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 * *
은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위험한 약이라고 했는데…….
“이 약…… 이제 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남아 있는 것도 없다고 했으면서! 나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그를 힐난하듯 말했지만 사실 그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은 전혀 없었다. 단지, 그가 걱정될 뿐이었다.
왜 다시 바이코딘에 손을 댔을까? 혹시 중독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아직도 바이코딘에 의지해야 할 만큼 통증이 심한 걸까?
“수술했는데도 통증이…… 줄어들지 않은 거예요? 아직도…… 많이 아파요?”
은서가 울먹거렸다. 속이 애타게 끓는다. 하루빨리 그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회복이 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가 욱신거렸다.
“조금.”
그는 간명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은서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또 거짓말이지……. 조금은 뭐가 조금이야!”
이 남자가 조금 아프다고 말하는 건, 어깨가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아프다는 뜻일 테다. 약한 모습은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남자니까.
아마도 그는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격통과 함께하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통증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참았을 거고…….
“대체 얼마나 아픈 거예요? 아프면 내색을 좀 해요! 혼자서 견디지만 말고!”
젖은 목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왜 나는 항상 늦게 알아야 해요? 나, 차강혁 씨 아내 아니에요? 나한테 뭐든지 다 말하기로 했으면서 또 숨기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해끔한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번져서 엉망이 되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고 은서를 꼭 안아 주었다.
“미안하다. 다시는 그 약 먹지 않을게.”
“흑…….”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울리고 싶지 않다고.”
“내가 단순히 약 먹은 것 때문에 이래요?”
“알아.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앞으로는 무엇이든 다 말할게. 숨기는 거 없이 전부 다.”
“…….”
“그러니까 제발 울지 좀 마. 당신 울 때마다 가슴 아파서 미쳐 버리겠다고.”
그는 은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은서는 그의 어깨에 젖은 얼굴을 꼭 묻고 훌쩍거렸다.
‘응석을 부리고 울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인데…….’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고 힘들다고 짜증을 내도 모자랄 상황에, 도리어 그는 어른스럽게 저를 달래 주고 있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이 남자가 너무 좋다.
빙벽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뜨거운 열정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는 그가, 야멸찬 에고이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희생적인 그가, 잔인하고 냉혹할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다정한 그가, 너무나도 좋다.
“난 언제나 강혁 씨 곁에 있어요. 당신이 기쁠 땐 같이 웃어 줄 거고, 당신이 힘들 땐 손을 잡아 줄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기대요.”
은서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진하게 맞추고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뒷목을 끌어당겨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숨결을 훔치고 마음을 훔쳐 갔다.
* * *
은서는 설 교수를 찾아가 그가 바이코딘을 복용한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루에 서너 알씩 한 달간 복용하신 거면, 위험한 수준으로 오남용한 건 아닙니다. 다른 의도로 복용하신 것도 아니고 통증 때문에 드신 거니까요.”
다행히도 설 교수는 그리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은서는 쉽게 안도할 수 없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긴장되어서 온몸이 경직된 상태였다.
“중독성이 심한 약이라고 하던데요…….”
“한 달 드신 거면 의존성이 발현되었다고 해도 아마 경미한 수준일 겁니다.”
“…….”
“바이코딘이 통증에 효과가 좋은 약이라, 중증도 이상의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겐 단기적으로 처방을 내리기도 합니다.”
“…….”
“문제는 차 사장님이 임의대로 바이코딘을 드셨다는 거지만요. 어깨가 워낙 아파서 그러셨겠지요.”
“수술을 했는데…… 왜 계속 아플까요?”
“수술을 한다고 통증이 곧바로 없어지지는 않아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며칠이 지나야 통증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입원을 시켜서 경과를 체크하는 거고요.”
은서는 한숨을 푹 쏟아 냈다. 그 독한 약을 몰래 먹을 만큼 아팠으면서, 제 앞에서는 괜찮은 척 웃고 싱거운 농담을 던지던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선 바이코딘을 당장 끊고 상태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
“금단 현상이 올 수도 있는데, 복용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서 금단 현상도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약물 중독 전문 센터와 연계하는 건 어떨까요?”
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최고의 의료진들을 붙여 치료받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설 교수는 온후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대답했다.
“앞으로 통증이 차차 줄어들면 바이코딘 생각도 더는 나지 않을 겁니다. 본인 의지로 끊을 수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
“혹시 상태가 심각해지면 전문 센터와 바로 연계를 하겠지만, 제 생각에 그런 단계로까지는 가지 않을 듯합니다.”
은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와 병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차강혁은 지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진통제가 추가되어 바늘을 통해 혈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은서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며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약은 내가 버렸어요.”
“잘했어.”
“혹시 남은 약이 더 있다면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줘요.”
“없어.”
불규칙한 숨을 내쉬며 그가 대답했다. 꽤 많은 양의 진통제를 계속 투여하는 중인데도 통증이 심한지 미간을 찌푸린다.
은서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제 존재가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 * *
낮에만 해도 그럭저럭 버티던 그는 밤이 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던 그가 갑자기 발작하듯 온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혁 씨,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하아.”
“강혁 씨, 내 목소리 들려요?”
“흣…….”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은서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짚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괴로운 신음만 내뱉고 대답조차 해내지 못했다.
그의 동공은 죄다 풀어져서 눈에 초점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몸은 계속 파들거리며 경련하고 있었고, 식은땀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강혁 씨, 조금만 참아요. 교수님을 불러올게요.”
늦은 밤, 설 교수가 긴급히 호출되어 병실로 왔다. 설 교수는 신중하게 그의 상태를 체크했다.
“전형적인 금단 현상입니다. 그리고 금단 현상 때문에 통증을 더욱 심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고요.”
“교수님, 심각해지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 사람, 지금 너무 괴로워 보이는데…….”
은서는 티슈로 눈물을 훔치면서 가냘프게 흐느꼈다.
“약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반응이 격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원래 초반이 제일 힘들어요. 이 시기를 잘 넘기면 좋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통제를 추가하고 진정제도 투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주사로 진정제를 투여하고 링거 병에 새로운 진통제를 주입했다. 그러자 경련이 서서히 잦아들고, 조금 뒤에 그는 잠이 들었다.
은서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어서 빨리 그가 이 고통에서 해방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넘어갔다. 곤히 자던 그가 또다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은서를 보고 천천히 손을 뻗더니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많이 아파요? 간호사를 불러올까요?”
은서는 그의 손을 꼭 겹쳐 잡고 초조하게 물었다.
“괜찮아.”
기운이라고는 없는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그는 대답해 주었다. 그나마 아까 전보다는 상태가 나은 것이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히 심한지 계속 거친 호흡을 하고 있었고, 꽉 다문 잇새로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은서는 간호사에게 잠깐 그를 부탁하고 부리나케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말보로 레드요. 아, 라이터도 주세요.”
