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외전
* * *
속싸개와 겉싸개에 돌돌 말려 있는 아기는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머리 반, 몸 반인 2등신 생명체가 이렇게도 사랑스러울 일인가.
은서는 감격에 젖은 눈으로 품에 안은 아기를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하루가 지났건만, 아기의 탄생은 여전히 꿈처럼 신기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귀엽고 깜찍한 아이가, 내 아들이라니.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막중한 책임감과 벅찬 감동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를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도 있고, 폭풍우도 용감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차강혁 씨랑 완전히 똑같이 생겼어요.”
아기답지 않은 비범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은서는 그렇게 말했다.
커다란 눈, 흑색의 짙은 눈동자, 높은 콧대와 도톰한 입술은 누가 봐도 차강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심지어 아기 주제에 턱 선까지 다부졌다.
이 아이는 분명, 장래에 강인한 테스토스테론을 마구 내뿜으며 온갖 여자들을 잠 못 들게 만들 테지.
“도진이는 내 아들이니까.”
아기의 이름은 ‘도진’으로 정해졌다. 차도진. 유 회장이 유명한 철학관에서 받아 온 이름이라고 했다.
“틀렸어요. 도진이는 ‘우리’ 아들이죠. 우리가 함께 만든 아이라구요. 엄연히 따지자면, 고생은 내가 다 했으니까 나를 더 많이 닮아야 해요.”
은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가며 견고하게 말했다.
“근데 이 얼굴을 좀 봐요! 대체 내 유전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내가 열 달 넘게 품어서 낳았는데, 내 유전자는 하나도 없어!”
아빠를 지나치게 닮은 아들을 보면서 은서는 억울하다는 식으로 토로했다.
은서의 유전자는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아이의 외모에서 은서를 닮은 구석은 없었다. 굳이 찾아내자면, 잔흔 하나 없는 뽀얀 피부 정도일까.
그러나 뽀얀 피부도 아이가 자라서 아빠를 닮아 운동을 좋아하게 된다면, 햇볕에 구릿빛으로 근사하게 그을리고 말 것이다.
“날 닮아서 잘생겼잖아. 남자답고.”
“…….”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뻔뻔한 그 말에, 은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도진이는 아빠를 닮아서 남자답게 잘생겼다. 선이 굵은 이목구비와 뚜렷하고 진한 인상, 2등신 주제에 솔솔 풍기는 늠름하고 당찬 기운은 모두 차강혁의 유전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엄마인 저를 닮았어도 그럭저럭 잘생겼겠지만, 아빠를 닮은 만큼은 아니었을 테지.
만약 도진이가 자신을 닮았다면, 이목구비는 올망졸망했을 테고 연한 인상에 다소 유약한 기운을 풍겼으리라.
“도진아, 부디 아빠 성격만큼은 닮지 말렴.”
아기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은서는 당부하듯 말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절절하게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차강혁의 성격마저 닮아 버린다면, 보나 마나 여자들 가슴에 대못이나 박고 다니겠지.
“하지만 머리는 닮아도 좋아. 아빠는 두뇌가 비상해서,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시거든.”
싱긋 미소를 짓고 남편의 장점을 칭찬했다.
그는 성격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지만, 장점 또한 분명한 남자였다. 그의 장점만을 쏙쏙 물려받는다면, 도진이는 장래에 멋지고 훌륭한 남자로 성장할 것이다.
“운동 능력도 꼭 닮아라. 한국인 최초로 북미 풋볼 리그의 쿼터백이 되는 거야.”
귓바퀴를 지그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은서는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서 기겁했다.
“지금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풋볼이라니, 말도 안 돼!”
소중하고 소중한 도진이에게 풋볼처럼 위험천만한 스포츠를 시킬 수는 없었다.
“도진아, 운동은 하지 않아도 좋아. 정 하고 싶다면 삼촌처럼 골프를 하렴. 골프는 정신과 육체를 모두 단련시켜 주는 스포츠거든.”
무엇보다 안전하고. 적어도 풋볼처럼 상대방 선수와 쾅쾅 충돌해서 뇌를 다치는 일은 없지 않은가.
“풋볼도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켜 준다고. 골프보다 훨씬 더 강하고 혹독하게.”
차강혁의 주장에 은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무조건 안 돼요. 하늘이 두 쪽 나도 우리 도진이한테 그런 위험한 스포츠는 안 시킬 거야! 차강혁 씨, 우리 도진이 앞에서 풋볼의 ‘풋’ 자도 꺼내지 말아요! 이건 경고야!”
눈에 심지를 활활 불태우며 은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목소리를 냈다.
차강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손까지 파르르 떨어가며 과민 반응하는 아내의 모습이 제법 깜찍해서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도진이 앞에서 아내와 티격태격하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른인 제 입장에서야 장난이지만, 아기인 도진이는 짓궂은 장난에 혹여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우리 도진이는 어쩜 이렇게 예쁠까. 심장 아프게.”
숨까지 씩씩거려가며 흥분을 하던 은서는 아기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금세 평온을 찾았다. 검지 끝으로 통통한 뺨을 살포시 두드리며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자신의 배 속에서 이토록 귀여운 생명체가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분명 기적일 거야.
“아, 차강혁 씨랑 안 닮은 부분 찾았다!”
아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던 은서가 크나큰 발견을 한 것처럼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울 도진이는 심장에 해로울 만큼 귀여운데, 차강혁 씨는 전혀 안 그래요.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라구요.”
다소 공격적인 말이었지만, 차강혁은 감정적 동요가 일절 없었다. 늘 그렇듯 낮게 가라앉은 차분한 음성으로 무심하게 반응할 뿐이다.
“내가 귀엽기까지 하면 반칙이야.”
은서는 시선을 옮겨 차강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은 눈이 부실 만큼 근사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유구하게 전승되어 오는 전설이나 신화에서는 종종 완벽한 외견을 가진 남자가 등장하고는 한다.
‘완벽한 외견’이라는 건 아마도 이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일 테지. 그는 전설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미남과 견주어 봐도 부족함이 없다.
이 반반하고 잘난 얼굴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여자들을 함락시킬 것이다.
거기다 운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는 또 어떠한가. 압도적인 장신과 광활한 어깨, 갑옷 같은 근육은 몰래 군침을 삼키게 할 만큼 육감적이다.
그는 너무 섹시하고 잘생겨서, 귀여울 틈이 없는 남자다.
은서는 넋 놓은 시선으로 그를 빤히 주시한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반칙이네요.”
* * *
신생아실에 도진이를 재우고, 은서는 병원 침대로 와서 편하게 누웠다.
“에구구…….”
눕자마자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쓰라렸다.
출산의 고통은 아기를 낳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을 온몸에 각인이라도 시킬 기세로 뼛속 깊이 남아서, 산모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는 것이다.
“많이 아파? 간호사를 불러올까?”
차강혁은 손을 잡아 주며 자상하게 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가 고통에 사로잡힌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주는 듯했다.
은서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는 손등에 입술을 쪽, 맞춰주었다. 손등으로 닿는 포근한 질감이 기분을 고양시킨다.
숱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은 건 정말이지 기쁜 일이었다. 도진이는 우리 사랑의 증거니까.
“아, 줄 게 있어.”
차강혁은 잠시 손을 놓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소파 위에 놓여 있는 브리프케이스를 열어 무언가를 꺼낸다.
하얀색 엽서 봉투였다. 그는 그 봉투를 들고 와 은서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건네받은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예요?”
“출산 선물.”
“선물? 뭔데요?”
이 납작한 봉투 안에 대체 뭘 넣어 뒀을까? 엽서 말고는 들어갈 게 없어 보이는데. 설마, 엽서가 선물은 아니겠지.
은서는 빠른 손길로 봉투를 뜯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푸르른 바다 위에 고고하게 떠 있는 요트 한 척을 찍은 사진이.
“달랑 사진 한 장이…… 출산 선물이라는 건가요?”
생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선물이 고작 사진이라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하나 더 있어.”
그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조그마한 SD카드를 건넸다.
그럼에도 은서의 만면에서 실망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SD카드 안에 괜찮은 선물이 들어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SD카드 안에 보석이나 옷, 구두, 가방 등을 집어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휴대폰에 SD카드를 꽂아 넣었다. 메모리 파일 안에는 설계도가 있었다. 은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설계도 말이다.
“차강혁 씨는 매번 참신한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내놓는군요? 고양이 오뎅 꼬치, 방울 목걸이에 이어서 사진과 설계도? 이딴 걸 출산 선물이라고 주다니, 출산이 장난으로 보여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서운함이 골수까지 사무친 은서는 눈을 앙칼지게 치켜뜨고 소리쳤다.
“당신을 생각하며 공들여 제작했는데 이딴 거라니, 조금 상처가 되는걸.”
“네? 제작이요?”
모호한 그의 말에 은서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만면은 어느새 물음표로 대치되었다.
“사진과 설계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라고.”
은서는 사진과 설계도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사진 속에 떠 있는 요트와, 3D 설계도가 구현해낸 요트는 아주 흡사해 보였다.
설마……
“요트가…… 선물이에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차강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제 은서의 얼굴은 경악으로 만연해졌다. 입을 턱 벌린 채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선물로 요트를 받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
“내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어.”
“…….”
“지금 거제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
“몸이 회복되면, 함께 이 요트를 타러 가자.”
차강혁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은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은서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선물이었다. 요트라니, 그것도 그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요트라니!
그는 이 선물을 오랫동안 준비했을 것이다. 어쩌면 제가 임신하기 전부터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요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안 그래도 바쁜 남자가 시간을 쪼개 가며, 오직 저를 위해 근사한 요트를 만들었다니.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감동이 분수처럼 피어올랐다. 눈시울은 뜨거워지고 시야는 흐릿해졌다.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손등으로 눈을 재빠르게 비벼 흐르려는 눈물을 닦아 냈다. 눈물을 쓱쓱 훔쳐 낸 은서는 선명해진 시야로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요트였다. 날렵하게 뻗은 하얀색의 기체가 가슴을 뭉클거리게 만든다.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런 선물은 처음이야…….”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이야말로 내게 최고의 선물을 줬는걸.”
“……무슨 선물이요?”
“도진이 말이야.”
은서는 젖은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오해했다. 그는 출산을 장난으로 볼 남자가 아닌데. 그 누구보다도 제 고통을 이해해 주고, 출산이 가져다줄 기쁨에 고마워할 줄 아는 남자다.
“근데 요트가 상당히 큰가 봐요. 헬기까지 있네요.”
