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30)

23.

* * *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꽂혀 들어오는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은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나와의 섹스를 사랑하는 거겠죠.”

“자신감 한번 대단하군.”

그는 거침없이 조소를 내뱉었다.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나. 유은서 너, 침대에서 형편없다고.”

비웃음이 자욱한 일격에 은서는 고개를 탁 치켜들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교육을 아무리 시켜도 터무니없이 서투르지. 죽었다 깨어나도 그 형편없는 섹스 실력으로 남자를 휘어잡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은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말이지 상종 못 할 남자였다.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는 걸까.

은서는 포크를 쥔 손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던질 거야. 이번에는 저 건방진 낯짝에 기필코 포크를 던져 버리고 말 거라고.

“그럼 잘하는 여자랑 만나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포크를 쥔 손을 힘껏 끌어 올리는 찰나였다.

“난 유은서만 만나고 싶은걸.”

단정적인 음성이 귓속을 명쾌하게 파고들면서 은서가 손을 멈칫거렸다.

“기가 막힐 정도로 미숙하고 황당할 정도로 어설픈데, 당신을 안을 때마다 좋아서 미치겠어.”

“…….”

“이렇게 서툰 여자랑 하면서 왜 좋은 걸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마음의 문제인 것 같아.”

“…….”

“마음이 끌리니까 무슨 짓을 해도 다 좋은 거지.”

그럼 여태까지 해 왔던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적인 섹스가 결국에는 다 나를 좋아해서 그랬다는 건가? 정말이지 부조리하고 이기적이고 간악한 논리인데, 이상하게도 속이 뜨거워졌다.

은서는 모히토를 벌컥벌컥 마셨다. 화약이 터진 것처럼 뜨겁게 타오른 속을 얼른 식혀야 했다.

“차강혁이 유은서를 사랑한다. 이 단순한 명제가 그리도 납득이 안 되나?”

그는 계속해서 사랑을 말했다. 완고한 태도로, 강고한 목소리로, 확고한 눈빛으로. 마치 옴팔레에게 사랑을 달라고 구걸하는 헤라클레스처럼 절실하게.

은서는 다시금 모히토를 들이켰다.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호흡을 여러 번 내뱉은 다음, 최대한 침착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좋아요. 인정할게요. 차강혁 씨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겠다구요. 그런데 어쩌죠? 난 이제 더 이상 강혁 씨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래. 가슴 아프지만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당신이 어제 그런 말을 했었지. 혼자서 마음 졸이고, 혼자서 애끓고, 혼자서 조바심 냈다고.”

“…….”

“이제부터는 그거 내가 하지. 나 혼자서 마음 졸이고 애끓고 조바심 내면서 당신을 열심히 사랑할 테니, 당신은 내가 주는 사랑 편하게 받기만 해.”

“…….”

실로 달콤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건 언제나 위험하다. 달콤함 뒤에는 덫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은서는 여전히 두려웠다.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가 또 상처를 받는다면? 그가 또 나를 아프게 한다면? 밤마다 울면서 잠들어야 한다면?

또다시 격통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깨질 만큼 깨졌고 망가질 만큼 망가졌다. 차강혁이라는 남자를 버텨 낼 여력 따윈 더는 남아 있지 않다.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안전하게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황송한 제안이네요. 하지만 사양하겠어요.”

은서는 냉랭하게 말했다.

“배가 불러서 이만 일어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매정하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 * *

객실로 돌아온 강혁은 제일 먼저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그는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필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미니 바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들이켜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새 또 업무 메일들이 쌓여 있었다. 중요한 메일부터 차례대로 확인을 하고 회답을 보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최 실장이었다.

강혁은 책상 위에 있는 디지털시계 두 개를 흘긋 본 다음 전화를 받았다. 지금 아루바는 저녁 7시 30분, 한국은 다음 날 오전 8시 30분이었다.

-사장님, 오늘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던 피코 엔지니어링 정성현 대표님과의 미팅은 화상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런데 서울에서 오후 3시면 아루바 현지 시간으로는 새벽 2시가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불편하시다면 제가 일정을 조율해서…….

“아냐. 괜찮아. 다른 미팅들도 화상으로 변경할 수 있으면 하고, 시차 신경 쓰지 말고 시간은 모두 그쪽에 맞추도록 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급히 떠나온 만큼 업무에 지장이 없어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별일 없지?”

-갑자기 자리를 비우셨다고 회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말고는 별다른 일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 그 양반은 항상 화가 나 있는 양반이니까.”

-네. 그런데, 사모님과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으신지…….

최 실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계속 차이는 중이야. 여자한테 차여 본 것도 처음이지만, 같은 여자한테서 여러 번 차이니까 굉장히 얼떨떨하군.”

-내 그럴 줄 알았어!

별안간 다른 목소리가 훅 끼어들었다. 차윤혁이었다.

-원래 형수님처럼 여리신 분이 돌아서면 아주 가차 없다고. 참고 참다가 한꺼번에 폭발시켜 버리니까. 그동안 개베이비 짓 한 거 다 돌려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반성이나 해.

촉새처럼 팔랑거리는 말에 그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이거 스피커폰인가.”

-네. 팀장님이 자꾸 스피커폰으로 돌리라고 하셔서…….

“최 실장, 차 팀장 말은 무시해도 돼.”

-내 말을 왜 무시해? 내가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주려고…….

“이만 끊지.”

단칼에 전화를 뚝 끊은 그는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고 위스키를 삼켰다. 내가 나쁜 짓을 했으면 얼마나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나간 기억들이 뇌리를 세차게 스쳐갔다.

「남자가 필요하면 진작 말을 하지. 내가 기꺼이 박아 줬을 텐데 말이야.」

「유은서 너처럼 곱고 바르게 자란 여자가 내 좆을 빨고, 내 좆에 박혀서 할딱대는 꼴을 보는 게 재미있어. 다른 새끼들은 네가 그런다는 걸 상상도 못 하겠지.」

「말했잖아. 보호하는 거라고. 바깥에는 널 노리는 위험한 놈들로 득실거리니까 함부로 풀어 둘 수가 없어. 안전하게 묶어 둬야지.」

「유은서, 왜 이렇게 얌전해? 강간할 맛이 안 나잖아.」

「이혼? 좆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널 놓아줄 것 같아? 내가 네 보지 안에 싸지른 정액이 얼만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너 못 놔줘.」

끝없이 몰려오는 기억의 파도에 그는 참담한 얼굴을 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쁘긴 나빴었군.”

은서가 자신을 매몰차게 밀어내는 것쯤은 그저 귀여운 애교로 보일 정도로, 개짓거리를 더럽게도 많이 했다.

하지만 제가 짐승처럼 포악하게 군 건 모두 유은서 때문이었다.

갖고 싶으니까. 사랑하니까. 미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책임은 져야지, 유은서.”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를 구제도 못 할 미친놈으로 만들었으면 책임도 끝까지 지라고.

