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30)

15.

* * *

목줄에는 금으로 제작된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펜던트 위에는 은서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은서는 기함했다. 말로만 듣던 목줄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다시는 우현이 안 만날게요! 어제도 나는 집에 가려고 했는데 우현이가 억지로 붙잡은 거예요. 앞으로는 연락 와도 무시하고, 우연히 마주쳐도 피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목줄에 감길 수는 없었기에 은서는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빌었다. 절벽 끝으로 내몰린 것 같았다. 두려움에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찼다.

“알아, 유은서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 단지 넌 터무니없이 빈틈이 많고, 터무니없이 나약할 뿐이지.”

그는 새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놀라울 만큼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호하려는 거야.”

그는 가녀린 목에 목줄을 감았다. 철컥,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목줄이 완벽하게 그녀를 구속했다.

목으로 닿는 가죽의 오싹한 감각에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심장은 절망스럽게 추락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손목을 묶은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목까지 채워 버리다니…….

얼굴이 사색이 된 은서와 달리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목줄에 리드줄을 연결해서 침대 헤드에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은서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반경을 제한한 것이다.

“대체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도 없다. 대체 왜 그가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나를 왜 자꾸 진창으로 박아 넣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말했잖아. 보호하는 거라고. 바깥에는 널 노리는 위험한 놈들로 득실거리니까 함부로 풀어 둘 수가 없어. 안전하게 묶어 둬야지.”

보호? 안전?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차라리 솔직했으면 좋겠다. 내가 끔찍하게도 싫다고. 주제도 모르고 당신의 아내 자리를 꿰찬 내가 지독하게도 미워서, 걸핏하면 격분해서 나를 징글맞게 괴롭히는 거라고.

“나한테 제일 위험한 남자가…… 바로 당신이야. 차강혁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남자라고!”

목줄로 구속당했다는 처참한 좌절감에 은서는 울분을 토해 내듯 쇳소리를 내질렀다. 하얀 목덜미로는 핏대가 툭 불거져 나왔다.

“은서야, 그렇게 짖으면 안 돼. 귀여운 목소리가 상하잖아.”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는 나지막한 음성이 기막히도록 다정했다.

가끔씩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도로 다정하고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때까지 봐 왔던 그의 분노한 모습은 진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화가 나면 그는 도리어 지금처럼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지는 것일지도…….

그래서 더 끔찍한 것이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것이다. 감정이 실종된 사람처럼 보이는 그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뭐? 짖어요? 차강혁 씨는 정말 나를 인간 취급도 안 하는군요!”

그는 가방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동그란 공 모양이 달린 재갈이었다.

“우웁!”

“이러면 안 짖겠지?”

은서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조그마한 입에 재갈을 가차 없이 물렸다. 이어서 그는 세 번째 물건을 꺼냈다. 베이비 캠이었다.

그는 협탁 위에 은서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베이비 캠을 설치하고 휴대폰으로 연동을 시켰다.

촬영이 시작되고 그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꼼짝없이 포박당한 채로 재갈이 물린 그녀의 처참한 모습이 휴대폰에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은서에게 친절히 보여 주었다.

“봐. 이러면 내가 없는 동안에 유은서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볼 수 있어.”

“읍…….”

진심으로 순수하게 미친놈이었다. 침대 바깥으로는 아예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내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이제 난 출근을 해야겠어. 그동안 당신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렇게 얌전하게. 어때? 완벽하지 않아?”

그는 은서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직선으로 내리쳐 오는 검은 눈빛은 맹독을 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정한 말투로 말하고 부드럽게 만져 주어도, 본질은 독을 품고 있는 남자다.

은서는 문득 깨달았다. 독사에게 물리면 생명을 빼앗기듯, 나는 차강혁에게 물려 영혼을 빼앗겨 버렸다고.

“그럼 쉬고 있어, 우리 공주님.”

그는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미소를 짓고 은서의 이마에 살포시 키스했다.

은서는 그나마 자유로운 두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제발 나를 놓아 달라고. 하지만 그는 반듯하게 걸어서 침실을 나가 버렸다.

