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5권) (25/30)

5권

24.

* * *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면서 나동그라진다.

막상 그가 이혼을 말하니까 낭떠러지로 내몰린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호흡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이스픽으로 명치를 사정없이 쑤시는 듯이 아팠다.

하지만 은서는 최대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한국으로 돌아갈게요.”

* * *

은서는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40분경. 차량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 기사가 모는 벤틀리와 윤 기사가 모는 롤스로이스였다.

롤스로이스에서는 최 실장이 내려 반듯한 자세로 묵례를 했다. 은서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를 곧장 회사로 데려가려 한다는 걸.

“이 사람 좀 쉬게 해 주세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남자라는 건 잘 알지만, 긴긴 여정 끝에 이제야 고국에 도착했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쉬게 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지쳐 있을 그가 걱정스러워 은서는 제 소관이 아님에도 주제넘게 나섰다.

하지만 최 실장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예정된 스케줄이 있어서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차강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최 실장은 다시 한번 은서에게 묵례를 하고 그를 따라 차에 몸을 실었다.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롤스로이스가 질주했다. 은서는 그 차가 작은 점이 되어 아득하게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 *

롤스로이스는 톨게이트를 통과해 서울로 진입했다.

차 안에서 내내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던 강혁은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시킬 요량으로 머리를 가볍게 털고 시내 도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는 짙은 눈썹을 비틀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병원이요.”

“병원?”

“MRI 검사 예약을 잡아 놓았습니다.”

아까 최 실장이 은서에게 ‘예정된 스케줄’, ‘중요한 일’이라고 했던 건 바로 병원 예약이었다. 최 실장은 그가 가능한 빨리 어깨를 치료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둔 것이었다.

“천천히 해도 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벌써 한 달 가까이 방치했는데. 오늘부터는 바이코딘도 그만 드세요.”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지. 본인 몸 상태는 전혀 살피지 않는 보스를 향해 최 실장이 충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강혁은 대답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꽂아 넣었다.

롤스로이스는 15분을 더 달려서 삼우병원에 도착했다.

80년대 중반, 삼우조선의 창립자였던 그의 조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공익 재단을 만들어서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 바로 삼우병원이었다.

이 병원에는 어깨 쪽 수술로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명의인 설종인 교수가 정형외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강혁은 설 교수와 간단히 문진을 하고 MRI 촬영을 했다. 영상이 나오자 그는 진료실로 들어가 설 교수를 마주 보고 앉았다. 최 실장도 보스의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 그의 옆에 섰다.

“아유, 이거 엄청 아프셨겠는데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어떻게 버티신 겁니까?”

영상을 보자마자 설 교수는 혀를 찼다.

“회전근이 완전히 다 끊어진 상태라 보존치료로는 차도가 없겠네요. 수술해야겠어요.”

“수술이요? 수술은 어떤 식으로 하나요?”

최 실장이 걱정을 가득 품고 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차강혁은 담담하기만 했다. 별로 궁금해하는 것도 없어 보였다.

“어깨 안에 내시경을 넣어서 끊어진 부위는 전부 다 봉합할 겁니다. 그리고 이거 보이세요? 충격으로 인해 연골 조각이 떨어져 나간 건데, 이게 관절강 내를 떠돌아다니다가 인대에 끼어서 통증을 유발하고 있거든요. 이것도 제거할 겁니다.”

설 교수는 포인터로 정확한 위치를 짚어 주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최 실장은 초조해졌다.

“제일 빠른 타임으로 수술 일정을 잡았으면 하는데요.”

“그럼요. 우리 차 사장님 수술은 제가 바로바로 해 드려야죠. 내일 아침 일찍 수술하는 걸로 합시다.”

설 교수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강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는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어투로 말을 툭 내뱉었다.

“귀찮게 됐군.”

* * *

롤스로이스가 병원을 빠져나가자 최 실장이 그에게 물었다.

“자택으로 갈까요?”

“왜?”

“아까 공항에서 사모님 걱정하는 거 보셨잖아요. 게다가 내일 아침 일찍 수술받으셔야 하는데, 오늘은 이만 댁에서 편히 쉬세요.”

“됐어. 회사로 가지.”

그는 휴식 따윈 필요 없다는 식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그 엄격하고 철저한 태도에 최 실장을 말을 더 보탤 수 없었다.

롤스로이스는 빠르게 달렸고 삼우조선 사옥 앞에서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강혁은 42층의 사장실로 들어갔고, 최 실장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춰서 몸을 돌렸다. 최 실장을 마주 본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냈다.

지금 그는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하지 않은 상태였다. 왼손으로 웬만한 것들을 해결하고는 있으나, 넥타이를 매는 건 역부족이었다.

“최 실장,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넥타이 좀 매 줘.”

