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8.
* * *
실버색 뷰익 운전수, 이정호는 골목길에 서 있는 붉은색 렉서스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백화점에서부터 여기 주택가까지 올 때만 하더라도 단순히 방향이 같은 건가 생각했지만, 운전자가 렉서스에서 내리지 않고 있자 수상하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미행 같은데.”
대체 저 말고 누가 또 유은서를 미행하는 것일까?
석연치 않은 느낌에 이정호는 렉서스의 번호판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사진을 찍었다. 저장한 사진을 최 실장에게 보내 렉서스의 차주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메시지를 입력하는 순간, ‘쿵!’ 하는 충돌음이 청각을 거세게 때렸다.
수상한 렉서스는 기어코 사고를 일으켰다. 은서를 치고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사모님!”
이정호는 뷰익에서 내려 재빠르게 달려갔다.
길 위에 쓰러진 은서는 의식을 잃은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은 살이 패이고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정호는 손을 은서의 코밑으로 가져가 호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런 다음, 입고 있던 티셔츠를 찢어 출혈 부위를 꾹 눌렀다.
“사모님! 사모님!”
은서가 좀처럼 의식을 차리지 못하자, 이정호는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성대가 찢어질 정도로 목청을 드높였다.
“사모님! 눈 좀 떠 보세요!”
동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음성에 그제야 느리게 눈꺼풀이 말려 올라갔다. 흐릿한 연갈색 눈동자가 이정호를 겨누었다.
“사모님, 제 얼굴 보이세요? 제 목소리 잘 들리십니까?”
은서는 멍하게 눈을 뜬 채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아까 빨간 차가 저를 향해 무작정 돌진했고, 그 순간 번개가 반짝거리면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보니 저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고, 웬 낯선 남자가 심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운 나쁘게 또 차에 치였구나…….’
상황 정리가 끝난 은서는 메마른 입술을 굼뜨게 움직였다.
“네…….”
“사모님, 지금 다리를 다치셨는데…… 혹시, 다리 말고 아프신 곳이 더 있습니까? 불편한 곳이 있다면 전부 말씀해 주세요.”
생면부지의 남자는 저를 잘 안다는 듯이 친근하게 ‘사모님’이라고 계속 불렀다.
은서는 의아했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초면인 사람들은 보통 저를 두고 ‘아가씨’라고 부르거나 ‘저기요.’라고 부르는데.
하지만 온몸을 덮치는 통증에 그러한 의구심도 길게 지속되진 못했다. 의식을 되찾고 사태 파악을 끝내고 나니, 이제는 통증들이 감각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오른쪽 무릎이 깨질 듯이 아파 왔고, 허리가 끊어질 듯했고, 팔뚝은 어디 긁힌 건지 따가웠다. 무더운 날인데도 통증과 출혈로 고통이 심해서 오한이 들었다.
은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다 아파요. 다리도 허리도 팔도…….”
“그럼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으로 이동할게요. 제 차로 섣부르게 옮겼다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어요.”
실버색 뷰익을 흘긋 바라본 이정호가 침착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척추를 다쳤다면 무리하게 옮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정호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9로 전화했다. 그리고 정확한 주소를 불러 구급차를 요청했다.
“사모님, 3분 뒤면 구급차가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금방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게 해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이정호는 고통에 떨고 있는 은서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이정호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조금 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응급요원들은 급히 지혈을 하고 은서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태웠다.
* * *
거제도 조선소의 공장장은 얼마 전에 새로 들여온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이 기계가 얼마나 유용하고 효율적인지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강혁은 거대한 기계를 쳐다보며 공장장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사장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온 최 실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빛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시퍼렇게 질려 있는 최 실장의 모습에 그는 의아해하며 공장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 실장을 공장 한쪽으로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사모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뭐?”
그의 만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달려드는 차에 치이셔서……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합니다.”
“…….”
아연해진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뇌가 작동을 멈추고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꿈이라면 어서 빨리 깨고 싶었다.
이건 끔찍한 악몽이니까.
“지금 옥상의 헬리포트에서 헬기가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이륙하기까지 시간이 약 30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그는 최 실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몸부터 움직였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걷다가 나중에는 아예 뛰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헬리포트에서는 거대한 헬기 한 대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얇고 긴 로터가 엄청난 바람과 소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거센 바람을 가르고 헬기 안으로 탑승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현재 IRS 신호 수신 대기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종석의 기장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한 그는 인사를 받을 여유조차 없었다.
“절차 따윈 생략하고, 그냥 바로 띄워!”
“그렇지만…….”
기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다시 한번 벼락처럼 외쳤다.
“당장 띄우라고!”
“안 됩니다.”
그때, 뒤늦게 헬기에 올라탄 최 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장님, 지금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이륙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최 실장.”
“사모님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아니, 이해 못 해.”
그는 최 실장의 말을 자르고 초조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애가 타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겠어. 내가 은서 대신 차에 치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심장이 회색빛 재가 되어 바스스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교통사고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는 여잔데, 그런 일을 또 당하다니……. 내가, 내가 대신 그 차에 치였어야 했어. 내가 우리 은서를 지켰어야 했는데!”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다니.
낯선 감정이었지만 분명한 진심이었다.
누군가가 불행한 사고를 당해야 한다면, 그녀가 아니라 내가 당해야 했다. 그녀 대신 내가 다치고, 그녀 대신 내가 아파해야 했다.
“최 실장은 내 마음 절대로 이해 못 해.”
“왜 이해 못 합니까? 저도 사랑해 봤는데.”
최 실장이 명료한 어조로 받아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죠. 그 사람을 걱정하고,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아파해 주고 싶고.”
그는 멍한 시선으로 최 실장을 응시했다. 혼란과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검은 눈동자는 전에 없이 복잡해 보였다.
“저는 사장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
“사모님을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다쳤으니까, 초조하고 불안해서 한시라도 빨리 가서 보고 싶은 것이겠지요.”
“…….”
“하지만 이해를 막론하고, 사장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게 제 임무입니다. 답답하시겠지만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도록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최 실장의 말을 조용히 듣던 그는 고개를 떨구고 머리를 우그려잡았다.
사랑?
아무래도 좋았다. 이 복잡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든, 아니면 또 다른 단어로 정의 내리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금 그는 오직 은서가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가 무탈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 용어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이라고?
그래, 좋아. 우리 은서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이 감정을 어떤 식으로 불러도 나는 다 좋다고.
* * *
엔진이 스타트 되었다. 거대한 헬기는 서서히 지면에서 멀어지고 점차 하늘과 가까워진다.
