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 * *
은서는 눈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혹시나 환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에 있는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꿈같아서,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때, 그가 대뜸 손을 뻗어 은서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얏!”
“꿈이 아니야. 명백한 현실이라고.”
그가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영역이었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차강혁 씨가 왜 여기 있어요? 회사는 어쩌구요?”
“알게 뭐야.”
“알게 뭐냐뇨. 차강혁 씨에게 제일 중요한 게 회사잖아요.”
그가 제 위치를 알아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욱더 놀라운 건 그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아루바까지 오려면 못해도 스무 시간이 넘는 장시간 비행을 각오해야 한다. 직항 노선도 없어 귀찮게 경유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차강혁은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태평양을 건너오는 수고로움을 감행하기보다는 한국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는 여기에 왔다. 천하의 워커홀릭이 회사를 후순위로 밀쳐 두고, 이곳 아루바까지.
“틀렸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유은서 너야.”
간명한 대답에 은서는 현기증을 느꼈다. 심장은 쿵쿵거리면서 요란하게 날뛴다. 해변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대며 굳게 다짐한 마음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어 흐트러지고 말았다.
차강혁이 나타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못 본 새 더 뻔뻔해졌군요. 그런 대답하면 누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죠? 또 사람을 붙인 건가요?”
은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쌀쌀맞은 음성으로 물었다. 진심이 아닌 말에 심장이 뛰어서는 안 되니까.
“안 붙였어.”
“그럼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데요?”
“본능이지.”
“네?”
“난 유은서가 어딜 가든 다 알 수 있는 타고난 본능적 감각이 있거든.”
그는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은서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발목까지 오는 맥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 안에 가려져 있을 흉터가 신경 쓰인 그는 오른쪽 무릎에 시선을 노골적으로 겨누었다.
“다리는 어때?”
“멀쩡해요. 하지만 기분은 상당히 별로군요. 차강혁 씨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당신은 못 본 새 비꼬는 실력이 늘었군. 나날이 일취월장한단 말이야.”
아내의 가시 돋친 말에도 그는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여기까지 온 용건이 뭐죠?”
“뭘 것 같아?”
깊고 검은 눈동자가 은서를 향해 직선으로 거침없이 꽂혀 들었다. 확고하고 분명한 눈빛이다.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은서는 그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나치게 커다란 데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에, 손등에 툭 튀어나온 힘줄이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이 손이 대단히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을 때면 언제나 좋았다. 따스하게 감싸 주는 온기가, 부드럽게 휘감아 오는 촉감이,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는 했다.
하지만 이 손은 내 것이 아니었다. 어디 손뿐일까. 나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은서는 냉정하게 그의 손을 쳐 냈다.
“이혼하자고 했어요. 내 뜻을 무시하지 말아요.”
“난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어. 유은서 너야말로 내 뜻을 무시하지 마.”
“강혁 씨!”
은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쇳소리를 내질렀다. 두 눈에는 서릿발이 단단하게 섰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의 완고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
언제나 그는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 내가 상처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사랑 없는 결혼에, 허수아비 아내 노릇에, 내가 지치든 피가 말라 죽든 그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순순히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해 주었겠지…….
“난 이제 더 이상 당신과 같이 못 살아요. 단 하루도 차강혁 씨와는 살 수 없다구요. 이혼에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소송까지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피차 번거로워지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자구요.”
“왜 이렇게까지 이혼을 고집하는 거지? 혹시, 민승아 일을 알고 있는 건가?”
‘민승아’라는 이름에 은서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역시 알고 있었군.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는 씁쓸하게 읊조렸다. 최 실장은 절대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고 단언했지만, 그는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혼 요구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에는 민승아가 낸 뺑소니 사고가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내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것이다.
“그래요. 다 알아요! 다 안다구요! 어떻게,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어요?”
은서는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다시금 귀청이 찢어지도록 새된 고함을 질렀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분노 뒤에 찾아온 감정은 슬픔이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신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덤덤히 인정하는 그의 말에 은서는 허탈한 숨을 터뜨리며 조소를 내던졌다.
“하긴, 날 놓치고 싶지 않았겠죠. 차강혁 씨는 욕심이 많은 남자니까.”
“인정하지. 나도 가끔은 조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 당신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이 통제가 되지 않아서 곤란할 때가 많으니까.”
담갈색 눈동자에 서려 있던 독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원하는 건 내 배경과 조건뿐이면서, 교묘하게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말장난에 심사가 뒤틀렸다.
“차강혁 씨는 욕심도 많고 비겁하기까지 하군요.”
“속여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당신을 속인 건 일이 이렇게 될 걸 알았기 때문이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더 완벽하게 속이지 못해서 후회가 되는군.”
“뭐라구요?”
“민승아 일, 끝까지 모르게 했어야 했는데.”
그 순간, 은서가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짝, 하는 매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그의 뺨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쓰레기…….”
