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30)

25.

* * *

흠뻑 젖은 부부의 모습에 담당 간호사는 혀를 내둘렀다.

특히, 차강혁을 보고 심하게 아연실색했다. 오늘 수술받은 환자가 링거를 빼 버리고 비를 실컷 뒤집어썼다니.

“환자분,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데…….”

“네. 이제부턴 제가 책임지고 관리할게요.”

은서는 간호사에게 방수 패드를 받아 그의 어깨에 씌우고 욕실로 들여보내며 신신당부했다.

“꼭 따뜻한 물로 씻어요.”

이윽고 문 너머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왼손으로만 씻어야 하는 그가 염려스럽고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제가 씻겨 주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같이 욕실로 들어가면 저 짐승 같은 남자가 분명 일을 쳐도 칠 터였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환자를 또 자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후에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은서는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환부에 드레싱을 새로 해 주고 어깨에 보조기를 채운 뒤, 링거 바늘을 팔뚝에 찔러 넣었다.

“쉬고 있어요.”

은서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비에 젖은 몸을 씻겨 냈다.

왠지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음이 춤을 추듯 고양되어서 기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샤워를 마친 그녀는 새 옷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차강혁은 또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업무에 매진 중이었다. 은서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쉬고 있으라고 했죠?”

은서는 다짜고짜 노트북을 압수하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 준 그녀는 자못 엄하게 말했다.

“교수님과 상담 좀 하고 올게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만 있어요. 말 안 들으면 혼날 줄 알아!”

그는 은서를 향해 시선을 곧게 겨누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말을 잘 듣네.’

아까 옥상에서 혈기에 들끓어 포악하게 날뛰던 짐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그는 주인 말에 복종하는 대형견처럼 마냥 온순해 보였다.

그 공순한 태도에 은서는 그에게 뭐라도 쥐여 주고 싶어졌다. 진짜 개껌이라도 사 두어야 할 판이다.

* * *

진료실로 들어간 은서는 설 교수를 마주 보고 앉았다. 설 교수는 화면에 MRI 영상을 띄워 놓고 자세히 설명했다.

“1cm씩 여섯 군데를 절개했어요. 여기에 내시경을 넣어서 찢어진 회전근을 봉합한 상태고, 통증을 유발하는 연골 조각도 깔끔하게 제거를 했습니다.”

“그럼…… 절개한 부위에는 흉터가 남겠네요.”

“그렇죠. 근데 뭐 별로 큰 것도 아니고 남자분이시니까.”

설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은서는 침울했다. 총 여섯 개의 흉터가 그의 어깨에 남는 것이다. 잘생긴 몸이 흉터로 얼룩진다니, 속상하고 우울하다.

“입원은 얼마나 해요?”

“통상적으로 1주 정도 입원하는데, 통증이 심하면 2주까지 입원할 수도 있어요.”

“보조기는 언제까지 차요?”

“4주에서 6주까지요. 주무실 때도 착용하셔야 합니다.”

새하얀 얼굴로 그늘이 내리쳤다. 잘 때도 보조기를 하고 있으려면 얼마나 불편할지…….

“보조기 풀고 나면 그때부터 재활 운동 치료를 시작할 거고요, 기간은 반년에서 1년 정도 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네? 재활을 그렇게나 길게 해요?”

은서의 낯빛은 아주 사색이 되었다. 수술을 했으니 이제 괜찮아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긴긴 시간 동안 재활에 매달려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워낙 파열이 심한 상태라서요. 재활 기간은 넉넉히 잡는 게 좋습니다.”

연갈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은서는 뜨거워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활 끝나면…… 어깨는 예전처럼 다시 쓸 수 있는 거죠?”

“그럼요. 재활 끝나고 나면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전혀 없을 겁니다. 다만, 골프나 야구, 수영처럼 어깨에 무리를 많이 주는 운동은 2~3년간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야구나 수영은 그렇다 치고, 사업하는 사람이 골프를 못 친다는 건 치명적일 텐데……. 은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설명을 모두 듣고 진료실에서 나온 은서는 비상계단으로 뛰어갔다.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또 실컷 흐느낀다.

‘바보 같은 남자……. 어깨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아프다고 했으면 이렇게 차일피일 수술을 미루지는 않았을 텐데.’

저를 위해 일부러 통증을 감췄다는 건 알지만, 그 애틋한 마음이 결국에는 그에게 해를 입혔기에 원망스럽기만 했다.

‘숨길 게 따로 있지, 아픈 걸 숨기다니. 앞으로는 서류에 손가락만 베여도 꼬박꼬박 보고하라고 단단히 일러 줄 거야.’

은서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번진 눈물을 쓱쓱 닦아 낸 그녀는 작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오늘 쓰러진 거 형부한테 꼭 말해. 나중에 형부가 알게 되면 엄청 가슴 아파할 거야. 숨기지 말고 형부한테 사실대로 말해. 부탁이야.”

* * *

노트북을 압수하면 뭐 하나. 스마트 시대에는 휴대폰으로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데.

휴대폰으로 거래처와 통화를 하고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업무를 지시하던 강혁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협탁 위로 휴대폰을 재빠르게 던져 놓고 가만히 누워 있던 척을 했다.

곧 문이 열리고 은서가 들어왔다. 터덜터덜 맥 빠진 걸음걸이에 표정은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우중충하기만 하다. 눈가는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았다.

“또 울었군.”

“…….”

“이럴 줄 알고 내가 말을 안 했던 거야.”

순간, 은서가 가자미눈을 하고 그를 흘겨보았다.

