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30)

4.

* * *

잔뜩 겁을 먹은 은서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장 턱이 붙잡히고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그윽하게 시선을 맞대더니 불쑥 입술을 덮쳤다.

“으읍!”

시작부터 거친 키스였다. 저돌적으로 부딪쳐 온 그의 입술은 은서의 입술을 탐욕스럽게 빨고 핥았다.

당황한 은서가 어깨를 밀어내자 그는 양 손목을 결박시키듯 그러잡고는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반신을 바짝 밀착시켰다.

말캉말캉한 혀가 입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영역이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미끄러지면서 그녀의 입속을 탐하고 또 탐한다.

격렬한 키스에 전신으로는 열이 번지고 사지가 저릿해졌다. 좋았다.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친 키스가 마냥 좋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에게 이 키스는 그저 분풀이에 불과할 뿐인데 나는 이 키스로 쾌감을 느꼈으니까. 억울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은서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차강혁을 바라보자 순간, 그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이내 그는 인상을 사납게 찌푸렸다.

“정말 흥 떨어지게 만드는군.”

은서의 몸에서 미련 없이 내려온 그는 다시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끝이 잿빛으로 타들어 가고 연기가 부유하듯 흩어졌다.

“미안해요. 키스마저도 형편없어서.”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은서는 타액으로 번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클러치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혼자 남은 그는 다 태운 담배를 비벼 끄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거실은 금세 연기로 자욱해졌다. 마치 그의 머릿속처럼.

뿌연 연기로 가득 찬 안개 같은 머릿속에는 그녀의 눈물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 * *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은서는 12월의 신부가 되었다.

호화로운 예식장, 무수한 하객들, 화려하게 만발한 꽃, 아름다운 드레스와 근사한 턱시도, 감미로운 사랑 노래까지. 누구나 부러워할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정작 은서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건 그저 형식적인 결혼에 불과했으니까. 차강혁의 말대로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이 결혼에 사랑은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은서는 그와 함께 스트레치 리무진에 올라탔다.

리무진 기사는 신혼부부를 위해 불투명한 글라스를 올려 운전석과 뒷좌석을 완벽히 차단시켰지만, 그게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신부와 신랑은 스킨십이라고는 일절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거리까지 두고 앉아 있었으니까. 대화 또한 없었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고 어색하기만 했다.

속이 답답해진 은서는 샴페인으로 손을 뻗었다.

샴페인 입구를 감싸고 있는 호일을 떼어 내고 철사를 돌려서 샴페인을 땄다. ‘폭!’ 하는 경쾌한 소리가 가라앉은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은서는 글라스에 금색의 술을 채우고 홀짝홀짝 마셨다. 결혼식 날, 샴페인으로 자작을 하는 신부라니. 꼴이 우스워서 조소가 새어 나왔다.

* * *

장시간 비행 끝에 신혼부부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는 이미 밤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들어왔다.

늦은 밤, 차강혁과 단둘이 호텔 객실에 있으니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긴장감이 몰려오고 심장박동이 빨라져서 은서는 몰래 심호흡을 해야 했다.

“샤워할래?”

그러나 차강혁이 무심코 던진 말은 신중한 호흡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은서의 심장은 발작하듯 내달렸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결혼을 사업이라고 일찌감치 정의 내렸고, 저를 질색할 정도로 싫어한다고 못을 땅땅 박았다.

키스를 한 적은 있지만 모두 우발적이었다. 첫 번째 키스는 장난이었고, 두 번째 키스는 화풀이었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괜히 긴장할 필요도 없고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릴 필요도 없었다.

은서는 스스로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차강혁과 호텔에서 밤을 보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건 그냥 대학교 MT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먼저 해요. 전 짐 정리하고 있을게요.”

그가 욕실로 들어가고 거실에 혼자 남자, 은서는 드디어 마음이 한결 놓이면서 긴장감이 탁 풀어졌다. 그리고 피로가 찾아왔다.

남들에게는 마냥 아름다워 보였겠지만 정작 은서에게는 전쟁과도 같았던 결혼식과 장시간의 비행은 육신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은서는 캐리어를 열어 짐을 대충 정리하고 소파에 앉아 등을 깊게 파묻었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내 그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눈꺼풀이 스르륵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 * *

희뿌연 영상 속에서는 테라스가 보였다. 아름다운 해변과 맞닿아 있는 테라스에서 그가 입술을 맞춰 왔다.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하지만 키스는 금세 격해졌다. 그는 은서의 입술을 집요하게 빨고 숨결을 난폭하게 훔치면서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큼지막한 손은 등허리를 쓰다듬다가 가슴 위로 안착했다. 풍만한 가슴을 손안에 가득 담고 만지작거리고 앙증맞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빙글빙글 돌리자, 은서가 단숨을 쏟아 내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은서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배꼽 아래가 간질거려서 하반신을 바짝 밀착시켰더니 아랫배로 딱딱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느껴졌다.

그 역시 저처럼 흥분했다는 사실이 왠지 감격스러웠다. 은서는 입술을 떼고 그를 짙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뜨거운 애욕이 가득 차 있었다. 살짝 젖어 있는 신비로운 연갈색의 눈동자는 어서 자신을 먹어치워 달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은서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성마르게 혀를 밀어 넣고 입안 곳곳을 휘젓고 탐하다가, 입술을 미끄러뜨려서 목선을 할짝거리고 쇄골을 물었다.

