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30)

17.

* * *

엘리엇이 그랬던가. 봄은 잔인한 계절이라고. 하지만 은서에게 있어 가장 잔인한 계절은 바로 여름이었다.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은서는 일절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가끔씩 가던 스튜디오에도 발길을 뚝 끊었다. 그저 침실에만 틀어박혀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서 지낼 뿐이었다.

그리고 차강혁은 침실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은서는 그가 출근을 하는지 퇴근을 하는지도 몰랐다.

과연 그가 집에 들어오기는 하는 건지, 아니면 온종일 회사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어딘가로 출장을 홀연히 떠난 건 아닌지, 그의 일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더럽고 지저분한 육체적 행위가 사라지자 자연히 그와의 소통도 끊긴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정오를 가리켰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홍 집사였다.

“사모님,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은서는 한숨을 쉬고 무기력한 몸을 겨우 일으켜 앉혔다. 밥을 먹는 게 세상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차강혁 덕분에 알았다. 대단하긴 대단한 남자다.

침대 위로 베드 트레이가 올라왔다. 트레이 위에는 갖가지 음식들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오곡밥과 노릇노릇하게 구운 김,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로 구성된 삼색 나물 무침, 장조림, 굴비구이, 잡채, 전복전, 창난젓, 백김치와 말간 바지락 된장국.

먹음직스럽게 조리된 음식들은 한눈에 봐도 영양분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 사람…… 내가 굶으면, 아직도 화낼까요?”

은서는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사모님 끼니 거르시면 제가 아주 크게 혼이 나죠. 요즘도 매일 저한테 사모님 식사는 잘 하셨는지 꼬박꼬박 확인하시는걸요.”

“…….”

“허약해지신 몸이 좀처럼 낫지를 않는다고, 얼마 전에는 영양사까지 고용하셨어요.”

기막힌 소리였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뒤에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잘도 꾸미다니.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사고방식이 정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이런 몹쓸 남자에겐 애당초 빠져드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마음이 동하는 걸까. 안 그런 척하면서 나를 은근히 챙기는 듯한 그의 행동에 설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사모님, 드세요. 잘 드시고 어서 기운 차리셔야죠.”

홍 집사가 수저를 쥐어다 주었다. 은서는 수저를 들고 오곡밥을 살짝 휘적거려 보았다.

“오곡밥인데 콩이 없네요.”

찰진 찹쌀밥 사이로 수수도 있고 좁쌀도 있고 붉은 팥도 있는데, 검은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밤이 들어있었다.

“네. 사장님께서 사모님 콩 싫어하신다고, 식사에 내지 말라고 지시하셨어요.”

“…….”

괜히 울컥했다. 심장을 죄어 오는 듯이 속이 답답해져서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더니, 홍 집사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사모님, 어디 불편하세요?”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상하다. 이런 건 너무 싫다.

사냥개처럼 나를 갈가리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들 땐 언제고, 뒤에서는 모래알처럼 사소한 사실을 기억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자상함을 부리다니.

차강혁이 나쁘기만 했더라면 마음을 버리는 것이 훨씬 쉬웠을 테다.

하지만 그는 늘 예측불허다.

화를 낼 것 같을 땐 불같은 키스를 해 버리고, 때릴 것 같았을 때는 숨 막히도록 안아 버린다. 나를 울려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도, 내가 정말 슬프게 울 때는 도리어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 준다.

못생겼다면서 예쁘다고 하고, 나를 잔인하게 괴롭히면서도 정작 내가 위험에 처하면 운명처럼 나타난다.

“아파요…….”

은서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너무, 너무 아파요…….”

왜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 왜 심장이 무너질 것만 같은 걸까.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이제는 이 빌어먹을 미로 속을 그만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오히려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만다.

그리고 이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어이없게도 차강혁이었다.

나를 미로에 가둬 버린 남자가 바로 차강혁인데, 모순적이게도 나를 미로에서 구해내 줄 남자 또한 차강혁일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 * *

오후 2시,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사장실의 넓은 채광창을 그대로 통과해 들어와 더위를 부추기고 있었지만, 강혁은 블라인드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시간을 허투루 버리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간을 의미 없이 허비하며 상념에 잠겨 있게 되었다. 비정하기만 하던 그의 마음속이 누군가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고, 그는 깊은 고뇌에 잠겨 들게 되었다.

수렁과도 같은 고뇌의 시간 속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프렌치 도어가 열리고 최 실장이 들어왔다.

“사장님, 덥지 않으십니까.”

여름 햇빛으로 가득한 사장실을 보고 최 실장이 의아한 투로 말했다. 강혁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최 실장은 알아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그늘을 만들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최 실장이 까만 파일을 건넸다.

“나중에 하지.”

그제야 입을 연 강혁은 까만 파일을 책상 한쪽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러자 최 실장이 결재 파일을 집어 들고 다시 내밀었다.

“긴급한 건이라 지금 바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파일을 열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은 늘 정적이고 무거운 고독감이 흐르는 곳이었지만, 요즘처럼 그 무거운 분위기가 숨 막히도록 심했던 적도 없었다.

만년필 촉이 종이에 닿아 쓱쓱 긁는 소리가 났다. 서명을 마친 그는 파일을 최 실장에게 넘겨 주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은색의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담배 끝이 타들어 가면서 잿빛의 재가 만들어지고, 희미한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최 실장은 공손하게 묵례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일곱 발자국쯤 걸었을 때,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단단한 표정을 짓고 방향을 바꿔서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와 섰다.

“사장님,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의 낯빛은 요즘 계속 어둡기만 했다.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새벽에 기상을 하고 밤에 퇴근을 하면, 러닝머신 위를 숨통이 끊어져라 달리고는 했다.

