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 *
이건 애틋한 재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이곳으로 온 것일까? 저와 은밀한 밀애를 즐길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냉혹한 이채가 번득이는 압도적인 눈빛에 승아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오빠, 일단 앉아. 실장님, 앉으세요.”
긴장감이 몰려와 입안이 바짝 말랐지만, 승아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평범하게 말하며 소파를 가리켰다.
“전 괜찮습니다.”
차강혁은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았으나, 최 실장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최 실장은 보스를 성실히 보좌하고 있는 충직한 비서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사적으로 엮인 남녀가 만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는 사적인 느낌이 일절 없었다. 최 실장의 존재로 인해 이곳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로 재단된 것이다.
민승아는 위험한 불륜을 기대했지만, 그러한 기대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무슨 용건으로 온 거야? 실장님까지 데리고…….”
승아는 그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나?”
“할 말……?”
“숨기고 있는 비밀 같은 거 말이야. 그런 게 있다면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군.”
‘비밀’이라는 단어에 어렴풋이 느끼던 위기감이 명확한 형태를 그리며 승아의 양심을 세차게 할퀴었다. 등 뒤가 싸늘해지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일까?
승아가 품고 있는 비밀은 두 가지였다. 뺑소니와 돈.
뺑소니의 경우 증거가 없으니 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돈이라면…… 그 매구 같은 영감탱이가 멋대로 입을 털었다면 얼마든지 그가 알 수 있는 일이다.
“좋아. 말할게.”
승아는 심호흡을 했다.
“실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 언니 아버지한테서 돈 받았어.”
무거운 목소리로 실토한 승아는 숨죽이고 차강혁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망할 영감탱이. 비밀로 해 준다더니.’
다행히도 그는 숨기고 있는 비밀이 더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뺑소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확실해 보였다.
만약 사고에 대해서 무언가 눈치챈 것이 있다면, 그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을 테니까.
“오빠, 화났어? 내가 거짓말해서…….”
“아니. 받은 돈은 잘 챙겨 둬. 살다 보면 큰돈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크게 아플 수도 있고, 크게 다칠 수도 있잖아.”
“이해해 주는구나…….”
“다만, 큰돈을 받은 만큼 네가 약속을 잘 지켰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오빠를 사랑하니까…….”
“사랑?”
그는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민승아, 난 네 속물근성을 이해해. 하지만 네가 순애보인 척 구는 건 못 참아 주겠군.”
그의 목소리는 냉소적인 미소보다도 더 차가웠다.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
“그래서 조용히 지냈잖아! 물론 내가 못 참고 오빠를 잠깐 귀찮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정신 차리고 최근에는 연락 아예 안 했어!”
“더 노력해. 더 필사적으로, 더 결사적으로,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그의 인생에서 민승아라는 흔적을 깔끔하게 도려내 버리고 싶은 말투였다.
“너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야.”
“…….”
“마지막으로 배려해서 하는 말이지.”
“…….”
“이만 간다.”
차강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매정하게 등을 보이고 뚜벅뚜벅 걸었다.
“겨우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왔어?”
그의 등에다 대고 승아가 설움에 찬 음성을 쏟아 냈다.
비참했다. 그가 오피스텔로 온다는 말에 하늘 위로 날아갈 것처럼 기뻤는데.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화장도 공들여서 하고 옷도 가장 비싼 것으로 꺼내 입었는데…….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눈빛이 승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승아야.”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승아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가 이렇게 성을 떼고 이름만 불러 준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민승아’라는 세 글자로 딱딱하게 불렀었는데…….
그러나 다정하게 들리는 그의 부름에 이상하게도 소름이 돋았다. 너무나 다정해서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
“몸조심해라.”
“…….”
“이 말 하려고 왔어.”
* * *
“여기가 무슨 화생방 훈련 장소도 아니고.”
사장실로 들어선 윤혁은 안개처럼 펼쳐진 희뿌연 연기에 기함했다. 흐린 연기 뒤로는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윤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혔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공기가 순환되면서 자욱하던 연기가 차츰 걷히고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고뇌에 잠긴 얼굴을 한 채,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넓은 책상 위에는 흐트러진 서류들과 술잔, 그리고 위스키 병이 있었다. 병에 든 술은 벌써 절반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 근무 시간인데 위스키가 웬 말이야. 사장이면 사장답게 모범을 좀 보이시죠?”
윤혁이 느물거리며 말을 붙였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왜 그래? 형수님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위스키를 목으로 넘겼다.
“아까 형수님이랑 통화했는데 목소리 밝으시더라. 밝은 만큼 금방 나으실 테니까 형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 때문이야.”
침묵을 지키던 그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뭐가 형 때문이라는 거야?”
“은서가 그렇게 된 거, 나 때문이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허공을 허무하게 가른다. 윤혁은 그의 말을 납득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왜 형 때문이야?”
“민승아.”
“뭐?”
“뺑소니를 친 게 민승아였으니까.”
최 실장으로부터 일부러 노리고 한 짓 같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그의 머릿속으로는 가장 먼저 민승아가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예상이 철저히 틀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제 잘못이 아니니까. 은서가 저 때문에 다쳤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를 차갑게 외면했다. 붉은색 렉서스의 주인은 불행히도 민승아였다.
“민승아라면…… 형이 예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 그 여자, 미국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며 스토커처럼 연락을 해 오더군.”
그는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 또 한숨처럼 연기를 뱉어 냈다.
“하도 성가시게 굴어서 일부러 장인어른 이야기를 꺼냈지. 걔, 우리 장인어른께 돈 받았거든.”
그는 입매를 비틀 듯이 말아 올리고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민승아는 유 회장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민승아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 청담동 오피스텔을 찾아와 어설픈 연기를 했을 때부터 이미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모른 척 넘어가 준 건 그저 싸구려 동정에 불과했다. 나를 못 가졌으니 돈이라도 가지라는.
“그 후로 연락 없이 잠잠하길래 나를 포기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어.”
“…….”
“내가 방심했지.”
“…….”
“확실하게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검은 눈동자가 악의에 사로잡혀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나 아무리 예리하고 날카롭게 눈을 번뜩여도 괴로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술잔을 거칠게 잡아채고 목울대를 일렁거리며 위스키를 삼켰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물어 땅이 꺼져라 묵직한 숨을 몰아쉬며 연기를 내뱉었다.
“내 잘못이야.”
민승아를 향해 독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그는 스스로를 강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건 민승아가 잘못한 거지, 형 잘못이 아니야!”
윤혁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고작 그런 한심한 여자 때문에 두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우선, 형수님께 사실대로 이야기해.”
윤혁은 민승아를 향해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이성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형수님이 형을 원망할 수도 있어. 형이 예전에 만났던 여자가 고의적으로 뺑소니 사고를 낸 거니까.”
“…….”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자책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먼저 형수님께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덮고 갈 거야.”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명료하게 말했다. 윤혁이 눈썹을 실그러뜨렸다.
“덮고 간다고?”
“그래.”
“그게 덮는다고 덮어져? 형이 숨긴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차피 다 밝혀질 일이야. 경찰들이 조사 중이니까…….”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윤혁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깊은숨을 내쉬더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짚었다.
“이미 압박 넣었구나…….”
경찰 측에는 뜻을 제대로 전달했으니 수사에 더 이상 진척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렇게 은폐되는 것이다.
“형, 그러면 안 돼. 민승아는 죄를 지었으니까 벌을 받아야 하고, 형은 형수님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민승아는 대가를 치를 거야. 하지만 은서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어.”
그는 변함없이 확고하게 말했다.
“대체, 왜……”
“우리 은서, 시든 꽃 같았어.”
그는 지독한 여름 안에서 시들시들 말라 가는 은서를 기억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친 게 보였어.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조금씩 지쳐 가는 게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고.”
끔찍한 폭염은 날씨만 망가뜨리려는 게 아니라 그녀마저도 망가뜨리려고 들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사고로 인해 은서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지.”
“…….”
“그런데, 그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나였다는 걸 은서가 알아봐.”
“…….”
“절벽까지 내몰렸던 여자야. 곧장이라도 절벽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던 여자였다고.”
“…….”
“그런 여자에게 큰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
“나, 유은서한테 버림받고 싶지 않다.”