* * *

절제 없이 술을 퍼마시는 짓은 관두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은서는 미니 바에 손을 댔다. 달콤한 고백이 자꾸만 머릿속을 산란하게 만들어서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레드 와인에 진을 흥청망청 섞어서 마신 그녀는 해가 뜨는 걸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알코올의 기운에 지독하게 짓눌린 채, 틈틈이 악몽을 꾸며 잠 같지도 않은 잠을 잤더랬다.

오후 2시쯤, 차임벨 소리에 눈을 떴다.

또 벨보이가 왔다. 데자뷔 같았다. 벨보이는 365송이의 초대형 튤립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무수한 쇼핑백들을 객실 안으로 옮겨 놓았다.

튤립은 방금 딴 것처럼 싱싱했고 쇼핑백들의 로고는 어제와 달랐다. 벨보이는 핑크색 깃털을 뽐내는 플라밍고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건네주었다.

[아루바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늘이 1주년이야. 기념으로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군.]

끈질긴 남자 같으니라고. 사냥개는 목표로 한 먹잇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지독한 습성이 있다고 하던데, 차강혁이 딱 그랬다.

“어제처럼 버려 드릴까요?”

벨보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은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과 꽃을 간직해 봤자 마음만 약해질 뿐이니까.

* * *

은서는 심란한 속을 달래기 위해 샤워를 하고 외출을 했다. 택시에 올라탄 그녀는 어눌한 네덜란드어를 구사했다.

“쇼핑센터로 가 주세요.”

택시 드라이버는 액셀을 밟으며 네덜란드어로 무어라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은서가 어벙한 표정만 짓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택시 드라이버는 유창한 영어로 다시 물었다.

여행 중이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은서는 간단히 그렇다고 대답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뒤에, 택시 드라이버는 룸미러를 흘긋거리며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쫓기는 중입니까?”

“네?”

“아까부터 웬 차가 대놓고 따라와서요.”

화들짝 놀란 은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파이어블루의 포르쉐가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화려한 색감이 차강혁과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그는 롤스로이스 같은 묵직한 세단도 잘 어울리지만, 포르쉐나 페라리 같은 날렵하고 트렌디한 스포츠카도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무튼, 그의 황당한 행동에 은서는 기가 차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위대한 비즈니스맨, 차강혁이 여자 뒤꽁무니만 개처럼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니.

“따돌릴까요?”

택시 드라이버가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 남자 운전 잘해요. 헛수고예요.”

* * *

택시가 멈춰 서자 포르쉐도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은서는 쇼핑몰로 들어갔다.

그녀는 먼저 전자제품 매장에 들러서 필름 카메라를 샀다. 그다음에는 여성복 매장으로 가서 챙이 넓은 모자를 집어 들었다.

모자의 디자인은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아루바의 뜨거운 태양 빛을 잘 가려 줄 것 같았다.

은서는 거울 앞에 서서 모자를 써 보았다. 제법 잘 어울렸다.

구매를 결심한 그녀는 모자를 벗고 흐트러진 헤어를 정리한 후, 카운터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옆에서 기다란 팔이 쓰윽 나와 카드를 내미는 것이다.

개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계산까지 하겠다니. 도를 넘는 뻔뻔함에 은서는 인상을 대놓고 찡그리고 그 손을 쌀쌀맞게 쳐 냈다.

“필요 없어요. 돈 쓰고 싶으면 나한테 쓰지 말고 자선 사업이나 해요.”

송곳 같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강혁은 다시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은서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재빠르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점원의 손에 거의 쥐어 주다시피 하며 어설픈 네덜란드어로 우렁차게 외쳤다.

“꼭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귀청이 떨어질 만큼 목소리가 큰 건 물론이고, 눈에는 무시무시한 불기둥까지 활활 태워 올리고 있었다.

점원은 두 개의 카드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목소리도 크고 표정도 험악한 은서의 카드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다.

“저 원피스 예쁜데.”

만족스럽게 모자를 쓰고 매장을 나가려는데, 저음의 음성이 발목을 붙들었다. 은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잔꽃 무늬들이 그려진 레드브라운 컬러의 랩 원피스였다.

예쁘긴 예뻤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이 동하기는 했다.

“예쁜데 뭐 어쩌라구요.”

하지만 은서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고 씩씩한 걸음으로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혼잡한 쇼핑센터를 벗어나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로 섞여 들어갔다. 운치 있는 풍경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레이저가 꽂힌 것처럼 등 뒤가 따가웠다.

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뒤쪽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예상한 대로 차강혁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손에는 쇼핑백까지 들고서.

기어코 그 원피스를 산 것이다. 어차피 입지도 않을 텐데.

“스토커 짓 좀 그만해요.”

은서가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앙칼지게 말했다.

“스토커 아닌데. 난 그냥 여행 중이라고. 호기심 많은 여행객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

무슨 스피치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할 때마다 청산유수다.

“날 따라오고 있잖아요!”

“따라가는 거 아닌데. 우연히 방향이 겹치는 것뿐인데?”

“그래서 목적지가 어딘데요?”

“목적지는 없어. 그냥 길 따라 바람 따라 걸을 뿐이지.”

낯짝이 어찌나 두꺼운지 모르겠다. 대거리를 실컷 퍼붓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은서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노기 서린 눈길로 그를 노려보기만 하다가 등을 홱 돌려서 다시 길 위를 걸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뛰어서 도망쳐 봤자 금방 따라잡힐 테고, 그렇다고 여기 스토커가 있다며 현지 경찰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은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잔뜩 홀린 시선으로 그 건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와, 예쁘다…….”

철제 프레임의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유럽풍 건물에 저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특히, 은은한 파스텔 색조가 마음을 잡아끌었다. 외관 디자인은 고풍스러웠지만, 그 특유의 색감 때문에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성처럼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대문 앞에는 ‘For Sale’이라는 문구와 함께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사고 싶다…….’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이라니, 구미가 당겼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내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별장으로 삼기에 아루바는 너무 멀었다. 1년에 몇 번 오지도 못할 텐데.

현실적인 깨달음에 은서는 구매 욕구를 꾹 누르고 카메라 셔터나 눌렀다. 아쉬운 심정을 사진으로나마 달래 볼 생각이었다.

* * *

은서는 꽤 많은 사진을 찍은 후에야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차강혁도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스토커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멈추면 자기도 멈추고, 내가 걸으면 자기도 걸으면서. 차라리 개라고 해 줄 걸 그랬나?’

속으로 불만을 투덜거리던 은서는 서점이 보이길래 그곳으로 들어갔다.

고서적 위주로 파는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책장도 건물도 모두 오래되었다. 주인 역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6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서점 안에는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은 책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은서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책장 앞에 섰다. 좁은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으니 답답해서 모자를 벗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려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은서는 고개를 틀어 그 손을 간신히 피했다.