거의 학대에 가까운 생활에 그의 얼굴은 부쩍 야위기까지 했다.

“그냥 술래잡기에 지쳐서 그래.”

뿌연 연기를 뱉어 낸 그가 천천히 말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힘없이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처음에는 쉬워 보였어. 내가 손을 뻗으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더군.”

“…….”

“그래서 손을 뻗었더니 도망가더란 말이야.”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짓고 회색빛 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담배를 물어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자꾸 뒷걸음질 치고 도망치려고만 하기에 난 악착같이 달려들었어. 내 손안에 넣으려고, 그 여자를 어떻게든 가지려고 발악하고 또 발악했지.”

“…….”

“그런데도 안 돼. 내가 좋다면서…… 나를 자꾸 밀어내려고만 해.”

“…….”

“진짜 이상한 여자야…….”

지독한 고뇌의 중심에는 유은서가 있었다.

천하의 차강혁이 여자 때문에 속앓이를 하다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인생은 성공과 실패라는 이진법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그 단순한 인생에 여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은서가 그의 인생에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성공을 열망하던 남자가 이제는 한 여자를 애타게 열망하게 된 것이다.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자행하고, 여태껏 굳건하게 지켜 왔던 이성의 벽을 무너뜨렸다.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인간이길 포기하고 짐승이 되었다.

그 여자 하나가 미친 듯이 갖고 싶어서…….

“쟁취하고 차지하려고만 하시니까요.”

최 실장은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주제넘게 조언을 드리자면, 사장님 방법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짧게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끈 그가 최 실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행을 붙이지 마시고 그냥 믿어 주세요. 이건 술래잡기 같은 게임이 아닙니다. 잡으려고 몰아붙이지 마시고, 그냥 나한테 와 달라고 마음을 열어 주세요.”

최 실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긴 호흡을 내쉰 다음에 다시 말을 이었다.

“사모님께 사랑한다고…… 진심을 전해 주세요.”

“사랑?”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반문했다. 어조가 시니컬했다.

“회장님도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더군. 그런데…….”

“…….”

“이렇게 추악한 욕망도 사랑일까?”

“…….”

“나는 잘 모르겠어.”

그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안개처럼 뿌연 연기가 그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안개 속에 갇혀 버린 그의 진실된 마음을.

* * *

최 실장은 빌딩의 옥상 문을 열었다.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장신의 키에 넓게 벌어진 어깨가 제가 모시는 보스와 퍽 닮아 있었다.

남자는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서서 도심의 빌딩 숲을 관망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하얀 연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최 실장은 인기척도 없이 그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서서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차 팀장님, 금연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 깜짝이야!”

장초를 손에 끼우고 있던 윤혁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최 실장님, 축지법이라도 썼습니까? 사람이 걸어오는데 무슨 발소리도 없어.”

불평스럽게 투덜거리는 윤혁을 향해 최 실장은 가볍게 웃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칙,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뱉으며 다시 말했다.

“금연에 실패한 사실을 여자 친구분이 아신다면 꽤나 실망하시겠네요.”

“실패라뇨. 딱 두 모금밖에 안 했는데.”

윤혁은 최 실장의 얼굴 앞으로 보란 듯이 장초를 들어 보였다.

“어쨌든 피우신 거 아닙니까.”

“나도 사람이라 실수를 할 때가 있다고요. 다이어터가 치킨을 시켜 먹을 때처럼.”

스스로를 변호하던 윤혁은 얼굴에 고민하던 빛을 비추더니 이내 장초를 바닥에 과감하게 버리고 구둣발로 비벼 껐다. 아쉬웠지만 여기서 이만 멈춰야 했다.

“형은 좀 어때요?”

“혼란스러워하시죠. 소유욕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그게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시네요.”

“하긴.”

윤혁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형, 여태까지 그런 심오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거예요. 본인이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차강혁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건 생산적이지 못한 일, 전혀 의미가 없는 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일, 효율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여자를 봐도 가볍게 스쳐 지나갈 상대로나 봤지, 진심을 다해서 대한 적은 없었다. 그의 심장은 늘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웬 여자가 불쑥 나타나 빙벽처럼 차갑던 그의 심장을 녹여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여자는 그를 약하게 만들었고, 그를 눈멀게 만들었고, 그를 불순한 소유욕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그는 난폭한 폭력을 휘둘렀고, 온갖 기구들로 그녀를 옭아맸으며, 심지어 미행까지 붙였다.

너무나도 추하고, 불순하고, 지저분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 추악한 욕망 또한 결국에는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인정하기 싫거나.

“요즘 사모님과 사이가 계속 좋지 않으신데…… 어쩌면 좋을까요?”

최 실장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걱정 섞인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을 어디 가둬 놓고 진실 게임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은 지켜봐야겠죠.”

희뿌연 연기 사이로 윤혁의 한숨 소리가 스며들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변한 건 없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고, 부부간의 의사소통은 제로였다.

밤의 어둠을 헤쳐 나가는 팬텀의 뒷좌석에 앉은 강혁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달리는 차 안에서도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알차게 활용했겠지만, 요즘에는 그럴 여력이 나지 않았다.

의미 없이 창밖을 응시하며 그는 아침에 홍 집사가 조심스레 전한 말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사모님께서 입맛이 전혀 돌지 않으시나 봐요. 어떤 음식을 내놓아도 맛이 없다며 깨작거리다가 금방 수저를 내려놓으세요.」

홍 집사는 심려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신 듯해서 보양식도 여러 번 해서 올렸는데, 영 신통치가 않네요.」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가 아팠다.

