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30)

16.

* * *

승아는 설렘이 잔뜩 부풀어 오른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장인어른께 허락은 받고 온 건가?

그는 형식적인 인사조차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의 통화에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가 ‘우리 장인어른’이라니 기가 막혔다. 결혼했다는 티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낼 필요가 있을까.

승아는 불쾌함에 인상을 확 구겼다. 감격스러운 재회를 기대했건만 시작부터 기대감이 와르르 붕괴되었다.

“뭐? 내가 허락을 왜 받아? 내 나라, 내가 들어오겠다는데!”

-우리 장인어른 앞에서 약속하지 않았나. 멀리 떠나기로.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미국으로 돌아가.

“싫어. 한국에서 눌러살려고 오피스텔까지 계약했는데 내가 왜 가? 그리고 미국 생활 완전 끔찍했단 말이야!”

-그럼 다른 나라로 가든가.

“오빠, 진짜 너무한다. 오빠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내가 널 왜 보고 싶어 하는데? 내가 너랑 한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오빠만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해…….”

괄괄하게 소리치던 승아는 방법을 바꿔서 우는 연기에 돌입했다. 억척스럽게 덤비는 것보다는 처량하고 가녀리게 우는 쪽이 남자에게 잘 통하니까.

승아는 일부러 가장해서 흑흑 울음소리를 수화기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차강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행동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한국에서 꺼져.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는 냉정하게 일갈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허무하게 끊긴 전화를 보며 승아는 분노의 숨을 씩씩거렸다.

지루한 결혼 생활로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 예측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전보다 더 차가워진 듯했다.

* * *

“요즘 집안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아.”

“아니, 그렇게 서로 냉랭하면서도 하기는 시도 때도 없이 한다니까?”

저택의 주방 일을 담당하는 직원 두 명이 조리대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추고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요전번에는 주차장에서도 했어. 암만 봐도 부부 사이가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눈만 마주치면 짐승처럼 붙어서 난리를 쳐, 아주.”

“아유, 성격은 안 맞아도 속궁합은 정말 잘 맞나 봐.”

직원들이 입을 가리고 킥킥 웃을 때였다. 홍 집사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죠?”

“아, 집사님…….”

신나게 웃던 두 사람은 홍 집사의 등장에 표정을 가다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입조심해요. 여기서 일을 하려면 눈뜬장님이 되어야 한다는 걸 다들 잘 아시지 않나요? 본 것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을 할 줄 아는 미덕이 있어야지요.”

50대 중반 여성인 홍 집사는 온화한 인상에 인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직업의식이 투철해서 아래 직원들을 문책해야 할 상황에서는 온화한 인상을 싹 거두고 엄하게 꾸짖고는 했다. 지금처럼.

“함부로 떠들다 사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두 분 모두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단순히 해고를 당하는 선에서 그치지는 않을 겁니다.”

“네, 집사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주의하겠습니다.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혹독한 대가’라는 단어에 머릿속이 싸해진 직원들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저택의 바깥주인 성격이 어떤지는 익히 잘 알고 있으니까.

차강혁은 자비가 없고 냉혹한 남자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누구라도 단숨에 결딴이 나고는 했다.

일례로 지난주 토요일, 정원사를 보조하기 위해 조경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한 명이 저택에 온 일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남학생은 정원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다가, 차강혁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산책을 나온 은서를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남학생은 장갑을 낀 손으로 흙더미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더운 여름 날씨에 걸맞게 그녀는 넓게 파인 브이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반듯한 쇄골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가슴골이 아찔하게 보였다.

남학생의 시선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 선을 음흉하게 더듬었다. 특히,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오래도록 훑었다.

「아앗!」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가며 몰래몰래 훔쳐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남편에게 덜미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남학생의 멱살을 강하게 낚아채고 수영장으로 개처럼 질질 끌고 갔다. 철퍽, 바닥에다 남학생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내팽개쳤다.

「으윽…….」

딱딱한 바닥에 볼품없이 엎어진 남학생은 고통스러워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 옆에 자세를 낮춰 앉아, 남학생의 뒷머리를 거센 악력으로 움켜쥐어 수영장 물속에다 얼굴을 사정없이 집어넣었다.

「흐흡!」

물속에 얼굴이 처박혀 호흡이 중단된 남학생은 온몸을 뒤흔들며 발악했다. 아등바등거리며 물속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뒷머리를 움켜쥔 그의 위력적인 손아귀는 한 치도 양보해 주지 않았다.

그는 남학생의 머리를 물에 담가 놓고 냉한 시선으로 조용히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시간이 흐른다. 2분쯤 지나자, 남학생은 거의 질식 직전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그는 머리채를 끌어당겨 물에서 얼굴을 빼냈다.

겨우 숨통이 트인 남학생은 어푸어푸 격한 숨을 토해 냈다. 그는 그 꼴을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알아. 눈알을 뽑아 버리려다가 참아 주는 거니까.」

그의 무자비하고 저돌적인 면모는 갓난쟁이 때부터 장난감 삼아 뱀을 가지고 놀고, 바다를 향해 독화살을 쏘겠다며 협박해 파도를 잠재우고, 태양을 향해 활을 겨눠서 낮과 밤을 바꿔 버리는, 헤라클레스의 야만적인 용맹함과 결이 비슷해 보였다.

“정 기사에게 방금 연락이 왔어요. 10분 뒤에 사모님께서 도착하실 거라니까 어서 저녁이나 준비해요.”

홍 집사가 명했다. 두 직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말없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 * *

집으로 귀가한 은서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졌다.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일상의 모든 것들이 힘겨워졌다. 이를테면, 아침에 기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옷을 갈아입는 것, 씻는 것, 밥을 먹는 것까지.

이따금씩 스튜디오로 외출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 작업에는 아무런 진척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거나, 창밖을 내다보거나, 짧은 거리를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은서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시체처럼 가만히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저녁 드세요.”

“…….”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저녁을 들라는 요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그녀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사모님, 제가 좀 들어갈게요.”

