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1)

권태: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1장. Remembering

라샤의 입에서 색스러운 신음이 샜다.

아무리 배에 힘을 주고 허벅지를 조여 보아도 그녀를 저 벼랑으로 연신 밀어내는 쾌락은 도통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섹스의 열락이고 이제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해졌으나, 오늘따라 유독 껄끄럽기 그지없다.

“혀.”

그녀의 가느다란 나신 위에 자리를 잡고 짐승처럼 박아 대던 사내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라샤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얌전히 혀를 내밀었다. 붉은 혀가 그것과 동일하나 조금 더 두꺼운 살덩이에 감싸져 쭉 빨렸다. 커다란 손이 힘 빠진 그녀의 오금을 붙잡아 벌렸다.

“흐응……!”

결합부에 묵직한 힘이 실리며 라샤의 미간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자궁 아래에 닿을 듯 깊숙이 삽입되어 있던 거근이 조금 더 정교하게 파고들며 이미 한 차례 싸 놓은 희부연 정액이 꾸물꾸물 밖으로 샜다.

“목 안아도 돼.”

“아, 음, 견장이 쓸려서…….”

황궁에서의 공적 일정을 치르고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끌고 침실로 온 체데프는 여전히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상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며 하의 역시 단추가 벌어진 채 풀려 라샤의 구멍을 쑤셔 대는 성기만 아니라면 거의 멀쩡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반면 그의 육중한 몸집 아래에 깔린 라샤는 간신히 걸치고 있던 네글리제마저 벗겨진 채였다. 크림처럼 뽀얀 피부가 한 줌 달빛에 가감 없이 드러났다.

“바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리하여 의복을 벗을 수는 없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그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저를 찾으러 와 줬음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예전이었으면 기껍고 반가웠을 일이지만 요즘의 심리로는 그저, 그저…….

“아……!”

“힘들면 위에서 할래?”

“아니에요…… 읏, 흐……!”

체데프의 굳은살 박인 손이 그새 오므라든 라샤의 다리를 제대로 붙잡았다. 직후 능숙한 허릿심으로 거칠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찔러 들어오는 박자마다 폐부가 수축하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검과 총을 잡은 채 전장을 피로 물들이는 사내답게 침대에서도 약간의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그다운 섹스 방식이었다.

“아, 아…… 흐응, 앗!”

한껏 벌어진 구멍이 간신히 그의 것을 머금었다. 핏줄이 두툼하게 불거진 좆이 그것을 물기에는 한참 연약한 살점을 강제로 벌리며 파고드는 게 다소 거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인의 음순은 번들번들해진 채 쾌락의 음액을 질금질금 뱉었다. 그 적나라한 광경을 응시하는 체데프의 동공이 한층 더 붉고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 적안에는 욕정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가 고개를 숙여 라샤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된 섹스로 눈시울을 붉히던 라샤가 금세 눈물을 터뜨렸다. 귓바퀴는 그녀가 유독 버거워하는 성감대였다. 체데프는 달래듯이 그 위로 혀를 굴리며 눅진하고 미끄덩거리는 내벽 안을 숨 가쁘게 쑤셔 댔다.

“아파?”

“흐으, 아, 그, 응!”

대답은 없었으나 라샤의 반응 자체가 곧 대답이었다. 간드러진 교성이나,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흔드는 허리나, 몽롱하게 풀려 녹아내리는 동공이나. 그건 사내와 허리를 짜 맞춘 채 완벽히 쾌락을 즐기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올라와 연분홍빛 젖꼭지를 어루만졌다. 칼자국부터 화상 자국까지 다양하게 상흔이 자리한 사내의 손가락은 부들부들한 유두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마치 부작용이 이는 것처럼, 그가 꼭지를 비틀자 찌릿한 전류가 가슴을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흐으……!”

라샤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며 헐떡거렸다. 체데프는 그녀의 양쪽 젖가슴을 리드미컬하게 주무르며 퍽퍽 허리를 치댔다.

“젖꼭지는 늘 예민하군.”

“하아, 체, 데프, 사, 살…… 살!”

“지금도 봐주고 있다고. 라샤…….”

그가 턱을 그러쥐더니 사나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입술이 먹히며 혀가 자연스럽게 얼크러졌다. 타액과 숨결이 제 것인지 상대방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난잡하게 뒤섞였다. 숨이 막혀 가슴팍을 두드리자 체데프가 난처한 미소를 지은 채 입술을 뗐다.

“힘들어?”

“숨, 숨 막혀서…….”

“천천히 할 시간이 없는데.”