엄마들은 애가 조금이라도 먹지 못하면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을 한다던데, 제가 딱 그 꼴이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서 마음이 잿더미로만 수북하게 쌓여 있는 듯하다. 가슴이 자꾸 욱신거린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자존심이 상하는 건 둘째 치고, 일상생활이 아예 되지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집중도 안 되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머리는 언제나 유은서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언젠가 유은서가 그랬었지. 제 두뇌는 일과 섹스로 단순하게 양분되어 있다고. 유감스럽지만 그녀가 틀렸다. 요즘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유은서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묵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그때, 웬 디저트 가게가 시야로 크게 들어왔다. 귀여운 폰트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간판이 어째서인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잠깐 멈추지.”

그는 홀린 듯이 말했다. 낮게 울려오는 말소리에 윤 기사가 차를 세우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기다리고 있어.”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린 그는 디저트 가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리문을 열자 달콤한 풍미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해 왔다.

‘살다 보니 이런 곳에도 다 오는군.’

그는 고개를 살짝 내젓고 진열장 앞에 섰다.

세련된 네이비 컬러의 슈트를 멀끔하게 차려입은 훤칠한 남자의 등장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흘긋거렸다. 그의 조각 같은 외모는 눈이 부실 만큼 수려해서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는 했다.

그는 진열장 안에 늘어서 있는 가지각색의 디저트들을 신중한 눈길로 들여다보았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대체 뭘 먹여야 좋을까. 제일 맛있고 제일 달달한 걸로 가져다주고 싶은데.’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한 표정으로 진열장만 들여다보고 있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도와드릴까요?”

“여자들은…… 어떤 걸 좋아합니까.”

건조한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흔하고 흔해 빠진 질문이었지만, 그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해 보는 질문이었다.

* * *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하지만 은서의 일상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오늘 그녀는 침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아침과 점심을 먹었고, 무료한 오후를 시체처럼 누워서 멍청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지루한 정적 속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뇌리에서 물음표가 만개했다. 노크 소리가 울릴 시간이 아닌데.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3시밖에 되지 않았다.

“사모님, 들어갈게요.”

홍 집사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에 걸쳐졌고 곧 침실 문이 열렸다.

은서는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홍 집사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베드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총총 걸어온 홍 집사는 트레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트레이 위에는 일명 데블스 케이크라고 불리는 꾸덕꾸덕한 쇼콜라 케이크 한 조각과 하얀 우유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요, 간식이죠. 어젯밤에 사장님께서 갖다 주셨어요. 사모님 드시라고요.”

홍 집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은서에게 포크를 쥐여 주었다.

‘그 남자가 이걸……? 스위트한 디저트와는 수천 광년의 거리를 두고 있는 남자가 이 달달한 케이크를 손수 사 왔다는 말이야?’

묘한 의문이 가슴속을 마구 파고들었다.

그러나 곧장 그가 직접 산 것 아니라 누군가에서 받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남자에게 소소한 선물을 챙겨 주는 사람들이야 차고 넘치니, 이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고작 나한테 먹이겠다고, 귀한 발걸음으로 이런 디저트를 직접 살 위인은 아니지.’

은서는 입속이 깔깔해서 별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홍 집사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떠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짙은 초콜릿 향이 입안에서 확 번져 나간다. 촉촉하면서도 진득한 질감이 혀끝에서 녹아들었다. 달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달아서 오히려 씁쓸했다.

* * *

늦은 저녁, 소개팅을 대차게 말아먹고 집으로 귀가한 승아는 오피스텔로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가동시켰다.

숨을 씨근덕거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소개팅 상대마저 뭣 같아서 더 더웠다.

“뭔 죄다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만 걸리는 건지!”

노한 목소리가 집 안의 공기를 쟁쟁하게 가른다.

오늘 소개팅에 나온 놈은 주제도 모르고 남한테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제 차림새를 훑어보고 한다는 말이 ‘그 나잇대는 그냥 보세만 입어도 예쁠 텐데, 전부 다 명품이시네요.’였다.

그러고는 또 ‘어릴 때 돈 관리 잘하세요.’라며 훈수를 두는데, 그 개떡 같은 면상에 물을 퍼붓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거기다 돈은 또 어찌나 아끼는지.

대기업에 다닌다고 해서 돈 좀 쓸 거라고 기대했건만, 저녁 먹으러 데리고 간 곳은 대학생들이나 갈 법한 메뉴 하나에 15,000원꼴인 캐주얼한 비스트로였고, 차도 없는 뚜벅이라 버스정류장에서 인사하고 헤어졌다.

“찌질한 새끼.”

승아는 욕설을 게워 냈다.

차강혁을 되찾을 때까지 허한 마음을 달래 보고자 이놈 저놈을 만나 보고는 있는데, 마음의 위안을 얻기는커녕 번번이 거지 같은 놈들만 걸려서 도리어 정신 건강을 위협받고 있었다.

클럽에서 건진 놈은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서 봤을 때는 얼굴이 제법 반반했는데, 막상 밖에서 보니까 성형한 티가 너무 심하게 났다.

인위적인 쌍꺼풀에 분필을 넣은 듯한 콧대, 그리고 턱은 어찌나 심하게 깎았던지. 자연 미남을 밝히는 승아의 취향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남자였다.

헌팅 포차에서 술 마시다가 합석한 놈은 와꾸가 나름대로 봐 줄 만한 모델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호스트바에서 일하며 사모님들 등쳐 먹고 다니는 양아치였다.