뺨을 친 손이 덜덜 떨린다. 단전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격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람을 바보로 봐도 유분수가 있지. 뭐? 나를 끝까지 속였어야 했다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요! 더 이상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은서는 대거리를 퍼붓고 몸을 홱 돌려세웠다. 그때 갑자기, 그가 뒤에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요!”
탄탄한 팔뚝에 온몸이 갇힌 은서가 몸부림을 쳤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강하게 힘을 실어서 그녀를 옭아매듯이 안았다.
“이거 놓으라구!”
“사랑해.”
“……?”
“사랑한다, 은서야.”
귓가를 살랑이며 부드럽게 고백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정지되고 두뇌도 정지되었다.
그 말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서 환청처럼 들렸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진다.
시간이 수십 초나 흐른 뒤에야 은서는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맞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사랑한다고.”
그는 또다시 달콤하게 고백했다.
귓바퀴를 뜨겁게 울리는 그 말이 가슴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은서는 그를 말없이 보고만 있다가 이내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입술을 들썩거렸다.
“나쁜 놈…….”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차강혁이 개자식에 나쁜 새끼라는 건 수백 번, 수천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차강혁. 넌 내가 우습게 보이지? 나 그렇게 물렁한 사람 아니야!”
은서는 젖은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바락바락 썼다. 용서할 수 없다. 이혼하지 않기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다니. 진심도 아니면서.
“그깟 거짓 고백에 네가 바람피운 거 넘어가 줄 만큼, 난 미련한 반푼이가 아니라고!”
“바람?”
“그래, 바람! 왜? 신성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니? 아름다운 불륜, 뭐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
“불륜?”
“나쁜 새끼, 나는 그 말 믿었는데……. 다른 여자는 필요 없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급기야 은서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탕탕 때리며 엉엉 울어 버렸다. 어린 아이처럼 울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역삼동 오피스텔에 가서 뭐 했어? 잤어? 민승아랑 잔 거야?”
“은서야.”
“언제부터 잤니? 걔가 그렇게 좋았어?”
“유은서, 조용히 좀 해.”
“날 안으면서도 그 여자만 떠올렸겠지? 내가 그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입 다물고 내 말을 좀 들으라고!”
내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가 은서의 양 손목을 틀어쥐고 벼락처럼 소리쳤다. 목에 핏대가 선명하게 오를 정도로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사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간절해 보였다.
“무슨 말?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나를 더 철저하게 속였어야 했다는 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찬찬히 호흡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에 은서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오해? 무슨 오해?”
은서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다그쳤다.
“내가 오피스텔에 간 건 어떻게 알았지?”
“그거야…….”
거칠 것 없이 쏘아붙이던 은서가 말끝을 흐렸다. 휴대폰을 몰래 본 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니까. 이런 음침한 행동을 좋아할 남자는 없겠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은서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끝날 관계인데, 차강혁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휴대폰을 봤으니까! 내가 차강혁 네 휴대폰 좀 봤다구! 뭐 불만이야?”
은서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일부러 더 당당하게 외쳤다.
“그래? 어디까지 봤는데?”
의외로 그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는데 표정 변화도 없고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민승아랑 메시지 나눈 거 전부 다.”
“메시지만? 좀 더 자세히 보지 그랬어? 기왕이면 통화 녹음 파일까지 찾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일을 하다 보면 많은 변수가 생기지. 그래서 통화를 하면 항상 녹음이 되도록 설정을 해 놨어. 민승아랑 통화한 내역도 녹음되어 있을 테니, 직접 들어 봐. 들어 보고 판단하라고.”
은서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굼뜬 걸음으로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의자에 털썩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민승아와 몇 번 통화를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어서 궁금하던 차였다. 그가 직접 들어보라고 했으니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많고 많은 파일들 중에서 민승아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찾아낸 은서는 재생 버튼을 힘 있게 눌렀다.
「좋은 말로 할 때 한국에서 꺼져.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
「너무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아내가 있는 남자한테 이러는 거 치졸하다는 생각 안 드나?」
「난 네 거였던 적이 없는데. 민승아, 착각도 병이야. 사람 그만 괴롭히고 병원에나 가 봐라. 너, 망상장애 있어.」
「안 그래도 요즘 우리 은서가 몸이 허약해져서 내가 근심이 많거든. 너까지 얹지 마라.」
「우리 은서, 재미있는데. 그 여자, 내 아내야. 함부로 지껄이지 마.」
통화 내용은 은서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달콤하고 은밀한 밀어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민승아는 일방적으로 매달리기만 했고, 차강혁은 아킬레우스의 방패처럼 일말의 틈도 허용치 않았다. 사람을 저렇게 깔아뭉개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는 민승아를 야멸차게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은서를 걱정하고 있었다. 민승아가 열불이 나서 숨이 꺽꺽 넘어갈 만큼 그는 유별나게 은서만 챙겼다.
“유은서. 상상력이 풍부한 건 알겠는데, 그 상상력은 작품 할 때 쏟아 줬으면 좋겠군.”
