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0)

3.

* * *

고깔모자를 쓴 여자는 신나게 외쳤다. 하지만 차강혁의 뒤에 주춤주춤 서 있는 은서를 발견하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그는 인상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 날 선 어조로 말을 뱉었다.

“나는 그냥 오빠 생일 축하해 주려고…….”

여자가 풀죽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가 있었고, 불이 붙은 초는 촛농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하얀 생크림을 지저분하게 더럽히고 있었다.

은서는 멀뚱히 선 채로 낯선 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키가 상당히 컸다. 운동을 즐겨 하는지 몸에 지방 하나도 없이 깡말랐고 탄탄했다. 이목구비는 크고 화려했으며, 피부는 캘리포니아 걸처럼 캐러멜색으로 태닝을 했다.

유은서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은서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우윳빛 피부에 작업하느라 움직일 일이 별로 없어서 날씬한 체형이기는 해도 탄탄한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까. 오히려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여자는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었을 뿐인데도 근사하게 태가 났다.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에 은서는 단번에 주눅이 들었다.

‘모델 같아.’라고 생각할 때였다. 얼마 전, 미용실에서 봤던 잡지가 퍼뜩 떠올랐다.

잡지에서 그녀를 봤다. 기다란 몸매로 포즈를 곧잘 잘 잡아서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다. 잡지 에디터는 그녀를 두고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 모델이라고 소개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민승아, 난 너랑 벌써 정리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맞아. 이름은 민승아였어.

“그렇지만…….”

승아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곧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오빠를 잊는 게 너무 힘든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난 하나도 정리가 안 됐는데 자기만 끝나면 다야? 어쩜 사람이 그렇게 냉정해?”

하소연을 하듯이 말을 늘어놓던 승아는 돌연 악의가 가득 찬 눈길로 은서를 노려보았다.

“이 여자가 그 여자지? 오빠가 선본다고 했던 여자! 우리가 왜 이 여자 때문에 헤어져야 해? 대체 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세게 때렸다. 당황한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신, 돈 많은 집안 딸이면 다야? 돈 많으면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해도 돼? 당신이 뭔데 나한테서 우리 오빠를 뺏어 가?”

“그만해. 은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어.”

“오빠, 지금 내 앞에서 이 여자 편드는 거야?”

커다란 눈망울에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승아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차강혁을 쳐다보고, 또 매서운 눈길로 은서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은서는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알 길이 없다. 이토록 기묘하고 혼란스러운 삼자대면은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이 여자가 왜 아무 잘못이 없어? 우리가 헤어진 게 다 이 여자 때문인데! 이봐요, 당신. 잘 들어요. 나랑 강혁 오빠는 정말 잘 사귀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선본다고 끼어드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됐다구요! 당신이 우리 사이를 다 망쳐 놓은 거야!”

“은서 씨는 끼어든 적이 없다고. 선은 내가 보겠다고 한 거야. 굳이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니야! 이 여자 잘못이야! 다 이 여자 잘못이라고!”

승아는 대기가 찢어질 정도로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꺽꺽 우는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

은서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 보자면, 민승아는 차강혁의 여자 친구였던 모양이다.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이 건물에 들어온 것을 보면, 도어록 비밀번호까지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꽤나 깊은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이별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유은서 때문. 차강혁은 어른들이 주선한 맞선으로 어쩔 수 없이 민승아에게 헤어짐을 고했던 것 같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여자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은서는 자신을 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승아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잔뜩 위축되어 있는 은서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일단 가. 집에 못 데려다줘서 미안하다.”

지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가라고.”

은서는 우물쭈물거리다 작게 목소리를 냈다.

“저는…… 여자 친구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은서는 내내 혼란스러웠던 삼자대면을 되새겼다.

서럽게 우는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원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답지 않게 곤란해하던 차강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은서의 역할은 악역이었다. 흔한 통속극에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남자를 탐내는 욕심 많은 조연 말이다.

눈가 주변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자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리면서 바지 위로 동그란 자국이 그려졌다.

‘내가 아주 많이 원망스럽겠지.’

저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못난 짝사랑을 들키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맞선을 주선하는 일은 없었을 테지. 그럼 두 사람은 여전히 잘 사귀고 있었을 것이고…….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인과 헤어져야 했던 차강혁이 안쓰럽고, 악에 받쳐 울던 민승아가 가련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 악역 행세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 * *

승아는 건물이 떠나가라 크고 격하게 울어 댔지만 차강혁은 그녀를 달래 주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울음소리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는 냉수를 커피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울다가 지치고 갈증도 심했던 승아는 냉수를 무슨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민승아, 이름에 빨간 줄 그이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거 주거 침입죄라고.”