꽁꽁 묶인 채로 혼자 남은 은서는 괴롭게 흐느꼈다. 달랑 사진 한 장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니.

‘나는 단지…….’

민승아의 사진을 보고 마음을 다쳤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대가가 덫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나에게는 마음을 다칠 자격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새벽에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카더라식의 루머가 하나 퍼졌다. 재벌 3세가 술집에서 여자를 두고 난투극을 벌였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난투극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고문 행위에 가까웠지만, 어찌 됐든 소문은 그런 식으로 널리 퍼졌다.

돌고 도는 소문에는 딱히 이니셜 없이 ‘재벌 3세’라고만 나와 있어서 사람들은 이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삼우조선의 사장, 차강혁이 터진 입술에 뺨에는 커다란 드레싱 밴드를 붙이고 출근했다.

사내 메신저는 순식간에 불이 났다. 도통 예측할 수 없었던 루머의 주인공을 얼핏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한껏 격양되어 뒤에서 몰래 수군거리느라 바빴다. 하지만 차강혁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차분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청담동에 ‘블루 노트’라는 재즈 바가 있어. 간밤에 거기서 사소한 소동이 벌어졌지.”

그는 사장실로 따라 들어온 최 실장에게 동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오늘 거기 좀 가 보라고 전해. 기물이 파손되고 사람이 다쳤어. 마스터가 머리를 다쳤는데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알아보고, 피해 보상 제대로 처리하도록 해.”

“네……. 루머의 주인공이 사장님이실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습니다.”

최 실장 같지 않게 말꼬리가 길었다. 그냥 ‘네’라고 대답만 하고 넘어가기에 이번 사태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은서와 관련된 일에는 그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걸 최 실장은 일찌감치 눈치챘다. 하지만 어젯밤의 난투극은 지나치게 심한 것이었다.

“벌써 소문이 났나?”

“다행히 실명은 안 떴습니다. 왜…… 직접 나섰습니까? 얼마든지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요. 사장님답지 않으십니다.”

차강혁은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자다. 그의 명석하고 냉철한 두뇌는 언제나 성공을 향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충동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건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차강혁은 파란을 일으키는 인물이지,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니까.

“그냥 가끔…… 그 여자는 나를 미치게 만들어. 아니, 자주인가.”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끝에는 알싸함과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여자가 다른 남자랑 있으면, 눈이 돌아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

“어젯밤도 그랬지. 은서가 그 새끼와 함께 있는 걸 보는 순간 심장이 폭주해 버리더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튀어 나가더군.”

사업을 할 때 그는 늘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지나치게 호전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갬블러가 도박을 하듯이 기업을 이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담한 선택들도 결국에는 치밀한 계산하에 나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여도, 실상은 그의 차가운 두뇌가 끝없는 회전 끝에 내놓은 것이기에 실패가 없었다.

하지만 유은서는 다르다.

은서가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면 일단 뇌 작동이 멈춰 버린다. 생각이 정지되어 오직 그녀를 가져야 한다는 광적인 일념에만 사로잡혀 섣불리 몸부터 움직이고 마는 것이다.

“한심하지?”

그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그 미소는 몹시도 자조적으로 보였다.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어. 멈추는 방법을 모르겠어. 이대로 계속…… 폭주할 것만 같아.”

유은서를 향한 음습한 욕망을, 극심한 소유욕을, 지독한 집착을,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다.

* * *

최 실장이 물러가자 홍보팀 차윤혁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사장실을 들이닥쳤다.

“형, 미쳤어?”

윤혁은 한껏 격양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미쳤다’라는 말처럼 어젯밤 일을 간단히 축약하는 말도 없을 터였다.

강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유은서한테 미친 게 사실이니까.

그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 한숨처럼 연기를 후 내뱉자 희뿌연 연기가 조각나듯 흩어졌다.

“누가 우리 회사 사장 얼굴이 제대로 망가졌다고 제보라도 넣은 모양이야. 냄새 맡은 기자들이 홍보팀으로 전화해서 유도신문하고 난리도 아니라고.”