편의점 직원이 담배와 라이터를 내어 주자마자, 은서는 황급히 낚아채고 초음속처럼 그에게 달려갔다.
“자, 한 대 피워요.”
은서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그는 사악한 통증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일 테니, 담배가 조금은 도움을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됐어.”
“왜요? 담배 좋아하잖아요.”
“안 피우기로 약속했잖아. 다시는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실망 안 해요. 그 약속 안 지켜도 되니까 담배라도 피워 봐요.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은서가 간절히 말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러나 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사양하지.”
끔찍한 고통 때문에 어금니를 꽉 물고, 명민하게 빛나던 눈은 탁해지고, 하얀 눈자위에는 빨갛게 핏발이 섰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마음 아프게.
“나중에 퇴원하고 나면 어차피 피울 거잖아요. 그냥 지금부터 펴요.”
“평생 안 피울 거야.”
“네?”
“완전히 끊을 거라고.”
“왜요?”
은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헤비 스모커가 담배를 완전히 끊겠다니. 새해도 아닌데 그런 다짐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순간, 초췌한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입꼬리를 지그시 끌어 올린 그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내한테 사랑받는 남편이 되고 싶으니까.”
약쟁이 주제에 사람을 끝까지 감동시킨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은서는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빠르게 훔쳤다.
“바보. 지금도 넘치도록 사랑하고 있거든요?”
“모자라. 더 받고 싶어.”
욕심 맞은 그의 대답은 은서의 마음을 더욱더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이런 귀여운 집착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라서 은서는 얌전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달콤하게 입을 맞춘 뒤에는 온 마음을 다해서 다부지게 말했다.
“줄게요. 차강혁 씨가 원하는 만큼 전부 다 줄게요.”
* * *
그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기운이 없었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식욕도 없는지 통 먹으려 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섹스조차 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발정이 나서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금욕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침대 시트는 언제나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를 악물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뱉는 것이 예사였고, 오한 때문에 스물네 시간 내내 몸을 으스스 떨고, 항상 호흡이 거칠었다.
밤이 되면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렸다. 가끔은 발작 증세를 일으켜 진정제를 투여해 간신히 안정을 시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은서는 습관처럼 그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은서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는 멀리 가지 않고 창밖을 보고 서 있었다.
요즘 그는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애처롭게 누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렇게 긴 다리를 뽐내며 서 있는 모습이 사뭇 낯설게 다가왔다.
“일어났어요?”
은서는 적당한 볼륨의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창밖을 내다보던 그가 몸을 돌려 시선을 부딪쳐 왔다.
“기분은 좀 어때요?”
“상쾌해.”
“네?”
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요즘 매일같이 그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그는 매번 ‘좆같아.’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상쾌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상쾌하다는 말과 어울리게 표정도 밝아 보였다. 은서의 마음속에서 낙관적인 희망이 움텄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보호자 침대 위에 걸터앉고는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곱게 빗어 주었다.
“어깨가 별로 아프지 않아. 통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군.”
“정말요? 다행이네요.”
하얀 얼굴은 희색으로 만연해지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춥지도 않고 몸이 떨리지도 않아.”
“식은땀도 안 흘리고 눈동자도 선명해요.”
땀방울 하나 없는 그의 매끈한 이마를 은서는 손바닥으로 쓰윽 만져 보았다. 항상 여기에 식은땀이 맺혀서 안쓰러웠는데 오늘은 깔끔하기만 하다.
설 교수의 의견대로 금단 현상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천만다행이었다.
은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줄곧 걱정과 불안으로 졸아들던 가슴에 이제야 조금은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앞으로도 계속 더 좋아지길. 그래서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야만적인 짐승, 차강혁으로 어서 돌아오길.
당신이 무탈하기만 하다면 난 얼마든지 괴롭힘당해도 좋으니까.
“《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는 질문이라 은서는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학부 때 영화 수업 들으면서 봤어요. 왜요?”
“그 영화에서 프랭키라는 이름을 가진 헤로인 중독자가 나오지.”
“…….”
“프랭키는 연인인 말리의 도움으로 헤로인을 끊어.”
“…….”
“그리고 금단 증세를 이겨 낸 어느 날 아침, 프랭키가 뭘 했는지 기억나나?”
은서는 오래전에 영화를 본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었다. 흑백 영상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이내 그녀는 무릎을 경쾌하게 내리쳤다.
“단 거!”
정답을 확신한 은서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단 게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리가 설탕을 가져다줬고, 프랭키가 그 설탕을 정신없이 핥아먹었죠.”
은서가 또랑또랑 대답했다. 그는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끌어 올렸다. 검은색 홍채 안에 그녀를 오롯이 담으며 그는 의미심장하게 읊조렸다.
“내게도 지금 설탕이 필요한 것 같군.”
“아, 갖다 줄게요. 잠시만…… 아앗!”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은서가 설탕을 가지러 가기 위해 침대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센 악력이 대뜸 그녀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이윽고 여리여리한 몸이 침대 위로 무방비하게 무너지고, 그가 느긋하게 올라왔다.
“아주 많이 단 걸 먹고 싶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달콤한 거 말이야.”
묘한 말을 속삭인 그는 무작정 키스를 퍼붓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함께 끌어 올렸다. 그는 가슴을 장난스럽게 주무르면서 혀를 엮어 넣어 그녀의 입안을 온통 헤집었다.
탐욕스럽게 점막을 훑고 거칠게 호흡을 훔쳐 낸 그의 입술은 그대로 천천히 내려와 풍만한 가슴 위로 안착했다. 유륜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혀를 굴리자, 앙증맞은 핑크빛 젖꼭지가 딱딱하게 일어섰다.
이어서 바짝 선 귀여운 젖꼭지를 입에 담아 츄르릅 핥아 올렸더니, 은서가 민감하게 허리를 뒤틀며 교태 섞인 신음 소리를 흘렸다.
“하아.”
그는 혀로 젖꼭지를 꾹꾹 누르고 입술을 모아 흡입하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가슴을 빨아먹었다. 츄웁 츄웁, 퇴폐적인 소리가 연신 청각으로 걸쳐 들었다.
집착스럽게 가슴을 탐하는 그의 모습은 꼭 어린애 같았다. 가슴이 그렇게도 좋을까. 배시시 웃은 은서는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열흘 전이었으면 다친 몸으로 병실에서 발정하는 그에게 실컷 앙탈을 부리며 그만두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의 발정이 몹시도 기뻤다. 그가 욕정한다는 건 좋은 신호니까.
“잘 먹네요…… 하읏.”
“맛있으니까.”
“으응……. 많이 먹어요.”
가슴을 한참 동안 애무한 그는 이를 세워 하얀 살결 위로 키스 자국을 만들어 가며 느긋하게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의 입술이 배꼽 주변을 빙빙 맴돌자, 은서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스스로 하의와 팬티를 벗어 내리고 다리를 활짝 벌려 주었다.
“여기도 맛있게 먹어 볼래요?”
