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 *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다시 우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로 은서는 모든 연락을 철저히 차단했으니까.
“내 얼굴 별로 안 보고 싶겠지만, 그래도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어. 누나가 사고를 당했다고 하니까 걱정이 돼서.”
우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날 밤 바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을 고스란히 상기시켜주듯, 얼굴에는 상처와 흉터가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잘 지냈어? 아, 환자에게 이런 인사는 조금 웃긴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우현은 커다란 보온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 사골국인데, 우리 누나가 직접 끓인 거야.”
“지현이가?”
“어. 누나 무릎 골절됐다는 소식 듣고, 우리 누나가 되게 정성 들여서 끓였어. 골절에는 사골국이 좋대. 꼭 챙겨 먹어.”
“일하느라 바쁠 텐데 언제 이런 걸……. 지현이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 줘.”
은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10년도 훌쩍 넘은 우정이었다. 한때 서로 감정이 상해 있긴 했지만 그 오래된 우정이 결코 얄팍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심하게 챙겨 준 지현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근데 지현이는 같이 안 왔어?”
“내가 같이 오자고 했는데 우리 누나가 자꾸 민망하다고 해서.”
“민망?”
“나 다친 걸로 우리 누나가 말을 심하게 했다며. 그거 때문에 좀 부끄러운가 봐. 미안해하기도 하고.”
당시 지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말들이 은서는 이해가 되면서도 서운했었다. 하지만 서운했던 마음도 정성이 듬뿍 담긴 사골국 하나로 벌써 다 풀려 버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보온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서는 지금 여기에 지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속으로 내심 아쉬워했다.
“나도 누나한테 많이 미안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는데…….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너무 비겁했고 너무 경솔했어.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우현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사과했다. 진중한 태도였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간절하게 빛나는 눈은 이 사과가 결코 허언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은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을 넘은 우현의 행동으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묻어 두고 싶었다.
그게 은서의 방식이었고, 은서의 성격이었다. 유은서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미워하고 원망할 성격은 못 되었다.
“몸은 좀 어때? 아직도 치료받고 있어?”
“많이 좋아졌어. 내 걱정은 말고 누나 몸이나 잘 챙겨.”
은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순간, 우현의 시야로 검붉은 자국이 들어왔다. 하얀 목덜미 위의 검붉은 자국은 누가 봐도 키스마크였다. 우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네.”
“응?”
“남편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
“아…….”
‘남편’이라는 단어에 은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남편. 요즘은 잘 길들여진 개처럼 온순하게 굴고 있지만, 수틀리면 언제든 난폭한 늑대로 돌변할 수 있는 남편. 그 남편이 올 시간이었다.
만약 차강혁이 들이닥쳐서 우현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아아, 상상하기도 싫다.
“우현아. 저기, 내가…….”
은서는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한 음성으로 운을 뗐다.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이만 가 줄래?’라고 부탁하려는 찰나,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신은 없는 게 분명하다. 두 남자를 또 대면하게 만들다니…….
병실 안으로 들어선 차강혁은 우현을 보자마자 인상을 험상궂게 구겼다. 거침없이 냉혈을 내뿜는 차디찬 눈빛은 영역을 침범당한 야생의 맹수처럼 호전적이었다.
잔인하고 난폭한 맹수는 침입자를 살육이라도 할 기세로 무참히 으스러뜨릴지도 모른다. 그는 적을 공격하는 데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최상위 포식자니까.
팽팽한 긴장감에 은서는 숨이 막히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눈동자를 목적 없이 빙그르르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우현이 그를 향해 반듯하게 묵례를 했다.
“은서 누나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얼굴 봤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우현은 은서에게 눈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려 뚜벅뚜벅 걸었다.
그나마 우현이 영리하게 행동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대로 문밖으로 쭉 걸어 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충돌은 없을 것이었다.