매서운 도끼눈에 그는 쿡쿡 웃었다. 그래, 우는 것보단 째리는 게 훨씬 낫지.

“이리 와.”

은서는 꾸물꾸물 걸어서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가 왼팔로 그녀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어깨에 흉터가 남을 거래요.”

“알아.”

“재활하는 데에만 반년에서 1년이 걸린대요.”

“알아.”

“2~3년간은 골프도 못 친대요.”

“알아.”

“어떡해요? 비즈니스 골프 중요하잖아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신경 꺼도 돼.”

“나 때문이야…….”

목소리가 습해지더니 금세 맑은 눈망울로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이윽고 눈물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뚝뚝 추락했다.

우는 게 예쁘다는 것도 제 밑에 깔려 있을 때나 얘기지, 이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우는 건 별로 반갑지 않다.

강혁은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며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만 좀 울어. 옷 벗겨서 확 깔아 버리기 전에.”

“……?”

불순한 발언에 은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당신 울면 굉장히 꼴리거든. 쑤셔 박히기 싫으면 울음 뚝 그치라고.”

위험을 자각한 은서는 재빨리 숨을 흐읍 삼키더니, 눈에 안간힘을 주며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

통통한 뺨은 선홍빛으로 달아올랐고,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되었다. 야무지게 앙다문 입술은 윤기로 번들거린다.

이런, 곤란해졌다. 진짜 꼴려 버렸다. 그는 더운 숨을 조용히 내뱉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은근히 쓸어 만졌다.

“근데, 내가 수술한 건 어떻게 알았지?”

“서재에 이혼 서류 가지러 갔다가 약통이랑 수술 팸플릿을 봤어요.”

“아, 너무 피곤해서 내가 실수했군. 제대로 치웠어야 했는데.”

그의 탄식에 은서가 날 선 눈빛을 레이저 빔처럼 쏘아 보냈다. 이런 식으로 귀엽게 째려볼 때마다 그의 바지 속이 뜨끈하게 달궈진다는 걸, 은서는 아예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 바이코딘이라는 약…… 이제 안 먹죠? 내가 찾아봤는데, 중독성도 심하고 위험한 약 같았어요.”

은서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염려 섞인 말투로 물었다.

“수술했는데 바이코딘을 왜 먹어. 어차피 남아 있는 것도 없다고.”

서재 휴지통에서 찾아낸 빈 약통이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안심이 된 은서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앞으론 몸에 이상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야 해요. 서류에 손이 베여도 나한테 말하고, 하다못해 모기한테 물려도 나한테 다 말해야 한다구요.”

“그래. 알았어.”

커다란 손이 은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혀를 할짝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묘한 뉘앙스로 말을 던졌다.

“근데, 뭐 없나.”

“네? 뭐가 없어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는데, 뭐 없냐고. 상 같은 거 줘야 하지 않나.”

사실 얌전히는 고사하고 휴대폰으로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상은 무슨…… 어머!”

투덜거리던 은서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이 불쑥 가슴을 움켜쥔 탓이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은서가 어깨를 비틀며 앙탈을 피우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을 조물조물 가지고 놀았다.

입고 있는 니트가 제법 도톰한데도 젖꼭지가 단단하게 선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입꼬리를 음험하게 말아 올리고 은서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니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는 브래지어를 끌어 올리고 본격적으로 가슴을 주물렀다. 그와 동시에 이를 세워 그녀의 목덜미를 자근거렸다.

“그만해요. 하아…….”

은서는 손은 쓰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다리만 버둥거렸다. 밀어내야 하는데 환자라 함부로 밀어낼 수 없었다. 잘못했다가 그가 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계속 울면 덮친다고 해서 눈물도 바로 그쳤어요! 근데 왜 이래…… 하으응…….”

그는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얄궂게 튕기고 빨개진 귓불을 앙 물어 버렸다. 절묘한 자극에 은서의 발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네?”

“보기만 해도 쑤셔 박고 싶은 걸 나더러 어쩌라고.”

“이 남자 진짜 미쳤나 봐! 환자면 환자답게 굴어요!”

간호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 이건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은서는 새된 음성으로 발악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는 니트와 브라를 벗겨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혀를 굴리고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링거 줄이 거슬리는지 거침없이 바늘을 빼 버린다. 팔뚝 혈관에 핏방울이 맺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아내를 가지는 데에만 열중했다.

이윽고 그는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기고 다리를 활짝 벌려 보았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음부를 보자 그의 입가에서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꼿꼿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꺼냈다. 선단에는 투명한 쿠퍼액이 맺혀 있었다. 은서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아, 안 돼요……. 하지 마요. 하읏!”

격렬한 거부에도 그는 기어코 좁은 구멍을 꿰뚫고 들어왔다. 은서의 눈가에 눈물이 작게 맺혔다.

“하지 말라는 것치고는 너무 잘 들어가는데? 마치 박아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냐, 이 바보야! 흐읏.”

그의 이죽거림에 분통이 차오른 은서가 성질을 부려 보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가 노련하게 허리를 놀리자, 벌어진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건 오직 야살스러운 신음뿐이었다.

* * *

차강혁은 ‘적당히’를 모르는 남자였다. 병실 침대에서 은서는 그에게 세 번 연속으로 박혔다.

정액도 아주 골고루 뿌렸다. 첫 번째는 가슴에다 뿌렸고, 두 번째는 얼굴에다 뿌렸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입속에다 뿌렸다.

몸에 정액 냄새가 진하게 배인 것 같았다. 은서는 샤워를 또 했다. 체력은 바닥을 쳐서 몸살이 온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그는 지독한 섹스에 대해 다음처럼 정의하고 평가했다.

