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 *
한가로운 토요일, 강혁은 아침부터 유 회장을 만나 골프를 쳤다.
하늘은 청명하고 햇살은 화창해서 골프를 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드넓게 펼쳐진 푸르른 페어웨이로 하얀 공이 멀리 날아간다.
총 18홀 중, 9홀까지 치고 두 남자는 그늘 집으로 들어왔다. 휴식도 취하고 가볍게 요기도 할 참이었다.
“이제 와 묻지만 자네 골프는 좋아하나?”
유 회장이 모자를 벗고 물었다. 강한 햇살에 아래서 내내 클럽을 휘두른 유 회장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냥 그렇습니다. 골프는 동생이 좋아하죠. 저는 보다 격렬한 운동을 좋아합니다. 풋볼이나 하키 같은.”
“이런, 내가 실수했군.”
“전혀요. 골프는 그저 그래도 골프장의 전경은 좋아합니다. 탁 트인 페어웨이를 보면 머리가 맑아지니까요.”
유 회장은 잠깐 탄식하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사위의 말에 금세 표정이 환해졌다.
“맞아. 기분 전환할 때는 골프장이 딱이지. 사실 걱정했네. 내가 공연히 불러내서 자네가 불편해할까 봐.”
“불편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불러 주세요.”
잠시 후, 테이블 위로 음식이 세팅되었다. 해물전과 막걸리였다.
꾸밈없는 성격의 유 회장은 평소 소탈한 음식들을 즐겨 먹고는 했다. 특히, 막걸리는 골프 게임 중간에 출출한 속을 달래는 데에 아주 좋은 술이었다.
강혁은 바른 자세로 유 회장의 사발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본인의 잔에도 술을 채우려는 순간, 유 회장이 자상하게 말했다.
“자네 술은 내가 따라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는 술이 담긴 주전자를 유 회장에게 건네주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들었다. 쪼르르, 희뿌연 술이 사발 잔을 먹음직스럽게 채웠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유 회장은 해물전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그의 앞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맛있게 먹게.”
온화하게 웃는 유 회장의 얼굴을 보며 그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엄하고 고압적인 독선가다. 폭언은 기본이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고성을 내지르고 집기를 내던지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뭐, 그렇다고 아버지를 미워한다거나 원망하는 마음 같은 건 없다. 그런 사춘기적 감성에 취할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훌쩍 지났으니까.
하지만 원망하는 감정은 없다고 해도, 아버지를 대할 때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지는 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속이 거북해지고 마음속의 여유가 사라진다.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유 회장은 선인이었다. 인자하고 자상하고 곧잘 웃어 주고 대화도 잘 통하고. 이런 선인을 대하는데 불편해할 이유는 하등 없다.
“우리 은서랑은 잘 지내고 있나?”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은서가 답답하진 않아? 워낙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아이라.”
“조금은요.”
차강혁의 대답은 역시나 직구였다. 아부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무미건조한 막내 사위의 태도에 유 회장은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
“자네, 정말 너무하는군.”
“장인어른께선 솔직한 대답을 원하실 것 같아서요.”
“맞아. 내가 그래서 차 서방을 좋아하지. 우리 은서도 자네처럼 솔직하고 당당했으면 좋았을 텐데.”
유 회장은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우리 은서는 어릴 때부터 낯도 심하게 가리고, 수줍음도 잘 타고, 소극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그 성격 고쳐 보려고 유명한 아동 심리 전문가들한테도 데려가 봤는데, 다들 한다는 말이 기질적으로 타고난 천성이라 쉽게 바꿀 수가 없다고 그러더군.”
그는 유 회장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타고난 성향이 그런 데다 자라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이 더 소심해지더라고.”
“이를테면, 어떤 일들 말입니까?”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입원 생활을 오래 한 것도 그렇고, 처음으로 마음 주고 사귄 놈한테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일도 있었고…….”
유 회장은 말끝을 씁쓸하게 흐렸다.
“그 남자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검은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교통사고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처음 사귄 남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없다. 왠지 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안테나가 꼿꼿하게 섰다.
“대학교 때 일이야. 학교 선배라는 놈이 감언이설로 우리 은서를 꾀어 내서 1년이나 교제했지.”
유 회장을 착잡한 표정으로 해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차 서방도 은서 다리에 큰 흉터가 있는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놈이 우리 은서 앞에서는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어 놓고…… 은서가 잠들었을 때, 몰래 흉터 사진을 찍어 놓았지. 그러곤 술자리에서 동기들이랑 사진을 돌려 보며 몹쓸 말들을 했어.”
불쾌한 스토리에 짙은 눈썹이 묘하게 움찔거렸다.
“그놈이 어떤 소리를 나불거렸는지는 차 서방도 대충 짐작할 거라고 생각하네.”
뻔했다. 그런 얼간이 새끼가 술자리에서 영웅 심리에 취해 여자에 대해 지껄이는 말이라면.
“워낙 친한 동기들끼리 모인 술자리라 그놈은 비밀이 지켜질 거라고 믿었나 봐. 근데 거기 있던 녀석들 중 한 명이 우리 은서한테 사실을 다 알려 줬지.”
“…….”
“그 일은 결국 내 귀에도 들어왔고, 난 당장 총장을 찾아가 학생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키는 거냐고 따졌지. 결국 그놈을 퇴학까지 시켰지만…… 그런다고 상처가 쉽게 아물겠나.”
“…….”
“우리 은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남자야. 처음으로 마음을 준 남자라고.”
“…….”
“그놈이랑 한 달도 아니고 무려 1년이나 만났어. 1년 동안 우리 은서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랑한다고 하던 놈이, 뒤로는 너절한 말들을 하며 은서를 웃음거리로 만든 거야.”
“…….”
“그 일로 우리 은서가 자신감을 많이 잃었어. 안 그래도 여린 아이인데……. 휴학도 두 학기나 하고,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남자를 아예 만나지도 않았지.”
그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처음에는 다 큰 딸을 금이야 옥이야 싸고도는 유 회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장인어른의 과잉보호에 철저히 동의하는 입장이 되었다.
혼자 내버려 두기에는 불안한 여자다.
정글 같은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 두기에는 너무 나약한 여자라, 그녀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강한 보호막을 쳐야 한다.
“우리 은서가 좀 더 씩씩하고, 좀 더 당차고, 좀 더 자신만만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 성격이 원하는 대로 짜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
유 회장은 막걸리를 한 모금 넘기고 다시 말을 꺼냈다.
“차 서방, 혹시 후회하나? 우리 은서랑 결혼한 거.”
이와 동일한 질문을 은서에게 던진 적이 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차강혁의 대답은 달랐다.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견고한 목소리에 유 회장은 턱을 슬슬 매만졌다.
“흐음, 서로 성향이 많이 달라서 자주 부딪칠 것 같은데.”
“때때로 부딪칠 때도 있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은서도 예전보다는 저를 훨씬 편하게 여기는 것 같고요.”
“그래?”
“네. 요즘 은서는 저한테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그럽니다. 여느 여자들이 남편에게 그러는 것처럼요.”
“우리 은서가?”
유 회장이 놀랍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반문했다. 원체 순한 아이라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데…….
“가끔은 욕도 하는걸요.”
“욕이라고? 우리 은서가 그럴 리가 없어. 그 애는 제 언니들이 험한 말을 쓰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애야. 우리 은서는 욕 같은 거 할 줄 모른다고.”
“저랑 결혼하고 나서 성격이 조금 변한 모양입니다.”
“어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딸애의 모습에 유 회장은 기묘한 탄성 소리를 냈다.
“은서가 보기보다 재미있습니다.”
그 예쁜 입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욕설을 내뱉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달려들면서 손톱으로 할퀴고 주먹을 날리고 발을 휘두를 때면, 제법 귀엽고 깜찍하다.
“재미있다고? 아까는 답답하다며.”
“답답한 것과 재미있는 건 별개이지 않습니까.”
“하…….”
유 회장이 황당한 얼굴을 하더니 곧 호탕하게 웃었다.
“차 서방도 참 별종이군. 화내고 욕을 하는데 그게 재미있다니. 모쪼록 우리 은서를 잘 부탁하네. 내가 자네만 믿고 있어.”
정글을 지배하는 험악한 사자에게 연약한 새끼고양이를 맡겼다는 사실을, 유 회장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 *
그늘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두 남자는 다시 페어웨이로 나섰다.
푸르른 잔디를 천천히 밟아 가던 강혁은 중요한 사실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장인어른, 혹시 그놈 이름이 뭔지 기억하십니까?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내가 그놈 이름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전병진이야, 전병진. 근데 이름은 왜?”
“그냥 알고 싶어서요.”
그는 ‘전병진’이라는 이름을 뇌리에 깊게 새겨 넣었다.
* * *
월요일 아침, 최 실장은 보스 앞에 서서 스케줄을 브리핑하고 결재 서류를 내밀었다. 강혁은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한 후에 서명을 하고 결재판을 넘겨주며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은서 대학교 선배 중에 전병진이라는 놈이 있어. 그놈에 대해서 좀 알아봐.”