윤혁은 속사포처럼 말들을 쏟아 낸 다음, 기자들의 징글맞은 추궁에 질렸다는 식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히 사진이나 영상은 없나 봐. 기사는 안 나가게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아버지까진 못 막아 주겠다.”

“…….”

“권 비서한테 물어보니까 벌써 눈치 다 깠대. 노친네, 귀신같이 눈치 하나는 빨라서.”

“…….”

“곧 호출이 들어올 거야.”

입이 보살이라고 책상 위의 유선전화에서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직사각형의 화면에 뜨는 번호는 내선 번호다. 회장실이었다.

강혁이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 후,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 줄까?”

윤혁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강혁은 피식 웃었다.

“많이 컸네.”

“뭐가.”

“형 뒷바라지도 할 줄 알고.”

그는 동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회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회장실은 삼우조선 사옥의 제일 꼭대기 층에 있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마천루의 최상층. 부와 명예를 향한 열렬한 욕망을 상징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곳. 그곳이 바로 차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강혁은 빈틈없이 단정한 태도로 차 회장 앞에 섰다. 하지만 뺨에 붙은 드레싱 밴드와 터진 입술이 그의 완벽함에 오점을 만들어 냈다.

소파에 앉아 난초를 손질하고 있던 차 회장은 완벽한 장남의 망가진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네가 싸움박질도 다 하고.”

차 회장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없이 그를 세워 둔 채로 말했다.

“너답지 않은 일이야.”

어릴 때 풋볼 경기를 뛸 때를 제외하고, 차강혁은 단 한 번도 주먹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태생이 그런 남자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동요하는 법이 없는 남자.

그런데, 격정을 전혀 모를 것 같던 남자가 갑자기 변해 버린 것이다.

차디찬 냉기가 흐르던 그의 심장에 누군가가 불쏘시개를 꽂아 활활 타오르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네 처 때문이냐?”

“아닙니다.”

“잡아뗄 생각 마라. 여자를 두고 웬 놈이랑 싸웠다던데, 당연히 그 여자가 네 처겠지. 네 처가 바람이라도 피운 거야?”

“그럴 여자가 아니라는 거 회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은서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냥 술을 마시다 취해서 시비가 붙은 것뿐입니다.”

“겨우 취해서 그랬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내 아들은, 내가 키운 차강혁은, 고작 술 때문에 취해서 충동적으로 난동을 부릴 녀석이 아니라고.”

별안간 차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난초 화분을 강하게 집어 던졌다. 사기로 만들어진 화분은 강혁의 얼굴 옆을 아찔하게 지나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한 표정으로 반듯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바닥 위로 깨진 사기 조각들이 널브러지고 흙들이 쏟아지고 싱싱하던 난초가 망가져서 엉망인데도, 그는 일말의 신경도 기울이지 않았다.

태연하기만 한 아들의 모습에 차 회장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래, 이게 바로 차강혁이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해야지.”

핏줄은 핏줄이라고, 마주 선 부자의 외양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차 회장은 예순하나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훤칠한 미남이었다.

185cm라는 장신의 키에 골프와 테니스로 단련된 몸, 고전 할리우드 스타를 연상케 하는 선 굵은 이목구비와 부리부리한 눈빛과 강인한 인상이, 누가 봐도 내가 차강혁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업가보다는 배우에 더 잘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잘난 얼굴 덕분에 차 회장은 아직도 인기가 좋아 여러 여자를 울리고 다녔다.

“강혁아, 이 아버지는 다 알고 있단다. 네 처가 무슨 문제를 일으켜도 일으킨 거겠지”

차 회장은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늘 냉철하고 의연한 장남이 이성을 잃는다면 그건 여자 문제밖에 없다고.

그리고 차 회장이 아는 한, 그에게 여자는 오직 은서뿐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그 어떠한 여자도 회사로 들이지 않던 아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 은서를 시시때때로 회사로 불러들인다는 사실은 이미 차 회장의 귀에도 들어간 일이었다.