“감히 어딜 만지려고 들어요?”

“도와주려고 한 건데.”

“차강혁 씨 도움 따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스토커 짓 그만하라고 했죠?”

좁은 서점 안에서 그와의 거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뻔뻔하게 은서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책 사려고 들어온 거야. 나도 책을 꽤 읽는 편이거든.”

역시나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차강혁 씨가 좋아할 만한 책은 여기 없을 걸요?”

대충 훑어보니 고전 문학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좋아할 만한 기계나 경영을 다루는 책은 한눈에 봐도 없었다.

“내 아내가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데, 나도 읽어 볼까 싶군.”

그는 책장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빼내서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마담 보바리》의 프랑스어로 된 원서였다.

“좋아하는 책이죠. 하지만 차강혁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순한 이유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은서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불순한 이유?”

“불륜이나, 마차 안에서 치른 격정적인 정사 씬 때문에 좋아하는 게 결코 아니라…….”

거기까지 떠들다가 은서는 입을 헙, 다물었다. 그냥 작품성이 뛰어나서 좋아한다고 말만 해도 됐을 텐데, 굳이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한 거지?

필요도 없는 설명을 구구절절해 대는 바람에 괜히 분위기만 끈적끈적해졌다.

“마차라…….”

아니나 다를까 차강혁은 벌써 눈빛을 오묘하게 빛낸다. 손으로 턱을 슬슬 쓰다듬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가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재미있을 것 같군.”

“…….”

“아까 보니까 광장에서 마차 타기 체험을 할 수 있던데.”

“…….”

“우리도 오붓하게 마차나 타러 갈까?”

그가 걸음을 내디뎌 간격을 좁혀 왔다. 은서에게 바짝 붙어선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불에 더운 바람을 후, 불어넣었다. 순간, 솜털들이 쭈뼛거리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변태가……!’

은서는 손바닥으로 귀를 덮고 황급히 카운터에 있는 주인 노인을 살펴보았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고 있는 노인은 다행히 부부의 은밀한 애정 행각(정확히는 수컷의 일방적인 구애 행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말아요. 자꾸 이상한 짓 하면 경찰을 불러 버릴 테니까!”

은서는 잰걸음으로 걸어 그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멀어진 만큼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든지 경찰을 불러 보라는 식이었다.

‘사악한 인간…….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내 성격을 이용해서 수작질이라니.’

은서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차강혁을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태연하기만 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좋아. 이제부터 말도 안 섞고 눈길도 안 던져 줄 거야.’

처음부터 상대를 했던 게 실수였다. 철저히 무시했어야 했는데. 은서는 이제라도 그를 투명인간 취급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장을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오만과 편견》의 원서였다. 번역서는 집에 있지만 원서는 없었다.

은서는 책 모서리를 쥐며 책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책들이 너무 빽빽하게 꽂혀 있어서 안간힘을 써도 책이 안 빠지는 것이다.

끄응,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 힘을 쏟아부어 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때, 담백한 목소리가 청각을 휘감아 왔다.

“손 치워 봐. 내가 해 줄게.”

흥, 누가 당신 도움 따위 받을 줄 알고! 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책 모서리를 잡아당겼다. 손톱 끝이 하얗게 질리고 팔뚝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때였다. 책장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은서를 향해 무너지려고 했다.

“……!”

거대한 그림자가 진다. 겁에 질린 은서는 눈을 질끈 감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차강혁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책장은 그의 몸 위로 ‘쿵!’ 하는 둔탁한 충돌음을 내며 쓰러졌고, 동시에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 무언가 찢어진 듯 ‘뻑!’ 하는 파열음이 거세게 울렸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책장은 그의 등과 어깨를 덮친 채 대각선으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은서를 무참히 덮칠 줄 알았던 책장은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그가 온몸으로 은서를 감싸면서 무너지는 책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한 것이다.

“괜찮아?”

그 와중에도 그는 따스한 품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아내의 안위부터 챙겼다. 슬며시 눈을 뜬 은서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날린 거야?

“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어, 어떡해…….”

은서는 말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었다.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또 감격스러웠다. 울먹울먹, 곧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얼굴이다.

“멀쩡해.”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숨소리는 흐트러졌고 미간도 일그러진 상태였다.

내색은 안 해도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상식적으로 저 큰 책장에 등과 어깨를 직격으로 맞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한편, 주인 노인은 뜻밖의 사고에 대경실색하더니 옆 상점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젊은 장정을 불러왔다. 책장이 워낙 크고 무거웠기에 노쇠한 노인이 혼자 힘으로 움직이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젊은 장정과 노인이 합세해서 책장을 바로 세웠다. 그제야 압박감에서 해방된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그쪽이 불편한 게 확실했다. 아까 파열음도 거기서 났었다.

“어서 병원으로 가요.”

은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왼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울지 마.”

어느샌가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냥 오른쪽 어깨가 조금 뻐근한 것뿐이야. 병원까지 갈 일은 아니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은서는 염려 가득한 눈길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그게 왜 병원 갈 일이 아니에요? 사람 몸 위로 책장이 엎어졌는데! 그리고 어깨에서 뻑! 하고 소리가 났단 말이에요! 내가 다 들었어!”

“그냥 부딪치면서 난 소리야.”

“아니야. 분명 어깨에서 소리가 났어요! 어서 병원으로 가야 해요!”

물기 넘치는 목소리가 서점 안을 카랑카랑하게 갈랐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그가 눈물을 닦아 주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기만 한다.

저 때문에 그가 다친 것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미어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냥 내가 다치도록 내버려 두지, 왜 괜히 나서서 잘난 몸에 해를 입히는지.

내 실수였는데, 내가 부주의했는데, 내가 다쳤어야 마음이 편한데…….

“빨리 병원에…… 흐흑…….”

“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울지 좀 마.”

* * *

주인 노인은 도보로 1분 거리에 병원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정형외과 전문의가 한 명 있는 곳인데,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용하다고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은서는 그 병원으로 차강혁을 데리고 갔다.

병원에 가자마자 그는 엑스레이부터 찍었다. 잠시 후, 의사는 부부를 진료실로 불러서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은서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얼핏 스페인어처럼 들렸지만 스페인어는 아니었다. 파피아멘토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차강혁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살짝 쳤다.

“알아듣는 척하지 말고 영어로 설명해 달라고 해요. 아루바 사람들 영어 잘한대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알아듣고 있으니까 걱정 놓으라고.”

“네? 알아들어요?”

안 그래도 커진 눈동자는 더더욱 커졌다.

“파피아멘토어는 스페인어와 유사한 점이 많아.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면, 파피아멘토어를 알아듣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고.”

“그래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거예요?”

“당신은 못하나?”

“…….”

못한다. 은서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곧잘 해도 스페인어는 하지 못했다.