“네. 조속히 알아보겠습니다.”
뜻밖의 지시였지만 최 실장은 ‘왜?’라고 묻지 않았다.
최 실장은 보스의 명령에 하나하나 간섭을 하며 의도를 캐묻기보다는 그저 우직하게 따르는 스타일이었다. 보스의 명령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더 지시할 일은 없으십니까?”
“없어. 그만 나가 봐도 돼.”
최 실장이 물러가자 그는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고 그는 조용히 뇌까렸다.
“나도 참 오지랖이 늘었군…….”
이런 사사로운 부분까지 신경 쓰는 타입은 절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을 그냥 모른 척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유은서를 울릴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나뿐이어야 한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그녀를 울리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 * *
최 실장은 일 처리가 빠른 남자였다.
다음 날 아침이 열리자마자, 최 실장은 출근을 하는 보스를 뒤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최 실장은 전병진에 대해 정리한 문서를 보스에게 건네주고 중요 이력을 조목조목 브리핑했다.
“유 회장님께서 총장을 찾아간 후, 학교 측에서는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술자리에 참여한 전병진의 동기들을 불러 모아 증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두 번째 장에 있습니다.”
강혁은 페이지를 한 장 넘기고 활자들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1년 내내 꼴렸는데 바지 벗기는 순간 발기가 탁 풀리더라.]
[그동안 자위나 하면서 존나게 쌓아 둔 환상이 다 날아갔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고 따먹으려고 했는데 그년이 존나 튕기더라.]
[그년이 부잣집 딸만 아니었으면, 물뽕 먹여서 골뱅이로 만든 다음에 따먹는 거였는데.]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내용을 확인하니 격노가 치밀었다. 더 보기 싫다는 듯 그는 거친 손길로 페이지를 덮었다.
“학교 측은 전병진을 퇴학시키는 조건으로 이 사건을 조용히 덮기로 했고, 유 회장님께서도 이에 동의를 하시고 따로 고소를 진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일이 커지면 사모님께서 더 상처를 받으실 거라 판단하시고 그쯤에서 정리를 하신 듯합니다.”
그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어른의 결정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유리처럼 깨지기 쉽고 유약한 여자라, 일을 크게 키우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었다.
“퇴학을 당한 전병진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학위를 땄고, 한국으로 돌아와 입시 미술학원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수강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를 당하면서 학원도 접게 되었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형은 얼마나 나왔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입니다.”
그는 미간을 진하게 구겼다.
“집유라고? 입시 미술학원이면 피해자가 미성년자 아닌가?”
“초범이고 피해자 부모와 합의를 한 게 법정에서 참작된 것 같습니다. 그 후에는 웹툰 작가로 전향해서 ‘집념의 사나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 실장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에서 웹툰 페이지를 찾아 그에게 전해 주었다.
“현재 연재하고 있는 웹툰입니다. 전체연령가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이 많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순위는 항상 상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판권 계약도 맺었다고 합니다.”
그는 화면에 뜬 웹툰을 대충 훑어보다, 흥미 없다는 식으로 태블릿 PC를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웹툰 인기가 워낙 좋아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데, 인터뷰에 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SNS도 하지 않고, 출판사 관계자들과도 미팅 없이 메일로만 원고를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신분이 노출되면 범죄 사실이 드러날까 봐 몸을 극도로 사리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시선을 흘긋 내려 문서의 첫 장을 주시했다. 전병진의 사진이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그는 만년필의 예리한 펜촉으로 전병진의 얼굴을 쿡쿡 찍으면서 물었다.
“이 녀석, 오른손잡이인가?”
의외의 질문에 최 실장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기민하게 표정을 정돈했다.
“그 부분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됐어. 양손잡이라고 생각하지.”
순간, 그가 눈빛을 칼끝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명백한 악의가 배어 있는 눈빛이었다.
사무실 안은 단번에 음산하고 냉혹한 공기로 에워싸였다. 살벌한 냉기에 최 실장 역시 온몸이 싸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아 어깨를 흠칫 떨었다.
* * *
새벽 4시, 집념의 사나이 전병진은 원고를 담당자에게 발송하고, 좀비 같은 몰골로 편의점으로 기어들어 가서 컵라면으로 출출한 속을 때웠다.
그런 다음, 시원 달달한 아이스 바로 입가심을 하며 터덜터덜 인적 드문 새벽의 거리를 걸었다.
어둡고 적막한 길 위에는 병진과, 대략 2m 정도 앞에서 휘청휘청 불안하게 걸어가고 있는 술에 취한 여자밖에 없었다.
‘뒤태 죽이는데. 몇 살쯤 됐으려나.’
여자의 뒷모습을 음흉한 시선으로 훑어보며 병진은 속으로 지껄였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불쾌한 눈길을 감지했는지 여자가 살짝 뒤를 돌아본다. 병진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쫓기는 사람처럼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옘병, 못생긴 게 쫄기는. 뭐, 그래도 몸매는 쓸 만하니까.’
병진은 빨라진 여자의 보폭을 따라 걸음 속도를 높일까 생각했지만 금방 마음을 접었다. 집행유예 기간이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자칫하면 진짜 감방으로 끌려가는 수가 있었다.
아쉬움에 혀를 찬 병진은 아이스 바나 쪽쪽 빨아먹었다.
‘성추행으로 기소만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년 뒤를 바짝 따라붙어서 실컷 겁을 줬을 텐데.’
조금 뒤, 빌라 건물이 하나 나왔다. 여자는 잽싸게 뛰어가 황급히 입구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 안으로 미꾸라지처럼 들어갔다.
길 위에는 이제 병진 혼자만 남았다.
그러나 이내, 좁다란 골목길에서 느닷없이 체격 좋은 장정 세 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척척 걸어와 병진을 둘러쌌다.
“뭐, 뭡니까.”
당황한 병진이 말을 더듬거렸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저보다 체격이 훨씬 큰 남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니 단전에서부터 공포감이 치솟았다.
병진의 머리가 차게 식으면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대체 이것들은 뭐지? 깡패들인가?’
하지만 질 좋은 캐시미어 슈트에 캄캄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남자들은, 깡패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했고 세련되었다.
다들 똑같은 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달리 특징이랄 게 없는 그들은 조폭이나 깡패보다는, 훈련을 잘 받은 경호원이나 특수 요원 쪽에 가까워 보였다.
“원하는 게 뭡니까? 돈입니까?”
병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윤기가 철철 흐르는 슈트를 보면 돈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작정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으니.
“이 돈 받고 그만 가세요. 무, 물러서지 않은 소리를 지르겠습니다.”
병진이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동안 세 명의 남자들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5분 거리에 지구대가 있거든요. 제가 소리 지르면…… 우웁!”
촉새처럼 떠드는 와중에 입안으로 솜뭉치가 쓱 밀려 들어왔다.
재갈처럼 솜뭉치를 쑤셔 넣은 남자는 병진의 멱살을 휘어잡고, 그들이 처음 튀어나왔던 으슥한 골목길로 질질 끌고 갔다. 나머지 두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남자는 병진의 몸을 시멘트 벽에 퍽 내동댕이쳤다.
아찔한 통증이 척추를 훑어 내린다. 고통에 찬 비명은 솜뭉치에 막혀 그대로 삼켜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병진은 목구멍 안쪽에서 숨을 급박하게 몰아쉬었다.
그때, 남자가 병진을 뒤에서 붙들어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머지 두 남자는 병진의 양 손목을 사이좋게 나눠서 붙잡았다.
완전히 포박당한 병진은 두려움으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극한의 공포였다. 이때까지는 이런 위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 새끼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대체 뭐 하는 놈들인데…….’
생각은 그쯤에서 끊겼다. 남자 두 명이 동시에 병진의 양 손목을 잔인하게 꺾어 버리자 격통이 덮치고 의식은 희미해졌다.
* * *
손목은 여러 번 꺾였다.
남자들은 이미 부러진 손목을 꺾고 또 꺾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병진은 양쪽 손목뼈가 산산이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신경까지 끊어졌다.
병진은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손목이 완전히 멀쩡해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경이 손상된 정도가 심해서, 재활에 최소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년이나요?”
1년이라니. 한창 연재 중인 작품도 있는데 재활에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건, 웹툰 작가로서 치명적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유감스럽지만, 재활을 해도 후유증이 남을 겁니다.”
“후유증이요? 선생님, 저 그림 그리는 놈인데요……. 그림 그리는 데에 지장은 없겠죠?”
“재활을 마치고 나면 그림을 그릴 수야 있겠지만, 예전처럼 장시간 손을 사용한다거나 섬세한 작업을 하는 건 무리입니다. 과도하게 손을 쓰면 손목이 버티지를 못하니 손을 최대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림쟁이에게 손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라니. 병진은 입원실에서 누워 병원 천장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절망과 좌절감을 곱씹었다.