출장을 떠날 때마다 몸을 혹사시켜 가며 오버워크(Overwork)를 해서 예정된 일정보다 항상 앞당겨 돌아오는 것도 결국 은서를 조금이라도 일찍 보기 위함이라는 걸, 차 회장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은서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일에 제가 과하게 반응한 것뿐입니다.”

“사소한 일이 대체 어떤 건데? 웬 놈이 네 처한테 치근덕거리기라도 한 거냐? 작년, 유은경 상무 결혼식 파티 때처럼?”

차 회장은 입가를 끌어올려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넌 이상했어. TN유통 회장 외손자의 팔뚝을 부러뜨려서 한동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지.”

“…….”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을 반쯤 죽여 놓았고.”

“…….”

“네 처가 엮이면 너답지 않게 멍청해지는구나.”

“…….”

“강혁아, 아무리 네 처라고 해도 마음을 다 주지는 마라.”

차 회장은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지혜를 전해 주겠다는 듯이.

“사내새끼가 어설픈 사랑 놀음에 빠져서 여자한테 마음을 전부 내어 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약해지기만 할 뿐이야.”

그는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차 회장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늘 너답게, 차강혁답게 냉정해야지. 여자 하나 때문에 여태껏 네가 쌓아 온 평판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일이야.”

“…….”

“그러게 도명그룹 장녀랑 결혼했으면 오죽 좋았겠냐.”

그는 은서를 만나기 2년 전, 도명그룹 장녀와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도명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에 꼽히는 기업으로, 차 회장은 도명그룹 회장의 큰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강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도명그룹의 장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더 만날 의사가 없다고 딱 잘라서 선을 그었다.

차 회장은 결혼을 택하는 데에 있어서 마음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아들을 타일렀다. 결혼은 사업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사랑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차 회장은 도명그룹의 장녀와 계속 만남을 이어 가라고 부추겼지만, 강혁은 뜻을 한사코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워낙 완고해서 차 회장도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국에는 백기를 들었다.

혼기가 찬 것도 아니고 어차피 맞선 자리야 차고 넘치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발 물러난 것이다.

차 회장은 맞선을 몇 번 더 보다 보면 아들의 짝이 알아서 정해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맞선 이후로 차강혁이 그런 자리에 나가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를 귀한 딸자식의 남편감으로 보고 있다며 맞선을 제안하는 굴지의 기업들은 많았으나, 그는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만나는 건 부담스럽다며 황금 같은 기회들을 죄다 단칼에 쳐내기만 했다.

아들의 뻣뻣한 태도에 차 회장의 인내심이 거덜 나 뒷목을 잡을 때쯤이었다. 유성중공업의 막내딸 유은서가 운명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면 무조건 손사래부터 치던 아들 녀석이 의외로 선뜻 맞선 자리에 나간 것은 물론이고, 곧바로 은서가 마음에 든다며 결혼까지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차 회장은 아들의 선택에 기뻐하며 어서 빨리 결혼을 추진하자고 나섰다. 그동안 뻗대기만 하던 아들 녀석이 드디어 고집을 꺾고 집안 좋고 참한 여자를 아내로 들이겠다니,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 한 템포 숨을 고르고 신중했어야 했다. 평소답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마냥 좋아할 게 아니라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은서 씨가 마음에 들어요.’라는 그 말을 결코 가볍게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음이 가는 여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시켰어야 했어. 그랬으면 내 아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은 없었겠지.”

“…….”

“강혁아, 진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

“여자를 사랑해서 마음을 쏟아붓는 건 한심한 놈팡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제대로 된 사내라면, 여자를 손에 넣고 뜻대로 쥐락펴락할 줄 알아야 한다고.”

“…….”

“여자는 사랑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종하고 다스려야 되는 존재야.”

“…….”

“그러니 멍청하게 굴지 말고 본래의 네 모습을 되찾아. 우리 집안에서 하찮은 사랑 놀음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은 차윤혁 하나로 충분하니까.”

차 회장은 엄격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어내고 아들의 양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강혁아, 아버지 말 다 이해했지? 다시는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

“난 오직 너만 믿고 있다.”