체데프가 조금은 초조하게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그 별것 아닌 시선의 이동에도 라샤는 마음속 어딘가에 균열이 이는 것만 같았다. 옷을 입고 안 입고의 차이 때문일까, 저의 열기는 그에게 낱낱이 전해지는 반면 자신은 그의 체온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봤자 만져지는 건 건조하고 메마른 옷감뿐.

아니, 어쩌면 이게 체데프의…….

생각이 이어지려는 찰나 그가 라샤의 몸을 단번에 뒤집었다. 안에 뿌리 끝까지 박혀 있던 페니스가 돌아가며 우둘투둘하게 돋은 핏줄이 내벽의 여린 살갗을 부드럽게 긁었다. 흐응, 라샤의 입에서 조건반사적인 교성이 흘렀다.

“아! 체데프, 이건, 싫…….”

“가만히 있어. 얼른 끝내야 하니까.”

어조는 다정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묘하게 몰인정하고 차가웠다. 라샤는 그 이유를 몹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요구는 어느 순간부터 행위에 담긴 감정보다도 행위 그 자체에 치중된 지 오래였으니까.

마음이 닿는 게 아니라 단지 몸만이 철썩철썩 부딪치는.

옅게 숨을 들이마신 체데프가 멈춘 추삽질을 재개했다. 그가 사슴 같은 라샤의 목덜미를 깨물며 허리를 방만하게 쳐올렸다. 깊숙이 박혀 있던 거근이 쏙 빠져 귀두만 간신히 걸쳐졌다가 다시금 내벽을 후벼대기를 반복했다. 짓쳐 다물린 음부는 주인의 마음 따위 모르듯 벌름대며 그의 것을 맛있게도 삼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샤는 체데프와의 섹스에 너무 길들여져 버렸다.

“아, 응, 으응……. 흐응! 읏, 앙……!”

“하아, 라샤…….”

사내의 손이 여인의 체구 위를 부산스럽게 오갔다. 도톰하게 부푼 젖꼭지를 긁고 비틀어대다가 판판한 아랫배를 거쳐 내려가 빳빳하게 선 음핵을 빙글빙글 문질러 주었다. 입술과 혀는 그녀의 짙은 흑발을 헤치고 귓바퀴를 할짝거리고 있는 게 한참이었다.

곧 그가 라샤의 잘록한 허리를 붙잡더니 이전과는 판이한 힘으로 스퍼트를 올렸다. 쑥 빠진 기둥이 안을 찍어 올릴 때마다 골이 다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체데프는 만족스럽지 않으리라는 걸 라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가학적이고 난폭한 성향을 온전히 받아 주기에 그녀는 너무 작고 가녀렸다. 그의 취향을 오롯이 받아 주다가는 라샤가 시든 꽃처럼 메말라 버릴 게 자명하여 체데프도 번번이 뒹굴 때마다 인내를 발휘해야만 했다.

그건 오랜 기간 사랑을 나눈 그와 그녀만의 암묵적인 타협이었다.

“응, 앙, 아…… 아아앗!”

피스톤질이 점점 빨라지다가 이내 라샤가 먼저 절정에 올랐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자극점을 치받아왔고 그때부터 눈앞이 허옇게 점멸하기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요란한 오르가슴이 그녀를 속수무책으로 덮쳤다.

그녀가 가는 와중에도 몇 번 더 추삽질을 한 체데프가 진한 정액을 라샤의 질 안에 가득 싸질렀다. 파정을 하는 동안 그는 손에 착 감기는 그녀의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그것만으로도 뽀얀 피부에는 벌건 손자국이 짙게 그려졌다.

“하아, 하아, 하…….”

견디기 버거운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물론 실제의 전쟁은 이런 희열의 여운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지난하고 파괴적인 일이지만. 그런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은 라샤에겐 체데프와의 섹스가 그 정도로 위험하고 때론 잔혹하며 가끔은 숨도 쉬기 버거워지는 행위였다.

네 발로 엎드린 라샤는 절정과 함께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시트를 움켜쥔 채 가까스로 호흡을 이어가고 있자니 곧 어깨가 붙잡히고 몸이 돌아갔다. 라샤의 갸름한 턱에 키스한 그가 위로 올라와 자연스레 입술을 물었다. 절정의 온도가 그대로 담긴 뜨거운 입맞춤이 잠시 오간 후 체데프가 먼저 입을 뗐다.

“더 자.”

“…….”

라샤는 그의 진액이 소유물의 흔적처럼 여기저기 튄 제 알몸 위로 덮어지는 이불을 망연히 응시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체데프는 여전히 배꼽까지 올라붙어 꺼떡대는 검붉은 성기를 제외하고는 성장한 채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당장 침실 밖을 나서도 문제가 없을.