“Incluso si no me amas, te quiero.”

그는 뜬금없이 은서의 귓가에 대고 스페인어를 속삭였다. 달콤하고 매력적인 발음이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뜻이라는 건,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알았다.

의사는 설명을 다 끝냈는지 입을 다물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은서는 다시 그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의사가 뭐라고 했어요?”

“타박상이라는군. 진통제와 근이완제를 처방해 주겠대. 지금 쓰고 있는 게 처방전이야.”

“타박상? 정말이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은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더 심하게 다쳤길 바랐나?”

“그게 아니라…….”

타박상이라면 천만다행이지만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어깨에서 분명 소리가 났는데……. 혹시, 엑스레이로는 잡히지 않는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뼈에는 이상이 없어도 인대나 힘줄이나…….

“엑스레이 말고 다른 검사는 해 볼 필요 없대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호들갑 떨지 마.”

그는 은서의 말을 간단히 묵살하고 처방전을 챙겨서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약국에서 약을 탄 그는 거리로 나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저쪽으로 가 있어.”

희뿌연 연기를 손으로 치워 내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은서는 그의 곁에 딱 붙어서서 불안한 어조로 계속 종알거렸다.

“그 의사, 돌팔이는 아니겠죠? 아무래도 찜찜해요. 어깨에서 엄청 큰 소리가 났는데……. 우리 다른 병원도 가 봐요.”

“됐어. 괜찮다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왜 그래?”

그는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고 조금은 짜증스럽다는 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은서는 마음이 쉽게 놓이지 않았다. 아무리 저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해도 거대한 책장에 부딪혔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약 먹고 지켜봐요. 대신, 내일 일어나서도 불편하면 당장 큰 병원에 가는 걸로 나랑 약속해요. 아니, 그러지 말고 이참에 그냥 한국 가요. 한국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받고…….”

“당신도 한국에 같이 가는 건가?”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은서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같이 갈 거 아니면 말 보태지 마.”

단호한 음성이 은서를 내리찍어 누른다.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의 마음을 선뜻 받아 줄 수 없어 괴로웠다. 무엇보다도 그를 불행한 사고에 휘말리게 한 것이 심장이 쓰라리도록 아팠다.

“미안해요. 전부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책을 빼낸다고 억지만 안 부렸어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 멀쩡하다고 했잖아. 병원에서도 타박상이라고 했고. 난 괜찮으니까 신경 꺼.”

그는 은서의 턱을 지그시 붙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고개 숙이지 말라고. 당신 잘못 없으니까.”

지나가는 개가 봐도 제 잘못이라고 할 일인데, 이렇게 담담하게 아니라고 하니까 더더욱 미안해졌다. 코가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의 손이 부드럽게 눈물을 훔쳐 냈다.

“울지 말라니까.”

“…….”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여행을 계속해야 할 거 아냐.”

“그냥 호텔로 돌아갈래요.”

은서는 뜨거운 눈물을 흡, 삼키고 말했다.

제가 바깥을 돌아다니면 그도 저를 쫓는다고 돌아다닐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호텔로 복귀해서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왜. 더 구경하지.”

“보고 싶은 것도 없어요. 호텔에서 쉴래요.”

눈물 섞인 대답에 그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차 가져올게.”

“네?”

“차가 쇼핑센터에 있잖아. 가서 가져올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호텔로 데려다줄게.”

아, 그러고 보니 포르쉐를 쇼핑센터에 세워다 두었지.

그는 등을 보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은서가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안 돼요. 운전하지 말아요. 통증 아예 없는 거 아니잖아요. 뻐근하다면서요. 오른쪽 어깨에 부담 가하는 일은 당분간 자제하도록 해요.”

때마침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은서는 허공 위로 팔을 크게 휘저으며 택시를 붙잡았다.

“이거 타고 가요.”

그를 위해 은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피식 웃더니 택시에 올라탔다.

은서도 그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는 엔진 소리를 내며 호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나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는 건 처음이야.”

그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런데 난 오른쪽만 다쳤지, 왼쪽은 멀쩡하거든. 앞으론 그러지 마.”

“차강혁 씨도 앞으론 그러지 말아요.”

“뭘?”

“날 위해서 몸을 던지지 말라구요.”

은서는 자못 엄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글쎄. 그건 본능이라.”

“본능?”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고 싶은 남자의 본능을 대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쿵, 쿵, 거센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발길질을 했다.

확실히 차강혁은 유해한 남자다.

그는 편하게 사랑을 받으라고 했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결코 편해질 수 없다.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항상 폭풍우에 휘말린 것처럼, 심장이 발광을 하고 마음이 생난리를 치는데, 대체 어찌 편해질 수 있단 말인가.

* * *

“배고픈데, 같이 밥이나 먹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차강혁은 그렇게 말했다. 은서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후 6시였다. 배가 고파질 시간이었다.

“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

은서는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를 구해 준 남자와 저녁 식사 한 끼를 먹을 용의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유은서랑 저녁을 함께할 수만 있다면, 돌을 씹어 먹어도 좋다고.”

또 또 능글거린다. 가만 보면 여자한테 작업을 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저렇게 실력이 좋으면서 그동안 왜 그리도 딱딱하게 굴었는지…….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일찍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었다면, 우리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생각이다. 이미 지나온 과거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들이대는 건 무가치한 짓이지.

은서의 얼굴에서 씁쓸한 빛이 감돌다가 금세 지워졌다. 기술적으로 표정 관리를 한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탈리안 음식 괜찮아요?”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다고 했잖아.”

* * *

부부는 호텔 안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웨이터는 창가 쪽 자리로 그들을 안내했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탁 트인 정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상쾌한 해변의 풍경과 우뚝 선 야자수 나무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청명하던 하늘은 어느샌가 붉은 색채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바깥의 풍경과 레스토랑 내부의 고아한 인테리어가 근사하게 조화되고 있었다.

“뭐 먹을래요?”

은서가 메뉴를 뒤적이며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메뉴 책자를 제일 뒤쪽으로 넘겨 와인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은서는 이맛살을 구겼다.

“우선 식사 메뉴부터 골라요.”

“글쎄. 배는 별로 고프지 않은데.”

“아깐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그는 싱긋 웃더니 어깨를 가볍게 들썩거렸다.

장난스러운 태도에 은서의 이맛살은 더욱 구겨졌다. 하지만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저 그에게 최대한 맞춰 주고 싶을 뿐이다.

“난 티본 스테이크를 먹을 거예요. 차강혁 씨도 같은 메뉴로 할래요?”

고집스럽게 와인 리스트만 훑어보는 그를 향해 은서가 말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고갯짓을 멈추었다.

“아니, 난 파스타로 하지. 오일 파스타가 좋겠군.”

그는 우아한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메인 메뉴와 와인을 주문했다.