“…….”

홍 집사가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홍 집사는 은서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사모님, 식사하셔야죠.”

“…….”

은서는 아무 말 없이 눈만 느리게 깜박거렸다.

“사모님, 끼니를 거르시면 사장님께서 어떻게 나오시는지 잘 아시잖아요. 저, 사장님께 혼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홍 집사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달래듯이 말했다.

은서는 한숨을 토해 냈다. 신물이 날 만큼 잘 알고 있다. 밥을 한 끼라도 거르면 차강혁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이틀 전, 저녁 식사를 걸렀다는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제가 보는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나이가 지긋한 홍 집사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저를 포함하여 제 주변을 괴롭히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는 남자였다.

별수 없이 은서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 인자한 여성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사모님, 많이 피곤하시면 식사를 여기로 가지고 올까요?”

은서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홍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은서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가 없는 순간에도 나는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 * *

밤 10시, 강혁은 퇴근 준비를 했다.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렸고 최 실장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오후 1시쯤에 정 기사가 사모님을 스튜디오로 모셨다고 합니다. 오후 4시경에는 사모님 혼자서 잠깐 밖으로 나와 근처 약국에 들르셨고, 그 뒤로는 계속 스튜디오에 계셨다고 합니다.”

최 실장은 뷰익 차량을 통해 전달받은 은서의 하루 일과를 브리핑했다. 얼마 전부터 추가된 업무 루틴이었다.

그가 퇴근할 때 은서의 일상을 보고할 것.

긴급사항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보고를 올리기로 되어 있지만, 그녀의 무기력하고 지루한 일상에 긴급한 사항은 아직 없었다.

“약국?”

“네. 약국에서 연고를 하나 샀다고 합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일단 알았어.”

“네. 그리고 오후 6시쯤에 정 기사가 사모님을 댁으로 모셔 왔다고 합니다. 오늘도 아무도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사장님. 외람되지만, 사모님의 일상이 궁금하시면 그냥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최 실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제언했다.

“최 실장, 잔소리가 심해졌어.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사장님께서도 원래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

“일을 하실 때 사장님께선 늘 빈틈없이 완벽하시죠. 그래서 제가 어쭙잖게 끼어들 틈이 없고요. 하지만 사모님과 관련된 일에서는…… 가끔 어긋난 판단을 내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 여자, 요즘 나랑 말 섞기 싫어해.”

강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눈빛도 변했어. 총기가 사라졌지.”

그녀의 밝은 모습을 되찾고 싶어서 자상하게 말도 붙여 보지만, 돌아오는 건 심드렁한 대답뿐이다. 정원으로 데려가 푸르른 녹음들 사이에 있게도 해 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폭염에 지친 듯해서 시원하게 수영이라도 시키고 싶은데, 싫다고만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은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인생의 모든 것들이 명확하고 쉬웠다. 집요하게 달려들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여자는 뜻대로 안 된다.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오히려 경계를 하고 겁을 먹는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매번 뒷걸음질만 치는 것이다.

“게다가 은근히 거짓말도 잘한다고. 그렇게 남자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내가 그리스에 떠나 있는 동안 기어코 나 몰래 그 새끼를 만난 여자야.”

“…….”

“불안해. 아무것도 모르면 불안하다고. 은서가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내가 확실하게 알아야 안심이 돼.”

“…….”

“알아, 이런 게 바로 집착이지.”

“…….”

“꼴이 우습게 됐군.”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고작 여자 하나 갖겠다고 악착같이 사투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이 퍽이나 우습고 꼴사나웠다.

* * *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밤, 차강혁이 침실로 들어왔다. 은서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예전에 은서는 그의 이런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밥 먹었어?”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은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옷 좀 벗어 봐.”

“네.”

순순히 대답은 해 놓고 움직임은 없었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건성으로 대답한 게 분명했다. 그는 한숨을 짓고 재차 말했다.

“옷을 벗으라고.”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은서가 굼뜨게 움직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명령한 대로 옷을 벗는다.

“속옷도 다 벗어.”

만사가 귀찮았지만 은서는 순순히 얇은 속옷까지 벗어 내렸다. 또다시 목줄에 채워지고 싶지는 않기에.

완전한 나신이 되어 반듯하게 눕자, 그는 눈을 예리하게 빛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얀 몸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뒤틀린 욕망에 잠식된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눈빛이었다.

“엎드려 봐.”

섹스를 하려는 것 같지는 않고 대체 왜 이러나 의문이 들었지만, 은서는 굳이 따져 묻지 않고 고분고분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뒤집었다.

그는 은서의 뒤태도 낱낱이 살펴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연고를 샀다고 해서 어디 다치진 않았나 걱정했는데, 몸은 깨끗하기만 했다.

장밋빛 발진도 이제는 다 가라앉았고, 하얀 몸 위에 흔적이라고는 그가 집착스럽게 새겨 놓은 키스 자국 말고는 없었다.

“어디 아픈 데라도 있나?”

그가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면서 물었다. 손끝이 성감을 절묘하게 지나치자 은서는 몸을 움찔 떨고 작게 대답했다.

“네…….”

“어디가 아픈데?”

“……안 아파요.”

은서가 잘못된 대답을 뒤늦게 정정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픈 데도 없다면서 굳이 약국에 들러서 연고는 왜 샀을까? 묻고 싶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작업 도중 혼자 약국에 방문했고, 이건 정 기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시각, 정 기사는 별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니.

정 기사도 모르는 일을 대놓고 묻는다면, 그건 내가 널 감시하고 있다고 이실직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샤워하고 올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는 찝찝함을 뒤로 하고 욕실로 향했다.

은서는 다시 옷을 챙겨 입지 않았다. 알몸 그대로 이불만 덮어쓸 뿐이다. 샤워를 하고 돌아온 그가 저를 게걸스럽게 삼켜 먹을 테니까.

* * *

격렬한 섹스로 침실에는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적요가 찾아왔다.

