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 *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식탁 위에 놓아 둔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차윤혁이었다.
그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왜.”
은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 남자는 동생한테서 온 전화도 참 무정하게 받네.
-혀엉…….
그러나 정작 윤혁은 냉담한 응답에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애교를 부리듯이 말끝을 늘렸다.
“뭔데.”
-나, 욕실에서 넘어졌어.
“다쳤어?”
그의 인상이 단번에 구겨졌다. 은서는 수저를 내려놓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응. 팔뚝이 너무 아파……. 막 팅팅 부어오르고 난리야. 혀엉, 나 병원에 좀 데려다줘.
“바로 갈게. 기다려.”
-빨리 와.
그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은서도 스프링이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나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왜 그래요? 도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욕실에서 넘어져서 팔을 다쳤다는군. 병원에 데려다주고 올게.”
“어머, 많이 다쳤대요?”
불의의 소식에 화들짝 놀란 은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 봐야 알지.”
“윤 기사님께 연락할까요?”
“아냐. 내가 운전하면 돼.”
“같이…… 갈래요?”
“됐어.”
조심스럽게 던진 제안에 차강혁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 말투가 어디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엄격하기만 해서 은서는 표정이 다소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때, 그가 곁으로 다가와서 은서의 어깨를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내려놓은 수저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당신은 밥이나 마저 먹으라고.”
커다란 손이 은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기분이 묘해졌다. 결국 굳어 있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그가 다이닝 룸을 떠나고, 은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밥을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 * *
그는 최 실장에게 연락해 곧바로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정형외과 전문의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하고, 차에 올라타 윤혁이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페라리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누볐다. 그는 예상 시간보다 일찍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혀엉…….”
윤혁은 형을 보자마자 퉁퉁 부어오른 왼팔을 보여 주며 어린애처럼 우는소리를 냈다.
차윤혁은 아프면 어리광이 심해진다. 오늘도 운전기사나 비서가 아니라 굳이 형을 부른 것도, 편하게 응석이나 부리기 위함에서였다. 직원들 앞에서는 체통을 지켜야 하니 지금처럼 징징거릴 수가 없지 않은가.
차강혁과 차윤혁은 전형적인 형제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과묵하고 듬직한 장남과 애교와 넉살이 넘치는 차남.
남들은 차강혁을 두고 혈관 속에 피가 아니라 얼음이 흐르는 냉혈한이라 감히 접근하기도 무서운 남자라고 평하지만, 윤혁에게는 그저 기대기 좋은 든든한 형이었다.
“가자.”
형제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팔이 다친 윤혁을 위해 강혁이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형의 호의에 윤혁은 입매를 너끈하게 끌어 올리고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얇은 천 조각을 발견하고 동작이 뚝 정지되었다.
그러니까 저건…… 꽃분홍색 레이스 팬티잖아!
“허……!”
망측한 물건에 윤혁이 괴상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형, 저게…… 저게…….”
당황한 윤혁이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을 버벅거리는 사이, 강혁은 찢어진 팬티를 주워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윤혁의 머리를 밀어 조수석에 억지로 태웠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표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
윤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데에 비해, 정작 사건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차강혁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낯으로 액셀을 밟고 차를 몰았다.
“부끄럽지도 않아?”
2분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윤혁이 나무라는 식으로 한 마디 던졌다.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팬티, 유은서 거야.”
하지만 뻔뻔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윤혁의 입가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콕 집어서 안 알려 줘도 되거든?”
“난 어제 유은서랑 이 차에서 잤고, 유은서는 내 아내야. 아내랑 섹스하는 건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라고. 다른 여자랑 잔 것도 아니고 내 아내랑 잤는데,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지?”
“대체 형수님이랑 잤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윤혁은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형, 나는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를 문제 삼는 게 아니야. 문제는 차에서 하는 거라고! 좋은 장소 많잖아. 집도 있고, 호텔도 있고, 별장도 있고, 할 만한 장소가 차고 넘치는데, 왜 하필이면 차에서 그런 짓을 하냐고!”
“차에서는 하면 안 되나? 이거 내 찬데.”
그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반응했다. 윤혁은 화병이라도 온 사람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때렸다.
“대화가 안 통해, 대화가.”
그런데, 가만. 팬티가 발견된 장소는 조수석 바닥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열띤 행위를 벌인 장소가…… 지금 내가 앉고 있는 이 자리란 말인가?
부지불식간에 전두엽을 어퍼컷으로 강하게 후려쳐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몰려왔다. 윤혁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투덜거렸다.
“상종 못 할 인간이야.”
“상종 못 하겠으면 여자 친구나 부르지, 나는 왜 불렀냐?”
“우리 현주는 아침부터 계속 독서실에서 열심히 공부 중이거든? 공부하는 애를 어떻게 불러내? 그러는 형은 뭐 하고 있었어? 대낮부터 형수님이랑 뜨거운 행각이라도 벌이고 계셨나?”
“알면 부르지 말았어야지.”
윤혁이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별생각 없이 빈정거린 말에 그렇다고 긍정할 줄은 몰랐다.
“지, 진짜 하고 있었어?”
“그래.”
“어디서?”
“식탁에서.”
정확히는 한 게 아니고, 하려고 했던 거지만.
몸보다 족히 두 배나 큰 드레스 셔츠를 입고 밥을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식사가 끝난 후에 한 판 하려고 했었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유은서를 식탁 위에 쓰러뜨려 놓고 질펀하게 뒹굴고 있었을 텐데.
“식탁이라니. 형, 그러지 좀 마.”
“뭘.”
“형수님이 그런 걸 원할 리는 없을 테고, 형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거지? 그러지 말라고. 여자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여린데. 분위기 있는 곳에서 분위기 좀 잡고 해. 형수님 상처받아.”
“시끄러워.”
그는 윤혁의 말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동생이 형을 생각해서 뼈와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줬는데, 그렇게 삐딱한 태도로 나오면 곤란해.”
“차 세운다. 길가에 낙오되기 싫으면 입 닫아.”
“아, 내가 드러워서 입 닫는다.”
윤혁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형에게 곧잘 응석은 부려도, 형을 이겨 먹을 깜냥은 아직 한참이나 모자란 동생이었다.
* * *
밥 한 공기를 깨끗하게 비운 은서는 목욕을 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고단한 몸을 달래 주었다.
‘도련님은 괜찮으려나. 많이 안 다쳤어야 할 텐데.’
불현듯, 유난히도 서두르던 차강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생이 다쳤다는 소식에 그는 인상이 단번에 구겨지며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처음 윤혁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언뜻 냉정해 보였는데, 막상 행동하는 걸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내심 동생을 꽤 아끼는구나 싶었다.
‘만약에 나도 다치면 그렇게 급히 달려와 주려나. 아니, 아니지. 나는 가족이 아니잖아……. 난 도련님과 위치 자체가 아예 다른걸.’