그가 넥타이를 내밀었다. 작년 생일에 은서가 선물로 준 넥타이였다. 이 넥타이를 얼마나 지겹도록 자주 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때문에 삼우조선 직원들은 한동안 그를 두고 ‘슈트는 매번 바뀌면서 왜 넥타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느냐. 저 넥타이가 무슨 부적이라도 되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최 실장은 그의 셔츠 칼라를 세워서 넥타이를 걸쳤다. 신중하게 길이를 측정하고 봉제선을 기준으로 넥타이를 돌리며 감는다.

그때,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유은서는 내 목을 졸랐어.”

“네?”

생각지 못한 말에 최 실장이 손을 멈칫했다. 강혁은 예전 일을 떠올리며 조금은 아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넥타이를 매 줄 때마다 항상 내 목을 조르는 장난을 쳤다고. 무척 귀여웠었지.”

“네…….”

‘어깨 아픈 거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으면, 이번에도 사모님이 넥타이를 매 주면서 귀여운 장난을 치셨을 텐데요.’라고 대꾸하려다 최 실장은 입을 다물고 다시 손을 움직여 넥타이를 매는 일에 집중했다.

최 실장은 노련한 손길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클래식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는 셔츠 칼라를 반듯하게 내려서 마지막으로 꼼꼼하게 손을 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프렌치 도어가 벌컥 열리고 차윤혁이 들어왔다.

예고도 없이 대뜸 사장실을 기습한 윤혁은 최 실장이 다정하게 형의 넥타이를 만져 주고 있는 광경을 보고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살을 거하게 찌푸렸다.

“아니, 시커먼 남자 둘이서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이런 건 형수님한테 해 달라고 해야지! 형수님은 아직도 형 상태를 모르는 거야?”

윤혁은 저벅저벅 걸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부쩍 야윈 형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밥도 못 먹고 다녔냐.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말투가 살갑지는 않았지만 분명 형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병원에는 다녀왔어? 병원에선 뭐래?”

“회전근이 완전히 다 끊어져 봉합해야 하고, 연골 조각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은 불가피하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수술을 받기로 했어요.”

최 실장이 조목조목 설명했다. 수술까지 해야 한다니까 윤혁의 낯빛은 더더욱 침울해졌다.

“그럼 형수님은? 형수님은 형이 수술받는 것도 몰라? 형수님이랑은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유은서와는 이혼하기로 했어.”

고저 없이 잔잔한 음성으로 전하는 폭탄선언에, 최 실장과 윤혁은 동시에 경악스럽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며칠 전 그에게 ‘은서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부부가 어느 정도 화해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뭐? 이혼? 형이 해 준다고 했어?”

“갈등이 조금은 풀린 줄 알았는데요.”

이해하기 어렵다는 원성이 강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창가에 긴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연기를 목으로 넘기며 차분히 말했다.

“한 번은 헤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

한숨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혼한다고 해서 유은서를 놓아주는 건 아니야. 그냥 놓아주는 척하는 거지.”

쉽게 와 닿지 않는 말에 최 실장과 윤혁은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은 헤어져야 유은서도 나를 아련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지. 그렇게 기억을 적당히 미화시켜 놓은 다음에 다시 대시할 거야.”

기막힌 논리에 최 실장도 윤혁도 얼이 빠졌다.

“그래서, 지금…… 이혼으로 밀당을 하겠다는 거야?”

윤혁이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뭐 이런 극단적인 인간이 다 있나. 이혼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 줄도 모르고.

사업을 할 때, 차강혁은 무모하고 위험한 도전을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도전 끝에는 언제는 달콤한 승리가 뒤따라왔다.

하지만 사랑은 사업보다 변수가 더 많은 게임 아닌가. 여자가 싱글이 되면 남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드는 법이다. 그리고 그 벌떼들은 모두 위험 변수가 된다.

“형, 그러다 형수님이 다른 남자를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이혼하면 형수님은 완전 자유의 몸이야! 어떤 남자든 입맛대로 다 만날 수가 있다고!”

“내가 유은서한테 좆 달린 새끼들이 꼬이게 둘 것 같아?”

일순, 흑색의 눈동자가 냉혹하게 빛났다. 사냥감을 하이에나 떼들에게 절대로 내어 줄 수 없다는 맹수의 눈빛과 흡사했다.

“벌레들은 조용히 제거하면 돼.”

지나치리만치 침착하고 지나치리만치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그의 강인하고 비정한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극점처럼 선득한 한기에 최 실장과 윤혁은 동시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혼을 해도 유은서는 여전히 내 아내라고.”

은서는 여전히 그가 쳐 놓은 덫에 걸려 있었다.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는 건 명백한 오산이다.

* * *

강혁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귀가했다.

침실 문을 열어 보니 은서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베개도 안 베고 이불도 안 덮고, 엉망인 채로.

협탁 위에는 이혼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이혼 서류를 처연한 눈매로 바라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은서의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 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준 뒤, 하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감상하는데,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이 급습했다.

“하아…….”

