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30)

8.

* * *

은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 버튼을 눌렀다.

매끄럽게 내려가던 기계는 알람음과 함께 36층에서 멈춰 섰다. 누군가가 타려는구나 싶어서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이 열리고 키가 장대처럼 큰 남자가 올라탔다. 익숙한 체형, 익숙한 이목구비. 아는 남자였다.

“어, 형수님?”

봄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알은체를 하는 남자는 차강혁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자, 삼우조선의 홍보팀 팀장인 차윤혁이었다.

“도련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형수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차윤혁이 친근한 말투로 안부를 물었다.

형제는 체격도 이목구비도 똑 닮았지만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차강혁이 날카로운 인상에 냉혈한 같다면, 차윤혁은 웃는 상에 살가운 성격이었다.

두 남자는 즐겨 하던 스포츠도 달랐다.

차강혁이 풋볼을 했다면, 차윤혁은 골프를 했다. 차강혁이 거친 바디체크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필드 위를 맹렬하게 달릴 때, 차윤혁은 고요한 잔디 위에서 클럽으로 정교한 샷을 날려 홀에 공을 집어넣었다.

차강혁이 야성적인 짐승이라면, 차윤혁은 젠틀한 신사였다.

“저야 잘 지냈죠. 도련님은요?”

“저도 그동안 무탈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회사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윤혁이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쩌다 은서가 이 밤에 회사로 오게 되었는지.

이때까지 형이 회사에 여자를 불러들인 적은 없었는데……. 뭐, 스치듯 지나가던 숱한 여자들과 아내는 엄연히 다르긴 하다만, 그래도.

“강혁 씨가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요.”

“그래요? 그런 일은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대답을 들어도 윤혁은 여전히 의아했다. 중요한 일도 아니고 고작 서류 전달 때문에 아내를 부를 필요가 있었을까?

“바람도 쐴 겸 제가 가져왔어요.”

“네. 그렇군요.”

의문이 완벽하게 가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윤혁은 서글서글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깊게 캐물어서 은서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은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은서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되기 5분 전이다. 남들은 벌써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은 아직도 일에 매진 중이지만.

“요새 국제 컨벤션 준비 때문에 무척 바빠서요.”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아직 젊어서 그런지 괜찮습니다. 형수님, 혹시 단 거 좋아하세요?”

“단 거요?”

윤혁이 백팩을 벗어 앞 포켓을 뒤적거렸다. 무언가를 한 움큼 집어서 꺼낸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은서에게 보여 주었다.

막대 사탕이었다. 오렌지 맛, 딸기 맛, 자두 맛, 초코 맛, 박하 맛 등등, 종류도 참 다양했다.

“도련님, 사탕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는 게 아니고, 요즘 담배 끊는다고 이걸로 겨우 버티고 있거든요. 취향대로 골라 보세요.”

“그럼 저는…… 딸기 맛으로 할게요. 고마워요.”

은서는 딸기 맛 사탕을 고르고 토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지금 안 드시고요?”

“밤에 단 거 먹으면 안 돼요. 내일 먹을게요.”

“역시 우리 형수님, 모범적이십니다!”

윤혁이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칭찬이었다.

차강혁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다. 만약 차강혁이었으면, 자신을 틀에 박힌 고루한 여자라고 맘껏 비웃었을 텐데……. 욕도 창의적으로 못한다고 빈정거리던 남자 아니던가.

“도련님, 금연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석 달 정도요.”

“와, 석 달째면 엄청 잘 버티고 계신 것 같은데요?”

“버텨야죠.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 친구가 담배 안 끊으면 저랑 결혼 안 하겠다고 선언했거든요.”

윤혁은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여자 친구분 때문에 담배 끊으신 거예요?”

“네. 연애 초반에는 제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콩깍지가 싹 벗겨졌는지 끊으라고 성화네요.”

“그건 콩깍지가 벗겨진 게 아니라, 도련님을 향한 사랑이 커져서 그런 거예요. 멋진 것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니까요.”

“음……. 형수님 말을 들으니 힘이 나네요. 방금 해 주신 말씀을 동력 삼아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금연 활동에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도련님 정말 로맨틱하고 다정하신 것 같아요. 여자 친구를 위해서 단번에 담배를 끊다니. 강혁 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내가 만약 차강혁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귓등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깡그리 무시하겠지.

아니, 어쩌면 무시를 넘어서서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쓰잘머리 없는 관심은 집어치우라고 신랄하게 대거리를 퍼부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차윤혁의 그녀가 부러워졌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차강혁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없으리라.

차윤혁의 여자 친구는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다. 통속극에 흔히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재벌 남자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서민 여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 온 그들이기에 주변의 반대가 극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예쁜 사랑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특히, 차윤혁의 마음이 굉장히 굳건했다.

차 회장이 너 같은 자식에겐 쌀 한 톨도 물려주지 않을 거라고, 조만간 호적에서 이름을 파 버릴 거라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차윤혁은 연인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로맨틱한 남자였다.

‘차강혁과 같은 핏줄을 이어받았을 텐데, 어쩜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은서가 씁쓸함을 곱씹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윤혁이 은서를 향해 먼저 내리라고 매너 있게 손짓하자, 은서는 미소로 그의 매너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내렸다. 이어서 윤혁이 내렸고, 두 사람은 걸음을 맞춰 나란히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로비 중간에서 윤혁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은서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형이 많이 무뚝뚝하죠? 원래 성격이 그래요.”

윤혁은 고민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서의 쓸쓸한 눈빛을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로함과 동시에 형을 두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 온 환경 때문에 감정 표현에 서툴러요.”

형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여자를 많이 만나기는 했어도 여자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간지러운 감정은 형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형이 아내를 어떻게 대할지는 한눈에 뻔히 보였다. 보통의 남편들처럼 아내에게 애정을 쏟아 주지도, 마음을 열어 주지도 않으리라.

출중한 능력에 외모는 번지르르하지만,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나쁜 남자가 되는 것이 바로 제 형이라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라이한 관계에 지쳐 있을 그녀에게 곧이곧대로 ‘차강혁, 그놈 참 나쁜 놈이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릴 적부터 야망에 길들여진 형을 위해, 그리고 그런 남자와 가약을 맺은 그녀를 위해, 일말의 변명이 필요했다.

“형은 뭐든지 다 잘했어요. 공부도 운동도 항상 1등이었죠. IQ도 높았고 또래들에 비해 습득 능력도 월등히 빨랐어요. 영재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죠.”

은서는 윤혁이 해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차강혁은 그녀의 남편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될지 몰랐다.

“집안 어른들이 형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대단했죠. 특히, 아버지는 형을 두고 당신이 만든 최고의 역작이라고 일컬을 정도였으니까요.”

윤혁은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며 신중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형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후계자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는 완벽한 장남을 보면서 추락한 회사를 언젠가는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고 희망했어요.”

“…….”

“형이 1등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 아버지는 늘 기대에 부풀어 올라 이런 말씀을 신물 나게 하시고는 했죠. 네가 무럭무럭 자라서 무너진 회사를 일으켜야 한단다. 어서 이 아버지를 도와 차 씨 가문의 명예를 되찾자꾸나.”

윤혁은 지금 생각해도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 형이 중학교 2학년 때 딱 한 번 2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집이 발칵 뒤집혔어요.”

“…….”

“아버지는 당신을 실망시켰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골프채를 휘둘러 집안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박살 내고,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구슬프게 우셨어요.”

“…….”

“형은 졸지에 죄인이 되었죠. 단지 2등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줄까요?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한동안 형을…….”