괜한 기대감을 품어 보던 은서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결혼을 했고 서류상으로는 부부였지만, 우리는 부부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다. 비즈니스를 위한 정략결혼에 부부니, 가족이니, 하는 달짝지근한 단어들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저 혼자서만 서류상 남편을 짝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서만 좋아하고, 혼자서만 바라보고, 혼자서만 마음 졸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는 멀게 느껴진다. 내가 잡을 수도 없는 먼 곳에, 혹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멀고도 이질적인 감각이 유일하게 지워질 때는 섹스를 할 때였다. 그와 격렬하게 살결을 마찰하고 체온을 나눌 때면, 그도 왠지 손에 붙잡을 수 있는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에게 몸이 쉽게 열리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차강혁에게 몸을 내어 주는 순간에는 절정으로 내몰려 내가 그의 ‘진짜 아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니까. 허울만 아내가 아니라 ‘그가 진심을 다해서 사랑하는 아내’ 말이다.
물론 섹스가 끝나고 나면 허황된 망상에서 깨어나, 나는 섹스토이에 불과하다는 차디찬 현실을 깨닫기야 하지만…….
* * *
은서는 목욕을 하고 침실로 돌아와 협탁에 있는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혹시나 윤혁의 상태를 전해 주기 위해 차강혁이 연력을 하지는 않았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남편으로부터 온 연락은 일절 없었다.
대신 우현의 연락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부재중 통화가 여러 건, 새로운 메시지가 여러 건이었다.
[누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혹시 또 남편이랑 싸웠어?]
[아직 자는 거야?]
[전화를 받든가 답장을 보내든가, 뭐라도 좀 해 줘. 걱정돼서 그래.]
은서는 어젯밤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그는 비상계단에서 발정했고, 무작정 길가에 차를 세워 난폭한 인터코스를 감행하며 분노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래서 목줄을 채워놨어야 했던 건데.」
「유은서,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넣어. 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내 거야. 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전부 다 내 거라고.」
「내 물건에 날파리가 꼬여 드는 건 질색이니까.」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정말 목줄을 채워 버릴 줄 알아.」
「다른 새끼들 앞에선 빈틈 보이지 마. 내 앞에서만 웃고, 내 앞에서만 예쁘고, 내 앞에서만 야해야 돼.」
발단은 사소했다. 신우현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섹스를 했을 때도, 그리고 어제도, 우현과 엮일 때마다 그는 뇌관이 터진 것처럼 무섭게 격노했다.
‘혹시, 같은 남자로서 우현이를 경계하는 건가? 질투…… 라도 하는 걸까?’
그러한 추측을 하자마자 은서는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 힘없이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질투는 아니야.’
그 분노가 결코 질투일 리는 없다.
차강혁처럼 냉정한 남자가 질투 같은 유치찬란한 종류의 감정에 휩싸일 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고작 ‘물건’밖에 되지 않으니 그의 질투를 유발할 만한 군번도 되지 못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질투는 아니다.
그는 단지 화를 낼 만한 건수가 필요해서 우현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내가 싫고 미우니까, 우현과 어울릴 때마다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일부러 분개하고 나를 잔학하게 괴롭히는 것이다.
「그땐 정말 목줄을 채워 버릴 줄 알아.」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소용돌이처럼 귓속을 빙빙 휘돌았다.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차강혁은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만약 일이 최악의 경우로 치닫는다면, 그는 진짜 내게 목줄을 채울지도 몰랐다.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오늘도 계속 자다가 이제 겨우 일어났고.]
은서는 그의 말을 꼭꼭 상기하고 우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누나, 괜찮아? 남편이랑 별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으니까 걱정 마. 주말 잘 보내.]
[바빠? 왜 이렇게 급하게 대화를 끝내려고 해? 나는 누나랑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피곤해서 자려고.]
은서는 성의 없는 답장만 보냈다. 우현이 서운해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기에, 전처럼 우현의 기분에 맞춰 줄 수 없었다.
차강혁 때문에 아끼는 동생을 멀리해야 한다니, 불합리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는 한 그에게는 절대적인 권력이 있었다. 그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비틀리고 냉혹한 폭군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목줄을 채우는 건 그에게 대수로운 일도 아닐 테니.
[아, 그래. 누나, 전시회 준비하느라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푹 쉬어. 다음에 시간 되면 만나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은서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그녀는 침대 속에 들어가 뒤척거리다 다시 또 잠이 들었다.
* * *
최 실장은 병원에 먼저 도착해서 차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가 로비로 들어서자 최 실장은 속히 진료실로 안내했다.
문진을 하고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전완부가 골절되었단다.
윤혁은 팔뚝에 깁스를 하고 VIP 라운지로 가서 숨을 돌렸고, 강혁은 바깥으로 나가 봄 햇살을 맞으며 조용히 담배를 태웠다.
그는 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연락을 할까,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곧 있으면 어차피 집으로 돌아갈 건데, 굳이 뭐 하러.
그는 담배를 다 태우고 VIP 라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은한 담배 향을 풍기며 다가오는 형을 보자마자 윤혁은 오지랖 넓은 조언을 날렸다.
“형도 담배 끊지. 그럼 형수님이 엄청 좋아할걸. 나도 담배 끊으니까 우리 현주가 완전 좋아해.”
“너나 많이 끊어라.”
“진짜 재미없는 인간이라니까.”
시큰둥한 대답에 윤혁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내가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다 형이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어떻게 동생의 속 깊은 마음을 그리도 몰라 주냐.’ 하면서 잔소리를 실컷 장전해서 갈기려는 순간, 최 실장이 라운지로 들어왔다.
“사장님, 약 여기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복용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전하는 최 실장의 차림새를 훑어보고 옅게 웃었다. 최 실장은 번듯한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휴일 날 급하게 연락을 했고 또 급하게 의사를 호출하느라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도, 최 실장은 정상 출근할 때처럼 옷을 정석적인 스타일로 차려입고 나온 것이다.
옷은 옷일 뿐 사실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모여서 결국에는 평판을 만든다.
그는 매사 꼼꼼하고 빈틈이 없는 최 실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최 실장이라면 공적인 부분부터 사적인 부분까지, 중요한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그 어떠한 일을 맡겨도 뒷일이 걱정되지 않았다.
“최 실장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타입이군.”
우회적으로 표현한 칭찬에 최 실장은 쑥스러운지 손바닥으로 뒷목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휴일인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사장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없어. 아, 그리고 어제 꽃 고마웠어.”
“저는 꽃을 준비하라는 사장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걸요.”
꽃? 시커먼 장정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곁에 있던 윤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집중해서 들었다.
“튤립을 고른 건 최 실장이잖아. 은서가 튤립을 좋아한다더군. 최 실장, 안목이 훌륭해.”
“장미는 왠지 식상할 것 같아서 튤립을 골랐는데, 사모님께서 좋아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난초 화분이나 화환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적은 많아도, 여자를 위해 꽃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남자였다.
최 실장은 보스의 생경한 명령에 심사숙고해서 꽃을 골랐다. 특히, 많고 많은 색깔들 중에서 빨간색을 고른 건, 빨간색 튤립에 사랑을 고백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위해 꽃을 준비하는 남자의 마음이라면 백이면 백, 뻔하지 않는가.
“그래. 들어가 봐. 오늘 수고했어.”
“차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냐. 괜찮으니까 이만 가도 돼.”
“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팀장님,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최 실장은 보스의 명을 받들어 형제에게 공손하게 묵례를 하고 물러갔다.