불안한 심경을 반영하듯 강혁은 손끝으로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끝을 멈추고 냉기 서린 음성을 내뱉었다.
“어떤 새끼야?”
“네?”
“어떤 새끼가 우리 은서를 쳤냐고.”
그는 검은 눈빛을 팽팽하게 번뜩였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져 있는 눈매가 당장 누구 하나를 죽여도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냉혹해 보였다.
노기가 고스란히 어려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최 실장은 난감한 얼굴을 하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게 실은…… 아직 모릅니다.”
“뭐?”
“사고를 낸 차량이 후처리를 안 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이정호가 구급차를 불러서 사모님을 병원으로 모셨고요.”
“운전도 좆같이 하면서 뺑소니까지 치다니. 사지를 찢어 놓아도 시원찮을 놈이군!”
그는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정호가 말하길, 수상한 차가 있어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그 차가 갑자기 사모님을 향해 돌진했다고 합니다. 불의의 사고라기보다는 일부러 노리고 한 짓으로 보였답니다.”
“노렸다고?”
짙은 눈썹이 삐딱해졌다.
“네. 이 차라고 합니다.”
최 실장이 휴대폰을 내밀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번호판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붉은색 렉서스의 뒤태를 찍은 사진이었다.
“경찰에도 사건 접수가 되어서 조만간 이정호가 목격자 진술을 해야 할 텐데, 어떡할까요? 차량 번호 넘기라고 할까요?”
최 실장이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강혁은 붉은 렉서스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렸다. 노렸단 말이지…….’
이윽고 그는 입술을 확고하게 움직였다.
“넘기지 마. 우리 쪽에서 조용히 알아보는 걸로 하지.”
“네. 조속히 알아보겠습니다.”
* * *
헬기는 삼우조선 사옥 옥상의 헬리포트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강혁은 단숨에 사옥의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는 세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빌딩 밖으로 나온 그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세단은 기다렸다는 듯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도로 위를 질주했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빠르게 뛰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VIP 병실이 있다는 꼭대기 층을 눌렀다. 하나하나 바뀌는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조금 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춰 섰고 그는 또 빠르게 달렸다.
입원실 문을 벌컥 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은서가 보였다. 심장이 다급하게 뛴다. 그는 불안한 숨을 삼키고 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링거액을 맞으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는 석고 붕대로 깁스를 했고, 팔뚝에는 드레싱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얀 얼굴은 그새 수척해진 듯했다. 그 창백하고 야윈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울컥 차오르며 내내 참고 있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안 그래도 겁이 많은 여잔데……. 유약하고 여린 여자라 상처가 오래갈 텐데.
그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냉정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던 남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코 기계처럼 굴 수 없었다.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지고 감정이 격랑처럼 요동쳤다. 명치가 욱신거리고 목구멍 안쪽이 숨 막히도록 죄여 왔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자네가 우는 모습도 다 보고.”
온화한 목소리에 강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착잡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유 회장의 모습이 흐린 시야로 들어왔다. 머릿속에 온통 은서뿐이라서 병실 안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울지 말게. 우리 은서 괜찮아. 괜찮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유 회장은 터벅터벅 걸어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자네도 오면서 소식을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다행히 큰 수술은 피했네.”
유 회장은 침착하게 말했다.
“간단히 봉합 수술만 하고 끝냈지.”
“…….”
“무릎 피부가 10cm가량 찢어져서 국소 마취를 하고 실밥으로 꿰맸어. 촘촘하게 꿰매기는 했지만 상처가 워낙 커서 흉터가 남을 거라고 하는군.”
흉터가 남을 거라는 말에 가슴이 또 미어졌다. 그는 괴로운 숨을 앓듯이 쏟아 냈다.
그렇잖아도 정강이에 있는 흉터를 콤플렉스로 여기는 여잔데, 무릎에도 흉터가 남으면 얼마나 우울해하고 스트레스를 받을지……. 할 수만 있다면 멀쩡한 제 피부를 그녀에게 떼어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무릎 뼈가 골절됐는데,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깁스만으로도 뼈가 잘 붙을 거라고 하네.”
유 회장은 석고 붕대로 꽁꽁 감싸여 있는 은서의 오른쪽 다리를 안타까운 손길로 쓸어 만졌다.
“허리 염좌는 사나흘 침상 안정을 취한 후에 2주 정도 물리치료를 받으면 회복이 될 거라는군. 팔뚝에 긁힌 상처들은 보다시피 드레싱 밴드를 붙여 놓았고.”
“…….”
“이만하니 다행이지.”
“…….”
“천만다행이야.”
유 회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다행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다. 하지만 그 말이 강혁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은서가 사고를 당하고 다쳤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비극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더도 말고 딱 오늘 아침으로만 돌아가서, 거제도에 가는 대신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그랬다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또다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방패막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보호막이 되었어야 했는데. 남편이라는 게 아내를 지키지도 못하고…….
“차 서방, 왜 자꾸 울고 그러나. 우리 은서 씩씩하게 나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유 회장이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름진 손으로 넓은 등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자네 오늘은 좀 사람답군. 항상 로봇 같더니.”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가?”
“제가 은서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신도 아니고, 사고가 일어나는 걸 대체 무슨 수로 막겠나.”
“아뇨, 막았어야 했어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늘 같은 일은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젖은 눈은 독을 품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제가 은서를 지킬 겁니다.”
강고하게 다짐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 회장은 확신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은서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 * *
“어? 차 서방 왔네?”
격해진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꽃병을 든 신 여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출장 갔다고 해서 못 올 줄 알았는데.”
신 여사는 총총 걸어서 꽃병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꽃병에는 파스텔 톤 색감의 라넌큘러스 꽃들이 예쁘게 꽂혀 있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병실 안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간다.
“아까 은하랑 은경이도 같이 왔다 갔어. 애들이 병실에 들어오더니 너무 삭막하다고 밖에 나가서 꽃을 사 온 거 있지.”
신 여사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손질해서 꽃병에 꽂아 봤는데, 어때? 꽃이 있으니까 병실 분위기가 한결 화사해지는 것 같지? 병실이 화사해야 환자도 힘이 나는 법이니까.”
“남편으로서 실격이네요.”
꽃잎들이 풍성하게 열린 라넌큘러스를 응시하며 강혁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쉬이 이해되지 않는 말에 유 회장과 신 여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눈을 의아하게 떴다.
“남편이라는 놈이 제일 늦게 오다니…….”
내가 가장 먼저 병원으로 달려와서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어야 했는데. 내가 저 꽃병에 붉은색 튤립을 담아 병실을 안온하게 꾸몄어야 했는데.