두려웠다. 그녀가 나를 원망하고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나를 떠날까 봐. 어떻게든 나를 참아 내고 견뎌 내던 여자가, 이제 더는 인내할 수 없다며 내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은서를 잃을 수는 없어.”
그는 비장하게 다짐했다.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는 전에 없이 간절해 보였다. 누군가를 이다지도 가슴 아프도록 절절하게 원한 적은 없었다.
“그 여자가 없으면 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 * *
오후 5시, 병실 안에는 은서 혼자 있었다.
오전부터 병원으로 와서 고집스럽게 곁을 지키던 신 여사는 2시쯤에 겨우 돌려보냈다. 다 큰 딸내미 간호를 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미안해서, 은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는 핑계를 들이대며 간신히 엄마 등을 떠밀었다.
홀로 남은 은서는 침대에 누워 적적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까 전부터 켜 놓은 TV에서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왠지 시끄럽게 들려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렸다.
은서는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에고고…….”
허리 주변 근육이 뻐근해지며 통증이 번지기는 했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처음에 비하면 허리 쪽 통증은 제법 줄어들었다.
은서는 낑낑거리며 침대 옆에 있는 휠체어로 조심스레 내려와 앉았다. 지겹도록 누워만 있으니 영 답답했다. 휠체어 바퀴를 도르르 굴려 창가로 다가갔다.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우비인가.”
오후 5시의 태양은 아직 높게 떠서 거리를 환하게 비춰 주고 있는데, 비는 억세게 퍼붓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우비인 듯했다.
“누군가가 구슬프게 우는 모양이네.”
하염없이 내리치는 세찬 빗줄기를 보며 속삭였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일찍 퇴근했구나.’
심장이 간지럽게 콩닥거렸다. 은서는 배시시 미소를 짓고 휠체어를 문 쪽으로 돌렸다.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사보다는 미소가 사라지고 아연한 표정이 지어지는 게 먼저였다.
“강혁 씨…….”
터벅터벅 은서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투명한 빗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은 지치고 고단해 보였다.
그는 휠체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별안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은서는 극히 당황했다.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차강혁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그는 처연한 눈빛으로 은서를 그윽하게 올려다보다, 그녀의 허벅지 위로 젖은 얼굴을 살며시 묻었다.
“강혁 씨, 술 마셨네요…….”
그에게서는 위스키 향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신 걸까.
“무슨 일 있어요?”
은서는 의아한 눈길로 까만 머리통을 주시하며 물었다.
비에 젖고 술에 취한 차강혁이라……. 빈틈없이 완벽하기만 한 그가 지금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는 건 흔치 않은 경우다.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염려스러운 말투로 물어보지만, 그는 허벅지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말하기 싫어요?”
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걱정거리나 고민거리 같은 것들을 나와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걸까.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텐데…….”
“나를 사랑해?”
불쑥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기습처럼 꽂혀 든 질문에 은서는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대답해. 나를 사랑하나?”
“…….”
“나를 사랑해?”
그는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 평소 칼끝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눈은 지금 이 순간에는 왠지 간절하고 애절해 보였다.
“네……. 멍청하게도, 아직 사랑하고 있네요.”
은서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혹시…… 부담스럽나요?”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도저히 숨기지를 못하는 저의 일방적인 사랑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 당신이 계속 멍청했으면 좋겠군.”
“네? 내가 계속 멍청했으면 좋겠다구요? 이거 지금 나 비하하는 거죠?”
은서가 발끈하자 그는 힘없는 얼굴로 피식 웃어 버렸다.
그는 비에 젖은 얼굴을 다시 은서의 허벅지에 살포시 묻었다. 안식처를 찾기라도 한 듯 조용히 호흡을 내쉬다가, 붕대가 단단히 감싸여 있는 무릎에 뺨을 부비적거린다.
낯선 행동에 연갈색 눈동자는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 차강혁이 아니라 개처럼 굴고 있었다.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모습이, 주인에게 사랑을 달라고 떼를 쓰는 덩칫값 못하는 대형견과 꼭 겹쳐 보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먼 셰퍼드를 데려온 적이 있어요.”
은서는 까만 머리통을 곧게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말문을 열었다. 뇌리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애틋하게 스쳐 지나갔다.
“검은색과 황갈색 털이 근사하게 조화된, 꽤나 잘생긴 녀석이었죠.”
“…….”
“이미 성견이라 덩치가 아주 컸던 그 녀석은 상당히 영리하고 똑똑한 데다, 자존심도 무척 강했어요.”
“…….”
“그 높은 프라이드 때문인지, 어리고 조그만 나를 주인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그때 은서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이미 늠름한 성견으로 자란 저먼 셰퍼드에게 쪼그만 꼬마 아이는 한 입 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아,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혈통 좋은 사냥견의 자존심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굳세고 완강해서, 어지간해서는 꺾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 아이에게 ‘러스티’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항상 그 이름을 애타게 불렀어요.”
“…….”
“하지만 그 녀석은 불러도 도통 오지를 않았죠.”
“…….”
“훈련을 시켜 보려고도 했지만 러스티는 늘 으르렁거리며 화만 냈어요. 공을 던져서 물어오라고 하면 짖고, 앉으라고 하면 짖고, 조용히 하라고 하면 또 짖고.”
“…….”
“저러다 성대가 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러스티는 나를 향해 난폭하고 무섭게 짖어 대기만 했어요.”
“…….”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를 물지는 않더군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은서의 무릎에 계속해서 뺨을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 개였다면, 애정에 몹시도 굶주려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거기에 희망을 걸었죠. 나를 물지는 않으니까 어떻게든 친해져 보려고.”
“…….”
“러스티가 화를 내도 계속 다가가서 그 녀석이 좋아하는 간식을 던져 주고, 그 녀석이 정원을 뛰면 나도 같이 따라서 뛰고, 포악하게 짖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끈질기게 말해 주었죠.”
“…….”
“그 처절한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어느 날은 갑자기 그 녀석이 먼저 나한테 다가왔어요.”
“…….”
“테라스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인기척도 없이 불쑥 다가오더니, 내 무릎에 자기 얼굴을 막 비비더군요.”
은서는 그때를 회상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지금 차강혁 씨가 꼭 그 개 같아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의 촉감도 어릴 때 키웠던 거칠고 사나운 사냥견과 똑같았다.
* * *
같은 날, 늦은 밤. 승아는 우울한 속을 술로 풀었다. 허름한 포장마차의 파란 테이블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소주를 꿀꺽꿀꺽 넘긴다.
오늘처럼 처량하고 슬픈 날, 같이 술을 마셔 줄 친구조차 없었다. 다들 바쁘단다. 최근에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주영 언니마저도 오늘은 시간이 나질 않는단다.
“개 같은 인생…….”
코가 시큰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승아는 또 소주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르고 원샷을 때려 넣었다.
“차강혁…….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아련하고 절절한 재회를 기대했건만, 그는 신랄한 말들만 퍼붓고 싸늘하게 등을 보이고 돌아갔을 뿐이다.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 더 필사적으로, 더 결사적으로,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냉정하게 일갈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서 생생히 되살아났다. 화살촉처럼 심장에 꽂혀 들어와 아픈 생채기를 만들어 내던 차가운 말들…….
생명의 동아줄처럼 꼭꼭 붙들고 있던 희망을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일까.
“그깟 기집애가 뭐라고.”
겨우 그딴 여자에게 밀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다. 어리바리해서는 남자라고는 좆도 모르게 생긴 게, 다른 남자도 아니고 차강혁을 사로잡다니.
“내가 너네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볼 거야.”
마침내 포기 쪽으로 마음을 완전히 기울인 승아는 칼을 가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말했다.
“두고 봐. 마지막에 웃는 건 나야. 나, 제대로 성공할 거니까!”
굳게 다짐을 하고 또 소주를 거침없이 삼켰다. 인생이 워낙 써서 소주가 달았다.
“한류 스타 돼서 매일매일 잘난 내 얼굴 TV에 나오게 만들 거야. 차강혁, 넌 반질반질한 내 얼굴 보면서 후회나 실컷 하라고!”