그가 곧 빈틈없는 손길로 남은 매무새를 정돈했다. 옆에 놓인 천으로 흰 거품에 푹 젖은 페니스를 닦고는 바지 안으로 잘 갈무리를 했다. 그러고 나니 그는 진정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공작의 모습이었다.

“……체데프.”

아무 말 없이 발을 틀려는 그를,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걸음을 멈춘 그가 라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에게서 키스를 받을 때의 자세로 그녀는 체데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어둠에 먹힐 듯 이슥했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요?”

“뭘?”

되묻는 어조가 여상하다. 그녀가 꺼내는 이야기가 정말 무언지 당최 감도 안 잡힌다는 듯.

아니, 어쩌면 그리 공들여 생각해 볼 일도 아닌 것처럼.

“그냥…….”

오늘 아침 막 알게 된 소식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라샤는 습윤하게 젖은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그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하던 체데프가 다가왔다.

“뭘 그만하자고.”

“……이런 관계.”

“…….”

“결혼 얘기 들었어요.”

당신이 지금 나와 불같이 섹스를 치른 후에 가는 자리가 그 결혼 상대를 만나러 가는 자리라는 것도 잘 알고.

그러나 그 말까지 뱉기엔 아무리 라샤라도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아니, 아니다. 자존심은 둘째 치고 혹 이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그가 제게 질려 하며, 그의 애정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칠까 봐 두려웠다.

“단지 의례적인 결합일 뿐이야.”

“…….”

“귀족들끼리 결혼, 큰 의미 없는 거라고 말했잖아.”

왜일까, 라샤에게는 그 말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이건 여타의 사업과 다를 바 없는 비즈니스적 업무일 뿐이라고. 하지만 체데프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오히려 그런 의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가 라샤와의 섹스를 마치 욕구 해소용처럼 다루는 것에 더더욱 비참해진다는 걸.

꼭 제가 그의 전용 창부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예전이라면 이런 질문에 망설임 없이 부정하겠으나 요즈음은 아니었다. 작금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라샤는 입을 꾹 다물게 될 것이다.

“다녀와서 얘기해.”

또 한 번 시계를 힐끔거린 그가 이내 침실을 벗어났다.

커다란 침실에 홀로 남은 라샤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실내엔 온기가 충만하나 서늘함은 가실 일이 없다. 관계가 끝나고 후희로 가득하던 지난날의 회상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반면 오늘의 체데프는 고작 키스 한 번을 하고 제게서 멀어졌다.

그의 사랑이, 제게서 살점처럼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너무도 훤히 보이고 있었다.

* * *

라샤는 눈을 떴다.

캄캄한 밤을 지나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여명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건 싸아아, 하고 귀를 스치는 빗소리 때문이었다. 야외의 전경을 비추는 통유리창이 주룩주룩 젖어갔다.

본래 침실에는 테라스가 따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벽면을 통유리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침실이 저 너머의 응접실처럼 통유리로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라샤를 위한 체데프의 배려였다. 바깥 경치를 내다보는 걸 좋아하는 라샤를 위하여 그가 친히 공사를 지시한 것이었다.

눈을 가물거리던 그녀는 허리께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고개를 숙였다. 근육으로 조밀하게 짜인 굵은 팔뚝이 허리를 틈 없이 감싸 안고 있었다. 라샤는 그 팔뚝을 느릿하게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언제 돌아왔지.’

어젯밤, 저를 헌신짝처럼 내버려 두고 나섰던 사내가 어느 틈에 돌아와 있었다.

라샤의 시선이 잠든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뒤편으로 남은 공간이 광활했다. 침대는 다섯 사람도 충분히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었으나 체데프는 언제나 그러했듯 저보다 훨씬 조그마한 라샤에게 딱 달라붙어 잠을 청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갑갑하던 잠버릇이었는데 이제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숙면을 취한 걸 보니 저조차도 적응된 모양이었다. 라샤는 미동도 없이 잠든 체데프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옷깃 쪽을 향해.

‘…….’

여인이 뿌릴 법한 향수 냄새가 오늘 역시 났다. 처음 맡았을 때만큼 심장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가슴이 바짝 마르는 건 여전했다. 건조한 속내에 이제는 몇 번째인지 모를 균열이 또다시 일었다.