조금 뒤에, 식전 빵과 와인이 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메인 메뉴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는 왼손으로 포크를 들고 파스타 면발을 돌돌 말았다. 순간 은서의 만면은 걱정으로 가득 메워졌다.

“어깨가 많이 아파요? 오른손을 쓰지도 못할 만큼?”

“전혀. 난 당신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뿐이야.”

“네?”

“당신이 오른쪽 어깨에 부담 주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 당신 말을 받들어 일부러 왼손을 쓰는 거라고.”

그는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은서는 여전히 불안했다.

“괜찮은 거…… 맞아요?”

“타박상이라고 했잖아. 쓸모없는 걱정은 제발 내려놓았으면 좋겠군.”

“그렇지만…….”

“유은서, 내가 너보다 세 살이나 많아. 벌써 나이가 서른넷이나 먹은 어른이라고. 네 눈에는 내가 몸 하나 간수도 못 하는 얼간이로 보이나?”

“…….”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신경 끄고 밥이나 먹지.”

차강혁은 직선의 눈빛을 은서에게 메다꽂았다. 날카로운 시선은 강고한 음성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은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무리 은서에게 매달리고 구애를 하는 형세라 해도, 그에게는 여전히 그녀가 대적하지 못할 강한 힘과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짐승의 본능으로 은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속에 잔뜩 들어 있는 걱정스러운 말들을 억지로 꾹꾹 눌러 삼키고 칼질이나 했다. 그러면서 흘긋 그가 파스타를 먹는 모양새를 훔쳐보았다.

그는 왼손 사용이 능숙해 보였다. 왼손으로 면발을 마는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동그란 모양으로 아주 예쁘게 잘 만들었다.

“왼손으로도 잘하네요.”

“양손잡이니까.”

의외의 사실에 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를 만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는데, 그가 양손잡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양손잡이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원래는 왼손잡이였어. 앞뒤 꽉 막힌 아버지가 오른손을 사용하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양손잡이가 된 거지. 그 양반, 완전 구식이거든.”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간단히 ‘강요’라고 표현했지만, 그 단어의 이면에는 훨씬 더 극심하고 폭압적인 행동들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2등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들을 스터디 룸에 가둘 만큼 고압적이고 맹혹한 인간이니까.

어린 시절의 그가 안쓰러워져서 은서는 눈가를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스테이크를 그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고기도 좀 먹어요.”

상냥한 행동에 그는 피식 웃고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이런 거 안 챙겨 줘도 되니까, 그냥 나한테 돌아와라.”

낮으면서도 진중한 음성이 청각을 부드럽게 자극한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잘해 줄게.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아껴 주고, 사랑해 줄게.”

“……밥이나 먹어요.”

은서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애써 무시하고 일부러 무딘 말투로 대꾸했다.

* * *

저녁을 먹고 객실로 들어온 강혁은 인상을 찌푸리고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고 진통제를 물과 함께 삼켰다.

고통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칼로 저미는 것 같기도 하고, 망치로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통증이 느껴지는 와중에 은서 앞에서는 괜찮은 척을 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제기랄. 하아…….”

그는 고통에 찬 욕설을 조용히 내뱉고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업무 메일들을 훑어보고 회답을 보내기 위해 왼손으로만 타이핑을 쳤다. 오른손을 사용하는 건 어깨의 통증을 가중시킬 테니.

타닥타닥, 리드미컬한 타이핑 소리가 객실 안으로 넓게 퍼질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타이핑을 멈추고 휴대폰 액정을 힐긋 바라보았다.

최 실장이었다.

-사장님, 오늘 있을 화상 회의 스케줄 아루바 현지 시간으로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밤 10시에 윤 상무님과 미팅 잡혀 있으시고요, 새벽 1시에 기술개발팀과 미팅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 3시에…….

최 실장은 오늘의 스케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브리핑했다. 보고가 모두 끝나고 강혁은 통증에 젖은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하아…….”

-사장님, 목소리가 왜 그러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최 실장은 보스의 컨디션이 심상치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어깨를 다쳤어.”

-어깨요? 어쩌다가요?

“서점에 갔다가 어깨 위로 책장이 엎어졌거든.”

-네? 어쩌다 그런 일이……. 병원에는 가 보셨습니까?

“갔어.”

-뭐라고 하던가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뼈에는 이상이 없대. 하지만 회전근 파열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큰 병원으로 가서 MRI를 찍어 보라고 하더군.”

그는 은서에게는 거짓말을 했지만 최 실장에게는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회, 회전근 파열이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최 실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아직 MRI 검사는 안 받아 보신 거죠?

“어.”

-제가 아루바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내일 바로 검사를 받으실 수 있도록…….

“됐어. 다음에 받도록 하지.”

그는 최 실장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네? 다음에요? 회전근이 파열됐을지도 모르는데 다음으로 미루는 게 말이 됩니까? 아파도 웬만하면 내색도 안 하시는 분이 이렇게 목소리가 다 죽어 가는데…….

“지금 내겐 유은서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어. 한가롭게 검사를 받을 만한 여유가 조금도 없다고. 우선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싶군.”

-그럼 어쩌시려고요? 계속 이대로 방치하실 겁니까?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최 실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했다.

“진통제를 받아왔어.”

-어떤 약인가요?

“트라마돌염산염 50mg이라고 적혀 있군. 통증이 있을 때마다 먹되, 하루에 400mg을 초과하지는 말라는데.”

그는 약병을 훑어보고 대답했다.

-트라마돌이면 비마약성 진통제 중에서는 강한 건데……. 사모님은요? 사모님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가벼운 타박상으로 알고 있어.”

-네? 타박상이요? 혹시, 일부러 숨기신 건가요? 대체 왜……?

그는 서점에서 책장이 쓰러진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런 다음, 단호하게 말했다.

“유은서는 절대로 알면 안 돼.”

아내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고 싶지 않다. 그건 불의의 사고였고, 그녀를 구한 건 자신의 순수한 의지였으니까.

회전근이 아니라 어깨를 평생 못 쓰게 된다 해도 그녀를 구했을 것이다. 그런 당연한 일에 아내가 가슴 아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팔을 제대로 쓰지도 못할 만큼 아프다는 걸 은서가 알게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면서 자책이나 하겠지. 그 소심한 성격에 얼마나 땅굴을 파고 들어갈지, 안 봐도 훤하다고.”

-형, 바보야? 그걸 제대로 이용해 먹어야지! 아프다고 생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에, 뭐? 일부러 멀쩡한 척하면서 숨긴다고? 형, 그 잘난 머리 그런 식으로밖에 못 써?

난데없이 윤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혁은 피곤하다는 듯 손끝으로 편두를 세게 짓눌렀다.

“또 스피커폰인가.”

-네. 갑자기 차 팀장님께서 오셔서 막무가내로…….

“최 실장, 내가 애정 어린 조언을 하나 해 주지. 차윤혁과 어울리지 마.”