“…….”
“당신 두고 부정한 짓 저지른 적 없어. 나한테 여자는 유은서뿐이니까.”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내 목숨을 걸고, 하늘에 맹세하지.”
단호한 확언이 고막에 콱 박혀 들어왔다.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티끌만큼의 여지도 주지 않았는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니…….
하지만 메시지 내용만 보면 충분히 의심할 만도 했다. 그는 느닷없이 민승아의 오피스텔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피스텔엔 왜…….”
“최 실장과 같이 갔어. 대화는 10분 정도 나눈 것 같군. 원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오피스텔 CCTV 화면을 확인시켜 줄 수도 있어. 최 실장을 심문해도 좋고.”
“최 실장님과는 왜 같이 갔고, 민승아 씨와는 10분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눈 거죠?”
평정심을 찾은 은서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평소처럼 높임말을 사용해서 물었다.
차강혁은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답지 않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저 은서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다의적인 시선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보던 그는 불쑥 은서의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날, 여우비가 내리던 날처럼.
“……?”
은서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후의 행동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그가 원피스 스커트의 끝자락을 붙잡고 끌어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 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변태 짓을 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진 은서가 화를 내려는 찰나, 그의 손이 멈췄다. 스커트는 무릎 위까지 올라갔고, 숨어 있던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릎을 사선으로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그는 애틋한 눈길로 흉터를 보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흉터를 어루만졌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이내 그는 흉터에 입술을 맞췄다. 포근한 온기가 흉터 위로 녹아들고, 은서는 온몸을 움찔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돌발적인 스킨십에 숨이 막혔다.
워낙 변태 같은 남자라 말도 안 되는 곳에 키스를 곧잘 하지만, 흉터에 키스하는 건 너무 징그럽지 않나. 우둘투둘한 촉감에 지네같이 생긴 모양새가 굉장히 비호감인데.
은서는 그의 어깨를 팍 밀쳐 버렸다. 그러나 장신의 체구가 쉽게 밀려날 리 없다. 오히려 그는 팔로 은서의 오른쪽 다리를 꼭 감아 안더니 길게 이어진 흉터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처음부터 끝까지, 흉터 선을 따라서 꼼꼼하게.
“왜 거기다 키스를…….”
“이 다리, 다치게 만든 사람이 민승아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화약 같은 폭발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붉은색 렉서스의 차주가 민승아라고.”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자 은서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사라졌다. 극적으로 커진 홍채는 경악으로 만연해 있었다.
‘뺑소니 범인이 민승아였다니……. 그래서 그는 나를 속였다고 한 거야? 다 알면서 고의적으로 진실을 감췄던 거야?’
뺨이 경련하듯 가느다랗게 떨렸다. 불규칙한 호흡이 쏟아지고 신경이 쭈뼛거렸다.
“오피스텔에는 그 이야기를 하러 갔지. 소득 있는 대화는 아니었어. 민승아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날 밤에 말이야.”
그는 고개를 들고 은서와 시선을 반듯하게 맞추었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났지.”
“사고요?”
“민승아가 트럭에 치였어. 운전자는 달아났고.”
“트, 트럭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충격의 연속이다. 저를 뺑소니 친 민승아가 인과응보처럼 뺑소니를 당하다니. 순간, 언젠가 들었던 그의 살벌한 목소리가 뇌간을 전류처럼 타고 흘러내렸다.
「가증스러운 여자야. 끔찍한 인간이라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해. 차라리 그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죽이고 싶다던 여자는, 어쩌면 제가 아니라 민승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차강혁이 트럭 사고를 지시한 건…….
아, 그건 아니야. 나쁜 남자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사악한 남자는 아니라고. 본인의 일과 커리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남자인데, 그런 위험한 짓을 할 턱이 없지.
“민승아 씨, 괜찮대요? 얼마나 다친 거예요?”
은서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태생이 그런 여자였다.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심성이 여리고 모질지 못해서, 자신에게 해를 가한 상대마저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보다 훨씬 더 심하게. 모델 일은 다시 못할 거야.”
“세상에…….”
끔찍하다는 듯 은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민승아가 괘씸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 일을 영영 묻어 두기로 했어. 민승아가 뺑소니범이라는 걸 당신이 몰랐으면 했으니까.”
“왜…….”
“말했잖아.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그는 은서의 손을 지그시 붙잡았다.
“당신이 나를 미워하고 원망할까 두려웠어.”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에 애절함이 아른거렸다. 불안하고 애가 타는 눈빛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여자쯤이야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거만하게 코웃음을 치는 남자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런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내가 민승아를 잘 처리했다면 아니, 처음부터 민승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야.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당신은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강혁 씨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건 민승아 씨가 저지른 일이고, 민승아 씨의 잘못이니까.”
그의 우려와는 반대로 은서는 의연하게 진실을 받아들였다.