명치 부근을 문지른 라샤는 당장 그 옷깃을 젖히고 안쪽의 살갗까지 확인하고 싶었다. 낯선 여인의 내음을 따라 혹 저 너머에 은밀한 키스마크가 찍혀 있지는 않을지. 심장이 매번 불안의 바다에 잠겨 출렁거린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충동을 억제하는 게 그를 믿는 마음인지, 아니면 현실이 될까 무서운 두려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상체는 제대로 세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젠 까마득한 일처럼 기억되는 과거의 잔상이 빗소리를 타고 조금씩 뇌리를 침범했다. 라샤의 눈길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밟아 넘어지듯 저택의 구석, 마구간으로 향했다.

본래 그녀는 공작인 체데프의 침실에 있을 수조차 없는 신분이었다. 마구간지기의 딸인 만큼, 오취가 풍기는 저 허름한 마구간에서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자였다.

처음 만남은 7년 전.

쉬테른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체데프 세실리온이 타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귀환한 이후였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나이에 세운 공적은 그를 완벽한 차기 공작감으로 칭송받게 해 주었다.

당시 체데프는 라샤를 알지 못했으나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마구간지기인 아버지를 따라 말을 돌보는 일을 하며 이따금 심부름을 다닐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스쳐 지나간 연무장에서 공자인 그를 보았었다.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칼? 혹은 태양처럼 빛나는 예리한 금안? 그것도 아니면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짓?

무엇이 라샤의 신경을 꼼짝없이 사로잡았는지는 정의할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공자를 지켜보았음은 틀림없었다.

혹자는 말했었다. 사랑을 알아채는 건 꽤 지난한 일일지 몰라도 사랑에 빠지는 건 단지 한순간의 일이라고. 그 말대로 라샤는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수려한 작은 주인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게 사랑에 상응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가 그분의 말이구나.’

그날부터였다. 마구간에서 돌보는 말 중 체데프가 아낀다는 애마를 살뜰히 보살피게 된 것은.

전장을 이따금 누비던 흑마는 다행히도 그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타인과 비교하면 그녀에겐 유독 온순하게 굴었다. 그래서 더 기뻤다. 고작 저택에서 봉급을 받고 일하는 사용인의 딸로서, 라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이상 작은 주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더한 것을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신은 그런 그녀의 애틋한 사랑에 일말의 가련함이라도 느낀 건지 친히 기회를 주었다.

‘넌 누구지?’

이제는 가문뿐 아니라 제국 내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는 공자가 친히 마구간을 찾은 것이었다. 발단은 단지 자신의 애마를 살펴보기 위함이었고, 그 발단이 그와 그녀를 만나게 해 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라샤는 어두운 밤, 허름한 마구간에 나타난 체데프를 보고 놀라 말을 잃었다. 한 걸음 내디딘 그의 얼굴이 틈새로 드나드는 빛줄기에 드러나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얼른 물러났다. 흑마는 주인을 알아본 양 후끈한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체데프는 그런 말의 갈기털을 쓰다듬어 진정시키며 라샤를 내려보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저, 저는…… 이곳 마구간지기의 딸이에요.’

‘딸?’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배가 고픈 것 같아서…….’

체데프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건초로 미끄러졌다가 이내 제 말에게로 향했다.

‘까다로운 녀석인데.’

라샤는 그게 혹 ‘앞으로는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인가 싶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얌전한 걸 보니, 네 손길이 썩 맘에 드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그런 뜻이 아님을 깨달았다. 용기를 내어 슬쩍 고개를 드니 체데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흑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공간에서 눈이 마주쳤다. 주변에 빛이라고는 달빛뿐인 환경 속에서도 체데프의 금안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냈다.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는 라샤를 들여다보던 그의 눈썹 산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앞으로도 부탁하지.’

그는 그 당부를 끝으로 마구간을 나섰다. 마주하는 순간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던 라샤는 뒤늦게야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 사소한 밤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체데프는 종종 밤마다 마구간을 찾았다. 그때마다 라샤와 마주쳤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희한하게도 그 횟수는 점차 빈번해졌고 더하여 말에 대해서만 오가던 이야기의 주제도 조금씩 바뀌었다.

가을에 시작되었던 만남은 매섭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마침내 봄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라샤는 그와 함께할 때마다 행복이 무언지 체감했다. 늘 먼발치에서나마 엿볼 수만 있던 존재를 곁에 두고 말을 섞을 수 있음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불현듯 한 욕심이 내내 모른 체하던 도화선에 불을 지펴 버린 건.