“오빠가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안 해 줬잖아. 어쩔 수 없었어…….”

그는 기막히다는 식으로 숨을 내뱉었다.

“도어록 비밀번호는 무슨 수로 알아낸 거지?”

“오빠가 비번 누를 때…… 슬쩍 봤다가 외워 놨어.”

“정신 나갔군.”

차강혁은 여자를 만날 때 주로 오피스텔을 이용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는 매스컴을 여러 번 타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젊은 기업가였다. 그리고 설령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도, 수려한 외모와 강한 인상, 큰 체구 덕분에 사람들은 자연히 그에게 주목하고는 했다.

더군다나 최근 엔조이 상대는 신인 모델 민승아였으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생각해 보면, 유은서는 지극히도 예외적이었다.

최 실장에게 지시해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공연을 예매했다는 건 그만큼 은서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증거였고, 또 은서와의 관계를 대중들이 알아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오피스텔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승아는 삼엄한 경비를 뚫는 것이 별다르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삼우조선 차강혁 사장님 여자 친구인 거 다들 알고 계시죠?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려고 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하지 말고 몰래 통과시켜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더니, 보안 요원들끼리 모여 잠시 회의를 한 후 승아를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다음엔 곁눈질로 훔쳐봤던 도어록 비번을 띡띡 누르고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었고.

“이제 다 울었으면 여기서 나가라.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질척거리는 엔조이 상대에게 장단을 맞춰 줄 의향 따위는 일절 없다는 말투였다.

“너무해, 정말…….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이렇게 차갑게 구는 거야?”

승아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그는 귀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미 끝난 사이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아직 오빠랑 끝나지 않았어. 끝낼 수 없다고……. 오빠, 정말 그 여자랑 결혼할 거야?”

“유은서가 원한다면.”

“오빠!”

“민승아, 내가 항상 너한테 말했지. 너랑은 진지하게 만날 생각도 길게 만날 생각도 없다고.”

“오빠…….”

“내가 너랑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만난 기간은 석 달밖에 되지 않았고, 가뜩이나 만나는 주기는 턱없이 길어서 석 달 동안 일곱 번밖에 보지 못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별 볼 일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아가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는 건,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차강혁은 단연코 최고의 남자니까.

외모, 두뇌, 재력, 능력, 체격 등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남자였고, 무미건조한 성격도 얼마든지 매력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드는 남자였다.

승아는 어떻게든 그를 가지려고 매사 최선을 다했다.

외모도 항상 공들여서 최상으로 꾸미고, 요리도 배우고, 성질도 죽였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너랑 사랑 놀음 따위 할 생각 없으니까 그딴 역겨운 말 다신 입에도 올리지 마.’라는 차가운 응수였지만.

“오빠, 나는 오빠 정말 많이 사랑해……. 이대로 놓을 수 없어.”

“사랑? 제발 그 헛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나? 너한테서 그딴 말 들을 때마다 속이 역해진다고.”

“오빠…….”

“맞선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끝낼 참이었어. 재미나 보려고 만났는데, 넌 재미가 하나도 없었거든.”

그는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승아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어리광 받아 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신 찾아오지 마라.”

“오빠, 이러지 마. 내가 잘할게. 내가 잘할 테니까, 제발…….”

승아는 엉엉 울면서 그의 팔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이런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또 이런 남자를 찾는단 말인가.

돈 많은 남자는 흔해도, 돈도 많고 잘생겼고 몸까지 훌륭한 남자는 흔하지 않았다. 날고 기는 재벌 남자들 여럿 만나 보았지만, 차강혁처럼 섹시한 수컷은 생전 처음이었다.

“오빠, 그 여자랑 결혼할 거면 해…….”

승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음을 굳게 먹은 듯 결연하게 말했다.

“대신 나랑은 계속 만나자. 그 여자 몰래 만나면 되잖아. 재벌 남자들은 다 그러잖아. 부인 두고 다른 여자 만나고, 다 그런 거 아니야?”

차강혁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첩 자리라도 좋았다. 하지만 얄팍한 설득은 그의 눈빛을 더욱더 잔인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칼끝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눈동자에는 차디찬 경멸마저 배어 있었다.

“네 헛소리 듣고 있는 거 거북하다.”

“오빠…….”

“네 발로 나갈래, 아니면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갈래?”

“…….”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 폭발하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살기가 번들거리는 서슬 퍼런 안광은 그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위압적인 아우라에 완벽하게 짓눌린 승아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극점처럼 선득한 한기가 얼음 폭풍처럼 몸을 덮치고, 숨 막히는 공포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살갗 위로 닭살이 오스스 돋았다.

“오빠…….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어.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꼭 연락 줘.”