“우리의 재화합을 축하하는 일종의 기념행사 같은 거야. 대단히 성스럽고 고귀한 행위였지.”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퍽이나 논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낮은 음도의 목소리와 완벽한 발음, 자신감 넘치는 어조를 이런 개소리를 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어깨가 박살 난 걸 다행으로 알아. 내가 베스트 컨디션이었으면, 유은서 넌 지금쯤 걷지도 못하고 바닥을 앙금앙금 기어 다니고 있었을 테니까.”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다. 얼핏 온순해졌다고 느꼈지만 명백한 착각이었다. 온순은 무슨. 그는 잠시 발톱을 감추고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개가 사납다고 개를 내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기념행사’ 덕분에 병원에서 제공해 주는 저녁 식사를 놓쳤다. 은서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몸에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그저 누워 있고 싶지만, 이 남자에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을 사 올게요.”

“죽은 왜.”

“우리 개가 발정기라서 식사를 놓쳤으니까요.”

뾰족한 말에 그의 만면으로 웃음기가 번졌다. 그는 장난기 서린 말투로 대답했다.

“배고프지 않아. 실컷 먹었거든.”

“난 밥이 아니거든요? 차강혁 씨, 앞으로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요. 살 빠진 거 어서 원상복귀 시켜야 한다구요.”

은서는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고 지갑을 챙겨 들었다. 문 앞까지 걸어가는데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죽은 별로야. 위장 수술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네. 은서가 몸을 돌려서 그를 쳐다보고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유은서.”

“…….”

“유은서가 먹고 싶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은서는 어금니를 꽉 물고 최대한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차강혁 씨, 잘 들어요. 나는 밥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묻겠어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요?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내 맘대로 사 올 거야.”

은서가 또박또박 명료하게 말을 쏟아 내자 그는 입술선을 끌어 올리며 피식거렸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 * *

은서는 초밥을 사 왔다.

그는 정석적인 젓가락질로 달걀 초밥을 집어 먹었다. 도톰한 입술과 단단한 턱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깔끔하고 섹시하다. 먹는 모습조차도 섹시하면 어쩌나 싶다.

은서가 입을 헤 벌리고 멍청하게 지켜보고만 있자, 그가 장어 초밥을 집어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 주었다.

“넋 놓고 있지 말고 정기나 충전하라고.”

하필 줘도 장어 초밥이 뭐람. 장어 먹이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은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주시하며 초밥을 오물오물 씹었다.

초밥을 다 먹고 치우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최 실장과 차윤혁이 찾아왔다.

“형수님, 드디어 우리 형이랑 화해하셨다면서요?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는 자고로 샴페인을 터뜨려야죠, 하하.”

윤혁이 샴페인을 높이 들어 올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옆에 서 있는 최 실장은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샴페인을 터뜨리려는 찰나, 은서가 두 남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왜인지 싸하고 소름 끼쳐서 두 남자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흠칫거렸다.

* * *

최 실장과 차윤혁은 옥상으로 끌려왔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 하늘은 석탄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까맸지만 옥상 조명이 레몬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엄중하게 굳어 있는 은서의 얼굴은 ‘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먼저 최 실장부터 취조했다.

“최 실장님,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가 있어요? 수술까지 할 만큼 그 사람 상태가 심각했으면, 저한테 귀띔을 해 주셨어야죠!”

“사모님, 저도 고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사장님께서 함구하라 하셨고, 저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 실장은 정중한 태도로 변명했다.

은서는 최 실장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만 하는 부하직원을 계속 추궁하는 건 가혹한 처사니까.

“그래요. 최 실장님은 강혁 씨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니까 섣불리 나설 수 없었겠죠. 하지만, 도련님은 저한테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음 취조 상대는 차윤혁이었다. 윤혁은 뻔질뻔질하게 스스로를 변호했다.

“저도 형 밑에서 일하는데요? 우리 형은 임원이고, 저는 임원도 뭣도 아닌 그냥 평범한 직원인데…….”

“비겁하게 회장 차남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죠!”

은서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러자 윤혁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최 실장마저 급격히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강혁이야 은서가 도끼눈을 뜨고 앙칼지게 반응하는 걸 셀 수도 없이 많이 봐 왔지만, 두 남자는 늘 그녀의 유순한 모습만 봐 왔다. 지금처럼 신랄한 눈빛은 그들에게 한없이 생소한 것이었다.

“형수님, 저는 어릴 때부터 우리 형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었어요.”

코너에 몰린 윤혁은 지난 과거까지 끌어들이며 유창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은서는 일단 그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제가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에 가출해서 군산까지 내려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우리 형이 귀신같이 찾아내서 ‘집에 가자.’ 이 말만 했는데, 제가 쪼르르 집으로 들어갔다니까요?”

“…….”

“그리고 두 번째로 가출했을 때는 순천까지 튀었는데, 그때도 형이 또 찾아내서 ‘집에 가자.’ 하니까 제가 군말 않고 따라 들어갔죠.”

“…….”

“저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형 말을 법으로 여긴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당연히, 형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이만하면 형수님도 충분히 납득하시겠지. 변명이 꽤 만족스럽다는 듯 윤혁은 고개를 상하로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은서는 다른 곳에 꽂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출을…… 했어요? 왜요?”

“뭐, 아버지랑 대판 붙고 열 받아서 집 나갔죠.”

“도련님, 비행 청소년이었구나…….”

“네? 비행 청소년이라뇨? 형수님, 우리 아버지 성격 잘 아시잖아요. 아버지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서, 사춘기 청소년으로서 잠시 방황을 한 것뿐입니다!”