하루는 그녀보다 체데프가 먼저 마구간을 찾은 적이 있었다. 또다시 고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그는 제복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말을 보러 왔다가 잠시 눈을 붙인 듯했다. 그의 제복 차림에 먼저, 다음으로는 쉽게 볼 수 없는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 라샤는 넋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작은 주인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물끄러미 살펴보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있을 때도 빛을 발하던 미모는 가까이서 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렇게 준수한 사내이니만큼, 여타의 영애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을지를 생각해 보니 질투를 두른 암담함이 삽시간 드리웠다.

그 바닥 없는 우울함을 곱씹던 와중이었다.

곱게 감겨 있던 주인의 눈꺼풀이 예고도 없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라샤는 그 상태로 망부석이 되었다. 여느 때건 빛을 잃지 않는 체데프의 눈동자가 그런 라샤로 가득 찼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당장 물러나야 함을 아는데, 예기치 못한 눈 맞춤이 그 현실을 아득하게 만들어 버렸다.

‘……너.’

명료하던 체데프의 동공은 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유독 혼란스러워 보였다. 라샤는 숨 한 자락 쉬이 내뱉지 못하고 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심장이 요란하게 두방망이질했다.

‘내게 마음이 있나?’

이윽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라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꽂힌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의 긍정이 그에게 사소하고 귀찮은 것밖에 되지 않음을 익히 알았다. 그간 남들 모르게 보내온 시간이 좋지 않았는가. 비밀스러운 짝사랑은 계속 저만 간직하고 있어야지만이 그 시간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걸 아는데, 아는데도…….

‘……네.’

‘…….’

‘좋아해요…….’

처음 반했던 그 순간처럼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결국 사랑은 숨겨지지 못했다. 체데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곧 그는 나른하게 기대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라샤의 고백만이 홀로 남아 초라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이후 체데프는 마구간을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그가 전쟁을 위해 출타했다가 돌아왔다는 귀환 소식은 꾸준히 들려오는데, 제 앞에는 나타나 주지 않으니 라샤는 갈수록 우울해졌다. 그날 한순간의 오판이 모든 관계를 망친 것 같아 걷잡을 수 없이 속상했다.

그렇게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밤낮없이 끈적하고 무더운 열기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여름답게 장마철이 돌아와 비가 이따금 내렸다. 쏴아아. 귀를 찌르는 음성과 함께 세상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라샤는 제 마음 또한 그렇게 어딘가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체데프의 성년식은 여름 도중 진행되었다.

그가 마침내 성년이 되고 공작의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섰던 날의 밤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빗소리만이 귀를 적시는, 이상하게 평소보다 적요하고 그래서 미묘한 긴장감이 도는 밤.

말들을 살피고 조용히 마구간을 나서던 라샤는 갑자기 제 팔을 잡아끄는 힘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으로 밀쳐졌으나 아프지는 않았다.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들린 시선 너머에는 몹시도 보고 싶어 그토록 애달프게 만들던 사내가 있었다.

‘주, 주인님……?’

‘내가 졌다.’

체데프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해 보였다. 일견, 내내 부정하던 무언가를 정면으로 맞선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나 땀에 젖은 얼굴,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 그러나 그 모습이 무더운 여름 공기와는 또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렸다.

곧 라샤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다랗게 떠졌다. 그녀의 턱을 그러쥔 그가 서슴지 않고 입술을 부딪쳐 온 탓이었다. 놀라 숨을 들이켠 라샤는 곧 입술 틈새로 파고드는 축축한 살덩이에 손끝을 잔뜩 오므렸다.

체데프는 조갈증을 앓는 수캐처럼 그녀의 입 안을 격렬하게 휘젓고 타액을 모조리 앗아갔다. 끓는 점을 넘어설 정도로 후덥지근한 숨결이 누구 것인지 모를 만큼 함부로 뒤섞였다. 정신없는 입맞춤이었다.

잠시 후, 젖은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라샤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를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그를 간신히 붙들고만 있었다. 체데프는 아까와는 달리 명징하고 결연해진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난 이제 멈출 생각이 없다.’

‘하아, 하…….’

‘그래도 괜찮다면 날 받아들여.’

여름의 더위인지 아니면 그의 감정의 온도인지, 입맞춤만큼이나 끈적한 습도가 밴 고백이었다. 거부할 이유 따위 없었다. 라샤는 그의 목을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찌는 듯한 열기, 그리고 매미 우는 소리와 빗소리가 엉망으로 뒤엉킨 어느 여름날이었다.

처음에는 저택 곳곳에 숨어 나누던 입맞춤이었으나 갈수록 스킨십의 농도는 진해졌다. 자연히 몸을 섞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의 침실까지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그게 그들이 보낸 7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는 그들이 함께 넘어온 많은 역경이 존재했다. 선대 공작 부부의 냉혹한 반대부터 주변에서 쏟아진 따가운 이목까지.

