와 뇌리를 장악했다. 체데프의 곁을 당당히 차지하던 여자. 외양이든 지위든, 저와는 어떤 면에서든지 정반대던…….

불꽃이 튀는 것처럼 점멸하는 눈앞에 그 여자가 귓속말을 하는 장면이 이따금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바짝 붙여 팔짱을 끼는 것도. 그때 라샤의 자존심이 허물어진 건, 두 사람이 부정할 수 없이 잘 어울린 까닭이었다.

그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서, 질투심은 여지없이 피어올랐다.

라샤는 피스톤질로 전신이 흔들리는 가운데 위태로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성교에 완전히 취한 체데프의 낯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옷을 벗지 않은 채였다. 이대로 그를 끌어당기면 저 옷깃에서는 여전히 지독한 향수 냄새가 날 것이다. 말릴 도리도 없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체데프는 제 목울대를 어루만지는 라샤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퍽! 강렬하게 안을 치받아왔다.

“읏! 하…… 당신도, 흐, 당신도 벗어.”

어느새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다른 쪽 손도 그에게로 올라갔다. 라샤의 두 손이 당장 벗기고 싶다는 것처럼 옷깃을 젖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내의 빗장뼈 부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내밀하다.

체데프는 목이 조이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로 급히 손을 움직였다. 금박이 박힌 깔끔한 정복이 그의 피부를 타고 미끄러졌다. 탈의는 빠른 편이었다.

그러고서야 체온이 제대로 맞닿았다. 열기가 들끓는 그의 묵직한 체구에 눌리는 감각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요즈음은 옷을 입은 그와 정사를 벌일 때가 많은 까닭이었다.

탈의를 하느라 빠진 성기를 그가 다시 젖은 질구에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벌름대는 구멍을 잡아 벌린 채로 그 위에 귀두를 슬슬 문질렀다. 차지게 마찰하는 부위에서는 찌걱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체데프가 긴장으로 굳어진 그녀의 뺨에 입술을 묻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한번 길이 트여서 그런지 페니스는 비좁은 통로를 따라 쭉 들어왔다. 민감해진 내벽을 감질나게 긁는 통에 라샤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다시 야릇한 방아질을 재개했다. 거무죽죽한 고환이 벌어진 회음에 부딪칠 정도로 강하게 밀려 들어올 때마다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더, 세게…….”

이 정사에 맹목적으로 구는 그를 올려다보던 라샤가 불현듯 말했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워 가슴 애무를 병행하던 그가 멈칫했다. 라샤가 그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싸며 아래에 힘을 꾹 줬다.

“더 세게 해줘요.”

체데프는 매 정사 때마다 낯이 일그러지고는 했다. 물론 그건 등줄기로 꽂혀 드는 짜릿한 전율 때문도 있겠지만 라샤에게는 그보다 고삐가 풀리지 않도록 참는 데에 주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 더 세게.”

체데프의 눈가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실렸다.

“왜 그래.”

“강하게 해도 돼…….”

“라샤, 읏, 아래 힘주지 마.”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니 성기를 품은 내벽 또한 빠끔히 좁아 들었다. 라샤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난감을 표하는 입술을 핥으며 계속해서 아래를 수축했다가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그로도 모자라 손을 뻗어 그의 성감대인 목 뒤를 문지르듯이 지분거렸다.

체데프는 그녀의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귓가에 욕설 비스무리한 것을 쏟아낸 그가 오금을 단단히 고쳐 안고는 격렬하게 안을 치받았다.

“흣! 아응!”

아래를 꿰뚫는 성기의 박자, 힘, 속도 모든 게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금을 움켜쥔 아귀힘 때문에 다리를 오므릴 수도 없었다. 라샤에게는 가히 고통에 버금갈 만한 쾌락이 피할 길 없이 꽂혀 들었다.

그는 맹수처럼 날렵하게 좆을 빼냈다가 보다 정교하고 예리하게 찔러 들어왔다. 짓쳐 다물린 음순 사이로 투명한 음액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시트고 체데프의 상체고 구분 없이 튀었다. 버겁기는 하나 그녀 또한 쾌락을 느끼고 있다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으읏, 아, 아……!”

라샤가 동아줄처럼 움켜쥔 그의 팔뚝 위에 손톱을 세웠다. 탄탄한 살갗 위에 긴 생채기가 그려지도록 힘이 실렸다. 그럼에도 체데프는 아프지도 않은지 아니면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무아지경으로 박아대는 데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성을 잃은 거대한 금수 한 마리가 위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었음에도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그가 작정하고 달려드는 건 이렇게나 버티기 버거운 것이었다.

이게 그가 그간 참아낸 욕망이었다. 그녀를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려놓은 경계선이었다. 이렇게나 무덥고, 질기며, 열렬하고, 맹목적이었다.

라샤는 그가 제게 명백히 흥분하고 발정한단 사실이 기쁘면서 서글펐다. 그래도 완전히 마음이 식은 건 아니라는 증거 같아서. 하지만 그게 결코 이전처럼 온전한 모양새는 아니라서…….

고작 섹스로, 갈망하던 그의 온기를 되찾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쏟아지는 눈물은 감정으로부터 발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가 몰아붙이는 쾌락의 노도에 휩쓸려 오열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몸은 끝없는 열기를 더해가는 반면 마음은 스산해지기만 했다.

“하으으응!”

하지만 곧 그 번민도 흐려져 버렸다. 체데프가 순간 각도를 달리하여 안을 찍어누르는 순간 절정감이 머리끝까지 축 차올랐다.

단번에 도달한 오르가슴에 까무러치듯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전신의 세포가 민감하게 달아올라 펄펄 날뛰는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정도 이상을 넘는 전율에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이성 어딘가가 마모되어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펄떡펄떡 뛰었다.

그간의 절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득함이 눈앞을 덮쳤다.

“하아, 후…… 라샤, 숨 쉬어.”

그녀만큼이나 격렬해진 호흡을 터뜨리며, 체데프는 휘발시켜 버린 이성을 반쯤 되찾았다.

“미안해. 너무 흥분했군.”

그가 여전히 잔경련에 떠는 그녀의 허벅지와 허리를 쓰다듬으며 거친 저음으로 읊조렸다. 상기된 얼굴 위로 평소의 침착함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변화를 목도하던 라샤는 물러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더 해요.”

그 음성은 절정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몰아붙여졌고 그 정도로 그를 감당하기에 벅차했다.

그럼에도…….

“더, 계속…… 더 해 줘.”

“너 대체…….”

그녀를 응시하는 체데프의 동공이 너울처럼 요동쳤다.

“사랑해요.”

라샤는 그의 판판한 뺨을 쓰다듬으며 고백을 속삭여 밀어 넣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니 체데프는 꼭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무력하게 휘청거리다가 이내 속절없이 넘어갔다.

이후 침실에는 요란한 교성과 질퍽한 밤꽃향의 내음만이 감돌았다. 그와 몸을 섞은 내내 라샤는 쾌락과 고통을 나란히 겪었다.

라샤의 눈꼬리를 타고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긴 궤적을 남겼다. 이대로 당신 안에서 잠기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 나는 침몰해 버릴 것만 같아…….

밤은 서서히 끝이 나고 있었다.

열락의 밤도, 그들의 밤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