우현의 발걸음이 거의 문 앞까지 다다르자, 은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포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봐, 잠깐 대화 좀 하지.”
* * *
옥상으로 올라온 차강혁은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빨아서 느긋하게 연기를 내뱉는다.
“내 아내를 계속 만날 생각인가?”
“계속 만난다고 하면요? 절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우현의 삐딱한 반응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니라고는 대답 못 하겠군. 사실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야. 그날 밤, 그냥 깔끔하게 담가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담가 버린다니. 표현 한번 저속했다. 하지만 조직폭력배 같은 이 말이 블러핑이 아니라는 걸, 우현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차강혁은 무자비한 남자였다.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사람 하나 없애는 거, 그에게는 일도 아닐 터였다.
만약 그날 우현이 은서에게 키스를 했다면, 우현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숨통이 끊어져서 구천을 떠돌고 있었겠지.
“은서 누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분입니다.”
“알아. 근데 그 여자는 이런 날 좋아해. 개자식이 취향인 모양이야.”
그는 시니컬하게 응수하고 잿빛 담뱃재를 바닥으로 툭툭 털었다.
단순한 말과 단순한 행동인데, 차강혁이 하면 알 수 없는 무게감과 위압감이 풍겨 온다. 그가 온몸에서 내뿜고 있는 강한 수컷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우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이 남자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쟁에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안 만납니다.”
우현은 묵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포기하기로 했거든요.”
씁쓸한 다짐에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은서 누나한테 말은 못 했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다.”
그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며 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한때는 은서 누나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같이 거칠고 위험한 남자로부터 은서 누나를 빼 와야 한다고.”
“…….”
“하지만 제가 어떤 짓을 해도 누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
“누나가 원하는 남자는 오직 그쪽뿐이니까.”
우현은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쏟아 냈다. 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을 놓는다는 건 생각보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아직 계속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에요.”
우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쓸어 만졌다. 턱뼈가 조각나듯 깨져서 치료에는 충분한 기간이 필요했다.
“남의 여자를 건드리면 그 꼴이 나는 거야. 소중한 교훈을 얻은 셈 치라고.”
냉정한 일갈에 우현은 맥없이 웃었다.
“치료가 다 끝나면 파리로 떠날 계획입니다. 그곳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영화를 찍을 거예요. 누나를 잊으려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일에 몰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실연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건가? 부디 훌륭한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군.”
차강혁은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내버리고 구둣발로 비벼 껐다. 이제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서로의 어깨가 스치는 순간, 우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은서 누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합니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이라고?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네?”
“내가 널 왜 때렸다고 생각하나?”
“…….”
“힘자랑을 하고 싶어서 때렸던 건 아니야.”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는 다시 성큼성큼 걸었다. 옥상 문이 열렸다가 쾅 닫혔다.
넓은 옥상에 혼자 남겨진 우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첫사랑을 놓기로 결정한 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빌어먹게도 예뻤다.
* * *
은서는 손톱까지 물어뜯어 가며 노심초사했다.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두 남자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겠다고.
‘설마, 그 대화가 피지컬적인 대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손톱을 하도 물어뜯어서 살점까지 드러났다. 그때, 문이 열리고 차강혁이 들어왔다.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현이는요?”
“갔어.”
“설마…….”
“멀쩡한 상태로 돌려보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도 마.”
은서는 그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 하나 없이 말끔한 걸 보면, 두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혁 씨, 나는…… 우현이가 올 줄 몰랐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나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혹시…… 화난 거 아니죠?”
“화났는데.”
“네?”
“질투도 나고.”
“지, 질투요?”
예상치 못한 단어에 은서는 말까지 더듬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차강혁이 질투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차강혁처럼 메마르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질투를 한다고? 말이 안 되잖아.
“잠깐이었지만 당신이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는 게 아주 기분 나빠. 불쾌하다고.”
불쾌하다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그는 미간까지 일그러뜨렸다.