괴로움에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지만, 양 손목이 깁스로 단단하게 감겨 있어서 눈물을 닦아 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병진의 절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입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 언론사가 유명 웹툰 작가인 ‘집념의 사나이’의 실체를 밝히는 기사를 올렸고, 그 기사로 병진의 신상 정보와 성범죄 행각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집념으로 어렵사리 쌓아 올린 커리어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
밤이 깊었다. 은서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바라보니 10시쯤 되었다.
‘언제 오려나…….’
아직 귀가하지 않은 남편이 대략 몇 시쯤 들어올지 궁금했지만, 은서는 굳이 전화를 건다거나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았는가. 남편에게 연락을 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때가 되면 들어오겠지, 라며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활자를 눈으로 따라 읽었다. 세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차강혁일까 싶어서, 은서는 날쌘 동작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액정에 뜨는 이름은 지현이었다.
-은서야, 너 그 쓰레기 소식 들었니?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지현은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쓰레기?”
-전병진 말이야.
전혀 반갑지 않은 이름에 은서의 만면이 볼품없이 어그러졌다.
“그 인간이 왜?”
-새벽에 괴한들한테 린치를 당해서 입원 중이래.
“뭐?”
-그리고 오늘 기사가 떴는데, 그 쓰레기 미성년자 성추행도 했더라?
“성추행? 세상에…….”
아연해진 은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학원 차렸다가 미성년자 성추행 때문에 접고, 익명으로 웹툰 그리다가 오늘 정체가 빵 터진 모양이더라고. 와, 진짜……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건지.
충격적인 소식에 은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였구나. 그런 인간을 한때나마 좋아했었다니.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시간들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다.
-이번에 벌 제대로 받은 거지. 그 괴한들이 전병진 양쪽 손목을 완전히 거덜 냈대. 너무 심하게 부러뜨려서, 나중에 회복해도 그림 그리는 데에는 지장이 생길 거라고 하더라.
“손목을? 그것도 양쪽 다?”
-그래, 양쪽 다. 기왕이면 불알도 같이 터뜨려 주지!
“다른 곳은 멀쩡한데 손목만 다친 거야?”
-응. 손목만.
“그럼 누가 의도적으로 노린 거네.”
-그렇지. 전병진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사주한 거겠지. 딱 봐도 전문가들 솜씨라 잡지는 못할 거라고 하더라.
“그 일을 사주한 사람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은서가 어깨를 으스스 떨었다. 당해도 싼 놈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림쟁이에게 손목이 망가졌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니까. 차라리 얼굴을 흠씬 두들겨 맞아 이빨이 몇 개 나갔다면, 이렇게 잔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난 너무 고소한데! 그런 쓰레기는 호되게 당해야 돼!
“나도 인과응보라고는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무서워. 일부러 손목만 노려서 공격한 것도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고……. 아무튼 밤길 조심해야겠다. 그런 사람들이 나쁜 사람만 공격한다는 법은 없잖아.”
-아냐, 아냐. 착하게 살면 원한 살 일도 없고 무서울 것도 하나 없어.
지현과는 10분가량 대화를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은서는 다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왠지 마음속이 찝찝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책을 덮어 버렸다.
전병진이 당했다는 소식이 반은 통쾌했고 반은 무서웠다. 마음 한켠에서 은근히 통쾌함을 느끼는 자신이 악랄한 것 같아 죄책감도 들었다.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고 해도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면 안 되는 건데…….’
마음이 어수선하고 머릿속이 산만해진 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차강혁이 들어왔다.
“이제 퇴근했어요?”
“어.”
“밥은요?”
“먹었어.”
그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드레스 셔츠 단추를 끌렀다. 그러다 하얗게 질린 은서의 안색을 확인하고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아픈 게 아니고……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서요.”
“무슨 소식?”
“대학교 선배가 얼마 전에 괴한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대요.”
“안됐군.”
그는 무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됐다’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혁 씨도 조심하세요. 무서운 세상이에요.”
무성의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은서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는 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은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일컬은 ‘무서운 세상’이라는 게 바로 차강혁 그 자체라는 것을.
* * *
순조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영속적이지 않다. 조용한 호수에도 돌멩이는 언제든 날아올 수 있고, 그 돌멩이로 인해 고요하던 호수 위로 거센 파문이 일기도 하는 법이다.
그날이 그랬다.
늦은 저녁, 은서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의 서재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이 집에서 그의 분위기를 한껏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서재니까.
“허락도 없이 들어와 조금 찔리긴 하지만……. 늦게 들어온 벌이라고 생각하세요, 차강혁 씨.”
혼잣말을 중얼거린 은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재를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이 집에서 함께 지낸 지도 벌써 수개월이 흘렀지만, 그의 서재에 발을 디딘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차강혁과는 딱 그 정도 사이였기 때문이다. 몸은 숱하게 공유해도 그 이외의 것들은 전혀 공유하지 않으니까.
씁쓸함을 잠깐 동안 짓씹던 은서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의 서류들이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의자에 앉아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이렇게 그의 공간을 몰래 훔쳐보고 있으니까 씁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었다.
“어, 여긴 잠겨 있네.”
마지막 서랍은 꽉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구나 싶었다. 은서는 책상 구경을 마치고 책장을 살펴보았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제목만 봐도 은서의 취향과는 수천 광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경영, 해양, 조선, 경제, 공학…….
은서는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경영의 철학》이라는 책을 빼서 펼쳐 보았다. 그런데 그때,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은서는 허리를 굽혀 사진을 주웠다. 사진 속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민승아…….”
희미하게 흐려진 말끝으로는 불쾌한 여운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사진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머릿속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뒤죽박죽되었다.
은서는 사진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풍겨 오는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해변을 배경으로 민승아가 해맑게 웃으며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매직으로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지칠 때마다 내 얼굴 보면서 힘내기! 사랑해, 오빠♥]
싱그러운 모델의 모습과 사랑스러운 글씨를 보는데 속이 메스꺼워졌다. 가슴속에서는 무언가 단단하게 응어리진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불현듯 제 지갑 속에 꽂아둔 그의 사진을 떠올랐다. 은서는 웨딩 사진들 중에서 제일 잘 나온 그의 사진을 오려 내서 지갑 속에 넣어 두고 심심찮게 들여다보고는 했다.
자신이 사진 속의 그를 보듯이, 그도 사진 속의 민승아를 보며 지내 왔던 것이다.
누군가의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누군가의 사진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은서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아직도…… 민승아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여전히 그 여자를 못 잊어서…… 이렇게 책 속에 몰래 사진을 숨겨 두고,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면서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는 거야?’
결혼을 하고서도 옛사랑을 잊지 못해 옛사랑의 물건을 처분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차강혁이 그럴 줄은 몰랐는데…….’
워낙 냉정한 남자라, 여느 남자들처럼 옛 연인을 아직도 사랑하고 그리워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헤어짐의 원인을 제공한 저를 막연히 미워한다고만 여겼지, 민승아를 여태껏 마음속에 담아두고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민승아는 빙벽처럼 차가운 그의 심장을 따뜻하게 녹이는 유일한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저 섹스 도구에 불과하다면, 민승아는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인 여자였을지도……. 그러니 사진이나 몰래 찾아보면서 애틋한 그리움에 젖는 거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동그란 눈물이 사진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은서는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흐려진 시야에도 민승아의 아름다움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이리도 매력적인데, 남자라면 더하겠지…….’
한이라도 쏟아 내듯 울음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쉰 은서는 사진에 묻은 눈물 자국을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지워 냈다. 사진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그의 소중한 추억을 망쳐서는 안 되니까.’
은서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시 책 속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책을 책장에 집어넣고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책이 책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사진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바닥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찾아간 재즈 바는 변한 게 없었다.
마스터도 그대로였고, 훌륭한 음악도 그대로였고, 낭만적인 분위기도 그대로였으며, 세련되고 우아한 인테리어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은서도 예전 그대로였다. 그깟 사랑 때문에 여전히 바보처럼 가슴앓이를 한다.
그냥 초연해지면 편할 텐데. 왜 자꾸 감정이 이리로 튀고 저리로 튀는지 모를 일이다. 쉽게 아파하고, 쉽게 감동받고, 쉽게 괴로워하고, 쉽게 들뜨고…….
서른한 살이 되었는데도 어른이 되려면 깜깜 멀었나 보다. 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의 높은 체어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중앙 홀에서는 솔로로 트럼펫을 연주하던 남자가 내려가고, 실크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 가수가 올라와 스탠드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밴드의 연주에 맞춰 아리따운 음색과 서정적인 감성으로 엘라 피츠제럴드의 《Yesterdays》를 불렀다.
‘달콤하고 즐거웠던 지난날들, 모든 것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지. 오늘도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린다네…….’
선곡이 아주 기가 막혔다. 차강혁이 이 노래를 들었어야 했는데. 이건 그를 위한 노래니까.
“오랜만에 오는군요.”