그의 발정이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은서는 부끄러움도 잊고 대담하게 도발해 버렸다.
“기꺼이.”
야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손끝으로 작은 구멍을 툭툭 건드렸다. 벌름거리는 입구는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음란하게 유혹하는 아래에 감탄하며 그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앙큼한 음부에 쪼옥쪼옥 키스를 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그러자 달콤함이 입안 가득 번지고 짜릿한 열감이 온몸을 관통했다.
* * *
지난 열흘간, 차강혁의 몸 상태는 극도로 나빠서 면도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턱에는 까끌까끌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은서는 그를 욕실로 데려가 면도를 해 주었다. 형편없는 실력인지라 이번에도 당연히 선혈을 봐야 했지만.
“악취미야.”
핏방울이 맺힌 턱을 훑어보며 그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미숙한 거라니까요.”
은서는 피를 닦아 내고 상처에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주며 변명했다.
“이보다 더 미숙했다간 사람을 아예 잡겠군.”
말만 들으면 어설픈 면도 실력을 타박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즐기고 있는 거다. 피와 상처로 얼룩지는 칼잡이의 무시무시한 면도를.
보통 변태는 아니다.
“샤워는 알아서 해요.”
은서는 보조기를 풀고 그의 상의를 벗겨 내 어깨에 방수 패드를 붙여 준 다음에 욕실에서 나왔다.
조금 뒤에,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그도 욕실에서 나왔다. 향긋한 비누 향이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툭툭 털어 내고 말했다.
“집에 좀 다녀와.”
“집에요? 왜요? 필요한 거 있으면 윤 기사님께 가져오라고 해요. 난 여기 있을래요.”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야.”
단호하게 목소리를 낸 그는 브리프케이스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서 은서에게 건네주었다.
“서재 책상 마지막 서랍에 바이코딘이 한 통 더 있어. 그거 당신이 처리해.”
그 말을 듣자마자 은서는 눈에 불을 번쩍 켜며 왈칵 성을 냈다.
“뭐예요? 또 거짓말한 거야? 대체 약을 몇 통이나 사들인 거예요?”
“거짓말한 거 아니야. 깜박한 거라고. 그때 너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매섭게 화를 내던 은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또 변했다. 눈꼬리가 스르륵 처지면서 걱정으로 가득 채워진다.
‘맞아. 그때 바이코딘을 끊은 직후라 무척 아프고 괴로울 때였어. 빈틈없는 남자가 단순한 사실마저 깜박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
흰 얼굴 위로 회색 먹구름이 지면서 은서는 습관처럼 또 울먹거렸다. 눈 주변이 아릿해지고 눈물이 맺혀 떨어지려는 순간, 그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울지 마. 눈물 보이면 또 박는다.”
“안 울어요! 안구가 건조해서 그런 거예요.”
은서는 손등으로 눈 주변을 비비며 눈물을 애써 감췄다.
아침부터 차강혁은 팽팽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무기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열흘만의 섹스에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미친개처럼 날뛰면서 격하게 쑤셔 박아 대서 가랑이가 다 쓰라리고 아팠다.
이런 상태로 그에게 또 당하는 건 무리였다. 만약 또 당하면 진짜 아래가 닳고 헤질지도 모른다.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죠?”
은서는 서랍 열쇠를 들어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확신을 시켜 달라는 듯이.
“마지막이야.”
“나…… 차강혁 씨 믿어도 되는 거죠?”
“당연히 믿어도 되지.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나처럼 믿을 만한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능글거리는 것 보니 확실히 좋아지긴 좋아졌네. 부쩍 건강해진 그의 모습에 은서는 결국 웃어 버렸다.
* * *
은서는 서재로 들어가 책상 가까이로 다가섰다.
책상 위에는 눈물로 번진 이혼 서류가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혼 서류를 파쇄기에 넣어서 갈았다.
그러고는 책상 마지막 서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서랍을 열자마자 물음표가 만개했다.
“……?”
서랍 안에는 의아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약통, USB, 덕트 테이프, 로프, 케이블 타이.
약통은 그가 처음부터 서랍 안에 있다고 말했고, USB는 책상 서랍과 제법 잘 어울리는 물건이다.
하지만 검은색의 덕트 테이프와, 흰색 섬유를 정교하게 꼬아서 만든 두툼한 로프, 40~50cm 길이의 대형 케이블 타이는 책상 서랍보다는 공구함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물건들이었다.
“이런 걸 왜 여기다 보관해 뒀지?”
은서는 셋의 공통분모를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언젠가는 덕트 테이프로, 로프로, 케이블 타이로 손목이 꽁꽁 묶여 결박당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은서는 약통을 꺼내고 서랍을 닫았다. 그런데 열쇠로 서랍을 잠그려는 순간, 예전에 책 속에서 발견한 기분 나쁜 사진이 뇌리를 번개처럼 강타하면서 여자의 직감이 발동했다.
그는 책 속에 민승아의 사진을 몰래 보관해 둔 것처럼, USB에도 민승아의 추억들을 저장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은서는 황급히 서랍을 열어 USB를 꺼내고 데스크탑을 부팅했다.
‘USB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혹시 민승아와 관련된 파일이 있다면 전부 삭제해야지. 그다음엔 책에 끼워 두었던 사진도 찢어 버릴 거야.’
그는 아루바에서 ‘처음으로 해 보는 사랑이라 서툴러서 그랬어.’라며 제가 첫사랑인 듯 달콤하게 고백했지만, 사실 은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서른네 살이나 먹은 남자가 이제야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은서는 알아야 했다. 차강혁은 비상식적인 남자라는 걸.
아무튼, 은서는 여전히 그가 민승아를 ‘한때’ 사랑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현재의 그는 민승아를 깨끗이 잊고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차강혁 씨, 옛 여자 친구의 흔적을 남겨 두는 건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은서는 USB를 본체에 꽂았다.
폴더는 하나밖에 없었다. 폴더명은 ‘영상’. 데이트하면서 알콩달콩 동영상 촬영한 걸 USB에 따로 보관해 둔 건가 보다.
‘민승아랑 좋은 곳에 많이 갔겠지. 바다도 가고, 산에도 가고, 꽃구경도 가고.’
질투심에 입술을 삐죽거리고 폴더를 클릭했다. 하지만 수많은 파일들이 나올 거라는 예상을 뒤집고 파일은 달랑 하나밖에 없었다.
“영상을 별로 안 찍었나 보네. 바빠서 데이트를 자주 못 했나?”
은서는 일단 그 파일을 클릭했다. 그런데…….
“뭐야. 왜 결혼식 영상이…….”
파일을 재생시키자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리따운 신부가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이건 유은서와 차강혁의 결혼식 촬영 영상이었으니까.
은서도 소장하고 있는 영상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웨딩 업체에서는 촬영 영상을 CD에 저장해서 은서에게 주었다. 그에게는 USB에 저장해서 전해 준 모양이었다.