‘비행 청소년’이라는 단어에 발끈한 윤혁은 차 회장을 이용해 스스로를 비호했다. 하지만 은서를 납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 강혁 씨는 그런 아버님 밑에서도 성실하게 공부만 했는데.”

심히 팔불출스러운 대꾸에 윤혁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최 실장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슬쩍 웃었다.

“하, 네……. 잘난 남편 두셔서 좋으시겠네요.”

윤혁이 기막히다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은서는 싱긋 미소를 짓고 낭랑하게 말했다.

“이번엔 이 정도로만 넘어갈게요.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해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저한테 알려 주셔야 한다구요.”

두 남자는 고개를 확고히 끄덕였다.

“형수님도 다신 도망치지 마세요. 우리 형, 예전부터 사람 찾는 데에는 아주 도가 큰 인간이에요. 도망쳐 봤자 어차피 우리 형이 다 찾아낼 겁니다.”

“다신 도망가지 않아요.”

은서는 다부지게 대답했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아니까.

* * *

최 실장과 차윤혁이 돌아가고 병실에는 다시 부부만 남았다.

은서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업무를 일체 금지당한 강혁은 지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침대를 빠져나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비스듬히 응시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사과 좀 깎아 줘.”

“사과요?”

은서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사과.”

잠시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은서는 이내 책을 덮고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싱크대로 가서 사과를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어서 소파로 돌아와 그에게 툭 내밀었다.

“자, 사과요.”

그는 황당하다는 식으로 눈썹을 비틀었다.

“너무하는군. 난 당신 아플 때 정성을 다해서 사과를 깎아 줬는데.”

“나도 정성을 다해서 사과를 씻었어요.”

“진짜 정성이 있었다면 사과를 씻어 주는 게 아니라 깎아 줬을 거야.”

“사과 껍질이 몸에 좋아요. 강혁 씨 건강을 살뜰히 챙기는 내 깊은 뜻을 전혀 몰라주는군요?”

뻔뻔함도 전염이 되는 걸까. 은서는 그에게 배운 뻔뻔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껍질은 싫어. 질기다고.”

“애처럼 왜 그래요? 편식하지 말고 먹기나 해요.”

“이건 편식이 아니야. 취향의 문제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사과는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서 지금 안 먹겠다는 거예요?”

“용납할 수 없다고 했잖아.”

“되게 까다롭게 구네.”

은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나나 먹어야겠다 싶어서 사과를 앙 깨물려는데, 돌연 그의 야윈 얼굴이 시야를 크게 차지해 왔다.

살 빠진 거 되돌려 놓으려면 일단 뭐든 많이 먹여야 하는데……. 결국 은서는 꼬리를 내리고 백기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알았어요. 깎아 주면 되잖아요.”

은서는 쟁반과 접시, 칼을 들고 와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뭐,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과를 깎는 게 아니라 난도질한다는 쪽에 가까웠지만.

과도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쟁반 위로는 껍질이 뚝뚝 잘려서 떨어지는데, 실상 껍질보단 딸려 나온 과육이 훨씬 더 많았다.

“내가 예술에는 문외한이라서 묻는 건데, 당신 지금 혹시 사과를 조각하고 있는 건가?”

과육이 두툼하게 붙어 있는 껍질을 쓱 들어 올리며 그가 장난스럽게 놀렸다.

은서는 눈을 새치름하게 흘겼다. 이래서 안 깎으려고 했던 거라고. 우스꽝스러운 모습 보여 주기 싫으니까.

“이래 봬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최대한 얇게 깎아 볼 테니까 너무 면박 주지 말아요.”

“그만해. 다쳐.”

그는 과도를 빼앗아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사과를 가져가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껍질을 반의반도 벗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입속엔 과육과 껍질이 함께 들어갔다. 다부진 턱 근육이 움직이면서 사과를 아삭아삭 씹고, 울대뼈가 부드럽게 일렁거리며 사과를 삼켰다.

‘껍질 질겨서 싫다더니 생각보다 잘 먹잖아.’

은서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무감한 목소리로 말을 툭 내뱉었다.

“맛이 별로군.”

“그래요? 이리 줘 봐요.”

은서는 그가 먹던 사과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오물오물 씹어서 삼키는데 그의 말과는 정반대로 달고 맛만 좋았다.

“맛있는데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는 순간, 그가 은서의 턱을 휘어잡아 입술을 능숙하게 부딪쳐 왔다. 달짝지근한 사과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머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혀를 빨았다. 혀뿌리까지 깊게 탐한 그는 혀를 짓궂게 굴리며 그녀의 입속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입천장을 핥고 치열까지 꼼꼼하게 훑은 후에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맛있는 건 이쪽이라고.”

약간 거칠어진 숨을 토해 내며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은서는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진 채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키스만으로도 오르가슴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 * *

은서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강혁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

그는 행거에 걸려 있는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안일하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에 은서는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 담배와 라이터를 빼앗아 들었다.

“환자 주제에 무슨 담배예요? 다 나을 때까지…….”

아, 다 나으려면 반년에서 1년은 걸린다고 했지. 헤비 스모커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담배와 안녕할 수는 없을 터.

은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정정했다.

“퇴원할 때까지만 끊어요.”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밖에 나가겠다는 뜻은 굽히지 않았다.

“그럼 바람만 쐬고 올게.”

“내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을까 봐요? 바람은 무슨. 몰래 담배나 피우고 올 거면서.”

은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는 간결하게 받아쳤다.

“못 믿겠으면 같이 나가든지.”