은서는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남자, 단순히 못마땅한 감정을 질투와 헷갈리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수컷동물은 으레 다른 수컷들을 견제하지 않는가.
“그건 질투가 아니라 그냥 속이 뒤틀린 것 같은데요. 차강혁 씨 많이 삐뚤어진 남자니까.”
은서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우현에 대한 그의 불쾌함은 수컷으로서의 동물적인 본능일 뿐, 절대 질투는 아닐 거라고 확신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 안다는 듯이 함부로 정의 내리지 마.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유은서 너, 독심술 능력이 형편없다고.”
그는 강하게 받아쳤다. 강고한 목소리만큼 눈빛도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압도적인 기운에 일방적으로 밀린 은서는 본인의 주장을 더 펼치지 못하고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아, 아무튼. 우현이랑은 앞으로 웬만하면 만나지 않을게요.”
은서가 우현의 사과를 받아 주기는 했지만, 그게 예전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우현의 속마음을 안 이상, 친남매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건 무리였다. 우현 역시 결국에는 흑심을 품은 남자였으니 경계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거야.”
“네?”
“조만간 파리로 떠난다더군.”
“……?”
“당신을 잊기 위해서.”
파리? 나를 잊기 위해서 우현이가 파리로 떠난다고?
“아까 만났을 때는 그런 이야기 전혀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소식에 은서는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연갈색 눈동자도 적나라하게 흔들렸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
“섭섭한가?”
“…….”
아니, 섭섭하진 않았다. 다만 미안했다. 우현의 순수한 의지로 파리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우현을 파리로 내쫓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처신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너무 둔한 게 문제였다. 일찌감치 우현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현명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역시 기분이 나쁘군.”
그는 어두워진 은서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그만하지.”
“네? 뭘…… 그만해요?”
“다른 새끼 생각은 그만하라고.”
“…….”
“난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해 줬고, 더 이상 써먹을 인내심은 없어.”
“…….”
“이제 그만 그 녀석을 지워 내라고.”
“…….”
“이 머릿속에는 오직 나만 있었으면 좋겠군.”
그는 은서의 머리를 우그려잡았다가 놓더니 동그란 정수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샤워를 해야겠어.”
“…….”
“유은서 너랑.”
“……네?”
은서는 급격히 당황했다. 뜬금없이 샤워를 같이하자니.
“질투가 났다고 했잖아. 당신과 함께 샤워를 하면 질투에 사로잡힌 내 마음이 조금은 풀어질 것도 같아.”
차강혁은 한쪽 입꼬리를 유하게 끌어 올리고 능글거렸다.
순간, 수치스럽고 음란하기 짝이 없던 욕실의 풍경이 은서의 뇌리를 점령했다. 심장이 빠른 템포로 내달리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뺨이 담홍색으로 물든 은서와 달리, 그는 태연하게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이어서 단추를 술술 끌러 내리고 드레스 셔츠마저 벗어 버렸다.
탄탄한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자 위기감은 극도로 선명해졌다. 은서는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몸을 사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강인한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손쉽게 환자복을 벗겨 내고 깁스한 다리에 방수 커버를 씌웠다.
알몸이 된 은서를 한쪽 어깨에 가뿐히 걸치고 그는 욕실로 척척 걸어갔다.
“싫어요. 안 할래요!”
넓은 어깨 위에서 몸이 뒤집힌 은서가 아등바등 사지를 뒤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엉덩이를 찰싹 후려쳤다.
“아앗! 아프잖아요.”
은서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징징거렸다. 그는 엄하게 대꾸했다.
“얌전히 있어. 내가 하자는 대로만 따르면 떡이 나온다고.”
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머릿속에 떡칠 생각밖에 없는 인간이.
* * *
물이 비처럼 쏟아지다가 멈췄다. 그는 샤워 타월로 하얀 거품을 만들어 내서 은서의 몸을 문질렀다.