설혹, 승아가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탑 스타가 된다고 해도 차강혁이 후회할 가능성은 제로, 아니 마이너스였다. TV 자체를 보지 않는 남자에게 그깟 탑 스타가 뭐라고.
하지만 승아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내가 남들 부럽지 않게 성공해서 잘나가면 차강혁이 후회할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나마 유치하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덜 초라해지니까.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추가요!”
승아는 쉴 틈 없이 소주를 삼켰다.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빈속에다 들이붓고 또 들이부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파란 테이블 위로는 빈 소주병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코가 삐뚤어질 만큼 취한 승아는 알코올에 절어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 비척비척 형편없는 걸음걸이로 밤길을 걸었다.
“내가 차를 어디에 댔더라. 아, 맞은편에다 댔지…….”
길 건너편, 도롯가에 불법주차 되어 있는 붉은색 렉서스가 보였다. 술에 취해 시야가 흐릿한데도 렉서스는 여전히 섹시했다.
“히히, 그래도 내가 너 때문에 산다.”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승아는 사랑스러운 애마를 향해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어두운 밤, 4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면서 말이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중앙선을 넘어서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트럭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반짝 빛내며 가열차게 달려왔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진다. 트럭과 충돌한 앙상한 마른 가지 같은 몸은 공중에 잠깐 튀어 올랐다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철퍼덕 추락했다.
* * *
다음 날 아침, 짤막한 기사가 떴다.
패션모델 민승아가 간밤에 술에 취한 채로 4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트럭에 치였다는 소식이었다. 트럭 운전수는 승아를 치고 그대로 달아났다고 한다. 전형적인 뺑소니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사고 현장 주변의 CCTV를 분석해 차량번호를 조회했지만, 안타깝게도 대포차로 밝혀져서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넷 연예 뉴스란 구석에 조그맣게 실린 그 기사에는 민승아의 인지도를 반영하듯 댓글은 10개도 채 달리지 않았다.
[얘가 누군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낳으세요!]
[븅신아, 임신했냐? 낳게? 아예 순산하라고 하지 그러냐?]
[무단횡단을 하니까 그 꼴을 당하지. ㅉㅉ]
[별로 불쌍하지도 않음.]
얼마 달리지도 않은 댓글의 대부분이 악플이었다. 그동안 승아가 심심할 때마다 연예 기사에 악플을 달며 차곡차곡 쌓아 온 구업을 이런 식으로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는 중이었다.
* * *
“뇌부종, 경추 및 척추뼈 골절, 추간판 탈출, 슬개골 골절, 전방 십자인대 파열, 허벅지 열상, 그 외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심하다고 합니다.”
태양이 높게 뜬 아침, 최 실장은 보스에게 진단서를 건네고 간략히 브리핑을 했다.
“겨우?”
차강혁은 진단서를 흘긋 내려다보더니 무감하게 말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처참한 상해를 그저 그런 타박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무런 일도 아닌 양 대하는 모습이, 그의 냉혹함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 정도면 심각한 중상입니다. 밤새도록 의식불명 상태였다가 오늘 아침에 겨우 의식을 되찾았고요. 회복한다고 해도 후유증이 꽤 남을 겁니다.”
최 실장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척추와 다리를 심하게 다친 터라 재활이 끝나도 예전처럼 하이힐을 신고 자유자재로 워킹하는 건 어렵습니다. 무대에 다시 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얼굴과 몸에 상처도 심해서 화보 촬영 또한 여의치 않을 겁니다. 모델로서 커리어는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실체 없는 커리어였지.”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의 혈관에 과연 붉은 피가 흐르기나 할지 궁금해진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보스의 모습을 보며 최 실장은 기억을 더듬었다.
연줄을 이용해 번호판을 조회하고 붉은색 렉서스의 소유주가 민승아라는 걸 알았을 때, 최 실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담백하게. 하지만 소프트한 건 싫군.」
그는 침착하면서도 음산하게 대답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그런데 난, 그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밤처럼 짙은 검은색 동공은 이채를 번뜩였다.
「복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지.」
그는 한쪽 입매를 유려하게 끌어 올렸다. 그 묘한 미소에 최 실장은 등이 쭈뼛거리며 굳어 버리는 걸 느꼈다.
「복수는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당한 것 이상으로 돌려줘야 달콤한 법.」
그것이 보스의 지시였다. 최 실장은 그 지시를 군말 없이 이행했다.
정글의 세계에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그렇다. 강한 만큼 잔인해서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 그 강건하고 잔혹한 카리스마로 무리를 지배하고, 피라미드의 최상층을 차지해 포식자로서 군림하는 것이다.
“아무튼 수고했어.”
그가 말했다.
“그 물건, 허튼짓할 낌새가 보이거든 그냥 묻어 버려.”
하드보일드라는 단어에 걸맞게 비정한 목소리로.
“네. 주의 깊게 지켜보겠습니다. 확실히 경고를 주었으니 섣부른 행동은 못할 겁니다.”
최 실장은 보스를 섬기는 충직한 태도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 * *
며칠이 흘렀다.
은서는 점점 회복 중이었다. 허리 쪽은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고, 팔뚝에 찰과상은 상처가 제법 아물어 딱지가 올라왔다.
새벽에 자다가 통증 때문에 끙끙 앓는 일도 사라졌다. 깁스한 다리 때문에 여전히 애를 먹고는 있지만,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해 혼자서 돌아다닐 정도는 되었다.
그날 오후에는 윤혁이 병문안을 왔다.
“형수님, 저 왔습니다.”
특유의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한 윤혁은 손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어머, 도련님? 어쩐 일이세요?”
침대에 누워 있던 은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쩐 일이긴요. 우리 형수님 잘 낫고 있는지 보려고 왔죠. 이거, 여기 둘게요.”
윤혁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 옆 스툴에 앉았다.
“그냥 와도 되는데……. 과일 잘 먹을게요.”
“우리 형수님 다쳐서 고생하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죠. 저놈들로 비타민 듬뿍 충전하세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잘 낫고 있어요. 그런데, 경찰이 계속 헤매고 있어서…….”
은서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수사 말이에요. 범인이 꼭 잡혔으면 좋겠는데 수사가 어려운가 봐요.”
“…….”
윤혁은 침묵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다. 주제넘게 ‘아, 그거 우리 형이 뒤에서 수를 좀 썼죠.’라고 촉새처럼 떠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범인이 잡혀야 반성을 하고 앞으로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을 텐데. 만약 이번에 빠져나간다면, 다음에 또 사고가 났을 때 무책임하게 달아날 거예요. 그런 일을 막으려면 꼭 검거해야 하는데…….”
그녀는 사적인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차후에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가해자를 기필코 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윤혁은 말간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며 며칠 전 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유은서한테서 버림받고 싶지 않다.」
그때 그 순간 그의 눈빛과 목소리를 윤혁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주 간절했고 아주 애절했다. 그녀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는 애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미안합니다, 형수님. 형이 비밀로 묻어 두려는 걸 제가 나서서 끄집어낼 수는 없네요.’
그녀의 정의감과 공정함에는 존중을 표하는 바이지만, 어쩔 수 없이 윤혁은 차강혁의 동생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형이랑은 요즘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요?”
윤혁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냥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요. 나쁘지는 않아요.”
은서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몸이 제법 나아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지극정성으로 챙기고 있었다. 천하의 차강혁에게 그런 섬세하고 다정한 부분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형, 정상적인 사고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에요.”
“네?”
“가끔 보면 사이코가 아닌가 싶고, 또 가끔 보면 저 남자가 기업을 이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갱단을 이끌고 있는 건지, 도통 구분이 안 될 때가 있죠.”
“맞아요. 강혁 씨 성격이 진짜 거칠고 모났죠.”
“제가 방금 갱단이라고 말했잖아요. 우리 형, 확실히 마피아 같은 기질이 있어요.”
은서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거렸다. 재즈 바에서 격분에 차 신우현을 때릴 때를 보면, 그야말로 시칠리아섬의 마피아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자기 것, 자기 사람은 확실하게 지켜요. 마피아들이 그러듯이.”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의 난폭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윤혁은 ‘지킨다’는 표현을 꺼낸 것이다.
“형수님이 우리 형 곁에 계속 있어만 준다면, 형은 형수님을 끝까지 지킬 겁니다.”