윤혁은 말을 잇기 어려운지 숨을 고통스럽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스터디 룸에 가둬 버렸어요.”

“네? 가뒀다고요?”

극단적인 사연에 은서는 아연실색했다.

“거기서 죽은 듯이 공부만 하라고, 형을 스터디 룸에 가두고 정말 죄수처럼 대했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그 방에는 온갖 책들과 인터넷이 되지 않는 노트북이 있었고, 그리고…… CCTV가 있었죠. 형이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하려고 아버지가 달아 둔 거예요.”

“말도 안 돼요…….”

“문은 바깥에서 자물쇠로 걸어 잠가뒀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자라다고 여겼는지 문 앞에 경호원까지 배치시켰어요.”

“…….”

“스터디 룸을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어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밥을 넣어 주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과외 교사가 들어가 수업을 했죠.”

“…….”

“며칠도 아니고 몇 달을 그렇게 갇혀서 지냈어요. 형은 그때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애였는데.”

은서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뱃속이 거북해지고 목구멍이 조여 들어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 어린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안 그래도 예민할 사춘기 소년에게 고작 2등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당한 죄의식을 심어 주고, 스터디 룸에 가두는 학대를 일삼다니.

도화지에 선 하나만 그려도 가족들로부터 어화둥둥 칭찬을 받고 자란 은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형은 다시는 1등을 놓치지 않았어요. 어딜 가든 어느 곳에서든, 항상 정상을 사수했죠.”

“…….”

“그런데도 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 집안 어른들은 걸핏하면 형에게 스스로의 실패는 곧 가문의 실패, 회사의 실패라고 기계처럼 세뇌시켰어요. 네가 실패하면 우리 집안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말도 안 되는 강박관념을 형에게 주입시킨 거예요.”

“…….”

“그 결과 형의 머릿속에는 온통 성공과 야망으로만 가득 찰 수밖에 없었고, 강한 능력을 갖춰서 선대의 패착을 바로 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거죠.”

“…….”

“그런 비틀린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형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본인의 감정적인 면은 죽여 버린 거예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건 성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본인만 괴로워지니까, 차라리 아예 차단시켜 버린 거예요.”

“…….”

“감정이 메마르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고민 역시 하지 않게 되니까, 목표에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죠.”

“…….”

“고뇌하고 방황하는 것보단 그저 우직하게 목표만을 정조준하는 것, 그게 바로 차강혁 스타일이에요.”

“…….”

“그 하드보일드한 스타일 덕분에 무언가를 쟁취하고 성취하려는 의식은 강하지만, 반면 감성적인 부분은 기본적으로 결여된 남자로 자라난 거죠.”

“…….”

“형이 어떤 압박감을 받았을지, 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

“저는 완벽한 형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동생이라 집에서 거의 포기한 자식이었거든요. 성적이 좋지 않아도, 원하던 대학에 낙방해서 재수를 해도, 심지어 학사 경고를 받아도, 다들 그러려니 했어요. 집안의 기대는 오로지 형에게만 쏠려 있었으니까요.”

“…….”

“저는 부족한 게 당연했고, 형은 완벽한 게 당연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예요.”

“…….”

“자유로웠던 저에 비해, 형은 늘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본인의 능력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했어요.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겠죠?”

“…….”

“형이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여도 형수님이 이해해 주세요. 그냥 살아온 삶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요.”

“…….”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서툰 것뿐이지.”

“그랬었군요…….”

은서는 씁쓸한 여운이 남아 있는 어조로 뇌까리듯이 대답했다.

“강혁 씨는 자기 이야기를 통 하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형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니까요. 말했다시피 감정을 다 죽여 놓은 인간이라, 타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친밀한 관계를 쌓아 가는 걸 잘 못 해요.”

“…….”

“그래서 말인데, 그 결핍된 마음을 형수님께서 채워 주길 바라는 건…… 제 지나친 욕심일까요?”

“아…….”

은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그런 마법 같은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건 감정이 아니라 섹스일 뿐이니까.

차강혁은 언제나 무언가를 쟁취하려 들고, 목표만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유은서라는 여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일종의 전리품쯤으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전리품과 감정 교류를 할 남자는 없지…….

“제가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했죠? 그냥 흘려 버리세요.”

곤혹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윤혁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그럼 갈까요?”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은서는 걸으면서도 깊은 상념에 골몰해 있었다. 제가 그의 전리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가슴이 저릿해졌지만, 그렇다고 그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부터 주변의 기대와 압박에 짓눌려 자발적으로 감정을 거세시키고, 야망을 위해서만 필사적으로 질주한 그가 가엽고 애처로워서, 마음속에 잿빛 그늘이 진 것처럼 울적해졌다.

맞선을 봤을 때, 결혼도 비즈니스라고 말하던 냉정한 그의 모습이 납득가기도 했다. 결혼도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테니, 사랑이 아니라 조건을 따져 볼 수밖에 없었겠지.

무거운 마음을 품고 회전문을 통과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이 불면서 은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바람결을 따라 머리칼이 너울거리면서 목덜미가 살짝 드러났다.

동시에 윤혁의 홍채는 극적으로 팽창되었다. 곱고 하얀 살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자국들이 있었다.

“형수님, 저는 다시 올라가 봐야겠어요.”

“네?”

“사무실에 뭘 두고 나왔네요.”

“아, 그래요. 그럼 전 먼저 갈게요. 도련님도 물건 잘 챙겨서 퇴근하세요.”

은서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더없이 맑고 깨끗해서 윤혁의 머릿속은 걷잡을 수도 없는 혼돈으로 자욱해졌다.

* * *

윤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42층 버튼을 눌렀다.

상승하는 빨간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윤혁은 형이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기를 바랐지만, 형은 그러한 바람을 무시하고 정략결혼을 택했다.

그 결혼은 차강혁과 유은서가 결혼했다기보다는, 삼우조선과 유성중공업이 사돈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략결혼이 그러하듯 부부는 드라이하고 밋밋한 관계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랬는데…….

‘키스마크라고? 천하의 차강혁이 그런 짓을 했다고?’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쳐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윤혁은 사장실까지 거의 뛰듯이 걸어갔다.

윤혁은 노크도 없이 사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 그런 남자였어?”

책상에 앉아 아직까지도 업무를 보고 있던 차강혁은 맥락 없이 던져진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아니, 그러니까…….”

윤혁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운 거리에서 형을 마주 보는 순간, 또다시 강펀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반듯하게 뻗은 목으로는 손톱에 긁힌 생채기가 여러 개 있었고, 하얀 드레스 셔츠에는 핑크색 립스틱 자국이 대놓고 묻어 있었다.

그리고 아까 마주쳤던 은서의 입술은 딸기 우유 같은 핑크색이었다…….

“형, 설마 여기서…….”

윤혁은 말을 차마 끝맺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의 생각들이 방황하듯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늦은 밤, 사무실, 야릇한 흔적들.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은 윤혁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외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클리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무미건조의 대명사, 차강혁이 회사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다니.

눈으로 확인하고도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예전에 윤혁의 여자 친구가 회사로 찾아와 로비에서 포옹을 하고 뺨에 뽀뽀를 쪽쪽거렸을 때, 강혁은 회사에서 뭐 하는 짓이냐, 공사 구분을 못 한다며 실컷 면박을 주었다.

키스마크는 소유욕의 상징이라 연인끼리는 응당 새기는 거라는 윤혁의 주장에, 강혁은 그 소유욕이라는 게 지극히도 유아적인 개념이며 궁극적으로는 집착하는 거 아니냐고 빈정거렸다.

그랬던 남자였다. 한없이 냉소적이고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남자.