밤은 새벽이 되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어둠의 고요 속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그는 은서를 옭아매듯이 꼭 껴안은 채로 잠들었다.

그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서가 몸을 집요하게 감싸고 있는 탄탄한 팔뚝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를 바르게 눕히고 스탠드 불빛을 켰다.

조명이 켜졌는데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은서는 그의 얼굴 위에서 손바닥을 휘휘 저어보았다. 속눈썹 하나 움찔거리지 않는 것을 보니 곤히 잠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은은한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을 숨죽이고 관찰했다. 유리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옥에 티였다.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생긴 것이 속상하다. 동시에 스스로가 지독히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나를 고문하던 남자를 걱정하고 있다니…….’

은서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협탁 서랍에서 흉터 연고를 꺼냈다.

낮에 약국에서 구입한 연고였다. 약사는 새살이 돋아날 무렵에 이 연고를 바르면 흉이 남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뚜껑을 열어 연고를 손가락 끄트머리에 짜서, 새살이 돋아난 곳에 정성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새살을 보호해 주듯 얇게 펴진다.

“흉터 남으면 안 돼…….”

은서는 연고를 다 바르고 주문처럼 읊조렸다. 그때,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은서, 나를 또 미치게 만들지.”

깜짝 놀랄 새도 없었다. 갑자기 그가 뒷목을 낚아채고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바람에.

“내가 그렇게 좋아?”

그는 입술을 질척하게 빨면서 나른하게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상태에까지 떨어졌는데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치 떨리도록 분하니까.

그는 단단한 팔로 은서를 안아 자세를 뒤집었다. 그녀를 그의 밑에 무력하게 가둬 놓고 귓불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간지럽게 속삭인다.

“대답 안 해도 돼.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이윽고 그는 턱을 핥고 목덜미를 자근거렸다. 은서는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악착같이 참아 냈다.

“눈빛이 변해도 귀찮다는 듯이 나를 대해도, 다 알아. 유은서 너한테는 나밖에 없어.”

혀로 목선을 길게 핥은 그는 이제 쇄골을 빨면서 키스 자국을 진하게 남겼다.

“이 심장의 주인이 바로 나잖아. 그렇지?”

그는 은서의 왼쪽 가슴을 꽉 우그려잡고 입매를 끌어 올렸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그 자신감에 찬 태도가 은서를 더욱 비참하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이깟 사랑조차도 숨기지 못하는가. 왜 내 사랑은 번번이 그에게 들키기만 하는 것인가. 억울함에 눈가로 눈물이 맺혔다.

그는 하얀 몸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성심성의껏 전희를 한 다음에 다리를 벌려 본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그곳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는 커다랗게 솟아오른 페니스를 젖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읏!”

내내 참아 왔던 신음이 결국 쏟아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가 제 몸을 탐할 때면 여지없이 깨닫게 된다. 나는 그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그는 짭조름한 눈물을 혀로 핥고 허리를 놀렸다. 익숙하게 스팟을 자극하자 교성이 조금 더 짙어졌다.

“흐으응…….”

“하아, 은서야.”

그는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맹렬하게 추삽질을 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몸이, 너무나도 뜨겁다. 미치도록 뜨거워서 활활 타오는 불 속에 꼭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 * *

얼마 전, 승아는 모델 에이전시 실장을 만나서 술을 마셨다.

승아는 술을 흥청망청 마시면서 붙잡고 싶은 남자가 있는데 도통 잡히지 않는다며 고민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었다.

“남자를 잡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기다리기나 해. 자꾸 들러붙고 보채면 남자는 더 도망간다고.”

승아가 친근하게 ‘주영 언니’라고 부르는 에이전시 실장은 모델 출신으로, 몇 해 전에 승아를 발굴한 인물이기도 했다.

승아보다 열다섯 살 연상인 그녀는 완숙한 만큼 남자를 만난 경험도 많아, 수컷의 심리에 관해서는 전문가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앞으로 절대 연락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러다 보면 그쪽에서 알아서 연락이 올 거야.”

승아는 그날 주영에게 들었던 조언들을 차근차근 상기했다.

“남자라는 족속이 굉장히 단순해서 붙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멀리멀리 도망간다니까? 그러니까 남자는 질척하게 매달리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거야.”

주영은 확신에 찬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네가 그 남자 마음을 되돌리지 못한 것도 지겹게 매달렸기 때문이야. 이번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면 쿨하게 내버려 둬. 그럼 남자들은 결국 돌아와.”

승아는 일주일간 주영의 조언을 철석같이 지켰다. 차강혁에게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꾹 참고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인내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그는 점 하나 찍어 보내지 않았다.

* * *

“언니,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인내심이 동난 승아는 조급한 마음에 주영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조언을 구했다.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연락이 하나도 없다구요!”

-일주일? 겨우 일주일 갖고 되니?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요?”

-그거야 모르지. 반응이 빠른 남자는 한두 달 만에 연락이 오기도 하는데, 네 이야기 들어보면 그 남자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몇 년? 방금 몇 년이라고 했어요?”

승아가 목청을 높였다. 내가 차강혁을 몇 년이나 오매불망 기다리자고 한국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고!

-냉정한 남자라며. 정 많은 남자들이야 금방금방 연락 오지만, 냉정한 남자들은 시간이 꽤나 걸릴걸? 남자 마음 되돌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아니?

“몇 년이나 기다리라는 건 말도 안 돼요. 난 못 기다려요! 못 기다린다구요! 그 남자 기다리다 내 청춘 다 보낼 일 있어요?”

-그럼 포기하게?

“포기는 무슨! 들이박을 거예요!”

-승아야, 그러지 마. 남자들 질색한다?

“가만히 기다리는 짓은 도저히 못 하겠는 걸 어쩌겠어요? 그냥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겠어요!”

승아는 주영의 조언을 무시하고 무작정 차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받지 않았다.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는데도 답이 없다.

“어쭈, 내 전화를 안 받는다 이거지?”