윤혁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단한 뼈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가끔 형이 형수님을 실망시키더라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왜인지 간절하게 들려오는 윤혁의 부탁에 은서는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야죠. 미우나 고우나 제 남편인 걸요.”
* * *
은서는 침대에 달린 테이블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적당한 크기의 스케치북을 놓고 연필로 스케치를 했다.
병실 안의 일상적인 풍경을 소묘로 그려 나간다. 종이 위를 부드럽게 스치는 연필 소리가 듣기 좋았다.
오후 5시 30분쯤, 병실 문이 열렸다. 차강혁은 오늘도 여지없이 일찍 퇴근했다.
“왔어요?”
은서가 연필을 내려놓고 인사했다.
“어. 작업 중이었어? 무리하지 마. 몸도 성치 않은데.”
“그냥 심심해서 그리는 거예요. 무리할 정도로는 하지 않아요.”
그는 손에 새빨간 튤립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은서는 그의 손에 있는 튤립을 보고, 그리고 협탁 위의 화병에 꽂혀 있는 튤립을 번갈아 보았다.
화병에 꽂힌 튤립은 시간이 흐르며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최 실장님이 또 꽃을 챙겨 주셨나 봐요. 꽃이 시들 타이밍에 딱 맞춰서 센스 있게 준비해 주셨네요. 고맙다고 꼭 전해 주세요. 튤립이 아주 예뻐요.”
은서의 섣부른 추측에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화병에 있던 꽃을 교체했다.
그는 싱싱한 꽃으로 새 단장을 한 화병을 협탁에 놓고 재킷을 벗었다. 이어서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드레스 셔츠 단추를 끌러 내렸다.
은서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벌어진 셔츠 틈 사이로 탄탄한 복근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그가 드레스 셔츠를 벗어 던지자 감질나게만 보이던 몸매가 훤하게 드러났다. 얼굴만큼이나 잘생긴 몸이었다. 각이 제대로 잡힌 넓은 직각 어깨와 두꺼운 팔뚝,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하게 근육이 오른 가슴과, 초콜릿 같은 복근까지.
선천적으로 크고 반듯한 골격과 운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매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만큼 섹시했다.
‘생각해 보니, 저 좋은 몸을 만져 본 지도 꽤 됐네…….’
까마득한 기분이다. 그의 몸을 더듬고 만지며 솔솔 잠들던 때가 정말 오래된 옛날 같다.
은서는 그때의 기억, 그때의 환상적이었던 감각을 떠올리며 무의식중에 군침을 삼키고 입맛을 다셨다.
“노골적이군.”
멍하게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은서를 향해 시선을 거침없이 꽂아 넣으며 피식 웃었다.
“오랫동안 굶은 건 이해하겠는데,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마. 그럼 이쪽도 달아올라서 확 덮쳐 버리고 싶단 말이야.”
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아, 창피해라. 너무 대놓고 감상하고 있었잖아! 민망해서 얼굴이 발그레 익어 버렸다. 그의 말대로 너무 오랫동안 굶은 것일지도 몰랐다.
“오, 오늘 낮에 도련님이 오셔서 과일을 주고 가셨어요.”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리던 은서는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 바구니를 발견하고 그렇게 말했다. 변변찮은 말 돌리기에 그는 또 피식거렸다.
“얼굴이 저기 있는 사과보다 더 새빨개졌군.”
오만하게 비웃은 그는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뎌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건 위험하다. 헐벗은 몸으로 바짝 다가오다니. 무슨 짓을 하려고…….
차강혁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는 이 오묘한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진다. 아랫배는 알알하게 당겼다.
실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긴 것처럼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을 때, 그는 은서의 뒷목을 감싸 쥐더니 사과처럼 빨갛게 익은 뺨에 쪽, 키스를 했다.
“자꾸 그러지 마.”
“내가 뭘요…….”
“너무 귀엽잖아.”
“…….”
“한입에 먹어 버리고 싶게.”
그는 은서의 귓가에 더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나지막한 음성이 기막히게도 매력적이라, 은서는 하마터면 ‘그냥 드세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샤워하고 올게.”
“…….”
“당장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히지 않으면 안 되겠어.”
“…….”
“누구 때문에 지금 몸이 너무 뜨거워졌거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그는 은서의 가슴에 불을 확 지펴 놓고 유유히 욕실로 들어갔다.
은서는 참았던 숨을 후, 내뱉었다. 양손으로 빨개진 뺨을 툭툭 두드린다. 온몸이 화끈화끈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 * *
갓 샤워를 하고 나온 차강혁이 얼마나 섹시한지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은서는 일부러 그쪽으로는 눈길을 안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스케치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림에 열중했다. 연필로 까만 선을 이어 나간다.
“관심 없는 척하는 것도 참 노골적이군.”
상쾌한 비누 향이 가까워지더니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항상 모든 게 티가 나. 어설프게.”
은서는 스케치를 멈추었다.
“왜?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가?”
“…….”
“다리에 깁스까지 한 아내를 잡아먹을 만큼 대책 없는 짐승은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
“너무 그렇게 안 보는 것도 이쪽은 좀 섭섭하거든.”
은서는 연필을 탁 내려놓고 미간을 좁혔다. 보면 본다고 뭐라 그러고, 안 보면 안 본다고 뭐라 그러고.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한단 말인가.
이럴 거면 그냥 대놓고 보자 싶어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샤워하고 나오니까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잘생겨졌다.
‘와…….’
마음의 소리가 감탄했다. 잘생긴 남편이랑 살면 매일매일이 이벤트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은서는 그 이야기에 100% 공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차강혁의 훌륭한 껍데기는 그냥 이벤트도 아니고 초특급 이벤트였다. 어째서 이 잘난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건지. 볼 때마다 짜릿한 기분이다.
은서는 부끄러움 따윈 내던지고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생뚱맞은 웃음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냥 웃겨서요.”
“뭐가 웃긴데.”
“차강혁 씨 얼굴이.”
그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내 얼굴에 희극적인 재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재능 많아요. 그 얼굴 얼마나 웃긴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은서는 입가를 계속 씰룩씰룩거렸다. 얼굴이 너무 재미있다. 잘난 얼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해서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사과 먹을래?”
저녁을 먹은 후, 차강혁은 과일 바구니에 있던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물었다.
“아, 사과요…….”
은서가 말끝을 흐렸다. 정확히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접시와 과도를 챙겨서 베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은서는 난감해졌다.
이 세상에는 과일을 정말로 못 깎는 사람이 있다. 과일을 깎으라고 과도를 던져 주면 그걸로 껍질을 벗겨 내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과육을 절단 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은서가 바로 그랬다.
“껍질째로 먹을게요. 씻어만 주세요.”
사과 껍질은 질겨서 싫지만, 차강혁 앞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부탁했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과도로 사과를 술술 깎아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
은서는 괴상한 탄성을 흘리며 입을 턱까지 크게 벌렸다.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차강혁이 과도로 사과를 깎고 있다니! 이보다 해괴하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차라리 이 남자가 장검으로 사람 목을 베어 버렸다면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과 하나를 손쉽게 뚝딱 깎은 그는 얼빠진 얼굴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은서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차강혁 씨가 사과를 깎는 게…… 너무 신기하잖아요.”
심지어 그는 사과를 굉장히 잘 깎았다. 껍질은 얇게 벗겨진 데다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은서는 길게 이어진 사과 껍질을 손으로 들어보고 감탄했다.
“신기할 것도 많군. 세상에 사과를 못 깎는 사람도 있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투였다. 거기다 대고 ‘나는 못 깎아요. 우리 엄마가 어디 가서 저보고 과일 깎지 말라고 그랬어요. 부끄럽다고…….’라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어서 은서는 그냥 말을 아꼈다.
그는 사과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포크로 집어 주었다. 은서는 사과를 앙 깨물었다. 아삭아삭, 맛있다.
“근데, 그 목격자분 말이에요. 나를 구해 준 사람이요. 번호판은 못 봤대요?”
수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궁금했던 은서는 낮에 담당 경찰에게 연락을 했었다.
경찰은 현재 뚜렷한 증거가 없어 목격자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라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고 고충을 토로하며, 어쩌면 범인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전망까지 내비쳤다.