민승아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까지 줬다니 소름이 끼치고 분노도 차오르지만, 민승아는 이미 큰 벌을 받았으니 이쯤에서 그냥 잊고 넘어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숨기려고 했던 그의 심정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미안해서 그랬겠지. 한때는 그를 소시오패스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그도 일말의 감정은 있는 남자였다.
“내가 멍청한 오해를 했군요.”
은서는 맥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오해에도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내게 돌아오는 건가.”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끝내고,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곁에 둘 수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감이.
하지만 은서는 그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아뇨. 난 돌아가지 않아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은서는 또박또박 분명하게 발음했다.
“이혼을 하겠다는 내 결정은 변함없어요.”
그의 만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절망스럽고 참담한 얼굴이다.
“대체 왜…….”
“민승아 씨에 대한 오해가 기폭제가 된 건 맞아요.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그를 알고 지낸 지는 이제 겨우 1년 정도.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관계를 정의 내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린 언제나 문제투성이였어요. 이 터무니없는 오해가 우리 관계의 핵심을 보여 주고 있죠.”
파도가 휩쓸려 오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관계, 그게 바로 우리였다. 탄탄한 지반도 없고 철근 같은 골조도 없는, 그런 허약한 관계.
“우리에게 신뢰가 있었다면, 우리에게 유대감이 있었다면…… 내가 이 먼 곳까지 무작정 떠나 오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은서는 지독히도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엔 신뢰도 유대감도, 아무것도 없죠. 우린 그동안 짐승처럼 교미만 했으니까요.”
“그 말은 좀 섭섭하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우리가 몸을 섞을 때마다 섹스 이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가요. 하지만 난 당신의 삐뚤어진 욕정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걸요.”
난폭하게 몰아붙이면서도 그는 언제나 시선을 곧게 맞대어 왔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집요한 눈 맞춤을 했었다.
그 강렬한 눈빛에 은서는 번번이 마음이 흔들리고는 했다. 가슴이 거세게 요동치고 심장이 뜨겁게 들끓었다.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치는 원초적인 몸짓은 결국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켜 그를 더욱 깊게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은서는 일부러 냉정을 가장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이혼을 결심한 의지가 약해져서는 안 되니까. 상처로 점철된 결혼 생활을 어리석게 리바이벌할 수는 없다.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부족했던 탓이겠지. 더 노력할게. 앞으로는 몸이 아니라 마음도 통하도록, 내가 노력할게.”
화가 난 연인을 달래려는 듯 그는 자상하게 말했다. 차강혁에게 이런 말랑말랑한 면모가 있다는 게 놀랍다.
하지만 색다른 그의 모습에 감탄할 겨를 따위는 없다. 은서는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의지를 굳혀야 했다.
“아뇨. 노력하지 말아요. 우리 관계는 이미 깨질 만큼 깨졌고, 그 깨진 조각들을 모아서 붙일 수는 없어요. 그래 봤자 금방 또 깨질 테니.”
안 되는 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다. 깨진 유리병을 억지로 붙일 수 없고, 바스러진 낙엽을 억지로 붙일 수는 없듯이.
깨진 건 결국 깨진 거다. 우리가 그렇다.
“이러지 마, 은서야. 여기서 너랑 끝낼 수 없어. 내게 기회를 줘.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그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차강혁처럼 담백하고 칼 같은 남자가 고작 여자 앞에서 무릎이나 꿇고 간청하는 꼴이라니. 퍽이나 괴상하고 퍽이나 해괴하다.
최상위 포식자가 나약한 피식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왕이 노예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큼 모순적이다.
“기회는 이미 충분히 준 것 같은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것 같은 초탈한 음성이 객실의 공기를 갈랐다.
“나, 차강혁 씨랑 살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은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놓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구요. 강혁 씨 화낼 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갑자기 이성을 잃고 미친놈처럼 난폭하게 굴 때마다, 난 항상 공포에 질렸어요.”
그가 잔혹한 횡포를 저지를 때마다, 그가 폭군처럼 거칠게 군림할 때마다, 은서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마음은 붕괴되고 붕괴되어서 이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게다가 그 무심하고 무뚝뚝한 성격은 사람을 얼마나 피 말리게 만드는데요? 매번 나 혼자서만 맘 졸이고, 나 혼자서만 애끓고, 나 혼자서만 조바심 내고…….”
서러웠던 지난날들이 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고였다.
“나는 분명히 당신 아낸데, 나는 분명히 당신과 결혼했는데…… 난 항상 당신이 멀게만 느껴졌어요.”
결국 눈물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눈물이 은서의 뺨을 촉촉하게 적셨다.
“결혼해서 행복보다 불행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어요. 더 이상 나를 갉아먹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남들은 사랑을 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지고 충만해진다는데, 은서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텅 비기만 했다.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허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아마 잘못된 상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일 테다. 감당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해서 그런 것일 테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줘요.”
은서는 슬픔으로 얼룩진 눈물을 닦아 내고, 목구멍이 죄어 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겨우 참아내고, 다시금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은서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절대로 너를 놓을 수 없다는 견고한 의지를 표명하듯이.