차강혁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문을 열고 나갔다. 은서는 부산스럽게 카디건 두 개를 챙기며 목청 높여 외쳤다.

“밖에 추워요. 외투 걸쳐야죠!”

쪼르르 달려가 그에게 카디건을 덮어씌우고 은서도 카디건을 입었다.

부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책로로 나갔다. 밤 10시였지만 산책로 주변으로는 조명들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어서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그는 조용하고 한적한 밤길을 걷는다. 은서도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그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따라 걸었다.

‘제일 큰 사이즈인데도 바지 기장이 짧네.’

흰색 환자복은 긴 다리를 감당하지 못해 발목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저 남자는 발목마저도 섹시하네…….’

야릇하게 도드라진 복사뼈와 아킬레스건을 보고 은서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앗!”

앞에 가는 남자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땅바닥에 볼품없이 넘어진 은서는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단숨에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괜찮아요…….”

“어디 봐.”

그는 바지를 돌돌 말아 올려서 은서의 무릎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바지만 엉망이 되었고 무릎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

“네. 안 아파요.”

그는 은서를 일으켜 세우고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주었다.

“조심 좀 하지. 하여간, 눈을 떼면 안 된다니까.”

바보처럼 넘어져서 창피한데, 이렇게 세심히 챙겨 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또 넘어져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잘 잡고 걸어.”

에스코트하듯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은서는 그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따스한 온기가 살갗으로 스며들고 마음속으로는 미풍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 * *

은서는 보호자 침대에서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났다.

차강혁은 아침 일찍부터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은서는 엉망진창이 된 머리칼을 손으로 빗으며 잠이 덜 깨서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라니까 왜 또 일하고 있어요.”

“어제 충분히 쉬었어. 이제 그만 쉬어도 돼.”

‘퇴원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쭉 쉬면 안 돼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에게 일을 빼앗는다는 건 생명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는 걸 알기에 은서는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게다가 그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긴요한 일도 많을 테고.

은서는 졸린 눈을 비비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샤워도 깨끗하게 했고 환자복도 새 걸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면도도 깔끔하게 했다.

‘팔 한쪽은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뭐가 저리도 부지런한 건지.’

그런데, 잠깐. 의문이 피어올랐다.

옷을 벗으려면 우선 보조기를 풀어야 한다. 그러고 샤워를 하고 새 옷을 입은 후에는 보조기를 또 채워야 하는데.

‘혼자서 보조기를 탈착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보조기의 팔과 어깨를 연결하는 끈은 앞쪽에도 있고 뒤쪽에도 있었다. 앞쪽이야 혼자서 연결할 수 있다지만, 등 뒤로 끈을 연결하는 건 혼자 힘으로 무리다.

“보조기는 어떻게 풀고 찼어요?”

“간호사한테 부탁했지.”

“내가 있는데 왜요?”

은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뭔데. 당신 챙기고 수발들려고 있는 거잖아!

“곤히 자길래.”

“그럼 깨우면 되죠! 자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불러요.”

보호자 침대를 박차고 나온 은서는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앞으로는 내가 다 도와줄게요.”

“샤워도 도와주나?”

그새를 못 참고 능글거린다. 은서는 그의 귓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샤워는 안 돼요.”

절개 부위의 실밥을 풀기 전까지는, 샤워를 할 때 방수 패드를 붙이고 가능한 짧게 하라는 환자 지침이 있었다.

그런데, 샤워를 도와준답시고 무턱대고 그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면 지침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절대로 샤워를 빨리 끝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귀찮거나 싫어서 안 도와주는 게 아니다. 그의 몸을 위해서였다.

“대신 면도는 해 줄게요.”

“면도를 해 준단 말이지…….”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턱을 매만졌다. 검은 눈에선 의혹의 빛이 아른거린다.

“부디 순수한 의도였으면 좋겠군.”

“네?”

“넥타이를 매 줄 때마다 목을 조르는 여자니까, 면도날 들고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내가 칼잡이도 아니고, 설마 면도날 갖고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요? 해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워낙 말썽을 자주 피워서 쉽게 안심이 되지 않는데.”

그가 통통한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은서는 인상을 무너뜨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아, 아파요.”

그는 손을 놓고 빨개진 볼에 쪼옥, 뽀뽀를 해 주었다. 포근한 감촉에 은서는 금세 인상을 풀고 배시시 웃어 버렸다.

* * *

유 회장은 출근하기 전에 신 여사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어깨에 보조기를 차고 있는 막내 사위를 보자마자, 유 회장 내외는 동시에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몸은 괜찮나? 대체 어쩌다 이리된 건가.”

“운동하다 조금 다쳤습니다. 심한 거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운동을 얼마나 무리해서 했길래……. 조심하지 않고.”

그의 거짓말에 은서는 잠자코 있었다.

어젯밤에 미리 입을 맞춰 둔 사항이었다. 은서를 친 뺑소니 범인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은 것처럼, 그는 자신이 어깨를 다친 이유도 그냥 조용히 묻어 두자고 했다.

용감하게 몸을 날려서 아내를 구했는데 생색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영웅담을 늘어놓듯 신나게 떠벌리며 자랑했을 텐데…….’

손해 보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조차도 차강혁다워서 왠지 그가 더 좋아진다.

“이거 공진단일세. 수술받으면서 기력이 많이 쇠해졌을 테니 꼭 챙겨 먹게. 체력 증진에 좋은 거야.”

유 회장 내외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필요한 대화만 나누고 병실을 떠났다.

은서는 부모님을 배웅하기 위해 병원 정문까지 따라나섰다. 차에 오르기 전, 유 회장이 자상하게 물었다.