공적인 영역인 회사로 사적인 부분을 끌어 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해서 어떤 데이트 상대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그러던 남자가 사무실로 아내를 불러들여서…….

어쩐지, 서류 가져다준다고 형수님이 여기까지 온 게 이상하다 싶었어. 목적이 있었던 거지. 음란하고 선정적인 목적이.

“미쳤구나, 형.”

“무슨 말이야.”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짓을 할 수가 없어.”

윤혁이 알고 있는 차강혁은 고작 성욕 따위에 굴복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이성이 앞서는 남자였고, 절제할 줄 아는 남자였다.

딱히 섹스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여자를 만나도 데이트 횟수는 남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편이었고, 어쩔 때는 섹스가 귀찮다며 아예 여자를 끊은 적도 있었다.

그런 남자가 사무실에서 여자와 질펀하게 일을 벌였다는 건, 미쳤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라. 빙 둘러서 말하지 말고.”

“내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과연 형이 감당할 수 있을까?”

윤혁은 시선을 노골적으로 립스틱 자국에 고정시켰다. 그제야 강혁은 상황 파악을 했다. 하지만 당황하거나 동요하지는 않는다.

별것도 아닌 일에 걸핏하면 부끄러워해서 발을 동동 굴리는 은서와 달리, 차강혁은 응당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스럽게 대응하는 타입이었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다.”

“나도 이 회사 직원인데 왜 상관할 일이 아니야? 이거 보고감이라고. 사장이면 사장답게 모범을 보여야지, 어떻게 그런……. 하, 불경스러워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혁의 입가는 장난스럽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흠잡을 거 없이 완벽하기만 하던 형의 약점을 우연찮게 잡아서 즐거운 것이 틀림없었다.

“인사과에 보고하고 싶으면 하든지. 이 회사에 발정 난 개새끼가 있다고.”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참 시시하다. 진짜 딱딱한 인간이라니까.

“어유, 내가 형 동생인데 설마 인사과에 찌르겠어? 물론 건전한 기업 문화를 위해 보고를 올려야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형제간의 우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윤혁은 번듯하게 말을 늘어놓고 히죽 웃었다. 활짝 핀 웃음꽃에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챈 강혁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내 편 들어 줘!”

“네 편?”

“그래, 내 편! 현주가 공시 합격하고 나면 나랑 결혼한다고 했어. 그때, 형이 우리 결혼을 지지해 달라고. 우리 집안 꽉 막힌 어르신들,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해도 형 말은 귀 기울여 들어 주잖아?”

“그 결혼 꼭 해야 하나? 집안 시끄러워지는 거 질색인데.”

“형, 현주는 내가 진심을 다해서 사랑하는 여자야! 목숨처럼 아끼는 여자라고. 현주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형이라도 제발 도와줘.”

윤혁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다부진 각오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결연한 동생의 모습을 지그시 주시하던 강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건 세상 귀찮지만, 그래도 동생의 애절한 부탁에 딱 잘라서 안 된다고 거절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보이는 남자지만, 나름대로 동생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진짜? 형, 약속한 거지? 약속했다! 응?”

“그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좋아하면서 폴짝폴짝 뛰는 윤혁을 보고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저거는 몸만 컸지, 아직도 어린애였다.

“그렇게도 그 여자가 좋은가.”

“응. 온 마음을 바쳐서 온몸을 바쳐서 사랑하고 있어.”

윤혁은 눈빛을 영롱하게 빛내고 강건하게 대답했다.

“형은 어때?”

“뭐?”

“형수님이랑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중이야?”

윤혁은 정략으로 시작된 결혼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확신하고 물었다.

“사랑하는 거야?”

“관심 없어, 그런 거.”

냉담한 대답이 날아왔다. 뭐, 달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윤혁도 제 형이 어울리지도 않게 사랑한다는 말을 선선히 내뱉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넌 내가 한가해 보이냐? 그만 나가라.”

“동생이 좋은 마음으로 조언해 주는데 야박하게도 구네. 형,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야. 첫째, 죽음이 임박했을 때. 둘째, 사랑에 빠졌을 때.”

윤혁은 분석조의 목소리로 신나게 떠들었다.

“근데 지금 형 혈색을 보면 곧 죽을 사람 같지는 않거든? 내 예리한 관점으로 봤을 때는 말이지, 형은 이미 형수님께 빠져 있어.”

“…….”

“그것도 그냥 빠진 게 아니라 아주 푹 빠져 있다고. 푹 빠져서 정신머리가 가출했으니까, 평소 차강혁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짓들을 겁도 없이 하는 거지.”

“…….”

“소유욕과 집착을 상징하는 키스마크를 남긴다든가, 거룩한 사무실에서 사회 윤리를 벗어나는 짓을 무모하게 저지른다든가.”

“…….”

“형수님, 쓸쓸해 보였어.”

윤혁은 아까 보았던 은서의 애달픈 눈빛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형이 마음을 조금만 표현해 준다면 형수님이 아주 좋아하실 거야.”

눈치 하나는 100단인 윤혁은 부부의 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면이 사막처럼 메마르고 황량하던 형에게 갑자기 낯선 감정이 찾아왔고, 형은 그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무작정 몸부터 내던진 것이다. 그래서 형수님은 상처를 받은 거고…….

“차윤혁.”

나지막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윤혁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형에게 무언가 큰 깨달음을 전파했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셋 세는 동안 안 나가면 보안팀 호출한다. 하나, 둘…….”

“에잇, 뭐야! 치사하게 나오네. 사람이 조언을 해 주면 귀담아들을 줄도 알아야지, 심술만 부리고. 더러워서 나간다! 나간다고!”

그가 비상 호출 버튼을 누르려는 시늉을 하자, 윤혁은 투덜거리면서 사장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강혁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으며 유은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그녀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기적이고 악하고 세속적인 자신과는 대척점에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착하고 온순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답답해 보였고, 모범적으로 행동했지만 그 모범이 지나쳐서 고지식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묘하게 반감이 드는 여자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반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지 아래가 격렬하게 발광했다.

단아한 차림새가 거슬리는데, 고운 말씨가 아니꼬운데, 서툰 반응이 짜증 나는데, 그런데도 아랫도리는 자꾸만 팽팽하게 뒤틀리면서 요란하게 괴성을 내지르는 것이다.

저 말갛고 해끔한 얼굴을 망쳐 버리고 싶다고. 단정한 옷을 마구잡이로 찢고 하얀 몸을 내 밑에 가둬서, 청초한 얼굴을 눈물범벅으로 만들고 숨을 할딱거리게 만들고 싶다고.

겉으로는 이성적인 척했지만, 사실 결혼을 택하는 데에 좆같은 욕정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토록 파괴적이고 뜨거운 욕구를 품게 만든 여자는 유은서가 유일했으니까.

물론 다가가는 건 쉽지 않았다. 가지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는 대책 없이 순진한 반응을 보여서 좀처럼 선을 넘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이성이 부서져서 그녀를 거칠게 집어삼키고 말았다.

자, 이제 그녀를 해치웠으니 모든 것은 다시 정상 궤도를 타야 했다. 이성을 되찾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고대했던 섹스를 했으니 욕정이 수그러들어야 정상인데, 모순적이게도 욕정은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그녀를 가졌고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는데, 그런데도 그녀의 몸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결국 그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싫다고 반항하는 그녀를 강제로 붙들어 기절할 때까지 페니스를 쑤셔 박고,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사무실로 불러들여 강압적으로 펠라를 시키고 강압적으로 인터코스를 행했다.