“처음으로 해 보는 사랑이라 서툴러서 그랬어. 이젠 안 그래. 전부 다 고칠 거야. 거친 성향도 투박한 행동도, 전부 다 고치겠다고. 당신에게 나를 완전히 맞추겠어.”
“사랑? 나는 그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차강혁이 나를 사랑한다는 게…… 거짓말 같고 공수표 같아요.”
그만큼 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너무 많이 너무 심하게 상처를 받아서, 그가 저를 사랑한다는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나를 아프게 했어?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내게 상처 줬어?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나를 울렸어?
“은서야, 대체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이 통할까. 다시는 널 아프게 하지 않아. 널 소중히 아끼고, 널 열렬히 사랑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는 처참한 한숨을 짓고 고개를 떨구었다. 은서의 무릎에 이마를 갖다 대고, 흉터 위에서 이마를 찬찬히 문지르며 애원을 계속한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처럼 안쓰러워 보여서 은서는 가슴 한구석이 시려 왔다.
“내가 잘할게. 내가 노력할게. 당신이 원하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겠어.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다 바칠 거야.”
“…….”
“나한텐 당신뿐이야. 유은서 너밖에 없다고. 네가 없으면 난 살 수가 없어.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마.”
“…….”
“사랑해.”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은서와 시선을 그윽하게 맞대고 뜨겁게 고백했다.
“사랑한다.”
“…….”
“마음이 부서지도록 사랑하고 있어.”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면서 물기로 젖어 들었다. 이내 눈가로 눈물방울이 맺히더니 뺨 언저리를 타고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이 한낱 여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너무나 이상한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애타게 젖어있는 눈에 은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심장이 격랑처럼 들끓었다.
은서는 고개를 홱 돌려 그의 젖은 눈길을 피했다. 그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분명 마음이 약해지리라.
“그만해요. 우린 여기까지예요.”
거세게 약동하는 심장을 애써 배반하며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만 가 주세요. 이렇게 무릎 꿇고 매달리는 거, 너무 치졸해요. 어서 나가 주세요.”
시린 가슴은 이제 면도날에 저며지는 통증을 느낀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를 버리는 건 나인데, 왜 내 가슴이 아픈 걸까.
“은서야…….”
“나가라구요! 제발 좀 가요! 가란 말이야!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결국 은서는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치고 오열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려 대고 미친 사람처럼 발광을 하며 그를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그렇게 해야만 이 고통스러운 이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차강혁이 떠나고 진짜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스테이크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졌지만 은서는 한 조각도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미니 바에서 레드 와인과 진을 꺼냈다. 투명한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고 적당한 양의 진을 섞었다. 좀 더 빨리 취하기 위해서였다.
은서는 기계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술은 계속 넘어가는데 마음은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국의 해변도, 근사한 호텔도, 풍미 좋은 술도, 그 어느 것도 위로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은서는 속절없이 눈물만 흘렀다. 왜 아무리 울어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는 걸까. 어린애처럼 울고 또 울기만을 반복할 뿐이다.
비통한 슬픔 속에서 그의 애절한 고백이 귓가를 연신 괴롭히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한다. 마음이 부서지도록 사랑하고 있어.」
그 자존심 강한 남자가 프라이드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보이면서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는데…….
그걸 뻥 걷어찼으니 이제는 완전히 끝인 거다.
더 이상 그는 매달리지 않을 테다. 후련하게 손을 털고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일이 중요한 남자이니, 아마 오늘 당장 아루바를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거야.
그럼 저도 마음을 잘 추스르고 며칠 뒤에 귀국을 하면, 이혼은 깔끔하게 성사되는 것이다.
‘잘됐어. 잘된 거야. 짐승을 길들일 수는 없어. 난 그 남자를 감당할 그릇이 못 돼.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순리인 거지…….’
은서는 갈가리 찢어진 마음을 애써 달래 보았다. 그와의 이별이 운명이고 순리라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다했다고.
* * *
은서는 흥청망청 술을 퍼마시고 내내 울기만 했다.
그러다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지는 못했다. 악몽을 꾸다가 다시 잠들기를 여러 번 반복했으니까.
오후의 태양이 한창 뜨겁게 타오를 무렵,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부스스 떴다.
‘누구지?’
이불 속에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뭉그적거리며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그러자 이제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호텔 직원입니다. 심부름을 왔는데, 잠시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영어 발음이 달팽이관으로 걸쳐졌다. 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심부름? 무슨 심부름?’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비척비척 걸어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챙 없는 모자에 버건디색 제복을 차려입은 벨보이가 서 있었다.
벨보이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란 튤립 꽃다발을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복도 바닥에는 무수한 쇼핑백들이 늘어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양해를 구한 벨보이는 먼저 튤립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쇼핑백들을 객실 안으로 옮겨 놓았다.
“12B호 손님이 보내신 겁니다.”