우윳빛 살결 위에서 그의 혀가 질척하게 움직인다.

붉은 혀끝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슴 능선을 타고 올라가 핑크빛 젖꼭지를 얄궂게 핥아 올리자, 은서가 교태 넘치는 교성을 터트리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민감한 반응에 그는 더욱더 끈적끈적하게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 하의를 벗기고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음부를 배회하듯 더듬는다. 낯선 자극에 겁을 먹은 은서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하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그를 느끼고 싶었다.

그는 가슴을 할짝거리며 동시에 손가락을 짓궂게 움직여 질구 주변을 자극하다 좁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미끌미끌한 애액이 새어 나와 그의 손가락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윽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애액이 넘쳐흐르자 그는 음란한 미소를 짓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페니스를 보고 은서는 바짝 긴장해서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곧 마음을 굳게 먹고 다리를 순순히 벌려 주었다.

은서답지 않게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뜨거운 욕망에 지배되어 있었다. 차강혁을 향해 기꺼이 온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서 들어와 달라고 애걸하듯 벌름거리는 음탕한 구멍에 성난 페니스를 쑤셔 박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희뿌연 영상이 잔인하게 흩어지고 은서가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이런 야한 꿈을 꾸다니……!’

여태까지 꾼 꿈들 중에 가장 저속한 꿈이었다.

‘말도 안 돼.’

그렇다. 이건 매우 저질스러운 꿈이었으며 또한 말이 안 되는 꿈이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헛된 꿈이었다.

은서는 숨을 가파르게 토해 냈다. 야한 꿈의 여파로 전신이 뜨끈뜨끈해지고 사지가 후들거렸다.

흥분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분명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아주 크고 탄탄한 무언가를 보물처럼…….

“어머나!”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챈 은서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얼른 떨어뜨렸다.

팔을 뻗어 더듬더듬 스탠드 조명을 찾아 켰다. 오렌지색 불빛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혀 주었다. 넓은 침대 위에는 차강혁이 상의도 입지 않은 채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은서는 저 남자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미쳤어, 정말.”

그래, 미친 거다. 신혼여행을 와서 외설적인 꿈을 꾼 것도 모자라 저 냉정하고 무심한 남자를 꼭 껴안고 있기까지 했다니.

차강혁이 곤히 잠들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이 괘씸한 행동을 들키기라도 했다면, 보나마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그가 저를 싫어하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해 주는 꼴만 되겠지.

은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스탠드 조명을 껐다.

주변은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은서는 그가 깨지 않도록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거실로 나와 소파에 누웠다.

눈을 감고 다시 잠에 청하려고 하는데 불현듯이 의문이 피어올랐다.

‘아까 나는 이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언제 침실까지 간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몽유병 환자처럼 잠결에 가기라도 한 건가?’

* *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은서는 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정말 몽유병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옆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벌써 일어난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차강혁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침대에 있었을까, 아니면 소파에 있었을까? 만약 침대에 있었다면 분명 그의 아침을 망쳤을 텐데……. 싫어하는 여자와 한 침대를 쓰고 싶은 남자는 없을 테니까.’

은서는 두 손으로 머리통을 꽉 우그려잡고 한숨을 푸욱 내리쉬었다.

‘간밤에 침대 습격 사건을 들키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했는데, 그새 정신이 나가서 여기로 또 기어들어 오다니…….’

왜 이렇게 그가 싫어할 짓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다.

은서는 절망에 빠져 있다가 침대에서 나와 객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차강혁은 거실에도 욕실에도 테라스에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마주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 무지 민망할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있었다. 신혼여행의 첫 아침을 홀로 맞이하다니…….

잠시 우울감에 빠져 있던 은서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은서는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프런트 데스크로 전화를 걸었다. 남는 객실이 있냐는 질문에 운 좋게도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풀었던 짐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카드키가 읽히는 소리가 들리고 차강혁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옷을 곱게 개서 캐리어에 넣고 있던 은서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왔어요…….”

차강혁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왔는지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칼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일상적이면서도 스포티한 그의 모습은 퍽 섹시했다.

넋 놓고 바라보다가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다시 옷을 개는 일에 열중했다.

“뭐 하는 거지?”

“짐 정리하고 있어요. 프런트에 물어보니까 빈 객실이 있다고 해서 거기로 옮기려구요.”

숙소를 따로 잡는 것이 그를 배려하는 일이라고 은서는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객실을 따로 쓴다면 침대를 습격하거나 그를 끌어안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을 테니까.

“어제는 제가 있어서 많이 불편했죠? 체크인할 때 빈방이 있는지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미처 못 챙겼어요. 죄송해요.”

그는 미간을 진하게 구겼다. 물론 짐을 정리하느라 바쁜 은서는 그의 구겨진 인상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은서는 짐을 모두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볼게요. 편히 쉬세요.”

* * *

신혼부부들의 천국이라는 하와이에서 은서는 홀로 외롭게 지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그녀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객실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거나 스케치를 하고,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다가 해질녘이 찾아오면 잠깐 해변가로 나가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혼여행치고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린 보통의 신혼부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남들이 하는 평범함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5박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평범하지 않은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신혼집은 울창한 자작나무와 광활하게 트인 잔디밭,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과 푸르른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신혼집은 부부를 위한 본채와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한 별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와 그녀는 본채로 들어갔다. 화이트 계열로 인테리어 된 내부는 깔끔하고 우아했지만 조금은 차가운 느낌도 들었다.