요트의 갑판 한쪽에는 검은색 헬리콥터가 세워져 있었다. 헬리콥터까지 실을 만큼의 크기라면, 평범한 요트는 아니리라.
“길이가 백 미터 정도 돼.”
“배, 백 미터요?”
가공할 만한 크기에 은서는 말까지 더듬었다. 늘 느끼지만, 이 남자는 중간을 모른다.
“5600마력의 엔진이 3대 설치되어 있지. 침실, 욕실, 다이닝 룸, 라운지와 연회장, 헬기장, 차고, 피트니스 룸, 당신을 위한 작업실, 그리고 스파와 야외 수영장까지 있어.”
“……그 정도면 요트가 아니라, 유람선 아닌가요?”
이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도 무방할 듯싶었다. 요트 안에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은가.
“난 수영도 못하는데, 수영장은 왜 만들었어요?”
“가르쳐 줄게.”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데요.”
“그럼 그냥 물장구나 치라고.”
순간 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만든 거 아니에요?”
차강혁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남자다. 이 남자는 혀를 내두를 만큼 음탕하니까.
“내가 비키니를 입었으면 좋겠죠? 꿈도 꾸지 말아요.”
은서는 새침데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자못 도도하게 말했다.
“아니, 난 유은서의 수영복 입은 모습 따윈 바라지 않아. 물론 비키니도 사양이고.”
담백한 반응에 은서가 놀랍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 변태가 수영복에, 그것도 비키니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니. 혹시 아들이 태어나서 변하기라도 했나? 생명의 신비로운 탄생에 벅찬 감동을 느낀 나머지, 성욕이 줄어들기라도 한 걸까?
“난 그저 당신이 나체로 물장구를 쳤으면 좋겠어. 당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차강혁은 차강혁이다. 무엇도 그의 음란한 열정을 무너뜨릴 순 없다.
은서는 본인의 짧은 생각에 반성했다. 고작 비키니 따위가 그의 욕정에 가당키나 할 텐가. 저를 벗겨 먹어야 만족할 남자인걸.
“인어 같을 거야.”
그는 은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은서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바다 위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물속에서 젖어 있으면, 인어공주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겠지.”
낯간지러운 칭찬에 입가가 살살 간지럽다. 결국 못 참고 웃음이 삐져나왔다. 은서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웃다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인어공주는 조개로 가슴을 가리고 있어요. 걔도 가릴 데는 다 가린다구요.”
“그럼 당신 가슴은 내 손으로 가려 줄게.”
그가 가슴을 움켜쥐려고 하자, 은서는 재빨리 그의 손을 탁 쳐내고 간신히 가슴을 사수했다.
“틈만 보이면 변태 짓이야.”
은서는 눈을 흘기고 다시 사진 속의 요트를 감상했다. 요트가 너무나 근사하고 예뻐서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요트 이름이 ‘베스트’인가 봐요?”
하얀색 기체에는 바다와 어울리는 푸른색으로 ‘B.E.S.T’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이건 약자잖아. ‘베스트’가 아니라 ‘비이에스티’.”
“무슨 약잔데요?”
“Beautiful Eun Seo Ti amo.”
미칠 듯이 오글거리는 단어를, 그는 실로 당당하게 내뱉었다. 은서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손바닥으로 팔뚝을 살살 문지르다, 이내 눈꼬리를 휘면서 키득거렸다.
“뭐야, 너무 유치해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오글거리고, 닭살 돋는 요트 이름이 아닐까.
은서는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고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온몸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치해서 죽을 것 같아. 손발이 다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야.”
키득키득, 그의 품 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근데 너무 좋아요.”
그의 사랑이 세포 하나하나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느낌이다.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다.
“그럼 나체로 수영장에서 물장구쳐 줄 거지?”
귓바퀴로 더운 숨이 닿으면서 음란한 말이 쏟아진다. 정말이지 이 남자 앞에선 틈을 보일 수가 없다니까.
은서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그의 다부진 턱을 고양이처럼 앙 깨물었다.
“개소리엔 매가 약이에요!”
* * *
병원에서 퇴원한 은서는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아무래도 집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차강혁은 아내의 몸이 잘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해 두었다.
그가 고용한 영양사는 산모를 위해 최선의 식단을 짰고, 5성급 호텔 출신의 유능한 셰프는 그 식단을 기반으로 완벽한 음식을 만들어서 은서에게 제공했다.
요가 강사와 마사지사는 정해진 시간에 저택을 방문해 은서의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주었다.
신생아인 도진이의 건강을 체크할 소아과 의료진과, 산모의 건강을 책임질 산부인과 의료진이 저택에 늘 상주해 있었고, 숙달된 베이비시터들이 도진이를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왔어요?”
산후조리 이틀째, 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은서를 찬찬히 훑어 내릴 뿐이었다.
“발이 왜 그 모양이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심하게 꿰뚫어 본 그는 대뜸 은서의 복장을 지적했다. 지금 은서는 양말을 신지 않고 있었고, 그 점이 이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몸을 항상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했잖아. 맨발로 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지금 보일러가 몇 도로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요?”
높은 온도로 보일러를 계속 가동한 탓에 저택 안은 폭염을 맞이한 여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더웠다.
이런 후끈한 열기 속에서 양말까지 챙겨 신어야 하는 건 곤욕이다. 은서는 불만스럽다는 의미로 눈을 가늘게 흘겼다.
저택 안이 용광로처럼 뜨거운 건 모두 이 남자 탓이었다. 이 남자가 집을 따뜻하게 하라고 홍 집사에게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유난이야, 정말.’
혈관 속에 피가 아니라 얼음이 흐를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냉철한 비즈니스맨 차강혁이 아내의 건강에 이토록 집착맞게 신경 쓰고 간섭한다는 걸, 사람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보일러 온도와 상관없이, 양말은 꼭 신어야 해.”
“싫어요. 답답하단…… 으악!”
차강혁 특유의 버릇이 나왔다. 은서를 종잇장처럼 가볍게 들어 버리기. 그는 은서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복도를 척척 걸어갔다.
“뭐야, 왜 이래요? 내려줘요!”
은서는 다리를 요란하게 뒤흔들며 앙탈을 피웠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반항이 먹혀든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다. 차강혁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남자였다.
그는 은서의 칭얼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그는 푹신한 가죽 소파 위에 은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랍장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양말이었다. 그것도 알래스카에서나 신을 법한 두툼한 양모 양말.
커다란 손에 쥐어진 양모 양말을 보자마자 은서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은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은서의 가느다란 발목을 그러잡았다. 그는 말괄량이 귀족 아가씨를 돌보는 성실한 집사처럼, 하얀 맨발에 두툼한 양모 양말을 억지로 신겼다.
당연히, 말괄량이 귀족 아가씨는 집사의 독단적인 행동에 왈칵 성을 냈다.
“차강혁 씨, 정말 이러기예요? 지금 나를 군고구마처럼 익혀 버리고 싶은 거예요?”
은서가 신경질을 부리며 양말을 벗으려고 하자, 그는 강한 악력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아 행동을 제지시켰다.
“난 당신을 보호하고 싶을 뿐이야.”
그는 시선을 곧게 맞대고 엄격하게 말했다.
“양말을 신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상당히 중요한 거야. 출산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당신에겐 특히 더 중요하지. 지금 몸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나중엔 뼈마디가 쑤실 거라고.”
“…….”
“난 유은서가 아픈 꼴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괴상한 말투였다. 낮은 목소리는 상냥한 듯하면서도 강압적이었다. 이 남자는 말투마저도 변태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말투에 은서의 고집이 꺾였다. 그녀는 남편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식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동의에 그는 지그시 미소를 짓고, 양말을 신긴 발등에 살포시 입술을 맞췄다.
“도진이는?”
그제야 그는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차강혁은 순서가 명확한 남자였다. 첫 번째는 아내, 그다음이 아들이었다.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에게 있어 처음은 언제나 아내였다.
“자고 있어요.”
“그래. 우선 샤워부터 한 다음에 보러 가지.”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은서는 반듯한 눈길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드레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 낸다. 이윽고 셔츠가 벗겨지고, 갑옷처럼 단단한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자 연갈색 눈동자는 더욱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햇볕에 자연스레 그을린 피부와 판 초콜릿처럼 쩍쩍 갈라진 복근, 기막힌 사선을 그리고 있는 갈빗대, 널찍한 어깨와 두툼한 옆통이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도 아름답고 멋지다.
은서는 입술을 조그맣게 벌리고 감탄했다. 그때, 집요한 시선을 느낀 그가 검은 눈동자를 움직여 은서를 딱 주시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쳐다봐?”
“내 남편 내가 보겠다는데, 뭐 문제 있어요?”
뻔뻔하게 받아쳤더니 그가 피식 웃는다.
“문제 많아. 그렇게 앙증맞은 눈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확 쑤셔 박아 버리고 싶어지거든.”
거침없는 발언에 은서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금욕 중인 남편을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고작 내 시선만으로도 자극이 되는 걸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그의 바지를 바라보았다.
앞섶이 두둑했다. 저 바지 안에는 욕정에 사로잡힌 뱀이 가열차게 꿈틀거리고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 은서는 온몸이 화끈거렸다.
“금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유난은. 우리 도진이 낳기 직전, 새벽에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배가 풍선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나를 안고 어찌나 짐승처럼…….”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은서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일을 돌이켜 보니, 몸이 더 달아오르는 것이다.
그에게 유난이라며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사실은 저도 조금은 괴로운 상태였다. 마지막 섹스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산후조리가 끝날 때까지 부부 관계는 하지도 못할 텐데, 제 몸은 왜 이리도 성급하게 타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진짜 좋았었지.”
기억을 더듬으며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낮은 음성엔 열기가 진하게 배여 있었다.
그는 발을 내디뎌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손등으로 홍조에 젖어 든 뺨을 찬찬히 쓰다듬는데, 그 손길이 지나치리만치 음험했다.
“당신 배가 남산처럼 솟아올라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로 나한테 박혔었잖아.”
“…….”
“그 와중에 배 속에 있는 아기를 보호하겠다고 양손으로 배를 꼭 쥐고 암고양이처럼 낑낑거리면서 우는데, 진짜 귀엽고 예뻤다고.”
“…….”
“그때 생각만 하면, 다시 또 임신시켜 버리고 싶을 정도야.”
더티하기 짝이 없는 말에 등줄기가 아찔거렸다. 만삭 임산부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자라니, 대체 이 남자의 변태력은 어디까지일지 두렵기까지 하다.