“12B호요?”
호텔 투숙객과는 안면을 튼 적이 없는데…….
“그리고 이것도.”
벨보이는 팜 비치의 깨끗한 바다가 그려진 엽서를 내밀었다. 은서는 얼떨떨해하며 엽서를 건네받았다.
“튤립은 총 365송이입니다.”
“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벨 보이가 물러가고 은서는 거대한 꽃다발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 튤립들이 모두 365송이라고? 대체 누가 저런 걸 보낸 거지? 거기다 쇼핑백들은 또 뭐고?’
밀려오는 궁금증에 재빠른 손길로 엽서를 뒤집어 보았다. 눈에 익은 단정한 필체가 시야를 점령해 온다. 그제야 머릿속의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깨진 걸 붙일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새로 만들어 나가는 거야. 우선, 데이트부터 신청하지.]
차강혁……. 아직 안 떠난 거야?
* * *
은서는 전투적으로 걸었다. 12B호 앞에 서서 주먹으로 문을 탕탕 두드렸다.
“차강혁 씨, 안에 있죠? 나예요. 문 좀 열어 봐요!”
불쾌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은서는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왁스를 바르지 않은 내추럴한 헤어에, 청바지에 흰 티셔츠만 걸친 캐주얼한 패션이 화가 날 정도로 근사했다.
열린 문 사이로는 객실 내부가 보였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은서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미로 같은 도면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상태였다.
“보아하니 바쁜 것 같은데,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그래요? 이역만리 관광지에서 일하는 것보단 회사에서 일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모니터 화면을 흘긋거리며 은서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차강혁이 어떤 남자던가.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걱정해 주는 건가. 고마워.”
태연한 태도에 은서는 인상을 확 구겼다.
“걱정 아니거든요? 방금 벨보이가 왔다 갔어요. 그 물건들은 대체 뭐죠?”
“보면 모르나. 선물이잖아. 1주년 선물. 한국 시간 기준으로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1년 되는 날이라고.”
은서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음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가져가요. 난 선물 따위 필요 없으니까.”
“필요 없으면 버려.”
“그걸 어떻게 버려요?”
“못 버릴 것도 없잖아. 벨보이를 불러. 팁을 쥐여 주면서 모조리 버려 달라고 부탁하면 아주 좋아할 거야.”
“이 남자가 끝까지…….”
무신경한 응수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은서는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시간까지 잔 건가.”
“네?”
“머리는 산발에 푸석푸석한 피부, 거기다 눈곱까지.”
“아…….”
직설적인 지적에 은서의 만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꼴이 추한 것도 추한 거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일에 매진하고 있는데 저는 게으르게 늘어져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은서는 곧장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형편없는 제 모습에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그가 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지지부진하게 이별하는 것보다 단칼에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닌가.
‘그래요. 나 지금까지 자고 있었고 세수도 안 했어요!’라고 은서가 큰소리를 뻥뻥 치려는 찰나였다. 선수를 빼앗겼다.
“이런 얼굴로 예쁜 건 반칙인데.”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은서의 뺨을 쓰다듬고, 엄지로 눈에 낀 눈곱을 떼어 냈다.
부드러운 스킨십에 자동반사 하듯 가슴이 덜컹거렸다. 은서는 갑자기 빨라진 심장 고동에 당황해하다가, 야멸찬 손길로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선물은 내가 알아서 버릴게요. 차강혁 씨는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서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요!”
은서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12A호실로 돌아왔다.
객실 문을 쾅 여닫고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왼쪽 가슴에 갖다 대니, 심장이 팔딱팔딱 아주 신명나게도 날뛰고 있었다.
‘발작 좀 그만해. 이 멍청아…….’
* * *
객실 안은 튤립 향으로 가득했다. 향긋한 꽃향기가 자꾸만 신경에 거슬려서 결국 벨보이를 불렀다.
은서가 튤립과 쇼핑백들을 모두 정리해 달라고 요청하자, 벨보이는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몇 번이나 확인해 물었다.
“꽃은 버리고, 쇼핑백에 든 물건들은 당신 여자 친구에게 주든 직원들과 나눠 가지든 알아서 하세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던 벨보이는 은서의 단호한 태도에 입가를 씰룩거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은서가 팁을 쥐어 주려고 하자, 벨보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괜찮다고 사양을 하고 물건을 챙겨서 나갔다.
그녀는 튤립의 잔향마저도 완벽하게 지워 내기 위해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시간이 차차 흐르고 객실 안에는 튤립 향이 사라지고 바다 내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제야 은서는 창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개운하게 씻고 나서는 옷을 챙겨 입고 해변으로 나갔다.
“그림같이 예쁘네.”
드넓게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를 보며 은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리브해의 보석이라는 수식어답게 아름다운 바다가 느긋하게 물결을 치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에메랄드색 바다로 섞여 들어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해변가에는 노을에 젖는 바다를 바라보며 선셋 디너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백사장 위에 테이블들이 세팅되어 있어서 은서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때마침 저녁 시간대라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관광지였지만 현지인들도 제법 몰려들었다.