“저만 믿지 마세요. 윤혁이도 잘하고 있어요.”

침묵을 지키던 그가 오랜만에 입술을 열었다. 뜻밖의 대답에 차 회장은 당황한 기색이다.

“그리고 제 마음은 제 것이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노한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왔지만 그는 가뿐히 무시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 * *

사장실로 돌아온 강혁은 높게 쌓여 있는 서류들을 책상 한쪽에 제쳐 두고 오직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은서가 있었다. 가죽 벨트로 손목이 결박되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고, 목은 목줄로 매어져 있는 그녀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는 엉엉 울면서 온몸을 악착같이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불현듯 열다섯 살의 여름날이 생생히 떠올랐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모습과 열다섯 소년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명치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내가 고통받은 방법 그대로, 그녀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묵직한 숨을 토해 내고 전화를 받았다.

내방객 응대를 담당하는 데스크 직원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팅 예정이었던 K마린의 이사가 이제 막 도착했다고.

“돌려보내.”

-네?

“최 실장 바꿔 봐.”

-아, 네. 알겠습니다.

데스크 직원은 당황해하다가 황급히 전화를 돌렸다.

“최 실장, 오늘 스케줄 전부 취소하고 지금 당장 차 대기시켜. 집으로 가야겠어.”

-사장님, 외람되지만 자리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최 실장은 정중하게 고했다.

“오늘따라 태클이 심하군.”

-중심을 잡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당장 은서에게 가야 해.”

-사장님…….

“은서가 울고 있어.”

그는 화면 속의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 심장이 깨질 듯이 아프다고.”

그는 손으로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유리 날이 심장을 잔인하게 베어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은서에게 가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끝장날지도 몰라.”

그답지 않게 간절한 목소리였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내 최 실장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네. 지시한 대로 하겠습니다.

* * *

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슈트 차림의 차강혁이 들어왔다.

침대에 묶여서 끙끙거리며 흐느끼고 있던 은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울음을 간신히 삼켜 내고 경계심이 그득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출근을 한 그가 왜 벌써 집에 돌아왔는지 의문이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 시간에 여길 왔을까?

하지만…… 무언가 나쁜 짓을 벌이려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약해 보였다.

늘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위축되고 불안한 표정만이 그의 만면에 펼쳐져 있었다.

낯빛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날카롭게 번뜩이던 눈빛은 상처를 입은 것처럼 그늘져 보였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냉혈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저에게 잔인한 형벌을 내린 주제에, 이제 와서 저런 얼굴과 저런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 기가 찼다.

‘왜 차강혁 네가 상처받은 척을 해? 상처 입은 건 나란 말이야!’

뛰어온 건지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는 그는 침대로 다가와 입에 물린 재갈부터 빼냈다.

입속에 내내 박혀 있던 답답한 물건이 빠져나가자 은서는 가슴을 격하게 일렁거리며 날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빠른 손길로 목줄을 풀어내고 손목도 풀어냈다. 그리고 은서를 꼬옥 껴안았다.

그 순간,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왈칵 터져 나왔다. 은서는 어깨를 들썩거리고 숨이 끊어질 듯 꺽꺽 소리까지 내면서 서럽게 울었다.

그는 등을 토닥토닥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잘못했어.”

“흐윽…….”

“내가 잘못했어, 은서야.”

“나쁜 놈…….”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나지막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은서는 그를 거칠게 밀어내고 주먹으로 넓은 가슴팍을 팡팡 때렸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나한테 그런 짓을…… 흐흑…….”

앙칼지게 소리치지만 목구멍이 울음으로 꽉 막혀 있어서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했다. 주먹도 몇 번 휘두르지 못하고 스르륵 맥없이 떨어지고 만다.

은서는 침실이 떠나가라 엉엉 울기만 했다. 어젯밤부터 내내 울었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가 나쁘다는 걸 알고 결혼했다. 그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결혼했다. 그는 나를 미워한다는 걸 알고 결혼했다.

하지만 이토록 극심한 고통과 수모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미우면…… 그냥 죽여 버려. 괜히 사람 고문시키지 말고…… 흐윽…… 차라리 그냥 죽여 버리라고!”