-형, 형수님한테 사실대로 실토하고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해. 그럼 맘 약한 형수님이…….

시끄럽게 떠드는 윤혁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손은 버릇처럼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는다.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통증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약통을 열어 진통제 캡슐을 한 알 더 집어삼켰다.

* * *

오늘 밤, 은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고뇌에 흠뻑 취해 버렸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고민의 실타래가 뇌중을 꽉 메워 버렸다.

한숨이 쏟아지고 하염없는 고민에 잠겨 드는 밤, 불쑥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은서는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10시였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지?’

의아해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감겨들었다.

“호텔 직원입니다. 심부름을 왔습니다.”

은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또 돈 자랑을 하려는 심산인가 보군.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선물이 간소하다.

벨보이는 책 한 권과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12B호 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은서는 천천히 손을 뻗어 선물을 전해 받았다.

책은 아까 낮에 서점에서 본 《오만과 편견》의 원서였고, 쇼핑백 안에는 그가 예쁘다며 구매했던 레드브라운 컬러의 랩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책장이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었었다.

《오만과 편견》을 사려던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원피스가 든 쇼핑백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그런데 그 물건들이 지금 은서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혹시, 이 밤에 서점으로 가서 책과 원피스를 찾아온 건가? 가뜩이나 어깨를 다쳐서 정신도 없고 몸도 고단할 텐데…….’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벅차고, 무언가가 넘쳐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여차하면 울 것 같아서 은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눈가에 힘을 꽉 주었다.

“……버려 드릴까요?”

벨보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벨보이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더니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은서는 《오만과 편견》의 낡은 페이지를 몇 장 넘겨 보다가 원피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원피스를 입은 몸을 요리조리 돌려 본다.

그러다 갑자기, 주먹으로 머리통을 툭 쳤다.

“뭐 하는 거야, 바보같이…….”

해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다짐을 했던 게 무색해진다. 모든 속박을 끊어 내고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리라고 결심했는데…….

빌어먹을 사랑이 자꾸만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다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겠어…….”

은서는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얼른 원피스를 벗었다.

* * *

새벽까지 업무에 몰두한 강혁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극심한 격통 때문에 고작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침대 시트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진통제는 새벽에도 여러 번 먹었지만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날보다 통증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어깨가 찢어진 것만 같았다.

“하아, 젠장…….”

그는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효과는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진통제를 기계적으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일에 몰두했다. 지금 부지런히 업무를 봐 두어야, 이따 오후에 은서가 일어나면 함께 외출을 할 테니.

시간은 흘러서 오전 11시가 되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전화가 왔다. 직원은 아주 다급하고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새벽 1시에 아내분께서 급히 체크아웃을 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알려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온몸이 차갑게 식고 뇌가 마비되는 느낌이다.

-어젯밤에 제가 교대를 하면서 부탁하신 내용을 다음 직원에게 전달했는데, 그 직원이 그만 깜박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직원이 주절주절 변명했다. 일찌감치 그에게 뒷돈을 받은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은서가 외출을 할 때마다 즉시 알려 주고는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체크아웃을 놓칠 줄이야.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저, 손님께 전해 주라며 아내분이 남기고 가신 물건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벨보이를 올려 보내도 될까요?

“일단 올려 보내요.”

전화를 끊은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또다시 도망칠 줄은 몰랐다. 누가 도둑고양이 아니랄까 봐, 몰래 뒤꽁무니를 내빼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다. 마음 같아서는 목줄을 채워 케이지에 가둬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요물에 빠진 대가가 이리도 혹독하다니…….

조금 뒤에, 벨보이가 물건을 가져왔다. 어젯밤에 선물로 준 《오만과 편견》의 원서와 원피스, 그리고 편지 한 통이었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담배를 태우며 편지를 읽었다.

[깊은 밤 내도록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봤어요.

맨 처음으로 떠오른 건, 이혼하자는 요구를 했을 때 당신이 격분해서 나를 강제로 안은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당신이 내게 목줄을 채웠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개인전에서 비상계단으로 끌려간 것이었어요.

당신에겐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짐승적 본성이 있어요. 난 그걸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구요.

물론 당신은 고치겠다고, 노력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그 약속이 과연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난 미지수처럼 불확실한 약속보단, 우리가 지나온 과거에 더 믿음이 가요.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면, 우리의 미래도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느낌이 들어요. 미래는 결국 과거가 말해 주는 거니까요.

나는 이제 모든 걸 털어 내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당신도 부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PS.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깨 검사를 자세히 받아 봐요. 나를 구해 준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감사했어요.]

편지를 쥔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이별의 텍스트를 가차 없이 찢어 버리려다 격정을 겨우 가라앉히고 편지를 반듯하게 접었다.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없애 버리고 싶으면서도, 이 잔인한 편지 또한 결국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기에 차마 찢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내리 줄담배를 피우며 괴로워했다. 극심한 통증은 이제 어깨를 넘어 온몸 전체를 잔학하게 덮치기 시작했다.

* * *

강혁은 담배 끝을 씹으며 전화를 걸었다.

“최 실장,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안 자고 있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은서가 또 도망쳤어.”

-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최 실장의 음성이 커졌다.

“유은서 신용카드 내역, 아직도 실시간으로 받고 있지?”

-아, 네. 저한테 바로 결제 문자가 오고 있어요. 그런데, 어제 쇼핑몰에서 결제한 게 마지막이고, 그 후로는 문자가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최 실장은 놀란 심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강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국을 떠나기 전, S카드를 포함하여 은서의 명의로 만들어진 모든 카드에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런데 어제 이후로 그 많고 많은 카드들 중에서 결제된 내역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새벽 1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벌써 열 시간도 넘게 시간에 지났다. 이동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돈을 쓸 수밖에 없는데…….

“현금만 사용하는 모양이군.”

골치 아파졌다는 듯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용카드로 아루바까지 추적했다는 걸 눈치챈 거야. 그래서 이번엔 치밀하게 현금만 쓰기로 한 거지.”

대책 없이 둔한 주제에 이럴 때는 여우처럼 군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어쩌죠…….

“아무래도 이쪽 사람을 구해야겠어.”

* * *

[디에고 얀 마르테스 사무소]

강혁은 청동제 간판으로 만들어진 간판을 흘긋 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2층으로 올라간 그는 노크를 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시가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잘 어울리는 메스티소였다.

“의뢰를 하나 하려고 왔는데, 그쪽이 마르테스입니까?”

남자는 강혁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커피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강혁이 소파에 앉았다.

마르테스는 커피 대신, 은색의 케이스에서 쿠바산 시가를 꺼냈다. 마르테스는 시가 캡을 커팅하고 전용 라이터로 균일하게 태운 시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시가를 물고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부드러운 연기가 허공을 찬찬히 나부끼고 혀끝으로 풍부한 풍미가 스며들었다.