귓가로는 다양한 언어들이 들려왔다.
아루바는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지만 파피아멘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또 영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그 다양한 언어들이 이 아름다운 도시를 더욱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잠시 후에, 레스토랑 직원이 은서에게 메뉴를 건네주었다. 은서는 랍스터 요리와 모히토를 주문했다.
절제 없이 술이나 퍼마시며 괴로워하고 우는 건 이제 그만둘 거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좋은 경치도 보고, 신나게 여행을 즐기면서 차강혁을 떨쳐 낼 것이다.
“저, 한국인이시죠?”
붉게 물든 바다를 구경하며 음식을 기다리는데, 낯선 남자가 불쑥 은서에게 다가와 한국어로 말을 붙였다.
남자는 야자수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하와이안 팬츠에, 유명 락 스타의 얼굴이 크게 프린팅 되어 있는 요란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을 꽤나 존경하는 모양인지, 머리가 그롤처럼 장발이다.
은서는 대번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식상한 멘트를 이 자그마한 섬나라에서도 들을 줄이야.
“저도 한국인이에요. 반가운 마음에 말 걸어 봤어요.”
이쪽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만. 은서의 속내도 모르고 장발남은 눈치 없이 환하게 웃었다.
“혹시 합석 괜찮으신지…….”
“이 여자, 나랑 데이트하는 중인데.”
그때, 웬 덩치 큰 남자가 은서의 옆자리에 앉더니 그녀의 어깨 위로 팔을 툭 걸쳤다.
이 두꺼운 팔뚝의 주인이 누구인지 은서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뻔뻔하고 거만하게 구는 남자는, 제가 아는 한 오직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오붓한 식사 자리에 날파리가 꼬이는 건 사양이야. 이만 꺼져 줬으면 좋겠군.”
‘날파리’라고 지칭당한 장발남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난 게 한눈에 훤히 보였다.
하지만 장발남은 그와 싸울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모래알이나 퍽퍽 걷어차며 꽁무니를 내뺐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강혁과 주먹다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는 장대처럼 큰 키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견고하고 다부진 골격을 갖추고 있는 남자니까.
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꼬리를 내리는 게 상책이다.
“남자를 끌어들이는 재주가 참 뛰어나단 말이야.”
오만불손한 태도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시니컬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은서는 이맛살을 진하게 구겼다.
“난 끌어들인 적 없어요.”
“본인은 모르겠지. 그게 더 나쁘다고. 순진한 얼굴로 사람을 홀리는 게 얼마나 미칠 노릇인데.”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은서는 양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그 순간, 위압적인 명령이 청각을 거칠게 때렸다.
기가 막혀 그를 빤히 보았더니 서늘한 눈빛이 망막에 충돌하듯 부딪쳐 왔다. 언제나 왕좌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강력한 포식자의 기운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이다.
은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게 차강혁이지.
“역시, 어제 차강혁 씨 말을 믿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고치긴 뭘 고쳐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명령조에 제멋대로 굴기나 하고. 난 당신 아랫사람이 아니에요. 더 이상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은서는 따발총처럼 말들을 따다닥 쏘아붙이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강한 악력에 손목이 단단히 붙들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같이 저녁만 먹자. 부탁이야.”
부탁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그의 말투는 한껏 누그러졌다. 검은 눈동자에 깊이 박혀 있던 날카로운 칼날도 말끔히 빼냈다.
멋모르고 으르렁거리던 사냥개가 주인의 엄한 명령에 자못 잠잠해진 느낌이다.
“내가 귀찮은 떨거지를 떼어내 줬잖아. 감사 표시는 하라고. 나한테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줄 수 있지 않나.”
그는 끈질기게 요구하고 회유했다. 은서는 손목을 그러쥐고 있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술을 굼뜨게 움직였다.
“손…… 놔요.”
의외로 그는 순순히 손목을 풀어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손목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틀어쥐고 있었을 텐데.
불과 1분 전에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은서는 그를 비난해지만, 사실 지금 상황을 보자면 그는 변하긴 조금 변했다. 예전에는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흉포한 맹견이었다면, 지금은 말귀가 약간은 통하니까.
손목이 자유로워진 은서는 모래 위를 터벅터벅 걸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그의 맞은편 자리. 은서는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밥만 먹는 거예요.”
짐짓 도도한 말투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레스토랑 직원은 은서의 앞에 랍스터 요리와 모히토를 내려놓고, 강혁에게 메뉴를 건네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드라이 마티니.”
“식사는요?”
그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밥을 먹으라는 잔소리가 목젖까지 치솟아 올라왔지만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니까.
은서는 관심 없는 척하고 포크로 랍스터의 살점을 푹 집어서 입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어 삼킨 뒤에 사무적인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한국엔 언제 돌아갈 건가요?”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지. 당신과 같이 돌아갈 거니까.”