“차종과 색깔만 확인했다는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은서는 조심스레 입술을 움직였다.
“조금…… 실망스럽네요. 차강혁 씨가 고용한 사람이라 철두철미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무표정하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검은색 동공이 약간 확장되었다.
“어떻게 알았어?”
“몰랐어요.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넘겨짚었는데, 강혁 씨가 걸려들었네요.”
은서가 옅게 웃었다.
완벽한 사람인데, 방심하고 있었는지 생각 외로 쉽게 걸려들었다. 이런 순간이 은근히 재미있다. 철옹성처럼 굳건한 이 남자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 말이다.
“그 사람, 나를 ‘사모님’이라고 깍듯하게 불렀어요.”
은서는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게다가 실버색 뷰익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기 차라고 이야기하더군요.”
“…….”
“언젠가부터 스튜디오 근처에 낯선 차가 보였는데, 그 낯선 차의 주인이 하필이면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래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
“어쩌면 당신이 붙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무섭지 않았어요. 신속하게 구급차를 불러 주었고, 병원으로 갈 때까지 계속 곁에 있어 줘서.”
만약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면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이정호는 비록 그가 불순한 의도로 고용한 감시인이었지만, 그 불순한 의도 덕분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움을 받았다.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
“혹시, 나 퇴원하고 나면 그 사람, 아니 그 사람은 이제 정체가 탄로 났으니까 더는 쓸 수 없을 테고…… 다른 사람이 나를 또 감시하는 건가요?”
“…….”
“그 사람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능숙한 사람으로?”
은서는 그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물음표로 끝맺은 말이었지만 사실 질문은 아니었다.
“나, 그거 싫은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도움을 받은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 사람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했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는다.
누군가에 의해 몰래 관찰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싫다면 그만두지.”
그는 잠깐 생각한 후에 느지막이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되도록 안 하고 싶으니까.”
그 말에 은서는 픽 웃어 버렸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안 하겠다고? 걸핏하면 제멋대로 나를 굴리는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차강혁 씨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를 세 살배기 어린애 취급을 하며 세수를 시키고, 내 얼굴에다 로션을 마음대로 발랐는데요?”
“그래서 ‘되도록’이라고 했잖아.”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은서는 기막혀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내가 무슨 수로 저 남자를 이겨 먹겠어.
“근데 미행은 왜 붙인 거예요?”
“그냥. 당신이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궁금해서.”
심플한 대답에 은서는 또다시 기막힌 얼굴을 했다. 차윤혁의 말이 옳았다. 그는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그럴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행을 붙이지 않고 직접 물어보거든요?”
“물어봤는데 당신이 대답 안 했잖아.”
“내가 언제요?”
“그날 밤, 블루 노트.”
그가 정확하게 콕 집어서 알려 주자 은서는 안색이 변했다.
서재에서 민승아의 사진을 발견하고 우울함에 빠져 재즈 바로 가서 위스키를 흥청망청 마시던 밤, 그는 전화를 걸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했던가. 위치를 알려 주는 대신, 단칼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만약, 그때 처음부터 솔직하게 대답을 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조금 달라졌을까. 적어도 넌더리가 나도록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유은서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날 밤, 내가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그는 그때 일이 몸서리날 정도로 싫다는 식으로 인상까지 험악하게 구겼다.
“늦은 밤 술에 취한 아내를 찾아 헤매는 그 심정, 그리고 마침내 찾았을 때 웬 남자랑 뒤엉켜 있는 꼴을 본 그 심정…….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해.”
그가 아랫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은서는 괴로워 보이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그의 팔뚝을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안 그래요.”
은서는 탄탄한 팔뚝을 쓸어 만지고 그의 손을 꼭 맞잡아 깍지까지 꼈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서 다시 한번 견고하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말해 줄게요.”
그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은서가 이 손을 놓고 그가 모르는 곳으로 훌쩍 도망가 버릴 것이라고는.
* * *
“병실에만 있으니 답답하군. 산책이나 하지.”
그는 가뿐하게 은서를 안아 들고 휠체어에 태웠다.
휠체어를 부드럽게 밀자 커다란 바퀴가 도르르 굴러갔다. 휠체어는 건물을 빠져나가서 병원 후문 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산책로에 올라탔다.
열대야가 사라진 여름밤은 상쾌했다. 기온은 적당했고 공기는 신선했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녹음이 무성해서 향긋하게 풍겨 오는 녹음 냄새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여름도 이제 끝나 가나 봐요. 곧 있으면 가을이겠어요.”
뺨에 스치는 잔잔한 바람을 느끼며 은서가 중얼거렸다.
하도 끔찍하고 잔인해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도, 결국에는 세력을 다해 서서히 끝을 향해 접어들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서 휠체어를 밀던 그는 동그란 잔디 정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특유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곧 있으면 1주년이 되겠군.”
“1주년? 무슨 1주년이요?”
“우리말이야. 작년 가을에 처음 만났잖아.”
그러니까 그가 언급한 ‘1주년’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난 지 이제 곧 1년이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나?
워낙 건조한 목소리라 그런 낯 간지러운 주제를 뜻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은서는 눈동자까지 키워 가며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곧 표정을 가다듬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 걸 일일이 계산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이봐. 우리가 작년 가을에 처음 만난 건 1 더하기 1만큼이나 단순한 사실이야. 그걸 굳이 계산할 필요는 없다고.”
함께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건만, 그의 딱딱하고 재수 없는 말투는 여전하다. 은서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가을이 되면 나를 실컷 칭찬해 줘야겠어요.”
“무슨 칭찬?”
“차강혁 씨 같은 남자를 무려 1년이나 알고 지냈다니, 내 인내심과 포용력에 찬사를 내리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비꼬는 실력이 날로 느는군.”
“이게 다 차강혁 씨 덕분이죠.”
그는 피식 웃었다. 늘 이런 반응이다. 은서가 발톱을 세워서 덤비고 할퀴려 들 때면, 그는 그저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다. 은서가 귀엽다는 식으로.
“밤하늘이 예뻐요.”
은서가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까만 여름밤 하늘에는 노오란 달이 떠 있었고, 작은 별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림 같은 풍경은 마음을 차분해지게 만들었다.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바깥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 같은 고요한 느낌을 준다.
고즈넉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용히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고막을 툭 건드렸다.
“유은서만큼 예쁘지는 않군.”
차강혁은 밤하늘을 흘긋 보고 그렇게 말했다. 로맨틱한 말을 무뚝뚝하게 내던지듯이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서정적인 풍경에 차분해졌던 마음은 그가 아무렇게나 던진 말 하나에 콩닥콩닥 발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은서의 심장은 언제나 그랬다. 아무리 고요하고 잔잔해도 그의 사소한 말 한 마디,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갑자기 폭풍이 들이닥친 것처럼 격랑이 몰아치기 일쑤였다.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리고 뺨은 분홍빛으로 상기되었다. 은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별다른 표정 하나 없는 무심한 얼굴에 반발심이 들면서도, 동시에 선명하게 깨달았다.
차강혁이 쉽게 동요하는 남자였다면 결코 반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의 타고난 무심함과 하드보일드한 분위기, 냉혹한 카리스마와 특유의 여유로움에서 흘러나오는 느긋함과 담백한 성격에 이끌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담백한 남자가 가끔은 실없는 농담도 던지고, 능글맞게 굴기도 하고, 간지러운 말을 속삭일 때도 있다.
그 묘한 갭에 은서는 더더욱 빠져들어서 허우적거리게 된 것이다.
확실히 차강혁에게는 책임이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건 모두 그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니, 그는 나를 책임질 일말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그에게 조금은 덜 미안해진다.
“그런 식으로 빤히 보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은서는 그를 향한 집요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제대로 꺾은 채로 그를 빤히 보고 또 본다.
정말 키스라도 해 달라고 조르듯이.
“날 유혹하는 솜씨도 날로 느는군.”
큼지막한 손이 은서의 길고 가냘픈 목을 감싸 쥐었다. 이내 그가 허리를 굽혀 부드럽게 입술을 훔쳐 갔다.
은서는 눈을 꼭 감고 그와의 키스를 느꼈다. 포근한 입술의 질감을 느끼고, 입속으로 들어와 치열을 섬세하게 훑는 혀끝을 느끼고, 더운 바람을 불어넣는 그의 숨결을 느낀다.