친목 모임에서는 허우대 좋은 농구 선수를 만나 침대까지 돌진했는데, 막상 바지를 벗겨 보니 시원시원한 허우대와 달리 그곳은 너무나도 옹졸해서 성욕이 푸시식 식어 버렸다.

남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차강혁과 비교가 되면서 새삼 그의 진가를 깨닫게 된다.

얘는 대체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차강혁은 존나 잘생겨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삶의 의미를 찾은 기분인데.

얜 뭔데 돈이 이렇게 없지? 차강혁은 카드도 척척 잘 던져 주는데.

얘는 뭘 먹고 자랐길래 키가 이렇게 작은 걸까? 차강혁은 178cm인 나를 아담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데.

얜 뭔데 남자로서 섹시함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거지? 차강혁은 온몸 전체에 섹시미가 흘러넘쳐서 보고만 있어도 뱃속이 아찔아찔해지는데.

변변찮은 남자들 때문에 괜히 차강혁만 더 보고 싶어지기 일쑤였다. 그리움이 날로 심화되는 것이다.

“아오, 염병 같아서 진짜!”

승아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천장을 멀거니 바라본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 은서, 재미있는데. 그 여자, 내 아내야. 함부로 지껄이지 마.」

단호하기만 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물결쳤다. 우리 은서, 내 아내라니. 차강혁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는 언제나 여자들을 놀잇감 취급했다. 여자를 그런 식으로 다정하게 칭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나? 무슨 연유 때문에 그렇게 변한 걸까? 혹시, 그 여자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야?’

그를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자초지종을 묻고 싶지만, 유 회장에게 받은 돈이 걸려 있어서 선뜻 접근할 수도 없었다.

승아는 갑갑한 마음에 되는대로 인터넷 검색 엔진에다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방대한 자료들이 나온다.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기사 사진들부터 해서 사업과 관련된 보도 자료들, 그의 사업 스타일을 분석하는 칼럼들, 수많은 언론들과 인터뷰한 내용들, 게다가 온갖 커뮤니티에서 그에 관해 떠드는 이야기들까지.

많고 많은 자료들 중에 승아는 그가 최근 경제지와 인터뷰한 기사를 클릭했다.

눈빛을 반짝 빛내고 인터뷰 내용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사업에 관한 내용만 잔뜩 있었고 사적인 내용은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승아는 페이지를 계속 넘겨 가며 무언가 건질 만한 게 없는지 찾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올봄에 유은서의 개인전에 참석했다는 기사 사진을 보게 되었다.

전시회장을 배경으로, 고전적인 스타일의 슈트를 차려입은 그가 은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승아의 눈에서 화약 불이 번뜩거렸다.

“내 쇼에는 오지도 않았으면서!”

사자후에 버금가는 괴성이 오피스텔 벽을 둥둥 때렸다.

승아는 예전 일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작년 여름,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윤주선의 쇼에 서게 될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승아는 온갖 애교를 부리며 그에게 쇼에 참석을 해 달라고 애걸했었다.

「오빠아, 나 윤주선 쇼에 서게 됐는데 바쁘겠지만 와 주면 안 될까? 나한테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이거든. 첫 줄에 앉아서 내가 워킹하는 모습 꼭 봐 줬으면 좋겠어. 보러 와, 응?」

「내가 그걸 왜 봐야 하는데?」

혀 짧은 소리와 콧소리까지 동원해 가면서 매달렸으나 돌아오는 건 칼 같은 거절이었다. 그런 남자였다. 인정머리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남자.

그런데 그 냉정한 남자가 저딴 시시한 전시회에는 참석했다니…….

“이거 완전 여우 아냐?”

유은서, 곰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백 년 묵은 여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차강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하긴, 그년 아빠가 천년 묵은 매구였으니 무리도 아니지.”

앞으로는 순진한 얼굴, 뒤로는 온갖 여우 짓을 해 가며 차강혁을 구워삶았겠지.

“그년이 분명 무슨 짓을 한 거야.”

승아는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이번에는 검색 엔진에 ‘유은서’를 입력했다.

“어떤 년인지 이참에 제대로 파악해야겠어.”

페이지를 쓱쓱 넘기던 승아는 웬 맘 카페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기묘한 글을 접했다. 얼마 전에 작성된 글이었다.

[저 오늘 누구 만났는지 아세요?]

승아는 글 내용을 자세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은서 작가님이라고, 그림 관심 있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미술 영재들한테 재능기부도 하시고, 명품 브랜드랑 콜라보도 여러 번 하신 화가분이세요. 오늘 산부인과에 정기검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딱 마주쳐서 깜짝 놀란 거 있죠!]

산부인과?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심박수가 조급하게 상승한다. 승아는 스크롤을 끌어 내리며 댓글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분 알아요! Y기업 딸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저번에 아이들 데리고 전시회도 다녀왔어요. 금수저라 선입견 갖고 있었는데 그림 좋더라구요.]

[작년에 결혼했다는 기사 봤는데 벌써 임신했나 보네요.]

‘임신’이라는 단어에 승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서 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복도 많아요. 잘난 남편 채 가서 임신도 바로바로 되고. 전 첫애 가지는데 3년도 넘게 걸렸는데.]

[맞아요. 남편이 진짜 잘생겼잖아요. 결혼식 사진 풀린 거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요즘 잘나간다는 배우들 명함도 못 내밀 만큼 멋지더라구요.]

[미남 남편에 임신까지 초고속. 완전 부러워요.]

[남편이 다들 잘생겼다고 해서 방금 사진 찾아보고 왔는데, 얼굴 장난 아니네요. 내 남편은 오징어인데…….]