단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극명히 드러나는 어조였다.
은서는 모히토로 목을 축이고, 그 못지않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래요. 같이 가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요. 이혼 서류에 서명해 주겠다고.”
“그건 안 돼.”
역시나 확고한 단언에 은서는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세게 짓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이리도 지독하게 이혼을 거부하는 거죠? 이유가 뭐예요? 실패하기 싫은 건가요?”
“실패? 이혼을 실패라고 정의하는 건 너무 촌스러운 사고방식 아닌가. 난 세련된 남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촌스러운 남자도 아니야.”
가시 돋친 말에 그는 그것이 부당한 추측이라는 듯 미간을 구기고 유려한 말솜씨로 받아쳤다. 그러나 은서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뾰족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럼 내 배경을 놓을 수 없는 건가요?”
“무슨 배경?”
그의 반문에 은서는 잠시 주저하다가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내 뒤엔 유성중공업이 있잖아요. 난 모기업 회장 딸이라구요.”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유은서, 이쪽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나?”
“네?”
“유성과 삼우의 인수 합병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유례없는 빅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 두 기업이 합쳐지면 ‘사상 초유의 거대 골리앗’이 탄생한다고.”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 사회마저 시끌벅적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어. 특히, 일본 쪽에서 태클이 굉장히 심했다고. 유성과 삼우가 합쳐지면 글로벌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니까.”
은서는 사업 이야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일단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인수 합병 당시 삼우가 치명적인 위기에 내몰린 건 맞아. 하지만 삼우는 여전히 조선업계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어.”
“…….”
“당시 유 회장님께서는 삼우가 경영 위기로 연구를 중단한 G타입의 울트라 롱 스트로크 엔진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 G타입 엔진이 개발되어 선박에 탑재만 된다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거라고 본 거야.”
G타입은 뭐고 울트라 롱 스트로크는 무엇일까. 은서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실현되었어. 내가 유성의 투자를 받아서 가장 먼저 한 일이 G타입 엔진을 안전하게 제작해서 LNG 운반선에 완벽하게 접목시키는 거였으니까.”
“…….”
“유성의 자본력과 삼우의 기술력이 합쳐진 건 서로 윈윈이었다고.”
“…….”
“삼우가 유성의 자회사로 들어가긴 했지만 다른 기업들처럼 수직적인 구조는 아니야. 인수 합병임에도 불구하고 삼우의 이름이 그대로 살아 있고, 내 조부이신 선대 회장께서 경영에서 손을 뗀 것 외에는 기업 지배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의 눈은 영민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서가 예술을 사랑한다면, 그는 일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매캐한 쇠 냄새와 붉은 용접 불꽃들이 파밧 튀어 오르는 중공업 시장 이야기를, 그는 재미난 동화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즐겁게 이야기했다.
“모기업만큼 크고 강력한 자회사, 모기업보다 더 큰 포텐셜을 품고 있는 자회사, 그게 바로 삼우라고.”
“…….”
“내가 모기업 회장님 눈치 보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위치는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줬으면 좋겠군.”
자신만만한 확언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맞선 날을 떠올리고 고갯짓을 멈추었다.
「나한테는 결혼도 비즈니스입니다. 이득이 생기면 하는 거죠. 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을 뿐입니다. 유성중공업 사위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때는 분명히 내 배경에 혹한 것처럼 말했었는데…….
“근데, 맞선 볼 때는 내가 가진 배경과 조건 때문에 결혼하는 것처럼 말했잖아요. 결혼이 비즈니스니, 유성중공업 사위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느니…….”
“그날이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나는 날이었지.”
“네. 그랬었죠.”
“겨우 두 번 만난 여자에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껴서 그러는데,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라고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
그는 한쪽 입매를 장난스럽게 끌어 올렸다. 또 능글거리지.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말에 은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걸 따지시는 분이, 세 번째 만남에서는 여자를 만나면 주로 침대로 데려간다는 둥, 옷을 벗긴다는 둥, 저질스러운 말을 잘도 쏟아 냈군요?”
“그거 당신 꼬시는 거였잖아. 빨리 자고 싶다고.”
적나라한 직구에 은서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짐승 같은 인간…….”
“인정하지. 유은서만 보면 발정이 나서 제어가 안 되니까. 짐승도 이런 짐승이 없지.”
때마침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서 천연덕스럽게 떠드는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너울거리게 했다. 잔잔한 바람에 조화되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생겨서 짜증이 더 치밀었다.
은서는 애꿎은 포크를 말아 쥐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잘난 얼굴만 아니었으면 진작 포크를 날려 버렸을 텐데.
“내가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야.”
그는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워 내고 진지하게 말했다.
“유은서 널 사랑하기 때문이지.”
검은 홍채가 견고하게 빛났다. 사랑한다는 말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싶다는 듯이.
“거짓이나 공수표 같은 게 아니야. 순수한 내 진심이라고. 당신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