은서는 제 뺨을 얄궂게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해롭다. 그의 지저분한 말솜씨와 음험한 손길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로울 게 전혀 없다. 하지도 못하는데, 성욕을 자꾸 끌어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몸만 안달 날 뿐이지.
은서는 선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고 쌀쌀맞게 말했다.
“샤워나 하러 가요. 난 침실에서 책 읽고 있을게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은서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선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 테니까.
그대로 드레스 룸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강한 힘에 의해 손목이 붙들렸다.
커다란 체구가 등 뒤에서 은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꺼운 팔뚝이 포박이라도 하듯 온몸을 세게 옥죄었다.
등허리로는 육식 짐승의 발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옷감을 뚫고 나올 기세로 등허리를 짓궂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정수리에 입술을 가볍게 묻고, 나른하면서도 위험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 앞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것도, 지금뿐이야.”
“…….”
“당신 몸 회복되면, 안 참아.”
“…….”
“손목, 발목을 다 묶어 버리고 침실에 감금시켜 둔 채로, 하루 종일 박아 대기만 할 거야.”
“…….”
“울어도 소용없어.”
“…….”
“울면 더 꼴리니까.”
살벌한 경고가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져서, 은서는 혼란스러웠다. 온몸이 찌릿찌릿거리고,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스파크가 튀어 버렸다.
* * *
은서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조금 뒤, 샤워를 마친 차강혁이 가운을 느슨하게 걸치고 침실로 들어왔다. 젖은 머리칼에서 은은하게 풍겨 오는 샴푸 향은 중독되고 싶을 만큼 청량했다.
은서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그를 관찰했다.
촉촉하게 젖은 그는 퇴폐적인 관능미를 진하게 내뿜고 있었다. 가운 사이로 감질나게 보이는 단단한 가슴 근육은 손바닥으로 쓸어 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어쩜 저렇게 맛있게 생겼을까. 아니, 멋있게! 맛있는 게 아니고, 멋있게 생겼다고!’
순간 잘못된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모음 하나의 차이였지만,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났다. 맛있게 생겼다니, 어쩜 그렇게 음탕한 실수를…….
아니, 어쩌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본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음탕한 실수가 아니라, 음탕한 본심이었을지도.
“유은서,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어.”
그는 파란만장하게 변하는 은서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툭 던졌다.
은서는 복잡한, 아니 음란한 사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내려놓고 머리를 짤짤 흔들었다. 그러나 뜨거운 욕망에서 해방되기엔 요원하다.
그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털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톡톡 튀는데, 그것마저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훅 벗어 던졌다. 근사하게 윤곽이 잡힌 나신이 드러나자, 은서는 기함하면서 소리를 꺅 질렀다.
“아, 왜 여기서 가운을 벗고 그래요!”
은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푹 덮어 가렸다. 물론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살짝 벌려서, 그 틈새로 잘 뻗은 나신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건 비밀이다.
“입을 옷이 여기 있는 걸 어쩌라고.”
그는 침대 위에 놓여 있던 홈웨어를 집어 들었다.
“내숭도 정도껏 부려야지. 아까 드레스 룸에서는 내 몸을 잘만 봐 놓고, 지금은 또 왜 이러나 모르겠군.”
“내숭이 아니라, 진짜 놀랐다구요! 아깐 상체만 봤잖아요! 세미 누드랑 전신 누드랑 같아요? 가운을 그렇게 막 벗으면 어떡해요?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구요.”
“아, 그래. 섹스를 몇천 번이나 하고 샤워도 함께 한 사이에, 알몸을 보여 줘서 정말 미안하게 됐군. 내가 선을 넘었어. 사과하지.”
차강혁은 시니컬하게 받아치고 옷을 입었다. 회색 트레이닝 팬츠에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편안한 스타일도 그는 찰떡같이 잘 소화해 냈다. 아무거나 대충 걸친 차림새였지만,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하지만 옷을 입은 모습에 약간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은근히 더 보고 싶었던 걸까. 그의 훌륭한 나신을. 음탕한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은서는 더욱 격렬하게 머리를 뒤흔들었다.
한편, 차강혁은 자신의 외양을 점검하듯 신중하게 훑어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군.”
그러더니 갑자기 은서의 손목을 잡아끌고 드레스 룸으로 데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은서는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그는 옷장 앞에 은서를 세워 놓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당신이 옷을 골라 줘.”
“……네?”
“슈트처럼 너무 차려입은 느낌이 들면 안 돼. 트레이닝복처럼 막 입은 느낌이 들어서도 안 되지. 자연스럽되, 조금은 옷차림에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해.”
은서는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뜬금없이 옷을 골라 달라니. 게다가 그의 청은 다소 까다롭기까지 했다.
“강혁 씨, 우리 지금 어디 가나요?”
“도진이를 보러 가잖아.”
“아니, 그러니까 잠든 아들을 보러 가면서 굳이 이렇게 옷을 신경 써서 골라야 해요?”
“서로 알아가는 단계잖아.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된 사이에 트레이닝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그 녀석이 실망할 거야. 그렇다고 슈트를 입으면 너무 무겁고 고압적인 느낌이 들겠지.”
기막힌 대답에 은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짚었다.
“차강혁 씨, 도진이는 어차피 당신이 뭘 입었는지 기억도 못 해요.”
“하지만 녀석의 잠재된 본능이 기억하겠지.”
급기야 은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난 가끔 차강혁 씨 머릿속이 너무 궁금해져요. 대체 그 잘난 머리통 안엔 뭐가 들어 있을까요?”
“별거 없어. 유은서가 꽉 들어차 있지.”
그는 검지 끝으로 옆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은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은연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기막힌 대답이 은근히 좋았다. 아니, 대놓고 좋은 걸까. 입꼬리를 씰룩씰룩거리며 옷장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적당한 옷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입어요.”
검은색 슬랙스와 흰색 셔츠였다.
아내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그는 이번에도 은서 앞에서 옷을 벗어 던졌다.
티셔츠를 벗고, 트레이닝 바지까지 벗으려는 순간 은서는 냉큼 몸을 돌려세웠다. 등 뒤에서는 트레이닝 바지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운동선수처럼 쩍쩍 갈라진 허벅지 근육이 두둥실 떠다녔다. 그 우람한 허벅지로 자신을 난폭하게 몰아세우는 장면까지…….
순식간에 마음이 동하면서 왠지 보고 싶어졌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을 때, 슬랙스를 입고 버클을 채우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은서는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과하게 들썩거리더니, 괜히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다 입었나 싶어서 돌아본 거예요! 차강혁 씨 허벅지를 훔쳐보려던 변태 같은 속셈은 손톱만큼도 없었다구요!”
“그래. 봤으면 단추나 채워 줘.”
담백하게 대답한 그는 셔츠를 걸치고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은서는 뺨을 수줍게 붉힌 채,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셔츠를 잠그는 순간, 음험한 풍경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까만 슬랙스가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강혁 씨, 바지가…….”
“알아.”
“대체 왜…….”
“왜긴 왜야. 꼴려서 그렇지.”
“……이 상태로는 도진이에게 갈 수 없어요. 빨리 가라앉혀요.”
시선을 아래쪽으로 흘긋 내리깐 그는 답지 않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흥분을 빨리 가라앉혀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은서는 그에게 ‘어서 애국가를 불러 봐요. 아니면 국제 정치와 경제 대해서 심도 깊은 고민을 해 봐요.’라고 조언을 해 주려다가, 별안간 마음을 바꿔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예기치 못한 행동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혼란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서는 양손으로 슬랙스의 버클을 풀려고 들었다. 사뭇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차강혁은 그녀의 대담함을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연약한 손목을 강하게 붙들어 잡아 그녀의 행동을 제어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일을 해결하려구요.”
은서는 볼록하게 솟은 그곳을 보란 듯이 직시하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는 작게 한숨 쉬었다.
“괜찮아. 당신이 해결해 줄 필요 없어.”
“그럼 이렇게 빳빳하게 세운 상태로 도진이를 보러 가겠다는 거예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급하게 굴지 마.”
은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응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그는 은서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은서는 얼른 바지 버클을 풀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재빠르게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끌어 내려 단단히 성이 난 페니스를 꺼냈다. 그가 방심한 사이, 일은 너무 빠르게 진척되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거대한 기둥을 살살 문지르자, 그의 얼굴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야릇한 자극에 쾌감을 느끼면서도 난감해하는 얼굴이다.
“유은서, 그만.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내에게 이런 걸 받는 건…… 개자식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지만 차강혁 씨는 개자식이 맞잖아요.”
명쾌한 해답에 그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아주 음탕하고, 불량하고, 불순한 개자식.”
은서는 입가에 싱긋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손을 놀렸다.
결국 그는 아내를 밀어내지 못했다. 감질나게 페니스를 만져 주는 그녀의 손길에 굴복해 버리고 만 것이다.
섬세하게 성감을 자극하는 손끝이 미칠 듯이 부드러웠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근사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볼록한 목울대가 거세게 일렁거렸다.
“하아…….”
제 손안에서 점점 커져 가는 페니스가 신기하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며 은서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가공할 만한 크기가 언제 봐도 놀랍다. 두툼하면서도 길게 뻗은 거근은 크기뿐만 아니라 모양마저도 완벽했다. 어쩜, 자지마저도 잘생길 수가 있을까.
딱딱해진 기둥 위로는 혈관이 불끈 도드라졌다. 그 또렷한 혈관이 점차 고조되어 가는 그의 흥분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은서는 마음이 들끓었다.
이내 귀두 끝으로 투명한 액이 맺혔다. 은서는 고개를 들어 올려 색욕에 빠져 흐트러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열에 찬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는 은은한 열기로 상기되었고, 냉철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초점이 이탈되었다.
은서가 좋아하는 얼굴이다. 칼끝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도 그는 멋지지만, 그보다는 흐트러진 얼굴이 조금은 더 좋다.
왜냐하면 이런 얼굴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으니까.
“강혁 씨, 너무 야해요. 벌써부터 이렇게 질질 흘리기나 하고.”
은서는 검지 끝으로 쿠퍼액이 번진 귀두 끝을 살살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는 페니스를 은서의 입술을 앞으로 바짝 들이밀며 서늘하게 명령했다.
“빨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강압적인 명령에 익숙해진 은서는 요염하게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투명한 쿠퍼액을 핥다가, 천천히 귀두 끝을 머금어 들어갔다.