댓글 내용들은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임신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오잉? 왜 다들 임신이라고 확신하세요? 여자들이 임신해야만 산부인과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진료 받으러 갔을 수도 있죠. 산부인과에 갔다고 임신이라고 단정 짓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댓글을 본 승아는 흐트러진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래, 맞아. 임신은 무슨! 여자들이 산부인과에 가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냥 몸이 안 좋은가 보지.’

긍정적인 기운으로 정신을 환기시킨 승아는 이어지는 댓글을 읽었다. 원글 작성자가 입력한 댓글이었다.

[임신 맞을걸요? 입덧하는 거 봤거든요. 실은 사인 받으려고 다가갔는데, 작가님이 갑자기 구역질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바람에 사인 못 받았어요.]

입덧? 입덧이라고? 확인 사살을 당한 승아의 마음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제는 손이 아니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임신을 했다고? 그 여자가…… 우리 강혁 오빠의 아기를 가졌다는 말이야?”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진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납득할 수 없었다. 아이라고는 세상 관심도 없던 남자였다. 예전에 확실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에 대한 그의 관점을.

「오빠, 오빠는 이다음에 결혼하면 아들 낳고 싶어, 딸 낳고 싶어?」

「안 낳아.」

「왜?」

「관심 없어.」

실로 차강혁스러운 반응이라 승아는 ‘맞아. 오빠가 아빠가 된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돼.’라며 샐샐 웃어넘겼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어떻게 이리도 쉽게 그 여자를 임신시킬 수가 있어?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가 그렇게 잘났어? 그 여자가 그렇게 특별해? 나는 그럴 꿈조차 못 꿨는데…….”

승아는 가끔씩 차강혁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미래를 상상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세상이 멸망해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금세 망상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의 아기를 가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는데…….’

그 여자는 뭐가 그렇게 쉬웠던 걸까. 그의 아내의 자리를 얻는 것도, 그의 아기를 가지는 것도……. 나는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그 여자는 너무 쉽게 손에 넣어서 분했다.

결국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승아는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어 댔다. 젖은 울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토해 내듯 실컷 울고 난 승아는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술 좀 사 줘요.”

이 서럽게 복받쳐 오르는 울분을 견뎌 내려면 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 * *

승아는 룸으로 들어갔다. 먼저 온 주영이 벨벳 소파에 기대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이미 술과 안주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승아는 주영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또 그 남자 때문이니?”

빨개진 눈자위를 본 주영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승아는 코를 훌쩍거렸다. 살면서 이런 설움과 비극은 처음이었다.

“남자들이라도 부를까? 분위기 좀 띄우게 잘 노는 놈들로.”

“됐어요. 그냥 우리 둘이 마셔요. 별 볼 일 없는 놈들 상대해 봤자 기분만 구려져요.”

“맞아. 술은 여자끼리 마셔야 제맛이지. 자, 오늘 실컷 마시고 훌훌 털어 내는 거다?”

주영은 맥주에 위스키 샷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손바닥으로 잔 입구를 막고 능란한 손목 스냅으로 술들을 회오리치듯 흔들어 댔다.

주영이 정성스레 말은 폭탄주를 내밀자 승아는 날쌔게 잔을 잡아채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원샷으로 쭉 넘기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캬. 술이 다네, 달아.”

주영은 또다시 폭탄주를 말아서 승아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시라며 살갑게 조언을 해 주지만, 승아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이번에도 원샷으로 때려 넣었다.

“승아야, 근데 너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요?”

“주혜미 있잖아.”

모델 생활을 몇 년 동안 하다가 온라인 쇼핑몰 CEO로 진로를 변경한 주혜미는 4년 전에 펀드 매니저를 만나서 결혼에 골인했다.

승아와는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결혼식에는 참석했지만 자주 연락하며 지내지는 않았다. 명절이나 신년이 되면 안부 겸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혜미 언니가 왜요?”

“걔 얼마 전에 이혼했다더라.”

“어머? 진짜요? 어쩌다가?”

“유산 때문에.”

“유산?”

승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임신했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데 무슨 유산이에요?”

“보통 안정기가 지나야 사람들한테 알리니까. 나도 얼마 전에 소문 듣고 알았어. 임신 7주째에 유산됐다던데, 그 일 때문에 혜미는 우울증 걸리고 남편은 바람나서 이혼했대.”

“뭐요? 바람이요? 아니, 여자가 유산을 했으면 남자가 위로를 해 줘야지, 감히 바람을 피워요? 그거 완전 인간쓰레기네!”

승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아는 언니의 불행한 소식에 괜히 있지도 않은 정의감이 불타오른다.

“원래 유산하면 둘 중에 하나라잖냐. 부부 사이가 엄청 끈끈해지거나,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거나.”

주영은 아몬드를 딱딱 씹어 먹으며 말을 계속했다.

“혜미 남편, 집에만 오면 질질 짜고 있는 마누라 때문에 기분 다운된다고 밖으로 팽팽 나돌다가 결국 바람까지 난 거랜다.”

주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가 여자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면 서로 아픔을 극복하고 끈끈해지는 건데, 어디 그러는 남자가 많니? 대부분 남자들이 우울한 와이프 꼴 보기 싫다고 바깥으로 싸돌아다니기나 하지.”

아이도 잃고 남편도 잃은 혜미가 딱하다는 듯 주영은 혀를 찼다.

“남자 새끼들이 다 그래.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놈들도 막상 까 보면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승아야. 너도 괜히 남자한테 목매지 말고 네 인생이나 챙기면서 살아. 조만간 이 언니가 오디션 큰 거 물어다 줄게.”

주영의 충고에 승아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섬광이 타올랐다.

‘만약 그 여자가 유산을 한다면……!’