그토록 힘겹게 헤쳐 온 길 끝에 놓인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 남자의 권태였다.

‘…….’

라샤는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다른 여인의 향기에 입이 써졌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침실과 이어지는 응접실로 빠져나왔다. 구석에 놓인 서랍 마지막 칸을 열어 잘 개킨 천 조각의 밑바닥에 숨겨둔 유리병을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화분이 놓인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찰랑, 유리병 너머에서 액체가 넘실대고 있었다.

세상이 숨 가쁜 속도로 도약하며 신문물이 빛보다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그 발전에 따라, 희귀한 힘으로 명명되던 마법이 어느 영역에 있어서는 실생활에 쓰일 만큼 보편화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반드시 의사의 처방이 필요했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는 마법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었다.

‘피를 한 방울 주입하면 임신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라샤는 꽉 닫힌 마개를 열어 안에 담긴 액체를 화분의 흙 속으로 흘려보냈다.

‘파란색 그대로면 비임신, 보라색으로 변하면 임신입니다.’

콸콸 쏟아지던 보랏빛 액체는 화분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편이었다.

듣자 하니 어미의 배 속에서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나온 조산아라 하였다. 그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살뜰히 챙김을 받지 못해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겪는 일도 허다했다.

‘자연 임신은 힘들 것 같습니다.’

불임은 아니라도 그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진단을 받은 것 또한 그래서였다. 겨울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지면 절로 배앓이를 할 만큼 자궁벽이 약한 편이었다. 그러니 사내의 씨가 제대로 착상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그 때문에 저도, 그도 조금은 안일하게 군 면이 있었다. 체데프가 혹시 몰라 피임약을 챙겨 먹기는 하였으나 그는 애초 원정으로 인해 저택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보니 몸을 섞는 일도, 그사이에 약을 챙겨 먹는 빈도도 들쑥날쑥했다.

그 상태로 몇 년간 몸을 섞고 그의 정액을 아래로 넘치도록 받았다. 어찌 보면 비루한 몸 상태를 감안하더라도,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임신이 된 게 신기할 만큼 빈약한 대응 방식이었다.

‘단지 한철의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지. 그것도 하필이면 평민에게…… 쯧.’

타계하신 체데프의 어머니, 전 공작 부인이 저를 앞에 앉혀두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 입장에서 저는 대등하게 마주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는지 대화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진행되었다. 네가 이래도 내 아들을 만날지 보자고 엄포를 놓는 것처럼 몇 시간 내리 무릎을 꿇려 놓았었다. 허벅지부터 종아리로 이어지는 신체 부위에 피가 통하지 않아 끊어질 듯 저릿거렸었다.

‘원래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변변찮은 것에 충동을 느끼고는 한단다. 나와 다른 것에는 한 번쯤 끌리기 마련이거든. 그게 정녕 탈이 날 거라는 걸 꼭 먹어 봐야 아는 것처럼.’

‘…….’

‘이 관계가 얼마나 갈 것 같니? 2년? 3년? 나는 그리 오래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은 어린 날의 치기에 속아 잠시 목을 매는 것뿐이야. 나중에 아리따운 영애가 나타나면 자연히 마음은 그쪽으로 돌아설 거다. 주제도 모르는 너 같은 것과는 근본이 다른, 우리와 같은 수준의 영애 말이다.’

‘…….’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난 그중에서도 인간이 주장하는 사랑이 가장 그러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언젠가 내 아들도 너에게 질리게 될 테지. 네게 목을 맨 시간을 한심해하고 아까워하며 제 손으로 직접 내버리게 될 거다.’

공작 부인은 몇 시간 동안의 대치 상태에 차게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곧 그것은 무릎 꿇은 라샤의 머리 위로 기울어졌다.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이 눈물처럼 뺨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관계 정리하고 떠나렴. 돈을 원한다면 돈을, 보석을 원한다면 보석을, 그 외에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주마.’

그 말을 들었을 때 다른 평민이라면 일순 혹했을지 몰라도, 라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간밤 저를 끌어안고 사랑을 쏟아 주는 사내의 체취와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던 순간이기도 해서였다.

‘저는…… 그런 것, 필요하지 않아요.’

당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수그리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단지 예견한 일을 맞닥뜨린 양 라샤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필요치 않다는 대답은 앞으로도 체데프의 곁에 거머리처럼 철썩 달라붙어 있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이해한 공작 부인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었다.