악에 받친 고함 소리가 대기를 쟁쟁하게 갈랐다. 그는 다시 은서를 품에 안았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그녀를 팔뚝에 강한 힘을 실어서 억지로 품에 가둔다.

“미워하지 않아.”

“거짓말……!”

“미워하지 않아.”

“그딴 말 안 믿어. 흑…….”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는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해서 했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에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 * *

지독한 열병이 은서를 덮쳤다.

온몸이 펄펄 끓을 정도로 고열이 치솟아 올랐다. 열병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잔인하게 망가뜨렸다.

설원 같은 하얀 살결 위에는 장밋빛 발진이 군데군데 피어났다. 임파선은 볼록하게 부어올랐고, 비대해진 편도는 목구멍을 꽉 죄어 와서 말을 내뱉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리는 누군가가 망치로 연신 내리치는 것처럼 아파 왔고, 소화가 되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를 해야 했다.

은서는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강혁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번번이 의사를 불러다 혈관에 갖가지 종류의 링거 바늘을 꽂아 넣었고 약을 강제로 먹였다. 홍 집사를 시켜서 맛도 없는 죽을 삼시 세끼 내내 먹였으며 이마에 얹어 놓은 물수건을 수시로 갈아 치웠다.

열흘이 지나서야 고열이 내리고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장밋빛 발진도 연해졌고 두통도 잦아들었다. 구토도 그쳤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름은 이제 가장 잔인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폭염이었다.

* * *

은서는 변했다.

표정이 사라졌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생기로 빛나던 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초연해졌다.

말수도 극히 줄어서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필요한 말이라는 것도 그가 묻는 말에 고작 대답이나 하는 정도였고, 그 대답도 거의 단답으로만 했다.

“밥 먹었어?”

“네.”

“잠은 잘 잤고?”

“네.”

“몸은 어때?”

“네.”

매크로 같은 답변이었다.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네’라고만 대답하고 보는 것이다. 무성의한 응답에 그는 인상을 구겼다.

“몸이 어떻냐고 물었잖아.”

“……좋아요.”

그제야 느릿느릿 올바른 답이 나왔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지?”

“네.”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낮출까?”

“네.”

“수영하러 나갈래?”

“네.”

“정말?”

무심코 ‘네’라고만 하다가 그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은서는 뒤늦게야 인식했다. 수영 따위 하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당황하거나 난감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대답을 정정할 뿐이다.

“……아니요.”

그녀는 행동이 굼뜨게 느려졌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정신을 놓은 듯했고 의식은 흐리멍덩해 보였다.

가장 활짝 피어야 할 순간에 시들어 버린 꽃 같았다. 영혼이 없는 인형 같았다.

그럴수록 차강혁은 섹스에 집착했다. 은서가 그나마 사람다워질 때가 바로 섹스를 할 때였으니까.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던 그녀지만, 섹스에 길들여진 몸은 그에게 삼켜질 때마다 저절로 반응했다.

“흐으응…….”

다리가 벌어지고 그가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온다.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동공이 형편없이 풀려 버렸다.

신음을 참아 보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어 보기도 하지만, 그가 허리를 강하게 쳐올리자 어쩔 수 없이 간드러진 교성이 잇새로 끙끙거리며 새어 나갔다.

“하읏.”

“은서야, 넌 내 거야.”

그는 격렬하게 페니스를 쑤셔 박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지 않아도 웃지 않아도, 넌 내 거라고.”

더운 숨결이 은서의 귓가로 달라붙었다. 따스한 봄에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좋았었다. ‘내 거’라는 단순하고 유치한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의 광적인 집착이 무섭고 공포스럽다.

* * *

한동안 칩거 생활을 이어 가던 은서가 다시 외출을 시작하자, 그는 사람을 하나 붙였다.

실버색의 뷰익 차량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몰래 따라붙는다. 은서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고, 뷰익은 골목길에 주차를 해 놓고 스튜디오의 넓은 창을 주시했다.

은서는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누나,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사과하고 싶은데 만날 수 있을까?]