모두 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본능에 이끌려 결혼 상대를 선택한 것도, 정욕에만 빠져서 앞뒤 분간 못 하고 좆을 마구 놀려 대는 것도.

짐승…….

그녀 앞에만 서면 차강혁은 한 마리의 포악한 짐승이 되고 만다. 그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위험한 짐승을 그녀가 단번에 흔들어 깨워 버리는 것이다.

“유은서 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허탈한 목소리가 중얼거린다. 그때, 윤혁이 화두처럼 던진 말이 그의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랑하는 거야?」

사랑? 그런 건 모른다. 관심도 없고.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자신은 그녀의 몸에 심히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 * *

은서는 불을 모두 끄고 침대에 누웠다.

육신은 지쳐 있었으나 머릿속에 맴도는 사념들이 너무 많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저 눈만 하염없이 깜박이며 오늘 벌어졌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격렬했던 섹스와 조금은 다정하게 느껴졌던 남편의 행동, 그리고 윤혁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그의 비정상적인 성장 과정까지.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사람인데, 그의 부모님은 왜 그렇게도 악독하게 닦달했던 걸까. 인생에는 성적이나 성공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더 많은데…….’

단단하고 강해 보이기만 하던 남자에게도 남모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만약 어린 시절의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열심히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 주고 싶은 밤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발소리가 달팽이관에 걸터앉고, 익숙한 향기가 후각으로 녹아들었다. 은서는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다.

장신의 체구가 침대 위에 올라앉자 매트리스 스프링이 출렁거린다. 아내의 옆자리를 차지한 강혁은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 주고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라.”

순간, 은서의 마음이 거세게 요동쳤다. 사소한 스킨십과 사소한 인사말인데도 왠지 저를 챙겨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 심장이 덜커덩거리면서 우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귀를 쫑긋 세워 그의 숨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은서는 눈꺼풀을 끌어 올리고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커다란 창으로는 만월의 빛이 들어와 잠든 그의 모습을 은은히 비춰 주고 있었다. 고단해 보이는 얼굴이 안쓰럽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겠지. 매일같이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을 테니까.’

은서는 손을 뻗어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상냥하게 매만져 주었다.

뺨을 쓰다듬고,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보기도 하고, 근사하게 뻗은 콧날을 손가락 끝으로 따라가 보기도 하다가, 도톰한 입술 위에서 손길이 멈췄다. 검지 끝으로 살포시 아랫입술을 눌러 보니 포근한 감촉이 느껴진다.

잠깐의 망설임 후에 은서는 고개를 숙여 매력적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쪽, 맞추었다. 그리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잘 자요.”

* * *

차강혁은 일찌감치 출근했고, 은서는 오전 9시에 일어나서 느지막이 스튜디오로 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거울에 비친 하얀 나신에는 키스 자국들이 난무했다.

목덜미, 쇄골, 가슴, 배, 허벅지……. 몸을 살짝 돌려 보니 등허리와 엉덩이에도 표식이 있었다. 다양한 부위에 다채롭게도 남겨 놓았다.

은서는 몸 위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흔적들을 손으로 쓸어 만지면서 그동안 그와 나누었던 불꽃같았던 섹스를 떠올렸다.

광기에 가까웠던 난잡하기만 한 행위들이었다. 사랑은 없고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이런 섹스는 옳지 않은데.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그의 손길이 닿기라도 하면 몸의 경계는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가 주는 자극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해서 결국에는 순순히 굴복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불현듯, 단호했던 그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저 목소리만을 떠올렸을 뿐인데도 체온이 상승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래, 어쩌면 이쪽이 나을지도 몰라…….”

그를 향한 사랑을 여기서 멈출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 바람이나 피우는 꼴을 보면서 살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역시 대답은 ‘아니오.’다.

그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도 없고, 그를 다른 여자에게 내어 주고 싶지도 않다면,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기꺼이 그의 전리품이 되어 착취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저 또한 이걸 즐기고 있었다.

차강혁에게 안기는 게 싫었어? 아니잖아. 좋아서 온몸을 미친 듯이 떨고 소리를 내지르고 절박하게 매달렸잖아.

사랑 없는 섹스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뭐 어쨌는데? 여태껏 올바르게만 자라왔어. 모범적으로 바른길만을 걸어왔다고.

지금까지 지겹게 올바르게 살아왔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일탈쯤은 눈감고 넘어가도 되는 거잖아.

합리화를 마친 은서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당신이 내 몸을 원한다면…… 기쁘게 드릴게요.”

* * *

달력이 한 장 넘어가고 5월이 찾아왔다. 개인전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은서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토요일 밤 11시, 은서는 작업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집으로 터덜터덜 귀가했다. 샤워를 하고 욕실과 연결된 파우더 룸으로 나와 미리 챙겨 둔 옷에 시선을 던졌다.

허벅지 중간쯤까지 오는 베이지색 면 원피스였다.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 부드럽고 편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본가에서 홈웨어로 자주 입었던 옷이었다.

5월로 접어들고 날이 차츰 더워지면서 옷을 가볍게 입고 싶어서 꺼내 온 것이긴 한데, 막상 입으려니 고민이 되었다.

‘이걸 입으면 정강이에 있는 흉터가 다 보일 텐데.’

굶주린 짐승처럼 난폭하게 달려드는 차강혁으로 인해 번번이 옷이 벗겨지고, 흉터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숨기는 건 별 의미도 없다 싶어서 과감하게 원피스를 챙겨 오기는 했으나, 어째 입으려니까 또 망설여지는 것이다.

은서는 입술까지 앙다물어 가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결국 ‘뭐 어때, 그냥 입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흉터를 가린다고 해서 차강혁이 날 좋아해 줄 것도 아닌데 옷이라도 편하게 입지, 뭐.

확실히 섹스를 하게 된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의 말을 따박따박 받아치기도 하고, 눈치도 전보다는 덜 보게 되었고…….

섹스를 기점으로 스스로의 처지를 처절하게 깨달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여자가 아니라 장난감에 불과하니까.

은서는 원피스를 입고 파우더 룸에서 나갔다. 잠들기 전에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홈시어터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영화를 볼지는 미리 정해 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남자 배우가 나오는 멜로 영화를 볼 것이다. 아련하고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기대가 많이 된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중,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차강혁과 딱 마주쳤다. 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홈웨어를 입고 있듯이 차강혁도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흰색 박스 티셔츠.

동네 백수 차림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가 입으니까 근사하게 태가 났다. 하긴, 거적때기를 걸쳐도 수려하게 빛이 날 남자긴 하지.

“이제 왔어?”

“네.”

그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은서의 몸에 꽂혀 들었다. 집요한 눈길로 육감적인 몸 라인을 질척하게 훑어 내린다.

나올 데는 나왔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 있는 콜라병 같은 몸매 위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는 짧은 원피스가 색다르다.

평소에 워낙 고리짝 시대 여자처럼 얌전한 스타일로만 입고 다녀서 그런지, 이런 가벼운 옷차림조차도 야하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군침이 돌았다. 그의 시선은 관능적인 굴곡을 따라 그리듯이 천천히 내려가다가, 정강이에 있는 우둘투둘한 흉터에서 딱 멈추었다.

동시에 은서는 민망해하면서 얼른 오른쪽 다리를 움직여 왼쪽 다리 뒤에 숨겼다.

‘역시 별로인 걸까.’

생각이 짧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실컷 봤다고 해도, 이렇게 흉터를 대놓고 드러내는 건 싫을지도 모르는데…….

은서는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유은서는 유은서였다. 예전보다 차강혁의 눈치를 덜 본다고는 해도 완전히 막나갈 수는 없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은서는 몸을 돌렸다. 그때, 어깨가 붙잡히고 몸이 원래대로 돌려지면서 다시 그와 마주 보게 되었다.