동영상 속의 은서는 부케를 쥔 손을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뺨은 연한 분홍빛으로 상기되었고,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여간 긴장한 게 아니다.
그리고 조금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의식적으로 웃다가도 순간적으로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모습이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다.
‘처절한 짝사랑 중이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차강혁이 날 사랑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은서는 기억을 더듬으며 결혼식 영상을 조용히 감상했다. 근데, 잠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거 내가 갖고 있는 영상이랑 다른데?”
은서가 가지고 있는 영상에서는 사회자가 식을 진행하는 장면, 주례가 주례사를 읊는 장면, 가수가 축가를 부르는 장면, 하객들이 축하하는 장면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결혼식의 모든 순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다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영상에는 다른 인물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 진행도 맥락 없이 뚝뚝 끊기면서 오직 신부인 은서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동영상 파일은 일명 ‘신부 유은서 편집본’인 셈이었다.
“이런 게 대체 어디서 났지?”
저도 모르는 제 편집본 영상이 있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은서는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서 그에게 사정을 물어보자고 생각을 정리하고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서재를 나가려는 찰나,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얼른 기억해 냈다.
“아차, 하마터면 잊어먹을 뻔했네.”
잰걸음으로 책장까지 걸어간 은서는 《경영의 철학》이라는 책을 끄집어냈다. 민승아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소중하게 보관된 책이다.
은서는 어서 사진을 찢어 버리겠다고 공격적인 다짐을 하고 책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책을 아무리 뒤져도 사진이 나오질 않는다.
“사진이 어디 갔지? 혹시, 다른 책으로 옮겼나?”
아무래도 사진의 행방도 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은서는 서재를 나와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 * *
병실로 돌아왔더니 차강혁은 소파에 앉아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최 실장이 서 있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은서의 등장에 최 실장이 정중하게 묵례를 했고, 강혁은 눈인사를 했다.
지옥 같은 금단 현상에 시달릴 때는 천하의 워커홀릭이 일조차 못 하는 지경이었는데. 다시 그가 업무에 나섰다는 건 그만큼 상태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은서는 그가 조금만 더 쉬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의 회복에 안심이 되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결재를 모두 끝내고 그가 만년필을 내려놓자, 최 실장은 서류를 챙기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은서는 최 실장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랍에 있던 약 버리고 왔어요.”
“잘했어.”
“근데 이건 뭐예요?”
은서는 외투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내밀었다.
“궁금해서 확인해 봤는데 결혼식 영상이 있더라구요. 근데 영상이 많이 이상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안 나오고 나만 나오는 거 있죠.”
“그야 내가 유은서만 나오게 편집해 달라고 요청했으니까.”
“네? 왜요?”
“그냥 일하다 쉴 때 보려고.”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식 영상을 그것도 온전히 나만 나오는 영상을, 그가 따로 챙겨 두고 봤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예전에 이거 보면서 지겹게도 많이 했지.”
그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음란하고 야릇한 느낌을 자아내는 미소였다. 은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뭘…… 많이 했다는 거예요?”
“내가 웨딩드레스 입은 유은서를 보면서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은데?”
심지어 대답하는 목소리마저도 야했다. 귓불이 뜨끈뜨끈해지면서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기이한 긴장감에 몸은 경직되었다.
무릎 위로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쥔 은서를 보고 그는 지그시 웃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부비적거렸다.
“우리 결혼하던 날, 당신 정말 아름다웠어.”
“…….”
“웨딩드레스를 찢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말도 안 돼. 그날, 그가 그런 위험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니. 나는 그때 차강혁이 결혼식장을 뛰쳐나가고 싶어 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근데, 우리 결혼할 때면…… 아직 민승아 씨를 사랑할 때 아니었어요?”
“누굴 사랑한다고?”
돌연 그가 고개를 치켜들고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격노한 짐승 같다. 압도적인 아우라에 짓눌린 은서는 어깨를 움츠러뜨리고 의기소침하게 웅얼거렸다.
“민승아 씨를 사랑하지만 집안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랑 맞선 봐서 결혼했고…… 나와 함께 살면서 차차 민승아 씨를 잊고, 날 좋아하게 된 거 아닌가요?”
“지루하고 시시한 드라마군.”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빈정거린 그는 눈빛을 견고하게 빛내더니 강경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 주지.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는 유은서 너야.”
“……진짜예요?”
“그럼 거짓말 같아?”
“…….”
“그런 걸 거짓말로 꾸며 낼 정도로 내가 요령이 좋지는 않은데.”
“…….”
“그리고 당신도 내 성격 잘 알잖아. 난 갖고 싶은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지는 성격이라고. 여자라고 예외는 아니야. 내가 민승아를 사랑했다면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
“난 유은서를 갖고 싶었고 그래서 당신과 결혼했어. 그게 이야기의 전부야.”
은서는 그가 한 말을 속으로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다급히 움직였다.
“그럼 책 속에 있던 사진은 뭐예요? 《경영의 철학》이라는 책 속에 민승아 씨의 사진이 아주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걸요?”
“사진? 아아, 그거. 예전에 찢어 버렸는데. 당신이 그 사진을 어떻게 알아?”
찢어 버려? 그럼 다른 책으로 사진을 옮긴 게 아니라는 건가.
“저번에 서재 들어갔다가 우연히 봤어요. 왜 찢어 버렸는데요?”
“불쾌하니까.”
“차강혁 씨가 손수 책 속에 사진을 보관해 놨으면서, 불쾌하다고까지 할 건 뭐예요.”
“내가 보관한 거 아닌데.”
“네?”
“아마 오래전에 걔가 책 속에 끼워 놨을걸. 성격이 기괴하고 음침해서, 어쩌다 오피스텔에 오면 본인 물건을 두고 가고 그랬거든.”
그게 차강혁이 아니라 민승아가 한 짓이었다니……. 불현듯이 오래전에 민승아를 만난 일이 기억에서 소환되었다.
「재회의 섹스가 훨씬 더 짜릿한 거 잘 알고 계시죠? 어젯밤, 우린 세 번이나 했어요. 그쪽은 꿈도 못 꿀 일이죠.」
「오빠가 장남이라서 집안과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해요. 맞선을 본 것도 그 책임감 때문이죠.」
「오빠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만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민승아가 자신만만하게 떠들던 말들이 모두 허언이었던 거야? 하긴, 뺑소니 사고를 낼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데 그 정도 거짓말은 일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가 민승아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한다고 해도, 제가 처음이라는 말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서른네 살이 되면서까지 사랑 한 번 해 보지 않을 수가 있어?
“내가 처음이면, 그 전에 만난 여자들은 다 뭔데요?”
“뭐긴. 그냥 스쳐 지나간 거지. 다른 여자들한테 마음 준 적 없어. 내 마음을 빼앗은 여자는 유은서가 유일하다고.”
뒷머리가 아찔해졌다. 내가 정말로 처음이었다니…….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그러다 상스러운 말이 툭 튀어나갔다.