시가의 맛을 음미하며 그는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앤티크한 디자인의 가구들은 유럽을 연상케 하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에는 동양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마르테스가 제일 영리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했다.

“의뢰하고 싶은 게 뭡니까?”

마르테스는 스페인식 악센트가 묻어 있는 영어로 물었다.

“공항 쪽에 연줄이 있습니까?”

“공항?”

“티켓 발권 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직원으로.”

지난 새벽, 은서는 퀸 베아트릭스 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한국에서 아루바까지 도망친 이력을 미루어 보면, 아마 이번에도 멀리멀리 떠났으리라.

그러니 티켓 발권 기록을 캐내서 일단 은서가 어느 나라로 갔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이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은서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뒷면에는 그녀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었다.

마르테스가 사진을 집어 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누굽니까? 당신 재산을 훔치고 달아난 옛 여자 친구?”

“그녀는 내 아내고, 내 마음을 훔쳐 갔죠.”

예상외로 달콤한 대답에 마르테스는 입가에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공항에 연줄이야 있죠. 그런데, 그 친구가 워낙 돈을 좋아해서. 물론 나도 돈을 좋아하고.”

그는 장방형의 검은색 가죽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금장치를 풀고 가방을 보란 듯이 열었다. 가방 안에는 현찰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착수금으로 충분합니까?”

* * *

마르테스의 사무소에서 나온 강혁은 택시에 올라탔다.

어깨를 붙잡고 고통스러운 숨을 흘리자, 택시 기사가 룸미러를 흘긋거리며 괜찮은지 물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해 주고 약통을 꺼내서 진통제를 삼켰다.

어제 무작정 운전대를 잡으려던 걸 은서가 막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이 상태로 운전을 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10분 후, 느긋하게 달리던 택시가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방문한 병원이었다.

“약을 계속 먹었는데도 통증이 전혀 줄어들지 않아요. 오히려 통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는 인상을 구기고 말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래서 제가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그 약으로 통증이 잡히지 않는다면 아마 상태가 심각한 수준일 겁니다.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가서 정밀 검사를 받을 예정입니다. 그때까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약을 처방해 주었으면 하는데.”

“트라마돌이 듣지 않는다면 마약성 진통제를 쓸 수밖에 없어요.”

“상관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의사는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종이 위에 무언가를 신중히 적기 시작했다.

“중독성이 몹시 심한 약이라 장기간 복용은 금물입니다. 딱 일주일만 처방해 줄 테니 최대한 빨리 검사를 받아 보세요.”

의사가 처방전을 내밀었다.

처방전에 기입된 약물은 바이코딘. 아편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 * *

바이코딘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통증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의식이 조금 흐려졌다. 몽롱하고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술에 흠뻑 취한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신이 초현실주의의 화폭처럼 오묘하게 일렁거린다고 할까.

바이코딘은 통증을 효과적으로 줄여 주었지만 대신 집중력을 앗아 갔다. 때문에 그는 더더욱 예민하고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저녁이 되자, 최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 실장은 늘 그래 왔듯 업무 브리핑을 올렸다. 그리고 은서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흥신소에 다녀왔어. 내일쯤 연락을 주겠다는군.”

-네. 어깨는 좀 어떻습니까?

“새로운 약을 받아왔는데 효과가 좋아.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어떤 약인데요?

“바이코딘.”

-아……. 그 약은 부작용도 심하고 중독성도 강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약 이름을 듣자마자 최 실장은 탄식했다. 목소리에도 염려가 그득했다.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한국으로…….

“내가 알아서 할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은서를 찾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었다.

-그러게, 내가 형수님한테 아픈 거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 형 상태 심각한 거 알았으면, 형수님도 안 떠났을 거라고!

윤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흥분한 듯 높게 찢어지는 음성을 들으며 강혁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은서가 제 곁에서 또 도망쳐 버린 건 슬픈 일이지만, 통증을 숨긴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형, 일단 돌아와. 한국으로 와서 치료부터 받자고. 형수님 찾아다니려면 몸이 성해야지. 어깨 다 나은 다음에 찾자고.

“바쁘다. 이만 끊는다.”

그는 여지없이 윤혁의 조언을 무시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독한 약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하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몸 하나 간수도 못 하는 얼간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 없었다.

* * *

새벽에 겨우 잠이 든 강혁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누군가가 몸 위로 올라타 숨통을 끊어 놓을 기세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은데 사슬에 몸이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 공포가 질려 온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손가락부터 차근차근 움직여 보려고 애썼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압박감이 자연스레 사라지면서 눈이 부릅떠졌다.

“하아……!”

가위에서 풀린 그는 격한 숨을 쏟아 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그때, 사근사근한 음성이 달팽이관을 부드럽게 진동시켰다.

“또 악몽을 꿨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슬립만 입은 은서가 그의 옆에 누워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진작 꿈 팔라고 그랬죠? 이번에는 나한테 꼭 꿈 파는 거예요? 내가 값 두둑하게 쳐줄게요!”

해끔한 얼굴로 조잘조잘 떠드는 아내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울컥했다.

그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로 손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을 걱정해 주던 아내의 모습이 환영이었다는 것을.

“젠장…….”

처참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고 침대를 비척비척 빠져나왔다. 그는 위스키를 삼키며 지독한 갈증으로 타는 목을 축였다.

“유은서…….”

그리움을 담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애틋하고 간절한 목소리가 어둠을 구슬프게 갈랐다.

“개가 되라고 하면 개가 될 거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기꺼이 내놓겠어. 제발…… 나한테 돌아와.”

* * *

날이 밝았다.

마르테스로부터 연락을 받은 강혁은 급히 사무소로 갔다. 마르테스는 어제처럼 쿠바산 시가를 권했고, 커피 테이블 위에 비행기 티켓 사본을 내려놓았다.

“당신 와이프의 최종 목적지는 포클랜드 제도요.”

“포클랜드 제도?”

강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티켓 사본을 훑어보았다.

“남대서양에 있는 군도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마르테스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 와이프, 참 별종이군요. 아루바에서 포클랜드 제도까지 가려면 꽤나 번거로울 텐데. 최소 세 곳 이상을 경유를 해야 하거든요.”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는 것도 그렇지만 각 경유지에서 대기해야 하는 시간도 제법 길어서, 아루바에서 포클랜드 제도까지 가려면 못해도 45시간은 각오해야 했다.

“당신 와이프는 마이애미, 산티아고, 푼타아레나스를 거쳐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하는 티켓을 끊었어요. 아마 지금도 계속 이동 중일 겁니다.”

마르테스가 턱을 매만지며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포클랜드에 도착할 거라고는 100% 장담하지 못하겠군요.”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겠죠. 비행 루트가 워낙 귀찮고 복잡하니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경유지에서 아예 머무를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방향을 틀었을지도 모르니까.”