차강혁은 상처 입은 여자를 극진히 위로해 주는 남자가 아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여자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는 타입이지.

그렇다면, 유산만 된다면, 부부 사이에는 금방 금이 생길 것이고 심란하고 외로워진 그는…….

‘나를 다시 찾을지도 몰라!’

암흑 속에 비친 가느다란 희망의 빛줄기에 승아는 흥분이 되어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 여자를 유산시키지?’

희망의 빛이 보이자마자 금세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원한다고 애가 마법처럼 똑 떨어질 리도 없고…….’

끄응. 승아가 괴롭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여자가 유산만 된다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착착 풀린 텐데.

‘굿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나? 아님 물 떠다 놓고 기도라도 해?’

* * *

“우욱……!”

모두가 잠든 새벽 2시, 은서는 별안간 침대에서 튀어 나가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저녁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곧잘 이런다. 걸핏하면 체해서 자주 구역질을 한다.

니글거리는 속을 토해 내고 또 토해 내다 눈물이 차올랐다. 꺽꺽거리면서 고통스럽게 속을 게워 내는데 등을 두드려 줄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변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울 자격도 없다고.

모두 내 탓이었다. 내 실수였다. 그를 사랑한 건 온전히 내 의지였으니 모두 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니 나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다. 이러는 것도 그저 볼품없는 자기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은서는 돌연 울음을 그치고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변기 물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샤워를 했다.

그러고는 새 파자마를 꺼내 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속이 불편하고 더부룩했지만, 언젠가는 나아지리라고 기대하고 그냥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시간은 새벽 4시로 넘어갔다. 갑자기 침실 문이 열리고 귀에 익은 발소리가 청각을 휘감아 왔다.

이윽고 매트리스가 살짝 출렁거리면서 익숙한 향이 후각으로 녹아들었다.

“은서야.”

이 목소리를 얼마 만에 듣는 건지 모르겠다.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별스럽게 마음이 울컥했다.

“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고만 있었다. 눈을 뜨면 투정 부리듯 울어 버릴 것만 같아서.

“난 가위에 눌렸어.”

그 말을 듣자마자 그가 악몽에 시달리며 가위에 괴롭게 짓눌리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한결같이 강해 보이던 남자가 유일하게 약해 보이던 순간…….

저번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을까? 옆에서 깨워 주는 사람이 없어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와중에도 그가 걱정되었다. 역시나 내 사랑은 구제 불능이다.

“가위에서 풀리고 나니 당신이 제일 먼저 보고 싶어지더군.”

커다란 손이 은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의 손길에 심장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쿵, 쿵, 빠른 템포로 맥박이 고동친다.

이런 거 너무 억울하다. 대체 언제쯤이면 내 심장은 그가 아니라 나를 따를까.

“당신 얼굴을 보면 자꾸만 하고 싶어져서,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안 보니까 내가 못 살 것 같아.”

“…….”

“보고 싶었다.”

“…….”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나지막하게 속삭인 그는 은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고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향기만을 남겨 둔 채로 침실을 떠났다.

그제야 은서는 눈을 떴다.

투명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보고 싶었다.’는 말이 귓속에서 자꾸만 반복해서 메아리쳤다. 단순한 말이 이토록 큰 울림을 가질 줄은 몰랐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거렸다. 동시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갑갑하게 가슴을 압박하고 있던 체증이 갑자기 내려가면서 속이 한결 편해진 것이다.

* * *

은서는 간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요즘 별 흉흉한 꿈을 다 꿨는데 오늘은 꿈자리가 조용했다.

취하듯 잠에 빠져든 은서가 아침 7시에 깬 건 자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며 애타게 저를 부르고 있었다.

“은서야.”

“…….”

“유은서.”

“…….”

“은서야, 잠깐만 일어나 봐.”

힘겹게 눈꺼풀을 끌어올리자 희미한 시야로 남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근사한 얼굴이 왠지 꿈같아서, 눈을 비벼서 시야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하다.”

담백한 목소리가 말했다.

은서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시선이 맞닿는다. 이렇게 서로 눈 맞춤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쑥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거제도 조선소에 가 봐야 해.”

“…….”

“내일 돌아올 거야.”

“…….”

“나 없는 동안 밥 잘 챙겨 먹고 쉬고 있어.”

“…….”

“그럼 다녀올게.”

떠나는 게 아쉬운지 그는 인사를 하고 나서도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은서를 길게 보기만 하더니 손을 뻗어 야윈 뺨을 쓰다듬는다. 섬세한 손끝이 하얀 살결을 간지럽히듯 어루만졌다.

그때, 은서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동요했다. 손을 잡아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핏 놀란 그는 이내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훔쳤다.

쪽, 상큼한 입맞춤을 하고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다녀올게. 보고 싶을 거야.”

* * *

그가 침실을 떠나고 은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요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기운이 조금 났다.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이, 따스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럽게 만져 주는 손길이, 상냥한 키스가, 원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고작 이런 것들로 활력을 얻다니 온당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어처구니없다는 것도 안다. 비웃음을 당해도 싸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차강혁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는 나를 진창으로 잔인하게 내던지면서도 동시에 나를 구원해 주는 남자였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한, 그는 손짓 하나만으로 나를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권력이 있었다.

* * *

침대 위로 아침밥이 올라왔다. 은서는 깨작거리지 않고 수저 위에 밥을 소복하게 퍼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반찬도 골고루 먹었다.

간만에 복스럽게 밥을 먹는 은서를 보고 홍 집사는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사모님, 매일 이렇게만 드시면 소원이 없겠어요.”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노곤함이 밀려와 다시 잠이 들었다.