바빠서 전화를 못 받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전화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지나가는 개도 알 터였다. 앞으로 계속 전화를 걸어도 그는 받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아예 나를 못 피하게 만들면 되지.”

승아는 굳건하게 다짐을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전쟁에 나서기 전 무사가 칼을 가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기초를 꼼꼼하게 다져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표현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색감으로 색조 화장을 했다. 긴 속눈썹도 붙이고 컬러 렌즈도 착용했다. 고데기로 헤어도 풍성하게 다듬었다.

“이 정도면 차강혁도 넋이 나가겠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승아는 자화자찬했다. 수려한 외모만 있으면 그를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만에 취해 있었다.

어차피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지 않는가. 예쁘고 섹시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나 정도 되는 여자라면 어떤 남자라도 기꺼이 불륜을 감행하리라.

승아는 회심에 찬 미소를 짓고 옷을 골라 입었다. 깡마르고 길게 뻗은 몸매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미니 드레스로.

“완전 팜므 파탈 같은데.”

전신거울 앞에서 외양을 최종 체크하고 택시를 불렀다. 지난주에 구입한 차가 아직 출고되지 않아 택시 신세를 져야 했다.

승아는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건물 밖으로 나가서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삼우조선 본사 사옥으로 가 주세요.”

승아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휘황찬란한 건물을 보자마자 승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큰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남자이니 역시 포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 얼굴은 좀 잘생겼는가.

차강혁을 만나기 전에 소위 재벌이라는 남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온몸 전체를 명품으로 휘감은 남자들이었지만, 아쉽게도 얼굴은 명품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통 만족이 되지 않았다. 돈 보고 만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이니까 놀아 볼 의지가 전혀 안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 차강혁이 나타났다.

돈이면 돈, 집안이면 집안,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학벌이면 학벌, 능력이면 능력, 모든 것이 다 되는 남자가.

‘이런 남자라면 첩 자리도 감지덕지지.’

승아는 삼우조선 사옥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받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오빠, 나 회사 앞이야. 잠깐만 만나.]

선전포고하듯 메시지를 발송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쭉 빨아 마셨다. 시럽을 전혀 뿌리지 않았음에도, 곧 있으면 그를 볼 거라는 장밋빛 기대감에 차서 커피가 달게 느껴졌다.

조금 뒤,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내 사랑 강혁 오빠’다.

‘줄곧 무시하더니, 회사 앞으로 왔다니까 반응이 오네.’

승아는 입매를 쓱 끌어 올리고 전화를 받았다. 애교 섞인 콧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오빠아. 나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까지 찾아왔어. 잠깐만 얼굴 보여 줘.”

그는 한숨을 내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온갖 종류의 여자들을 다 만나 봤는데, 너 같은 찰거머리는 처음이다.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정말이지 근사한데, 말하는 내용은 영 형편없었다. 찰거머리라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하하는 법이 어디 있어?

승아가 이맛살을 진하게 구겼다.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너무해, 진짜.”

-너무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아내가 있는 남자한테 이러는 거 치졸하다는 생각 안 드나?

“아내? 웃기지 마. 오빠는 원래 내 거였어.”

-난 네 거였던 적이 없는데. 민승아, 착각도 병이야. 사람 그만 괴롭히고 병원에나 가 봐라. 너, 망상장애 있어.

“마, 망상장애? 오빠 끝까지 이러기야? 한 번쯤은 날…… 봐 줘야지. 적어도 한 번쯤은…… 나를 돌아봐 줘야지!

-내가 왜 너를 봐 줘야 하지? 안 그래도 요즘 우리 은서가 몸이 허약해져서 내가 근심이 많거든. 너까지 얹지 마라.

순간 승아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 은서’라고? ‘우리 장인어른’에 이어 ‘우리 은서’라는 호칭까지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차강혁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저와 만날 때는 단 한 번도 ‘우리 승아’라고 다정하게 불러 준 적이 없다. 언제나 딱딱하게 ‘민승아’라고만 불렀지.

더군다나 그깟 여자 몸이 허약해졌다고 걱정까지 하다니. 내가 맹장 수술 때문에 개고생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오빠, 설마 그 세상 재미없는 여자한테 정이라도 든 건 아니지?”

-우리 은서, 재미있는데. 그 여자, 내 아내야. 함부로 지껄이지 마.

세상에. 또 ‘우리 은서’란다. 거기다 재미있다고? 애교라고는 일절 부릴 줄도 모르는 아둔한 곰 같은 여자가 대체 어디가 재미있다는 거야?

“오빠, 뭐 잘못 먹었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 일단 만나. 만나서 차분하게 대화를 해 보자.”

-그만 가라.

“싫어. 못 가! 만나 주지 않으면 회사로 쳐들어갈 거야!”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다. 그래서 예전부터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회사 안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그는 분명 못 이기고 저를 만나러 나와 주리라.

일단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작전의 절반은 성공하는 셈이라고 승아는 멋대로 판단했다.

그를 다시 만나면, 전보다 더 예뻐진 얼굴과 전보다 더 날씬해진 몸매로 그를 유혹할 것이다. 게다가 사르륵 녹는 애교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시시한 아내 따위는 까맣게 잊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승아의 기대감을 무참히 무너뜨렸다.

-올 테면 와 봐. 고작 무명 모델 따위가 삼우조선 보안 요원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군.

“오빠…….”

-1분이나 버틸 수 있으려나. 우리 회사 보안 요원들이 제법 거칠어서 여러 군데 부러질지도 모른다고. 뭐, 그래도 시도해 보겠다면 치료비 정도는 두둑하게 챙겨 주도록 하지.

그는 협박에 협박으로 대응했다.

-이만 끊는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라. 다시 또 연락하면 그땐 곧바로 장인어른께 넘겨 버릴 테니까.