츄릅츄릅, 입속에 페니스를 집어넣고 혀를 굴리면서 동시에 손으로는 기둥을 쥐고 빠르게 흔들었다. 한층 강해진 자극에 그는 더운 숨을 길게 몰아쉬며 은서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꽉 우그려 잡았다.
“우읍…….”
입속에 살짝만 밀어 넣었을 뿐인데도 거대한 페니스는 목구멍을 턱턱 찔러 댔다. 무시무시한 크기에 숨이 막히고 기침이 캑캑 쏟아졌다. 하지만 은서는 오럴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커다란 물건에 오히려 자극받을 뿐이다.
얼굴이 다 망가진 채로 페니스를 츕츕 빠는데, 배 속이 알알해지면서 아래가 차츰 젖어 들어갔다. 애액을 질질 쏟아내는 좁은 구멍은 강한 자극을 갈구하며 요망하게 벌름거린다. 성난 페니스에 마구 짓밟히고 농락당하고 싶은 것이다. 산후조리 기간만 아니었으면, 분명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어서 박아 달라고 애원했을 테지.
“으음…… 좋아요?”
감당도 못 할 장대한 페니스를 꿀떡꿀떡 삼키면서 도발적으로 물었다. 해끔하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선홍빛으로 달아올랐고, 깨끗하던 눈동자는 흥분으로 잔뜩 충혈되었다.
그 음란한 얼굴을 곧게 마주하며 그는 입꼬리를 짓궂게 끌어 올렸다.
“여전히 서툴러.”
“그래도…… 좋죠?”
대답을 채근하는 안달 난 목소리에 그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당연하지. 유은서 네 몸만 멀쩡했으면, 벌써 나한테 깔렸어.”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은서가 해사하게 웃었다. 페니스를 입에 가득 물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순수한 미소를 짓다니.
이중적인 매력에 그는 온몸으로 관통하는 쾌감을 선명하게 느끼며, 그녀의 뒷머리를 더 세게 쥐어 잡았다.
“그 앙증맞은 보지에 하루 종일 쑤셔 박고, 좆질만 하고 싶을 지경이야.”
열기로 갈라진 음성이 귓속을 저돌적으로 파고들었다. 은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의 더러운 말에 두려움을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짜릿한 자극제였다.
은서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쓰다듬으며 가열차게 페니스를 빨아 댔다. 고갯짓까지 하면서 페니스를 입에 쑤셔 넣었다 뺐다를 반복한다.
따뜻한 입속과 부드러운 혀끝으로 연신 자극을 주자, 그는 한계에 다다른 듯 신음에 가까운 격한 숨을 토해 냈다.
“은서야…… 쌀 것 같아.”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내뱉는 저속한 그 말이 왜 이리도 섹시할까. 은서는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어서 제 입 안에 그의 욕망을 실컷 싸 달라는 듯이.
그는 팽팽하게 성이 난 페니스를 손에 쥐고 격렬하게 흔들어 댔다. 이윽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하얗고 진한 정액을 입 안 가득 채워 넣었다.
“하아……!”
은서는 조그만 입술을 앙다물고 정액을 꿀꺽 삼켰다. 이런 지저분한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그의 혹독한 교육 때문이었다.
입 안에 든 정액을 삼키기는 했지만, 워낙 양이 많아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제법 되었다. 그는 검지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훑어 그녀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라고 했잖아.”
은서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꼭 쥐고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성실하게 핥아 먹었다.
손가락이 깨끗해지자 그는 이제 정액이 치덕치덕 묻은 페니스를 들이밀었다. 페니스에 묻은 정액도 깨끗하게 핥아 먹으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개자식다웠다.
그러나 그의 개자식스러운 행동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다. 은서는 당연히 시킬 줄 알았다는 식으로 군말 않고 혀를 날름거렸다.
할짝할짝, 혀끝으로 페니스에 묻은 정액마저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그러자 그는 잘했으니 칭찬을 해 주겠다는 듯, 큼지막한 손으로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 * *
열기를 식힌 부부는 아기방으로 향했다.
“내가 노크할게요.”
아기방 앞에 서서 은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차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최대한 살살 문을 노크했다.
방 안에 있던 베이비시터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 주었다.
“도진이 자고 있죠?”
“네. 아주 곤히 자고 있어요.”
밀담을 나누듯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은서가 속살거리듯 묻자, 베이비시터 역시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아기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 안에는 조그만 아이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가 왠지 경이롭고 감격스러웠다.
“우리 도진이, 천사 같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픈지, 은서는 양손으로 왼쪽 가슴을 꼭 짚고 말했다.
“천사 따위가 감히 어딜.”
천사조차도 도진이에겐 범접할 수 없단 말인가. 심하게도 팔불출스러운 그의 반응에 은서는 풉,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다음 날 오전, 은서는 산모를 위한 마사지를 받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개운하게 몸을 씻은 은서는 두툼한 샤워 가운을 입고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칼을 말렸다. 그런 다음,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편안한 홈웨어로 갈아입고, 하얀 맨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민이 되었다. 양말을 신을까, 말까.
집 안은 늘 그렇듯 적도에 있는 것처럼 더웠다. 양말을 신지 않아도 몸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강혁은 노할 것이다. 고작 양말 하나 안 신은 걸 가지고, 마치 세상의 중요한 이치를 어긴 것처럼 분노하고 걱정하겠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은서는 결국 서랍장을 열어서 양말을 꺼내 신었다.
두꺼운 양모 양말이 발을 감싸자 답답함이 밀려왔지만, 차강혁을 위해서 이 정도 답답함은 기꺼이 감수하리라.
그의 기대대로 온몸을 따뜻하게 중무장하고, 드레스 룸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도진아, 엄마 왔어.”
아기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도진이는 천천히 흔들리는 흑백 모빌을 말똥말똥 보고 있었다.
“분유 아직 안 먹였죠?”
은서는 침대 곁에 서 있는 베이비시터에게 물었다. 베이비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이요.”
타이밍을 잘 맞춰서 왔다. 은서는 화사하게 웃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도진이를 안아 들었다. 도진이는 엄마 품이 좋은지 칭얼거리지도 않고 푹 안겼다.
은서는 도진이를 안고 소파에 앉아 셔츠 단추를 풀었다.
“도진아, 맘마 먹자. 오늘은 분유 말고 엄마가 젖 줄게.”
우리 도진이는 분유보다 모유를 훨씬 더 좋아할 거야. 기대감에 잔뜩 차서 젖을 물렸다. 그런데, 빈 젖이다. 모유가 돌지 않아서 도진이는 빈 젖만 빨아야 했다.
“보통 이때쯤이면 모유가 나온다고 했는데…….”
기대감은 와르르 무너지고, 대신 실망감이 들어찼다. 은서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눈치 빠른 베이비시터는 민첩하게 분유를 타서 가져왔다.
“도진아, 미안. 오늘도 분유 먹어야겠다.”
은서는 셔츠 단추를 채우고 도진이에게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입술로 젖병을 꼭 물고 분유를 삼키는 모습이 정말이지 깜찍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더 아쉽고 실망스러웠다. 우리 도진이가 모유를 이렇게 맛있게 먹어 주면 정말 좋을 텐데.
도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기방에서 나온 은서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가 근심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교수님, 모유는 대체 언제쯤 나올까요? 오늘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오지가 않아요.”
“모유가 나오는 시기는 제각각이에요. 첫날 바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사나흘 정도 지나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일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하구요. 곧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시기에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니까, 마음 편히 지내세요.”
의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친절히 답변해 주었다.
은서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히 성마르게 굴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유가 더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 * *
어둠이 깔리고 저녁이 찾아왔다.
도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기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걷는데 휴대폰에서 실로폰 소리가 울렸다.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이제 퇴근했어. 이따 집에서 봐.]
사소한 메시지에도 입꼬리에서는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은서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키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네. 오늘도 수고했어요.]
30분 후, 저택으로 돌아온 차강혁은 양말까지 꼼꼼하게 챙겨 신은 은서를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은서와 함께 도진이를 보러 갔다. 도진이는 신생아답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우리 도진이, 천사가 따로 없어.”
“천사 따위에 비교할 수가 없다니까.”
잠든 얼굴을 꽤 오랫동안 감상한 후에, 그는 은서의 손을 잡고 침실을 향해 걸었다.
안락한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불쑥 은서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출렁거리고, 연갈색 눈동자가 동요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오늘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알았어.”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중요한 사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은서는 의문이 서린 눈동자로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알았는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는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시선을 맞대며 은서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큼지막한 손은 거침없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젖몸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슴 마사지를 꾸준히 해 줘야 한다는군.”
세상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중요한 사실’이라는 게, 겨우 이거였나? 젖몸살? 가슴 마사지? 은서는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터뜨렸다.
“몸이 약해져서 만지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뭘 몰랐어. 가슴만큼은 부지런히 만져 줘야 하는 거였는데.”
셔츠 속에서 커다란 손이 가슴을 조몰락거렸다. 은서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탁, 때렸다.
“뭐예요, 진짜! 손 치워요!”
의외로 그의 손은 순순히 빠져나갔다. 너무 쉽게 물러나서 놀랍다고 느끼는 것도 잠시, 그는 셔츠 단추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마사지해 주려고.”
마지막 단추까지 끌러 낸 그는 셔츠를 열고, 브래지어를 확 끌어 올려 가슴을 꺼냈다.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피, 필요 없어요!”
아직 젖도 안 나오는데 마사지는 무슨. 사지를 발악하듯 뒤흔들며 반항했다. 그러나 어설픈 반항 따위, 그는 가볍게 묵살해 버리고 양손으로 가슴을 그러잡고 조물조물거렸다.
은서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그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사지를 해 준다면서 오일을 바르지도 않고 하다니, 세상에 이리도 어설픈 마사지가 어디 있을까.
‘젖몸살을 예방하기 위한 마사지’라는 그럴싸한 명목을 이용해서 그저 가슴을 만지고 싶은 것뿐이겠지.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점이 또 귀여운 것이다. 고작 가슴 좀 만져 보겠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을 생각을 하니, 괜히 차강혁이 귀여워 보였다.
은서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그가 손끝으로 튕기듯이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하아……!”
성감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능숙한 손길에 은서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건 완전 반칙이었다. 가슴 마사지라면서, 젖꼭지를 괴롭히는 게 어디 있는가. 눈을 새치름하게 흘겼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로 젖꼭지를 꾹 짓눌렀다가 떼었다.
그 순간, 젖꼭지에서 하얀 액체가 왈칵 흘러나왔다.
‘세상에. 드디어 모유가 나오다니!’