“정말 전형적인 개자식이네.”
험한 표현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들을 따발총처럼 연사했다.
“그럼 뭐야? 이때까지 만난 여자들은 다 엔조이였다는 거 아니에요? 사랑 없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면서 여자들 가슴에 대못 박고, 피멍이나 들게 만들었다는 거 아니냐구요. 완전 나쁜 남자야!”
“그럼 당신은 만나는 남자들마다 모두 사랑했나?”
“그럼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대단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항상 신실하게 상대방을 사랑했죠.”
제법 당당한 대답에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래. 몇 명이나?”
“일곱 명.”
“일곱 명이라.”
그는 숫자를 곱씹어 보더니 돌연 은서를 넘어뜨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어 누르듯이 일직선으로 꽂혀 들어오는 밤을 닮은 검은 눈동자는 맹금처럼 잔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가슴이 죄어 오면서 숨통이 막혀 오는 기분에 피식자의 연약한 눈동자가 동요했다.
“왜 이래요…….”
“무려 일곱 명의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는 내 아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입매를 유려하게 끌어 올려서 웃었다. 그 웃음에는 위험한 야만성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일곱 명이니까 일곱 번을 해야겠군.”
그런 무논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무어라 항의할 틈도 없이 그는 은서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팬티를 잡아 뜯었다.
휑해진 하반신을 보며 그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입맛을 다셨다. 이내 가랑이를 활짝 벌려 발기한 페니스를 불쑥 밀어 넣었다.
“아으읏!”
은서가 몸서리를 치면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전혀 젖지 않은 상태로 그가 들어와서 너무나도 아팠다. 하반신 전체가 얼얼하고 아릿하다. 눈꼬리로는 투명한 눈물이 맺히다 관자놀이를 타고 선을 그리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하읏, 아파요…….”
“유은서 넌 더 아파야 돼.”
은서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칭얼거렸지만, 그는 냉혹하게 일갈하고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감히 내 앞에서 딴 새끼들을 사랑했다는 말을 해? 버릇이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도 제일 많이 사랑한 남자는, 제일 깊게 사랑한 남자는 바로 당신인데.’라고 고백하려는 순간, 입술이 먹혀 버렸다.
입속으로 침략해 들어온 혀가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동시에 그는 더욱 맹렬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거세게도 들이박는다.
자궁을 찢을 듯이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가학적인 추삽질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흣, 아파…….”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고는 있지만 사실 이젠 고통보다 쾌감이 더 커졌다.
난폭한 인터코스에 호응이라도 하듯 클리토리스가 부풀어 오르고, 음부에서는 애액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젖꼭지는 딴딴하게 솟아올랐고 가슴 속에서는 스파크가 튀었다. 온몸으로 저릿저릿 전류가 도는 듯했다.
“강혁 씨, 그만…….”
“나도 그만하고 싶은데 얘가 날 안 놔줘.”
그는 완벽하게 맞물린 교합 부위를 흘긋 내려다보며 음란하게 속삭였다.
“유은서 네 보지가 내 자지에 딱 달라붙어서는 도통 놓아주질 않는다고. 집착이 굉장해.”
짓궂은 놀림에 은서는 도끼눈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윽고 손톱을 세워서 그의 뒷목을 고양이처럼 할퀴어 버렸다.
“변태. 나쁜 놈! 하아…….”
“앙탈 적당히 부리고, 그 새끼들 이름이나 대.”
“이름은 왜…… 하으응.”
“그냥 다 없애 버리려고.”
그는 붉어진 귓불을 빨고 나른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시선을 그윽하게 맞대어 왔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진심이다. 이름만 말해 주면 그 남자들을 정말로 찾아내서 없애 버릴 작정인 것이다.
소름이 밀려와 온몸이 오스스 떨렸다. 그 순간, 그가 목덜미를 콱 물었다. 동시에 은서는 깨달았다. 나는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 * *
차강혁의 몸 상태는 계속 좋아져서 나흘 뒤에 퇴원했다. 그는 이제 비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통증 조절이 잘된다고 했다.
이른 아침, 은서는 그의 출근 준비를 도왔다.
실밥을 푼 오른쪽 어깨에는 불그스름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색깔은 연해진다 하더라도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심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은서는 훈장과도 같은 그 흉터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다음, 드레스 셔츠를 입혀 주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고, 신중하게 공들여서 넥타이도 단정하게 매 주었다.
그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무사히 매듭지어진 넥타이를 흘긋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요?”
“웬일로 목을 조르지 않길래.”
“질식당하고 싶어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주죠.”
도도한 응수에 그는 픽 웃고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넥타이 300개 사 뒀어요.”
“300개?”
도를 넘는 과한 수량에 그는 기막혀한다.
“최 실장님이 그러더라구요. 당신, 내가 작년에 선물로 준 넥타이를 꽤 자주 하고 다닌다고. 직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정도로.”
은서는 넥타이 모양을 한 번 더 꼼꼼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다.
“남들이 보면 대체 아내가 뭐 하는 여자길래 남편 넥타이도 안 사 주냐고 험담할까 봐, 일부러 충분히 사 뒀어요. 똑같은 거 이틀 이상 하고 다니지 말아요.”
“넥타이 300개라니, 날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군.”
“……네?”
“여자가 남자한테 넥타이를 선물하는 의미가 그거잖아. 당신을 갖고 싶다고.”
능글능글한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부정하진 않겠어요. 만약 차강혁이 300명 있다면, 난 300명 모두를 다 가지고 싶을 테니까.”
진솔하게 대답한 은서는 그의 어깨에 보조기를 채워 주고 발꿈치를 들어 올려 입술에 쪽, 키스했다.
* * *
수은주가 뚝 떨어지고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차강혁은 이제 더 이상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고, 보조기를 착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꾸준히 재활 운동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오른손도 어느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 그는 레스토랑을 통째로 예약했다.
외식을 할 때면 그가 레스토랑 전체를 예약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은서는 오늘의 저녁 식사를 달리 특별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홀에서는 트럼펫 연주자가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을 연주하고 있었다. 금빛의 샴페인을 홀짝거린 은서는 상냥한 음률에 귀 기울이며 마주 앉은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 노래 좋죠?”
“당신과 잘 어울리는 곡이군.”
“언제는 《싸이코》의 OST가 어울린다면서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매끄럽게 응수하는 말에 은서는 입술을 샐그러뜨렸다.
“근데, 오늘 왜 와인이 아니고 샴페인이에요? 무슨 축하할 일이라도 있어요?”
은서는 샴페인이 든 글라스를 살짝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는 질문에 질문으로 화답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건가?”
무슨 날? 크리스마스는 다음 주인데…….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왜 이러지? 뜻밖의 행동에 은서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더더욱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공주를 알현하는 기사처럼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미는 것이었다.
반지 케이스였다.