“자넨 거제도에 있었잖나.”
유 회장이 다시금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를 변호했다.
“그래. 차 서방은 오늘 아침에 거제도로 갔었다며. 아침에 거기 갔다가 또 서울까지 온다고 고생했어.”
신 여사도 그를 다정하게 감싸 주었다.
“피곤하지? 은서 봤으니까 이만 가 봐. 내가 은서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당신도 이제 그만 들어가 봐요. 병실 안에 사람 많아 봤자 어수선하기만 해요.”
세상모르고 깊게 잠든 은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신 여사는 그렇게 말했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하지만 강혁은 그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은서를 보살피고 싶어요.”
“아니야. 내가 있는 게…….”
“여보, 우린 이만 가지.”
유 회장이 신 여사의 말을 막으며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차 서방이 알아서 하게 두자고. 은서는 차 서방 아내잖아.”
“난 엄마거든요.”
“결혼했으면 남편이 우선이야. 은서 보호자는 우리가 아니라, 차 서방이라고.”
유 회장은 강경하게 말했고, 강혁은 검은 눈을 견고하게 빛내고 있었다. 두 남자의 기에 밀린 신 여사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내일 아침 일찍 올게. 오늘 밤은 차 서방이 맡고, 내일 아침부터는 내가 와서 맡고. 아, 근데 저녁은 먹었어?”
모전여전이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신 여사는 사위의 끼니를 챙기고 있었다. 은서의 따스한 마음씨는 모두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안 먹어도 됩니다.”
“에이, 안 먹어도 되는 게 어디 있어? 나가서 밥부터 먹고 와. 밥 먹고 오면 우린 그때 갈게.”
“괜찮습니다. 은서는 제가 잘 돌볼 테니 이만 들어가 쉬세요.”
“자, 그만 가자고.”
유 회장이 재촉하듯 신 여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신 여사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냉장고에 죽과 과일이 있으니 그거라도 꼭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 * *
은서가 눈을 떴을 때, 어두운 병실 안으로는 노오란 달빛이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하품을 하고 졸린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그러다 웬 허우대 좋은 남자를 발견하고 일순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침대 옆 스툴에 앉아 까만 머리통을 까닥거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은서의 손을 깍지까지 낀 채로 꼭 잡고서. 정교하게 엮인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체온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차강혁…….’
혀끝에서 그의 이름이 맴돌았다. 은서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 사람, 지금 거제도에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거제도에 있어야 할 남자는 지금 여기, 이곳에 있었다. 제 곁에 말이다.
‘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건가?’
저 하나 때문에 차강혁이 만사를 다 제쳐 놓고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생각을 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것도 아니고, 큰 수술을 한 것도 아니다. 출장 스케줄을 모두 끝내고 돌아와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획된 일정을 모두 내팽개치고 저를 보러 왔다. 당연히 그에게는 일이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보다 저를 우선으로 두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냉혈한에게도 일말의 정은 있는 걸까.’
난 그의 소중한 아내도 아니고 그저 정략혼으로 맺어진 형식적인 아내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이렇게 급히 와 주었다는 것은, 그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든 것일지도 몰랐다.
은서는 불안하게 까닥이고 있는 그의 고개와 꼭 잡고 있는 손을 번갈아 보았다. 불현듯, 그와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고 그러다 냉전에 다다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오래된 영화처럼 옛일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화해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은서가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좀 더 세게 잡았을 때였다. 꾸벅이며 졸던 그가 고개를 부스스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은서야…….”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그렇잖아도 빠르게 내달리고 있던 심장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계속 자지 왜 일어나. 혹시 아파서 깼어?”
그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그냥……. 목이 말라서.”
메마른 입술로 대답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 갖다 줄게. 불 좀 켜도 될까?”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하듯이 묻는 말투가 낯설었다. 은서는 눈을 어벙하게 뜨고서 창밖에 떠 있는 보름달을 흘끔거렸다.
보름달이 뜬 밤, 늑대로 변해 버린 남자의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 봤어도 잘 길들여진 개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켜지 마?”
“아, 아니요. 불 켜요…….”
은서가 눈이 부시지 않도록 그는 메인 조명 대신 은은한 오렌지 불빛의 무드 등을 켰다. 그리고 빨대가 꽂혀 있는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허리 염좌 때문에 은서는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느껴야 했다. 그나마 누워 있을 때 통증이 가장 적어서, 물 정도는 그냥 누워서 마시라고 신 여사가 빨대 텀블러를 준비해 둔 것이었다.
그는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 은서에게 다가왔다. 텀블러를 비스듬히 기울여 빨대를 입술 가까이 가져다주자, 은서가 빨대를 앙 물고 물을 쪼옥 빨아 마셨다.
“차가운 물 먹고 싶은데…….”
목을 적당히 축인 은서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냉수 몸에 안 좋아. 아프니까 물도 가려서 마셔야지.”
저를 위하는 말인지라 은서는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빨대를 다시 물어 미지근한 물을 조금 더 마셨다.
“다 마셨어요.”
“더 필요한 거 없어?”
그는 텀블러를 협탁 위에 올려놓고 물었다.
“없어요.”
은서는 대답을 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자위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강혁 씨, 눈이 엄청 빨개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울어서 눈이 그렇게 됐으리라고는 은서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강혁이 우는 건, 코끼리가 하늘을 나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안 피곤해.”
그는 다시 스툴에 앉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은 지쳐 보였다. 은서는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0시 32분이었다.
“언제 왔어요?”
“7시 넘어서. 늦게 와서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그 시간에 도착했으면 거제도에서 얼마 있지도 못하고 바로 서울로 왔겠네요. 어떡해요? 나 때문에 일정 꼬여서…….”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은서의 안테나는 언제나 차강혁에게 예민하게 반응했으니까.
은서는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는 아침에 입고 간 슈트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불편해 보인다. 신고 있는 애나멜 구두도 답답해 보이고.
이윽고 은서의 시선은 그가 앉아 있는 의자에 가서 닿았다. 등받이도 없는 스툴 역시 불편해 보이기만 했다.
“계속 여기 앉아 있었어요?”
“어.”
“불편하게 왜 그러고 있었어요?”
푹신한 소파를 두고, 안락한 보호자 침대를 두고, 왜 딱딱한 스툴에서 그러고 앉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이 야심한 밤에 날 내쫓으려는 건가? 내 아내는 자비가 없군.”
그가 입매를 능글맞게 끌어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쫓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강혁 씨 편하라고…….”
“당신 옆에 있는 게 편해.”