풍만한 젖가슴을 따라 희고 진한 모유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은서는 신기하면서도 감격에 젖은 눈으로 모유를 응시했다. 드디어 우리 도진이에게 모유를 먹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와, 우유 나온다.”
그 역시 신기한 눈으로 모유가 나오는 걸 빤히 지켜보았다.
“우유가 아니고, 모유거든요? 앗……!”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라고 지적하는 찰나, 그는 혀끝을 세워 젖무덤 위에 방울 모양으로 흘러내린 하얀 액체를 핥아 먹었다. 이내 젖꼭지를 입 안에 담고 쯉쯉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돌발 행동에 은서는 경기를 일으키며 기겁했다.
“가, 강혁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긴. 당신을 보살피고 있는 거잖아. 우유, 아니 모유를 제때 빼 주지 않으면 가슴이 팽팽하게 부풀어서 아프다고 했어. 당신 가슴 아프지 않도록, 내가 모유를 다 빼 줄게.”
실로 뻔뻔한 대답이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자길 위해서면서. 괴상한 욕정을 채우려고 변태 짓 하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는가.
은서는 뿔난 고양이처럼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든 말든, 그는 모유를 먹어 치운다고 여념이 없었다.
모유가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리는 젖가슴에선 단 내가 진동했다. 그는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채 단 내를 음미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동시에 젖꼭지를 열심히 빨아들였다. 혀끝으로 녹아드는 하얀 모유는 꿀처럼 달콤했다.
“그만…… 이건 우리 도진이 거예요…….”
안 되겠다 싶은지, 은서가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이 멸망해도, 유은서는 차강혁을 힘으로 이길 수 없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젖꼭지를 빨아 댔다.
“도진이 줄 거란 말이야……. 당신 거 아니야…….”
주먹을 말아 쥐고 어깨를 팡팡 때려 보기도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그런 짓을 해 봤자, 공연히 본인 주먹만 아플 뿐이다.
갖은 반항에도 그를 막을 수 없자, 은서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지었다.
“그만 먹어요. 도진이 먹일 거라구……!”
그때, 그가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은서를 일직선으로 곧게 바라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진하게 잡힌 얼굴은 상당히 엄격하고 단호했다.
“성스러운 부부 침실에서, 딴 남자 이름은 꺼내지 마.”
기막힌 소리였다. 차도진이 어째서 ‘남자’ 이름이란 말인가?
“도진이가 남자예요? 걘 우리 아들이잖아요!”
“나한테만 집중하라는 의미야.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아들 이름이라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요? 가슴 마사지 해 준다면서, 완전 자기 욕정만 채우고 있는 상황이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를 꺅꺅 질렀지만, 차강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젖을 빨아 먹었다.
츄릅츄릅, 고막을 연신 울리는 마찰음이 어이가 없을 만큼 부도덕하고 음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기막힌 상황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다리 사이였다.
절망스러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느껴버리다니.
그가 저를 보호한답시고 하반신 쪽으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손을 댔다면 분명 저를 음탕한 여자라고 실컷 놀려 댔을 것이다.
은서는 그의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스스로가 창피한 마음을 그에게 풀어 버린 것이다. 사정없이 머리칼을 쥐어뜯는데도, 그는 뭐가 좋은지 싱긋 웃는다.
봄처럼 싱그러운 미소에 은서는 또 다른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제 젖을 츕츕 빨아 먹고 있는 그가 사랑스러워 보여서…….
* * *
어쩌면 자신은 차강혁보다 더 심한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휩싸인 채 은서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꿈나라에 빠져 있던 은서는 이상야릇한 느낌에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흐린 시야를 차지해 오는 건 웬 까만 머리통이다. 익숙한 머리통이었다.
그 잘난 머리통은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아침부터 입질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젖꼭지를 쪽쪽거리면서 빨고, 달콤한 젖을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고막을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 도진이 거란 말이야! 그만 먹어요!”
소리를 앙칼지게 지르자,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까만 눈동자가 은서를 짙게 겨냥했다. 그의 눈은 흥분으로 충혈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다른 남자 이름 꺼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날 선 경고가 귓바퀴를 짓누르자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고함쳤다.
“우리 도진이가 왜…… 우웁!”
더는 들어 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손으로 은서의 입을 틀어막았다. 강한 힘이 얼굴 절반을 압박하듯 눌러 댄 탓에, 은서는 찍소리도 못하게 되었다.
악에 받쳐 발을 굴러 보기도 하지만, 그런 허접한 발차기에 당할 남자가 아니다. 주먹을 휘둘러 봤지만 역시나 의미 없는 몸짓이다. 오히려 손목만 잡혔을 뿐이다.
그는 은서의 입을 막고 몸을 단단히 결박시켜 놓은 채로,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즐겼다.
* * *
출근하기 전, 차강혁은 아기를 품에 안고 분유를 먹였다.
오묘한 광경이었다. 아기를 단숨에 잡아먹을 육식 짐승처럼 생긴 남자가, 아기를 소중하게 안고 분유를 먹이고 있다니.
안 그래도 작은 아기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안고 있으니 더더욱 작고 앙증맞아 보였다.
은서는 도진이가 부지런히 분유를 먹고 있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숙여 제 가슴을 흘긋 주시했다.
‘오늘 아침에는 도진이에게 모유를 꼭 먹이고 싶었는데…….’
어젯밤과 오늘 아침 연속으로 차강혁이 모유를 모조리 빨아 먹어 버린 탓에 나올 젖이 더는 없었다. 젖이 다시 돌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우유가 나와도 아기한테는 단 한 방울도 안 줄 거야. 내가 남김없이 다 빨아 먹을 거라고.」
불현듯 그의 목소리가 뇌리를 세차게 스쳤다.
언젠가 그는 자신을 난폭하게 안으면서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었다. 우리 아기에게도 양보해 주지 않겠다고. 달콤한 우유를 자신이 모조리 다 빨아 먹고야 말겠다고 무섭게 경고했었지.
‘미친놈. 진짜 자기가 다 먹고 말았잖아!’
결국 그의 뜻대로 된 것 같아 소름이 훅 끼쳤다. 은서는 닭살이 오돌토돌 돋아난 팔뚝을 슬슬 쓸어 만지면서, 얄미워 죽겠다는 듯 도끼눈으로 차강혁을 째려보았다.
그는 꿀떡꿀떡 분유를 삼키는 도진이를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며, 세상에 이런 기쁨은 없다는 듯 아주 밝고 환하게 웃었다.
“도진아, 맛있어?”
발끝이 간질간질해질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아들에게 말을 붙였다.
“아빠가 먹여 주니까 더 맛있지?”
순간, 은서는 바보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냉혈한 차강혁이 설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 봄처럼 싱그럽게 웃으리라는 걸.
하지만 이제 그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는 여전히 지배적이고, 강압적이고, 제멋대로 굴지만, 빙벽처럼 차가웠던 그의 가슴이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충만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조그만 아기에게 푹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을 빤히 응시하며 은서는 배시시 웃어 버렸다. 이상하게 감격스럽고 기뻤다. 그가 내 남편이고, 우리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괜히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아, 동영상으로 찍어 둘까.’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그가 도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광경을 정성스럽게 촬영하기 시작했다.
촬영을 알아챈 그는 카메라 렌즈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환희에 가득 찬 미소를.
* * *
분유를 다 먹인 그는 부드러운 냅킨으로 도진이의 입 주변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한쪽 어깨 위에 도진이를 올리고, 손바닥으로 등을 살살 문질렀다.
이내 도진이가 트림을 했다.
“잘했어, 우리 도진이.”
고작 트림 한 번 했을 뿐인데, 그는 도진이가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이제 다시 누울까.”
그는 도진이를 아기 침대에 눕혔다. 은서도 촬영을 멈추고 그의 옆에 서서 침대에 누운 도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토실토실한 아기 배를 손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갑자기 그때, 도진이가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서 그의 새끼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은서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고사리처럼 조그만 손으로 아빠 손가락을 움켜쥐다니!
“세상에, 우리 도진이 지금 아빠 손 잡은 거야?”
“기특한 녀석.”
그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미소를 지그시 짓고 도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품에 아기를 꼭 안고 뽀뽀를 하려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순간, 은서가 질겁을 하면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뽀뽀는 안 돼요!”
은서가 엄격하게 외쳤다. 그는 미간을 약하게 구겼다.
“왜?”
“신생아는 면역력이 약하니까요!”
“그럼 언제 해?”
“18개월 정도 지나서요.”
“18개월? 그때까지 대체 무슨 수로 참으라는 거야?”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진해졌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18일 참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장장 18개월을 어떻게 참으라고.
은서도 아쉽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이 귀여운 생명체에게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뽀뽀를 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니까.
하지만 행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행동이 도진이에게 해를 끼칠까 봐, 억지로 충동을 꾹꾹 눌러 가며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입술 말고, 이마에 할게. 이마는 괜찮지 않아?”
그는 차선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은서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이마도 안 돼요.”
“그럼 뺨에 하지.”
“거기도 안 돼요.”
“손은?”
“안 돼요.”
“배는 어때?”
“안 된다구요.”
“발바닥은?”
“…….”
대쪽같이 아니라고만 하던 은서가 일순 대답을 망설이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간절해 보였다. 애절하게 빛나는 까만 눈은 ‘제발 발바닥에는 된다고 해 줘.’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 절실한 눈빛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던 은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신중하게 고심해 보았다.
잠시 동안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중대한 결심을 내린 듯 그녀는 자못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발바닥에는 뽀뽀를 허하도록 하죠.”
아내의 허락에 그는 온 우주를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아들의 조그만 발바닥에 열띠게 뽀뽀했다. 오른발에도 쪼옥, 왼발에도 쪼옥, 한 번으로는 부족하니까 다시 반복, 두 번으로도 부족하니까 또다시 반복.
“강혁 씨, 이제 그만해요! 내가 할 거니까!”
은서는 도진이의 발을 꼭 쥐고 발바닥에 쪽쪽, 입술을 맞췄다. 발이 어찌나 작은지 모르겠다. 요정처럼 자그마한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격한 감동이 몰려왔다.
도진이가 태어난 이후로 하루하루가, 아니 매 순간순간이 감격스러웠다.
“발이 어쩜 이렇게 작을까요.”
“그러게.”
“이렇게 작은 발도 점점 커져서, 어른이 되면 차강혁 씨처럼 300mm가 되겠죠?”
“내 발, 320mm인데.”
사실을 정정해 주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은서는 아연해하면서 입을 턱 벌렸다.