마스터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밝은 얼굴도, 친절한 태도도, 역시 그대로였다.
은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오랜만이긴 하지. 결혼한 후로는 처음 오는 거니까.
“어떤 걸로 줄까요?”
“위스키요.”
자못 대담한 주문이었다. 은서의 술 취향과 주량을 익히 알고 있는 마스터는 눈을 크게 떴다.
“위스키는 못 마시잖아요.”
“마셔 봤어요. 먹을 만하던데요.”
작년 가을, 은서는 오피스텔에서 차강혁이 거의 반강제로 먹이던 위스키의 맛을 떠올렸다. 목구멍이 탈 것 같았고 미치도록 썼다.
그 정도로 독한 술이라면 취하는 건 금방이리라.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취하고 싶었다. 흥청망청 취해서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면 울적했던 기분도 나아지겠지.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잿빛 그늘이 진하게 내려앉은 눈동자를 확인한 마스터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은서는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을 두고 ‘무슨 일’이라고 부르는 건 과분하다. 차강혁에게 상처 받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하지만 상처가 만성이 되었다고 해도 술은 필요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어서 위스키를 주세요.”
은서는 재촉하듯 말했다.
“피치크러시를 만들어 줄게요. 맛도 상큼하고 달달한 데다, 컬러가 예뻐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예요.”
“난 오늘 위스키를 마시려고 왔어요.”
마스터의 다정한 제안에도 은서는 끝까지 위스키를 고집했다. 피치크러시 같은 부드러운 술은 취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럼 온 더 락으로 줄게요.”
“스트레이트로 줘요.”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냥 오랜만에 여기 오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흠뻑 취하고 싶네요.”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데 눈은 꼭 울 것만 같았다. 마스터는 슬픔에 잠긴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내젓고, 스트레이트 잔을 바 위에 탁 올려놓았다.
투명한 잔에 갈색의 술이 채워진다. 술을 적당히 채운 마스터는 주방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은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아…….”
독한 맛에 저절로 인상이 이지러지고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코올의 짙은 농도에 목구멍으로 아릿한 통증이 감돌았다.
이렇게 고약한 술을 몇 번 쭉쭉 들이켜다 보면, 책 속의 사진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듯했다.
남은 술을 마저 삼켜 낸 은서는 빈 잔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지만 주방으로 들어간 마스터는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저쪽 멀리 있는 다른 바텐더를 부르려다가 분주해 보여서 관뒀다. 은서는 턱을 괴고 멍한 시선으로 비어 있는 술잔만 응시했다.
그때, 낯선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혼자 왔어요?”
하, 이 지겨운 멘트. 은서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흘긋 훑어 내렸다.
나이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고, 얼굴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미남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본인을 미남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아도취적 나르시시즘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계속 보니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스포츠 뉴스!’
스포츠 뉴스에서 남자를 본 적이 있다.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지만, 안타깝게도 골보다는 홈런을 더 잘 때리는 축구 선수라지.
“되게 빤히 쳐다보네. 나한테 반했어요?”
남자는 기름기가 잘잘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느물거렸다.
은서는 입매를 비식거렸다. 차강혁이 내 눈을 하늘 끝까지 높여 놓은 탓에, 고작 이 정도 얼굴로는 성에 안 찬단다.
“혼자서 조용히 마시고 싶으니까 말 걸지 마세요.”
은서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도도한 태도가 오히려 남자의 도전 의식에 불을 당긴 듯했다.
“왜? 같이 마시면 좋잖아. 혼자서 술을 무슨 맛으로 마셔?”
남자는 벌써부터 반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게 연하남 특유의 저돌적인 매력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정이 있어서 반지는 끼지 않았지만 결혼한 몸이에요. 집적거리지 말아요.”
“결혼한 게 뭐 어쨌다고? 난 촌스럽게 그런 거 안 따져.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잖아?”
“그쪽은 잘 못 넣는 것 같던데요?”
뾰족한 힐난에 남자가 이맛살을 구겼다. 하지만 이내 구긴 표정을 펴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어디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날 씹어 대는 소리를 들었나 본데, 이래 봬도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야. 슈팅 실력은 내가 한국에서 최고라고.”
“뭐, 그래요. 그쪽 슈팅 실력이 뛰어나다고 치죠. 그래도 나한테는 안 통해요. 난 그쪽 얼굴도 별로고, 키도 작아서 싫으니까.”
차강혁의 거만한 태도에 전염이라도 된 걸까. 겸손과 공손의 여왕, 유은서가 이렇게 시건방지게 나오다니.
하지만 지금은 평소처럼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 가며 ‘이만 물러가 주세요.’라고 사정할 여력이 없었다.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하면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어진다.
“아니, 얼굴이야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그렇다 치고. 객관적으로 내 키가 작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나?”
남자는 어이없다는 식으로 반문하고는 바 체어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봐. 나 184라고. 이게 대체 어디가 작다는 거야?”
축구 선수답게 단단한 골격과 긴 다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차강혁에 비하면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다.
“난 남자는 190 이상부터 취급해서요.”
“뭐야, 이 누나. 골 때리네.”
남자는 기막히다는 듯 웃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슬쩍 팔을 뻗어 은서의 어깨 위로 걸쳤다.
“비록 키는 190에서 6cm 못 미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놈이거든. 허벅지도 딴딴하고. 만져 볼래?”
“관심 없어요.”
은서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남자의 팔을 걷어 냈다. 하지만 남자는 고집스럽게 다시 팔을 그녀의 어깨 위로 얹었다.
“일단 만져 봐. 만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이 재즈 바는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 주요 회원들은 재벌,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매너를 보장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재수가 없으면 이런 진상도 걸리는 법이다.
“싫다구요. 나 좀 내버려 둬요!”
“누나, 너무 튕긴다. 가시 적당히 세우고 나랑 같이 한잔하자.”
남자가 팔에 힘을 줘서 은서를 바짝 끌어당겼다. 도를 넘는 거북한 스킨십에 은서는 고함을 쳐서 저 멀리 있는 바텐더를 부르려고 했다.
그때 마침, 마스터가 주방에서 나왔다. 은서는 마스터를 향해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조용히 술을 마시려고 왔는데 훼방꾼이 있네요. 이 사람 좀 치워 주세요.”
“뭐? 치워? 누나,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사람 섭섭하게.”
“손님, 여자분이 싫어하시잖아요. 이만 물러나 주시지요.”
바를 넘어온 마스터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하고 은서를 떨어뜨렸다. 남자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야, 네가 뭔데 끼어들고 지랄이야? 콧대 세우며 튕기고 있는 걸 조금만 더 달래면 넘어올 판이었는데, 눈치도 없이 껴들어서 망치면 어쩌겠다는 건데?”
“손님, 이 분은 유성중공업 막내 따님이십니다. 공연히 트러블을 일으키면 그리 좋은 꼴은 못 보실 텐데요.”
기세등등하게 나오던 남자가 멈칫했다.
마스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은서를 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비밀 통로처럼 연결된 복도를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방들 중에서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방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마시려면 여기가 나을 겁니다. 한 놈 떨궈 내면 또 다른 놈이 들러붙을지 모르니까요. 여기가 아무리 회원제로 운영된다고 해도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죠. 술은 어떤 걸로 가져다드릴까요?”
“위스키 한 병 갖다 줘요.”
“음…….”
마스터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부드럽게 제안했다.
“칵테일로 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와인이나.”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죠? 이야깃거리도 못 되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은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냥 바닥 위에 먼지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지극히도 사소한 일이죠.”
계절은 여름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낙엽이 바스스 부서져 내리는 가을처럼 쓸쓸하고 스산하게 들렸다.
“아마 다른 여자들이었으면 잠깐 투정을 부리다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여자라 아주 독한 술이 필요하네요.”
평범한 부부 사이였다면, 차강혁이 정말 내 남편이었다면…… 사진을 당장 버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구를 할 만한 자격이 저에게는 없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작 서류상 아내가 주제넘게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냥 빨리 술에 취해 잊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면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마스터는 그녀의 서글픈 눈을 조용히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바로 위스키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속이 아프지 않도록 과일도 함께 내오도록 하죠.”
* * *
테이블 위로 술과 과일이 올라왔다.
은서는 병을 열어 잔에 술을 따랐다. 원샷을 과감하게 시도했지만 너무 독해서 결국 중간에 잔을 내려놓았다.
“으…….”
잔에는 술이 반쯤 남았고 입안으로는 알싸한 맛이 번져 나갔다. 혀끝이 아프게 타고 목구멍이 뜨겁다. 만면은 엉망으로 찌푸려졌다.
감당도 못 할 술을 마시고 있는 거다. 감당도 못 하는 남자와 결혼한 것처럼.
은서는 절망스러운 한숨을 크게 토해 내고 남은 술을 마저 넘겼다. 문득, 지갑 속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녀는 지갑을 열어 그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웨딩 사진인데도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특유의 차가운 무표정이다. 그에게 결혼은 아마도 그런 것일 테다. 웃을 일이 전혀 없는 것.