그는 은서의 손을 꼭 붙잡고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옆에 있게 해 줘.”
“…….”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한 그는 또다시 손등에 뽀뽀를 했다. 은서는 이상하게 명치가 간지러웠다.
“그럼…… 저기 가서 자요.”
은서가 눈짓으로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손잡고 있을래.”
“난 싫거든요.”
손을 잡고 있는 건 좋지만 그가 불편한 건 싫었다. 하루 만에 거제도와 서울을 오고 간다고 고단했을 텐데, 그런 남자를 스툴에 불편하게 앉혀 놓고 고생을 시킬 수는 없었다.
“손 계속 잡고 있으면 손에서 땀도 나고…… 아무튼 별로라구요. 손잡을 만큼 실컷 잡았으니까, 이제 그만 놓고 저기 가서 잠이나 자요.”
은서가 뜻을 분명하게 전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교통사고 당한 환자 말 안 들을 거예요?”
결국 은서는 필살 단어를 꺼냈다. ‘교통사고 당한 환자’라는 거창한 단어에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내 그는 아쉬운 듯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는 스툴에서 일어나 침대 헤드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수척해진 은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쪽, 베이비 키스를 한 그는 새벽에 어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게.”
시키는 대로 하겠다니. 이 남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게 놀랍다. 은서가 입술을 조그맣게 벌리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차강혁은 보호자 침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설득하는 데에 약간 애를 먹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움직여 주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온순해진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환하게 뜬 보름달이 정말로 마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보호자 침대에 누웠고, 오렌지빛 무드 등이 꺼졌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스르륵 수면의 요정이 몰려온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그도 잠이 들었다.
하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까 전만 해도 평화롭게 숨 쉬고 있던 은서가 갑자기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조명을 켜고 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들썩거리며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통증이 심해진 모양이었다.
“은서야, 많이 아파? 간호사 불러올까?”
“으읏…….”
비몽사몽 상태인 그녀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잠결에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간호사 불러올게. 잠깐만 기다려.”
은서가 괴로워하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그는 간호사실로 다급하게 뛰어갔다.
“아내가…… 아내가 너무 아파하는데요.”
야간 근무를 하고 있던 간호사에게 그는 몹시도 당황한 표정과 초조한 음성으로 상황을 전했다.
차강혁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내의 사고 소식을 접한 이후로 그는 계속 그랬다.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해 물가에 아기를 내놓기라도 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포커페이스를 잃고, 이성을 잃고, 냉정과 비정을 멀리멀리 내다 버린 채로, 오직 한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매달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삶의 의미라도 되는 듯이.
“유은서 환자분 말씀하시는 거죠? 많이 힘들어하시나요?”
“네.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바로 준비해서 갈 테니, 병실로 먼저 가셔서 기다려 주세요.”
병실로 돌아온 그는 끙끙거리며 앓고 있는 은서를 안쓰러운 눈길로 주시하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대신 아파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강하니까. 이런 일은 내가 당했어야 했는데.’
처참한 심경이다. 아픈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마저 느껴졌다. 그는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운 한숨을 쏟아 냈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병실 문이 열렸다.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간호사가 들어와 은서의 호흡, 맥박, 혈압 상태를 체크했다. 그런 다음, 링거 병에 주사를 꽂아 한 단계 높은 진통제를 주입했다.
“오늘이 첫날이라 심한 거예요. 통증은 차차 줄어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주세요.”
간호사는 친절하게 말하고 병실에서 나갔다. 그는 은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시간이 흐른다. 새로 넣은 진통제가 약효를 발휘했는지 끙끙 앓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신음 소리는 아예 사라지고 규칙적인 호흡음이 귓가로 걸쳐졌다.
그제야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은서. 너 왜 사람을 놀라게 하냐.”
“…….”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 때문에 일도 내팽개치고, 수명도 줄어들고, 성격도 변하고…….”
“…….”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어.”
“…….”
“너 하나 때문에.”
* * *
보름달이 지고 아침 해가 떴다.
은서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눈을 몇 번 깜박여 흐린 시야를 선명하게 만든 다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시선은 차강혁에게 닿아 멈췄다. 그는 침대 옆 스툴에 앉아 제 손을 꼭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 남자가 또…….’
간밤에 보호자 침대로 가서 눕는 걸 봤는데, 왜 또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은서는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살짝 긁었다. 그러자 그가 곧장 눈을 떴다.
“일어났어? 혹시 또 아픈 건 아니지?”
자는 걸 깨웠는데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걱정과 염려가 자욱한 눈빛이다. 이 남자가 이리도 동정심이 넘쳐 나는 남자였나.
“별로 안 아파요. 근데, 왜 자꾸 여기 앉아 있어요? 멀쩡한 보호자 침대 두고.”
“그냥 이게 나을 것 같아서.”
“하여간 말 참 안 들어요.”
은서가 툴툴거렸다. 온순해지긴 했어도 제멋대로 구는 버릇은 못 고쳤다 싶다.
“지금이라도 침대 가서 눈 좀 붙여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냐며 어서 가서 누우라고 윽박을 지르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 기사였다. 윤 기사는 그의 슈트와 캐리어를 챙겨 왔다.
“말씀하신 건 다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이만 가 봐.”
“네. 사모님, 빨리 쾌차하십시오.”
윤 기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은서는 커다란 캐리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캐리어? 어디 출장이라도 가는 건가? 아, 어제 거제도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테니 오늘 다시 거제도로 가는 것일지도.
“출장 가요?”
“갑자기 무슨 출장?”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문했다.
“출장 가는 거 아니에요? 캐리어…….”
은서가 손끝으로 캐리어를 가리켰다.
“아, 이거. 병실에서 지내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을 테니까.”
그는 캐리어를 병실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병실에서 지낸다니요?”
이번에는 은서가 반문했다.
“당신 퇴원할 때까지는 나도 병실 생활 해야 될 거 아니야. 당연한 걸 왜 묻는지 모르겠군.”
“아…….”
은서는 얼떨떨했다. 하루만 특별히 자고 가는 게 아니었어? 앞으로 계속 이곳에서 잠을 자며 나와 함께 지낼 거라는 말이야?
“안 그래도 되는데…….”
“샤워하고 올게.”
그는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은서는 잠에서 덜 깬 기분이었다. 그가 저와 같이 병원 생활을 할 거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아무리 VIP 병실이라고 해도 집에서 지내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불편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저와 같이 지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속을 알 수 없다니까.’
왠지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 * *
샤워를 하고 나온 차강혁은 편안하게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었다. 심플한 차림이었지만, 심플했기에 그의 수려한 외모는 더욱더 돋보였다.