그가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프린세스 컷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찬란한 광채를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다정하게 뒤흔드는 순간, 은서는 깨달았다. 오늘이 바로 결혼기념일이라는 걸.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깜빡하다니. 미안한 마음에 은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뺨도 은은한 분홍빛으로 익어 버렸다.
“괜찮아. 당신이 여기 있잖아.”
미안해서 안달복달하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그는 자상한 태도를 보이며 은서의 왼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반지를 끼워 줘도 될까?”
“다른 건 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이런 건 또 허락을 받으려고 하네요.”
은서는 배시시 미소를 짓고 그가 반지를 쉽게 끼울 수 있도록 손가락을 길게 펼쳤다. 그는 영롱한 빛깔을 흩뿌리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지에 끼워 주었다.
“이 반지는 절대로 빼지 않았으면 좋겠군.”
“뺄 거예요.”
돌발적인 대답에 그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그날그날 기분 따라 반지 골라 가면서 낄 거예요. 벌써 세 개나 되니까.”
은서는 개구진 얼굴로 입술을 발랄하게 움직였다. 그런 아내가 귀엽다는 듯, 그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손등에 살포시 키스했다.
은서도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팔목을 잡아끌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는 또 다른 케이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또 뭐예요?”
“선물. 열어 봐.”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안에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별장을 한 채 샀어.”
“별장? 어디에 있는 건데요?”
“아루바.”
고작 세 음절의 단어에 은서의 얼굴은 극적으로 변했다. 아루바라고?
“설마…… 그 건물이에요? 파스텔 색조의 유럽풍 저택?”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심장이 빠르게 맥동했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래도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서, 욕구를 꾹 누르고 사진을 많이 찍어 두는 걸로 그냥 만족하기로 했었는데.
차강혁이 그 저택을 선물로 주다니…….
“고마워요. 생각도 못 했어요.”
너무도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은근히 섬세하다. 기억력도 좋고 관찰력도 뛰어나고.
“곧 있으면 연말 휴가야. 같이 아루바로 여행을 갔으면 하는데.”
이어서 그는 비행기 티켓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뉴욕을 거쳐서 아루바로 향하는 루트다.
“뉴욕에서 사나흘 정도 머물면서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고, 그다음에 아루바로 떠나면 괜찮을 것 같군.”
“브로드웨이? 강혁 씨, 예술엔 관심 없잖아요.”
“예술을 좋아하는 유은서한테는 관심이 무척 많아.”
달콤한 말에 가슴이 또 뭉클해진 은서는 그의 옆자리로 가서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남자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가득 실어서.
* * *
근사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실 문을 열었더니, 침대 위에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반지나 열쇠를 담은 것처럼 조그마한 케이스는 아니고, 중간 크기의 선물 상자였다. 리본도 예쁘게 매어져 있었다.
“또 선물이에요?”
은서가 손뼉을 짝 부딪쳤다. 만면에는 화색이 돌았다. 분에 넘치는 선물에 기분이 끝을 모르고 상승하고 있었다.
쪼르르 침대로 달려간 은서는 성마른 손길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밝았던 표정은 순식간에 애매해졌다.
이런 황당무계한 선물은 처음이라서, 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이게…… 뭐예요?”
상자 안에는 저번에 서재 책상의 마지막 서랍에서 본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덕트 테이프와 로프, 그리고 케이블 타이.
왜 이런 걸 선물로 주지?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차강혁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긴 머리칼을 어깨 한쪽으로 넘기고, 하얗게 드러난 뒷목을 쓸어 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인데도 왜인지 소름이 돋는다. 이내 그는 그녀의 귓속에 더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떤 걸로 묶이고 싶어? 당신이 선택해.”
모호한 소름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은서의 머릿속에서 위험 신호가 요란하게 깜박거렸다.
“네? 내가 왜…… 묶여요?”
“유은서 넌 나쁜 아내니까.”
“…….”
“우리의 소중한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렸잖아. 질이 아주 나쁜 여자라고.”
그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이 눈빛의 의미를 잘 안다. 먹잇감을 잔인하게 가지고 놀아 보려는 난폭한 야성이 고스란히 배인 눈이다.
“아까는 괜찮다고 했으면서…….”
“아니, 실은 상처 받았어.”
상처는 무슨. 날 괴롭히려고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그 시커먼 속내를 누가 모를까 봐.
하지만 은서에겐 반박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강한 완력으로 그녀의 어깨를 확 밀어뜨렸다. 시야가 뱅그르르 회전하면서 연약한 몸이 보기 좋게 침대 위로 추락했다.
갑작스레 펼쳐진 상황에 은서가 당혹해하는 사이, 그는 로프를 집어 들어 그녀의 손목을 정교하게 묶어서 포박시켰다.
“나쁜 아내는 벌을 받아야지.”
귓불을 할짝거리며 위협적인 말을 서늘하게 내뱉는 그에게서는 굶주린 짐승의 아우라가 진하게 풍겨 왔다. 허기진 음욕을 채우려는 날것의 열기가 말뚝처럼 은서의 가슴으로 쿡 박혀 왔다.
이러다 꼼짝없이 묶인 채로 잡아먹힐 터였다. 은서는 포박당한 손목을 마구 비틀고 발을 휘적거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선택하게 해 준다면서 왜 로프로 묶어요? 이거 풀어요. 난 로프를 선택한 적이 없다구요!”
“그럼 덕트 테이프로 결박시켜 줄까?”
“…….”
“아니면 케이블 타이?”
“……다 싫거든요.”
“싫다는 건 선택지에 없는데.”
그는 음습한 미소를 짓고 목덜미를 야금야금 깨물었다. 은서는 발작하듯 몸서리를 치다 무릎을 세워 그의 복근을 퍽 가격해 버렸다.
“변태! 사디스트!”
나름대로 야심 찬 공격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복근이 워낙 딱딱해서 도리어 은서의 무릎만 아팠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내뱉은 그는 요망하게 발악하는 은서가 사랑스럽다는 식으로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새로운 선택지를 주지.”
“…….”
“나한테 순순히 잡아먹힐래, 아니면 실컷 앙탈이나 부리다 온갖 험한 꼴은 다 보고 잡아먹힐래?”
“…….”
“케이블 타이로 발목을 묶어 버릴 수도 있어.”
“…….”
“덕트 테이프로 입을 막아 버릴 수도 있지.”
어쩜 이렇게도 변태적인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사디스트적인 변태에게 코가 꿰이다니.
억울해진 은서는 그에게 욕이라도 날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그의 가학성을 자극해 봤자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테니.
결국 은서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한없이 위축된 표정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얌전히 있을게요…….”
그는 입매를 만족스럽게 끌어 올리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혀를 미끈하게 엮어 넣으며 하반신을 빈틈없이 맞붙인다.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은서의 아랫배를 짓눌러 왔다.