그날 이후 라샤는 구석의 골방에 갇혀 햇빛 한 번 보지 못했다. 체데프에게 각별히 부탁을 받은 집사가 마님의 눈을 피해 챙겨 준 식사로 끼니를 때우며 간신히 버티고 또 버티었다. 마침내 체데프가 원정에서 귀환한 날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골방에 갇혀 있을 때는 견딜 만하다 생각했는데 희한하게도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체데프는 그날 밤 누구보다도 따스하고 자상하게 라샤를 안아 주었었다.

‘널 원정에 데려갈 수도 없고, 젠장.’

그는 단단히 열이 오른 눈동자로 씨근덕거렸다. 핏발 선 동공에 심상치 않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나중에 듣자 하니 그날이 그와 부모가 완벽히 반목하게 되었던 시발점임과 동시에 그가 하루라도 빨리 공작에 오르겠다는 염원을 품은 날이었다.

“…….”

라샤는 조금 전, 임신임을 알려 주는 약을 버린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 잎이 눈부셨다. 자꾸만 눈두덩이가 시큰시큰하는 건 그 이채 때문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두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갈 것 같니? 2년? 3년?’

공작 부인의 언질과 달리, 그들의 사랑은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가득 채워진 채 이어져 왔다.

‘언젠가 내 아들도 너에게 질리게 될 테지.’

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건 결국 그 종식의 때가 도래해 버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더 빨랐으면 나았을까. 그의 아기를 배기 전에, 7년이라는 세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기 전에…… 이 관계를 정리했어야 할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라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그녀는 그를 떠나지 못했으리라. 두 사람이 일궈낸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터다.

체데프의 사랑이 굳건하다면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요동하기에 라샤 또한 불안해진다. 그의 애정이 그녀를 이 집안에 머물 수 있게 하는 명분인 이상, 라샤는 이곳에 제 자리 따위 없음을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견딜 수 없이 먹먹하게 가라앉아만 갔다.

소낙비는 바깥과 그녀의 속에 동시에 내리고 있었다.

* * *

비스듬하게 기운 시야로 테라스의 풍경이 펼쳐졌다. 가운 하나를 걸친 채 시가를 피우는 사내의 모습은 홀로 후희를 달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관계를 마친 뒤 후희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은 진즉 인지했으나 그 비참함은 매번 새롭게 다가왔다. 매일매일 몸을 섞지만, 라샤는 체데프와 함께하는 모든 밤이 설레고 벅찼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설렘과 떨림을 그에게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권태에 물든 그에게 섹스란 단순히 쾌락의 도구일 뿐, 그 외의 의미는 전부 퇴색되었다.

라샤는 이불을 들추고 흐트러진 다리 사이를 살펴보았다.

그가 여느 때처럼 안에 가득 뿌려놓은 백탁액이 가득 찬 정도를 넘어 줄줄 새고 있었다. 체데프는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는 순간 꽉 다물린 입구 사이로 제가 일찍이 파정해 둔 것이 질금질금 새는 걸 구경하는 악취미가 있었다.

비부가 찝찝해서 닦고 싶었으나 온몸이 기진하여 무리였다. 예전이라면 이런 제 상태를 알아채고 손수 천에 물을 적셔 닦아 주었을 사내를 떠올리니 속은 더욱이 뭉그러졌다.

그간의 후희가 이따금 뇌리에 어른거리는 이유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샤가 중요시한 건 귀족적이고 우아한 그가 제게 바짝 엎드리는 태도가 아니라 그 태도 안에 담긴 또렷한 애정이었다.

“…….”

“…….”

문득 눈이 마주쳤다.

체데프가 난간에 걸친 팔을 거두며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연기가 가지 않도록 구석의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끈 그가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길이 담백한 듯, 무미건조한 듯 묘했다.

“조만간 저택으로 손님이 올 예정이야.”

“손님……? 누구?”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침묵하는 사내를 올려다보던 라샤는 이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섬뜩한 직감을 느꼈다.

그 여자구나.

체데프의 아내이자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라는, 요즈음 저택 안팎으로 시끌벅적하던…….

라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확인한 체데프는 그것으로 전할 말이 끝이었는지 가분히 몸을 일으켰다.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으며 덧붙여지는 말조차 전무했다.

그게, 그 건조하고 무심한 태도가 라샤를 또다시 어느 밑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라샤의 눈동자에 깃든 이채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별안간 짓이겨진 자존심, 그 자리를 대신하는 자괴감에 입이 불쑥 열렸다.

“그럼 이제 그만해요, 우리도.”