키스만으로도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워지고 아랫배가 아릿거렸다.
“하아…….”
타액이 질척하게 엮이며 서로의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다.
은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검은 눈동자는 흥분에 취한 듯 초점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는 혀로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장난스럽게 핥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지.”
열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귓바퀴에 걸쳐진다.
“여차했다간 몸도 성하지 않은 아내를 잔디밭으로 끌어내 뒹굴 판이거든.”
* * *
부부는 병실로 돌아왔다.
더위가 아무리 가셨다고 해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은서는 땀을 조금 흘렸다. 게다가 뜨거운 키스로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기까지 한 상태였다.
땀도 씻겨 내리고 체온도 식히고 싶어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은서는 내일 신 여사가 올 때까지 참기로 했다.
차강혁에게 샤워를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
교통사고로 몸을 다친 후 그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샤워까지 도움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은서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침대 위로 올려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은서를 안아 드는 대신, 환자복의 단추를 끌러 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돌발적인 행동에 하얀 얼굴이 당황으로 자욱해졌다.
“보면 모르나? 옷을 벗기고 있잖아.”
“왜요? 왜 벗기는데요?”
“샤워를 시키려고.”
샤워? 샤워라고? 은서는 아연해하더니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그리고 단추를 빠르게 채워 속살을 가렸다.
“됐어요. 안 할 거예요.”
이미 지겨울 만큼 그에게 알몸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샤워까지 내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차강혁이 나를 홀딱 벗겨 놓고 몸 구석구석을 씻겨 준다니, 상상만 해도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침대에나 올려 주세요. 쉬고 싶어요.”
은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 따위 껌 씹듯 가볍게 씹어 버리고, 손을 뻗어 다시 단추를 끌러 냈다.
“아잇, 하지 마요!”
“얌전히 있으라고.”
검은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서가 주먹을 휘두르며 발악했지만, 그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거추장스럽게 반항하는 그녀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가뿐히 틀어잡고 단추를 술술 풀어내더니, 환자복 상의를 벗겨 버렸다.
“앗, 안 돼요……!”
병원에서 편하게 지낸다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터라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두 팔을 재빨리 오므려 가슴을 필사적으로 가렸다.
“변태!”
“난 당신 가슴 눈 감고 그릴 수도 있을 만큼 많이 봤거든. 그러니까 어쭙잖은 내숭은 집어치우지.”
“내숭이 아니라 마음대로 옷을 벗기니까 그렇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안 한다고 해 놓고! 무슨 남자가 자기가 한 말을 하루도 못 지켜요?”
“‘되도록’은 왜 빼 먹어? 난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되도록’ 안 하겠다고 했지, ‘무조건’ 안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말장난하지 말아요. 아무튼 오늘 나는 샤워 안 해요!”
은서가 눈을 부라리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그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게 샤워가 하기 싫은가?”
“네. 싫어요!”
“유은서. 네가 어떤 꼴을 해도 내 눈에는 마냥 귀여워 보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청결했으면 좋겠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뭐? 청결했으면 좋겠어? 그럼 지금 내가 더럽다는 거야?
“사람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지 마세요. 나 청결해요! 내일 엄마가 오면 그때 샤워할 거라구요. 나는 차강혁 씨랑 샤워하는 게 싫단 말이야!”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 그리고 쓸데없이 장모님 고생시키지도 말고.”
엄격하게 말한 그는 은서를 번쩍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고 환자복 바지를 스스럼없이 끌어 내렸다.
“하지 마요! 하지 말란 말이야!”
은서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그런 안타까운 외침을 들어줄 남자가 아니다.
그는 팬티까지도 능숙하게 벗겨 냈다. 알몸이 되어 치부까지 드러낸 은서는 부끄러움에 어깨를 달달 떨었다. 그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서랍에서 방수 커버를 꺼내 깁스한 다리에 꼼꼼하게 감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은서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욕실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낮은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다친 다리를 걸쳐 놓게 했다.
그는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를 체크한 후, 적당한 온도로 따뜻한 물을 은서의 몸에 뿌렸다. 깁스한 다리 쪽으로는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쁜 놈.”
은서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처럼 착한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기가 막혔다. 뻔뻔해도 어쩜 이리도 뻔뻔할 수 있을까.
“착해요? 누가요? 차강혁 씨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지금 누구 보고 착하대?”
“당신이 다친 이후로 줄곧 노예처럼 당신 시중만 들고 있잖아. 이런 남자, 흔치 않다고.”
“안 그래도 차강혁 씨가 그러는 거 엄청 부담스럽거든요? 어울리지도 않는 노예 놀이는 이제 그만두라구요.”
입원 생활이 시작된 후로 차강혁은 일하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제 곁에 착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다. 편할 때도 있지만 지금 같은 순간은 상당히 굴욕적이다.
그는 은서의 앙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샤워 타월로 거품을 풍성하게 만들어 내, 몸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얀 거품은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팔뚝을 길게 쓸어 만졌다. 그리고 쇄골을 지나 가슴 위로 안착했다.
원을 그리듯 젖가슴을 덧그리자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등줄기가 뻣뻣해지고 발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거품 묻은 타월이 젖꼭지를 스쳐 지나가자, 하마터면 은서는 신음을 터뜨릴 뻔했다.
“딱딱해졌어.”
도도하게 서 있는 핑크빛 젖꼭지를 일직선으로 보며 그가 말했다. 이런 건, 그냥 모른 척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입 좀 닫아 줄래요?”
은서는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했지만, 실은 수치심 때문에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로 열이 피어오르며 화끈거린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타월로 젖은 몸을 문질렀다. 배를 쓸어 만지고 다리로 내려와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성심성의껏 거품을 묻힌다.
그 손길이 야릇하고 끈적끈적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향긋한 거품이 몸을 뒤덮으면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체온이 상승하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오묘한 손길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화끈거릴 때였다. 타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내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을 불쑥 침범해 왔다.
은서가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이미 그녀의 은밀한 곳에 닿아 얄궂게 지분거리고 있었으니.
“하으…….”
막을 새도 없이 입술 새로 야트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노골적이었고 너무 갑작스러운 터치였다.
“촉촉하네.”
그는 손끝으로 외음부를 더듬으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샤워한다고 물 묻었으니까 그렇죠…….”
“미끌미끌한 걸 보면 물은 아닌 것 같은데.”
다리 사이에서 손을 빼낸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중지 끝에는 끈적끈적한 애액이 묻어 있었다.
은서의 얼굴은 이제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가뜩이나 몸이 예민해졌는데 사타구니로 손을 집어넣어 만지작거리면 아래가 젖지, 그럼 안 젖겠나. 누가 변태 아니랄까 봐 꼭 괴상한 짓거리를 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타월로 은근히 젖꼭지를 스치던 것도 다 계산된 술수였던 거다.
“고작 샤워나 하면서 젖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음란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애액이 묻은 가운뎃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심술궂게 놀렸다.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려 음한 미소를 짓는데, 은서는 저 잘난 얼굴에 따귀라도 날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작 샤워라니. 자기가 일부러 날 자극해 놓고!’
치욕과 분노의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 은서는 숨을 색색거리며 눈에 서릿발을 세웠다. 그를 힘껏 째려보는데 망측하게도, 그의 바지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것이 망막에 맺혀 왔다.
“그쪽도 발정 난 건 마찬가지면서.”
은서는 복수라도 하겠다는 식으로 얄밉게 비아냥거렸다.
“나야 늘 발정 상태지.”
뭐, 기대와 달리 효과는 전혀 없었지만. 그는 별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수긍했다.
“회사에서도 유은서 네 생각만 하면 빨딱빨딱 서 버리는걸.”
“…….”
“유은서 너 때문에 걸핏하면 자지가 발광을 해서 굉장히 곤혹스럽다고.”
하도 태연하게 응수해서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유은서처럼 지극히도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가, 이런 상식적이지 않은 남자를 상대하는 건 늘 버거운 일이다.
은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빤히 쏘아보다가 뒤늦게 입술을 웅얼거렸다.
“그럼…… 내 생각을 안 하면 되죠.”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해.”