그는 스킨을 손바닥에 털어 얼굴에 툭툭 대충 발랐다. 뭐, 워낙 투박한 손길이라 발랐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덕분에 병실 안으로는 청량한 스킨 향이 퍼져 나갔다. 그는 매력적인 향을 솔솔 풍기며 다시 욕실로 들어가 하얀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얼굴 닦아 줄게.”
“내가 할…… 앗!”
말을 끝까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다짜고짜 물수건으로 은서의 얼굴을 닦아 냈다. 따뜻한 물기가 피부 이곳저곳을 스쳐 지나간다.
“눈곱 끼었네.”
눈 주변을 문지르던 그가 무심하게 읊조렸다. 순간, 은서의 얼굴은 푹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그걸 왜 말해요! 이런 건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센스가 있어야죠!”
악을 바락 쓰자 그는 피식 웃는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였다.
* * *
아침 식사를 할 시간, 차강혁은 자그마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침대 올려 줄게.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
은서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입을 비장하게 앙다물었다. 그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침대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앗…….”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친 허리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온 근육이 뒤틀리면서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은서를 달래 주듯 손을 꼭 잡아 주고, 정수리에 입술을 누르며 ‘조금만 참아.’라고 계속 속삭여 주었다.
적당한 각도로 침대가 올라오자 움직임이 멈췄다. 큰 과제를 치른 것처럼 은서는 깊은숨을 휴, 내쉬었다.
그는 침대와 연결된 테이블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음식이 정갈하게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고 은서에게 수저를 쥐여 주었다.
은서는 식사를 시작했다. 앙증맞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밥이며 반찬이며 국이며, 트레이 위에 있는 모든 음식들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씹어서 먹었다.
밥을 다 해치우자 차강혁은 트레이를 치우고 물티슈로 테이블 위를 깨끗하게 닦았다. 지극히도 평범한 행동인데, 이 평범한 행동을 그가 하고 있으니까 영 낯설고 이상했다.
‘천하의 차강혁이 밥을 치우고 테이블이나 닦고 있다니…….’
왠지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깨끗하게 정리한 테이블 위에 약과 물을 올려놓았다. 은서는 약봉지를 뜯어 알약들을 손바닥에 털어 냈다. 항생제와 진통제 등을 포함하여 총 다섯 알이었다.
은서는 다섯 알의 알약을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고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러자 그가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먹네. 밥도, 약도.”
역시나 황송하다. 고작 이런 일로 칭찬을 듣다니.
“근데, 출근 안 해요?”
은서가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벌써 8시였다.
“좀 이따가.”
그건 얼마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좀 이따가 출근을 하겠다던 그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은서의 곁에 딱 붙어 앉아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
심심찮게 휴대폰을 확인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통화를 하는 걸 보면 바쁜 게 확실한데,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9시 30분쯤, 신 여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신 여사는 그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이제 제가 왔으니 걱정 말고 출근을 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스툴에 계속 앉아서 은서의 곁을 지켰다.
10시 30분경, 담당 의사가 오전 회진을 돌았다.
담당 의사는 은서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수술이 잘되었으니 곧 회복이 될 것이다, 충분히 쉬는 것이 중요하다 등등.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뻔한 설명을 모두 다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옷을 갈아입었다. 네이비색에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슈트를 입은 그는 스타일리시해 보였다.
뭐, 저 남자야 거적때기를 걸쳐도 스타일리시해 보이기야 할 테지만.
“다녀올게.”
그는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가 듣기 좋은 저음의 음성으로 인사했다. 은서도 인사를 하려고 입술을 조그맣게 열었을 때였다.
별안간 그가 입술을 덮쳐 왔다.
“읍……!”
그렇다. 그는 신 여사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해 버린 것이다. 은서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어머나.”
신 여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어설프게 가리고 키드득 웃었다.
쪼옥, 상큼하면서도 질척한 입맞춤 소리가 나고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은서는 얼굴이 열로 화끈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엄마 앞에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그나마 혀를 안 넣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는 매우 뻔뻔한 표정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힐긋 내려다본 다음, 신 여사에게 예의 바르게 묵례를 하고 병실을 떠났다.
“누가 신혼 아니랄까 봐. 은서야, 넌 박력 넘치는 남편 있어서 좋겠다?”
“…….”
“어우, 난 순간적으로 우리 딸 입술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어.”
신 여사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짓궂게 놀렸다.
은서는 이불을 끌어 올려 토마토가 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왜 낯짝 두꺼운 남자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지.
* * *
한가로운 오후 2시, 벨 소리가 울렸다.
은서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차강혁. 연갈색 눈동자에 단번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새 무슨 일이 생겼나?’
오전에 얼굴을 보고 나간 사람이 오후에 전화를 거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부터 들었다.
평범한 부부 같았으면 ‘아,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이 뭐 평범한 부부였던가.
“여보세요?”
-뭐 해?
“그냥 누워 있는데요.”
-그래, 그게 제일 좋아. 침상안정을 취하는 게 회복에 좋다고 했어.
그 후로도 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점심은 먹었는지, 점심 약은 먹었는지, 링거는 잘 맞고 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을 세세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 없는 통화는 저번에 그리스 출장을 떠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부 말해. 퇴근할 때 사 갈게.
“네? 아, 그런 거 없어요.”
속없이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고 하면 공연히 최 실장만 귀찮게 할 거라는 생각에 은서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입가심을 할 수 있는 디저트류가 먹고 싶기는 했지만.
-그럼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연락해.
“네…….”
-일찍 들어갈게.
“그럴 필요 없어요. 천천히 업무 다 보고…….”
-끊는다.
뚝, 전화가 끊겼다. 통화 예절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은서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입가는 배시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지럽다. 겨우 전화 한 통에.
* * *
오후 5시에는 늘 그렇듯이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피임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은서는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며 고민을 하다가 피임약을 먹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다섯 알의 알약을 하루에 세 번씩 복용해야 하는 상황인데, 거기다 피임약까지 먹어 버리면 위장이 뒤틀릴지도 모른다.
‘섹스를 할 것 같지는 않아.’
자신을 묵묵히 케어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며 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쳐서 몸져누워 있는 저를 그가 덮칠 것 같지는 않다고.
뺑소니를 당한 제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하는지,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짐승의 면모를 벗어 던지고 고도로 훈련을 받은 군용견처럼 굴고 있었다.
군견이 갑자기 발정이 나서 덤벼들 리는 없다. 은서는 생각을 그리 정리하고 몸이 다 나을 때까지 피임약 복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 * *
“엄마, 이제 그만 집에 가요. 나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은서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신 여사를 향해 말했다. 오전에 병실로 온 신 여사는 오후 5시 30분이 되었는데도 계속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차 서방 오면 갈게.”