오전 내내 늘어지게 잠만 자다가 정오 무렵, 홍 집사의 노크 소리에 일어나 사육을 당하듯 또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잠은 잘 만큼 잤고 더는 무기력하고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워낙 아무것도 하지 않은 터라, 막상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을까. 영화를 볼까. 음악을 들을까.

사소한 행위를 하는 것도 왠지 결정이 힘들어 고심하고 있을 때, 휴대폰에서 실로폰 소리가 울렸다. 작은언니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도 여지없이 폭풍 입덧. 속이 다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야.]

텍스트 뒤에는 엉엉 우는 이모티콘이 따라왔다. 은서는 액정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손가락을 놀려 답장을 보냈다.

[많이 힘들겠다.]

[힘들지. 임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근데, 은서야. 요즘 많이 바쁘니? 뭔가 메시지에 소울이 없는 느낌이야. 내가 호르몬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런가?]

은경의 지적에 그제야 은서는 답장을 성의 없이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이었으면 ‘언니, 입덧하느라 많이 힘들지? 입덧 심할 땐 죽 먹으면 좀 낫다던데, 내가 죽이라도 사다 줄까?’ 하면서 살갑게 반응했을 텐데.

오늘뿐만 아니라 요즘 계속 은경에게 무뚝뚝했다. 답장을 아예 보내지 않은 적도 있었고.

[언니가 예민한 게 아니야. 내가 요즘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신경을 못 썼어. 미안해.]

[어머, 우리 막내. 어디 아파?]

[어디가 특별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여름이라 기운이 떨어졌던 모양이야. 이제는 괜찮아졌어.]

은경이 걱정하지 않도록 은서는 일부러 활짝 웃는 이모티콘을 첨부했다.

[이 언니가 우리 막내 몸보신 좀 시켜 줘야겠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언니 입덧 심하다며.]

[그래도 먹을 때는 먹어야지. 입덧 심하다고 굶을 수는 없잖아?]

은서는 휴대폰을 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랫동안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늘마저도 나가지 않는다면 이대로 영영 방구석에서 틀어박혀서 인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아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했었지. 은서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외출. 오늘은 외출을 해야 한다.

[그럼 내가 언니 퇴근할 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으로 갈게. 언니가 먹어도 괜찮은 음식으로 먹자.]

[그래. 이따 저녁에 봐. 아마 6시쯤에 퇴근할 것 같은데, 상황보고 또 연락할게.]

[응. 연락 줘.]

메시지를 마무리 지은 은서는 휴대폰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불현듯 아직 언니에게 임신 축하 선물을 챙겨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세상에. 입으로만 축하한다고 하고 아직 선물도 못 줬다니!’

너무 무심했다. 이따가 저녁에 만나면 선물을 주면서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다시금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스케줄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지금 준비하고 나가서 선물부터 사고, 스튜디오에 들러서 간만에 일을 하다가 저녁 시간에 은경을 만나면 될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은서는 정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기사님, 저 오늘 외출하려고 해요. 씻고 준비하는 데에 한 시간쯤 걸릴 거예요. 시간 맞춰서 차 대기시켜 주세요.”

* * *

새벽까지 술로 달린 승아는 정오가 훌쩍 지났는데도 정신없이 잠만 잤다.

그러다 오후 1시가 되었을 즈음,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승아는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눈을 반쯤 들어 올리고 액정에 뜨는 번호를 확인했다.

자동차 딜러였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일순, 정신이 맑게 트이면서 숙취가 물러갔다. 승아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민승아 고객님 맞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차가 나와서 오늘 보내 드리려고 하는데요, 댁에 계신가요?

“네. 지금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나요?”

목이 빠져라 차를 기다린 터라 최대한 빨리 받고 싶었다. 새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 그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스트레스도 시원하게 풀릴 것 같았다.

-네. 곧바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오는 데 얼마나 걸려요?”

-아마 30분쯤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빨리 보내 주세요.”

전화를 끊은 승아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온몸에 거품 칠을 하면서 휘파람을 분다. 곧 있으면 새 차를 볼 거라는 기대감에 울적했던 기분도 잠시 잊혔다.

* * *

“오, 역시 나처럼 섹시해.”

오피스텔 정문 앞으로 멈춰 서는 붉은색의 렉서스 쿠페를 보고 승아는 한껏 감탄했다.

렉서스에서 내린 딜러가 승아에게 키를 전해 주었다. 승아는 입을 귀까지 끌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제가 몰아도 되죠?”

“네. 검수 완벽하게 했고 옵션 작업도 끝냈습니다. 운전하셔도 됩니다.”

승아는 차를 수령했다는 서명을 하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량 내부를 둘러보고 또 입꼬리를 너끈하게 말아 올린다. 흠 하나 없이 깔끔한 게 꼭 반짝반짝 빛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 볼까?”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승아는 금세 목적지를 정했다.

“백화점으로 가서 쇼핑이나 왕창 하자!”

승아가 액셀을 과감하게 밟았다. 렉서스는 도로를 신나게 누비며 강남의 J백화점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은서는 J백화점에서 은경의 선물을 샀다.

임산부가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루즈핏 원피스 몇 벌과 임산부에게 좋은 영양제, 그리고 나중에 태어날 아기가 신을 신발을 샀다.

한편, 승아는 아직 차 안이었다.

백화점에는 진작 도착했는데 차들이 워낙 많아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주차장 입구 쪽으로 온갖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오, 평일인데 무슨 차가 이렇게도 많아! 다들 일도 안 하고 사나.”

승아는 짜증스럽게 지껄이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백화점에서 나오는 은서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머나!”