“근데, 은서야. 차 서방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네?”

“은서 너는 통 연락이 안 되지, 차 회장 말로는 차 서방이 출장도 아닌데 해외로만 떠돈다고 하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유 회장 내외는 사정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호기심으로 빛냈다. 은서는 당황한 심정을 애써 감추고 열심히 둘러댔다.

“아, 슬럼프가 심하게 와서 여행을 갔는데, 그 사람이 걱정된다고 굳이 따라왔어요. 유별난 사람이라구요.”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유 회장 내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까 병실에서 봤을 때 부부 사이가 꽤 좋아 보여서 큰 걱정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서야. 차 서방이 너를 아주 많이 아낀단다. 너도 차 서방을 많이 아껴 주고 잘 보살펴 주려무나.”

유 회장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사려 깊은 조언을 해 주었다. 은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섬광처럼 타오른 생각에 다급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빠, 그 사람 2~3년간은 어깨에 부담 주는 운동하면 안 된대요. 다 나아도 골프 치자고 불러내지 마세요.”

“그래. 나중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등산이나 가자고 해야겠구나.”

“등산은 무슨 등산이에요. 그냥 불러내지 마세요. 그 사람 바빠요.”

야단스럽게 남편을 보호하는 은서의 말에 신 여사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유 회장에게 팔짱을 딱 꼈다.

“어머, 제 남편 챙기는 것 좀 봐. 나도 내 남편 챙겨야겠다. 여보, 등산은 사위 말고 나랑 갑시다.”

* * *

오전 내내 차강혁은 일에만 푹 빠져 있었다.

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스케치북에 데생을 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아니 어쩌면 꽤 자주 그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챙겨 줬다. 밥을 다 먹은 후에는 디저트로 사과도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그런데, 그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배고파.”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원 밥이 부실했나…….

“양이 모자랐어요? 밖에 나가서 뭐 좀 사다 줄까요? 아니면, 홍 집사님께 연락해서 음식을 좀 해 오라고 할까요?”

그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왼팔로 잘록한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야릇하게 속삭였다.

“유은서가 고프다고.”

강한 완력이 허리를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침대 위로 작은 몸이 쓰러졌다. 담갈색 눈동자가 연약하게 흔들린다. 그는 사냥에 성공한 맹수처럼 느긋하게 그녀를 올라탔다.

“강혁 씨, 이럼 안 돼요…… 읍!”

그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은서가 입술을 열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키스를 퍼부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붉은 혀가 침범해 들어와 입속을 약탈하듯 난잡하게 유린한다. 동시에 셔츠 안으로는 커다란 손이 들어와 몰랑몰랑한 배를 짓궂게 만지작거렸다.

“하아.”

격한 키스에 호흡이 부족해진 은서는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를 흘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은서는 그의 가슴팍을 밀쳐 내며 간신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그는 짜증 난다는 식으로 미간을 구겼다. 반면, 재빠르게 방문객을 확인한 은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아버님…….”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차 회장이 인상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로 서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아버지에게 은밀한 애정 행각을 들키다니,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은서는 빛보다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와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버님, 오셨어요.”

“요즘 것들은 정말…….”

차 회장은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은서를 직시하며 혀를 쯧쯧 찼다. 흐려진 뒷말에는 많은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은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노크를 하셨어야죠. 요즘 것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 줄 알고.”

그는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대앉아서는 한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은서는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그를 흘겨보며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어이가 없는 건 차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한심한 놈. 여자한테 푹 빠져서는 정신도 못 차리고…….”

맘 같아서는 아들놈에게 화병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지만, 며느리 앞이라 그나마 참는 중이었다.

“아버님, 커피 내려 드릴까요?”

“됐다.”

살벌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은서가 상냥하게 말을 꺼냈지만, 차 회장은 단칼에 거절하고 그에게 간단히 용건을 전했다.

“멀쩡해 보이는구나. 이만 퇴원하고 어서 회사로 복귀해라.”

“네. 내일쯤 퇴원…….”

“퇴원이라뇨? 이 사람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퇴원 소리를 꺼내세요?”

얌전한 태도를 고수하던 은서가 갑자기 돌변해서 쇳소리를 드세게 내질렀다.

차 회장은 극도로 당황해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단아하고 조신한 며느리가 이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는 건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유은서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유순하고 올바른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뇌관은 있었다.

그건 바로 차강혁이다. 그를 건드리면 은서는 폭발하게 돼 있었다.

“아버님은 어제 수술받은 사람한테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세요? 퇴원해서 회사로 복귀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몸 상태가 어떤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성을 잃은 은서는 숨조차 쉬지 않고 융단폭격하듯 말들을 쏟아부었다.

“아버님 눈에는 우리 그이가 진짜 멀쩡해 보이세요? 대기업 회장이시라는 분이 멀쩡한 거랑 아파도 내색을 안 하는 거랑 구분을 못 하세요?”

“아가, 너 뭐 잘못 먹었니?”

차 회장이 온몸을 부들거렸다. 관자놀이에는 정맥이 불끈 튀어나왔다. 하지만 은서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 폭탄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병원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우리 그이 계속 입원시켜 둘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아버님은 아들 병문안을 오면서 어떻게 빈손으로 오세요? 못해도 음료수 한 통은 사 오셨어야죠!”

은서가 숨을 색색거렸다. 우리 아빠는 사위 입원했다고 공진단 챙겨 왔는데. 어떻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장인보다 못할까.

“우리 그이, 스트레스 주지 마시고 이만 가세요!”