부부는 별다른 대화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부부 침실은 2층에 있었다.

2층에 당도하고 은서가 부부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어 손잡이를 잡고 열려는 순간, 차강혁이 침묵을 깨뜨렸다.

“난 게스트 룸으로 가지. 피차 그쪽이 편할 테니.”

간략하게 말한 그는 반대쪽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서는 멀어져 가는 등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여행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혼집에서도 각방을 쓰는 건 지극히도 합당한 일이었다. 우린 쇼윈도 부부니까.

* * *

계절이 바뀌었다.

냉혹한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아름다운 벚꽃이 만발한 4월의 봄이었지만, 은서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처럼 스산하고 춥기만 했다.

결혼 생활은 공허했다. 대화도 없고, 스킨십도 없고, 정도 없었다.

차강혁은 늘 일찍 출근했고 항상 늦게 퇴근했다. 한가로운 주말이 되면 그는 서재에 틀어박혀서 지내고는 했다. 아마 거기서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으리라.

그럴 때면 은서는 서재 근처를 서성거리며 그에게 말을 붙여 볼까 고민을 하고는 했다. 주말이니까 함께 나들이를 나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함께 밥을 먹자고 하거나.

무엇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닫힌 서재 문이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져서 번번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은서는 남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밤이 되면 1층 거실로 나가서 퇴근하고 들어오는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늘 데면데면했다. 은서가 반갑게 웃으면서 ‘이제 왔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부부는 한집에서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서로 공유하는 건 일절 없었다.

충분히 각오를 하고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결혼 생활을 막상 피부로 직접 겪으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들었다.

남편의 차가운 등만 보면서 지내는 생활에 은서는 점점 지쳐 갔다.

나는 결혼을 한 게 아니라 하우스 메이트를 얻은 것뿐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고 해도, 가끔씩은 서러운 감정이 응어리져서 울분이 차오르기 일쑤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외롭고 쓸쓸한 날, 은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대로변의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번쩍하게 지어진 7층 건물은 전체가 산부인과로, 서울에서 꽤나 알아주는 유명한 병원이었다.

은서는 지난달 처음으로 이 병원을 방문했다. 결혼을 한 후로 규칙적으로 나오던 생리가 뚝 끊겼기 때문이었다.

문진을 하고 각종 검사를 한 결과, 다행히도 몸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의사는 결혼으로 인한 생활 환경의 변화와 스트레스 때문에 생리가 끊긴 것 같다고 추측하며 피임약을 복용하자고 권유했다.

그래서 지난달부터 매일같이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약이 다 떨어져서 새로 처방받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것이었다.

“약 먹고 어디 불편하진 않던가요?”

의사는 차트를 확인하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이번에도 같은 약으로 처방해 드릴게요.”

은서는 피임약을 처방받고 건물에서 나와 세단에 올라탔다.

“스튜디오로 갈까요?”

“네.”

정 기사의 물음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세단은 엔진 소리를 내면서 한적한 도로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이따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캔버스에 스케치해 둔 그림을 어떤 색감으로 칠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차강혁이었다. 단지 이름만 확인했을 뿐인데도 심장이 격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은서는 충분히 호흡을 진정시킨 다음에야 전화를 받았다. 남들이 보기엔 퍽 우스울 거다. 고작 남편 전화를 받으면서 긴장하다니…….

“여보세요?”

-나야.

“무슨 일 있어요?”

그랬다. 둘은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을 하는 사이였다. ‘그냥 네가 생각나서 연락했어.’ 같은 말은 결코 나올 수가 없는 관계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당장 홍콩으로 가야 해. 당분간 집에 안 들어가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아, 네……. 오늘 출발하면 언제 돌아오는데요?”

-아마 다음 주쯤.

“알겠어요. 일 잘 해결하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실로 간단한 통화였다. 용건만 딱딱 전하고 나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 * *

차강혁이 출장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다.

은서는 스튜디오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서 책상 달력을 조용히 응시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며칠만 더 보내면 다음 주가 찾아오는 셈이다.

‘차강혁은 다음 주, 어느 요일에 집으로 돌아올까? 기왕이면 월요일에 왔으면 좋겠다. 빨리 만날 수 있게.’

한집에 살면서 함께하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지만, 그래도 신혼집에 차강혁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던 게 무의식적으로 위안을 주었던 걸까. 그가 사라지고 없으니 공허함과 쓸쓸함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보고 싶다, 아주 많이.’

은서의 시선은 책상 달력에서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옮겨 갔다.

‘전화해서 어느 요일에 올 건지 물어볼까? 그러면서 목소리도 듣고…….’

손을 천천히 뻗어서 휴대폰을 쥐려는 순간, 은서는 한숨을 쉬고 손을 거둬들였다.

차강혁은 홍콩으로 떠난 이후 연락이 아예 없었다. 필요한 용건 외에는 말을 하지 않는 남자니까 연락이 없는 게 달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남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서 언제 돌아오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분명 귀찮아하리라.

은서는 바쁜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기 위해 욕심을 억지로 눌렀다. 머리를 가볍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하던 캔버스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작업 중인 그림 속에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 * *

머릿속에 상념이 많은 탓인지 작업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덤비기보다는 잠깐 쉬어 주는 편이 더 낫다.