거품을 흠뻑 머금고 있는 타월은 목덜미와 쇄골을 지나, 가슴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만지작거린다.
“하지 마요.”
은서가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물론 그는 그녀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젖가슴을 계속 집요하게 지분거렸다.
“하지 말…… 하읏.”
젖꼭지를 톡 건드리자 참지 못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은서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번지르르하게 입을 놀렸다.
“나 아직 그 새끼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야. 협조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핑계가 대단하군요. 항상 그런 식이죠.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아서 날 괴롭히는 게 차강혁 씨의 유별난 특기죠.”
“그렇게 폄하하면 서운해. 난 매일같이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말이야.”
“대체 나를 언제 기쁘게 했다고, 하으읏…….”
앙칼지게 따지려는 순간, 거품 묻은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음탕한 손길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랫배가 꿈틀거리고 가랑이가 뜨끈뜨끈해져서 더는 신경질적으로 굴 수 없었다.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졌고 골반은 바르르 떨렸다.
그는 그녀의 예민한 반응을 충분히 감상한 후에 손가락을 빼내고 수전을 틀었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당연하다는 듯이 젖가슴과 사타구니를 저격했다.
* * *
샤워가 끝나고 은서는 침대 위로 던져졌다. 그는 젖은 몸 위로 올라타 살점을 물어뜯었다.
“하아……!”
그는 성감대만을 집중공략 해서 키스 자국을 남겼고, 손과 혀로 끊임없이 페팅했다. 탁월한 애무로 여지없이 절정에 도달한 은서는 잔뜩 노곤해져서 스르륵 꿀잠에 들었다.
밤은 새벽을 넘어 아침이 되었다.
눈을 뜬 그는 간밤에 한 짓을 그대로 반복했다. 은서를 홀딱 벗겨서는 우윳빛 살결에 집요하게 키스마크를 찍는 것이다.
그는 육식 짐승처럼 실컷 이빨질을 한 다음에야 슈트를 차려입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변태 주제에 옷발은 더럽게 잘 받아요.’
잘 뻗은 몸매를 훑어보며 은서는 마음속으로 꿍얼거렸다.
이런 순간에는 늘 배알이 뒤틀린다. 조금 전만 해도 발정이 난 짐승처럼 야만스러운 숨을 토해 내며 달려들어 놓고, 이제 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번듯한 비즈니스맨 돌아갈 때는 왠지 심술이 돋았다.
그는 실크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은서의 뇌리에서 섬광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태평하게 누워 있던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앉아 야심 차게 말을 꺼냈다.
“넥타이, 내가 해 줄까요?”
매력적인 홍채가 은서를 그윽하게 겨누었다.
“여기 앉아 봐요.”
은서가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탁탁 두드리자,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의 곁에 앉아 넥타이를 건네주었다.
은서는 웃음이 삐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신중하게 움직이는 손길에는 사실 불순한 의도가 가득했다.
매듭이 거의 완성되는 순간, 은서는 넥타이를 사정없이 쭈욱 잡아당겨서 그의 목을 확 졸라 버렸다. 볼록한 목울대가 섹시하게 일렁거리며 기침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보기보다 머리가 나쁘네요. 이런 시시한 장난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은서는 눈꼬리를 휘면서 키드득거렸다.
“일부러 당해 준 거야.”
그는 넥타이의 매듭을 바로 잡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방금 목이 졸린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태연한 태도였다.
“네? 일부러 당해 줬다구요?”
“그래. 기어오르는 게 오죽 깜찍해야 말이지.”
여유가 철철 흘러넘치는 그의 반응에 은서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츄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야.”
츄르? 갑자기 웬 츄르? 츄르는 고양이 간식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은서는 갑자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남자가 나를 또 미물 취급하고 있구나!
“츄르는 당신이나 먹어요!”
순한 얼굴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면서 숨을 과하게 색색거리는데, 뿔난 모양새가 제법 귀엽다.