“어딜 도망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옷을 갈아입으려고요.”

“보기 좋은데 왜 갈아입어?”

“네? 괘, 괜찮아요?”

은서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어.”

단호한 긍정에 뺨은 더더욱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한입 꼭 깨물어 먹고 싶은 사과처럼.

“뭐할 거야?”

“네?”

“이제 뭐 할 거냐고.”

“아, 영화 보려고요.”

“그럼 같이 보지.”

“네?”

예상치도 못한 제안에 은서는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결혼하기 전에는 데이트 같지도 않은 데이트를 하면서 함께 영화를 본 적이 가끔은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일절 없었다.

은서는 그러려니 했다. 첫 만남부터 예술은 잘 모른다고 했던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같이 영화를 보겠다고? 극장에서 세상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자발적으로 나랑 같이 영화를 보겠다고?

“왜요?”

은서가 의아하다는 말투로 묻자 그는 눈살을 구겼다.

“뭐가 왜야.”

“차강혁 씨가 왜 저랑 같이 영화를 봐요? 영화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할 게 없다고.”

할 일이 없다고 영화를 보던 남자였던가.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워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심심해요?”

“어.”

“그럼 운동이라도 해요.”

“아침에 하고 오후에도 했는걸.”

“그럼 수영을…….”

“밤에 무슨 수영이야.”

“그럼 서재에 가서 일하세요. 강혁 씨,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나도 가끔은 머리 식혀야지. 항상 책상 앞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

끄응. 더 대응할 말이 없었다. 은서는 별수 없이 그와 함께 홈시어터 룸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멜로 영화니까 쿠션을 꽉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를 꺅꺅 지르면서 보고 싶었는데.

차강혁이 옆에 있으면 마음껏 설렘을 즐기면서 볼 수가 없잖아. 은서는 겉으로 내색은 못 하고 속으로만 아쉬움을 곱씹었다.

“멜로 영화 보려고 했는데…….”

소파에 앉은 그를 향해 은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뜩이나 남자들은 멜로 영화를 안 좋아하는데 차강혁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 보나마나 질색하겠지.

“아무래도 멜로는 좀 그렇죠? 영화 많으니까 강혁 씨가 보고 싶은 걸로 골라볼래요?”

은서는 DVD가 빼곡하게 꽂혀 있는 선반을 가리켰다. 이 많고 많은 영화들 중에서 그가 좋아할 법한 영화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난 뭘 보든 상관없으니까 당신이 보려던 걸로 봐.”

“진짜요?”

“그럼 가짜겠어?”

어리둥절하다. 뭘 보든 상관이 없다면 굳이 영화는 왜 보려는 것일까?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다.

은서는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 미리 골라 두었던 영화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조명을 모두 끄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의 옆자리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그런데, 긴 팔이 불쑥 다가오더니 은서의 어깨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폭 안겨 버리게 된 은서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연인들이나 할 법한 간지러운 스킨십이 가히 낯설었다. 우린 비록 부부이긴 해도 연인은 아니지 않은가.

“왜 이래요? 이러지 말아요.”

은서는 경직된 몸을 겨우 움직여 그의 넓은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더 강한 힘으로 은서를 끌어당겼다.

“나랑 내외하나?”

“네?”

“갈 데까지 간 사이에 이런 식으로 내숭 떠는 것도 우습군.”

“내숭이라뇨? 나는 그냥 불편해서…….”

“영화 시작했어. 그만 떠들고 영화나 봐.”

기가 막혔다. 먼저 시비를 튼 게 누군데 입 다물고 영화나 보래.

은서가 가자미눈을 뜨고 새초롬히 흘겨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차강혁은 마이페이스다. 그는 매서운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커다란 스크린이 송출해 내는 영화를 묵묵히 감상할 뿐이다.

하는 수 없이 은서는 백기를 들었다. 이 남자에게 덤벼 봤자 저만 망가진다는 것을 몸으로 지독하게 체득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편하게나 보자 싶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묘해졌다.

스크린 속에서는 교복을 입은 남녀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지만, 안타까운 시련 앞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어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30대가 되어 다시 만난 옛 연인은 분위기 좋은 바에서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셨다. 두 남녀의 눈 속에서는 아직도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은서는 애틋한 심정으로 영화에 몰입하며 그들이 어서 다시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딸이 한 명 있어. 아내를 닮았지.」

「나는 아들만 둘인데. 둘 다 남편을 닮았어. 무난한 외모도, 활발한 성격도.」

이 주옥같은 대사는 대체 뭐지? 아련한 러브스토리라며.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며. 그런데 주인공들이 결혼도 하고 애까지 있다니!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스토리에 은서는 당황했지만 일단은 잠자코 영화를 봤다.

그들은 고교 동창이라는 핑계로 만남을 계속 이어 나갔다. 선을 넘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러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두 사람은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키스를 하고 침대로 돌진하는데…….

“멜로 영화라고 하지 않았나?”

건조한 목소리가 귓가를 선득하게 때렸다.

“불륜도 멜로인가.”

불쾌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말투에 은서는 긴장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은서, 네 취향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어.”

“그게 아니라…… 앗!”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은서의 허리를 덥석 붙잡고 그의 무릎 위에 올려 앉혔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자 연갈색 눈동자가 세차게 동요했다.

“그 빌어먹을 취향, 내가 오늘 확실하게 개조시켜 주지.”

본의 아니게 또 오해를 사고 말았지만 해명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가 뒷머리를 잡아채고 거칠게 키스를 퍼붓는 바람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침범해 들어와 입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으음.”

격렬한 입맞춤에 호흡이 부족해진 은서는 가쁜 숨을 흘리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질척하게 혀를 굴리며 손으로 등허리와 엉덩이까지 굴곡진 몸 선을 훑어 내렸다. 이윽고 봉긋한 젖가슴을 한가득 쥐고 주무른다. 짓궂으면서도 장난스러운 손놀림에 은서는 뒷머리가 아찔해졌다.

“하아.”

키스 후에 그는 진한 눈 맞춤을 했다. 암흑과도 같은 검은 눈동자에는 오직 은서만이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자 불현듯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그에게 기꺼이 몸을 바치고 싶다는 그런 발칙한 욕구가…….

“나한테 또 반했나?”

“네?”

“반해서 얼이 빠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길래.”

“아, 아니거든요?”

피식 웃음을 뱉은 그는 혀로 목덜미를 할짝거리며 손으로 가슴이며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얇은 원피스 위에서 움직이는 손길은 가히 노련했다. 흥분이 고조된 은서의 입에서는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은서 네 몸은 전체가 성감대인가 보군.”

“흐응.”

“아무 곳이나 만져 줘도, 아무 곳이나 빨아 줘도, 그저 좋다고 앙앙거리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교묘하게 은서가 느끼는 곳만 공략하고 있다. 그는 쇄골을 잘근 물어 키스 자국을 남기고, 원피스 치마 끝을 붙잡아 끌어 올렸다.

치맛자락이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왔을 때, 은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편하게 원피스를 벗길 수 있도록.

기꺼이 그를 위한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어설픈 반항은 무의미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고분고분한 거지? 이제부터 나한테 순순히 박히기로 마음먹은 건가?”

원피스를 벗겨 바닥에 툭 내던진 그는 검은 눈을 호기심으로 반짝 빛냈다.

“내가 반항하는 쪽이 더 흥분되나요? 원한다면 반항해 줄게요.”