낮은 신음이 참을 새도 없이 흘러나왔다.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혼 서류를 챙겨서 서재로 다급히 들어왔다. 격한 통증으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킷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약통 안에는 바이코딘이 딱 한 알 남아 있었다. 그는 알약을 삼키고 빈 통을 휴지통에 버렸다. 하지만 브리프케이스 안에는 여분의 바이코딘이 두 통 더 있었다.

그는 브리프케이스에서 약통을 꺼내 하나는 재킷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하나는 책상 마지막 서랍에 넣어 두고 열쇠로 잠갔다.

그러곤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고 앉았다. 약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자 육신이 나른하게 이완되면서 정신이 붕 뜨기 시작했다.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고 졸음이 밀려온다.

동시에 환영이 보였다.

은서는 서류가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갈색 눈을 순진하게 깜빡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제법 귀엽다.

만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사라질 테니.

“어서 서류에 사인해요.”

은서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이혼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 말은 좀 안 귀엽네. 그는 피식거리고 가슴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내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그러자 은서가 만족한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착각하지 마. 나 너 포기 안 했어.”

그는 환영을 향해 결연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네 스스로 목줄을 차고 싶어지는 날이 올 거야.”

오만하면서도 난폭한 말에 은서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톰한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잔뜩 당황한 모습이 정찰을 하다 맹수를 발견한 미어캣처럼 앙증맞다.

환영 주제에 이렇게 깜찍한 건 반칙 아닐까.

“겁먹지 마. 망가뜨리진 않을 테니까.”

그는 확고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아끼고 사랑해 주겠다고 했잖아. 그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거라고.”

* * *

눈을 뜬 은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벌써 아침 8시였다. 새벽 3시 30분까지 그를 기다린 기억은 나는데……. 기다리다 그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깜빡 잠이 든 것치고는 지나치게 길게 자기는 했다만.

‘집에 들어오긴 한 건가. 혹시, 외박했으려나.’

은서는 졸린 눈을 비비며 그런 생각을 하다 협탁 위에 있던 이혼 서류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잠이 확 깼다.

“어? 서류가 어디로 갔지? 그 남자가 가져갔나…….”

이혼 서류를 챙겨 갈 사람이라고는 차강혁밖에 없었다. 서류가 사라진 걸 보니 집에 들어오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은서는 침대를 빠져나와 게스트 룸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마침 복도에서 홍 집사와 딱 마주쳤다.

“집사님, 혹시 그 사람 못 봤어요?”

“출근하신다고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요. 근데, 사장님 얼굴이 너무 안되셨어요. 살도 많이 빠지시고. 오늘도 새벽 4시에 들어오시고 잠도 서재에서 주무셨는데, 또 출근하신다고…….”

“네. 알았어요!”

은서는 홍 집사의 말을 듣다 말고 쏜살처럼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롤스로이스는 아직 출발 전이었다. 윤 기사가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

그는 마당가의 단풍나무 아래 서서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단풍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이 그림 같고 절경 같았다.

은서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기다란 장초를 바닥에 툭 내버리고 구둣발로 비벼 껐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왜 버리는지 의아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에 쓰이는 건 윤 기사가 방금 트렁크에 실은 캐리어였다.

“어디 가요?”

“출장.”

“출장 어디로 가는데요?”

“도쿄.”

“얼마나 있다가 와요?”

“아마 일주일쯤.”

은서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저, 이혼 서류…….”

“서명한다고 내가 가져갔어.”

“서명…… 했어요?”

“어.”

간단한 대답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혼을 열렬히 원한 건 제 쪽이었고 결국엔 그의 동의를 이끌어 냈는데, 왜 이리도 심장이 아픈 걸까.

“서재 책상 위에 올려 뒀으니까 이혼 서류 당신이 법원에 제출해.”

“아, 그게…… 나 혼자 가면 처리 안 된대요. 대리인도 안 되고. 협의 이혼은 부부가 꼭 함께 법원에 가야 한대요.”

“그래? 그럼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때 같이 법원으로 가지.”

그는 실로 담담했다. 감정 정리가 벌써 다 끝난 것처럼 초연하고 냉정하기만 했다. 그깟 이혼쯤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태도였다.

눈물을 보이며 제게 끈질기게 매달린 것이 모두 환상 같고 단꿈 같다. 이제 그런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환상과 꿈의 세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차갑고 냉엄한 현실이 그녀의 뺨을 선명하게 때렸다. 몹시 아프고 슬퍼져서 어린애처럼 주저앉아 그냥 엉엉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은서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애써 의연한 척을 하며 꽉 죄어 들어오는 목구멍에서 겨우 목소리를 꺼냈다.

“넥타이…… 안 했네요.”

“도쿄에 도착하면 하려고.”

“하긴, 넥타이 많이 답답하죠.”

“이만 갈게.”

그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은서는 그 넓은 등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빠르게 달려가서, 차에 오르려는 그의 재킷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강혁 씨!”

“왜.”