“하여간 너무 크다니까!”
“내가 커서 좋아하잖아.”
귓가에 걸쳐 드는 저음의 음성이 왜인지 묘하게 들렸다. 검게 빛나는 눈빛은 음험하면서도 짓궂어 보였다.
무언가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일 거라고, 은서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은 조종당하듯 그의 바지 앞섶으로 향했다. 저 바지 안에 감춰져 있는 크고 웅장한 물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 체온이 상승하면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러다 얼른 도진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도진이 앞에서 이런 망측한 상상을 하다니, 엄마로서 실격이다.
“네. 키도 크고 발도 커서, 좋긴 해요.”
은서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건전한 대답을 내놓았다. 능청스러운 반응에 그는 피식 웃음을 뱉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불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귀엽긴.”
* * *
오후 2시, 홍보팀 차윤혁 팀장이 차강혁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차강혁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고, 윤혁의 구두 굽 소리에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윤혁은 책상 위에 있던 액자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액자 안에는 몽실몽실한 아기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은서의 사진이 있었다. 차강혁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윤혁은 액자 속의 사진을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며 의문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진이는 분명 형을 닮았어. 근데,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 도진이는 엄청 착해 보인다구. 내가 재미없는 농담을 해도 웃어 줄 얼굴이야.”
선 굵은 이목구비는 영락없이 차강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분위기는 굉장히 많이 달랐다. 서늘한 카리스마를 피부처럼 지니고 있는 차강혁에 비해, 도진이는 따뜻하고 선해 보였다.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난 애가, 내 분위기를 닮으면 대체 어쩌자는 건데.”
그제야 강혁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윤혁을 곧게 쳐다보며 반박했다. 윤혁은 턱을 슬슬 매만지며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형은 아기 때도 도진이처럼 선해 보이진 않았을 것 같아. 분명 아기 때도 눈썹을 삐딱하게 세우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실없는 말에 차강혁은 비소를 흘렸다.
“봐! 비웃고 있잖아! 도진이는, 내 조카는 형처럼 남을 비웃지 않을 거야!”
윤혁은 검지 끝으로 비소에 젖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켰다. 동생의 유치한 언행에 차강혁은 또다시 비소를 던졌다.
“볼따구 진짜 빵빵하다.”
윤혁은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솜뭉치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미어터질 듯한 볼이 퍽 깜찍했다.
“귀엽지?”
“형한테서 이런 아들이 태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액자 속의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윤혁은 새삼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형이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자신이 삼촌이 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새롭고 신기했다.
또한 언젠가는 자신도 형처럼 아빠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용건은?”
강혁의 간명한 물음에, 윤혁은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본론을 꺼냈다.
“다음 주에 《글로벌 이코노미》랑 인터뷰 약속 잡혀 있는 거 알고 있지?”
《글로벌 이코노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경제 잡지였다. 차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그쪽 담당자랑 통화를 했는데 말이야.”
윤혁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후, 내쉬었다.
‘이런 종류의 부탁은 형이 들어주지 않을 텐데……. 하지만 도진이의 탄생으로 요즘 형 기분이 엄청나게 좋으니까, 혹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지도 몰라.’
윤혁은 난처하면서도 기대감이 깃든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형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조금은 얘기해 줬으면 하는 눈치더라.”
윤혁은 눈알을 도르륵 굴려 차강혁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이라 좀처럼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형수님이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고 2세도 태어났으니, 괜찮지 않아? 편하게 가족 이야기 하면서, 이참에 냉혈한 이미지를 벗고 가정적인 이미지로 어필하는 것도 좋을 듯한데…….”
“됐어.”
그는 구구절절 떠들어 대는 윤혁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칼 같은 거절에 윤혁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왜?”
“일은 일이고, 사생활은 사생활이야. 인터뷰 자리에서 굳이 내 생활을 떠벌릴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사생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그쪽에 확실하게 전해.”
‘공과 사’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보다는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인터뷰 자리에서 섣불리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가, 주체도 못 하고 떠벌릴지도 모르니까. 은서와 도진이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괜히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는, 주객이 전도되어 사업 이야기는 하나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쪽에서도 너무 깊게 들어가진 않을 거고, 그냥 표면적인 것만 대충 물어볼 텐데…….”
“안 돼.”
“혀엉…….”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고집부리지 마, 차윤혁.”
“휴…… 알았어.”
냉정으로 일관된 형의 대답에 윤혁은 더 이상 조르지 못하고, 맥없이 터덜터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넓은 사무실에 혼자 남은 강혁은 책상 위의 액자를 가까이 가져와, 사진 속의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퇴근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액자 위에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꼭 담은 뜨거운 뽀뽀였다.
* * *
차강혁은 예정대로 《글로벌 이코노미》와 만남을 가졌다.
먼저 세트장에서 표지 촬영을 한 후, 인터뷰를 진행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강혁과 마주 앉은 인터뷰어는 양해를 구하고 녹음기를 꺼내 작동시켰다.
인터뷰어의 질문은 예상을 어긋나지 않았고, 그는 성실히 대답했다.
삼우에서 새로이 개발 중인 무인 선박 프로젝트와 향후 선박 업계의 비전, 기업인으로서 목표 등에 대해서 그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쯤, 인터뷰어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차 사장님, 유은서 작가님과의 결혼 생활은 어떠신가요? 재벌가 잉꼬 커플로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사적인 질문에 검은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칼같이 대응했을 터.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냉정한 말 대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인터뷰 시간은 이제 7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다 했다. 남은 7분 동안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 그대로입니다.”
짤막한 대답에 인터뷰어는 생긋 웃었다. 사생활에 대해서는 늘 함구하던 차강혁에게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이따 편집장이 이 사실을 알면 만세를 하며 환호성을 내지를 테다.
“얼마 전에는 유은서 작가님께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요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한 선물인 것 같은데요?”
“별거 아닙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내에겐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아내를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사랑에 푹 빠진 냉혈한의 모습에 인터뷰어는 신기해하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요트 선물이 별거 아니라니, 유은서 작가님이 너무 부러워지는걸요? 얼마 전에는 아들이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뻔한 말이지만, 행복합니다.”
그는 견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면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정말 완벽하게 느껴져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는 일이, 이토록 완벽한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아내를 더 일찍 만나서 얼른 결혼했을 텐데.”
“유은서 작가님과 결혼을 늦게 한 걸, 후회하시는 건가요?”
“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유년 시절로 돌아가 아내부터 만날 겁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청혼할 거예요.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아내를 일찍 만났더라면, 더 일찍 행복해졌겠지. 사랑을 더 빨리 배우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으리라.
* * *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갔다. 생후 4주 차가 된 도진이는 그새 더 자랐다.
몸무게도 늘었고, 분유를 먹는 양도 늘어났다. 오랫동안 양수 속에 있어 쪼글쪼글하던 손발도 이제는 매끄러워지고 보드라워졌다.
한가로운 주말, 은서는 아기 침대에 누워 있는 도진이에게 초점 책을 보여 주었다.
보석 같은 눈망울로 초점 책을 보던 도진이는 잠이 오는지 스르륵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이내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흘리면서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도진아, 잘 자.”
은서는 베이비시터에게 도진이를 맡기고 아기방에서 나왔다.
침실로 들어간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잡지를 집어 들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출간될 《글로벌 이코노미》를 잡지사에서 미리 보내 준 것이었다.
표지에는 차강혁이 왕좌 같은 의자에 앉아 근사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이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잡지를 펼쳐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인터뷰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은서는 끝부분을 확인하고 눈이 커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유년 시절로 돌아가 아내부터 만날 겁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청혼할 거예요.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대외적인 자리에서 차강혁이 이렇게 달콤한 말을 했다니.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명치가 간질간질거렸다. 온몸으로는 열이 번진다.
은서는 잡지를 내려놓고, 침실에서 나와 서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서재에 차강혁이 있으니까.
업무에 열중하고 있을 그를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방해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그를 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는걸.
서재 앞에 선 은서는 노크를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예요. 좀 들어갈게요.”
문을 열자, 넓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차강혁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일이 잘 안 풀리나?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성급하게 찾아오긴 했는데, 어쩌면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노트북 화면에 꽂혀 있던 시선을 움직여 은서를 곧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느긋하게 움직였다.
“유은서 보지에 내 자지를 쑤셔 박고 비비고 싶다는 생각.”
“……네?”
“그 귀여운 구멍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됐거든.”
대낮부터 이 더러운 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함할 정도로 음란한 단어들에 은서는 아연실색했다.
이 남자, 일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일하면서 그런 음탕한 생각을 한다고? 은서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결혼식 영상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줍어하는 은서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면사포에 싸고 싶었어.”
하늘하늘 흘러내리는 면사포를 가리키며 그는 외설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기가 막힌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침실에서 본 잡지가 떠올랐다. 인터뷰에선 신사가 따로 없었는데, 여기엔 웬 변태가 있었다.
“미쳤어, 정말.”
은서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 쳤다. 욕설과 폭력에도 그는 지그시 웃으며 두꺼운 팔뚝으로 잘록한 허리를 감아 안았다.
“맞아. 나 유은서한테 단단히 미쳐 있다고.”
힘을 줘서 허리를 끌어당기자, 아담한 몸은 그의 무릎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심하게 움직이는 손끝에 은서의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짙은 음욕이 도사리는 목소리로 밀어를 속삭였다.
“키스해 줘.”
이런 달콤한 요구를 거부하는 방법 따윈 모른다. 은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고, 포근한 감촉이 녹아들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은서의 뒷목을 움켜잡고 조금 더 진하게 입술을 훔쳐갔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빨고, 자연스럽게 틈새를 벌려 혀를 밀어 넣는다.
요악한 혀끝은 그녀의 입속을 능숙하게 헤집었다. 키스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퍼졌다. 은서는 몸을 잘게 떨면서 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아…….”
진득한 키스 후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투명한 실이 연결되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단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는 베이비 키스를 쪽 하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따스한 입술은 그녀의 턱에 키스하고 아리따운 목덜미로 내려왔다. 설원처럼 하얀 목덜미에 이를 세워 검붉은 영역 표시를 남긴 그는 반듯한 쇄골에도 수컷의 흔적을 꾹 남겼다.
이윽고 그는 은서의 상의를 끌어 올리고, 브래지어를 살짝 내려 가슴을 꺼냈다. 순간, 달달한 젖내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는 마시멜로 같은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단 내를 맡으면서 양손으로 가슴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리자, 핑크색 젖꼭지가 딱딱해지면서 하얀 액체가 꿀처럼 흘러나왔다.