제법 당돌한 대꾸에 그는 입매를 유려하게 말아 올렸다. 벌써부터 뺨이 복숭아처럼 익어서는 지레 겁을 먹고 어깨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주제에, 그래도 지기 싫다고 건방지게 받아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이것 봐.”

그가 손끝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가 적나라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내 자지가 빨딱 선 거 보면 고분고분한 쪽도 꽤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

“유은서가 이렇게 쉽게 나오다니 교육이 효과가 있기는 했나 보군. 앞으로도 더 열심히 당신을 교육시켜야겠어.”

그는 브래지어 버클을 풀어내고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향긋한 살 내음을 음미하듯이 맡는다.

“냄새나.”

“네?”

“맛있는 냄새.”

“…….”

“단내가 나.”

은서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무슨 냄새가 나는 줄 알고 간담이 다 서늘해졌었다. 복수라도 하듯 그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쥐고 머리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젖가슴을 즐긴다고 여념이 없었다. 양손으로는 푸딩처럼 야들야들한 살결을 만지작거리고, 얼굴은 가슴골 사이에 끼워 아이처럼 부비적거린다.

터프하고 이지적이고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남자, 차강혁이 유일하게 소년처럼 천진난만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유은서를 손에 쥐고 마음껏 농락할 때.

고작 가슴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변하나 싶어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의 색다른 면모를 보는 건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다.

“여기서 우유가 나오면 단내가 더 심해지겠지?”

그는 검지 끝으로 젖꼭지를 톡톡 두드렸다.

“우유? 거기서 우유가 왜 나와요?”

“아기 낳으면 우유 나오잖아.”

은서는 ‘내가 아기를 왜 낳는데요?’라고 대꾸하려 했지만, 그가 젖꼭지를 입에 물고 게걸스럽게 빨아올리는 통에 머릿속이 텅 비면서 말 대신 신음이 쏟아졌다.

“하읏.”

츄르릅 츄르릅. 정말 우유가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맛있게도 빨아먹는다. 그는 입으로 가슴을 애무하면서 손을 뻗어 은은하게 달아오른 은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마에서부터 코끝을 지나 도발적인 입술까지 찬찬히 어루만지다가,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살포시 짓누르더니 불쑥 입속에 집어넣었다.

“읍……!”

“빨아.”

위압적인 명령에 은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두 손으로 그의 커다란 손을 쥐고 혀로 엄지손가락을 할짝거린다. 꼼꼼하게 엄지를 빨고 나서는 검지로 넘어가 또 혀를 착실하게 굴렸다.

“유은서 네 보지는 넣어 주기만 하면 손이든 좆이든 그저 좋아 죽는군.”

이젠 중지에서 혀를 놀리고 있는 은서가 눈살을 찡그렸다. 상스러운 말에 불쾌해하면서도 동시에 ‘이건 입이지, 보지가 아닌데요.’ 하는 표정이었다.

“입보지.”

이지러진 표정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는지 그가 간명하게 대답했다. 기가 찼다. 저급하다, 저급하다 했지만 이 정도로 저급할 줄이야.

이 남자는 진짜 변태다. 그냥 변태도 아니고 진짜 상변태.

“그래도 내 생각엔 이쪽 보지가 조금 더 앙큼한 것 같은데.”

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팬티 속에 집어넣었다. 젖은 손가락은 질구 주변을 탐색하듯 지분거리다가 천천히 구멍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하앗.”

은서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간드러진 신음성을 터뜨렸다.

민감한 반응이 귀여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 페니스를 찔러 넣고 싶지만 제대로 예열을 하지 않으면 아파하는 그녀이기에, 그는 간신히 인내심을 발휘해서 전희에 열중했다.

그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가락을 휘돌리며 안을 샅샅이 헤집고 내벽을 긁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특정 지점을 꾹 누르자 은서가 온몸을 자지러뜨렸다.

“하으…….”

“여기가 좋아?”

“으응.”

그는 집요한 눈길로 그녀의 반응을 자세히 살피며 손가락을 기술적으로 놀렸다.

소리, 눈빛, 표정, 몸짓,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꿰뚫어 보면서 은서가 최대치로 기쁘게 느낄 수 있도록 자극점만을 찾아 희롱하는 것이다.

문득, 그는 이런 자신이 몹시도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섹스는 단지 사정을 하기 위한 행위일 뿐, 여자를 배려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은서를 안으면서 변했다. 고통스럽지 않은 삽입을 위해 전희에 온갖 공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향한 욕정이 대단한 것이리라. 이런 귀찮은 짓을 해서라도 유은서를 안고 싶고, 유은서가 잔뜩 달아올라 엉망진창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 테다.

“유은서,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다루는지.”

손가락을 깊숙한 곳까지 퍽퍽 찔러 넣으면서 그가 나른하게 읊조렸다.

은서는 ‘차강혁 씨, 혹시 애지중지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거 아니에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전신을 장악해 버리는 강렬한 쾌락에 말보다는 교성을 내뱉고야 말았다.

“흐응.”

열에 찬 소리가 예뻐서 더 크게 소리를 내지르게 하고 싶다. 그는 손가락을 빼내고 은서를 소파 위에 눕혀 축축해진 팬티를 찌익, 찢었다.

이제 그녀는 완벽한 알몸이 되었다. 먹기 좋게 손질된 사냥감이나 다름없어서 당장 집어삼켜도 무리가 없지만, 왠지 조금만 더 짓궂게 괴롭혀 주고 싶었다.

그는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흠뻑 젖어 있는 구멍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혀로 쭉 핥아 올리니 요망한 구멍이 입을 빠끔빠끔거리면서 어서 들어와 달라고 깜찍하게 유혹했다.

“역시 음탕해. 벌써부터 박아 달라고 애교부리고 난리 났잖아.”

“으흣.”

붉은 혀가 여린 속살을 스치고 입술로 강하게 흡입을 할 때마다, 좁은 입구에서는 끈적끈적한 꿀이 흘러나와 그를 달큰하게 취하게 만들었다.

“맛있어.”

“하읏.”

“유은서 너, 왜 이렇게 맛있어?”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귓바퀴를 은밀하게 울린다. 은서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렇게 맛있으면서 먹지도 못하게 내숭만 떨고, 그동안 참은 거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고.”

“아흣.”

“앞으로는 매일매일 먹을 거야.”

“하아.”

“넌 이제 내 거니까.”

“으응.”

은서는 발정기에 접어든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허리를 튕겼다. 어서 그 거대한 페니스로 나를 농락해 달라는 무언의 행위였다.

열렬한 욕구를 읽은 그는 애무를 멈추고 다리 사이에 파묻은 얼굴 비죽 들어 올렸다.

“박히고 싶어?”

망설임 끝에 은서가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이자, 그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 거만하게 웃었다.

“고갯짓으로 대답하다니 버릇이 없잖아.”

“…….”

“유은서, 너답게 공손하게 부탁해 봐. 박아 주세요, 라고.”

절망의 한숨이 쏟아졌다. 은서는 뜸을 들이다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박아…… 주세요.”

“어디에?”

“…….”

“어디에다 박아 줄까? 요 입에다 박아 넣으면 되나?”

그가 팽팽하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꺼내 도톰한 입술로 가져오려고 하자, 은서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아니, 거기 말구…….”

“그럼 어디?”

“여기…….”

“여기가 어딘데? 정확하게 말해 봐. 난 잘 모르겠거든.”

“다 알면서.”

은서는 숨을 색색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악마처럼 사악한 미소를 그린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그를 향한 살인욕보다는 그에게 놀림당하고 싶은 색욕이 훨씬 더 컸다.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은서는 다리 사이에 손을 가져가 질구를 벌리고, 목청을 쥐어 짜내서 천박한 말을 힘겹게 뱉어 냈다.