뚜, 뚜, 전화가 끊겼다. 허무해진 승아는 휴대폰을 맥없이 내려놓았다. 아직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왜 그렇게 변했냐고 따지고 싶었고, 그 여자가 혹시 오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지 추궁하고 싶었고, 그동안 내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만나 달라고 애걸하고 싶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속이 너무나도 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단호한 목소리가 승아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장인어른께 넘겨 버릴 테니까.」

제가 한국에 돌아온 걸 유 회장이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 매구 같은 영감이 돈을 도로 뱉어내라고 한다면…….

“나만 개털 되는 거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진다. 승아는 치밀어 오르는 욕심을 꾹 누르고 휴대폰을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일단은 후퇴야.”

포기가 아니라 후퇴였다. 그를 되찾을 방법만 찾는다면 승아는 불나방처럼 다시 덤벼들 것이었다.

* * *

승아는 분노의 숨을 씩씩거리며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핸드백을 소파에 내팽개치고 어금니를 세게 악물었다.

차강혁이 변했다.

예전에도 그 여자를 두둔하기는 했었지만 오늘처럼 ‘우리 은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는데.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 아무리 정이 들어도 그렇지. 날 한 번 만나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매몰차게 밀어내야 해? 유부남이 되었으니 결혼 생활에 질려서 불륜의 로망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는데…….

또다시 버려졌다는 상실감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어서, 그날 밤에 승아는 주영을 만나 술을 마셨다. 소주가 달았다.

“그 정도 했으며 됐어. 여기서 더 진상 부리면 스토커 되는 거야. 그냥 다 내려놓고 있다 보면 일이 순리대로 풀린다니까. 승아야, 우선 일이나 다시 시작해. 남자한테 정신 빼놓지 말고.”

“내려놓는 게 안 되는 걸 어떡해요? 나 그 남자 때문에 귀국한 거란 말이에요. 그 남자를 되찾지 못하면 한국에 온 의미가 없잖아요!”

“대체 얼마나 만났는데 이래?”

“……3개월이요.”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주영이 멍한 얼굴을 했다.

“3개월? 되게 찐하게 만났나 보다. 고작 3개월 만났으면서 이 난리를 다 피우고.”

“나만 찐했어요.”

승아는 풀죽은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나 혼자서만 미쳤었죠. 그 남자는 항상 일이 먼저고, 항상 바쁜 남자였거든요. 데이트도 일곱 번밖에 못 하고…….”

오죽 못 만났으면 데이트를 한 횟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할까. 주영은 입을 크게 벌리며 아연해했다.

“야, 그런 거면 그 남자는 널 심심풀이로 이용한 거야! 사귄 것도 아니네.”

“맞아요……. 사귄 거 아니에요. 그 남자는 나한테 언제나 엔조이라고 말했으니까요. 근데 나 혼자서 여자 친구다, 사귄다, 열심히 정신승리를 해 왔던 거죠.”

막판에는 ‘엔조이인데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나한테는 재미없다고 해 놓고, 그 여자는 재미있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하다니.

승아가 눈물을 훌쩍였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했고 열에 받쳤다. 나는 ‘여자 친구’ 자리조차 얻지 못했는데, 그 여자는 ‘아내’ 자리를 너무도 쉽게 얻어서 화가 났다.

“승아야, 이 언니가 연락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것도 어느 정도 찐하게 연애한 사이에서나 통하는 거지, 너처럼 엔조이로 잠깐 논 경우에는 그런 거 먹히지도 않아.”

주영은 위로하듯 승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주었다.

“그냥 잊어. 그 남자는 네가 잡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술이나 마시고 다 잊어버려.”

승아는 소주를 벌컥벌컥 원샷했다. 하지만 그를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다. 단지, 후퇴한 자신을 위로하는 술일 뿐.

알코올이 끊임없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고 취기가 머리를 몽롱하게 만드는 와중에도, 승아는 뇌를 열심히 회전시키며 그를 되찾을 방법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차강혁을 불륜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 * *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에어컨이 부지런히 돌아간다. 침실에는 블라인드를 내려 햇빛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은서는 오늘 어두컴컴한 그늘 속에서 에어컨 팬이 돌아가는 무의미한 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다 홍 집사가 침실로 식사를 가져오면 잠깐 일어나 수저를 들었다.

요즘 대부분의 나날들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중이다.

스튜디오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갈 뿐이고, 그나마 가서도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가 귀가했다.

지독한 열병을 앓은 후로 무기력이 심해져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동력을 잃어버렸다.

오후 5시, 알람이 울렸다. 피임약을 먹을 시간이다.

은서는 자동 반사처럼 일어났다. 아무리 동력을 잃었다 해도 피임약을 먹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협탁 서랍을 열어 피임약을 찾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약이 달랑 한 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은서는 물과 함께 마지막 알약을 삼키고 정 기사에게 연락했다.

“정 기사님, 지금 당장 산부인과에 가야겠어요. 준비 부탁드려요.”

“네, 사모님. 바로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지만 피임약은 꼭 받아야 했다. 임신만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니까. 이런 멍청한 엄마의 모습을 아이에게 결코 보여 줄 수는 없기에.

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섰다.

오후 5시가 지난 시간인데도 여름의 태양은 이글이글 타듯이 뜨겁기만 했다. 내내 음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강한 햇빛을 맞으니 미약한 현기증이 몰려오면서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제 은서에게는 빛이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거슬리고 괴롭고 성가신 존재.

누구보다도 빛과 잘 어울리는 여자였는데…….

* * *

정 기사가 모는 세단이 저택을 빠져나오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실버색의 뷰익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 기사도 은서도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세단이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은서가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질문을 던졌다.

“몸 상태는 어떠세요? 약 드시고 불편하신 점은 없으세요?”

“괜찮아요.”

속이 자주 거북해지고 머리가 곧잘 어지러웠지만 그게 피임약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이건 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열병의 후유증 탓이었다.

“그럼 똑같은 약으로 지어 드릴까요?”

“네.”

피임약 한 달 치를 처방받았다. 은서가 차에 올라타자 정 기사가 물었다.