“차강혁, 기본적인 성의마저도 없네.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을 기념하는 순간인데 가식적인 미소조차 지어 주지 않고…….”
은서는 맥없이 웅얼거리고 지갑에서 사진을 빼냈다. 웃지 않는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어 보다가 이내 거침없이 사진을 찢어 버렸다.
그의 사진이 잘게 찢어지면 찢어질수록 그녀의 심장도 산산이 조각나 버리는 것 같았다.
* * *
늦은 밤, 퇴근을 하고 귀가한 강혁은 전화를 받으며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서류들 중 하나를 살펴보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스 쪽 선주사에서 수주 받은 LNG 운반선에는 ME-GI 엔진을 탑재시킬 겁니다. 그리고 FRS 시스템을 적용시켜서 기본 운반선보다 연료 효율을 높이도록…….”
몇 분간 이어지던 업무 통화가 끝나고, 그는 서재를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을 주웠다. 사진 속의 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미간이 진하게 구겨졌다.
“뭐야, 이건.”
못마땅하다는 투로 중얼거린 그는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책장을 훑어보았다.
“책 속에 끼워 둔 건가.”
과거, 민승아는 오피스텔을 올 때마다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겨 놓고 떠나고는 했다.
침대에 향수를 뿌려 놓거나, 욕실에 칫솔을 꽂아 두거나, 드레스 룸에 본인 옷을 걸어 두거나, 심지어는 휴대폰을 놓고 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민승아는 고약한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이 폴라로이드 사진도 대략 그 고약한 버릇의 일종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 물건이 신혼집에까지 딸려 오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벅벅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면 아내가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서 꼬물거리며 책을 읽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없었다.
“유은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무응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은서야.”
광대한 대저택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다. 열 번쯤 울렸을까. 기다리던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 있지?”
-내가 그런 걸 일일이 차강혁 씨한테 보고해야 되나요?
그녀의 말투는 모가 나 있었고 발음은 어눌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술 마셨어?”
-마셨으면요?
간담이 서늘해졌다. 술에 취한 유은서는 대책 없이 무방비해지는데. 혹시, 주변에 남자라도 있다면…….
“그 새끼랑 같이 있나?”
-글쎄요. 내가 누구랑 같이 있든 그건 차강혁 씨랑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갑자기 왜 이래? 히스테리 그만 부리고 어디에 있는지 위치나 불러.”
-싫어요.
뚜, 뚜, 전화가 끊겼다. 부부끼리는 닮는다더니 은서는 차강혁 스타일로 전화를 뚝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허망한 기계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 * *
호쾌하게 전화를 꺼 버린 은서는 위스키를 또 과감하게 들이켰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도수가 워낙 높은 탓에 벌써부터 취기가 찾아왔다. 머리가 띵하면서도 몽롱하다. 시야는 흐리다. 몸은 무거워서 어딘가에 편하게 눕고만 싶어졌다.
‘그냥 소파에 누워 버릴까.’
누울까 말까 고민을 하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초점을 되찾았다.
“어? 우현아…….”
“어유, 누나 많이 취했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우현이 은서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술과 과일과 그리고 찢어진 사진 조각들이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진은 잘게 조각나 있었지만, 우현은 사진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그녀가 지치고 지쳐서 엉망으로 무너진 때가.
“누나, 나한테 기대.”
우현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상하게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근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마스터가 전화해서 알려 줬어. 누나가 여기서 혼자 불쌍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고.”
개인전을 기점으로 차강혁의 실체를 명확하게 알게 된 우현은, 은서가 조만간 혼자서 우울하게 술을 퍼마실 거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마스터에게 미리 부탁을 했던 것이다. 혹시나 은서가 홀로 재즈 바를 찾아오면 꼭 연락을 달라고.
“위스키? 왜 이런 걸 마셔. 술도 잘 못 하면서.”
우현은 위스키 병을 가볍게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은서는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날뛰었다. 우현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는 것이 영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만약 이 일을 차강혁이 알게 된다면 큰일 날 텐데…….’
하지만 그 순간, 민승아의 사진이 뇌리를 세게 관통했다. 책 속에 소중하게 보관해 둔 아름다운 추억의 사진…….
‘차강혁은 예전 여자 친구도 못 잊었는데, 내가 아는 동생이랑 술 좀 마시는 게 무슨 대수라고.’
반발심이 발동했다. 술에 취해 과감해진 은서는 어쭙잖은 만용을 부리기로 결심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위스키가 가득 찬 술잔을 우현에게 내밀었다.
“마셔.”
“이거 누나가 마시던 잔이잖아. 내가 이걸 마시면 우리 간접 키스하는 건데?”
“실없는 농담 말고 마시기나 해.”
우현은 화끈하게 원샷을 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굳건히 다짐했다. 오늘 기필코 유은서를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그런 악독한 무뢰한에게 그녀를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남편이랑 싸웠어?”
“싸우긴. 난 그 남자랑 싸울 수준도 안 되는걸.”
“무슨 일인데?”
“별거 아냐.”
은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그깟 사진이 무슨 대수라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런데, 다른 남자도 아니고 차강혁이……
한 번 끝을 내면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칼같이 냉정한 남자가, 여자 하나를 놓지 못해서 미련을 남기고 그리움에 취해 있었다니…….
명치가 콕콕 쑤시면서 욱신거린다. 은서는 다시 잔에 술을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술이 식도를 잔인하게 긁으며 넘어갔다.
“그냥 나한테 시원하게 털어놓지 그래? 동생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써먹어야지. 맘속에 담아 두지 마. 속병 나.”
우현이 유들유들한 말솜씨로 은서를 달랬다.
은서는 손끝으로 술잔을 더듬었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는 듯했다. 이윽고 잔을 들어서 남아 있는 술을 모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을 삼키고 한숨을 크게 몰아쉰 그녀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저번에 도련님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차강혁은 성장 환경 때문에 감정을 다 죽여 버린 남자라고.”
은서는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심장이 빙벽 같은 남자도 사랑에 빠지면…… 사르륵 녹아 버리나 봐. 책 속에 사진을 몰래 꽂아 놓냐, 유치하게……. 하나도 안 어울려, 그런 거.”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우현은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실그러뜨렸다.
“그냥 차강혁도…… 보통 남자라는 얘기야. 보통 남자들처럼 사랑하고, 보통 남자들처럼 그리워하고 그런다고…….”
은서는 힘없이 웃었다. 눈은 곧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입술은 비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차강혁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라면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랑할 수 없는 거잖아……. 난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
“…….”
“짝사랑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수행이 부족한가 봐. 별것도 아닌 일에 상처나 받고…….”
“혹시, 누나 남편 바람피웠어?”
은서가 한 말을 차근차근 되씹어 본 우현은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때, 개인전에서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었을 때는 은서를 향한 집착이 굉장히 강해 보여서 다른 여자를 만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바람은 아니고……. 그냥 예전 여자 친구를 못 잊겠나 봐. 아직도 그 여자 사진을 보관하고 있더라고.”
우현은 ‘대부분의 남자들은 섬세하지 못해서 별 의미 없이 그럴 수가 있다. 나만 해도 휴대폰에 전 여자 친구 사진들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다.’라고 조언을 해 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건설적인 충고로 둘 사이의 관계를 괜히 좋게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은서가 불행하고 괴로울수록 우현에게는 성공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이 실망해야 했고, 더 크게 상처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더 비참해져야 하고, 더 우울해져야 하고, 더 슬퍼해야 했다.
그래야 우현의 자리가 생기는 거니까.
“그 여자, 엄청 예쁘다? 너도 보면 한눈에 반할걸? 성격도 되게 당돌해.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어. 고리타분하기만 한 나랑은 완전히 달라.”
은서는 승아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수려한 외모와 당당한 태도로 입바른 소리만 또박또박하던 모습을.
“내가 예뻤다면, 내가 키가 컸다면, 내 성격이 통통 튀었다면, 내가 센스가 있었다면……. 강혁 씨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을까?”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어? 누나는 지금도 완벽해. 성격, 외모, 취향,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릴 것 없이 완벽하기만 하다고!”
의기소침한 자기비하를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우현은 강건하게 단언했다.
“그래? 위로 고마워…….”
은서는 쓰게 웃었다.
위로가 고맙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를 상처 입히는 남자가 차강혁이라면, 그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남자도 차강혁이기에.
“위로가 아니야. 난 누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으니까.”
“고마워. 좋아해 줘서.”
“가볍게 듣지 마. 난 진지하다고.”
우현은 결연한 표정으로 다부지게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굳센 모습이었다.
“동생으로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아니야. 남자로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
“좋아해. 좋아한다고, 누나.”
우현은 음절, 음절마다 진심을 다해서 말했다.
뜻밖의 고백에 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뇌를 흠뻑 적셔 놓던 알코올이 단숨에 증발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말이 안 돼? 누나처럼 예쁘고 착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남자로서 당연한 일이야.”