건조한 눈빛이 직선으로 내리쳐왔다. 낯선 이국에서 보았던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은 이제 더는 없다.

차갑고 무심한 눈길에 은서는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숨을 고르고 차분히 당부했다.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일해요. 잠도 충분히 자고 밥도 잘 챙겨 먹고…….”

“그래.”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거친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를 태운 차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은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 * *

은서는 숨이 끊어지도록 실컷 울었다. 제 안에 남아 있는 슬픔을 지워 내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울고 울어도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눈물로 슬픔을 지워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울던 은서는 울음을 뚝 그치고, 얼굴로 번진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그 남자처럼 초연해질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우린 이제 끝났고 더는 함께할 수 없어. 겸허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시련을 극복해 내야만 한다고.’

은서는 굳센 다짐을 하고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비처럼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은서는 또 흐느꼈다. 하지만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는 울지 않았던 것처럼 눈물을 그치고 일부러 단단한 얼굴을 했다.

은서는 새 옷을 꺼내 입고 이혼 서류를 챙기기 위해 서재로 걸어갔다.

서재 문을 열려고 하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은서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액정을 확인했다.

작은언니, 은경이었다.

-은서야…….

전화를 받자마자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귓가에 걸쳐 들었다. 놀란 은서는 걱정스레 물었다.

“언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 지금 입원했다.

“뭐? 입원?”

* * *

은경은 병실 침대에 누워 영양제 수액을 맞고 있었다. 병명은 과로로 인한 탈진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쓰러져 버린 거 있지. 그래서 구급차에 실려 왔다니까.”

곧장 병원으로 달려온 은서를 보며 은경이 조잘조잘 설명했다. 은경은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은 빠져 있었지만 수다스러움은 건재했다.

“혹시 빈혈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라더라. 그냥 무리해서 그렇대.”

“언니, 괜찮아?”

“응. 몸에 힘없는 것 말고는 괜찮아. 수액 다 맞으면 퇴원하래. 두세 시간쯤 걸린다네. 입원은 너무 거창한 표현이었나?”

은경이 생글생글 밝게 웃었다. 하지만 은서는 여전히 염려 섞인 시선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괜찮대?”

“응. 이상 없대. 애가 괜찮으니까 내가 이렇게 활짝 웃고 있는 거겠지?”

“형부는 왔다 갔어?”

순간, 은경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검지를 길게 세워 입술에 딱 갖다 붙였다.

“니네 형부는 몰라! 나 쓰러진 거 비밀이니까 형부한테는 절대로 말하면 안 돼!”

“뭐? 왜?”

어처구니없는 당부에 은서의 만면이 이지러졌다.

“그 인간 알면 난리나. 그렇잖아도 나보고 일하는 시간 줄이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 댔는데! 쓰러진 거 알면 오죽하겠니?”

“아니, 그래도 남편인데……. 언니 아픈 건 알아야지.”

“안 돼. 그 인간 날뛰는 것도 보기 싫고, 징글맞게 잔소리해 대는 것도 듣기 싫어. 은서 너, 함부로 입 열지 마. 알겠지?”

언니의 말을 한 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태도가 워낙 완강했기에, 은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근데 언니, 형부 말 들어. 홑몸도 아니잖아. 몸 챙겨 가면서 일해야지.”

“앞으론 조심할 거야. 야근도 안 하고. 아, 완전 식겁했다니까. 우리 애기, 잘못되는 줄 알고.”

은경이 볼록하게 솟아오른 배를 살살 문질렀다. 은서는 그 배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이젠 임신한 티 제법 난다. 전엔 옷으로 가리면 별로 표시 안 났는데.”

“배 많이 불렀지? 만져 볼래?”

은서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은경이 손을 덥석 잡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은서는 손을 찬찬히 움직이며 배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이제 더는 언니가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일종의 허세였나 보다. 막상 임신한 배를 만져 보자 지독한 씁쓸함과 부러움이 거세게 솟구쳐 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이혼하기로 결심한 주제에 아직도 이런 못난 감정을 느끼다니……. 대체 언제쯤이면 감정 정리가 깔끔하게 끝날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그를 향한 마음을 모조리 비워 낼 수 있을까.

사랑을 잊는 데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저에게는 영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이 얼핏 들었다.

* * *

수면마취와 국소마취를 하고 회전근 파열 수술이 진행되었다.

최 실장과 윤혁은 초조한 심정으로 수술실 앞을 서성거렸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수술실에서 설 교수가 나왔다.

설 교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수술 잘 끝났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강혁은 회복실에서 30분 정도 수면을 더 취한 후에 마취에서 깨어났다. 이후, 그는 입원실로 옮겨졌다.

“괜찮으십니까?”

최 실장이 침대 가에 서서 물었다. 그는 누구든 예상 가능한 답을 했다.

“괜찮아.”

“형, 진짜 형수님한테 말 안 할 거야?”

이번에는 윤혁이 물었다. 그는 그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 눈짓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최 실장, 노트북 좀 갖다 줘.”