기가 막힌 우연에 승아는 턱이 빠질 만큼 입을 크게 벌렸다. 저 여자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서울도 은근히 좁다니까.”

승아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의 대열에서 이탈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서를 몰래 지켜보았다.

은서는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나란히 서서 정문 앞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구지? 혹시…… 바람이려나? 바람이었으면 딱 좋겠는데.”

승아는 주문을 외듯 일종의 희망 사항을 중얼거렸다. 은서가 딴 놈이랑 놀아난다면 승아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일 테니.

하지만 그러기에 남자는 은서보다 나이가 열 살도 넘게 많아 보였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외도 상대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승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들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그때, 갑자기 은서가 걸음을 멈추고 남자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쇼핑백에서 손을 집어넣어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은서는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아기 신발이었다. 그녀는 작고 귀여운 신발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또 남자에게도 보여 주면서 배시시 웃었다.

“임신했다고 아주 좋아 죽는 모양이야.”

승아가 핸들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비아냥거렸다. 아기 신발을 들고 화사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잠깐 잊었던 분노와 설움이 다시금 울컥 차올랐다.

그때, 주차장 출구에서 근사한 검은색 세단이 빠져나와 길가에 멈춰 섰다. 세단에서 유니폼을 차려입은 발렛 직원이 내렸고, 은서는 쇼핑백 안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세단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뒤에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은서를 향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남자는 은서가 좌석에 안전하게 앉은 것을 확인한 후에 문을 조심스레 닫았고, 쇼핑백들을 트렁크 안에 실은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기사였나 보네. 팔자 하나는 좋다니까. 돈이 넘쳐서 기사나 부리면서,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백화점에나 다니고.”

검은 세단이 도로로 진입했다. 승아도 액셀을 밟아 세단의 뒤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

* * *

세단은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서서 어느 주택 앞에 멈춰 섰다.

정 기사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 은서가 내렸다. 그녀는 정 기사에게 눈인사를 하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으며, 정 기사는 세단을 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골목길에 차를 세워 둔 승아는 은서가 들어간 주택을 훑어보았다. 외벽이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진 2층짜리 단독 주택은 심플하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재력에 비해 크기가 소박한 걸로 보아, 신혼집 같지는 않고 스튜디오 용도로 보였다.

“이제 어떡하지?”

승아는 하얀 집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 여자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따라오기는 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당장 저 집으로 쳐들어가서 ‘네가 뭔데 우리 오빠 아기를 가져?’ 하면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번처럼 한 방 거하게 먹이고 싶은데, 지금은 그때랑 상황이 달라져서 섣불리 접근할 수도 없고…….”

승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은서는 카메라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조용한 길 위에 선 은서는 카메라로 신중하게 구도를 맞춰 보고 셔터를 눌렀다. 스튜디오와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서 작업할 때 참고 자료로 쓰려는 모양이었다.

“배가 납작한 걸 보니 임신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네.”

승아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은서를 구멍이 뚫어질 만큼 무섭게 노려보았다.

“대체 저 여자가 뭐라고 임신까지 시킨 거야? 예쁜 건 알겠는데 나한테는 한참이나 못 미친다고! 내가 더 예쁘고, 내가 더 키도 크고, 내가 더 말랐단 말이야!”

승아가 핸들을 마구 때리며 소리쳤다.

은서는 찍은 사진들을 꼼꼼히 확인해 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는 다시 또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잠깐만, 이건…….”

사진 촬영에 완전히 푹 빠져 있는 은서를 보는데, 순간 승아의 뇌리로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신이 내린 기회야!”

제힘으로 유은서를 유산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이 차로 저년을 친다면…….”

은서는 여전히 촬영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넋 놓고 있는 그녀에게 갑자기 차 머리를 확 들이밀어 버리는 것이다.

“살짝만 치면 돼, 살짝만. 임신 초기니까 살짝만 쳐도 애가 떨어질 거야.”

승아는 야심 차게 되뇌고 골목 주변을 빠르게 탐색했다.

“CCTV도 없고, 사람도 없고.”

평일 한낮의 주택가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길가로 주차된 차가 몇 대 있을 뿐, 사람은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선팅도 제대로 됐고.”

렉서스의 유리창은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필름으로 선팅을 해서 바깥에서는 차 안이 보이지 않았다. 충돌하는 순간 설혹 그 여자가 전면 유리창을 본다고 해도 운전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을 터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상황이었다. 승아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양손으로 핸들을 꽉 말아 쥐었다.

“자, 가는 거야!”

승아가 힘껏 액셀을 밟았다. 붉은색 렉서스는 별안간 은서를 향해 돌진했다. 깜짝 놀란 은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렸다.

이내 쿵! 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지고 은서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맥없이 쓰러졌다.

“헉, 너무 세게 쳤나?”

렉서스를 멈춰 세운 승아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브레이크를 빨리 밟는다고 밟았는데도 생각보다 충돌음이 컸다.

계획하고 벌인 일이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사람이 픽 쓰러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그러나 승아는 곧장 이성을 차리고 액셀을 밟아 미꾸라지처럼 골목을 빠져나갔다. 큰 도로로 올라탄 렉서스는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많이 다쳤으려나……?”

그래도 인간인지라 양심이 좀 찔렸다.

“아니야,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그 여자가 어찌 됐든 난 오빠만 가지면 돼!”

마음이 약해져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해 승아는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세게 치긴 했지만 그만큼 애는 확실하게 떨어졌을 거야. 민승아, 잘했어. 잘한 거야!”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었다. 승아는 죄책감을 꾹 누르고 액셀을 가열차게 밟아 사고 지점으로부터 멀리멀리 벗어났다.

<3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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