“난 유은서만 먹으면 돼.”
그는 미소를 머금고 끝까지 능글거렸다.
“빨리 회복이나 하라고. 당신 남편 쫄쫄 굶어서 아사하기 직전이니까.”
* * *
그가 출근을 하고 병실에 혼자 남은 은서는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심호흡을 충분히 한 후에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몇 번 울렸고, 이내 달칵거리며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지현아……. 나, 은서야. 바쁘니?”
오랜만의 통화에 긴장이 된 은서는 목소리가 제법 조심스러웠다.
-아냐. 안 바빠. 입원했다는 얘기 들었어. 몸은 어때?
지현 역시 긴장했는지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낫고 있는 중이야. 어제 우현이가 와서 사골국 주고 갔어. 고맙다는 말 하려고…… 전화했어.”
-먹어 봤어?
“응. 어제저녁에도 먹고 오늘 아침에도 먹었어. 엄청 맛있더라.”
-다 먹으면 말해. 또 끓여 줄게.
“응…….”
그러고는 침묵이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지현은 수다스러운 타입이었고 그런 지현 앞에서 은서 또한 말이 많아졌기에, 두 여자가 대화를 하다가 침묵이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그 사건의 영향으로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의 결론에 도달한다. 흉금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관계를 회복하느냐, 아니면 서로 서먹서먹하게만 대하다가 어정쩡하게 멀어지느냐.
-있잖아, 은서야……. 그때는 내가 심했어.
지현이 먼저 침묵을 깨뜨리고 신중하게 말을 시작했다.
-우현이 얼굴 다 망가진 거 보니까 나도 속이 상해서…… 괜히 너 원망하고 그랬어. 네 잘못이 전혀 아닌데……. 진심으로 미안해.
“아니야. 동생이 다쳤는데 그럴 수도 있지.”
-너한테는 내가 정말 면목이 없다. 하지만, 나…… 네 남편한테는 아직도 서운해. 우현이가 맞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때리지는 말지. 한 서너 대 정도만 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현의 토로에 은서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야수처럼 돌변한 그가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무섭게 휘두르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광경을 기억하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오한이 훅 끼쳐 왔다.
은서는 어깨를 살짝 떨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 사람이 도를 넘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나도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지? 네 남편이 널 많이 좋아해서 그랬구나, 하고.
“어?”
은서가 맹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자기 아내 건드리는데 거기서 이성 차려 가며 이놈은 석 대만 때리고 말자, 할 남자는 없을 테니까.
“…….”
-실은…… 내 동생이 얽힌 것만 아니었으면 멋있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네 남편 되게 차갑고 침착해 보였는데,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아서 사람 하나를 아작 내다니.
“…….”
-왜, 냉정하던 남자가 사랑에 눈 돌아가서 미친 짓을 하면 더 멋있고 섹시해 보이고 그런 거 있잖아.
어느새 지현은 원래의 지현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다스럽고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신지현 말이다.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한다니. 사랑이라니. 그런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미쳐서 날뛴 건, 단지 그가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컷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다른 수컷을 마땅히 응징한 것뿐이다.
하지만 지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현은 우리가 쇼윈도 부부라는 걸 모르니까.
“지현아. 나, 다 나으면 우리 만나자. 내가 밥 살게.”
은서는 자연스레 대화 주제를 돌렸다.
-뭐 사 줄 건데?
지현이 넉살스럽게 물었다.
“네가 먹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다.”
-그럼 비싼 거 사 달라고 해야지. 흐흐. 근데, 다 나아야 만날 수 있는 거야?
“응?”
-내가 병원으로 가면 안 돼?
“오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심심한데.”
-그럼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간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그냥 와.”
-어떻게 빈손으로 가니. 바리바리 싸 들고 갈 테니까 말만 해!