“그 사람이 언제 올 줄 알구요?”
아까 통화를 하면서 그는 ‘일찍 들어갈게.’라고 얘기했지만, 은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냥 다친 제가 안되어 보여서 예의상 하는 말이겠거니 했다.
“엄마, 강혁 씨 취미가 뭔 줄 알아요? 일이에요, 일. 그 사람, 밥 먹듯이 야근하는 남자라구요.”
하지만 은서는 알아야 했다. 차강혁은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사탕발림을 하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구제 못 할 워커홀릭이라 늦게 퇴근하는 게 일상…….”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랍게도 차강혁이었다. 그는 손에 빨간색 튤립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신 여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은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혹스러웠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그는 일보다 자신을 선택했다.
“차 서방, 이제 왔어? 안 그래도 우리 은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언제 기다렸다고! 난 기다린 적 없어요!”
신 여사의 주책맞은 말에 은서가 쇳소리를 내질렀다. 뺨은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었다.
피치핑크색으로 익은 얼굴을 보고 그는 피식 웃더니 튤립 꽃다발을 은서의 가슴에 무심하게 툭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케이크 상자는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차 서방, 은근히 다정하다. 꽃과 케이크라니. 여자들이 딱 좋아할 것만 사 왔네.”
신 여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은서는 꽃도 케이크도 그가 사 온 것이 아니라, 최 실장이 센스를 발휘해서 챙겨 준 것이라고 사실을 알려 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막내 사위를 향한 엄마의 환상을 굳이 깨고 싶지는 않았기에.
“치즈케이크인데, 드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난 이만 가야지. 두 사람 방해하면 안 되니까.”
신 여사는 은서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하고 병실을 떠났다. 방해는 뭐고 윙크는 또 대체 왜 하는 건지. 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찡그렸다.
“케이크 먹을래?”
“저녁 먹고 먹을게요.”
“그래.”
은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저번에 산 쇼콜라 케이크가 너무 달아서 오히려 쌉싸름했다는 감상을 홍 집사로부터 전해 들은 그가, 이번에는 고심하고 고심해서 조금 덜 단 케이크로 준비했다는 것을.
그는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화병에 새빨간 튤립을 꽂았다.
그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던 라넌큘러스를 소파 앞의 커피 테이블로 옮기고, 대신 튤립을 협탁 위에 놓았다. 새빨간 튤립이 은서와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튤립 역시 은서를 위해 그가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색깔도 직접 골랐다. 꽃집 주인은 알록달록하게 다양한 색깔을 섞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오직 빨간색만을 고집했다.
새빨간 튤립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다가왔으므로.
“최 실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꽃도 케이크도.”
은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최 실장이 모든 걸 준비했으리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말투였다.
그는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 * *
저녁을 먹고, 약을 먹고, 그리고 치즈케이크도 야무지게 먹었다. 빵빵하게 속을 채운 은서는 먼발치에 있는 휠체어를 눈으로 가리켰다.
“휠체어 좀 이리로 갖다 주세요.”
“왜?”
“양치하고 세수하려구요.”
차강혁은 휠체어를 침대 앞까지 끌고 왔다. 그런 다음, 은서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서 휠체어에 앉혔다.
“아앗…….”
몸을 움직이자 여지없이 통증이 몰려오며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상을 쓰며 괴로워하는 은서를 달래듯이, 그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정수리에 살포시 키스해 주었다.
앉아 있는 자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앓는 소리가 사라지자, 그는 휠체어를 욕실까지 밀었다. 휠체어는 세면대 앞에서 멈춰 섰다.
“저쪽에는 볼일 없나?”
대뜸 그가 변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에?”
은서의 양 볼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생리적인 현상을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묻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볼장 다 본 사이라고 해도, 난 여잔데.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옷을 잘 벗기잖아. 볼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도록 하지.”
뻔뻔한 낯짝으로 뻔뻔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기막혔다.
“됐거든요! 칫솔이나 내놔요.”
도끼눈을 치켜뜨고 쌀쌀맞게 응수했다. 그는 가볍게 웃더니 칫솔에 치약을 짜서 건네주었다. 은서는 입술을 뚱하게 내밀고서 칫솔질을 했다.
양치를 끝낸 다음에는 세수를 시작했다. 클렌징폼으로 풍성한 거품을 내서 얼굴에 부드럽게 문지르고, 거품을 씻어 내기 위해 손에 미온수를 받아서 얼굴에 끼얹었다.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자세가 세면대와 각도가 맞지 않는 것인지, 환자복이 자꾸 물에 젖는 것이었다.
“내가 해 줄게.”
옆에서 보다 못한 그가 나섰다.
“고개 숙여 봐.”
그는 은서의 뒷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살짝 숙이게 만들었다. 그 상태로 커다란 손에 물을 받아서 얼굴에 남은 거품을 쓱쓱 씻겨 냈다.
깨끗하게 세안을 시킨 그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머리도 감을래?”
“머리요?”
찝찝해서 감고 싶기는 한데 이 남자에게 자꾸 번거로운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다. 은서가 어물거리며 확답을 망설이자 그가 선수를 쳤다.
“휠체어 돌린다.”
휠체어가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귀찮은 일을 굳이 나서서 하려는 모양이다.
“고개를 뒤로 젖혀 봐.”
그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자 척추 선을 타고 또 통증이 몰려왔다. 은서는 야트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그는 은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만져 주었다. 그 손길 덕분인지, 몸은 금세 자세에 적응했고 통증도 미미해졌다.
“이제 감길게.”
그는 샤워기를 빼서 미지근한 물을 틀었다.
긴 머리카락이 차츰 물에 젖어 들어간다. 머리칼이 충분히 물에 적셔지자, 그는 샴푸로 거품을 내서 손끝으로 두피를 정성스럽게 문질렀다.
은서는 욕실 조명이 눈이 부셔서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은 탓에 그의 손길은 더욱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묘하다. 차강혁이 내 머리를 다 감겨 주다니. 예측불허의 교통사고로 인해 예측불허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샴푸질이 끝나고 그는 다시 샤워기를 빼 들었다. 솜사탕처럼 올라온 거품을 물로 깨끗하게 씻겨 낸다.
“다 했어.”
그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감싸 주고 휠체어를 끌었다. 휠체어는 침대 앞에서 멈췄다. 그는 아까처럼 은서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혔다.
“옷 갈아입혀 줄게.”