[만나는 게 안 된다면 통화라도 하고 싶어.]

[누나 목소리라도 들려줘. 제발 부탁이야.]

[이대로 누나를 잃을 수는 없어.]

우현이 보낸 메시지들을 확인하는데 잦아들었던 두통이 다시 악령처럼 되살아났다. 은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현도 수많은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우현이 납작 엎드려서 빌고 있다면, 지현은 화를 내고 있었다.

[우현이 지금 12주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야. 애 얼굴이 다 망가졌다고!]

[어떻게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수가 있어?]

[우현이가 실수한 거 알아. 하지만 아무리 실수를 했어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짓이겨 놓는 건 아니지 않아?]

[네 남편 좋게 봤는데 내가 눈이 완전히 삐었었네. 네 남편이란 사람 진짜 무섭다.]

[은서 너,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내 전화 받아! 네가 사람이면 우현이 병문안이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은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심하게 다친 우현이 걱정되면서도, 오랜 우정을 배반한 우현이 원망스러웠다. 동생만 감싸고 도는 지현에게 서운하면서도, 동생의 일이기에 화를 내는 지현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수선하게 뒤엉킨 마음들을 그들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은서는 남매들이 보낸 메시지를 모두 지우고 그들의 전화번호도 삭제했다.

지현의 말대로 비겁하게 피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신우현과 관련된 연결 고리는 이쯤에서 독하게 끊는 것이 신상에 도움이 되리라. 공연히 연락을 주고받아서 그의 분노를 부추기면 안 되기에.

다시 또 목줄에 매이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남매와의 인연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오래도록 함께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보낸 세월이 정말로 길었다. 청춘을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리도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 순간, 희미한 깨달음이 피어올랐다.

차강혁은 나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오직 그의 품 안으로만 나를 이끌려고 한다는 것을.

그는 나에게 섹스로 쾌락을 가르치고 내 영혼을 타락시켜서, 그의 사랑을 깨트린 내게 복수를 가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은서는 허탈한 미소를 짓고 스튜디오 한쪽에 있는 그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채색 작업이 덜 끝난 미완의 초상화와 목탄으로 스케치된 무릎 꿇은 헤라클레스를 번갈아 바라본다.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맹독이 묻은 화살로 그리스의 신들조차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 독은 불사의 생명을 지닌 신들이 기꺼이 자살을 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독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강혁이 내 심장에 찔러 넣은 독도 신화 속의 독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 * *

“아, 고국의 냄새! 역시 한국인은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니까.”

캐리어를 끌고 복잡한 공항을 빠져나온 민승아는 양팔을 넓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덥고 습한 공기가 호흡 기관으로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마냥 반갑기만 했다.

한국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승아는 고국의 공기를 실컷 만끽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역삼동에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이었다.

택시는 여름의 열기를 가르며 도로 위를 달려 나간다.

승아는 차창 밖의 풍경을 다소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전에는 전혀 색다를 게 없던 풍경들도 오랜만에 보니 특별하게 다가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 시간쯤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승아는 번쩍번쩍 빛나는 신축 건물을 길게 훑어보고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18층에 멈춰 섰다. 승아는 1805호실로 찾아 들어가 현관에다 캐리어를 대충 두고 집 구경부터 했다.

입구에 신발장이 크게 있었고, 짧은 복도를 지나 주방과 거실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침실과 욕실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신축 건물답게 모든 옵션 기기들은 최신식이었다.

이만하면 혼자 살기에는 딱 좋았다. 예전에 살던 대학가의 6평짜리 허름한 원룸에 비교하자면 이 오피스텔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 할아버지 덕분에 호강하네.”

유 회장이 준 봉투에는 꽤나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뉴욕에서 버는 것도 없이 내내 소비만 하다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돈이 제법 남아서 이렇게 근사한 오피스텔을 구했으니까.

오늘은 짐 정리를 대충 하고, 내일은 차를 뽑으러 갈 것이다. 강렬한 레드 색상에 예쁘고 섹시하게 생긴 놈으로 골라야지.