어색한 기류는 어느새 증발되었다. 오래된 만큼 깊은 우정이라 화해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 * *
여름과 가을의 경계, 승아는 여러 번의 수술 끝에 겨우 안정을 되찾고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병실을 옮겼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이 완전히 치유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뇌의 부종이 서서히 빠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골절된 부위마다 철심을 박아 넣은 상태라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 외에는 일절 면회를 받지 않던 승아는 오늘 일반실로 이동하면서 면회 제한을 풀었다.
제일 먼저 병실로 찾아온 사람은 주영이었다. 음료수를 사 들고 병실로 들어온 주영은 승아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승아는 온몸이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망가진 곳이 많았다.
“세상에, 대체 얼마나 다친 거야…….”
주영은 테이블 위에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고,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승아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고운 얼굴도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엉망이었다.
“안 죽은 게 다행이죠, 뭐.”
의외로 승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뺑소니 사고로 인해 예능 PD와의 미팅도 물 건너가고, 모델로서의 생명도 거의 끝장난 거나 다름없고, 가장 중요한 건강마저 잃어서, 절망과 좌절에 빠져 슬프게 몸부림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승아는 담담하고 차분해 보였다.
“너 이렇게 만든 놈은 잡았대니?”
“못 잡는대요.”
“왜?”
“용의자가 벌써 중국으로 도망쳤대요. 트럭도 대포차였고. 아무래도 범죄 조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봐요.”
“그런 놈이면 더더욱 잡아야지! 못 잡는 게 어디 있어? 중국으로 튄 거면 그쪽 경찰이랑 공조수사 하면 되겠네!”
주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의감에 차서 외쳤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인 승아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국가 간 공조수사가 어디 말처럼 쉽겠어요? 그리고 경찰들도 내 사건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가뜩이나 인력도 부족한데.”
“그거 다 핑계야! 경찰들이 일을 안일하게 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인터넷에 글 올려서 공론화시켜야겠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경찰들도 정신 차리고 일 똑바로 하겠지!”
“언니, 그러지 말아요. 나,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래요.”
승아는 모든 걸 다 떨쳐 버리겠다는 식으로 초연하게 말했다. 초연해지는 것, 그게 바로 남은 인생의 해답이니까.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 폭발하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 더 필사적으로, 더 결사적으로,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너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야. 마지막으로 배려해서 하는 말이지.」
「몸조심해라.」
아이스픽처럼 날카롭게 꽂혀 들던 음성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 목숨을 부지시켜 준 건 그의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언니, 나 사고당하고 뼈저리게 깨달은 게 있어요. 그건 바로 인생은 소중하다는 거예요. 내 남은 인생…… 범인 잡겠다고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범인을 잡겠다, 범인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히겠다고 나대는 건, 그를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를 자극하는 순간, 단칼에 목이 날아가겠지.
거대한 권력과 파워 앞에서 승아는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는 없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마지막 배려로 근근이 붙어 있는 목숨을 계속 이어 나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요즘, 엄마랑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화를 해요.”
승아의 엄마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국밥집을 운영한다. 식당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던 엄마는 딱 사흘만 승아의 곁을 지키고 시골로 내려갔다.
엄마가 돌아간 뒤로 승아를 보살피는 사람은 잔뼈가 굵은 중년의 간병인이었다.
요약하자면, 승아는 유 회장에게 받은 돈으로 대형병원에 입원해 유능한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숙달된 간병인을 고용해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중이었다.
「받은 돈은 잘 챙겨 둬. 살다 보면 큰돈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크게 아플 수도 있고, 크게 다칠 수도 있잖아.」
결국 그 돈이 합의금과 위자료가 된 건가. 승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통화할 때마다 엄마는 울면서 빨리 나으라고,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해요. 객지에서 고생 그만하라고.”
눈물 섞인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승아는 울컥 들끓는 심정을 애써 억누르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해요. 몸이 회복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엄마가 있는 집으로.”