이윽고 그가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주무르고 젖꼭지를 희롱하자, 은서는 뜨거운 흥분에 사로잡혔다. 반항을 했던 게 우스워질 만큼 아래가 금방 촉촉하게 젖어 버렸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실처럼 가느다란 타액이 질척하게 엮이고, 열로 달궈진 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뭉툭한 콧잔등에 입술을 살며시 누르고, 느긋하게 일어나 앉아 바지 버클을 풀어 발기한 페니스를 꺼냈다.
투명한 쿠퍼액이 맺힌 페니스가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본능적으로 배꼽 아래가 뒤틀리며 음순이 벌름거렸다. 마치 악마에게 유혹이라도 당한 것처럼, 은서는 눈에 초점이 나간 채로 멍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그는 야한 미소를 던지고 그녀의 턱과 뺨을 틀어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세게 주면서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리게 만든다. 그러고는 벌어진 입속에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우악스럽게 쿡 박아 넣었다.
* * *
“에고고.”
밤을 넘어 새벽까지 호되게 당한 은서는 눈을 뜨자마자 격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전신이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거기다 아래는 어찌나 욱신거리는지.
차강혁은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 협탁 위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은서는 손을 뻗어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다녀올게.]
단정한 글씨체는 실로 간단한 메시지만 남겨 놓았다. 별것 아닌데도 가슴께가 간질간질거리며 기분이 좋아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아서 그런 게 아닐까.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껴 주는 그 마음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기에, 사소한 것에도 기분이 들뜨는 게 아닐까 싶었다.
비록, 침대에서는 그다지 아껴 주지 않지만.
은서는 실없이 키득거리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게으름을 피울 요량이었다.
그러다 어제 결혼기념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챙겨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 주간이니까, 그때 선물을 주면서 어제의 실수를 만회해야 돼.’
은서는 야무지게 다짐을 하고 고단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음 주까지 선물을 준비하려면 당장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 * *
스튜디오에 도착한 은서는 아직 미완성인 초상화 앞에 섰다.
완성할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아 한동안 방치하고만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제법 붙어서 재작업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은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유화 안료를 기름에 개어 색을 냈다. 그리고 붓에 물감을 묻혀 채색을 시작했다.
그의 빼어난 외모와 독보적인 분위기가 제대로 표현될 수 있도록, 은서는 붓끝에 온 정성을 기울여서 성심성의껏 색칠했다.
여념 없이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창밖으로는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왔다.
잠깐 휴식을 취해야겠다 싶어서 붓을 내려놓고 굳어 있는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차강혁이었다.
-어디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차강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인사 생략하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통화 습관도 그렇고, 걸핏하면 발정이 나서 달려드는 것도 그렇고, 제 몸 위로 올라타 폭군처럼 군림하는 것도 그렇고, 입에 걸레를 문 듯 저질스러운 말솜씨도 그렇고, 광적인 소유욕과 무서운 집착도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를 감당할 수 있는 건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스튜디오예요. 혹시…… 올 건 아니죠?”
-갈 건데.
“오지 말아요!”
-왜?
은서는 공들여 작업하고 있는 초상화를 힐끔거렸다.
“비밀 작업 중이에요. 그러니까 절대로 오면 안 돼요. 와도 문 안 열어 줄 거예요.”
-문은 부수면 그만이야.
“부수긴 뭘 부숴요?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 아무튼 안 되니까 오지 말아요. 오면 진짜 나 화낼 거예요! 절대로 오지 말아요. 알았죠?”
-대체 뭘 그리고 있는 건데.
“곧 알게 될 거예요.”
서프라이즈 선물을 벌써부터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 * *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워커홀릭 차강혁은 변함없이 업무에 치중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은 하나둘 슬슬 퇴근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충실히 사무실을 지키며 국내외 거래처와 통화를 하고, 결재를 하고, 사업 계획서를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다 유선 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최 실장이었다.
-사장님, 선물이 도착했는데 안으로 들여보내겠습니다.
“됐어. 비서실에서 알아서 처리해.”
-사모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만.
“아, 그건 당연히 들여야지. 가지고 와.”
잠시 후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최 실장이 프렌치 도어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 뒤로 장정 두 명이 포장된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뜯어 볼까요?”
최 실장이 물었다. 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정들은 포장을 벗겨 냈다.
“초상화네요. 그림이 굉장히 멋집니다.”
“당연하지. 누가 그렸는데.”
본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낸 정밀하고 섬세한 극사실주의 화풍의 초상화에 그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껏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문득, 요 근래 스튜디오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새벽까지 무슨 작업을 그리도 열정적으로 하나 싶었는데, 저를 그리고 있었을 줄이야. 이 초상화를 위해 장시간 동안 연약한 몸을 바쳐 일했을 그녀의 정성과 노력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뭉클해진다.
“저걸 떼어 내고 이걸 걸지.”
그는 사장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모더니즘 회화 한 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림을 걸기 전에, 장정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엽서 한 장을 전해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PS, 난 나쁜 아내 아니에요!]
해변이 그려진 흔한 엽서였지만,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체는 흔한 엽서에 산뜻한 생명력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 * *
12월의 마지막 날, 부부는 계획한 대로 여행을 떠났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에는 호텔 밖으로 나가 보지도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침대 밖으로’ 나가 보지를 못했다.
잔뜩 발정이 난 그 남자가 거친 숨을 그르렁거리며 은서를 홀딱 벗겨 놓고, 온종일 물고 빨고 핥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외출을 해서 가볍게 브런치를 먹고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러 갔다.
‘악마의 변호사’라고 불리는 로이 콘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이었는데, 지루해할 줄 알았던 그는 예상과 달리 연극에 깊게 몰입했다.
로이 콘이 활동하던 시절의 미국 정치 경제가 연극 전반에 넓게 깔려 있는 점이 그의 흥미를 돋운 모양이었다.
연극을 다 보고 나서는 카페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은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그에게 티켓을 내밀었다.
“풋볼?”
티켓을 확인한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아해했다. 스포츠와는 담쌓고 지내는 여자가 풋볼 경기 티켓을 예매하다니.
“브로드웨이 공연만 볼 수는 없잖아요. 이따 저녁에는 풋볼을 보러 가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풋볼을 한 남자니까 당연히 풋볼 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좋아할 듯해서, 은서가 그를 위해 세심하게 준비했다.
뉴욕 자이언츠와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대결. 두 팀 모두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알아주는 명문 팀이라고 해서 은서도 이따 펼쳐질 경기가 기대되었다.
“홈팀 좌석으로 예약했군.”
“네. 뉴욕이니까 당연히 뉴욕 자이언츠를 응원해야죠.”
“하지만 난 댈러스 카우보이스 팬인걸.”
자못 뿌듯해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시무룩해졌다. 나름대로 멋진 선물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좌석 선택을 그만 잘못한 것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에 강혁은 눈꼬리를 휘며 큭큭거렸다. 어찌나 소심한지, 그냥 툭 던진 말에도 감정이 널을 뛰는 게 한눈에 훤히 다 보인다.