“어제 형수님한테 꽃 선물했어?”
윤혁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 히죽 웃으며 느물거렸다.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차강혁이 여자에게 꽃을 줄 위인이 아닌데.
“어제 유은서 개인전이었어. 그런 행사에 빈손으로 갈 만큼 못 배운 놈은 아니라고.”
“어? 어제가 형수님 개인전이었어? 그럼 나도 불렀어야지! 그 중요한 행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윤혁이 아쉽다는 식으로 탄식했다.
“근데, 형. 원래 여자한테는 배워 먹지도 못한 후레자식처럼 굴지 않았나?”
“…….”
“형이 여자한테 꽃을 주다니. 아무리 중요한 행사라도 이건 너무 나갔는데.”
“…….”
“차강혁에게 형수님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윤혁이 은근슬쩍 떠보았다. 혹시나 형의 입에서 말랑말랑한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루 세 번씩 먹어라.”
그러나 차강혁의 입에선 여지없이 딱딱한 말이 나온다. 그는 처방약을 윤혁의 가슴팍에 탁 던져 주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약봉지를 얼른 잡아챈 윤혁은 널찍한 등짝에다 대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혀엉, 같이 가!”
* * *
걸핏하면 종알거리며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 귀찮아서 병원에 떨궈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동생이라고 결국에는 기다려 주었다. 후다닥 뛰어온 윤혁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어 윤혁을 먼저 태우고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액셀을 밟자 페라리는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와 아스팔트 도로 위로 진입했다.
“본가로 데려다줄까.”
“거긴 왜?”
‘본가’라는 단어에 윤혁의 말투는 급격히 까칠해졌다. 싱글싱글 웃는 상의 얼굴도 두드러지게 구겨졌다.
“팔 다쳤잖아.”
“겨우 팔 좀 다쳤다고, 내 발로 지옥에 들어가라고?”
“거기가 왜 지옥이야.”
“아버지가 계시잖아.”
걸핏하면 골프채를 휘두르고 물건을 깨부수며 호적에서 이름을 파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앞뒤 꽉 막힌 아버지가 있는 곳인데, 거기가 지옥이 아니면 대체 어디가 지옥이겠는가.
“아버지가 어때서.”
“아버지가 어떻냐니? 형은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도 않아?”
“내가 너 같은 어린애냐.”
“으휴. 형은 가끔 보면 사람이 아니라 로봇 같아. 감정이 없어, 감정이.”
윤혁이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독불장군 같은 아버지가 자신을 반투명 인간 취급했다면, 형에게는 기대를 가장한 학대를 일삼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1등만을 강요하고, 실수로 삐끗했을 때는 어른답게 위로를 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스터디 룸에 가두는 만행까지 저지른 아버지였다.
그런데도 형은 아버지를 향한 반감을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형은 아버지가 몰아붙이고 압박을 줄 때마다 오히려 더 스스로를 호되게 채찍질하면서,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과물을 내보인 남자였다.
강철 같은 심장의 소유자.
윤혁이 정의하는 차강혁은 그런 남자였다. 심장이 강철처럼 굳세고 단단해서 어떠한 일에도 감정적 동요가 없고 매사 의연한 남자.
“아무튼, 본가에는 절대로 안 가.”
윤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여자 친구 집에라도 가.”
“우리 현주 수험생이라니까? 남친이랑 같이 살면 수험생한테 퍽이나 도움 되겠다.”
“깁스하는 동안만이잖아.”
“수험생한테는 단 하루도 금쪽같거든요? 차라리 형네 집에 가고 말지.”
“꿈도 꾸지 마라.”
순간, 그는 눈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빛내고 싸늘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오, 이 거친 반응은 뭐지? 형, 지금 되게 무서운 표정으로 정색하고 있어.”
주변 공기마저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가공할 만한 냉기에 윤혁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던진 말에 이리도 서슬 퍼런 눈빛을 할 줄은 몰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매가 사람을 너끈하게 베어 버릴 기세다.
“농담이야, 농담. 나도 눈치란 게 있는데 설마 신혼집에 쳐들어갈까 봐? 안심하고 표정 풀라구.”
윤혁은 형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넉살 좋게 말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단정했다. 강철 같은 심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 * *
은서는 꿈을 꿨다. 지진이 나는 꿈이었다. 천장이 흔들리고, 조명이 흔들리고, 침대가 흔들리고, 그리고 몸이 흔들렸다.
어, 그런데. 느낌이 상당히 괴상야릇했다. 흔들리는 것도 흔들리는 건데, 아랫배가 묘한 이물감으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은서가 눈을 번쩍 떴다. 흐린 시야를 충만하게 채워 오는 건 차강혁이었다. 셔츠를 벗어 던진 그는 제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또 깼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난폭한 피스톤질은 멈추지 않는다.
“하아, 뭐야……. 그만해요.”
은서는 비몽사몽 상태로 잠투정을 부리고 앙탈을 부렸다.
곤히 잠든 사람을 덮치고 싶을까? 너무 변태 같다. 의식이 없는 저를 두고 그가 별별 짓들을 다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온몸으로 소름이 돋는다.
옷이 거의 벗겨진 상태로 아래가 질척하게 젖어 그의 페니스를 곧잘 받아들이는 거 보면, 분명 온갖 너저분한 짓들은 다 했을 텐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으니 묘한 두려움마저 얼핏 피어올랐다.
“사람 자는데 하지 좀 마요, 흐읏……. 진짜 당하는 것 같단 말이야.”
“뭘 당해? 강간?”
그가 피식 웃는다.
“그래, 강간이라고 치지.”
“아흣.”
“그렇다면 유은서는 나한테 강간당하면서도 느끼는 거군. 보지가 엄청 젖었어. 침대 시트 또 갈아야 할 판이야.”
그는 조소를 내뱉으며 퍽퍽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몸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그의 페니스가 자궁을 건드리며 깊숙이 쑤셔 들어올 때마다 진한 쾌감이 전해졌다.
“개자식, 흐응……. 죽여 버리고 싶어.”
은서는 욕설을 지껄이고 손톱을 휘둘러 그의 가슴팍을 앙칼지게 할퀴었다. 분노와 살기를 가득 실어 할퀸 것이라 평소보다 살점도 심하게 뜯기고 붉은 피까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가슴팍에 상처가 생기든 말든 피가 흐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격한 피스톤질에만 몰두했다.
* * *
광란의 행위가 끝나고 차강혁은 창가로 다가섰다. 커다란 창에서는 오후의 햇살이 들어와 그를 환하게 비춘다. 그는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서는 침대에 휘늘어진 채로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는 셔츠는 벗어 던지고 청바지만 입고 서 있었다. 긴 다리와 완벽하게 윤곽이 잡힌 근육이 멋지다. 햇볕에 자연스럽게 그을린 피부는 더할 나위 없이 섹시하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얼굴은 뭐,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근사하기만 하고.
저렇게 나쁘고 불량하고 불순하고 비틀린 남자에게 그나마 착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외모였다.
‘겉모습 하나는 끝내주게 훌륭하지.’