그가 새 환자복을 꺼내 와서 말했다. 은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입을게요.”
그러나 그는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듯이 무작정 단추를 풀어헤쳤다.
“내가 한다니까요!”
“얌전히 있어. 완력을 행사하고 싶진 않으니까.”
나직하지만 위력감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눈빛은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아무리 차강혁이 온순해졌다고 한들 짐승의 기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 강렬하고 압도적인 아우라는 언제나 그의 몸 전체에 흘러넘쳐서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든다.
은서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별수 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 옷을 벗기고 제멋대로 옷을 입혔다. 그다음엔 또 제멋대로 로션을 털어서 은서의 얼굴에다 펴 바르기 시작했다.
“이런 건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말이 많군.”
“자꾸 말을 하게 만들잖아요.”
자기 얼굴에 스킨을 바를 때는 세상 투박하게 손바닥으로 퍽퍽 두드리고 말더니, 은서의 얼굴에는 제법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션을 꼼꼼하게 발라 준다.
널을 뛰는 것처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그 모습에 은서는 괜히 또 마음이 설레었다.
로션을 다 바른 그는 이제 젖은 머리에서 수건을 걷어 내고 헤어드라이어를 집어 들었다. 은서가 ‘설마?’ 하는 순간, 위이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더운 바람이 젖은 머리칼로 날아들었다.
‘세상에. 하다 하다 이제는 머리까지 말려 주는구나…….’
차강혁은 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엮어 넣으며 두피와 머리칼을 섬세하게 말리기 시작했다.
은서는 꺼벙한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느꼈다. 워낙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다.
머리칼이 다 마르자 그는 헤어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다 끝났나, 하고 생각했을 때 그는 빗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엉킨 머리칼을 곱게 빗겨 내려갔다.
‘미쳤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차강혁이 내 머리를 빗겨 주고 있다니…….’
기대치도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개꿈을 꿔도 이보다는 덜 황당할 거다.
“이제 눕지.”
“네…….”
은서는 혼미한 정신에 사로잡힌 채로 침대에 누웠다. 그가 베개를 똑바로 받쳐 주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환상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왜 이렇게 잘해 주지? 왜 이렇게 다정한 거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차강혁이 다 해 주었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정리해 주는 등등, 먼지처럼 사소한 일들이 모두 그의 손안에서 이루어졌다.
「하긴, 넌 스스로 하는 게 없지. 너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야.」
불현듯 언젠가 그가 냉정하게 뱉어 냈던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었다. 나는 스스로 하는 게 없다고.
어쩌면, 이 황송한 대접 뒤에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고를 당한 내가 불쌍해서 챙겨 주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내심 나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몰라.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를 엄청 귀찮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도 아니면서 어린애처럼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수동적으로 그에게 기대고, 그에게 챙김을 받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무래도 이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제 모습은 엄살이나 부리는 철없는 응석받이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강혁 씨, 애쓰지 말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은서가 입술을 움직였다.
“보다시피 난 괜찮아요. 허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고, 오른쪽 다리를 못 쓰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 내공을 충분히 쌓아 둬서 목발도 잘 짚고 휠체어 사용도 능숙해요.”
그녀는 조곤조곤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강혁 씨가 나를 일일이 챙겨 줄 필요는 없어요. 병원에서 지낼 필요도 없구요. 이만 집으로 돌아가요. 가끔…… 병문안이나 와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데.”
그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저의 같은 거 없어요. 그냥 나는 강혁 씨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민폐라고?”
그의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예전에 강혁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죠? 난 스스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건지 모르겠군. 그때, 감정이 상해 있었잖아. 홧김에 한 말이라고.”
“홧김에 한 말이든 어쨌든, 그건 사실이에요. 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그리고 언니들에게 기대서 살았어요.”
은서는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왜 나를 차강혁 씨와 결혼시켰는지 알아요? 당신이 강해 보이기 때문이에요.”
“…….”
“언니들은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부모님도 나이를 먹어 가니까, 당신에게 나를 맡기려는 생각이었죠.”
“…….”
“차강혁 씨가 내 버팀목이 되기를 원했어요.”
“…….”
“근데, 우리…… 그렇게 살지 말죠.”
“…….”
“당신은 나한테서 이상한 책임감 같은 거 갖지 말고, 나는 당신에게 나약하게 기대지 말고.”
“…….”
“원하지 않았던 결혼이었잖아요. 당신에게 부담 주기 싫어요. 민폐 끼치기도 싫고. 그리고 나도 독립적으로 사는 삶을 배울 필요가 있구요.”
“최근에 들은 헛소리 중 최고군.”
조용히 듣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독립? 그딴 거 개나 주라고 해.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을 챙길 거야. 내가 유은서 너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전부 다 내가 할 거라고.”
“대체 왜…….”
“내 아내니까.”
밤하늘을 풀어놓은 듯한 까만 눈동자가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그는 오직 은서만을 눈동자에 담은 채로 확고하게 말했다.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서.
“유은서, 넌 내 아내야.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지. 그러니 부담이니 민폐니 그딴 말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마. 듣는 남편, 기분 나쁘거든.”
너무도 완고하게 말해서 은서는 더 이상 무어라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은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상체를 비스듬히 숙여 간격을 바짝 좁힌다. 더운 숨결이 콧잔등 위로 닿는 순간, 그는 정확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운명처럼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나의 남편이고 나는 그의 아내라는 단순한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숨 막히는 키스를 퍼붓고 또 퍼부어 댔다.
* * *
더위가 한풀 꺾였다.
계절은 여름으로부터 조금씩 달아나려 하고 있었지만 승아의 일상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어젯밤에도 술로 달린 승아는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기상했다.
잠에서 깨기는 했지만 이불을 박차고 나오지는 않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졸린 눈을 의미 없이 깜박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뿐이다.
“오빠는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그 여자가 유산해서 상처받았을까?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차강혁의 심리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상처는 그 여자가 받았겠지. 아이를 잃은 비극에 가슴이 저며지는 고통을 실감하며 넋이 빠져서 울고 또 울고 있겠지.
걸핏하면 펑펑 울어 대는 여자를 그는 세상 귀찮게 여기며 질색하고 있을 것이다.
“오빠는 우는 여자를 엄청 싫어하니까.”
제가 그 앞에서 울었을 때 얼마나 짜증스럽고 성가신 표정을 지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완전히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유은서, 넌 이제 끝났어. 오빠한테서 영영 아웃이라고.”
승아는 입꼬리를 의기양양하게 말아 올렸다.
“조만간 오빠가 나를 찾아올 거야.”