그는 두 손으로 토마토처럼 푹 익어 버린 뺨을 감싸 쥔 채로 시선을 지그시 맞대었다.
“거기다 야하기까지 하잖아.”
그가 입술에 쪼옥 뽀뽀했다. 겨우 어린애 장난 같은 베이비 키스였을 뿐인데도 배꼽 아래가 간질거렸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고 매끈한 살결 위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찬물…… 틀어 줘요.”
“뭐?”
“거품 씻어 내게 찬물이나 틀어 달라구요.”
흥분을 가시려면 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맞는 게 좋겠지. 은서의 요청에 그는 수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앗, 뭐야! 찬물 틀어 달라니까!”
안 그래도 열이 오른 몸에 뜨끈뜨끈한 물이 우수수 떨어진다. 차강혁은 끝까지 제멋대로였다.
“그 연약한 몸에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다고.”
고저 없이 세상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어찌 됐든 은서를 챙기는 말이었다. 그는 더운물로 은서를 씻기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비처럼 뿌리며 손바닥으로 몸에 묻은 거품을 쓰윽 쓸어내린다. 은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안 그래도 예민해진 몸은 더운물에 더욱더 민감해졌다.
이윽고 그의 손이 가슴에 묻은 거품을 지워 내려고 하자, 은서는 어깨를 홱 틀고 경계하듯 날카롭게 말했다.
“만지지 말아요.”
“안 만지고 어떻게 씻겨?”
“내가 씻을 테니까 이만 나가요.”
그때, 그가 샤워기의 방향을 사타구니 쪽으로 틀었다. 직선의 물줄기가 은밀한 부위를 공략해온다. 은서는 고함을 힘껏 내지르며 두 손으로 그곳을 가렸다.
“이 변태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자꾸 튕기고 떽떽거리니까 놀리고 싶어져서 말이야.”
“뭐예요?”
“괴롭히기 딱 좋은 상황이잖아. 알몸인 데다 다리를 다쳐서 도망가지도 못하니까.”
“…….”
“변태 소리 들은 게 억울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유은서를 가지고 놀아 볼까 싶은데.”
“…….”
“당신 생각은 어때?”
그는 샤워기의 방향을 돌렸다. 이번에 공략하는 지점은 풍만한 젖가슴이다. 딱딱하게 서 있던 젖꼭지로 거센 물줄기가 닿자, 감각세포가 부글부글 끌어 오르며 뒷골이 아찔하게 당겼다.
“하읏, 아, 알았어요. 얌전히 있을 테니까 제발 변태 짓 좀 그만해요!”
결국 은서는 항복을 선언했다. 머릿속에 저를 괴롭힐 방법이 수만 가지쯤은 있는 남자다. 이런 남자에게 기를 쓰고 맞서 봤자 저만 손해였다.
은서가 눈가까지 축 늘어뜨리며 비굴하게 애걸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샤워기를 어깨 쪽으로 돌렸다. 정상적으로 물줄기를 뿌리면서 손바닥으로 그녀의 몸을 문질러 거품을 걷어 낸다.
은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얌전히 앉아서 한숨만 작게 내쉬었다. 몸이 자꾸 화끈거리고 뱃속이 알알했다.
* * *
차강혁은 샤워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깨끗하게 감겼다.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그는 젖은 몸을 타월로 대충 두르고 안아 들었다. 침대 위에 그녀를 앉히자, 몸을 어설프게 감싸고 있던 타월이 스르륵 풀리며 다시금 알몸이 드러났다.
은서는 부끄러워하며 타월을 집어 몸을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그가 나신을 넘어뜨리고 입술을 덮쳤다.
“으읍.”
은서는 장신의 체구에 속수무책으로 깔려서 격정적인 키스를 당했다. 아랫배로는 단단하게 성이 난 페니스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흥분에 취한 그는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어 능숙하게 휘젓고, 손으로는 젖가슴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숨 막히는 키스와 짜릿한 자극에 은서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꼭 쥐고 얕은 신음을 흘렸다.
“하아.”
그 소리에 더 흥분이 된 건지, 그는 그녀의 혀뿌리까지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입술을 진득하게 탐한 그는 혀를 굴리며 턱선을 타고 목덜미로 내려왔다. 반듯하게 뻗은 목을 짓궂게 빨다가 잘근 물어 버리고는, 탐스럽게 솟아오른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적거렸다.
달콤한 살 내음을 맡는 그의 숨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짐승의 숨소리처럼.
“강혁 씨, 왜…….”
“왜냐고 묻지 마. 난 항상 이러고 싶으니까.”
그는 몰캉몰캉한 젖가슴을 양손에 가득 쥐고 가지고 놀면서, 입으로 봉긋한 가슴 능선을 타고 야금야금 먹어 갔다. 그러다 정상에 올라 앙증맞게 서 있는 젖꼭지를 앙 물어 버린다.
은서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며 교성을 터뜨렸다. 그는 소리를 더 내보라는 식으로 그녀와 눈을 곧게 맞추면서 핑크색 젖꼭지 위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하읏, 강혁 씨. 여긴 병원인데…….”
“환자 주제에 색기나 풍기고 다니는 널 탓해. 나도 참으려고 꽤나 애썼다고.”
그는 가슴을 욕심맞게 빨아먹으면서 손을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로 가져가 외음부를 지분거렸다.
“또 젖었네. 내가 분명히 깨끗하게 씻겼는데.”
허스키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기막히게 섹시했다. 그는 다치지 않은 왼쪽 발목을 손에 쥐고 가랑이를 넓게 벌렸다. 그러곤 흥건하게 젖어 있는 구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물이 많이 나와서 닦아 줘야겠어.”
“…….”
“내 입으로.”
음험하게 속삭인 그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작은 구멍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츄릅 츄릅, 질퍽한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으응…….”
그는 혀끝으로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핥았다. 노련한 애무에 날개처럼 펼쳐진 음순이 벌름거리며 반응했다. 워낙 감도가 좋은 몸이기도 했지만, 이토록 진한 스킨십이 오랜만이라 더 쉽게 달아오른 것도 있었다.
할짝할짝, 그는 개새끼처럼 잘도 핥아 대고 있었다. 은서는 발끝을 오므리며 전신을 바르작거렸다.
그가 좁은 틈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온몸은 은근한 기대감에 휩싸였다. 머지않아 잔뜩 성이 난 거대한 페니스가 제 몸을 가르고 들어와 가학적으로 유린할 것이라는 위험한 기대감이.
동시에 선명한 깨달음이 뇌간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임약 안 먹었는데…….’
입원한 후로 피임약을 전혀 복용하지 않았다. 다친 몸으로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동안 그도 절제를 잘해 왔고.
‘그만하라고 해야 돼.’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아래를 집요하게 탐하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는 찡긋, 윙크까지 하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은서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생각들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를 밀어내야 하는 손은 도리어 그의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어루만졌다.
“입으로 닦아도 닦아도 계속 물이 나와.”
“하으…….”
“닦을 게 아니라 못 나오게 마개를 해야 하나.”
실없는 농담을 던진 그가 구멍 안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내벽을 살살 휘저으며 기술적으로 스팟만을 정확하게 건드린다.
부드럽게 시작된 핑거링은 이내 퍽퍽,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거칠어졌다. 구멍 깊숙한 곳까지 거침없이 드나들며 포인트를 찔러 댄다.
이어서 혀로 클리토리스를 츕츕 빨면서 손과 동시에 자극을 주자, 버틸 수가 없어진 은서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면서 울먹거렸다.
“아읏, 그만.”
눈 끝에 투명한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은서는 그의 손목을 꽉 잡아 밀어서 구멍 안을 점령하던 손가락을 힘겹게 빼냈다.
“이런 거 싫어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그는 가냘프게 흐느끼는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나는…… 빨리…….”
안달이 난 것처럼 온몸을 배배 꼬면서 은서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당신을 느끼고 싶어요.”
손가락이나 혀가 아니라 진짜 그를 느끼고 싶었다.
바지 속에 갇혀서 발정하고 있는 그의 우람한 페니스로 온몸이 꿰뚫리고 싶었다. 은서는 손을 뻗어 두툼하게 솟은 바지 앞섶을 매만졌다. 어서 삽입을 해 달라고 조르듯이.