“사모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은서는 잠시 고민했다. 기왕 나온 김에 스튜디오에 들를까. 하지만 그럴 기운이 전혀 나지 않았다. 시간도 벌써 저녁으로 향해 가고 있었고.

“집으로 가요.”

“네. 그럼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세단은 태양의 열기로 뜨겁게 익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려 나간다. 은서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똑바로 앉아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시간은 6시가 조금 지났다. 은서는 샤워를 하고 편안한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5분도 채 못 누웠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저녁 챙겨 왔어요. 들어갈게요.”

홍 집사가 베드 트레이를 가지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은서는 짜증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진짜 사육이라도 할 심산인 건지 한 끼도 거르지 못하게 한다.

“굶기는 게 고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밥을 먹이는 것도 고문이 되네요.”

침대 위로 올라온 트레이를 보며 은서는 불만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전보다는 말수가 제법 늘었다. 이렇게 불평불만도 하고. 하지만 말이 늘었다고 해서 그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고문이 아니라, 사장님께서는 사모님을 걱정하시고 챙기시는 거예요.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잘 드셔야죠.”

홍 집사는 온화한 목소리로 그의 입장을 변호했다. 하지만 은서에겐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차강혁이 나를 걱정하고 챙길 리가 없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소복하게 쌓인 하얀 밥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아, 식사 새로 준비해 올게요.”

홍 집사가 빠릿빠릿하게 말했다.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먹을게요. 어차피 아무런 맛도 안 느껴져요.”

* * *

여름밤이 깊어졌다. 퇴근 준비를 하는 강혁에게 최 실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후 5시쯤에 정 기사가 사모님을 모시고 산부인과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산부인과?”

밤처럼 까만 눈동자가 이채로 빛났다.

“네. 산부인과 말고는 오늘 아무 곳에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임신…… 이려나.”

강혁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저음의 음성에는 묘한 기대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물론 산부인과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무조건 임신을 뜻하는 건 아니다. 여자들은 임신 외에도 무수한 이유들로 산부인과에 방문하니까.

하지만 그는 요즘 내내 임신에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부인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임신부터 떠올렸다.

어쩌면 며칠 전, 은서가 약국에서 흉터 연고를 샀을 때 임신 테스트기도 함께 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들었다.

“그 부분까지는 확인을 못 했습니다. 댁에 가시면 사모님께 한번 여쭤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는 입가에 은연한 미소를 지었다. 심장은 약간 빠른 템포로 뛰고 있었다. 고작 네 음절의 간단한 단어에 기분이 이리도 고양될 줄은 몰랐다.

“수고했어. 그럼 내일 봐.”

그는 최 실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걸음을 옮겼다. 사장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하강한다. 1층에서 내려 정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오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열대야였다. 지독한 폭염은 밤에도 기세가 등등했다. 더위는 습기까지 잔뜩 머금어 불쾌지수를 높이 끌어올렸다.

하지만 강혁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던 롤스로이스까지 걸어갔다.

“사장님, 표정이 밝아 보이십니다.”

윤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말을 붙였다. 요 근래 그의 얼굴은 그늘이 내려앉은 듯이 마냥 어둡기만 했는데, 오늘 밤은 간만에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빛나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그런데 곧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는 약간 들뜬 어조로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윤 기사가 운전석에 올라타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 엔진 소리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는 왠지 설레게 들려왔다.

* * *

은서는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청하게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까 저녁을 꾸역꾸역 먹었으니 대충 밤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무음의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휴대폰 알람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낭랑한 실로폰 소리가 연속으로 두 번 울렸다.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은서는 알람 소리에도 한동안 꼼짝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요즘 입덧 때문에 죽겠어.]

작은언니였다.

[음식도 음식인데, 네 형부 스킨 향까지 역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아! 내가 그래서 옆에 오지 말라고 짜증을 부렸더니, 그 인간은 또 쫌생이처럼 삐지는 거 있지? 내가 이런 인간이랑 살고 있다.]

예전이었으면 이 메시지를 읽고 부러워했으리라.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 없어 슬프고 아프다며 스스로의 처지를 실컷 비관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더는 언니의 임신이 부럽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건 욕망하는 게 아니라는 세상의 단순한 이치를 이제야 겨우 깨달았으니까.

은서는 고생이 많다는 형식적인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요즘에는 빛보다는 어둠이 더 편안한 느낌이다.

무음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침실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내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이불을 걷어 냈다.

“나 왔어.”

“네.”

은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표정도 없었다. 그는 핏기를 잃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 산부인과에 다녀왔다며.”

창백한 얼굴에 드디어 표정이 생겼다. 눈동자가 커진 게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정 기사한테 물어봤지.”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는 일부러 정 기사에게 아내의 외출 여부를 물어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든 셈이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 임신이래?”

임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은서는 웃음을 픽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즐거운 일이 생겼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내 힘 하나 없던 몸이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기운이 샘솟았다.

“임신이라뇨?”

“오늘 검사받으러 산부인과에 간 거 아닌가?”

검사는 고사하고 형식적인 문진만 했을 뿐이다. 여태까지 계속 먹어 왔던 피임약을 다시 처방받는 데에 거창한 검사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검사 안 받았어요. 그리고 난 임신 못해요.”

은서는 모처럼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신을 못한다는 말에 검은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더니 금세 걱정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은서가 사무실로 찾아와 서럽게 울던 때가 떠올랐다. 작은 처형의 임신 소식에 기뻐하지 못하고 펑펑 울던 모습이.

임신이 늦어져서 운 게 아니라,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라서 울었던 건가.

“왜? 몸이 안 좋기라도 해? 어디가 안 좋은 건데?”

그가 격양된 어조로 물었다.

차강혁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 제법 볼만해서 은서는 입매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미약한 나에게도 그를 엿 먹일 폭탄이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이 기묘한 희열을 안겨다 준다.

“난 건강해요.”

“근데 왜 임신을 못한다고 하는 거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은서는 입술을 확고하게 움직였다.