유산 때문에 허구한 날 슬픔에 빠져 있는 여자를 곁에서 지켜보는 건 곤욕일 테지. 그 여자한테 질릴 대로 질린 차강혁은 머지않아 나를 다시 찾으리라.
그럼 우린 그 여자 몰래 스릴 넘치는 불륜과 밀애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다 이혼까지 하면 금상첨화고.”
낙관적인 상상으로 상념을 매듭지은 승아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킬링 타임을 보냈다.
말 많고 시끄러운 연예 뉴스란을 훑어본다. 누군가는 열애를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도박을 했고, 누군가는 성매매를 했단다.
그러다 동료 모델 K의 기사를 발견하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K가 올 하반기에 방영될 공중파 미니시리즈의 서브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뭐야. 얘는 무슨 빽으로 드라마에 꽂힌 건데?”
마음 깊은 곳에서 열등감이 용솟음쳤다.
작년까지만 해도 K는 승아와 비슷한 위치에 속한 유망주 모델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체 언제 공중파 드라마에 나올 만큼 뜬 건지…….
“스폰이라도 잡은 거야?”
열등감에 취한 승아는 수준 낮은 말을 되는대로 지껄였다.
K의 순수한 능력으로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야 본인의 처지가 그나마 덜 초라해지니까.
안면을 볼썽사납게 일그러뜨린 승아는 긴 손톱으로 키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이 개듣보는 누군데 드라마에 나오는 거임? 공중파도 다 죽었네!]
악플을 툭 던져 놓은 승아는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옷을 몇 벌 샀다. 그러다 별자리 운세도 읽었다.
[길운이 내리는 날. 모든 일들이 그대의 뜻대로 풀리리라.]
길운? 밖에 나가서 복권이라도 살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벨 소리가 울렸다. 주영이었다. 길운이 내린다는 운세의 내용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영은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승아야, 너 예능에 관심 있니?
“예능이요?”
-응. 요즘 우리 에이전시에서 모델들 방송 쪽으로 많이 돌리고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아는 PD가 케이블에서 짝짓기 프로그램 준비 중이라는데, 남자들은 아이돌이나 배우로 채우고, 여자들은 모델이나 인스타그래머 같은 뉴페이스로 채울 계획이래. 그래서 내가 네 이야기 하니까 PD가 만나 보고 싶다네? 어때? 생각 있어?
뜻밖의 제안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가열하게 내달렸다.
예능이라니! 예능을 통해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스타가 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럼 나도 K처럼 드라마도 찍고, 드라마가 대박 터지면 한류 스타도 될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 있죠. 불러만 준다면 어디든 다 나갈 수 있어요!”
승아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모델 일도 좋지만 승아는 무엇보다도 유명세를 얻고 싶어 했다. 일단 유명해져야 돈을 싹쓸이 끌어모을 테니.
-그래. 나중에 미팅 일정 잡히면 그때 또 연락 줄게. 준비 잘해라.
전화를 끊고 승아는 꺄악, 괴성을 내질렀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린아이처럼 방방 뛴다. 스타가 되리라는 희망찬 기대감에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TV에 나오려면 몸매 관리 잘해 놔야 돼. TV는 실제보다 더 뚱뚱하게 나오니까.”
출연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겨우 담당 PD와의 미팅 자격만을 얻은 것뿐이었지만, 승아는 벌써부터 프로그램 출연이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승아는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 숨 가쁘게 달리기를 하고, 사이클을 미친 듯이 타며 땀을 쏙 뺐다. 90분가량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역시 한국은 내 진가를 알아준다니까.”
온몸에 거품을 칠하며 승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잔뜩 신이 난 상태로 설레발을 치며 샤워를 한 후에 욕실에서 나왔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내고 체중계에 올라가 체중을 체크했다. 50.7kg이다.
“48kg까지는 빼야 돼.”
178cm라는 키를 감안하면 지금도 삐쩍 마른 수준이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면 이보다 더 마르고 더 늘씬해야 했다.
승아는 주린 배에 영양제만 밀어 넣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가 한 통 찍혀 있었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쩌억 벌어졌다.
“드디어 오빠한테서 연락이 왔어!”
승아는 귀청이 떨어질 만큼 크게 환호성을 쳤다.
“그 별자리 운세, 되게 용하네.”
확실히 오늘은 운수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었다. 운이 트여도 이렇게도 잘 트일 수가. 일과 사랑을 동시에 다 잡다니!
승아는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사람을 매몰차게 밀어내기만 하더니, 이제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래?’라고 자못 도도하게 내용을 입력했다가,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미련 없이 지워 버렸다.
괜히 틱틱거리고 쏘아붙이면서 차강혁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평소처럼 그를 대해서, 그의 안식처는 바로 내 곁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식시켜 주어야 했다.
승아는 무난한 내용의 메시지를 발송했다.
[오빠, 전화했네. 샤워 중이라 못 받았어.]
[어딘데.]
답장이 상당히 빨랐다. 신속한 반응 속도에 승아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과하게 웃었다. 아닌 척하면서 그동안 내가 무진장 보고 싶었나 봐.
[집에 있지. 왜?]
[주소 찍어.]
[오려고?]
[그래.]
굉장히 적극적인걸. 친히 여기까지 오겠다니. 역시 그때 그 여자를 차로 밀어 버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뺑소니 사고 하나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으니.
[갑작스럽긴 한데 오빠가 온다니까 좋긴 좋네. 샤워하길 잘했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뉴베르 오피스텔 1805호야.]
[15분 안에 도착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예쁘게 하고 있을게. 빨리 와.]
메시지를 마무리 지은 승아는 잽싸게 화장대 앞으로 뛰어가 앉았다. 그가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쁘고 화려하게 꾸며야지.
* * *
정확히 15분 뒤, 차강혁이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그러나 승아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최 실장을 뒤에 달고 온 것이다.
문득, 그와 처음으로 엔조이 관계를 시작했을 때가 기억났다.
그때도 그는 최 실장을 데리고 왔었다. 이 얄팍한 관계를 그 누구에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면서.
“아, 오빠……. 오랜만이야.”
승아는 당황해하며 우물쭈물 인사를 건넸다.
상상했던 것과는 그림이 아주 많이 달랐다. 차강혁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감격에 벅차오른 얼굴을 할 줄 알았는데.
“근데 혼자서 안 오고, 왜…….”
검은 눈빛이 화살처럼 꽂혀 들었다. 사람을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 만큼 차가운 눈빛은 독화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가 단둘이서 만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의 목소리에서도 한기가 쌩쌩했다. 승아가 기대한 그리움에 사무친 남자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