“진심이야? 진심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예상 밖의 말에 주영이 톤을 높이며 다그치듯 물었다. 당연히 고향으로는 안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럼 진심이죠. 설마 엄마한테 입에 발린 소리를 했을까 봐요.”
충격적인 선택이었다.
승아는 늘 말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은 앞으로 나가면 논이 있고 뒤로 나가면 밭이 있는, 소똥 냄새가 지독한 시골 중의 시골이라고.
젊은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도로에는 자동차보다 탈탈거리는 경운기가 더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답답한 시골구석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서울이 별천지 같고 천국 같다며 입이 닳도록 찬양을 하던 승아였다.
그러던 애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네 고향 완전 깡시골이라며? 거기서 어떻게 살려고?”
“왜 못 살아요?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아니, 내 말은 너처럼 도회적인 애가 시골 생활을 감당할 수 있겠어? 승아 너, 고향 지긋지긋하다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맨몸으로 뛰쳐나왔잖아.”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아는 멋대로 집을 나와 상경했다. 서울에서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악착같이 다짐하며.
“그냥…… 이젠 지겨워졌어요. 나한테는 대도시가 어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고향에 내려가면 뭐할 건데?”
“엄마 식당 일 돕고 배워야죠. 나중에 내가 물려받을 수 있게.”
큰 사건을 겪어서 그런 걸까.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승아의 결정은 충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계획을 얘기하는 걸 보면, 오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으로 보였다.
주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간 승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그러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결정이 그렇다면 존중해야겠지.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언니가 항상 응원할게.”
“그동안 친언니처럼 잘 챙겨 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고향으로 놀러 와요. 내가 국밥 맛있게 끓여 줄게요.”
승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불의의 사고는 심경의 변화뿐 아니라 성격마저 변하게 만든 듯했다. 승아는 철부지 같던 모습을 내던지고 한층 의젓해지고 성숙해진 것으로 보였다.
* * *
입원 마지막 날, 은서는 실밥을 풀었다.
상처를 촘촘하게 봉합하고 있던 실들이 사라지고, 무릎 위로는 적색의 선이 길게 가로지른다. 지네 같다. 지렁이 같기도 하고. 어떤 것에 비유하든 본질은 똑같다.
흉측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겠지.
시간이 흐르면서 이 검붉은 선은 차차 옅어져 분홍색으로 변하겠지만, 문신처럼 남아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상처가 잘 아물었네요.”
초로의 의사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러나 은서의 기분은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우중충했다.
‘흉터 연고 발라도 소용없겠지. 워낙 심해서…….’
은서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아프게 베어 물었다. 그때, 차강혁이 그녀의 뒷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생각보다 귀엽다고.”
지네가, 지렁이가, 귀여울 리가 전혀 없는데. 울적해진 맘을 정확하게 읽고 어쭙잖게 위로를 해 주려고 그러는 거겠지.
의외로 그는 타인의 감정을 곧잘 읽는다. 타인에게 세상 관심 없는 성격이면서 말이다. 아마 짐승이기 때문일 것이다. 짐승들에게는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과 본능적인 촉이 있으니까.
러스티도 그랬다.
러스티는 말도 안 통하는 개였지만, 은서가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덩치에도 안 맞는 애교를 피우고는 했다.
“그럼 드레싱을 하겠습니다.”
의사는 상처에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다시 석고 붕대를 감아 깁스했다. 골절된 무릎뼈가 완전히 붙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 * *
퇴원 수속을 밟고 부부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차강혁은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 거실을 지나 복도로 휠체어를 밀었다. 복도를 따라서는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문을 열었다.
“당분간은 이 방을 부부 침실로 사용하자고. 2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기 불편할 테니까.”
넓고 채광 좋은 방이었다.
커다란 통창으로는 뒷마당의 정경이 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푸르른 잔디와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은 감성을 충족시켜 주는 듯했고,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는 활기를 독려하는 것 같았다.