“아, 오늘은 그냥 쉬어. 이 지독한 인간아!”

윤혁이 질린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최 실장도 정중하게 윤혁의 의견을 거들었다.

“팀장님 말대로 오늘은 그냥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 쉴 테니까 다들 가 봐.”

생각 외로 강혁은 순순히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마취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조금은 어지러웠다.

“가긴 어딜 가. 방금 수술했는데. 오늘 하루는 동생인 내가 옆에 있어 줘야지.”

“네. 저도 오늘은 여기 있겠습니다.”

그는 대번에 미간을 구기고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다.

“다들 나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안 떠들면 되잖아. 입에 지퍼 채울게.”

“방해 안 하겠습니다. 그냥 편히 쉬세요.”

두 남자의 고집에 그의 목덜미에서 핏대가 툭 불거졌다.

“둘 다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결국 그들은 사이좋게 쫓겨났다. 병원 복도에 서서 윤혁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형한테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 형수님이겠죠.”

동의한다는 듯 최 실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

은경이 수액을 다 맞는 걸 지켜보고 은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의 영향으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공기가 차가웠다.

하지만 실내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끼쳐 왔다. 습하고 쌀쌀한 날씨에 홍 집사가 보일러를 높은 온도로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은서는 외투를 벗고 편안한 홈웨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서재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이혼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이름 옆에 새겨진 서명을 보자, 바윗덩어리가 마음을 세게 짓누르는 것처럼 속이 갑갑해졌다.

울고 싶지 않은데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고 만다. 눈물방울이 서류 위로 툭 떨어지면서 그의 서명이 흐리게 번졌다.

“서류 망가지면 안 되는데…….”

은서는 황급히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젖은 티슈를 휴지통에 버리는데 웬 약통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휴지통에서 약통을 꺼냈다.

“바이코딘?”

약통 겉면에 적힌 영어를 읽어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소한 약이었다.

“무슨 약이지?”

솔솔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휴대폰으로 약 이름을 검색했다.

“아편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 마약성 진통제?”

내용이 뜨자마자 연갈색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렸다.

“부작용으로 중추 신경계를 둔하고 만들고, 환각, 환청, 기도 팽창, 호흡 곤란, 의식불명 등이 있다.”

부작용이 무시무시한데. 휴대폰을 그러쥔 손이 불안하게 떨렸다.

“복용량이 지나친 경우에는 영구적인 뇌 손상이나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섬뜩했다.

“미국에서는 바이코딘 중독으로 인해 한 해 사망자가 17,000명에 이르며, 현재 미국 FDA에서는 퇴출을 권고하고 있다.”

은서는 빈 약통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이런 무서운 약을 그 사람이 왜…….”

그 순간, 책장이 그의 어깨를 강타하면서 ‘뻑!’ 하고 둔탁한 파열음이 울리던 게 떠올랐다. 왼손으로 포크질을 하던 모습도, 넥타이를 하지 않은 모습도 연달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역시 아팠던 거야! 그래서 이 독한 약을…….”

은서는 양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그러자 책상이 살짝 흔들리고 서류들이 흐트러지면서 두껍게 코팅된 팸플릿의 끄트머리가 튀어나왔다.

“저건 또 뭐지?”

묘한 직감에 은서는 주저 없이 팸플릿을 빼냈다.

[회전근 수술 환자를 위한 가이드]

정형외과에서 배포하는 수술 안내 책자였다. 팸플릿 맨 아래쪽에는 병원 이름이 기입되어 있었다. 삼우병원…….

은서는 당장 최 실장에게 전화 걸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죠?”

-네? 아, 저…… 그게…….

최 실장은 말끝을 흐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난감한 반응에 은서는 완전히 확신했다.

“말씀 못 하신다면,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 * *

“정 기사님, 당장 차 대기시켜 주세요! 삼우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은서의 다급한 전화에 정 기사는 별채에서 민첩하게 나와 차를 준비시켰다.

가을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켠 채로 그녀를 기다리며 정 기사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쓱쓱, 와이퍼가 움직이며 유리창의 빗물을 지워 낸다. 이내 유리창 너머로 현관에서 나오는 은서가 보였다.

정 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려 은서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이 쌀쌀한 날씨에 외투도 걸치지 않고 원피스 하나만 달랑 입고 있었다. 그것도 무릎길이의 원피스를.

날씨도 날씨지만 외출할 때는 다리 흉터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데. 대체 뭐가 그리 급하길래…….

“사모님, 날씨가 추워요. 외투를 걸치시거나 아니면 옷을 더 두꺼운 것으로…….”

“그럴 시간 없어요. 빨리 가야 해요!”

은서는 정 기사의 말을 자르고 앞장서서 뒷좌석 문을 직접 열고 차에 올라탔다. 조급한 그녀의 행동에 정 기사도 빠르게 운전석에 올라타 액셀을 밟았다.