“보지에…… 박아 주세요.”

“유은서 너, 오늘 나 미치는 꼴 보려고 작정했지.”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목소리는 난폭한데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득했다. 그는 자상한 손길로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어이가 없었다. 사악한 악마 주제에 이런 다정한 짓거리라니.

하지만 눈앞에서 꺼떡거리고 있는 페니스를 보면, 이 다정한 스킨십도 결국 차후에 벌어질 일을 위한 싸구려 적선에 불과했다.

저 커다란 물건은 곧 있으면 몸을 잔인하게 가르고 들어와 은서를 지랄맞게도 유린할 테니까.

“흐읏!”

예상 그대로였다. 그는 꼿꼿하게 선 페니스를 구멍 속에 서슴없이 집어넣고 허리를 움직였다.

박자를 타듯이 능숙하게 피스톤 운동을 하자, 음란한 구멍이 기다렸다는 듯 페니스를 빠듯하게 압박했다. 검질기게 물고 조여 오는 좁은 구멍 때문에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인상까지 찌푸렸다.

일그러진 모습이 섹시했다. 눈이 풀린 것도, 거친 숨을 내뱉는 것도,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탄탄한 근육이 약동하는 것도, 그의 모든 것들이 섹시함의 극치였다.

압도적인 섹시함에 넋이 나가 버린 은서는 본능적으로 아래에 힘을 실어 페니스를 더 세게 앙 물어 버렸다.

“하아, 적당히 조이라고. 좆이 끊어질 것 같잖아.”

“아으응.”

왜일까. 왜 그를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걸까. 은서는 일부러 하체에 힘을 주며 페니스를 음탕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건방지게 요기를 부리는 은서에게 벌을 가하듯이 퍽퍽, 가혹하게 질 속을 쑤셔 댔다. 맹렬한 피스톤질에 결국 눈물샘이 터지고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유리알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은서는 그의 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두 다리를 교차해 그를 덥석 끌어안고 더욱 찰지게 물고 늘어지며 허리까지 요사스럽게 흔들어 대는 것이다.

그 자태가 미친 듯이 야하고 귀여워서, 그는 폭주한 기관차처럼 격렬하게 들이박았다.

한참 동안 구멍 속을 들쑤시던 그가 여리여리한 몸을 껴안고 일으켜 앉았다. 그는 은서를 무릎 위에 올려 앉히고 소파에 등을 느른하게 기댔다.

“움직여 봐.”

그는 손바닥으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후려치고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치만…….”

“왜, 내 밑에 깔려서는 허리를 잘만 놀렸잖아. 위에서도 실컷 해 보라고.”

당황한 은서는 토끼처럼 두 눈을 순진하게 깜빡거렸다. 나더러 위에서 하라고? 낯선 체위에 얼굴까지 새빨갛게 익었다.

은서가 잔뜩 수줍어하며 우물쭈물거리자, 그는 미간을 구기고 다시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뭐 해. 빨리하지 않고.”

“이런 자세는 안 해 봤는데…….”

“다른 건 해 봤고?”

“…….”

“너 내가 처음이면서 왜 경험 많은 척해?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게.”

“나…… 많이 못 해요?”

“어. 더럽게 못 하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지. 어서 움직여 봐.”

“…….”

“안 하면 빼 버린다?”

협박 아닌 협박에 연약한 눈동자가 눈에 띄게 일렁거렸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은서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짚고 천천히 골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가 깊게 들어오면 어떻게든 절정으로까지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잊고 그저 몸을 내던지게 되는 것이다.

은서는 그의 위에서 혼자서 요분질을 쳤다. 허리를 요리조리 색스럽게 놀리는 모습을 그는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번뜩이며 빛나는 음험한 안광이 흥분을 가중시켰다. 은서는 엉덩이를 높이 들어 올려 쾅 내려앉았다.

“하아앗.”

떡을 치듯 방아질을 칠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빨아 달라고 유혹하듯이 출렁거렸다. 그는 그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 주겠다는 식으로 출렁이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꼭지를 츕츕 빨았다.

이윽고 그는 통통한 엉덩이를 양손으로 세게 그러잡고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며 작은 구멍 속을 집착맞게 괴롭혔다.

요망하게 요분질을 하는 유은서가 너무 야해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음란한 여자는 숨도 못 쉬도록 혼내 줘야 한다.

“아읏.”

앙큼한 요분질과 저돌적인 피스톤질이 미친 듯이 맞물린다. 서로의 몸은 빈틈 하나 없이 운명처럼 꽉 들어맞았다.

은서는 경련하듯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너무 깊고 세게 들어와서 몸이 망가지겠다는 두려움이 드는데도, 그에게 당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흣, 강혁 씨…….”

“유은서, 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나뿐이야.”

“흐응.”

“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몸이라고.”

“아으응.”

“그 누구도 널 이렇게 울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다른 새끼한테 안긴다는 상상은 꿈속에서도 하지 마.”

“하흣, 한 적 없어요……. 난 항상 강혁 씨만을 상상했는걸요. 하아.”

열락에 취해 무의식이 속마음을 고백했다. 농염하게 이를 데 없는 고백에 그는 음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귀여운 소리를 하는군.”

퍽, 퍽, 퍽, 그는 더욱 가열차게 허리를 놀리며 구멍 안을 파헤친다. 최고조까지 끌어올린 야만적인 피스톤질에 은서는 무너지듯 그를 꽉 껴안았다.

* * *

그는 날연하게 느즈러져 있는 몸을 유심히 감상하고 퍼레이드처럼 키스했다.

은서의 이마에서부터 콧등, 입술, 턱을 차근차근 내려오고, 목덜미와 쇄골을 지나 가슴을 스치고, 아랫배를 지나 허벅지, 무릎까지 향한다.

마침내 흉터가 있는 정강이 쪽으로 포근한 입술이 내려왔을 때, 은서는 얼른 다리를 뺐다. 그의 입술이 흉측한 흉터에 닿을까 봐 불안했다.

“그만하고 옷이나 주워 줘요.”

은서는 양팔로 알몸을 가리고 제법 도도하게 말했다. 피식, 웃음을 던진 그는 옷을 주워 주기는 고사하고 은서를 품에 쏙 안았다.

“좋았지?”

귓가로 흥분이 가시지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걸쳐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했지만 은서는 일부러 새침하게 대답했다.

“별로였어요.”

일순간, 그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더니 은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예요? 내려 줘요!”

“별로였다며. 난 유은서 남편이고, 유은서를 만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당신이 좋다고 느낄 때까지 내가 열심히 봉사하지.”

그는 은서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가 막혔다. 봉사? 그게 무슨 봉사야. 사람 숨 막힐 때까지 괴롭히는 짓이지.

침실에서 또 거침없이 먹힐 생각을 하니 은서는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다 내려놓고 정신없이 앙앙거릴 제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그려져서 벌써부터 수치스러워졌다.

* * *

개인전이 다음 주 코앞으로 다가왔다. 은서의 작업 시간은 길어졌고, 귀가 시간도 자연히 늦춰졌다.

자정이 깊은 밤, 스튜디오에는 빌 에반스의 풍성한 피아노 연주로 가득했다. 은서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온종일 캔버스 앞에 서서 작업을 한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손목은 아릿하고, 다리는 저리고, 허리랑 어깨는 뻐근했다.

은서는 붓을 내려놓고 작업용 앞치마를 벗었다.