다짜고짜 은서는 차 회장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잖아도 차 회장에 대한 반감이 내면에 잠재해 있었는데, 그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분노가 치밀어서 예의고 나발이고 다 내던져 버린 것이다.

며느리의 돌출 행동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차 회장은 말리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강혁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말릴 생각은커녕,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큭큭거리며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저 못난 놈!”

차 회장이 아들을 향해서 삿대질을 해 보지만 질질 끌려나가는 신세를 면할 수는 없었다.

은서는 차 회장을 병실 밖으로 내쫓고 문을 쾅 닫았다. 185cm인 거구의 몸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영차영차 밀어내느라 숨도 차고 이마에 땀도 송골송골 맺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낸 은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바짝 주며 강하게 말했다.

“혹여 멋대로 퇴원할 생각 말아요! 설 교수님이 퇴원하라고 할 때, 그때 나가는 거예요. 알겠죠?”

“우리 그이?”

하지만 차강혁은 엉뚱한 곳에 반응했다. 아까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달짝지근한 호칭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것이다.

“듣기 나쁘진 않군.”

하얀 뺨이 복숭앗빛으로 은은하게 달아오른다. 쑥스러워진 은서는 애꿎은 뺨을 살살 긁적였다. 그러다 불쑥 맹랑한 질문을 던졌다.

“차강혁 씨는 언제 회장 돼요?”

그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모르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아버지 이제 환갑이시잖아.”

70-80대가 되어서도 총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이들이 많다는 걸 감안하면, 그가 왕좌를 차지하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리라.

은서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발칙하게 말했다.

“그냥 아버님 밀어내고 차강혁 씨가 회장 자리 차지하면 안 돼요? 솔직히 일은 강혁 씨가 다 하잖아요.”

“내가 이방원이냐.”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왜 회장 타령이야.”

“왜긴요. 강혁 씨가 회장 돼서 기업의 전권을 장악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러죠.”

걸핏하면 차 회장의 등쌀에 시달리는 그가 안쓰럽다는 듯, 은서는 그의 얼굴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이제 보니 야망 있는 캐릭터였군.”

그는 그녀의 손을 꼭 겹쳐 잡고 섬섬한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왜 이 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냥 귀엽다. 대책 없이 귀여워서 안아 주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다.

“근데, 어머님은 언제 오실까요?”

“안 오실 거야.”

“네?”

“우리 어머니, 나 싫어하거든.”

“왜요?”

무슨 심각한 사연이라도 있나. 은서의 만면으로 물음표가 만개했다. 그는 세상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나를 싫어했지. 아버지랑 닮은 내 얼굴을 보면 짜증 난다고.”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 얼굴이 짜증 날 수 있어?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데!”

은서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세게 외쳤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말만큼은 결코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뭐? 힐링?”

그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울대뼈가 섹시하게 일렁거린다.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어머님이 상처받은 건 알겠지만 그건 옳지 못한 처사예요. 잘못은 언제까지나 아버님이 하셨다구요.’라는 교과서적인 반응이 아니라, 팔불출 끼가 다분히 넘치는 반응이 오히려 신선했다.

위로받을 일도 아닌데, 왠지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든다.

“자, 그럼 내 얼굴 실컷 보면서 힐링이나 해라.”

웃음을 그친 그는 은서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성큼 다가온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 근사하고 훌륭했다. 명치가 간질간질해지는 걸 느끼며 은서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꼭 감싸 쥐고 음각하듯 눈에 새겨 넣었다.

동시에 제 말이 완벽히 옳은 것이었음을 강하게 확신했다.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봄바람처럼 하늘하늘 나부끼는데, 이게 힐링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힐링이겠는가.

* * *

오후 4시, 은서와 강혁은 산책을 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택배가 와 있었다. 제법 큰 박스였다. 은서는 송장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 주문했어요?”

“궁금하면 뜯어 봐.”

은서가 박스를 살짝 들어보았다. 박스 사이즈는 큰데 무게는 굉장히 가벼웠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박스를 옮겨서 소파에 앉아 커터 칼로 테이프를 뜯었다.

박스를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은서는 펄쩍 뛰면서 기겁했다.

“이런, 망측한!”

대형 박스 안에는 콘돔 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문득, 그가 콘돔을 쓰겠다고 한 약속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많은 양을 사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사고 회로가 궁금해진다. 절대로 평범하진 않을 테다.

“대체 어쩌려고 이걸 다 사들였어요?”

“어쩌긴. 써야지.”

“그러니까 이 많은 걸 대체 언제 다 쓰냐구요?”

“걱정 마. 금방 다 쓰고 없을 테니까.”

은서가 손끝으로 편두를 짓눌렀다.

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콘돔들을 금방 다 쓰고 없앨 거라니……. 심지어 그 말이 허언이 아닌 것 같아서 더더욱 무서워졌다. 벌써부터 사지가 저릿해지는 느낌이다.

차강혁은 박스 안을 훑어보며 물건이 제대로 왔는지 체크했다. 트로잔 매그넘 XXL.

선택한 옵션대로 정확하게 온 것을 확인한 그는 콘돔 상자를 뜯었다. 그러고는 낱개 콘돔 하나를 집어 들어서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자, 그럼 성능을 테스트해 봐야지.”

놀랄 틈도 없이 그가 기민하게 다가와 은서를 덮쳤다. 소파 위로 풀썩 쓰러진 그녀는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 주고 다정하게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손끝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눈두덩을 짚으며 자연스레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가 혀를 뒤섞자 키스는 한껏 질척해졌다. 동시에 그는 니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젖가슴을 마음대로 조몰락거렸다.