차는 빗속을 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 * *

삼우병원의 제일 꼭대기 층에 다다른 은서는 VIP 병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왼손으로 타이핑을 치고 있는 차강혁이 보였다. 소매를 돌돌 말아 올린 왼쪽 팔뚝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고, 오른쪽 어깨에는 보조기가 채워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은서의 등장에 그는 유령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서야…….”

평소 같았다면 그답지 않게 황망해하는 모습을 볼만하다고 여겼을 텐데, 지금은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마음이 부서진 것처럼 아프다.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가냘픈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끝까지 제멋대로지. 이 바보 멍청이!”

은서는 침대 위로 약통을 내던졌다. 동시에 눈물샘이 터지고야 말았다. 주체할 수도 없을 만큼 눈물이 펑펑 흘러내린다.

그녀는 젖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돌연 병실을 뛰쳐나갔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달리기만 하다가 도착한 곳은 옥상이었다.

* * *

가을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덕분에 옥상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철제문을 쾅 닫고 차가운 외벽에 기대선 은서는 분풀이를 하듯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화가 났다. 그가 여태껏 계속 아팠다는 것을, 수술을 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제 자신에게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까끌까끌한 벽에 부딪힌 손은 살갗이 벗겨지고, 비를 맞아 젖은 몸은 체온이 떨어져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스스로를 질책하고 우느라 여념이 없는 은서는 그러한 감각을 자각할 틈도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고 애가 타서 숨을 꺽꺽거리며 울기만 할 뿐이다. 손에 생채기가 나서 따끔따끔한데도, 얇은 원피스만 걸친 몸이 냉기 서린 공기 때문에 달달 떨리는데도, 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은서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그때, 철제문이 열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왼손에 두툼한 카디건을 들고 있었다. 탄탄한 팔뚝에는 선혈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호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무턱대고 링거 바늘을 뽑은 게 틀림없다.

“차강혁 씨, 정신 나갔어요? 환자가 이러고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가뜩이나 비도 오는데……. 어서 병실로 가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서는 쇳소리를 바락바락 내질렀다. 환자면 환자답게 병실에나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마음대로 링거 바늘을 뽑고 왜 마음대로 나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카디건을 은서에게 포근히 덮어 주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꼴로 돌아다녀. 날도 추운데.”

그는 그윽한 눈매로 은서를 내려다보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굴이 다 얼었잖아.”

이 와중에도 나부터 챙긴다. 다친 건 자기면서.

“손은 또 왜 이래. 조심하지 않고.”

살갗이 까져 핏방울이 맺힌 손을 보고 검은 눈동자가 동요했다. 별것 아닌 상처인데도 그는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음성이 섞여들었다. 그의 머리칼도 차츰 빗물에 젖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해.”

“…….”

“간단한 수술이라 별로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 아프지도 않았고.”

“거짓말…….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구요?”

은서가 앙칼지게 받아치자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낮아진 기온에 뿌연 입김이 잠시 서렸다가 사라졌다.

“그럼 솔직하게 말하면, 나한테 돌아올 건가.”

감미로운 제안에 심장이 급격하게 일렁거렸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정해서, 감정 정리를 다 끝냈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가 은서의 손을 지그시 붙잡자 심장의 떨림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조그만 손을 잡아끌어 그의 왼쪽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쿵, 쿵, 그의 심장 역시 그녀처럼 빠르고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아파.”

“…….”

“유은서가 떠난 이후로 계속 여기가 아팠다고.”

그 말에 또 눈물이 차올랐다. 은서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동안 제 상처만 돌보느라 그의 상처는 미처 보지 못했다. 워낙 강인하고 단단한 남자라, 그도 저처럼 아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엔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남자였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고, 사랑 때문에 지독한 고통 속을 헤매는 남자였다.

또한 누구보다도 사랑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남자였다. 어깨를 쓰지도 못할 만큼 아픈 걸 참고 견디면서 나만 찾아다닐 정도로, 내가 걱정하고 자책할까 봐 통증을 꼭꼭 숨길 만큼, 미련하게도 나를 챙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였다.

“실은 나도…… 거짓말했어요.”

은서는 그와 시선을 반듯하게 맞추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

“난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구요.”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짐승적 본능이, 폭발적인 집착이, 무시무시한 소유욕이, 나를 다치게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가 독이라도 좋고, 그가 폭풍우래도 좋다.

난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당신에게 뛰어들겠어. 사랑하니까. 내가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난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다시 말해 봐.”

그가 낮게 명했다. 오직 유은서만을 담고 있는 짙은 눈동자는 뜨거운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랑해요……. 차강혁 씨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순간, 그가 은서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열띤 키스를 퍼부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가파른 숨을 쏟아 내며 격렬하게 입술을 빨고, 조급하게 혀를 밀어 넣어서 입속을 능숙하게 헤집는다. 찰박찰박, 농염한 마찰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어서 그는 작은 몸을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여 하반신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자 딱딱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은서의 아랫배를 쿡쿡 찔러 왔다.