승아는 거실의 커다란 창 앞으로 다가섰다. 도심의 전경을 널리 아울러 볼 수 있는 뷰가 훌륭했다.

“내 나라에 돌아오니까 화병이 싹 가라앉는 것 같아.”

승아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 생활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은 도통 늘지 않았고 오디션은 번번이 떨어지기만 했다. 미국에 가면 다들 나를 보고 환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투명인간 취급이나 당했다. 쇼에는 단 한 번도 서 보지 못했다.

만나는 놈들도 죄다 머저리들뿐이었다.

스윗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뒤로는 두 다리, 세 다리를 걸치고 있는 놈이 있지를 않나,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몰래 돈을 훔쳐서 마약을 사는 놈이 있지를 않나, 제 친구랑 쓰리썸을 해 보겠냐고 묻는 놈이 있지를 않나, 생일이라고 선물을 달라고 했더니 찌질하게 포스트잇에다 시를 적어서 주는 놈이 있지를 않나.

엮이는 놈들마다 죄다 허접한 쓰레기들뿐이었다.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오빠가 최고였는데…….”

차강혁이 좋기는 좋았다. 얼굴 잘생겼고, 키 크고, 몸매 끝내주고, 목소리 좋고, 돈 많고, 능력 출중하고, 학벌 좋고, 혈통 타고났고.

뭐, 성격이 더럽고 워커홀릭이라 거의 데이트도 못 해 봤지만, 그 정도 되는 남자라면 그런 사소한 문제들은 얼마든지 눈감고 넘어갈 만했다.

“생일이라고 징징거렸더니, 알아서 선물 사라며 카드 던져 줄 때는 눈물 나게 감동받았다고.”

승아는 바벨탑처럼 높이 솟아오른 도심의 마천루들을 바라보며 결연하게 다짐했다. 차강혁을 되찾고야 말겠다고.

“오빠를 다시 잡아야 돼.”

그의 내연녀가 된다면 인생이 다시 재미있어지리라.

그에게 카드를 받아서 명품 쇼핑도 하고, 그 순진한 여자 몰래 밀회를 가지면서 불륜의 짜릿한 스릴도 즐기고.

물론 뉴욕으로 떠나기 전, 그에게 바람이나 피우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싸늘하게 화를 냈었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지금 그의 생각은 아마도 달라졌을 테다.

“지겨운 결혼 생활에 지쳤을걸.”

결혼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미혼남보다 유부남을 꾀어 내는 게 훨씬 더 쉽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거기다,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고 뻔하고 뻔한 정략결혼이었다.

그의 결혼 상대자는 남자를 녹이는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숙맥이었다. 딱 봐도 남자한테 애교는 부리지도 못하는 둔하고 멍청한 곰 스타일이었다.

청순한 외양과 단아한 매력에 처음에는 혹할지 몰라도, 그런 지루한 여자는 금방 질리는 법이다.

“자고로 여자는 나처럼 여우 같은 면이 있어야 한다고.”

자화자찬을 한 승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차강혁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서 메시지를 입력했다.

전화번호가 달라져서 모르는 번호라고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승아는 키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오빠, 나 승아야. 있잖아, 나…… 한국으로 돌아왔어. 오빠는 그동안 잘 지냈어? 난 하나도 못 지냈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승아는 메시지를 보내 놓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오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많이 놀라겠지? 그리고 기뻐할 거야. 오빠도 날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다며 반색할 거야.

답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함흥차사다.

한 시간이 지나도 답이 오지 않자 승아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전화를 할까, 아니면 더 기다려 볼까 고민을 하던 때였다.

답장이 드디어 도착했다.

[돌아왔다고?]

[응. 미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빠가 없으니까 영 재미가 없더라. 나 오피스텔 구했어. 시간 날 때 놀러 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승아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냉정하게 나를 버렸지만 사실은 계속 나를 그리워했던 거야. 그렇지? 나를 못 잊어서, 내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지?

승아는 애를 태울 겸 벨 소리가 일곱 번쯤 울리는 걸 기다린 다음에야 통화를 연결했다.

“응,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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