두 팔을 만세 하듯 하늘 높이 뻗어 올리자,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어지면서 욱신거리던 몸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이어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어깨를 앞뒤로 돌려 주며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 다음,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작업에 몰두할 계획이었다.

꼬르륵.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배에서 뭐라도 넣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스튜디오의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은서는 별수 없이 머그잔에 홍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향긋한 향이 번지면서 티백이 우러났다.

티백을 잘 젓고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서 마셨다. 홍차의 맛을 음미하며 그동안의 작업물들을 먼발치에서 꼼꼼히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누나, 전시회 준비는 잘되고 있어? 난 장 감독 만나서 소주 좀 마시다가 이제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우현이었다. 은서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지금 열심히 작업 중.]

[아직도 일해? 밤이 깊었는데?]

[전시회가 코앞인데 밤낮이 어디 있겠니? 막바지 작업 중이야. 전시회 끝나고 나면 당분간 푹 쉬어야겠어.]

[그래, 누나. 고생 많다. 맘 같아선 간식거리라도 사 들고 찾아가서 응원하고 싶은데, 방해될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어.]

[말만이라도 고마워.]

[집중해서 마무리 잘해! 파이팅!]

간단한 대화가 끝나고 피로에 젖은 눈동자로 맨 구석에 있는 습작을 응시했다. 습작이라고는 하지만, 그 어떤 작업물들보다도 열과 성을 다 바쳐서 그린 작품이다.

물론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보고 싶다…….”

은서는 초상화 속 차강혁을 멀거니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지치고 힘들 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차강혁이라는 게 기함할 노릇이다.

정작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저 남자인데…….

한숨을 작게 내쉬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또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였다.

액정에 뜨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동공이 확장되었다. 실로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귀신같이 전화가 오다니.

은서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늘 그렇듯이 차강혁은 인사 따위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묻는다.

“스튜디오요.”

-언제 들어올 건데?

“글쎄요. 새벽 2시쯤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알았어.

뚜, 뚜, 전화가 끊겼다. 매정하기도 하다. 그 좋은 목소리, 조금이라도 더 들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은서는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보기만 하다가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전화해 준 게 어디야.’

옅게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찰나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힘을 내서 다시 작업에 돌입해야지.

* * *

그러고 30여 분이 지났다.

갑자기 스튜디오의 초인종이 울렸다. 채색을 하고 있던 은서는 고요한 밤을 뒤흔드는 뜻밖의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야심한 밤에 대체 누가 온 거지?’

은서는 음악을 끄고 인터폰으로 가까이 다가가 화면을 확인했다.

긴장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하도 놀라서 몸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은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

초인종 소리가 재촉하듯 다시 울렸다. 그제야 굼뜨게 몸이 풀린 은서는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눈앞에는 차강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현실 같지가 않고,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남자가 여기까지 행차하다니.

그는 캐주얼 차림이었다. 블랙진에 블랙 셔츠. 하지만 블랙이라는 색상 덕분에 그 차림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특유의 냉정한 인상과 블랙이라는 색상이 절묘하게 잘 어울려서 더욱 섹시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손님이 왔는데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하는 건가?”

“아, 일단 들어오세요.”

은서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은서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스튜디오 주소를 알려 준 적이 없는데.

“정 기사한테 물어봤지.”

“아…….”

은서는 낮은 탄성을 흘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스튜디오 주소가 무슨 극비 사항도 아니고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주소를 알아낸 건 둘째 치고, 애당초 여기엔 왜 왔는데? 무슨 목적으로?

“근데, 왜 왔어요? 설마…… 하려고 온 건 아니죠?”

연갈색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 찼다. 야밤에 그의 사무실에서 꼼짝없이 당한 기억이 생생한 은서는 양팔을 가슴 위에다 교차해서 몸을 보호하듯이 가렸다.

‘설마, 내 스튜디오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그 꼴을 보고 그는 미간을 대놓고 구기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백을 은서의 얼굴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먹이려고 왔어.”

“네?”

종이백을 낚아챈 은서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잘 포장된 샌드위치와 우유팩이 들어 있었다.

“이걸 왜…….”

“작은 처형이 당신 살 빠졌다고 걱정하길래. 먹으면서 하라고.”

“언니가 강혁 씨한테 연락해서 뭐라고 했어요?”

작은언니가 쓸모없는 오지랖이라도 부렸을까 봐 은서는 발을 동동 굴렸다. 처가댁에서 간섭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별말 안 하셨어. 그냥 안부 겸 연락 주신 거야.”

정작 차강혁은 평온해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서는 혹여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죄송해요. 언니한테는 내가 잘 말해 둘게요. 다음에는 그런 연락 못 하도록…….”

“죄송할 것도 많군.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꼬르륵.

이 와중에 주린 배가 우렁차게 울었다. 눈치도 없지. 은서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푹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별일은 여기 있었군. 얘 아주 절박하게 우는데. 당신은 이쪽에나 신경을 쓰라고. 좀 먹지 그래?”

그는 검지로 주린 배를 가리켰다. 은서의 얼굴은 더더욱 붉게 타올랐다.

차강혁 앞에서는 유독 민망한 행동들을 잘 들키는 것 같다. 짝사랑이라 안 그래도 지고 들어가는 게임인데, 어떻게 번번이 뒤집는 패마다 꽝인지 모르겠다.

“여기 앉아서 먹으라고.”

그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의자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은서는 열 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고 슬금슬금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먹는 건 먹는 거고.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잘됐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며, 샌드위치 포장을 뜯고 복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마주 보고 앉은 그는 유리컵에 흰 우유를 따라 주고 은서가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그마한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서 샌드위치를 앙 베어 물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꼭 도토리를 볼 한가득 저장해 놓는 다람쥐처럼.

“잘 먹네.”

“맛있어요.”

“역시, 그 입은 뭐든지 안 가리고 다 좋아하는군.”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곧게 펼쳐서 유심히 보았다.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씹던 은서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저 변태,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거기까지만 해요. 더 이상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뻔하죠, 뭐. 야한 말 하려고 했잖아요. 손가락을 잘 빤다느니, 거기를 잘 빤다느니, 순 엉터리 같은 소리만 하려고…….”

은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헙, 다물었다.

내 입으로 왜 굳이 이런 말들을 친절히 한 거지?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내 입으로 직접 노골적인 말들을 뱉어 버리다니…….

“네가 잘 빤다고 생각해? 좋아한다고 했지, 잘한다고 한 적은 없어. 유은서 너, 굉장히 서투르다고.”

“…….”

“그 형편없는 실력 최소 평균치까지 끌어올리려면 하루에 서너 번씩 빨게 해도 모자랄 지경이야.”

“…….”

“어디 빠는 것만 못하나? 받는 실력도 형편없지. 조금만 강하게 쑤셔 박으면 허리가 낭창하게 휘면서 무너지잖아.”

“…….”

“그런 볼품없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을 다해서 안아 주는 남편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

그는 능글맞게 이죽거렸다.

“그럼 하지 말든가요! 못하는 여자랑 왜 해요?”

발끈한 은서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목에 핏대까지 도드라졌다. 열이 확 뻗쳐서 숨을 색색거리는데, 갑자기 그가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간격을 좁혀 왔다.

그는 은서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하고 싶으니까 하지.”

“…….”

“입에 물려주고 싶고, 보지에 박아 주고 싶고.”

“…….”

“꼴리는 데 이유 있나? 그냥 내 좆이 그러고 싶다는데.”

귓바퀴를 살랑이듯 간지럽히는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지만, 내용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이 남자는 왜 이 좋은 목소리를 이렇게밖에 사용하지 못하는지 실로 의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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