미친 욕망이었다. 피임약도 먹지 않은 주제에 안아 달라고 칭얼거리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 원하고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에게 그냥 이 몸을 내던져 버리고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임신을 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낙관적인 희망이 어렴풋이 피어오른 탓도 있었다.
‘다친 나를 잘 보살펴 준 것처럼, 우리 아기도 잘 보살펴 줄지 몰라.’
이상적인 부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 아기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박히고 싶어?”
나른한 목소리가 물었다. 은서는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확고하게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안 돼.”
그는 앞섶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매정하게 걷어 냈다.
안 된다고? 은서는 혼란스러웠다. 이 발정 난 짐승이 삽입을 거부하다니. 흥분으로 폭주해서 맹렬하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가는 그의 반응에 연갈색 눈동자가 거세게 동요했다.
“나도 가끔은 튕기고 싶을 때가 있어서 말이야.”
짓궂게 입매를 말아 올린 그는 고개를 숙여 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애액으로 질척거리는 음부에 혀를 굴리자, 자그만 구멍이 빠끔거리면서 유혹하듯 입을 벌렸다.
“아으…….”
“다 나을 때까지 내 자지 안 넣어 줄 거야.”
그는 혀로 음란한 구멍을 정신없이 헤집으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온몸이 간지럽고 저릿저릿해진 은서는 그의 뒷머리를 세게 쥐면서 골반을 파르르 떨었다.
“대신 몸이 다 낫고 나면 그때는 매일매일 박아 줄게.”
“하읏.”
“유은서 네가 울면서 싫다고 앙탈을 부려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귀여운 보지에 박아 넣을 거야.”
“하아.”
“강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아으응”
“그렇지만, 도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는 시선을 짙게 맞대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구? 갑자기 웬 도구? 그 순간, 은서의 뇌리에서 끔찍했던 폭염이 스쳐 지나갔다.
「난 차강혁 씨의 자위 도구밖에 되지 않잖아요.」
우리가 지독하게 싸웠을 때,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난 한낱 도구 따위한테 이렇게 정성을 다하지는 않거든.”
그는 젖은 아래에 키스를 쪼옥 쪼옥 퍼붓고 혀를 할짝거렸다. 그러다 정말 음부를 먹어 치우기라도 할 기세로 입술에 힘을 주며 흡입하듯 빨아 버리는데, 그 자극이 너무도 강해서 은서는 온몸을 격하게 들썩거리며 앙앙거렸다.
“하으읏!”
“봐. 내가 얼마나 당신 밑을 개처럼 충실하게 빨아 주고 있는지.”
“아흣.”
“박을 것도 아닌데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다고. 내 정성이 눈물겹지 않나?”
“하앗.”
능글거리는 말에 은서는 그의 머리칼을 확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는 싱긋거리며 웃기만 한다.
이윽고 그는 가운뎃손가락을 질 속에 쑤셔 넣으며 리드미컬하게 피스톤질을 했다. 퍽퍽, 손가락으로 아래를 쑤시면서 동시에 혀를 날름거려 구멍 주변을 섬세하게 핥는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자극에 육신은 불기둥에 휘말린 것처럼 뜨거워졌다. 압도적인 쾌락에 의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본능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은서는 허리를 계속 요염하게 뒤틀면서 그에게 페니스를 넣어 달라고 무언의 안달을 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손가락과 혀만으로 그녀를 절정에 오르게 만들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자위 도구로 이용당한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그는 힘 하나 없이 축 휘늘어진 은서를 흘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은서는 그의 바지 앞섶으로 시선을 겨누었다. 여전히 팽팽하게 발기가 되어 있었다.
자위 도구로 이용당했다는 그의 말이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은서가 숨을 할딱할딱 삼켜 가며 오르가슴을 맛보는 동안, 그는 아직도 욕정을 해소하지 못했으니까.
손으로라도 발기를 풀어 주어야겠다 싶은 마음에 은서가 바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냉정하게 손을 쳐 냈다.
“혼난다.”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임신까지 각오했건만 삽입은 안 하겠다 그러고, 아예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은서가 입술을 불만스럽게 삐죽 내밀자 그는 쿡쿡 웃었다.
“손도 못 대게 하니까 서러운가?”
“그게 아니라 그냥 기분이 나빠서요. 차강혁 씨는 내 몸 마음대로 만지면서, 나는 왜 못 만지게 해요? 불공평하잖아요.”
“당신이 날 만지면 폭주해 버릴 것 같아서 그래.”
그는 흥분을 감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폭주하면 당신만 손해야. 성치도 않은 몸에 꼴리는 대로 자지를 쑤셔 박았다가는 분명 그 몸이 망가지고 말 테니까.”
망가뜨려도 괜찮은데.
은서의 입속에서는 그런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망가뜨려도 괜찮다고. 임신까지 각오했는데 그깟 몸이 망가지는 게 대수일까.
하지만 발칙한 속내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다.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두 팔을 뻗어서 그를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바보.”
* * *
날이 바뀌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차강혁은 갑자기 환자복을 벗겨서 은서의 온몸에 키스했다. 치아로 살점을 깨물면서 몸 구석구석에 키스마크를 남긴다.
다리에 깁스를 한 탓에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고 병원에 고립된 상황이라 병문안을 오는 손님들을 제하고는 남자들을 만날 수도 없는 환경인데, 그런데도 그는 하얀 몸에 그의 표식을 새겨 넣어야 속이 후련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 대신 은서를 쪽쪽 빨아먹고 출근했다.
그가 떠나고 은서는 침대에 누워 멀거니 천장만을 쳐다보며 호흡을 차근차근 골랐다. 섹스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애무만을 당했을 뿐인데, 기가 쏘옥 빠져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오전 11시쯤에 신 여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은서야, 엄마가 샤워시켜 줄까?”
신 여사가 나긋하게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어젯밤에 했어요.”
“어떻게? 언니들이 왔다 갔니?”
“아니……. 그 사람이 해 줬어요.”
“그 사람? 차 서방 말하는 거야?”
은서는 뺨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줍은 반응에 신 여사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너희 금실이 좋기는 정말 좋구나. 네 아빠가 궁합 봤다는 점쟁이, 용하기는 용한가 보다.”
그 궁합이 혹시 ‘속궁합’을 일컫는 것이라면, 용한 거 인정한다.
“차 서방한테 여자 친구 있다고 엉엉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잉꼬 같은 부부가 되었는지.”
“아, 엄마. 그때 이야기는 왜 해요!”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신 여사의 말에 은서가 발끈해서 목소리 톤을 높였다.
부모님 앞에서 나잇값 못하며 울며불며 난리를 쳤던 게 부끄러운 것도 있었고, 민승아가 떠올라 기분이 나쁜 것도 있었다.
‘그나저나, 그는 아직도 민승아 사진을 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까. 나한테 잘해 주기는 해도, 민승아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을 거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은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 봤자, 태평양 너머 미국 땅에 있는 여자야. 차강혁이 그리워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것도 아니잖아.’
은서는 단단히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차피 힘없는 추억일 뿐이니 질투하지 말고 그냥 떨쳐 내자고.
* * *
오후에 신 여사가 병실을 떠났고 은서는 혼자가 되었다.
은서는 스케치를 하고, 책을 읽고, 휠체어로 병실 한 바퀴를 빙 돌면서 무료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렇다. 병원 생활은 무료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쾌적하다고 해도, 병원 자체가 주는 특유의 지루하고 맥 빠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은서는 휠체어에 앉아 창밖 구경을 하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서 벌써 오후 5시가 지났다. 그제야 지겨운 무료함이 증발되고 활기가 찾아오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곧 있으면 차강혁이 올 것이다.
병실에 와서도 항상 노트북을 붙잡고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써 가며 통화를 하는 것을 보면 바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스럽게 계속 일찍 퇴근을 했다.
이 비정상적인 다정함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퇴원을 하자마자 마법이 풀리듯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불안해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이 정도의 인간적인 동정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니까.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상념이 뚝 끊어지고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대에 올 사람이라면 차강혁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노크를 하지 않는데…….’
은서는 의문 섞인 시선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방문객을 보자마자 은서는 급격히 아연해졌다.
“아, 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