야릇한 광경에 그는 입매를 짓궂게 말아 올렸다. 그는 핑크색 젖꼭지를 입에 물고 츕츕 빨았다. 달콤한 우유가 혀끝으로 사르륵 녹아들었다.
“가, 강혁 씨…….”
‘이건 도진이 거예요.’라고 하려다가 은서는 그 말을 입속으로 간신히 삼켰다. 그런 말을 하면 그가 제 입에 재갈을 물리든가, 아니면 손바닥으로 입을 꽉 틀어막거나, 하여튼 좋지 못한 꼴을 볼 것이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욕정에 사로잡힌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체득한 은서는 선선히 그에게 가슴을 내어주었다.
“신기해. 빨 때마다 우유가 나와.”
“우유가 아니라 모유라니까요?”
“아무튼, 맛있어. 엄청 달고 진해.”
그는 탐욕스럽게 가슴을 빨아 댔다. 그렇게 좋을까. 모유를 꿀떡꿀떡 삼켜 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은서는 그의 뒷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손톱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젖꼭지를 자꾸 자극해 대는 통에 온몸이 저릿해졌다. 아랫배는 아릿하게 당기고, 다리 사이는 열로 뜨끈해졌다.
“하으…….”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이 새어 나갔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은서를 흥분시키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예민한 가슴에 그가 노련하게 자극을 주면 느낄 수밖에 없어진다.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은서는 입을 벌린 채 할딱할딱 단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그의 바지 위로 손을 뻗었다.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그의 페니스는 단단히 성이 나 있었다. 우람하게 서 있는 거근에 은서의 흥분은 더욱 가중되었다.
바짝 안달이 난 그녀는 바지 버클을 풀어 드로어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딱딱하게 기립한 페니스는 이미 쿠퍼액이 흘러나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누가 발정 난 짐승 아니랄까 봐. 은서는 싱긋 미소를 짓고 드로어즈 속에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만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욕구가 해소되지 않았다.
더 직접적이고, 더 자극적인 걸 원했다.
은서는 가슴을 열심히 할짝거리고 있는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떼어 냈다. 그의 입 주변으로는 하얀 액체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만.”
손으로 그의 입술 주변을 닦아 주며 은서는 자못 엄격하게 말했다.
“이젠 내 차례예요.”
은서는 그에게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드로어즈를 끌어 내리고 거대한 페니스를 꺼내서 입속에 앙 집어넣었다.
고개를 들고 그를 반듯하게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듯 성난 페니스를 빨아 먹었다. 츄릅츄릅, 외설적인 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운다.
* * *
8주간의 산후조리를 끝내고, 거제도로 왔다.
푸른 배 위에 떠 있는 웅장한 요트는 눈으로 직접 보니 훨씬 더 멋졌다. 이렇게 근사한 요트가 내 선물이라니. 바쁜 시간을 쪼개 가며 그가 이 요트를 설계하고 제작했을 생각을 하니 감동이 파도처럼 떠밀려 왔다.
은서는 그의 팔뚝을 꼭 붙잡고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강혁 씨. 너무 소중한 선물이에요.”
그는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살포시 입술을 맞췄다.
“그럼 올라갈까.”
은서는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아 요트 위에 올랐다.
넓은 갑판 위에 서서 내려다본 바다는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눈부신 태양 빛과 넘실거리는 바다가 만나 반짝반짝 빛나는 광경이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도진이도 분명 이 요트를 좋아할 거예요. 도진이 크면, 셋이서 꼭 같이 와요.”
좋은 곳에 있으니 자연히 아들 생각이 났다. 베이비시터에게 도진이를 맡기고, 둘만 좋은 곳으로 오니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은서의 낯빛이 다소 어두워지자, 강혁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정수리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그래. 그 녀석이 자라면, 이 요트를 타고 더 먼 바다로 나가자.”
자상한 속삭임에 은서의 표정이 사르륵 풀렸다. 은서는 몸을 돌려 그를 꼭 바라보았다. 짙은 시선이 엮여 든다. 서로의 눈 속엔 오직 서로만이 가득하다.
이내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상냥하게 훔쳐 갔다.
* * *
다이닝 룸에서 가볍게 브런치를 먹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컨과 소시지, 에그스크램블과 아보카도, 시저샐러드는 소박하고 평범한 메뉴였지만, 드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먹으니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요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요트가 워낙 넓어서,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했다. ‘구경’이라고 보다는 ‘산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아까 먹은 브런치는 금방 소화가 되었다.
“그럼 이제 수영이나 하러 가 볼까.”
“네?”
은서가 눈살을 찡그렸다. 수영보다는 다른 운동을 하고 싶은데. 산후조리도 끝났고, 의사도 이젠 부부 관계를 해도 된다고 했다.
저를 곧장 침실로 데려가 열정적으로 안아줄 줄 알았건만……. 난데없이 수영이라니, 김이 팍 샜다. 은서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틱틱거렸다.
“수영엔 젬병이라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난 아직 당신을 물속에 집어넣을 생각이 없어. 당신 출산한 지, 겨우 두 달밖에 안 됐으니까. 앞으로 1년 동안, 찬물을 조심해야 할 거야. 수영은 내가 하고, 당신은 선베드에 누워서 일광욕이나 해.”
결국 은서는 그의 손에 이끌려 야외 수영장으로 왔다. 수영장 주변으로는 선베드가 늘어서 있어서 일광욕하기에는 좋아 보였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올게. 당신은 저기 누워 있어.”
선베드를 눈짓으로 가리킨 그는 탈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은서가 그의 팔목을 붙잡고 옆에 딱 붙어 섰다.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을래요. 탈의실에 수영복 구비되어 있죠?”
은서는 마음속에 발칙한 계략을 품고 있었다. 노출이 많은 수영복을 입으면, 그의 욕정에 불을 붙일 수 있으리라.
물론 저번에 그는 비키니에 별 감흥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막상 제가 얇은 끈으로 이어진 비키니를 입고 눈앞에 살랑살랑 움직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것이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다. 욕망이 불꽃처럼 들끓어서 짐승처럼 몸부터 움직이겠지.
“수영복은 무슨 수영복이야. 당신, 체온 유지에 계속 신경 써야 한다고. 그냥 옷 입고 있어.”
그러나 그는 엄격한 말투로 은서의 발칙한 계략에 재를 뿌렸다. 은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산후조리도 다 끝났는걸요? 햇볕도 뜨겁고 기온도 적당해서, 수영복 입어도 괜찮아요.”
“유은서, 아직 네 몸 완전히 회복된 거 아니야. 산후조리 끝났다고 멋대로 풀어지면 안 돼.”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요?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어야지, 롱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입고 있으란 말이에요? 양말까지 신고?”
“그래. 그 옷차림 그대로 저기 얌전히 누워 있어.”
그는 은서의 손을 걷어 내고, 혼자서 탈의실로 가 버렸다. 계획이 무산되어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은서는 숨을 씩씩거리며 선베드에 누웠다.
대체 언제 나를 덮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금욕 기간이 오래되어서 분명 차강혁도 엄청 달아오른 상태일 텐데.
혹시, 그동안 내가 입으로 자주 풀어 줘서 쌓인 욕구가 별로 없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입으로 해 주지 말 걸 그랬나 봐.
아니야, 입으로 해 준 건 그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어. 내가 즐겼잖아. 서툰 오럴로 바짝 달아오른 그를 지켜보는 건,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골몰하고 있을 때, 탈의실에서 차강혁이 나왔다.
“와…….”
그를 보자마자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은서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허벅지에 착 밀착되는 타이트한 수영복을 입은 그는 정신이 쏙 빠질 만큼 섹시했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수영복 위로 여실히 드러나는데, 장관이 따로 없었다.
훤히 드러내 놓고 있는 상체는 또 어떠한가. 드넓은 어깨와 조각 같은 복근, 두꺼운 팔뚝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은서는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차강혁은 은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멋진 자세로 입수한 그는 접영을 하기 시작했다. 날렵한 동작으로 수면을 근사하게 가르는데, 은서는 또다시 사랑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영도 잘하는구나…….’
운동 신경이 타고난 모양이다. 나는 물에 뜨지도 못하는데.
은서는 그가 수영장을 휘젓는 모습을 넋 놓고 감상했다. 만약 수영을 제대로 했다면, 정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쉼 없이 접영을 하던 그는 수영장을 열 바퀴쯤 돌고 나서야 멈췄다. 목울대가 일렁거릴 만큼 가파른 숨을 토해 내며, 그는 수영모와 수경을 벗고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털었다.
숨 막힐 정도로 섹시한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는 은서는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흠뻑 젖은 몸에 어서 빨리 안기고 싶었다. 갑옷 같은 근육질의 몸에 부서지도록 안긴 채 목이 쉴 정도로 울고 싶었다.
“아, 단추를 다 채우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하네.”
욕망에 눈이 먼 은서는 다시 또 발칙한 계략을 꾸몄다. 일부러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푼 것이다.
그러자 물속에 서 있는 그가 은서를 향해 시선을 꽂아 넣었다. 은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그의 시선이 조금 더 짙어지고 뜨거워졌다.
세 번째 단추를 끌러내자, 하얀 블라우스와는 대비되는 도발적인 붉은색 브래지어가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물속에서 빠져나와 은서의 가녀린 몸을 확 덮쳤다.
“여우 같은 게.”
“내가 뭘요? 난 그냥 갑갑해서 단추 좀 풀었을 뿐인데.”
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능청을 떨었다.
그 잔망스러운 태도에 벌을 주듯, 그는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채 난폭하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굶주린 짐승처럼 숨을 그르렁거리면서 도톰한 입술을 벌려 혀를 엉겨 넣었다.
약탈하듯 입속을 헤집고 다니자, 은서는 숨이 부족한지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으음…….”
야릇한 소리에 자극받은 그는 더욱 격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면서, 힘줄이 불끈 돋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 만지작거렸다.
‘더 애태우고 싶었는데.’
눈동자를 살살 굴리면서 섹스를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 더 애태우고 더 안달 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애가 타고 안달이 나 버린 건 그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안 잡아먹고 대체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욕망이 폭주하고, 음욕은 불타올랐다.
수영복 바지 안으로는 페니스가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사냥을 시작하려는 독사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아…….”
그는 입술을 미끄러뜨려 찬찬히 아래로 내려왔다. 목덜미를 핥고, 쇄골을 스치고, 벌려진 블라우스 틈으로 입술을 묻는다.