오후 2시, 햇살이 가장 뜨거울 때 은서는 머리를 식힐 겸 지현이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갤러리로 찾아갔다.

갤러리에서는 ‘욕망’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은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세심하게 감상했다. 그러다 17세기에 그려진 극단적인 명암 대비가 돋보이는 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춰 세웠다.

그림이 주는 강렬한 아우라에 압도된 듯 넋을 놓고 서서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은서의 옆구리를 툭 쳤다.

“왔어?”

“아, 지현아.”

“얼굴이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남편이랑 뜨거운 밤이라도 보냈니?”

지현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농을 던졌다.

하지만 은서에게는 뼈아픈 농담이었다. 목구멍 안쪽에서는 ‘손끝 하나도 대지 않는단다.’라는 말이 허무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섹스는 필수불가결이라고들 하지만, 차강혁과 유은서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손조차 잡지 않는데 섹스라니.’

가당치도 않다. 은서는 서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정강이에 있는 요철처럼 우둘투둘한 긴 흉터를 발견한다면, 차강혁은 첫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기겁할 테니까.

‘나를 더 싫어하게 되겠지…….’

은서는 미대 1학년 때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두 살 연상의 미대 선배였는데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남자로 보였다.

긴긴 나날 동안 참새처럼 입술만 쪽쪽거리다가 사귄 지 1주년이 되는 날, 큰 결심을 하고 첫사랑과 여행을 떠났다.

늦은 밤, 설레면서도 두려운 심정으로 은서는 침대에 누웠다.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은서는 고해하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선배, 나 다리에 흉터가 있어요……. 많이 보기 싫을 거예요.」

「그런 거 상관없어. 넌 흉터마저도 예쁠걸.」

다정한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남자는 부드럽게 키스했고 섬세한 손길로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바지를 벗겼는데…….

막상 흉터를 보자 남자의 만면은 급격히 굳어졌다.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네…….」

열기로 달아올랐던 눈동자가 단번에 식은 것이 보였다. 은서는 수치심에 재빨리 바지를 끌어 올리고 도망치듯 침실을 뛰쳐나왔다.

남자가 곧장 뒤따라 나와 은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선배, 내 흉터 보고 실망한 거죠? 이제 내가 싫어진 거죠?」

남자는 눈물을 닦아 주면서 자상하게 다독였다.

「그냥 조금 놀란 거야. 널 향한 내 마음은 변함없어. 당황했을 뿐이라고.」

남자는 다시 은서를 침실로 데려가 관계를 시도했다. 하지만 은서에게는 다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은 결국 손만 잡고 잠이 들었다. 이후로도 남자는 계속 사과하고 해명했다.

지극한 사과에 다쳤던 마음이 서서히 회복되고 첫사랑과 다시 밤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나를 정말로 사랑해 준다고 믿었던 남자는, 내가 잠들었을 때 몰래 찍어 둔 흉터 사진을 절친한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돌려보며 더러운 말들을 나불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는 설탕 바른 말들을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으며 다정한 남자 친구 코스프레를 해 놓고, 뒤로는 저를 술자리 안주 삼아 약점을 공격해 성희롱을 하며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 준 것이다.

그 추악한 첫사랑으로 인해 은서는 안 그래도 부끄럽게 여기던 흉터를 더욱더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남자를 여럿 사귀긴 했어도 끝까지 가지 못했던 건 순전히 흉터 때문이었다. 보여 주면 실망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결혼 후, 차강혁은 제 몸에 손끝조차 대지 않으니 어찌 보면 잘된 일이긴 했다. 이미 모자란 부분을 충분히 보여 줬는데 끔찍한 흉터마저 보여 줄 순 없다.

‘결혼은 했지만, 나는 분명 처녀 귀신으로 죽겠지…….’

은서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맺혔다.

“그 사람, 사흘 전에 홍콩으로 출장 갔어. 난 혼자서 베개 끌어안고 잤단다.”

“어머, 아쉬워서 어떡해? 한창 좋을 때에.”

나야 아쉽지만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만끽할걸.

“언제 온대?”

“다음 주.”

“다음 주면 곧 오겠네? 이벤트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벤트?”

“응. 이벤트. 예를 들자면, 출장을 다녀온 지친 남편을 위해 야시시한 속옷을 입고…….”

지현이 말끝을 흐리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다음에 결혼하면 네 남편한테 실컷 해 주렴.”

은서는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크 시대 때 그려진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였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들어?”

심상치 않은 눈길을 읽은 지현이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단호히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들어.”

사자 가죽을 걸친 옴팔레는 헐벗은 헤라클레스를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면 헤라클레스는 옴팔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하듯 애타는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용맹한 장수도 옴팔레 앞에서는 한낱 노예에 불과했다.

“신기하지.”

은서가 조용히 읊조렸다.

“뭐가?”

“옴팔레가 저 야성적인 장수를 굴복시킨 거 말이야. 저렇게 강한 남자 위에서 군림하다니 대단하지 않아? 옴팔레는 헤라클레스를 어떻게 길들였을까?”

“음…….”

지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입술을 열었다.

“성적 매력?”

“뭐?”

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현이 킥킥 웃는다.