너무 훌륭해서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다는 소감이 든다. 맞선 자리에서 차강혁은 자신과 같이 살면 재미없을 거라고 경고를 주었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차강혁 외모를 뜯어보는 게 웬만한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은서는 넋 놓고 감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도련님은 어때요?”
“정신 차리자마자 남부터 챙기는 게 참 유은서답군.”
“도련님이 남이에요? 쓸데없이 비꼬지 말고 상태가 어떤지나 말해 봐요.”
“팔뚝이 골절됐어.”
“어머, 어떡해요?”
피곤에 지쳐 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어떡하긴. 깁스했으니 시간 흐르면 낫는 거지.”
“골절이면 많이 아플 텐데. 불편하기도 할 거고. 가뜩이나 도련님 혼자 사는데…… 그냥 집으로 보냈어요?”
“그럼 집에 보내지, 어디로 보낼까? 왼팔이라 괜찮아. 그 녀석, 오른손잡이거든.”
무뚝뚝한 대꾸에 은서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요. 혼자 살면서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데. 본가에라도 데려다주고 오지.”
“그 녀석, 아버지를 싫어해.”
단호한 대답에 은서는 저번에 윤혁이 차근차근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런 아버지라면 싫어할 만도 하지.
“그럼 여기로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방 많은데.”
이번에는 차강혁이 인상을 구겼다. 그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짧아진 꽁초를 거칠게 비벼 껐다. 그러고는 침대 가까이로 척척 걸어갔다.
“헛소리 말고 잠이나 자라.”
냉담하게 일갈한 그는 이불을 은서의 머리끝까지 푹 덮어 버렸다.
* * *
은서는 또 잤다.
밤 9시가 되어서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강혁이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은서는 투정만 부리고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 점심때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잠에 취한 은서를 가뿐히 안아 들고 식탁으로 데려가 억지로 밥을 먹게 했다.
강제 식사를 다 하고 난 은서는 또다시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섹스로 체력이 고갈되어 수면으로 보충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부스스 눈이 떠졌다. 사위는 어두컴컴해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은서는 손을 뻗어 더듬더듬 협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새벽 3시 20분이었다. 계속 자야겠다 싶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오늘 너무 많이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은서는 요리조리 뒤척거리다가 결국 눈을 떴다.
제 쪽에 있는 소형 스탠드의 불을 밝히고 가벼운 페이퍼 북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다 보면 다시 잠이 오리라.
은은한 불빛 아래서 활자를 눈으로 따라 읽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옆자리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은서는 책을 내려놓고 다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실 전체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 옆자리를 살폈다.
그는 만면이 일그러진 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럽게 앓고 있었다.
‘왜 이러지? 어디 아픈가?’
이마에 손을 얹어 보니 열은 없었다. 하지만 오한을 느끼는지 낯빛이 창백했고,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달싹거리는데 어디에 꽁꽁 묶인 것처럼 녹록지는 않아 보였다.
입술은 잘게 떨리면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거라고는 형태가 뚜렷한 언어가 아니라 형편없이 뭉개지는 신음뿐이었다.
‘가위에 눌리고 있는 것 같은데…….’
가위에 눌린 사람은 얼른 깨워 줘야 한다고 들었다. 은서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강혁 씨, 일어나 봐요.”
“…….”
“내 목소리 안 들려요? 강혁 씨, 눈 좀 떠 봐요.”
“…….”
“차강혁 씨! 일어나 보라구요!”
반응이 없자 은서는 더 세차게 그의 어깨를 뒤흔들고 함성이라도 치듯 목청을 크게 높였다. 그제야 꾹 감겨 있던 눈꺼풀이 느릿느릿 말려 올라간다. 황량하게 텅 빈 눈동자가 은서를 멍하게 응시했다.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질문에 그는 눈을 굼뜨게 깜박거리기만 할 뿐 달리 대답은 없었다. 흑요석처럼 짙고 명석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상처를 입은 것처럼 그늘이 져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이번에도 그는 대답 대신 눈을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온전히 정신을 차리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물수건을 가져올게요.”
은서가 침대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덥석 손목이 붙들렸다.
“가지 마…….”
메마른 입술이 말했다. 가지 말라고. 왠지 애가 타는 그의 목소리에 은서는 심장이 덜커덕거렸다.
“식은땀을 닦아야죠. 안 그럼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은서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애처로운 눈빛을 집요하게 보내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가지 마…….”
항상 강해 보이던 남자가 처음으로 약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본인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늠름한 남자가 지금 이 순간에는 불안에 시달리는 초조한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다.
결국 발을 떼지 못한 은서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당신 곁에 있을게요.”
* * *
「아버지, 실망시켜서 죄송해요.」
소년은 장벽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육중한 문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며 간절하게 말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용서해 주세요.」
소년은 키가 컸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제법 강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열다섯 살 소년일 뿐이었다.
「아버지, 여긴 너무 답답해요. 제발 나가게 해 주세요…….」
「도련님, 사장님께서는 주무시러 가셨습니다. 도련님도 어서 잠자리에 드세요.」
소년은 절실하게 아버지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젊은 경호원의 기계적인 답변이었다.
경호원이 말하는 잠자리란, 스터디 룸 한쪽 구석에 처박힌 간이침대를 일컬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몸을 섣불리 돌렸다가는 바닥으로 나가떨어지기 십상인 볼품없는 간이침대.
아버지는 소년에게 편하게 잠을 잘 자격도 없다며 일부러 낡아빠진 간이침대를 스터디 룸에 넣어 놓은 것이다.
소년은 중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2등을 했다.
분명 시험지에는 답을 제대로 체크했는데,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 OMR카드에는 그만 오답을 체크하고 말았다. 뼈아픈 실수로 1등을 빼앗긴 것이다.
실수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아버지는 공부에 더 효율적으로 집중하고 실수를 반성하라는 의미로 한동안 스터디 룸에서 지내라는 엄벌을 내리셨다.
소년은 여름방학 기간 내내 스터디 룸에서만 갇혀 지냈다. 집 밖은커녕 방 밖으로도 나가 보지 못했다.
정해진 시간마다 경호원이 자물쇠를 열어 과외 교사를 들여보내 주고, 식사를 넣어 주었다. 천장에 부착된 카메라는 스물네 시간 내내 돌아가면서 소년을 끈질기게 감시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지독한 감금 생활도 당연히 끝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노기는 쉽사리 풀리지 않아, 방학이 끝났음에도 감금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개학을 한 후에는 학교에 가는 것만 허락될 뿐, 하교할 시간이 되면 경호원이 픽업을 해서 다시 스터디 룸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침에 등교할 때까지 방 밖으로는 절대로 나갈 수 없었다.
스터디 룸은 그냥 일상적인 공간이었는데, 갇힌 이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그곳은 넓었지만 좁아 보였고, 충분한 산소가 있었지만 질식할 것 같았다.
책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들은 어느샌가 무너져서 소년의 몸을 덮칠 것만 같았고, 공간을 환하게 밝혀 주는 조명은 갑자기 머리 위로 추락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였으며, 불을 끄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명이 들려와 불면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따금씩 심장이 조여 들어와 숨이 막혔고, 가끔씩은 이유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소년은 혼자였다. 소년을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침묵으로 아버지의 뜻에 동조했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손을 다정히 잡아 주며 말해 주길 원했다. 너는 실패한 게 아니고 단지 실수를 한 것뿐이라고.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런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끔찍했던 감금 생활은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1등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나서야 겨우 종결되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가 남은 것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간혹 그 시절 꿈을 꿀 때가 있다.