소담하게 부푼 젖무덤 위에 쪽쪽 키스를 하다가, 이를 세워 앙 깨물어 버리자 검붉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아앗…….”
은서가 허리를 튕기면서 가냘픈 교성을 터뜨렸다. 검붉은 상처 위에서 그는 혀끝을 움직여 할짝할짝 핥아 댔다.
이윽고 브래지어를 살짝 끌어 내려 앙증맞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찰박찰박 빨았다. 달고 진한 모유가 목구멍을 타고 꿀떡꿀떡 넘어간다.
“흐읏…….”
그는 노련하게 젖꼭지를 희롱하면서 스커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팬티를 한쪽으로 젖히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벌려 보자, 안에 갇혀 있던 애액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좁은 구멍 속을 비집고 들어가 내벽을 얄궂게 긁어 댔다.
“하아앙…….”
성감을 능수능란하게 자극하는 혀끝과 손끝에 은서는 머릿속이 희미해졌다. 선명해지는 건 오직 본능뿐. 어서 그가 자신을 잔인하게 꿰뚫고 들어오기만을 고대할 뿐이다.
은서는 스스로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풀었다. 블라우스를 벗으려는 순간, 그가 은서의 손목을 강하게 부여잡고 단호히 명령했다.
“입고 있어.”
“……?”
“벗기지 않고 할 거야.”
이 와중에도 체온 유지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어차피 하다 보면 온몸에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져서 옷 벗어도 상관없는데.
그러나 은서에게 그의 강한 힘을 이길 재간은 없다. 그저 그의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좁은 구멍 속을 빠듯하게 채우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는 수영복 바지를 살짝 끌어 내려 쿠퍼액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 페니스를 쥐어 잡았다.
은서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스스로 스커트를 끌어 올리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끈적끈적한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요망한 음부를 보고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자신을 애타게 원하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그는 열띤 욕망을 단단히 응축시켜 놓은 거근을 젖은 음부에 찔러 넣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크고 거대한 페니스에 은서는 온몸을 자지러뜨리면서 울먹거렸다.
“아읏……!”
너무 커서 감당하기가 힘든데, 왜 이리도 좋은 걸까. 은서는 그의 팔뚝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전율했다.
천천히 허리를 놀리던 그는 은서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쳐 두고 본격적으로 박음질하기 시작했다. 퍽퍽, 투박하고 가열차게 쑤셔 박아 대는 몸짓에 선베드가 덜컹거리면서 밀려났다.
“하아, 강혁 씨…… 천천히…….”
“엄살 부리지 마. 유은서 네 보지는 좋다고 물고 조이고 있으니까.”
욕심맞게 페니스를 꽉 물고 늘어지는 좁다란 구멍이 그의 가학성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는 자궁까지 퍽퍽 찔러 가면서 터프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동시에 고개를 숙여 달콤한 모유가 질질 흘러나오는 가슴을 탐욕스럽게 빨았다.
거친 짐승의 몸짓에 은서의 눈이 충혈되면서 투명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좋았다. 너무 좋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더 세게 박아 달라고 아양이라도 떨듯, 골반을 튕기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 깜찍한 허리짓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살벌한 경고를 내렸다.
“오늘, 한숨도 안 재울 줄 알아.”
“흐으읏…….”
“하루 종일 박아 넣을 거니까, 잘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하으응…….”
간드러진 교성은 울음과 뒤섞여서 더욱 야하게 들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격하게 허리를 쳐올리며 그녀의 자그마한 구멍을 잔학하게 유린했다.
“하아, 은서야…….”
퍽, 퍽, 퍽, 한참을 흉포하게 쑤셔 박던 그가 아내의 이름을 울부짖듯 불렀다. 그는 페니스를 빼내고 하얀 모유로 번들거리는 젖가슴 위에 정액을 마구 흩뿌렸다.
달콤한 모유와 끈적끈적한 정액으로 뒤범벅된 광경이 아주 그럴싸했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그는 엉망으로 망가진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다, 그녀의 턱을 붙잡고 짙게 입을 맞췄다.
* * *
요트 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은 가장 먼저 아들부터 보러 갔다.
도진이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보석 같은 눈망울을 말똥말똥 뜨고 엄마, 아빠를 쳐다보는 모습이 어찌나 깜찍한지 모르겠다.
차강혁은 작고 소중한 도진이를 품에 안고 발바닥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러자 은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발바닥에 입술 도장을 꾹 찍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우리 도진이, 엄마 아빠 많이 보고 싶었지?”
“으갸갸…….”
놀랍게도 도진이는 정체 모를 소리로 응답해 주었다. 마치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일순, 은서와 강혁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강혁 씨, 우리 도진이가 방금…….”
“옹알이를 했어!”
첫 옹알이였다. 감격스러운 순간에 은서는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도진아, 방금 엄마 아빠 보고 싶었다고 말한 거 맞지? 그치?”
“크으응…….”
조그만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면서 소리를 내는데 심장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은서는 손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도진아, 이다음에 크면 그때는 엄마, 아빠랑 같이 여행 가자. 아빠가 근사한 요트에 태워 주실 거야.”
“으브브…….”
꼭 가고 싶다고 피력하듯 도진이는 만세 하는 자세를 취하며 귀여운 소리를 냈다. 결국 은서는 참지 못하고 감동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 * *
아들의 기념비적인 첫 옹알이에, 차강혁은 아내처럼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크나큰 감동을 받은 것은 틀림없었다.
그는 아들의 옹알이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사 왔다. 비서진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고른 선물이라고 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상자를 보며 은서는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아기 침대에 누워 있는 도진이를 향해 말했다.
“도진아, 아빠가 도진이를 위해서 선물을 사 오셨대. 무슨 선물일까? 궁금하지?”
“으파파…….”
도진이는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옹알이로 대답했다.
차강혁은 리본을 풀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은서는 박수를 짝짝 치다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니까, 도진이 선물이라는 게…….
“도진아, 이게 뭔지 알아? 풋볼 공이라는 거야.”
풋볼 공을 이제 갓 옹알이를 시작한 아들 선물이랍시고 사 가지고 온 것이다. 차강혁은 풋볼 공을 침대 안에 넣어 주며, 고사리 같은 아기 손을 그러잡아 공을 만지게 했다.
“만져 봐. 촉감이 신기하지?”
“크으흐흐…….”
“차강혁 씨,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은서는 침대에 있는 풋볼 공을 냉큼 꺼내 들고 서늘하게 말했다.
“당신, 나 좀 봐요.”
도진이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은서는 차강혁의 팔목을 붙잡아 서재로 끌고 왔다. 아기 앞에서는 싸워서 안 되니까,
“강혁 씨, 어떻게 풋볼 공을 도진이한테 선물로 줄 수가 있어요? 보통 아빠들은 인형이나 장난감을 선물로 준다구요! 그 어린애한테 풋볼 공을 줘서 대체 뭐 어쩌려구요!”
은서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누누이 말했듯, 우리 도진이한테 절대 풋볼은 안 시켜요! 이 공, 필요한 사람한테 갖다 줘요.”
은서는 풋볼 공을 서재 책상 위에 쿵 내려놓았다.
그는 버림받은 것 같은 풋볼 공을 아련하게 바라보다, 손을 뻗어 공을 꼭 쥐었다. 타원형의 공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단지, 내가 느꼈던 걸 그 녀석도 느껴 봤으면 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은서는 노기 서린 표정을 풀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조금은 어둡고 복잡해 보였다.
“어렸을 때 나는 항상 숨 막히는 압박감에 시달려 왔어.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의 기대가 내 가슴을 너무 무겁게 짓눌러서, 급기야는 질식할 것만 같았지.”
해묵은 과거 이야기에 은서의 눈동자에는 연민이 그득해졌다.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은 언제나 가슴을 저미고 아프게 만든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내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열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했어.”
“…….”
“그 시절 내가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경기장에서 풋볼을 할 때였지.”
“…….”
“팀원들과 의기투합해서 그라운드를 달리고 승리를 쟁취할 때면, 막혀 있던 숨통이 탁 트이면서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졌어.”
“…….”
“도진이도 내가 느꼈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해 봤으면 해서…… 선물로 풋볼 공을 준 거야.”
진솔한 고백에 은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눈가에 번진 눈물을 얼른 닦아 내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가여워 보이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강혁 씨, 당신은 아버님이 아니에요.”
“…….”
“당신은 우리 도진이에게 관용적이고 이해심 깊은 아빠가 되어 줄 거예요.”
“…….”
“내 단점과 상처를 사랑해 주었듯이, 우리 도진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사랑해 주겠죠. 그 아이가 무언가를 이루길, 그 아이가 높은 성과를 올리기를, 압박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을 거예요.”
“…….”
“나는 당신의 강철 같은 심장 속에 다정한 상냥함이 있다는 걸 아니까.”
“…….”
“차강혁 씨는 분명……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은서는 젖은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서 속삭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아내의 젖은 눈가에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 풋볼 공은 압수예요. 도진이는 당신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항상 자유로울 테니까, 풋볼 공은 필요 없다구요.”
은서는 그의 손에 있던 풋볼 공을 단호하게 빼앗았다. 압수한 풋볼 공은 그의 사인을 받아서 부부 침실에 장식해 두었다.
* * *
도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부부의 욕심은 커졌다.
어서 빨리 엄마, 아빠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진이에게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도진아, ‘아빠’ 해 봐. 아빠.”
“아브…….”
“아니, 아브가 아니고 아빠. 아빠.”
“아바바…….”
도진이는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소리를 냈다. 아빠와 비슷한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아직 아빠는 아니었다.
차강혁은 좀 더 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도진아, 다시. 아빠.”
“아쁘…….”
“아빠. 아빠라고 하는 거야.”
“아빠……!”
청각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아빠’라는 소리에 강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은서는 소리를 ‘꺅!’ 내질렀다.
그는 도진이를 품에 꼭 안고 등을 살살 쓸어 주면서 감격스러워했다.
“우리 도진이, 드디어 아빠라고 했구나. 기특해라.”
“도진아, 그럼 이제 ‘엄마’ 해 봐. 엄마.”
“아빠바…….”
“아니, 아빠 말고 엄마. 엄마.”
“아빠…….”
“엄마라니까. 엄마.”
“아빠…….”
그날 은서가 아무리 ‘엄마’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도진이는 끝내 ‘아빠’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서는 서운해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았다. 우리 함께 할 날들이 많으니까. 행복한 시간들이 꽃길처럼 펼쳐져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