“은서야, 남자들은 다 뻔해. 헤라클레스도 결국 뻔한 남자였고. 이 여자를 갖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게 결국 성적 끌림이고, 그렇게 몸이 끌리면 남자들은 간이고 쓸개고 자존심이고 다 빼 준다니까.”

어처구니없는 궤변에 은서는 논박할 의지조차 상실했다.

* * *

스튜디오로 돌아온 은서는 작업을 하다가 밤 11시가 넘어서 집으로 귀가했다. 다음 달에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요즘은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는 날이 많았다.

은서는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홈시어터 룸으로 들어갔다. 몸은 고단했지만 잠은 오질 않았다. 영화를 한 편 본 다음에 잠자리에 들 계획이었다.

홈시어터 룸 한쪽 벽면에는 은서가 그동안 모아둔 DVD로 빼곡했다. 절반은 본 거고 절반은 아직 보지 못했다.

신중한 눈길로 무수한 DVD들을 훑다가 하나를 선택해서 꺼냈다. DVD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여성들을 위한 애틋하고 짜릿한 로맨스.]

줄거리를 읽어 보니 뻔한 불륜 영화였다. 은서는 피식 웃고 DVD를 재생시킨 다음, 케이스는 테이블 위에 툭 던져 놓았다.

테이블 위에는 최근에 본 DVD 케이스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었다.

죄다 불륜 영화였다.

욕구불만인지 요즘은 계속 이런 종류의 영화만 보게 된다. 아무래도 여성의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려면 불륜이 쉽고 간편한 소재이긴 하니까.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은서는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의 쓸쓸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가 있지만 그녀의 인생은 무언가 빠진 것처럼 무료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다 폭우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그녀는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여자는 홀린 듯이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과는 절대로 느낄 수 없었던 극한의 오르가슴을 맛보게 된다.

“와…….”

자극적인 베드 신에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침대에서 젖은 몸으로 정신없이 사랑을 나누는 신은 노골적이면서도 우아했다.

동물처럼 그저 헉헉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성감을 절묘하게 건드리면서 외설적이고 음탕하게, 그러나 선을 넘지는 않는 세련미가 있었다.

영화 속의 남자는 여자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격렬하게 놀려 댔다. 허리짓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은서의 발끝은 아찔하게 오그라들었고 입안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스크린 속의 남녀는 어느샌가 유은서와 차강혁으로 치환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륜 영화를 보면서도 은서가 꿈꾸는 남자는 언제나 남편이었다.

은서는 눈을 꼭 감고 그가 거칠게 입술을 훔치고 부서질 듯 안아 주는 상상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음란한 상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전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차강혁을 만난 후로 괴이한 성적 충동에 휩싸이는 일이 잦아졌다.

실로 거추장스러웠다. 어차피 섹스는 하지도 못할 텐데 쓸모없이 욕망만 강하다는 것이.

‘경험도 없는 주제에 내 몸은 왜 이리도 애타게 그를 원하는 것일까.’

은서는 야릇한 손길로 달아오른 몸을 어루만졌다. 그가 만져 준다고 상상하면서 부드럽게 옷 위를 쓰다듬다가 슬며시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들 별채로 돌아갔고 그는 다음 주에나 집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지금이 은밀한 장난을 즐기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손가락을 세워 외음부를 조심스럽게 매만져 보았다. 살짝 만졌을 뿐인데도 질구에서 끈적끈적한 애액이 흘러나와 촉촉해졌다.

“하아.”

오른손으로 아래를 연신 희롱하면서 왼손은 티셔츠 안에 집어넣었다.

브래지어를 끌어 올려 가슴을 쪼물거리다가, 이미 탱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손끝으로 튕기듯이 만지작거렸다.

위와 아래, 동시에 자극을 주니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은서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리고 투명한 애액이 번들거리는 좁은 구멍 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가 넣어 준다고 상상하면서.

“하읏!”

손가락으로 좁디좁은 구멍 속을 깊숙이 헤집으며 그가 위에 올라타 허리를 놀리는 모습을 그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흔들리고, 저를 집어삼킬 듯이 키스하고, 탄탄한 근육들이 약동하고, 짐승처럼 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다.

흥분이 고조될수록 손가락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강해졌다. 젖은 구멍을 연신 파고드는 질퍽한 소리가 벽을 마구 때려 댔다.

“하으읏!”

절정에 다다른 순간, 은서는 방이 떠나가라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크게 들썩거렸다. 이내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황홀한 쾌감을 느낀 몸은 녹진하게 풀어졌다. 은서는 소파에 날연하게 느즈러져서 감았던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순간, 등줄기로 서늘한 긴장감이 타고 흘렀다. 은서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도어 쪽을 돌아보았다.

절망스럽게도, 차강혁이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서서는 눈빛을 묘하게 빛내고 있었다.

“혼자서 재미 좋군.”

시니컬한 목소리가 고막을 잔인하게 찔러 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은서는 전신을 오들오들 떨더니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대체 언제 온 거지?’

혼자만의 장난에 흠뻑 빠져서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은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수치스러워 도저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그런 너저분한 짓을 하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강혁에게 들키다니…….

‘안 그래도 없던 정나미가 뚝 떨어졌겠지. 나를 끔찍한 저질이라고 여길 거야.’