“하아.”

집요하게 키스를 퍼붓던 그가 아쉬운 여운을 남기고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가느다란 타액이 실처럼 엮인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육감적인 입술에 베이비 키스를 하고 귓가에 부드럽게 읊조렸다.

“나도 사랑해. 유은서 너만 가질 수 있다면, 내 자신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만큼.”

진중하면서도 달콤한 고백에 온몸 전체로 전류가 퍼져 나가면서 솜털들이 쭈뼛거리며 섰다. 명치가 아찔아찔해지고 심장이 발작하듯 날뛴다.

투둑투둑, 가을비는 계속 쏟아져 내리며 그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칼이, 빗방울이 맺힌 얼굴이, 빗속으로 녹아드는 뜨거운 숨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섹시했다.

은서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의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는 은서의 손을 겹쳐 잡고 손바닥에 쪼옥 키스를 하더니 다시 그녀의 입술을 야성적으로 훔쳤다.

그는 정신없이 혀를 섞어 넣으며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마른 등을 쓸어 만지고, 잘록한 허리를 지분거리고, 풍만한 가슴을 조물거렸다.

그러다 원피스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얇은 팬티 위를 음험하게 만지작거리자 당황한 은서는 그의 손을 밀쳐 냈다.

“가, 강혁 씨……. 당신 환자예요. 무리하면 안 된다구요.”

한쪽 팔은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일까.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다시금 팬티 위를 짓궂게 문지르며 야릇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지금 난 환자가 아니라 발정 난 개야.”

“…….”

“당장 유은서를 잡아먹지 않으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사실 그의 눈은 이미 미쳐있었다. 욕망으로 탁해진 눈빛은 짐승 그 자체였다.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시는 섹시하게 미친 짐승 말이다.

“아파도 참아.”

“…….”

“나도 참았으니까.”

그는 팬티를 찢어 버리고 은서의 한쪽 다리를 끌어 올렸다. 벌어진 틈으로 팽팽하게 솟아오른 페니스가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온다. 은서는 허리를 활처럼 꺾으며 진저리를 쳤다.

“하읏!”

성급한 삽입에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맹독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사지가 아릿해진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짙은 눈빛과 나를 만져 주는 그의 상냥한 손길에는 마약과도 같은 마취 작용이 있어서, 금세 통증을 잊고 황홀감에 젖게 만들었다.

은서는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꼭 감아 안으며 온몸을 그에게 내맡겼다.

그가 덮어 준 카디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지만 은서는 전혀 춥지 않았다. 비를 맞아 차갑게 식어 있던 몸은 어느새 불꽃에 휘말린 것처럼 뜨거워졌기에.

그는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좁다란 구멍에서는 애액이 흘러나와 교합 지점을 매끄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 은서 역시 흥분이 빨랐다.

질척하게 젖은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며 그는 입매를 묘하게 끌어 올렸다. 그 퇴폐적이고 야한 미소에 뒷머리가 저릿하게 당겼다.

“하으응…….”

그의 몸짓은 점차 격렬해진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젖은 머리칼이 흔들리며 빗방울이 툭툭 은서에게 떨어지고, 동시에 더운 숨결이 은서의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차가운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마찰하는 아래는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질적인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통에 오감은 더욱 예민해졌다. 은서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그에게 더욱 절실하게 매달렸다.

“아흣.”

그는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쑤셔 넣으며 흉포하게 피스톤질을 했다.

자궁까지 퍽퍽 찌르면서 잔혹하게 유린하는데, 은서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줘서 그의 목덜미에 손톱을 콱 박아 넣고 울상을 지었다.

“하으, 강혁 씨……. 너무 깊어.”

“엄살 부리지 마. 좋아하는 거 다 아니까. 더 세게 박아 달라고 보지가 흠뻑 젖어서는 벌름거리고 있잖아.”

네크라인을 끌어 내린 그는 달랑달랑 흔들리는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허스키한 음성으로 나른하게 속삭였다.

저급하고 지저분한 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배꼽 아래가 후끈거리며 좁은 내벽으로 힘이 들어갔다.

은서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것을 촘촘하게 조여 물자, 그는 더욱더 무자비하게 허리를 놀렸다.

야수처럼 맹렬하게 내부를 파고들며 질벽을 긁고 거칠게 박음질을 하는데, 버티기가 힘들어진 은서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교태스럽게 앙앙거렸다.

“조금만 천천히, 하아앗…….”

그의 혹독한 교육으로 성에는 진작 눈을 떴지만, 육체가 개발된 것과 잘하는 건 별개였다. 은서는 여전히 서투르기만 했다.

그의 페니스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가녀린 몸은 낭창낭창하게 흔들리기만 할 뿐이다. 그의 손에 들려진 한쪽 다리는 연신 대롱거리고, 바닥에 겨우 지탱하고 있는 다른 쪽 다리는 후들후들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젠장……. 여전하네, 유은서. 요망하게 유혹만 할 줄 알고 정작 받는 건 형편없지.”