나는 분명 어른인데, 무슨 일이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성인인데, 그런데도 꿈속에서 과거로 빨려 들어가 열다섯 살의 미숙한 소년과 조우하고 나면,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정신이 흐리멍덩해진다.
그리고 몹시도 외로워진다. 홀로 내버려진 기분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마음이 사막처럼 황량해지는 것이다.
황폐해진 이 마음을 누군가가 달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늘 혼자였다. 열다섯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누군가가 있었다. 흐린 시야는 점차 선명해지고 망막으로 말간 얼굴이 비춰 들어왔다. 그는 무심결에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애원했다.
“가지 마…….”
“아무 데도 안 가요. 당신 곁에 있을게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감싸 주고 자그마한 손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듯이.
그는 잿빛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담한 몸이 넓은 가슴팍 위로 풀썩 쓰러진다.
그는 단단한 팔뚝으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는 서로의 심장박동이 거세게 울리고 있었다.
“강혁 씨…….”
은서가 고개를 비죽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상냥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와 눈빛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느낌에 그는 조급하게 그녀의 뒷머리를 부여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고 입안 곳곳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탐험한다.
그는 거침없이 숨결을 훔치며 자세를 뒤집어엎었다.
그녀를 밑에 가둔 채로 젖가슴을 만지작거리고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원피스 자락을 찬찬히 끌어 올렸다. 옷자락이 가슴께까지 올라오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가쁜 숨이 쏟아졌다.
“하아.”
은서는 그가 원피스를 쉽게 벗기도록 스스럼없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라면 이깟 몸뚱어리쯤은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엉망으로 망가뜨려도 좋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헤집어 놓아도 좋았다.
얇은 원피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그는 홀린 듯이 살결을 더듬었다. 아무도 밟지 못한 새하얀 설원 같은 몸이 언제 봐도 아름답다.
그래서 더럽히고 싶다. 나만의 발자국을 아름다운 눈밭 위에 꾹꾹 각인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는 깨끗한 살결에 입술을 맞추며 영역 표시를 하듯 자국을 남겼다.
질척한 전희로 몸이 달아오르자 은서는 안달이 난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솜 주먹으로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강혁 씨, 하읏. 어서요. 어서 해 줘요…….”
음란한 요구에 그는 서슴없이 안을 꿰뚫고 들어갔다. 은서는 열띤 신음을 터뜨리며 그의 몸을 꼭 부둥켜안았다.
“하아, 은서야.”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허리를 광포하게 놀렸다.
퍽, 퍽, 속살이 뜨겁게 맞부딪친다. 체온은 끝 모르게 상승하고 심장은 격발하듯 날뛰었다. 쾌감이 몰아치고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순간, 그는 괴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육체는 점점 극단을 향해 치닫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은 안정이 되는 그런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울감과 외로움이 걷히고 이유 모를 평온함이 밀려온다.
그녀의 몸이, 그녀의 온기가, 소년기 때부터 그를 징그럽게도 괴롭혀 오던 악몽의 기억을 마법처럼 지워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 * *
그가 눈을 감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자 은서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장 다부진 완력에 의해 손목이 붙들리고, 다시 침대 위로 푹 쓰러지고야 말았다.
“도둑고양이처럼 어딜 도망가.”
그가 눈을 느리게 떴다.
“도망 안 가요. 샤워하려고 욕실에 가려고 했어요.”
은서는 도톰한 입술을 움직였다. 섹스하면서 하도 많이 깨물리고 빨린 덕분에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을.
“아무 데도 안 간다고 했잖아.”
“금방 씻고만 올게요.”
“가지 마.”
그가 은서를 세게 끌어안았다. 두 팔로 껴안은 것은 물론이고, 두 다리까지 합세해서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집착스럽게 옭아맸다.
“갑갑해요.”
건장한 체구에 완전히 포박당한 은서가 투덜투덜 불평했다.
“잠이나 자.”
“갑갑한데 어떻게 자요.”
“그래도 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꼭 철부지 어린애 같았다. 아무래도 악몽을 꾸고 난 뒤에 그는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
은서는 고개를 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근데…… 무슨 꿈 꿨는지 물어봐도 돼요?”
“개꿈.”
명백한 거짓말이다.
고작 개꿈 따위로 사람이 이리도 이상해질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누가 봐도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무언가 끔찍하고 무서운 악몽을 꾼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묻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개꿈’이라고 거짓말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면, 솔직하게 털어놓기 싫은 것 또한 확실해 보였다.
은서는 궁금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몹쓸 꿈을 자꾸 들춰 내는 것보다야 빨리 잊게 해 주는 게 더 좋겠지.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그의 기억 속에서 악몽을 빠르게 삭제시킬 수 있을까.
은서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강혁 씨, 나한테 그 꿈 팔아요.”
“꿈을 팔라고?”
“네. 내가 살게요. 얼마에 팔래요? 얼마면 되는데요?”
사람들은 좋은 꿈을 사서 행운을 얻는다. 그렇다면 나는 악몽을 사서 그의 악운을 가져갈 테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악몽의 그늘을 모조리 지워 낼 거다.
“당신, 정말…… 문제가 많은 여자군.”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왜인지 묘하게 벅차 보였다.
그녀를 직시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넘실거리고 있었다. 깊고 검은 바다에 바위가 풍덩 떨어져서 파문이 이는 것처럼 잔잔하고 부드럽게.
“문제요? 내가 왜 문제가 많아요?”
“개꿈을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살 수도 있죠. 상식은 깨뜨리라고 있는 거예요. 자, 어서 나한테 그 꿈 팔아요. 돈은 달라는 대로 다 줄게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라.”
“싫어요. 꿈 팔기 전에는 안 잘…… 흐읍!”
그는 난폭한 키스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은서가 내뱉으려던 말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숨결을 훔쳐 간다.
은서는 몸을 바르작거리며 반항했지만 얼마 못 가서 잠잠해졌다.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점점 짙어지는 키스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뒷머리를 온통 헝클어뜨리며 열띤 키스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 * *
‘이건 새로운 자세인데…….’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은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옆으로 누워 있는 자신의 등 뒤로는 그가 바짝 붙어 있었고, 머리 밑으로는 그의 팔이 베개처럼 받쳐져 있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뛴다. 잠은 계속 같이 잤어도 이렇게 찰싹 붙어서 팔베개까지 받으면서 자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뭔가 좀 이상한데.’
묘한 감각에 이불을 들춰 보니, 솥뚜껑도 울고 갈 것 같은 커다란 손이 가슴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등허리로는 꼿꼿하게 발기된 페니스가 뻔뻔스럽게 닿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자면서도 변태 짓이야.’
은서는 가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손을 가슴에서 떼어 내 허리쯤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손이 스르륵 움직이며 다시 가슴으로 회귀하듯 오는 것이다.
‘아이참, 왜 이러지.’