망치로 머리통을 거하게 두들겨 맞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니 몸 전체가 얼얼했다.
“우현아…… 나, 결혼했어.”
은서는 고백 자체를 납득할 수 없었다. 설령 저를 좋아하는 우현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쳐도 이 고백은 아니었다.
올바르지 않은 고백이다. 자신은 이미 결혼을 한 몸이니까. 그 결혼이 비록 허울뿐이라 할지라도.
“알아. 이제 와서 이러는 거 비겁한 짓이지.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누나가 불행하게 사는 걸 더는 봐 줄 수가 없다고.”
“너…… 취했나 보다.”
“겨우 위스키 한 잔에 취할 얼간이는 아니라는 거 누나가 더 잘 알잖아.”
“…….”
“처음부터 좋아했어. 누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좋아했다고. 근데, 누나는 항상 날 동생으로만 보니까…… 도저히 고백할 수가 없었어. 괜히 고백했다가 사이만 벌어질까 봐.”
“…….”
“누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내 마음을 숨기고 또 숨겼어. 그냥 편한 동생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기도 했었지.”
“…….”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나를 보며 그 남자가 누나를 행복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
“이제는 아니야. 이젠 내가 직접, 내 힘으로 누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렇잖아도 마음속이 다 헤져서 엉망진창인데, 이런 이기적인 고백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방금 네가 했던 말들 안 들은 걸로 할게. 피곤해. 집에 가야겠어.”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우현이 손목을 세게 잡아끌어 억지로 그녀를 자리에 주저앉혔다.
당황스러웠다. 늘 온화하고 다정한 우현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 싶어서 은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보지만 또다시 주저앉혀졌다.
심지어 우현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기까지 했다. 거북한 스킨십에 은서는 그 손을 탁 걷어 내고 단호하게 말했다.
“왜 이래. 집에 갈 거야. 비켜!”
그 순간, 우현이 은서의 뒷머리를 세게 틀어잡았다. 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우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러지 마!”
입술이 부딪치려는 찰나, 은서는 고개를 비틀어서 간신히 키스를 피했다. 하지만 우현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키스를 시도해 왔다.
“싫단 말이야!”
바락바락 고함을 내지르며 은서는 어떻게든 키스를 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비틀고 또 비틀었다.
키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우현은 아예 은서를 소파로 넘어뜨렸다. 힘없이 쓰러진 몸 위로 올라타서 작은 턱을 단단히 움켜쥔다.
“싫다고 말했어. 당장 그만둬!”
“그 자식은 되고 나는 안 돼?”
“……뭐?”
“나한테도 기회를 줘. 그 개자식한테만 기회를 주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신우현!”
“나도 꽤 쓸 만해. 누나를 만족시킬 자신은 충분히 있다고.”
정신 나가도 단단히 나간 소리에 은서는 질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현은 입술을 가까이 가져온다. 피하고 싶지만 턱을 그러진 악력이 너무 강해서 은서는 고개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전신이 벌벌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믿고 아끼던 동생이 단숨에 돌변해서 아예 딴사람이 된 모습이 섬뜩했다.
또한, 끔찍하게도 불쾌했다. 차강혁에게 숱하게 강압적으로 당했지만, 이토록 끔찍하고 불쾌했으며 싫었던 적은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몸이 닿고 있으니 너무나도 징그러웠다.
“멈춰, 그만해…….”
은서가 발을 세게 걷어찼다. 하지만 곧장 우현이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찍듯이 눌러 압박했다. 으스러지듯 짓이겨진 다리에 괴로워진 은서가 상을 찌푸렸다.
입술은 거의 겹쳐지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절망과 좌절감이 몰려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대한 체격의 남자가 들이닥쳐서 우현의 뒷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내동댕이를 쳤다. 거센 충돌로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내 아내 건드리지 말라고!”
격노에 휩싸인 음성이 귓가를 쟁쟁하게 때린다. 소파에 쓰러져 있던 은서는 몸을 일으켜 세워 위기의 순간에 절묘하게 나타난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차강혁…….
입속에서 그의 이름이 맴돌았다.
“남의 여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오늘 똑똑히 알려 주지.”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으로 조롱하듯 말을 뱉어 낸 그는 쓰러져 있는 우현의 멱살을 움켜잡고 거침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값비싼 슈트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난폭하고 야만적인 주먹질이었다.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뒤따라 들어온 마스터가 펄쩍 뛰면서 그의 팔목을 붙잡고 뜯어말렸다. 그는 성가시다는 식으로 팔뚝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마스터는 풍선 인형처럼 튕겨 나가 벽에다 머리를 쿡 찍어 박았다.
“윽…….”
룸 한구석에 찌그러진 마스터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짚고 괴로운 신음성을 토해 냈다.
그 틈을 타서 우현이 혼신의 힘으로 발악하듯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한 대 쳤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우현의 숨통을 끊어 놓을 기세로 주먹을 다시 무섭게 갈겼다. 오히려 한 대 맞은 것이 자극이 된 모양인지 주먹질이 더욱더 격해졌다.
한편, 소란을 알아챈 룸 손님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입구에 진을 쳤다. 인원은 점점 늘어나 어느새 복도까지 쭉 늘어섰다.
피 터지는 광경을 보고 저마다 웅성거린다. 그러나 용감하게 나서서 말리는 이는 없었다. 과격한 주먹질을 폭포수처럼 퍼붓고 있는 야수 같은 남자에게 감히 덤볐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란 생각에 단단히 겁을 먹었기 때문이리라.
뒤늦게 홀 직원들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하지만 손님들이 복도를 꽉 막고 있어서 룸 안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빨리 손님들부터 돌려보내!”
고참 직원의 지시로 직원들은 복도를 가로막고 있던 손님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원이 워낙 많았고, 끝까지 구경을 하겠다고 고집스럽게 버티는 사람들도 있어서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연거푸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퍽, 투박한 소리가 끊임없이 고막을 울린다.
매서운 펀치가 정확하게 메다 꽂힐 때마다, 우현의 얼굴에선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고 얼굴의 형태는 처참하게 망가져 갔다.
피범벅이 된 우현은 코뼈가 형편없이 내려앉았다. 입술이 다 찢어지고 눈썹도 찢어졌다. 턱도 부서지고 이빨도 세 개는 날아갔다.
바닥은 피로 흥건해졌고 우현은 거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그때서야 그는 주먹질을 멈추었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 감히 내 아내를 넘보다니,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피떡이 된 몰골로 숨을 고통스럽게 할딱이는 우현을 향해 그는 피식 비웃음을 내씹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은서에게 닿았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겁먹은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우현이 테이블 위로 가까스로 손을 뻗어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우현은 그의 머리를 조준해서 위스키 병을 냉큼 날려 버렸다.
“강혁 씨!”
은서가 고함을 크게 내질렀다. 동시에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병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간발의 차로 빗나간 위스키 병은 벽에 부딪혀서 와장창 깨져 버렸다. 커다란 파편 한 조각이 튀면서 날카로운 유리 날이 그의 뺨을 할퀴었다. 잘생긴 뺨에 기다란 사선으로 상처가 만들어지면서 붉은 선혈이 새어 나온다.
“겨우 이건가? 마지막 발악치고는 지나치게 시시하군.”
그는 손으로 새빨간 피를 태연하게 닦아 내고 오만하게 말했다. 유리 날에 베인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이었다.
이어서 그는 구둣발로 우현의 복부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아악!”
우현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피 섞인 기침을 컥컥 토해 내며 온몸을 부르르 떨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복부를 몇 번이나 발로 가격했다.
그런 다음, 구둣발로 피범벅이 된 우현의 얼굴을 세게 눌러 밟았다.
“부디 좋은 공부가 되었길 바라.”
비정한 조소와 함께 그는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바닥에 무성의하게 내던졌다.
“이 정도면 치료비로는 충분할 거야.”
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다시 은서를 바라보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다.
이내 반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는 은서를 공주님처럼 가뿐히 안아 들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집에 가자.”
상처가 난 뺨에서는 계속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은서는 재킷의 가슴 포켓에 꽂혀 있는 행커치프를 꺼내 상처 부위를 꾹 누르고 가냘픈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피가 나요…….”
“알아.”
그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투로 대답하고 룸 출입구로 걸어갔다. 이제 막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낸 홀 직원들이 문 앞에서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아내를 데리고 나가야 해서요.”
지나치게 담백한 어조였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잔혹하게 짓밟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직원들은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스터를 응시했다. 마스터가 고개를 끄떡이자 직원들이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 * *
그는 대로변에 세워 둔 롤스로이스 팬텀에 은서를 태웠다. 이어서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자 은서는 손에 쥔 행커치프로 피가 흐르는 뺨을 꾹 눌렀다.
“강혁 씨, 피가…… 피가 계속 나요.”
은서가 울먹거렸다. 그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그녀의 손을 냉정하게 쳐 냈다.
“벨트나 매.”
“그치만…….”