보다 못한 그가 낮은 욕설을 내뱉고 페니스를 빼냈다. 이내 그는 은서의 몸을 돌려세우고 등허리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가 원하는 체위를 단번에 눈치챈 은서는 양손으로 벽을 짚고, 상체를 낮춰 그에게 엉덩이를 내밀었다. 정말이지 수컷과 암컷이 교미하는 자세다. 수치스럽다.

하지만 수치심보다는 그를 향한 갈망이 훨씬 더 강했다.

“다리도 벌려야지.”

그가 발끝으로 가느다란 발목을 툭툭 쳤다. 은서는 고분고분 다리를 벌렸다.

이어 그는 원피스 치마를 등까지 끌어 올렸다. 새하얗게 찰진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동시에, 핑크빛 음부도 앙증맞게 입구를 열어 보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음란하고 도발적인 자태에 그의 입술선은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자, 이번엔 제대로 받는 거야. 날 반하게 했으면 유은서 너도 이 정도 책임은 져야 하는 거라고.”

거대한 페니스가 다시금 깊숙한 곳까지 꽂혀 들어왔다. 은서는 온몸을 자지러뜨리면서 색기 가득한 교성을 내질렀다.

“하아……!”

아랫배까지 쑤시고 들어온 발칙한 물건은 불방망이처럼 뜨거웠다. 그는 온몸을 쪼갤 기세로 저돌적으로 추삽질했다.

무참한 허리짓을 감당하기 버거워 은서는 도망치듯 허리를 뒤틀고 말았다. 그 순간, 그가 왼손으로 엉덩이를 찰싹 후려쳤다.

“아앗.”

매서운 스팽킹에 골반이 움찔 떨리고 하얀 엉덩이 위로는 빨간 손자국이 남았다. 은서가 고개를 꺾어 억울한 눈매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눈을 맹금같이 사납게 번뜩이며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어딜 감히 도망쳐. 똑바로 받으라니까.”

“흐읍.”

숨 막힐 듯한 야생적인 카리스마에 겁에 질린 은서는 초식동물처럼 눈물을 훌쩍거렸다.

“그러게 요물 짓도 적당히 했어야지. 왜 멀쩡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흑…….”

“웃기지 마. 처음 본 순간부터 말간 얼굴로 내 시선을 빼앗아 가서는, 페로몬을 폴폴 풍기며 날 미치게 만들었잖아.”

“흡…….”

“유은서 네가 날 끌어당겼다고.”

그는 골반을 콱 틀어쥐어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채로 과격하게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하아앙…….”

벽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은서는 그의 원초적인 욕정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엉엉 울기만 했다.

은서를 달래려는 듯 그는 그녀의 뒷머리와 뒷목에 차근차근 입맞춤을 해 주었다. 물론 아래는 여전히 난잡하게 몰아붙이고 있지만.

“또 도망칠 거야?”

그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하으응…….”

“다신 안 그럴 거지?”

“으응.”

이번에는 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밑구멍이 잔인하게 뚫리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귀여워, 그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또 도망치기만 해 봐. 그땐 손목 발목을 다 묶어서 케이지에 가둬 버릴 줄 알아.”

“흐으응.”

“하아, 은서야……. 넌 내 거야. 영원히 내 거라고.”

무아지경에 빠져 한참을 질 속을 유린하던 그가 허리짓을 멈추더니 짐승처럼 숨을 그르렁거렸다. 이내 페니스를 빼내고 은서의 등과 엉덩이에 정액을 실컷 흩뿌렸다.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세워 입술을 난폭하게 부딪쳤다. 혀로 입안을 고루 휘저으며 그녀를 음미하고 또 음미한 다음에, 진한 여운을 남기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왜…… 안에 안 했어요?”

은서가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등과 엉덩이를 따라 끈적끈적한 정액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걸핏하면 임신을 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질 속에 정액을 가득 뿌려 놓던 그가, 갑자기 질외사정을 하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안에 하면? 그 좆같은 사후 피임약을 또 먹으려고?”

먹을 생각 없었는데……. 은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왠지 쑥스러워서 좀처럼 나오지를 않는다.

“질외사정은 피임법이 아닌걸요.”

대신 엉뚱하게도 입바른 소리가 튀어 나갔다. 지극히도 교육적인 발언에 그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는 콘돔 쓸 테니까 시시한 성교육은 이만 집어치우지.”

일순간, 은서가 미간을 좁혔다. 콘돔 싫은데. 그 크고 잘생긴 페니스를 콘돔으로 감싸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은서는 용기를 내서 ‘콘돔 따위 필요 없는데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마침 그가 하늘을 쳐다보는 바람에 보기 좋게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비가 그쳤군.”

은서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에 칭칭 감겨 있던 하늘은 어느새 파랗게 개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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