은서가 재차 손 위치를 옮기려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젖가슴을 막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딱딱한 페니스는 엉덩이 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음험하게 부비적거렸다.
“가, 강혁 씨…… 흐응.”
기다란 손끝이 젖꼭지를 장난스럽게 튕기자 은서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침 운동이나 할까.”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고, 붉은 혀가 귓불을 쓰윽 핥아 올렸다.
이내 그는 은서를 똑바로 눕혀서 보들보들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쯉쯉, 게걸스럽게 가슴을 할짝거리며 여념 없이 탐한다.
열띤 자극에 은서는 앙앙거리면서도 설핏 미소를 지었다.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냉철한 남자가 고작 가슴에 넋이 빠져서 개처럼 핥고 있다니.
물론 그는 가슴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밑구멍도 혀를 내두를 만큼 좋아했다. 그 짓을 하려고 잘난 무릎도 꿇을 만큼, 은서의 다리 사이를 빨아먹을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무슨 짓이든 했다.
그가 냉혈한의 모습을 냉큼 집어던지고 발정 난 개새끼처럼 저에게 달려들 때면, 은서는 항상 기이한 쾌감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무너뜨리지만, 사실은 어쩌면 자신이 그를 무너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짜릿해지는 것이다.
“하아.”
가슴을 실컷 빨아먹은 그는 천천히 혀를 아래로 굴렸다. 몰랑몰랑한 배를 할짝거리며 가랑이를 넓게 벌려 본다.
깜찍하게도 구멍은 벌써 젖어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젖은 구멍을 맛보기 시작했다.
“하읏.”
능숙한 혀 놀림에 은서가 그의 머리통을 세게 쥐면서 머리칼을 엉망으로 잡아당겼다. 무언가를 잡고 뜯지 않으면 얄궂은 애무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혀끝으로 클리토리스를 꾹꾹 눌러서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동시에, 구멍 속으로 손가락까지 쑤셔 넣어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하아앙.”
허리가 바르르 떨리고 새된 교성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의 머리를 절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손끝은 이미 하얗게 질려 버렸다.
“하읏. 강혁 씨…….”
은서는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거의 울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노련하게 애무를 이어 나갈 뿐이다.
결국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려 댔다. 이제 이런 건 그만하고 더 큰 자극을 달라고 시위하는 것이다.
그를 원했다. 그의 거대한 페니스로 제 몸을 마음껏 짓이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녀를 괴롭히는 재미에 맛이 들린 그는 달콤한 꿀들을 왈칵 쏟아 내는 음란한 구멍에서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하앗. 이제 그만…….”
“그만, 뭐?”
그가 짓궂게 물었다. 벌름거리는 아래에 장난을 치듯 더운 입김을 후, 불어넣자 은서가 몸서리를 쳤다.
“흐응.”
“박아 줄까?”
유혹하듯 속삭이는 말에 은서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버릇없이 고갯짓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은서는 숨을 꿀떡꿀떡 삼키고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엄격한 꾸짖음에 서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작은 입술을 음탕하게 오물거린다.
“박아…… 주세요.”
본능이 육체를 관통하면 천박한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저를 탐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듯이, 은서도 그를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박아 줘?”
“으응.”
“이 구멍에 뭘 박아 줄까?”
“…….”
“손가락? 혀?”
이 빌어먹을 장난질은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럼에도 은서는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달달 떨면서 치욕스러운 말을 겨우겨우 쏟아 냈다.
고삐 풀린 말을 멈춰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미 흥분으로 치솟은 몸을 가라앉히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자지…… 박아 주세요.”
귀여운 입에서 나오는 저속한 단어에 그는 피식 웃었다.
“공주님이 원한다면 기꺼이 박아 드려야죠.”
또 나를 놀리지. 은서가 눈을 새치름하게 흘겼다. 하지만 그가 팽팽하게 솟은 페니스를 젖은 구멍 속에 사정없이 찔러 넣자, 눈동자는 초점을 이탈해 버렸다.
“하흣!”
은서는 경련하듯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커다란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받아들였다. 그는 잘록한 허리를 붙잡고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하읏.”
애액으로 흥건해진 아래는 그의 페니스가 드나들 때마다 찔꺽거리는 난잡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좁다란 구멍은 페니스를 압박하듯이 물고 조였다. 빠듯하게 물고 늘어지는 요망한 구멍에 그의 허리짓은 더욱더 야만스러워졌다.
그는 페니스를 엇박으로 쑤셔 넣으며 그녀를 마음껏 농락했다. 일부러 그녀를 놀리려고 포인트를 빗겨 나가기도 한다.
“아읏, 거기 말고…….”
“거기 말고, 어디? 여기?”
징징거리면서 보채는 데도 그는 심술궂게 계속 엉뚱한 곳만 건드렸다. 결국 은서는 본인 스스로 스팟을 자극하기 위해 하반신을 들썩거렸다.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허리와 골반을 어설프게 놀린다. 그는 앙큼한 요분질을 흡족하게 감상하다 돌연 페니스를 빼냈다.
순간,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끝난 건가? 예상보다 빠르게 끝난 인터코스에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이다.
그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은서를 안아 들어 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어디 내 위에서 실컷 움직여 봐.”
은서는 숨을 멈추고 눈을 순진무구하게 떴다.
위에서 움직여 본 적은 있지만 이 체위는 처음이었다. 그가 완전히 누운 상태로 제가 올라타 앉으니, 꼭 말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뭐 해. 어서 움직이지 않고.”
그가 재촉하듯 엉덩이를 다시 찰지게 후려쳤다.
매질에 정신이 번쩍 든 은서는 그의 명령을 성실하게 받들기 위해 꼿꼿하게 서 있는 페니스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벌어진 질구로 귀두 끝을 가져와 살살 비볐다.
“하아.”
기분이 요상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그의 페니스를 가지고 놀고 있으니 굉장히 부끄러우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짜릿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의 페니스로 자위를 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윽고 은서가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내려앉자 단단한 페니스가 질 속을 파고들어 왔다.
“하읏……!”
깊숙한 삽입에 인상이 저절로 어그러졌다. 거대한 물건이 아랫배를 완전히 장악해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은서는 탄탄한 가슴팍 위에 두 손을 짚고 의지하며 천천히 골반을 돌렸다. 살짝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크나큰 자극이 휘몰아쳐 왔다.
“하앗.”
은서는 본능적으로 스팟을 찾아 요분질을 쳤다.
우윳빛으로 빛나는 아리따운 몸이 그의 위에서 요염한 춤사위를 뽐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흔들린다.
그는 손을 뻗어 출렁출렁 흔들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말랑말랑하게 감겨 오는 감촉이 가히 훌륭하다.
아니, 모든 것이 훌륭했다. 우유 푸딩 같은 몸, 관능적인 몸짓, 야한 얼굴, 외설적인 신음 소리까지, 모든 것들이 다 완벽했고 훌륭하기만 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이제 더는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그는 은서의 골반을 틀어잡고 허리를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무작정 거칠게 시작된 피스톤질에 여리여리한 몸이 균형을 잃고 속절없이 흔들렸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위에 올라탄 것처럼 은서는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아으, 강혁 씨…… 천천히…….”