이따금씩 인터넷에서 고민 상담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배우자가 몰래 자위하는 걸 알게 되었는데, 기분이 너무나도 더럽고 배우자가 극도로 미워진다고.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도 그러는데 하물며 사랑 없이 결혼한 저 남자는 오죽할까. 내 꼴을 보기도 싫을 거다.

“다, 다음 주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났어. 내가 일찍 온 게 불만인가?”

“아, 아니에요…….”

은서는 백치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귓불도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어떡하지? 이제 그는 나를 싫어하는 걸 넘어서서 혐오할 텐데…….’

각방을 쓰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시는 근처에 얼씬대지도 말라고 선을 확실하게 그어 버릴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이참에 별거를 하자고 나올 수도 있었고.

“저…….”

“샤워하러 갈게.”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구구절절 용서를 구하려는 찰나, 차강혁이 냉정히 등을 보이고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마치 나와는 이 공간에 함께 있기 싫다는 듯이.

홈시어터 룸에는 다시 은서 혼자 남게 되었다. 은서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고 두 손으로 머리통을 꽉 틀어잡았다.

세상이 끝장난 것만 같았다.

* * *

은서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 집에서 남편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럴 면목도 없었고 자격도 없었다.

‘나는 함량 미달 아내니까.’

바깥은 봄비치고는 거센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정원에 있는 풀과 꽃들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윽한 향기였지만 지금 은서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은서는 정원을 지나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옷은 금세 비에 젖어 들어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고, 젖은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져서 톡톡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큰길로 나와서 택시에 올라탔다. 별채에는 운전기사가 두 명이나 있었지만 늦은 밤 그들을 깨워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중년의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은서는 스튜디오 주소를 댔다. 오늘 밤은 일단 스튜디오에서 잠을 잘 요량이었다.

택시는 비에 젖은 도로를 달린다. 속도에 맞춰서 미터기 또한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실시간으로 변하는 미터기의 숫자를 보다 문득 깨달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빈손으로 나왔다는 것을.

지갑은 고사하고 휴대폰조차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

“저, 기사님……. 목적지 바꿀게요. 양재동 쪽으로 가주세요. 그리고 죄송한데요, 혹시 휴대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가 휴대폰을 두고 나와서요. 딱 1분만 통화할게요.”

택시기사는 룸 미러로 흘긋 은서의 행색을 훑어보고 딱하다는 식으로 혀를 찼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불쌍해 보였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해도 순순히 휴대폰을 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은서는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고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지현아, 나야. 은서.”

본가로 들어가면 보나마나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고, 언니들에게 가는 건 본가와 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고…….

결국 친한 친구인 지현에게 조난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휴대폰도 지갑도 없는 상황이라 택시기사님께 휴대폰을 빌려서 전화 걸었어. 늦은 시간에 정말 미안한데…… 내가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잠깐 나와 줄 수 있어? 택시비만 빌려 줘. 부탁할게.”

-무슨 일 있어?

지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정도 훌쩍 지난 시간, 은서는 다른 이의 휴대폰을 빌려서 초조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무 일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리라.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래…….”

-그래, 알았어. 내가 나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하자. 지금 어디야?

“택시 타고 양재동으로 가는 중이야. 아마 15분쯤 뒤에 도착할 것 같으니까 그때 나와줘.”

-응. 시간 맞춰서 나갈게. 걱정하지 말고 와.

지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은서는 왠지 울컥했다.

친구의 상냥함에 안심이 되다가도 역시 저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한심함도 느껴졌다.

「하긴, 넌 스스로 하는 게 없지. 너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야.」

언젠가 차강혁이 했던 말이 다시금 되살아나 귓속을 잔학하게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던 남자에게 나는 거대한 폭탄까지 던져 주고 말았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짝사랑에게 미움 받고,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또 미움을 받고……. 연쇄 작용처럼 이어지는 끔찍한 고리가 너무나도 서러웠다.

* * *

택시는 양재동의 어느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우산을 쓴 누군가가 택시 가까이로 다가왔다. 빗물이 묻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은 키가 제법 컸다. 여자의 실루엣은 분명 아니었다.

키 큰 실루엣이 상체를 살짝 낮추고 유리창을 똑똑 노크했다. 은서가 창을 내렸다.

“은서 누나.”

우현이었다.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나 그저께부터 우리 누나 집에서 지내고 있거든. 배관 공사 때문에.”

“아…….”

지현이 집에 있는 우현을 시켜서 저를 데리고 오라고 한 모양이었다. 은서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현은 뒷좌석 문을 열어 택시비를 지불하고,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서 은서에게 건네주었다.

“입어.”

“괜찮아.”

“입으라니까.”

거절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대쪽 같은 단호함에 은서는 별수 없이 바람막이를 걸치고 택시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노랑 우산을 사이좋게 함께 쓰고 오피스텔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은서가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 탓에 우현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들어갔다.

“우현아, 우산 똑바로 들어. 너 비 다 맞잖아.”

“난 비 좀 맞아도 돼. 누나가 안 맞는 게 중요하지.”

불현듯 차강혁도 우현처럼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덜 미워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근데, 배관에 무슨 문제 생겼어?”

“누수가 있어서.”

“어머, 어떡해? 수리는 얼마나 걸린대?”

“이 주일쯤.”

두 사람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야심한 밤에 비에 흠뻑 젖은 꼴로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불쑥 찾아온 상황이 이상하고도 남을 텐데, 고맙게도 우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우현이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현이 환하게 웃으면서 은서를 반겨 주었다.