지난번엔 의향을 구하듯 조심스러웠다면, 이번엔 다소 일방적으로 종결을 알리는 어조에 가까웠다. 씻으러 갈 생각이었는지 욕실 쪽으로 향하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휘영청한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사위가 어두운 새벽. 홀로 부유스름한 빛을 태우는 실내의 등불이 망부석처럼 굳은 사내의 실루엣을 있는 그대로 비추었다.

라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젠 행복이 아닌 울적함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은, 신물이 나는 외로움. 그의 뒷모습만 보고 지낸 시간이 언제 이렇게 길어졌는지 모르겠다.

체데프가 몸을 돌렸다. 야음에 가려진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또 그 소리야.”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디자 희붐한 빛자락에 수려한 얼굴선이 섬세히 드러났다. 라샤는 그 흔적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은 여전히, 저 얼굴만 봐도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데……. 억울한 마음에 울컥함이 말릴 새도 없이 치밀어 올랐다.

습윤해진 눈망울을 몇 번 깜박거리는 사이, 체데프는 어느새 침대로 돌아와 있었다. 턱을 그러쥐는 손길이 우악스럽지는 않으나 벗어나지 못할 힘이 실려 있음은 확실했다.

“저번부터 뭘 그만하자는 거냐고.”

“헤어지자구요.”

무표정을 하면 유독 도드라지는 차가운 인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헤어져……?”

체데프는 그녀의 눈동자를 샅샅이 파헤쳐 볼 요량인 양 집요히 응시하며 라샤가 입에 올린 말을 느릿하게 곱씹었다. 긴장감, 그리고 그를 아우르는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오래지 않아 체데프가 입꼬리를 사납게 비틀었다. 차게 식은 비소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라샤는 쪽, 소리와 함께 입술 위로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체데프의 입술을 멍하니 응시했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진다는 거지?”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건지, 아니면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건지. 아리송한 질문이다. 그 말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리는 라샤를 보며 체데프는 판판한 미간을 찌푸렸다.

“……읏.”

턱을 입술로 지분거리던 그가 미끄러지듯이 귓가로 이동해 보들보들한 귓불을 쭉 빨아들였다. 라샤가 예민하게 구는 성감대를 건드리는 게 체데프가 익히 행하는 섹스의 도입부였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뻗어오는 그의 손길을 피해 라샤가 몸을 비틀었다.

“싫어요. 지금, 지금은…… 하기 싫어.”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억지로 부추겨지는 쾌락에 취하고 싶진 않았다. 그 끝엔 초라해진 제 마음만 덩그러니 남을 게 뻔하니까.

무작정 들이대는 그를 피해 턱을 젖히고 어깨를 틀었지만, 체데프는 끈질기게 따라와 라샤의 여기저기에 입술을 비볐다. 시트를 짚고 있던 큼지막한 손은 어느새 동그란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체데, 흣, 체데프……!”

“나와 헤어질 수 있겠나?”

불현듯 귀청을 파고드는 음성에 심장이 쿵 떨어진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의 이별은 내내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순식간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지.

아, 라샤는 그제야 저도 한편으로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함께한 지가 자그마치 7년이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중 헛된 건 없다. 7년이라는 시간 속에 그들의 사랑은 무엇보다 분명하고 완벽한 형태로 녹아 있었다. 추억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이별은 그 시간을 통째로 부정하고 내다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도통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왠지 뒷골이 얼얼했다. 어쩌면 이런 말을 전함으로써 체데프가 자신을 간절히 잡아 주기를 원한 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아기……. 이제는 그녀의 배 속에 아무도 모르게 자리를 잡은 그의 씨까지 존재하지 않는가.

이 모든 걸 뿌리째 뽑아 내버린다는 건 생경함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여러 이유로 머릿속이 혼란하게 꼬였다. 체데프가 그런 라샤의 허리를 껴안으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난 너와 못 헤어져.”

“…….”

“그러니 다신 그따위 말 꺼내지 마.”

참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고백과 같은 말인데, 전혀 고백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여름, 풀벌레가 맹렬하게 울어댄 그 밤. 그의 마음이 진정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들은 고백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일 터. 당시 체데프가 쏟아내던 감정과 지금의 고백은 밀도도, 농도도 달랐다.

그 반증인 양 라샤의 심장은 설렘의 진동 없이 거뭇하게 가라앉기만 했다.

체데프는 관계를 거부하는 그녀를 억지로 안는 대신 욕실로 향하기를 택했다. 몸을 일으키기 전 하복부가 성성하게 발기해 있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욕실에서 뺄 생각인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자신이 싫어하면 억지로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다.

어느새 또, 홀로 남겨진 침실 속에서 라샤는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으니까. 온기를 찾아 헤매듯, 아직은 판판한 배를 문지르는 손길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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