은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손톱을 바짝 세워 그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상체가 풀썩 엎어졌다. 그는 작은 몸을 소중하게 껴안고 무자비하게 허리를 밀어 쳐올렸다.
“하으응.”
은서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극한의 쾌감이 육체를 잔인하게 관통하면 눈물샘마저 터져서 엉엉 울어 버리게 된다.
그는 폭주하듯 밑에서 끊임없이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그럴수록 은서는 계속 울었고 그의 어깨는 뜨겁게 젖어 들었다.
“흣, 은서야…….”
피치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맹렬하게 치받던 그가 짐승처럼 포효했다. 음습한 욕망을 진하게 담은 정액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여운에 젖은 격한 숨소리가 침실을 온통 메운다. 그는 지쳐서 맥없이 느즈러져 있는 그녀의 마른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은서가 고개를 비죽 들어 올리고 매혹적인 홍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갈색 눈동자를 그윽하게 마주 보다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 * *
계절은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들어섰다. 기온이 상승했고 녹음이 짙어졌으며 태양은 더욱 뜨거워졌다.
섹스는 거의 매일 했다.
은서는 반항을 할 때도 있었고, 순순히 그를 받아들일 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늘 한결같았다.
어떤 선택을 해도 항상 차강혁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은서가 남편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섹스는 짜릿했지만 사랑이 없었기에 때때로 허무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은서는 그런 종류의 허무감이나 공허함을 달래는 데에도 도가 텄다.
서글픈 짝사랑과 의미 없는 섹스에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 올 때면, 그녀는 차강혁의 단호한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했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이 말을 기억하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가도 조금 힘이 난다. 그는 비록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자에게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명목상 내 남편이고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똑똑히 상기하면서, 힘겨운 짝사랑을 안간힘으로 버텨 내는 것이다.
혹자는 비굴하다고 하겠지. 자존심도 없냐고 훈계를 하고 싶겠지. 하지만 사람 마음은 논리적으로 딱딱 끊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이 수학 공식처럼 합리적이고 논리정연 하다면, 과연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겠는가.
* * *
여느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수요일 오후 5시, 알람이 울렸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은서는 자동 반사처럼 붓을 내려놓고 피임약을 챙겨 먹었다. 생리는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피임약을 끊을 수는 없었다.
걸핏하면 차강혁이 짐승처럼 달려드는 덕분에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덜컥 임신을 했다가는 큰일이니까.
“임신이라…….”
은서는 ‘임신’이라는 단어를 씁쓸하게 뇌까리며 스튜디오 구석에 있는 초상화를 응시했다.
계절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은 여전히 미완인 채로 남아 있었다. 현실의 차강혁이 멀게 느껴지듯, 초상화 속의 차강혁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완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렇게 멀리 있는 사람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잿빛 같은 우울감이 정신을 덮쳐 온다. 하지만 은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환기시키고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쓰라린 현실에 슬퍼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순응하는 편이 낫다. 슬퍼한다고 이 비참한 현실이 달라지지도 않을 테니까.
시간이 흘렀다.
청명하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자, 은서는 뒷정리를 하고 스튜디오에서 나와 세단에 올라탔다.
그녀를 태운 세단은 도심의 어느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웨이터가 예약한 자리로 안내를 해 주었다. 약속 상대인 작은언니는 먼저 도착해서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은경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낯빛이 평소보다도 더 밝아 보였다.
“언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글쎄.”
입가를 씰룩거리며 히죽히죽 웃는 모양새가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뭔데? 말해 봐.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일단 음식부터 시키자.”
은경은 대답을 피하고 메뉴를 펼쳤다. 메뉴를 꼼꼼하게 훑은 은경은 연어 스테이크를 골랐다. 은서도 같은 음식으로 주문했다.
잠시 후, 웨이터가 테이블로 다가와 입맛을 돋우기 위한 애피타이저 와인을 준비해 주었다. 투명한 글라스로 술이 쪼르륵 채워진다.
“오랜만에 건배할까?”
은경이 잔을 들고 제안했다. 은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잔을 부딪쳤다. 짠, 하는 낭랑한 소리와 함께 술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경쾌하게 건배를 하고 은서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은경은 와인을 마시지 않고 잔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 두는 것이다.
“언니, 안 마셔?”
순간, 은경은 얼굴을 붉히며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웬만한 사내들보다 호방한 성격을 자랑하는 유은경이 이렇게 수줍게 웃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은서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때, 은경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입술을 극적으로 움직였다.
“은서야, 실은 나…… 임신했다?”
예상 밖의 소식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몸도 표정도 굳어 버렸다.
호흡 기관이 망가진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귓속에서는 웅웅거리는 불쾌한 잡음이 울렸다.
“내가 은서 너한테 밀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추월은 안 당했어. 호호.”
은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처럼 웃었다.
그 행복한 미소가 이상하게도 은서의 가슴을 송곳처럼 쿡쿡 찔러 왔다. 출처 모를 고통에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 기쁜 순간을 어리석게 망칠 수는 없었다.
은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기술적으로 웃었다. 어느 때보다도 입매를 곡선으로 크게 말아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축하해. 진짜 축하해. 너무너무 잘됐다…….”
입 밖으로는 축하한다고 연신 말을 하는데 입안에서는 쓴맛이 감돌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어엿하게 품을 수 있는 언니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생리 주기가 규칙적으로 돌아왔는데도 피임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건 결코 자의가 아니다.
솔직한 욕심으로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 다른 여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임신을 해서 출산을 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은 욕심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욕심만을 따르기에 은서는 다른 여자들과 처한 상황이 명백하게 달랐다.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질 수는 없잖아…….’
차강혁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뼈아픈 현실을 오롯이 내 몫으로만 감당할 때는,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은 아이에게 필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부부 관계 속에서 자란 아이는 쉽게 불안정해질 것이고 결국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하겠지.
아이에게 그런 불운을 줄 수는 없었다.
허울뿐인 이 가정에서 불행한 사람은 저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대를 이어 가며 불행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기에, 은서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심을 애써 누르고 피임약을 꾸역꾸역 먹어 댔던 것이다.
아마도 평생 동안 먹어야겠지. 차강혁이 나를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테니까…….
“임신한 지는 얼마나 됐어?”
은서는 우울한 감정을 숨기고 밝은 어조로 물었다.
“5주 됐대. 초음파 하는데, 난 처음에 애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했다? 의사가 콕 찍어서 알려 주는데 완전 콩알만 한 거 있지?”
“되게 귀엽겠다. 오늘 저녁은 내가 사야겠네? 다시 한번 축하해, 언니.”
발랄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는데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에서 나온 은서는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세단에 올라탔다. 세단은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나섰다.
무슨 정신으로 저녁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샐샐 웃으면서 언니의 말에 호응을 하고 음식을 입속에 집어넣었지만, 지나고 보니 레스토랑에서 언니를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사람이 과연 저였는지 아니면 유령이었는지 도통 구분이 가질 않았다.
휴, 은서는 묵직한 한숨을 쏟아 냈다. 고작 이런 일로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다.
아직도 수행이 부족한 걸까.
그저 받아들이면 편할 것을. 나는 잘못된 사랑에 빠져 행복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했다고, 그냥 인정하면 편할 것을…….