“어서 와. 비 많이 맞았구나. 우선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해야겠다.”

지현은 은서에게 속옷과 잠옷을 챙겨 주고 욕실로 안내했다. 샤워부스로 들어온 은서는 따스한 물줄기를 맞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잔다고 해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호텔을 알아봐야 하는 걸까?’

그는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그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우선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충격적인 사건도 점차 옅어질지 몰라…….’

은서는 작은 희망을 품으면서 샤워를 했다.

조금 뒤에, 샤워를 끝내고 잠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젖은 머리는 귀찮아서 수건으로 대충 닦기만 하고, 거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았다.

그런데 우현이 다가오더니 헤어드라이어를 젖은 머리칼에 가까이 갖다 대며 바람을 세게 켰다. 위이잉, 우는 소리가 고막을 요란하게 때리고 머리칼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신우현,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은서가 목청을 높였다. 우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머리를 바짝 말려야지. 안 그럼 감기에 걸린다고.”

그러면서 우현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엮어 넣으며 온통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현의 말이 맞다고 동생 편을 들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 우현은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맥주 두 캔을 거실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우현과 지현은 맥주 캔을 하나씩 집어 들어 땄고, 은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멀거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맥주 주지.”

“누나는 비 맞았으니까 차가운 거 마시면 안 돼.”

“그래. 몸 따뜻하게 해야 감기 안 걸려.”

이번에도 지현은 동생 편을 들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으르렁거리다가도 죽이 잘 맞을 때는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입술을 삐죽인 은서는 코코아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설탕을 거의 넣지 않은 모양인지 단맛은 없고 온통 쓴맛뿐이었다.

마치 제 결혼 생활처럼.

“근데 은서야……. 남편이랑 싸웠니?”

지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뭐…….”

“왜 싸웠는데?”

“누나,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부부 사이 일인데.”

우현이 한 소리 하자 지현은 머쓱하게 웃더니 은서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은서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근데, 네 남편은 네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알고 있어?”

“…….”

“말 안 했으면 지금이라도 전화해. 전화가 그러면 메시지라도 보내고. 아무리 싸웠어도 연락 없이 외박하는 건 안 돼. 남편이 걱정할 거야.”

걱정 같은 걸 할 남자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알고 있어. 메모 남기고 나왔거든.”

은서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코코아를 마셨다. 쓴맛이 입안을 모조리 장악해 버렸다.

* * *

샤워를 하고 나온 강혁은 2층 난간에 기대서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벨 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렸다. 그는 벨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홈시어터 룸.

테이블 위에는 주인 없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그가 전화를 끊자 주인 없는 휴대폰도 같이 잠잠해졌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짜증스럽게 읊조린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홈시어터 룸을 훑어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휴대폰과 먹다 남은 맥주와 DVD 케이스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가서 DVD 케이스들을 살펴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표지에 적힌 홍보용 문구들이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지루한 결혼 생활과 외간 남자, 정숙한 여자의 비밀스러운 일탈, 금단의 관계, 불온한 욕망, 배덕한 욕정, 위험한 불륜…….]

그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취향 한번 고상하군.”

* * *

은서는 내내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났다. 피곤한 눈을 비비고 방에서 나오자, 달콤한 풍미가 후각으로 스며 들어왔다.

냄새가 풍겨 오는 곳을 따라서 발걸음을 움직였더니, 우현이 주방에서 프렌치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누나, 일어났어?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토스트 거의 다 됐으니까 먹고 씻어.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고마워. 지현이는 출근했어?”

“벌써 했지. 어서 앉아.”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 보니, 우현이 완성된 토스트를 접시에 담아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이어서 우현은 나이프와 포크를 세팅하고, 흰 우유를 유리잔에 따르고, 사과까지 예쁘게 썰어서 접시에 담았다. 보편적이면서 훌륭한 브런치였다.

은서는 프렌치토스트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입안에 넣었다. 맛있었지만 계속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안이 영 깔깔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 모양이다. 은서는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만 먹게?”

“입맛이 별로 없네. 나 샤워하고 스튜디오로 가야겠어.”

마음이 어수선하고 기분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열심히 작업이라도 해서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물론 작업에 열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럼 씻고 나와. 내가 데려다줄게. 옷은 드레스 룸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어.”

“내 옷은?”

“세탁기 돌렸지. 다음에 챙겨 줄게.”

“응.”

은서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런 다음, 드레스 룸으로 가서 지현의 슬랙스와 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런데 잘 때 입은 잠옷 바지는 고무줄로 되어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는데, 슬랙스는 허리가 약간 커서 불편했다.

“우현아, 나 스튜디오 말고 집으로 데려다줘. 내 옷으로 편하게 갈아입고 작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드레스 룸에서 나온 은서가 헐렁한 바지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1시였다. 지금 차강혁은 회사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없을 때 재빨리 집에 들러서 옷도 갈아입고, 또 필요한 물품도 챙겨야겠다 싶었다.

“그래. 그럼 갈까?”

우현이 차 키를 집어 들었다.

* * *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우현의 차는 신혼집을 향해서 달려갔다.

은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높이 떠올라 밝은 빛깔을 온 거리에 뿌리는데, 기분은 한없이 우중충하기만 했다.