“아, 이런 것까지 내가 해 줘야 하는 건가? 고귀하신 공주님이시니까? 그런데, 그렇게 고귀하신 공주님께서 대체 왜 술집에서 외간 남자랑 뒹굴고 있었던 건지 실로 의문스럽군.”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에 은서는 머리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깨달았다. 이건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 준 늠름한 기사의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단지 제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야만스럽게 휘두른 것뿐이다. 강압적인 섹스로 분풀이를 한 것처럼 잔인한 폭력으로 분풀이를 한 것에 불과하다.
나를 걱정해서 달려온 것이 아니라 내게 화를 내려고 달려온 것이다. 은서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현이 박살 났으니 이제는 자신이 박살 날 차례라고.
하지만 그 전에 상처부터 치료해야 했다. 유리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려 그의 어깨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일단…… 병원부터 가요. 어서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돼요.”
은서는 안전벨트를 매고 다시 손을 뻗어 행커치프로 상처를 꾹 눌렀다.
“손 치워.”
여지없이 비아냥이 돌아온다. 그러나 은서는 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손 치우라고. 말귀 못 알아듣나?”
“…….”
“하긴,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겁도 없이 그 새끼랑 어울렸겠지.”
그가 또 냉정하게 손을 쳐 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손목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어울릴 생각 없었어요! 약속하고 만난 거 아니라구요. 그냥……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혼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우현이가 때마침 온 거예요.”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불규칙한 숨이 가쁘게 쏟아진다.
“뒹군 게 아니라 당한 거예요. 우현이가 억지로 키스를 하려고 해서…… 악착같이 반항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눈물이 흘러내렸다.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 은서는 몹시도 괴로워졌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동생에겐 봉변을 당했고, 차강혁은 극도로 화가 났다.
그간의 순조로웠던 일상이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듯했다.
“개인전 끝난 후로는 우현이 전화도 아예 안 받고 메시지도 최대한 자제했어요. 거의 만나지도 않았다구요. 강혁 씨 출장 갔을 때 만나고, 오늘까지 딱 두 번…….”
순간, 그가 눈빛을 팽팽하게 빛냈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 위로 거센 불꽃이 활활 불타올랐다.
“내가 그리스에 있는 동안 그 녀석을 만났다고?”
그때서야 은서는 실수를 자각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켜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무심코 해 버린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등줄기로 한기가 싸하게 번져 나갔다.
“우현이가 연락도 없이 무작정 스튜디오로 찾아와서…….”
“순순히 그 녀석을 안에 들였겠지. 그러니까 네가 당하는 거야.”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냉담한 비소를 내던졌다.
“그리스에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려고 내가 미친 듯이 일만 하는 동안, 유은서 넌 화려하게 내 뒤통수를 쳤군. 고마워.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심어 줘서.”
“나는 그러려고 했던 게…….”
“입 닫아.”
“강혁 씨…….”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입 닫으라고.”
냉혹하게 일갈한 그는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검은색의 팬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난폭하게 도로 위를 헤치고 달려 나갔다.
* * *
단숨에 저택까지 팬텀을 몰고 온 그는 은서를 짐짝처럼 한쪽 어깨에 들쳐 메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은서를 침대 위로 내팽개치듯 던져 버렸다.
은서는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통증은 느끼지 못했다. 곧 이어질 일들에 대한 공포로 가득해서 이런 가벼운 통증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그는 재킷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러곤 가녀린 몸 위에 올라타 앉아 눈을 서슬 퍼렇게 빛냈다.
“역시 목줄을 채워 놔야 했어. 너 같은 물건을 밖에다 풀어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가 손을 뻗어 은서의 목을 쥐었다.
단지 목을 쥐고만 있을 뿐 전혀 조르지 않았는데도 은서는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숨통을 옥죄어 오는 위력적인 압도감에 심장이 무참히 파열될 것만 같았다.
“내가 제때 안 나타났으면, 넌 그 새끼랑 과연 어디까지 갔을까.”
유리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와 은서의 얼굴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잔흔 하나 없이 하얗고 깨끗하기만 얼굴 위로 붉은 피가 묘하게 수놓는다.
“강혁 씨, 상처부터…….”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신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마.”
그는 가죽 벨트를 풀어 채찍을 휘두르듯 침대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퍽, 하며 갈겨지는 소리가 고막을 세게 때렸다.
은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분노에 찬 차강혁은 언제나 무서웠지만 오늘처럼 무서운 적은 처음이다. 어쩌면 저 가죽 벨트로 저를 내리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입 닫으라고 했지.”
용서를 구하려는 순간, 가죽 벨트가 또다시 침대를 내리쳤다. 둔탁하게 울리는 무시무시한 충돌음에 입술이 저절로 다물려졌다.
감긴 눈으로는 공포감에 질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붉은 피와 은서의 투명한 눈물이 한데 뒤섞여서 하얀 얼굴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은서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은서는 어쩌면 그가 손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손목을 쓰윽 쓰다듬어 보더니 가죽 벨트로 양 손목을 정교하게 묶어서 결박했다.
은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이없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채찍질당하듯 가죽 벨트로 잔혹하게 맞지는 않을까, 손목이 부러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결박당하는 선에서 그쳐서.
겨우 이딴 걸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개탄스러웠다.
그는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페니스를 꺼내 보였다. 반쯤은 발기한 상태였다.
기가 막혔다. 도대체 왜 그가 흥분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분노와 성욕이 동일한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손으로 페니스를 몇 번 쓸어 만지자 거대한 기둥이 금세 꼿꼿하게 섰다. 발정 난 짐승의 발기는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이후에 다가올 일을 예감한 은서는 긴장감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예상한 대로 그는 손쉽게 그녀의 하의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다리를 확 잡아 벌려서 작은 구멍에다 페니스를 무작정 쑤셔 박았다.
“하읏!”
눈앞으로 번개가 번쩍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아무런 전희도 없이 무자비하게 쑤시고 들어와서 격통이 온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허리를 밀어붙였다. 전혀 젖지 않은 상태로 피스톤 운동을 받으려니 살갗이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으읏, 아파요…….”
“신음 소리 외에는 소리 내지 말라고 했잖아. 유은서, 넌 어쩜 이렇게 교육이 안 되지?”
“흣…….”
“너같이 멍청하고 손은 더럽게도 많이 가는 물건한테 내가 미쳐 버리다니. 하아…….”
상처 난 뺨에서는 피가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격렬한 추삽질에만 몰두했다.
사지가 찢기는 고통에 은서의 만면은 울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마찰하는 아래가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쓰라렸다.
“남자가 필요하면 나한테 와. 괜히 다른 놈들까지 미치게 만들지 말고. 나 하나 병신 만든 걸로는 부족해서 그래?”
“아흑.”
“아니면, 이렇게 맛있는 보지를 신우현 그 새끼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나?”
은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수모, 이런 모욕은 견디기 힘들다. 나한테는 오직 차강혁밖에 없다는 걸 뻔히 다 알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으로 망가졌는데…….
“아니라면서 왜 자꾸 흘리고 다니지? 좆 달고 있는 새끼가 너한테서 뭘 바랄 것 같아? 그냥 네 보지에 박고 싶어 할 뿐이야. 겉으로는 착한 척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널 벗겨 먹을 생각밖에 없는 놈이라고.”
우스운 소리였다. 이것이야말로 차강혁을 표현하는 말 아니던가. 누구보다도 나를 좆이나 집어넣는 구멍으로 보는 남자가 바로 차강혁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길이 없다. 은서는 울면서 동시에 실소를 지었다.
“당신도 그렇잖아. 당신은 뭐가 다른데? 차강혁 너도…… 흐읏, 나만 보면 발정 내잖아. 맨날 박아 대기나 하면서, 흣…… 당신은 뭐 달라? 지금 네가 하는 짓을 봐!”
은서는 그를 한껏 비웃으며 대거리를 퍼부었다.
만용이라는 걸 안다.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남자와는 다르다는 허언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인정을 해. 차강혁 너한테 나는 구멍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
“건방지게 또 내 말을 안 듣는군. 함부로 입 열지 마. 확 부서뜨리는 수가 있어.”
경고를 하듯 그가 허리를 크게 쳐올리며 페니스로 깊숙한 곳까지 살벌하게 찔러 댔다. 은서는 경련을 하듯 온몸을 들썩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답을 주자면 말이야. 유은서, 난 그 이상을 원해.”
그는 피로 얼룩진 얼굴로 은서를 곧게 마주하며 단호하게 읊조렸다.
“이건 무의미한 충동질이 아니야. 그저 그런 섹스가 아니라고.”
“하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경건하고 숭고한 행위야.”
“흐읏.”
“내가 왜 맨날 네 보지 안에다 좆물을 싸지르겠어? 난 널 임신시키고 평생 내 밑에서 울게 만들 거야.”
왜 이렇게 임신에 집착하는 것일까.
어쩌면 차강혁은 나를 임신시켜서 아기를 낳게 하는 것도, 일종의 성취물쯤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언제나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남자였다.