“출입국 기록을 살펴봤는데, 아루바에서 마이애미로 떠난 건 확실합니다.”

“그럼 우선 마이애미로 가야겠군요.”

다음 행선지를 정한 그는 눈빛을 단단히 빛냈다.

* * *

은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체의 날렵한 날개와 솜사탕처럼 푹신해 보이는 하얀 구름이 망막에 맺혀 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데, 느닷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는 건 슬픔을 씻어 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 걸 보면, 내 안에는 씻어 내야 할 슬픔이 너무도 많은 모양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울고 싶지 않아서 그를 떠나왔는데, 왜 나는 아직도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걸까. 상처받기 싫어서 도망쳐 왔는데, 왜 나는 아직도 가슴 저리게 아프기만 한 걸까.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왜 나는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고 위태롭기만 한 걸까.

오직 끝없는 혼돈만이 이어질 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건 가시밭길 위를 걷는 것처럼 힘들었다. 그런데 그를 버리는 건, 그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 * *

마이애미로 간 강혁은 현지 흥신소를 통해 은서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다. 그녀는 예정대로 산티아고로 떠났다.

그는 아내를 쫓기 위해 산티아고행 티켓을 끊었다. 비행기가 뜰 때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브로커를 만나 바이코딘을 다량으로 사들였다.

어깨는 여전히 말썽이었다. 바이코딘이 없으면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드는 격통을 접하게 될 테니, 약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챙겨 두어야 했다.

그는 공항 라운지로 가서 산티아고행 비행기가 뜨기를 기다리며 알약을 삼켰다. 그러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청각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차강혁. 너어…… 되게 재수 없는데, 그런데도 난 네가 좋아. 네가 너어무 좋아서, 온종일 네 생각만 하구…… 네 꿈도 꾸고…….」

「그래요. 나, 차강혁 씨 사랑해요.」

「멍청하게도, 아직 사랑하고 있네요.」

목소리가 차츰 선명해지고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청초하고 맑고 사랑스러운 얼굴…….

만지고 싶은 충동에 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그의 손은 허공을 방황하듯 떠돌다 힘없이 툭 떨어졌다.

바이코딘을 복용한 이후로 꽤 자주 환청을 듣고 환영을 본다. 아마도 약의 부작용이겠지. 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 * *

은서는 산티아고에서 스탑 오버를 하고 푼타아레나스를 거쳐 포클랜드 제도로 떠난 것이 확인되었다. 강혁은 동일한 루트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한 그는 흥신소를 고용해 출입국 기록부터 체크했다.

“입국한 기록은 있어도 출국한 기록은 없네요.”

흥신소 직원이 빙긋 웃으며 영국식 영어로 말했다. 그제야 강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나라에.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여러 섬들이 모여 있는 이 제도에서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자 막막함이 몰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포클랜드의 섬들을 모두 다 합쳐도 면적이 그리 크지 않고, 인구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흥신소 직원도 똑같은 말을 했다.

“포클랜드는 작은 나라고 사람도 많지 않아요. 아시아인은 더더욱 드물어서, 아내분을 찾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보겠습니다.”

* * *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는 카리브해의 따스하고 온화한 기운을 품고 있는 아루바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남극권과 가까운 이곳은 은서의 마음처럼 춥고 황량하기만 했다.

장시간 비행과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은서는 끔찍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고열과 탈력감은 물론이고, 기침을 할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구토를 하는 것도 예사였다.

은서는 호텔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약이나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뜩이나 포클랜드는 작고 고요해서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있는데,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으니 더더욱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특히 늦은 밤, 백야로 창밖이 환할 때에는 왠지 을씨년스러워서 기묘한 공포감마저 들었다.

지독한 몸살감기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장장 3주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날이 추운 것도 있었지만, 은서가 병원에 가지 않고 호텔의 비상약으로만 미련하게 버텨서 병을 키운 탓도 있었다.

아무튼 오늘, 드디어 열병에서 해방된 그녀는 간편하게 필름 카메라만 챙겨서 외출을 감행했다.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 비행기를 타고 손더스섬으로 이동했다. 비행기가 섬에 착륙한 다음에는 지프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펭귄 서식지까지 갔다.

“와…….”

해변 위에서 수천 마리의 젠투 펭귄들이 모여 있는 진풍경을 보자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은서는 넋이 빠져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구경에만 집중했다.

눈으로 열심히 펭귄들을 쫓으며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귀엽다…….”

“유은서만큼 귀엽지는 않은데.”

난데없이 들리는 익숙한 한국말에 은서는 전신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차강혁이 서 있었다.

바닷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우아하게 너울거렸다. 얼굴은 전보다 야위었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고 조금은 지쳐 보였다.

“…….”

은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아루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아릿한 감각이 선명한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추적을 막기 위해 신용카드도 쓰지 않았는데. 온갖 발악을 해도 나는 결국 그의 손바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이 빌어먹을 술래잡기는 이제 그만두면 안 되나.”

해풍이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이러다 세계 일주까지 할 판이야.”

뼈 있는 농담을 한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때, 저 앞에 있던 펭귄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뒤뚱뒤뚱 신나게 돌진하다가 꽈당,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저 녀석은 운동신경이 형편없군.”

그는 턱짓으로 넘어진 펭귄을 가리켰다.

“애 앞에서 왜 말을 그렇게 해요? 형편없다니요? 애가 그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을 거 아니에요?”

꿈결 같은 재회에 당황하고 놀라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던 은서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는 피식 웃는다.

“포클랜드 제도에 사는 젠투 펭귄이 한국말을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내뱉고 보니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펭귄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 민망해진 은서는 손끝으로 턱을 슬슬 긁었다. 그러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깨는…… 어때요?”

“어깨가 왜.”

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깨 위로 거대한 책장이 떨어진 일을 벌써 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아루바에서 다쳤잖아요.”

“타박상이라고 했잖아. 진작 나았지. MRI도 두 번이나 찍어 봤다고.”

“다행이네요.”

은서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다.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자, 이제 어쩔 거지.”

“뭘요.”

“내가 당신을 찾아냈으니, 당신은 또 도망갈 건가.”

깊고 검은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며 은서를 향해 꽂혀 들었다.

이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자 여지없이 마음이 약해진다. 이래서 도망쳐 왔던 거다. 차강혁을 보고 있으면, 겁도 없이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으니까.

은서는 그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괜히 신발 코로 바닥을 툭툭 때린다.

“차강혁 씨가 결정해 봐요. 평생 나랑 술래잡기를 할지, 아니면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줄지.”

“그냥 나한테 잡혀 주면 안 되나?”

“…….”

은서가 침묵을 지키자 그는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윽고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절망처럼 알싸하고, 체념처럼 텁텁한 한숨이었다.

“그래, 좋아.”

“…….”

“유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

“우리, 이혼하자.”

<4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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