어제 내렸던 비가 아직도 맘속에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강혁에게 은밀한 장난을 들켰다는 수치심도 수치심이지만, 그를 또 실망시키고 말았다는 절망감이 은서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유은서라는 여자는 차강혁이라는 남자를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수렁처럼 깊은 우울 속으로 끌어들였다.

“누나……. 괜찮은 거야?”

우현이 은서의 안색을 살피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응? 아, 그럼. 괜찮지.”

은서는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웃어도 눈동자는 잿빛으로 그늘져 있다는 걸 우현이 모를 리 없었다.

“사실 나는…… 누나 결혼 말리고 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서의 눈이 커졌다.

“예전에 누나가 바에서 술 마시면서 울었잖아, 그 남자 때문에. 나는 당연히 누나가 그 남자랑 끝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혼한다고 해서…… 많이 놀라고 당황했었어.”

“…….”

“이 결혼, 못하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누나를 울리는 남자한테 누나를 보내는 게 맞는 일일까? 고민하고 계속 고민하다가…… 청첩장까지 나왔는데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참았어.”

“…….”

“근데…… 어제 비에 흠뻑 젖은 누나 모습을 보니까, 역시 그 결혼 말렸어야 했나 싶더라.”

“나 괜찮아. 원래 부부들은 다 그래.”

“다 그렇지 않아. 내가 누나 남편이었다면…… 누나 그런 식으로 안 내보내.”

“그 사람이 내보낸 거 아냐. 내가 나온 거야. 잠깐 피하고 싶었어.”

차강혁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건 자신이었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것도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우현아, 걱정하지 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고 우리 잘 지내고 있어.”

은서는 잘 지낸다는 말을 유독 강조하며 본인의 불행을 애써 숨겼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이 떠벌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

단호한 은서의 태도에 우현은 더 말할 수 없어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감돌았다.

* * *

우현의 차는 웅장한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은서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곧장 내리려던 그녀는 마음을 바꿔서 상냥하게 말했다.

“커피 한잔 마시고 갈래? 브런치 차려 준 값은 갚아야 될 것 같아서.”

“그런 거라면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열 잔은 대접해야 할 텐데? 내가 만든 특제 프렌치토스트는 어디 가서도 못 먹는 귀한 음식이거든.”

어색해졌던 분위기를 풀려는 듯 우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은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현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쉽고 편했다. 분위기가 아무리 가라앉아도 지금처럼 금세 회복이 된다.

‘결혼도 이렇게 편안한 남자랑 했어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차강혁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불편한 남자였다. 그의 앞에선 항상 긴장이 되고, 그의 앞에서는 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든다.

‘하긴, 따지고 보면 지은 죄가 많기는 하지. 짝사랑 간수도 못 해서 억지로 맞선을 보게 만들고,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게 만들고, 음침한 짓을 하던 것까지 들켜 버렸으니…….’

은서가 몰래 씁쓸한 표정을 짓는 사이, 우현은 다시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함께 정원을 따라서 걸었다.

“정원이 예쁘네. 수영장도 멋지고.”

“그래?”

“응. 집 되게 좋다.”

근사한 집인데 이 집에서 무언가를 즐겨 본 적은 없다. 수영장은 그림 좋은 떡에 불과했고,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며 정원을 산책한 적 역시 없었다.

이 집은 확실히 주인을 잘못 만났다. 사랑이 가득한 부부를 주인으로 맞이했다면, 삭막한 건조함이 아니라 따스한 활기로 가득 찼을 텐데.

은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와.”

우현이 은서를 뒤따랐다. 은서는 전실을 지나 거실로 가서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여기 앉…….”

그러나 은서는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일순,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계단에서는 차강혁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느린 걸음이지만 위압감이 풍겼다. 사자가 장난삼아 겁을 주려고 사슴들의 영역을 어슬렁어슬렁 누비는 느낌이었다.

은서의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차강혁이 왜 지금 집에 있지?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그의 옷차림은 캐주얼했다. 청바지에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편안한 차림을 보아하니, 회사에 있다가 집에 잠시 들른 것도 아닌 듯했다.

“오늘 출근 안 했어요?”

차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은서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기만 할 뿐.

바로 코앞에서 떡 버티고 있는 장신의 체구는 위력적이고, 곧게 내려다보는 눈매는 압도적이었다. 공기의 압력이 단번에 높아졌다.

싸늘한 긴장감이 은서의 등줄기를 얄궂게 쓸어내렸다.

“안녕하세요. 결혼식 때 뵀었죠? 신우현이라고 합니다.”

눈치를 살피던 우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손을 내밀며 악수까지 청했지만, 차강혁은 별로 받아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는 우현을 훑어보고, 그리고 은서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어젯밤, 그녀가 홈시어터 룸에서 입고 있던 옷은 카키색 린넨 팬츠에 연미색 티셔츠. 그리고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검은색 슬랙스에 핑크색 셔츠. 게다가 목덜미에서는 낯선 향기마저 풍겼다.

돌연, 그는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 은서를 2층으로 끌고 갔다.

“강혁 씨!”

화들짝 놀란 은서가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더 세게 손목을 그러잡고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올라갔다.

2층에 당도해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는 은서를 내동댕이치듯 침대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위에 올라타 눈빛을 야수처럼 팽팽하게 빛냈다.

“어젯밤, 그놈과 무슨 짓을 했지?”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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