공부를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사업을 할 때에도, 마치 게임을 치르듯 맹목적으로 승리만을 열망하는 남자였다.
결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결혼이라는 이 비즈니스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건 결국 비즈니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하여 혼맥을 한층 더 공고하게 다지려는 심산일 테고.
‘이런 소시오패스의 아기를 절대로 가져서는 안 돼. 난 네 비즈니스 놀음에 재를 뿌려 줄 거라고.’
굳게 다짐한 은서는 연갈색 눈동자를 노기로 번뜩이고 그의 얼굴에다 침을 퉤 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하읏……. 누가 너 같은 개새끼한테 임신당할까 봐?”
은서는 그에게 박혀 잔인하게 쑤석거려지면서도 악에 받쳐 기를 쓰고 덤볐다. 그는 얼굴로 날아든 타액을 손으로 닦아 내고 피식 웃었다.
“까불지. 입 다물라니까 끝까지 말 안 듣고.”
그는 잘록한 허리를 꽉 틀어잡고 쾅쾅 몰아붙인다. 폭력에 가까운 추삽질에 은서는 온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페니스를 물고 있는 좁은 구멍에서는 애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합 지점에 미끌미끌 윤기가 돌면서 고통이 점차 옅어진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정신적 고통은 더더욱 극심해졌다.
그 어떤 애무도 없이 그저 무식하게 쑤셔 박히고만 있는 상황에서도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은서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죽여 버리고 싶어, 하아…….”
“누구를? 나를?”
그가 조소하듯이 묻는다. 자기를 죽이고 싶냐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차강혁 네가 아니야.
“흐응.”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은서의 몸은 화염으로 화끈하게 에워싸였다.
자궁까지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페니스에 전신이 저릿해진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긴 것처럼 찌릿찌릿하고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줄줄 흘러내리는 애액은 이제 침대 시트까지 흠뻑 적셨다. 배꼽 아래로는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 그의 페니스를 빠듯하게 조여 댔다.
은서는 이대로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어코 느끼고 마는 자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못난 몸뚱어리, 그냥 불타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난 지옥 끝까지 유은서 너를 데리고 갈 거니까. 아, 우리 아기도 함께 데려가야겠지.”
“닥쳐! 난 죽어도 당신한테 임신 안 당해. 흐읏,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당신이랑…… 안 잘 거야!”
“박아 주기만 하면 좋다고 물고 조이면서 안 자긴 뭘 안 자. 지금도 봐. 질질 싸면서 내 자지를 앙 물고 있잖아.”
“흐흣.”
“그리고 임신은 이미 했을지도 몰라.”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인 그는 손바닥으로 은서의 아랫배를 은근하게 짓눌렀다.
“지금 이 뱃속에 우리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그동안 더럽게도 많이 싸질렀으니까.”
“꿈 깨. 하읏……. 아기는 없어.”
은서는 입매를 비틀어 비웃음을 던졌다. 피임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차강혁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일 테니까.
그동안 내 안에 정액을 뿜어 대던 게 죄다 헛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두고 봐. 곧 있으면 여기서 달콤한 우유가 흘러나올 테니까.”
그는 은서의 상의를 끌어 올려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실컷 부비적거린 그는 이미 예민하게 달아올라 딱딱해진 젖꼭지를 입에 담아 게걸스럽게 빨고 할짝거렸다.
“하아앙…….”
은서는 허리를 뒤틀었다. 신음 소리는 한층 더 앙큼해졌다.
그는 가슴을 야금야금 먹어치워 가면서 페니스로 안쪽 깊숙이 들쑤셔 댔다. 스팟을 정확하게 찔러 오는데, 은서는 차라리 기절을 하고 싶었다. 의식을 놓아 버리고, 감각을 제거하고, 기억을 삭제시키고 싶었다.
“우유가 나와도 아기한테는 단 한 방울도 안 줄 거야. 내가 남김없이 다 빨아먹을 거라고.”
그는 아플 정도로 집요하게 젖꼭지를 물고 빨았다. 아릿한 고통에 은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 하으응…….”
“유은서 넌 내 거니까, 우리 아기한테도 양보해 주지 않을 거야.”
제정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 미치고 돌았다는 사람 많지만 차강혁처럼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린 남자는 본 적이 없다.
“하아, 은서야.”
흥분에 잠긴 목소리가 은서를 애타게 부른다. 그는 허리를 가혹하게 놀리면서 초점이 이탈해 탁해진 눈으로 시선을 반듯하게 맞부딪쳐 왔다.
검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와 같은 눈동자에는 오직 그녀만이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은서야, 널 평생 내 밑에 가둬 두면서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줄게. 넌 내 거니까. 영원히 내 여자여야 하고, 영원히 내 아내여야 하니까.”
절실하게 귓가로 꽂혀 드는 뜨거운 목소리가, 오직 나만을 담고 있는 밤바다 같은 눈동자가, 화살촉처럼 심장을 쿡 찔러 왔다.
그 순간, 은서는 기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그도 나를 사랑할지 모른다는…….
하지만 이런 착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마약처럼 사람을 현혹시킬 뿐이다. 은서는 고개를 홱 돌려서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아무리 외면해도, 평생, 영원히, 내 거, 내 여자, 내 아내라는 단어들이 자꾸만 고막에 걸쳐 귓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은서야, 나를 봐.”
그의 손이 은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고개를 똑바로 돌렸다. 다시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오직 은서만을 그윽하게 주시한다.
“내 거야, 영원히. 유은서 넌 내 거라고.”
그는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쳐올리며 눈을 맞대고 허스키하게 잠긴 음성으로 집착맞게 속삭였다. 한참을 그렇게 쑤셔 박던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몸을 잘게 떨었다.
“하아.”
그는 조그만 구멍에 정액을 잔뜩 뿌려 놓고 은서를 꼭 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 * *
은서는 기절을 했다가 깼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다.
기절을 하면 기절한 대로 깨어 있으면 깨어 있는 대로, 그는 살벌하게도 안을 파고들었다. 오직 광란으로만 점철된 짐승적인 행위였다.
은서는 영혼 없는 사람처럼 침대에 휘늘어져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물든 것을 보면 새벽인 듯했다.
“목말라…….”
바짝 메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가 눈길을 던진다.
은서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옷은 죄다 찢어져 있었고, 손목은 여전히 가죽 벨트로 단단하게 포박되어 있었다.
물론 꼴이 엉망인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상처 난 뺨 위로 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 하다못해 소독약이라도 발랐으면 좋겠는데,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안개와도 같은 담배 연기를 느릿느릿 내뱉으며 협탁 위에 있는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은서의 입을 벌려 입안에다 물을 쏟아 넣었다.
갈증에 시달리던 은서는 콸콸 쏟아지는 물을 꿀떡꿀떡 들이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후에는 지독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손목이 꽁꽁 묶인 채로 타인의 힘에 의지해 물을 얻어 마시고 있으니, 흡사 사육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목 풀어 줘요.”
은서는 ‘물을 먹여 주지 말고 그냥 손목을 풀어 달란 말이야. 이 변태 새끼야.’라고 신랄하게 소리치려다가 참았다. 지쳐서 그럴 힘도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로 은서를 지그시 보았다. 그러더니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의 뺨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말했잖아. 너 같은 물건을 풀어 두는 게 아니었다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소름이 끼칠 만큼 서늘했다. 그렇게 섹스를 많이 했는데도 아직도 그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은서의 입술을 쓸어 만졌다. 그녀의 입술은 하도 많이 물어 뜯겨서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젖은 입안을 몇 번 들락날락거렸다.
타액을 충분히 묻힌 손가락이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은서의 다리 사이였다. 또다시 그녀를 무자비하게 먹어 치우려는 것이다.
* * *
은서는 토막잠에 들었다가 깼다. 아니, 기절하다 깬 거였을까.
어찌 됐든 은서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밖으로는 연보랏빛 하늘이 걷히고 태양이 밝게 떠 있었다. 아침이 온 것이다.
은서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주변을 탐색했다.
차강혁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은서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손목은 여전히 꽁꽁 묶여 있었고, 익숙한 담배 향이 옅게 남아 있었다.
‘손목도 풀어 주지 않고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날 이렇게 내버려 두고 출근을 해 버린 건 아니겠지?’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용솟음칠 때였다.
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차강혁이 들어왔다. 저 개 같은 남자는 아직까지도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 뺨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손에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방형의 아타셰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저걸 왜 들고 왔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은서는 의혹의 눈초리를 빛냈다. 낯선 물건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는 침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걸터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본채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전하세요.”
그는 짤막하게 용건만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통화 상대는 저택의 직원들을 총괄 관리하는 홍 집사로 추측되었다.
은서의 머릿속은 미로에 빠진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러는 거지?
“왜…… 직원들을 본채에 못 들어오게 해요?”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잠금장치를 풀고 검은 가방을 열어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가죽으로 제작된 목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