그 간단한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은서는 또다시 한숨을 길게 토해 내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차강혁이 보고 싶었다.
힘들 때, 우울할 때, 슬플 때, 차강혁이 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감정 여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기분이 어떻든 간에 언제나 그가 보고 싶었다.
‘그 남자가 바로 내 불행의 원인인데…….’
차강혁만 없었다면 내 인생이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텐데, 그런데도 항상 그가 보고 싶다. 어리석게도.
은서는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키패드를 눌렀다.
그래, 용기가 필요했다. 고작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 일에도 용기 같은 거창한 감정이 필요한 것이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외마디의 단조로운 인사가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남자다. 무뚝뚝하고 인정머리도 없고.
아, 그래도 그나마 도련님에게는 마음을 조금 열어 주는 편이다. 그렇다면 나도 차라리 그의 아내가 아니라 그의 동생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까.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사예요?”
-어.
“오늘도 늦게 들어와요?”
-어.
“저녁은 먹었어요?”
-아니.
은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되기 5분 전이다.
“시간이 몇 신데 여태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했어요?”
-바빴어.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요.”
-그래.
“…….”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물어볼 말도 없었고.
공연히 그를 방해하지 말고 이쯤에서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부드럽게 진동시켰다.
-올래?
“네?”
-배고파. 먹을 것 좀 사다 줘.
“내가 왜요?”
-당신이 방금 그랬잖아. 밥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라고.
“그렇지만 그걸 내가 왜…….”
-배고프니까 빨리 와.
뚜, 뚜, 그는 일방적으로 말을 툭 내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익숙한 일이다. 불친절한 끝맺음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은서는 매정하게 끊어진 휴대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운전 중인 정 기사에게 말했다.
“정 기사님, 강혁 씨 회사로 가야겠어요. 차 좀 돌려 주세요.”
“네.”
직진을 하던 세단은 유턴을 해서 방향을 바꿨다. 사뭇 달라진 차창 밖의 풍경에 우울하게 죽어 있던 심장이 조금씩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샌드위치를 살까 하다가 초밥을 샀다. 저녁을 아직 먹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빵보다는 밥을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은서는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두꺼운 프렌치 도어를 열자, 차강혁은 그림 같은 야경을 배경으로 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번과 비슷한 모습이다. 넥타이가 사라졌고 드레스 셔츠 윗단추가 풀려 있었다. 다소 지친 듯 안색은 조금 나른해 보였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든가 아니면 섹스를 줄이든가. 둘 중에 하나만 줄여도 그나마 덜 피곤할 텐데.
그는 고집스럽게도 두 가지 모두를 집착맞게 사수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바쁘게 일하면서도 집요하게 섹스를 해 대는 것이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남자다.
“초밥 사 왔어요. 먹어요.”
은서는 내방객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된 중앙 테이블로 걸어갔다. 낮은 테이블 위에 초밥을 놓고 푹신한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윽고 차강혁이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가 명료하게 울린다. 순간, 은서는 소파에서 등을 떼고 척추를 반듯하게 곧추세웠다.
어쩌면 그는 짐승같이 달려들지도 모른다. 도면을 핑계로 저를 이곳에 불러들였을 때처럼, 배고픔을 핑계로 저를 유인해서 허기진 색욕을 채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긴장감으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갈 때였다. 그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종이백에서 초밥 박스를 꺼내 열었다. 곧장 젓가락을 뜯는 것을 보니 배가 고팠다는 말이 핑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은서는 헛숨을 작게 쉬고 고개를 저었다. 괜히 혼자서 이상한 상상만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지레 긴장이나 하고.
바보같이 몸으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까…….
“작은 언니가…… 임신했대요.”
한심한 스스로를 실컷 비웃으며 은서는 기운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차강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시선을 빤히 던진다.
“아직 5주밖에 되지 않아서 가족들한테만 조용히 알리겠대요. 그러니까…… 강혁 씨만 알고 있어요.”
눈시울이 화끈거리더니 결국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개를 맥없이 떨구자 투명한 눈물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생뚱맞은 눈물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눈동자가 확연하게 동요했다.
“왜 울어?”
“그냥…… 좋아서요. 언니가 임신했다니까…… 너무 감격스럽잖아요……. 임신 선물, 어떤 걸로 하면 좋을까요? 아기 신발이 좋을까요? 아니면 장난감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말을 해 보지만 금세 또 울컥해서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창피하게 왜 이럴까. 전혀 울 일이 아닌데. 기뻐서 춤을 추고 나팔을 불어도 모자랄 일인데.
은서는 코를 훌쩍거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아 냈다. 하도 거칠게 문질러서 눈 주변이 죄다 빨개졌다.
그때, 차강혁이 일어나 은서의 옆으로 자리로 옮겨 왔다. 그는 두 팔로 은서를 꼭 안아 주면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자상한 어조였다. 우는 여자를 달래려는 듯이. 이런 거 차강혁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데.
“우리는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임신이 늦어져서 슬퍼하는 것이라고 그는 대강 짐작한 듯했다. 내 슬픔의 근원은 바로 당신인데.
“울지 마.”
그는 두 손으로 젖은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빨개진 눈가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맨날 울어 보라고 으름장을 놓더니 이제 와 울지 말란다.
역시 차강혁답지 않다.
“당신도 곧 임신할 거야.”
남자들은 단순하다. 아이만 낳으면 그게 끝인 줄 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낳으면 그만이라고 본다.
차강혁도 똑같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냉정한 머릿속에는 아이의 불우한 성장 과정 따위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래도, 저를 달래 보겠다고 애쓰는 말들이 듣기 나쁘지는 않았다.
우는 여자를 달래는 일에는 재능이 새끼손톱만큼도 없는 남자가, 어떻게든 저를 달래 보겠다고 답지도 않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제법 봐 줄만은 했다.
“내가 매일매일 이쁜 보지에 정액을 듬뿍 넣어 주니까 아기는 금방 생길 거라고.”
이건 좀 차강혁스럽네. 자상한 말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단어들에 은서는 피식 웃어 버렸다.
목구멍 안쪽으로는 ‘아이는 없어요. 당신과 섹스를 1년을 해도, 10년을 해도, 100년을 해도, 난 임신 못 해요. 당신은 절대로 우리 아이에게 엄마를 사랑하는 아빠가 되어 줄 수 없을 테니까.’라는 말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은서는 애써 말을 삼켰다.
그의 위로를 받는 게 은근히 좋아서 이 분위기를 구태여 깨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 당장 만들어 버릴까.”
돌연 그가 격한 키스를 퍼부었다. 탱글탱글한 입술을 질척하게 빨고 입속을 가르고 들어가 혀를 능숙하게 굴린다.
두꺼운 팔로 은서를 꽉 당겨 안으며 몸을 바짝 밀착시키던 그는 결국 연약한 몸을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그녀를 밑에 가둬 놓고 포실한 가슴을 주무르며 더욱더 농밀하게 혀를 뒤섞었다.
“하아.”
“유은서, 내가 오늘 여기서 당장 임신시켜 줄게.”
열띤 욕망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에 은서는 뒷골이 아찔해졌다. 머릿속이 텅 비면서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