귀엽다. 스스로의 감정을 능숙하게 감추지 못하고 매번 어설프게 드러내 보이고 마는 그 서투른 면모가.
“오늘만 특별히 자이언츠 팬을 하도록 하지. 당신을 위해서.”
그는 은서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또 좋아진 건지 그녀는 헤실헤실 웃었다.
* * *
뉴저지에 위치한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은 8만 명의 관중들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경기장과, 아직 경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응원세례를 퍼붓고 있는 열광적인 관중들의 열기에 은서는 덩달아 격양되었다.
“나 스포츠 경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엄청 기대된다.”
심장이 떨려서 은서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꼭 짚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그녀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근육질의 선수들이 쾅쾅 부딪치며 충돌하고 날아가고 또 추락하는 모습은 어깨가 움찔 떨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원래 몸싸움이 심한 마초적인 스포츠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걸 직접 눈으로 보니 훨씬 더 격렬하고 폭력적이었다.
심지어 흥분한 선수들끼리 서로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관중들은 선수들의 주먹질에 함성을 더욱 크게 터뜨리며 환호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은서는 인상을 확 찡그러트렸다.
“뭐 이런 폭력적인 스포츠가 다 있어요?”
“원래 투쟁심이 강한 스포츠야.”
그는 폭력을 투쟁심이라고 포장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응수했다.
“차강혁 씨가 이 위험한 스포츠를 대학 때까지 했단 말이죠?”
“위험하지 않아.”
역시나 무신경한 말투였다.
은서는 휴대폰을 꺼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다. 기사들이 주르륵 뜬다. 그녀는 기사 하나를 클릭해서 휴대폰 화면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위험하지 않긴요? 풋볼 선수들 중 90% 이상이 은퇴 후에 만성 외상성 뇌 질환을 앓는다고 하는데요?”
무서운 기사였지만 정작 대학 때까지 풋볼을 한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은서를 유난 취급하는 눈치였다.
“아버님 어머님은 왜 강혁 씨에게 이런 위험한 스포츠를 시켰대요? 난 우리 아이한테 절대로 이런 거 안 시킬 거예요!”
“아이를 가질 생각은 있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은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말똥말똥 뜬 채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 싱겁게 웃을 뿐이었다.
“웃지만 말고 Yes or No로 대답해.”
“I Don’t Know예요.”
은서는 일부러 더 짓궂게 웃었다.
* * *
부부는 짧게 뉴욕 여행을 끝내고 아루바로 왔다.
별장으로 들어간 은서는 빨빨거리며 내부를 휘젓고 다니며 인테리어 구경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스텝이 엉켜서 넘어지는 바람에 그가 일으켜 주며 혀를 가볍게 차기도 했다.
“엄청 예뻐요. 외관만큼 내부도 환상적이야!”
은서가 방방 뛰면서 하이 톤으로 외쳤다.
한없이 해맑은 아내의 모습에 강혁은 피식 웃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왼쪽 어깨에 걸쳤다. 성큼성큼 침실로 걸어간 그는 침대에 은서를 툭 내던지고 그녀의 위를 오만하게 점령했다.
“침대도 마음에 드나?”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고 묘한 눈길을 던졌다. 검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뜨거운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대낮부터 발정한 것이다.
“글쎄요. 침대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도발적인 대답에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드레스 셔츠를 벗어 던졌다. 탄탄하게 윤곽이 잡힌 근육질 몸매에 감탄하는 순간, 그가 혀를 내밀어 은서의 뺨을 핥아 올렸다.
이윽고 격한 키스를 퍼붓는다. 두 개의 혀가 난잡하게 뒤엉키면서 타액이 섞여 들고 숨결이 섞여 들었다.
“으음.”
그의 손은 옷감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얇은 원피스를 사정없이 찢어 버렸다. 투둑,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잔꽃 무늬가 그려진 레드브라운 컬러의 랩 원피스는 넝마 조각이 되었다.
그가 선물로 준 옷이었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선물로 줄 때는 언젠가는 그 옷을 벗겨 주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 이 남자에게는 옷을 찢어 버리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속옷마저도 자연스레 벗겨진 은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그는 발등에서부터 찬찬히 입술을 찍어 오며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으…….”
나른한 숨이 쏟아진다. 그의 입술은 복사뼈를 지나 정강이의 흉터를 다정하게 애무했다.
예전의 은서였으면 징그러운 흉터가 부끄러워 다리를 빼 버렸겠지만, 이제 그녀는 이 흉터들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모습이든 다 보여 줄 수 있었다.
쪼옥 쪼옥, 그의 입술이 차근차근 올라오면서 무릎 흉터에 머물러 상냥하게 키스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와 폭신폭신한 가슴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쪼물거렸다.
그러다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장난스럽게 지분거리자, 발끝이 간질간질해지며 참을 수 없는 전율이 솟구쳐 올랐다. 은서는 골반을 예민하게 튕기며 야살스러운 교성을 터뜨렸다.
“하으응…….”
능숙한 전희로 음부는 일찌감치 젖어 버렸다. 오늘따라 왜인지 그를 빨리 느끼고 싶어진 은서는 대담하게 그의 바지 버클을 풀며 칭얼거렸다.
“빨리 들어와 줘요…….”
보통 때였으면 보채는 저를 오히려 더 짓궂게 괴롭혔을 텐데, 그도 참기 힘든 모양인지 얼른 콘돔을 집어 들었다. 지이익, 가지런한 치아로 콘돔 포장을 뜯는 섹시한 광경을 감탄에 젖어 바라본다.
그가 진하게 키스하며 꼿꼿하게 선 페니스에 콘돔을 씌우려는 순간이었다. 은서는 콘돔을 빼앗아 저 멀리 화끈하게 던져 버렸다.
“이딴 거 필요 없어요.”
과감한 말에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가 거세게 동요했다.
“그냥…… 바로 넣어 줘요.”
은서는 직설적으로 요구하며 손을 뻗어 그의 왼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쿵쿵, 격렬한 템포로 박동하는 심장 울음이 환상적이다.
“아기, 아기를 갖게 해 줘요. 강혁 씨 아기를 갖고 싶어요.”
일순, 검은 눈이 뜨겁게 활활 타올랐다. 열정의 불꽃을 가득 품고 있는 안광은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야만적으로 번뜩거렸다.
그는 쿠퍼액이 번들거리는 거대한 페니스를 작은 구멍 속으로 조급하게 찔러 넣었다. 그러자 은서가 골반을 부르르 떨며 색스럽게 앙앙거렸다.
“아흣!”
“내 씨를 잔뜩 뿌려 줄게. 당신이 완벽하게 임신할 수 있도록.”
갈라진 음성으로 야하게 속삭인 그는 무자비하게 허리를 놀렸다.
퍽, 퍽, 맹렬한 교합음과 후끈한 열기가 침실을 가득 채우고,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푹 빠진 채로 가장 높은 지점을 향해 함께 내달렸다.
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환희를 안겨다 줄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