“피임약을 먹고 있으니까요.”

은서는 협탁 서랍에서 피임약을 꺼내 그의 얼굴에다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을 맞고 떨어진 약은 침대 위로 안착했다.

그는 다량의 알약들을 보고 눈빛을 팽팽하게 빛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 가히 무시무시했지만, 은서는 기죽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기죽고 겁먹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드디어 이 야수 같은 남자에게 폭탄을 시원하게 날렸는데, 두려워할 게 아니라 통쾌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약 때문이라면 임신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말해야지. 그동안 내가 당신 밑구멍에다 정액을 싸지른 건 죄다 헛짓거리였다는 거군.”

날 선 말들이 고막을 찔러 왔다. 하지만 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신랄한 말쯤이야 얼마든지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 쓰레기를 먹었지?”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우리가 처음 섹스했을 때부터 먹었단 건가?”

“말은 똑바로 해요. 우리가 한 건 섹스가 아니죠. 차강혁 씨가 일방적으로 나를 강간했을 뿐.”

그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쪽으로 비틀어진 입꼬리에는 조소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 교만한 미소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강간? 너도 좋아했잖아. 너도 즐겼잖아. 내 밑에 깔려서 앙앙거리며 울고 매달린 건 바로 너야.’

하지만 그깟 비웃음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강철처럼 강하고 단단한 이 남자에게 작은 균열을 만들어 냈다는 거니까.

“그래. 좋아. 섹스든 강간이든, 당신 좋을 대로 정의 내리라고. 대체 그딴 쓰레기를 왜 먹은 거지?”

“임신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원하지 않는다?”

그는 헛웃음을 쏟아 냈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차강혁의 여러 가지 모습을 봐 왔다. 하지만 오늘처럼 황당해하고 당혹스러워하며 어처구니없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에게 한입이면 꿀꺽 삼켜지는 나에게도 이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새삼 또 자랑스러워진다. 열심히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작은 처형 임신 소식에 하도 서럽게 울길래 당신도 임신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감쪽같이 속았어.”

그는 고개를 살짝 내젓고 말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씁쓸하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속은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군. 당신도 우리 아기를 원한다고.”

‘우리 아기’라니 이상한 단어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이질적으로 들린다.

“나한테 임신을 당하지 않겠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던 게 진심이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 화를 낸다고만 생각했지.”

그가 허무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재킷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어헤치더니 은서를 직선으로 내리쳐 보았다. 검은 눈빛에서 잔인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샤워하고 올 테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유은서 널 강간할 거거든.”

격노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는 곧 폭풍이 불어 닥칠 것을 예고라도 하는 것처럼 음산하기만 했다.

* * *

20분 뒤, 침실 문이 열리고 청량한 향기가 널리 퍼졌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을 느슨하게 걸친 차강혁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향이 더 짙어졌다. 은서는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할 것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있는 그는 은서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채고 완력으로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거친 행동이었지만 은서는 초연했다. 해 볼 테면 얼마든지 해 보라는 식이었다.

그 초연한 태도에 부응이라도 하듯, 가운을 벗어 던진 그가 페니스를 무작정 은서의 입에다 밀어 넣었다.

“우웁!”

입안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물건에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만면이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숨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괴로웠지만 은서는 순순히 눈을 꾹 감았다. 저항할 필요도 발악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야 포기를 배웠으니까. 단념하고 체념하는 방법을 마침내 배웠으니까.

“읍…….”

은서의 뒷머리를 강하게 움켜쥔 그는 허리를 성급하게 쳐올리며 조그마한 입에다 페니스를 닥치는 대로 들쑤셔 댔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 페니스가 단단해지며 완전하게 발기했다. 언제나 흥분이 빠른 남자였다.

몸체를 어마어마하게 키운 페니스가 목구멍을 사정없이 찔러 대고 있었다. 은서는 컥컥 기침을 터뜨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제대로 빨아. 그만큼 했으면 능숙해질 때도 됐잖아. 대체 언제까지 처녀처럼 굴 셈이지?”

싸늘하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은서의 귓등을 후려쳤다. 하지만 뭘 제대로 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는 무자비하게 추삽질만 해 댈 뿐이다.

끊임없이 입안을 드나드는 가혹한 물건에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은서는 고통스러운 숨을 쥐어 짜내며 두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꼭 부여잡았다.

손톱 끝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감았던 눈을 뜨니 눈 안에서 고여 있던 눈물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은서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의 눈동자가 얼핏 흔들렸다.

이내 입속을 장악하고 있던 페니스가 빠져나갔다. 타액이 길쭉하게 엮이고 은서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아.”

가슴이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날숨이 격하게 쏟아진다.

그는 안쓰럽게 호흡하고 있는 은서를 가볍게 밀어 버렸다. 작은 몸이 쓰러지면서 매트리스가 살짝 출렁거렸다.

그의 손안에서 모든 일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는 손쉽게 하의를 끌어 내렸고, 큼지막한 손으로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아 가랑이를 넓게 벌렸다.

핑크빛으로 농익은 음부를 보며 그는 불순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아무런 전희도 없이 우람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좁은 구멍 안에다 무참히 꽂아 넣었다.

“하으읏!”

잔인하게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에 은서는 진저리를 쳤다. 거대한 페니스는 맹독을 품은 뱀처럼 위협스럽게 꿈틀거리며 질 속을 마구 유린했다.

격통이 온몸 곳곳으로 번져 나갔지만 은서는 그만두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발을 버둥거리며 발악하지도 않았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쇳소리를 내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하얗게 질린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악착같이 그러쥐며 버틸 뿐이었다.

어디 실컷 해 봐. 날 산산이 망가뜨려 보라고.

“흐읏.”

그는 파자마 상의를 찢어 버리고 젖가슴을 손에 담아 주물거리면서 난폭하게 허리를 놀렸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퍽퍽대면서 살덩이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연신 때려 댔다.