숨결을 진득하게 빼앗은 그는 그대로 입술을 내려와 그녀의 턱을 잘근 물고 목덜미를 짙게 빨았다. 기다란 손가락은 젖꼭지를 얄궂게 건드리며 희롱한다.

은서는 달뜬 신음을 흘리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강혁 씨, 그만……. 자제 좀 해요. 하아.”

“당신이 자제할 수 없게 만들잖아. 유은서 너만 보면 자지가 꼴려 버린다고.”

그 저급한 말을 명백히 증명이라도 하듯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은서의 아랫배를 뭉근하게 짓눌렀다.

그는 뜨거운 입술로, 발칙한 혀로, 야릇한 손길로, 새하얀 몸이 먹기 좋은 분홍빛으로 농익을 때까지 착실히 애무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찰락거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왠지 자극적이다. 은서는 허리를 파르르 떨면서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안 되는데…….”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가 하의를 편하게 벗길 수 있도록 골반을 살짝 들어 주었다.

그는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 내리고,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아 다리를 활짝 벌렸다. 수줍게 벌름거리는 음순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고 혀를 할짝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이내 그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혀를 능숙하게 굴렸다. 은서는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음란한 교성을 터뜨렸다.

“아흣.”

츄르릅 츄르릅, 질퍽한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운다.

그는 야릇하게 혀를 놀리면서 시선을 지그시 맞대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폈다. 온몸을 들썩거리며 신음을 앙앙 내뱉는 것이 귀엽다. 순진한 얼굴은 쾌락에 물들어 새빨개졌다.

혀끝으로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핥으며 애액을 촉촉이 쏟아 내고 있는 구멍에 중지를 쓰윽 집어넣자, 그녀의 반응은 더더욱 민감해졌다.

“하으응.”

교성도 한층 더 커지고 영롱하게 빛나던 눈도 완전히 다 풀려 버렸다. 눈 끝으로는 투명한 눈물이 작게 맺히다 뚝 떨어진다.

좁은 구멍도 이미 충분히 울어서 소파가 축축해졌다. 그는 입술을 떼고 입가에 묻은 애액을 손등으로 훔친 다음, 콘돔을 집어 들었다.

‘콘돔 싫은데…….’

은서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저 크고 잘생긴 페니스에 라텍스 막을 끼우는 건 별로라고. 그냥 바로 느끼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그가 콘돔 포장 비닐을 이로 물어뜯는 순간,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콘돔은 반갑지 않았지만 그가 이로 콘돔 포장을 뜯는 모습은 굉장히 섹시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뭉툭한 콧잔등에 살포시 입술을 누르며 동시에 콘돔을 페니스에 씌웠다. 그리고 거대한 페니스를 좁다란 구멍 속에 집어넣었다.

은서는 골반을 튕기면서 두 팔로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하아앗…….”

깊숙한 곳까지 페니스를 찔러 넣은 그는 키스를 해 주며 천천히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능란하게 질벽을 긁고 정교하게 스팟을 자극하자, 은서는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면서 전율하듯 울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난 은서는 그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면도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은서는 의자에 그를 앉히고 스팀타월로 인중과 턱 주변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그런 다음, 셰이빙폼을 하얗게 발라 주고 날이 제대로 벼려진 면도기를 야심 차게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음악이 필요할 것 같군.”

그는 면도기를 들고 있는 은서를 흥미롭게 주시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재생시켰다.

끽, 끽, 끽, 바이올린의 현을 긁어 내듯 짧고 날카로운 고음이 반복된다. 히치콕의 공포 영화 《싸이코》에 삽입된 유명한 배경 음악이었다. 욕실 살해 씬에서 사용되었던.

“지금 당신 모습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이야.”

저를 살인자 취급이나 하는 짓궂은 농담에 은서가 미간에 주름 두 줄을 진하게 잡고 발끈했다.

“하지 마요, 진짜! 해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은서는 휴대폰을 빼앗아 음악을 끄고 선반에 툭 올려놓았다. 완벽한 면도 기술을 보여 주리라 다짐하고 비장하게 면도기를 놀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손이 삐끗하더니 그의 턱에 선혈이 맺혔다.

“앗, 어떡해!”

당황한 은서가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태연하기만 했다. 은서는 붉은 피를 살짝 닦아 내고 다시 면도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앗, 또 피가……!”

면도의 끝은 처참했다. 생각보다 다량의 피를 보았고 그의 턱은 생채기로 얼룩졌다. 은서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턱에 연고를 발라 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칼잡이가 아니라며.”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며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역시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있었어.”

“아니에요. 미숙해서 그런 거예요. 계속하다 보면 실력이 늘 거라구요!”

“계속?”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앞으로도 계속 내 면도를 해 주겠다는 건가?”

“그럼요.”

은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살점이 남아나질 않겠군.”

* * *

밝은 햇살이 비춰 들어오는 오후, 차강혁은 여지없이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에 매진 중이었다.

은서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고 스케치북을 넘겼다. 그런데, 남아 있는 종이가 없다.

“밖에 나가서 스케치북 좀 사 올게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은서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가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가자, 강혁은 침대를 빠져나와 행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약통을 꺼냈다.

수술을 하고 나면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한 격통이 급습해 오고는 했다. 그는 손바닥 위에 알약 한 알을 덜어 냈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은서가 들어왔다.

“지갑을 두고 가서…… 강혁 씨?”

심상치 않은 광경을 목격한 은서는 빠르게 다가가서 그의 손에 있던 약통을 거칠게 빼앗았다. 약통 겉면에는 ‘바이코딘’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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