그는 휠체어를 밀어 침실 한 바퀴를 빙 돌아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작업은 여기서 하도록 해.”
탁 트인 공간에는 다양한 종류의 미술 도구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 은서가 작업하던 작업물들도 준비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그녀의 완성작들이 걸려 있었다.
작업이 막힐 때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레코드플레이어가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고, 책장에는 미술 서적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물감에 더러워진 손과 미술 도구들을 언제든 씻을 수 있도록 간이 개수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는 침대와 가구가 있는 방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치워 내고 그가 스튜디오로 꾸민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은서를 위해서.
“언제 이런 걸 다…….”
감격에 젖은 은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 가끔씩 그답지 않은 섬세함을 보여 줄 때면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고 또 간지러워진다.
“감동받았어?”
“조금은요…….”
돌연 그가 은서의 앞으로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공주를 알현하는 기사처럼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하얀 손등에 살포시 입술을 바쳤다.
“그럼 상을 주는 게 어때?”
“아…….”
은서는 낮은 탄성 소리를 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개껌이라도 사 뒀어야 했는데.”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가며 호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를 따라 볼록한 목울대가 일렁거리는 광경은 퍽 섹시했다.
“유은서,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너만 먹는다고. 그런 형편없는 간식 따위 나한테 들이댈 생각도 마.”
웃음을 멈춘 그는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에 묘한 안광을 번쩍거리며 빛냈다. 짐승의 눈이다.
“다 낫기만 해 봐. 밤낮으로 먹어 치워 줄 테니까.”
* * *
차강혁은 본래의 워커홀릭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하지만 하루에 서너 번씩은 은서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저녁 무렵에는 몇 시쯤에 퇴근할 것인지 꼬박꼬박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은서는 그의 바쁜 일상이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치열한 면모를 좋아한다.
언젠가 민승아가 저를 두고 ‘한량’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확실히 자신에게는 그런 면이 존재했다. 작업이 잘 될 때에는 푹 빠져서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냥 대책 없이 내팽개치고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페이스가 오락가락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한결같이 높은 열도로 달리는 남자였다. 항상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의 뜨거운 열정과 야심 찬 열망을 은서는 속으로 몰래 존경하고 있었다.
밤 9시 50분,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스케치에 채색을 하고 있던 은서는 붓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벗었다. 아까 통화할 때, 그는 10시쯤에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 맞춰서 마중 나가야지.’
은서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서 그녀는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수 분간의 시간이 흘렀고, 시계의 시침이 10을 가리키자 익숙한 발소리가 귓가로 감겨왔다.
성큼성큼, 그는 은서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꽃이 있었다. 여지없이 붉은색의 튤립이다. 그는 은서의 가슴에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최 실장님은 왜 이렇게 붉은색 튤립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은서가 향긋한 꽃향기를 맡으며 중얼거리자, 그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너무 둔해.”
“네?”
“예쁜 걸 다행으로 알아. 하도 둔해서 화가 나려다가도, 그 예쁜 얼굴을 보면 싹 가라앉으니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은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피식 웃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샤워나 하지.”
* * *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거리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다.
골절된 뼈가 확실하게 붙은 은서는 오늘 깁스를 풀었다. 이제 더는 목발도 휠체어도 필요치 않았다.
강혁은 그녀를 기품 있는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을 먹였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최 실장님이 고른 거예요?”
은서가 반지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물었다.
강혁은 허탈한 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다. 이제는 이 둔한 여자를 일깨워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입술을 확고하게 움직였다.
“내가 골랐는데.”
“……네?”
“내가 백화점에 가서 직접 골랐다고. 물론 점원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한다. 토끼처럼. 터무니없이 둔한 여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귀엽다.
강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곧 있으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한입에 꿀꺽 집어삼킬 수 있겠지. 고대하고 고대하던 날이었다. 완벽한 날이었고, 행복한 날이었다.
그녀가 이혼을 얘기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