거칠고 투박한 피스톤질에 사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반신이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음부에서 애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것을 꽉 물고 있는 교접지점이 애액으로 칠해지며 매끄러워졌다.

그는 습하게 젖은 아래를 확인하고 입매를 흡족하게 끌어 올렸다.

“보지가 젖기 시작했어.”

“하으응…….”

“역시 좋아하는구나. 나한테 강간이나 당하는 주제에.”

조롱하듯 속삭이는 말에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그때, 그가 은서를 안아 들어 다리 위에 올려 앉혔다. 갑작스러운 체위 변경에 감았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는 페니스를 자궁까지 깊숙이 쑤셔 넣으면서 은서의 턱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페니스가 부단히 드나드는 뜨거운 교합 지점이 시야에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유은서, 똑바로 봐. 네가 내 자지를 얼마나 맛있게 먹어 대고 있는지 똑바로 보라고.”

“하읏.”

그의 말대로 조그만 구멍은 그를 열렬히도 삼켜 대고 있었다. 난잡하게 결합된 아래가 끔찍하고 비참했다. 어쩜 제 몸은 자존심이라고는 없을까.

그를 거부할 줄 모르는 육신은 벌써 아찔한 쾌감에 정복되었다. 전류에 휘감긴 듯 온몸이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벌어진 입에서는 간드러지는 교성이 연신 터져 나왔다.

“아기? 낳기 싫으면 낳지 마. 아기 하나 안 낳는다고 우리 사이가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아흣.”

“내가 박아 주면 박아 주는 대로 넌 벌리게 돼 있어. 지금처럼.”

“하아앙…….”

“유은서 넌 영원히 나한테 박혀서 울어 버릴 운명이라고.”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질척하게 빨았다. 이어 목덜미를 핥고, 가슴으로 내려와 얼굴을 부비적거리고, 젖꼭지 위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장난스러운 애무를 하면서도 혹독한 추삽질은 멈추지 않았다. 은서는 그의 위에서 온몸이 속절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눈앞에서는 불꽃이 팡팡거리며 터져 나갔다.

“아흐흣.”

짜릿한 오르가슴이 전신을 관통했을 때, 그는 사정을 하는 대신 페니스를 빼내고 은서를 다시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은서는 질 속이 허전해진 걸 느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분명 사정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그가 페니스를 손에 쥐고 몇 번 흔들더니 은서의 얼굴 위로 파정해 버렸다. 얼굴을 뒤덮는 끈적끈적한 정액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임신도 하지 않을 몸인데, 굳이 안에다 싸지를 이유는 없잖아. 안 그래?”

차가운 말에 은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꾹 감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어쩌면 으레 그러던 것처럼, 그가 뒤처리를 해 줄지 모른다고 얄팍한 기대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코끝으로 담배 향이 스쳐 오자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서는 협탁 위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티슈를 찾아 몇 장 뽑았다. 스스로 얼굴을 닦아 내고 눈을 떠 보았다.

그는 안개 같은 담배 연기를 느릿하게 내뿜으며 비소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어.”

“…….”

“그동안 보지 안에 쌀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분명 비웃고 있는데, 그 조롱 끝에는 기묘한 쓴맛이 감도는 듯했다.

복잡 미묘하게 들리는 그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던 은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는 담배를 연속으로 세 개비를 태웠다. 그런 다음, 이불을 걷어 내고 가는 발목을 붙잡았다. 강제를 구멍을 벌리고 다시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또 그녀의 얼굴에 정액을 뿌렸다.

학습 효과가 생긴 은서는 알아서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아 냈다.

속눈썹에도 들러붙은 정액을 꼼꼼히 지워 내는 그녀의 얼굴에는 달리 표정이랄 게 없었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날 상황인데도, 덤덤하고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모든 것을 비운 듯한 얼굴을 불만스럽게 쏘아보다가, 불쑥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입에다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페니스를 밀어 넣어 단단히 발기시킨 후, 좁다란 구멍 속을 꿰뚫고 들어가 허리짓을 시작했다.

흉포한 인터코스가 아플 게 당연한데도, 은서는 반항 없이 그저 순응하는 태도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아프다고 칭얼거리지도 않았고, 당장 그만두라며 솜 주먹을 팡팡거리며 때리지도 않았다.

“유은서, 왜 이렇게 얌전해?”

그는 허리짓을 멈추고 두 손으로 은서의 어깨를 꽉 틀어잡았다.

“강간할 맛이 안 나잖아. 반항 좀 해 봐.”

“…….”

“화를 내고 성질을 부려 보라고. 내 뺨을 후려치고,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예전처럼 해 보란 말이야!”

날카롭게 고함을 치는데, 은서는 그 음산하고 매서운 목소리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애걸하고 사정하는 것처럼 들려서 이상했다.

“화가 나지 않아요…….”

은서는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슬프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아요.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아요.”

말들이 조각나듯 부서져 내린다.

“처음부터 감정을 가진 것부터 잘못된 거였어요. 난 차강혁 씨의 자위 도구밖에 되지 않는데……. 한낱 도구가 감정을 느낀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일순간, 검은 눈빛이 황량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고독하고 쓸쓸한 모래사막처럼.

아무래도 이런 건 이상하다. 왜 그가 이런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눈에는 날카로운 냉기가 번뜩이고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데.

“도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니…… 유감이군.”

허망한 목소리를 내뱉은 그는 가운을 걸치고 침실을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히고 은서는 혼자 남았다. 그제야 내내 초연하게 지켜 왔던 얼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다.

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달싹달싹 떨면서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끙끙 앓듯이 눈물을 토해 내고 또 토해 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 없는데 왜 나는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까. 눈물샘이 말라 버렸으면 좋겠는데, 심장이 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사랑은 아직도 어리석고 미숙해서 뜨겁게 우는 심장으로, 열렬하게 뛰는 가슴으로,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고만 있었다.

* * *

차강혁은 그날 이후 다시 게스트 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더 이상 은서를 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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