그 말을 끝으로 승아는 그의 팔목을 놓고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수 없었다. 여기서 선을 넘었다가는 정말로 도살장의 개 취급을 당할 터였으니까.

그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고는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욕실 문이 쾅, 과격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승아는 현관문 앞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그녀는 도어 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다 힘없이 손을 놓아 버렸다.

이제 나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오, 씨발!”

승아는 철제문에 이마를 박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상스러운 욕설을 지껄였다. 오늘 그의 생일을 챙겨 주면서 살살 구슬려 볼 계획이었는데, 도리어 화만 돋우고 말았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야 차강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고심하는데 순간, 뇌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면서 섬광이 번쩍 타올랐다.

「유은서가 원한다면.」

결혼을 할 거냐는 질문에 차강혁은 그 여자가 원하면 하겠다고 했다. 그럼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면 결국 끝이잖아?’

승아는 살금살금 걸어서 다시 거실로 되돌아갔다. 욕실 문 너머로는 거센 물줄기 소리가 들렸고, 커피 테이블 위에는 그의 휴대폰이 있었다.

승아는 휴대폰을 재빠르게 집어 들었다.

“이름이 유은서라고 했지.”

검색하니까 바로 연락처가 떴다. 승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지난밤 사건의 충격으로 우울감에 풍덩 빠져 있던 은서는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차강혁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좋으니까 그가 연락을 해 주길 바랐는데, 야속하게도 벨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은서는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며 의미 없이 눈을 깜박거렸다. 스튜디오로 갈 의지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시체처럼 누워서 허황된 공상에나 빠져 있을 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어.’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작은언니의 결혼식 날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로 돌아가서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리셉션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파티에만 가지 않았다면 내가 차강혁에게 반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어리석은 짝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모두들 괜찮았을 것이다. 그도, 그녀도, 그리고 나도. 다들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는 일은 없었겠지…….

지난날을 후회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내내 무기력하고 누워 있던 은서는 스프링이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혹시, 차강혁일까?’

기대감을 품고 협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액정에 뜨는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은서는 출처 모를 번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 전화는 받아야 한다는 직감이 들어서 통화를 연결했다.

-유은서 씨 휴대폰 맞나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상대방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네……. 누구신가요?”

-나예요. 민승아.

은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직감이 꽝이다. 이 전화는 안 받는 편이 좋았을 텐데.

-우리 좀 만나죠.

* * *

은서는 자주 가는 레스토랑으로 민승아를 불렀다. 테이블마다 방으로 나뉘어 있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좋은 곳이었다.

민승아는 약속한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지각을 했지만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승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와인을 맥주처럼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한껏 꼬인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부자라서 좋겠네요.”

“네?”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을 약속 장소로 잡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중무장을 하고 나왔잖아요. 나를 기죽이려는 의도 아닌가요?”

“아,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요. 혹시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해요.”

정중한 사과에 민승아는 입매를 비틀면서 은서가 가소롭다는 듯 대놓고 비웃었다.

‘어제도 죄송하다며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더니, 오늘도 쭉 저자세구나.’

승아는 마주 앉은 은서를 위에서 아래로 빤히 훑어보았다.

미인이었다. 뽀얀 피부에 풍성하고 윤기가 도는 긴 머리칼,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제법 고왔다. 맑고 청초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몸매는 청순한 얼굴과는 상반되게 야한 스타일이었다. 아담한 체구,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통통한 허벅지, 가느다란 발목이 남자들의 색욕을 실컷 자극할 것이 틀림없었다.

성격은 순진한 얼굴처럼 여리여리하고 유순한 듯했다.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겁이 많고 유약해 보였다.

‘차강혁의 맞선 상대가 이런 타입일 줄이야. 재벌 집 딸이라고 해서 매스컴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한 인상에 오만방자하게 갑질이나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 보니 이건 뭐 순둥이가 따로 없었다. 이런 여자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근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오빠가 잠든 사이에 휴대폰을 살짝 봤어요. 어제 아주 격렬한 밤을 보냈더니 정신없이 자더라구요. 재회의 섹스가 훨씬 더 짜릿한 거 잘 알고 계시죠?”

승아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쳤다.

하지만 우습게도 은서는 그 말에 홀랑 속아 버렸다. 무릎 위로 주먹을 굳게 말아 쥔다. 작은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불편한 삼각관계에서 자신이 악역이라는 사실을 은서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감정이 순식간에 증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저를 먼저 보내 놓고 차강혁이 민승아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서부터 질투와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뭔가요?”

“왜겠어요? 그쪽은 우리 오빠랑 잤나요?”

“그런 질문, 불쾌하군요.”

“안 잤나 보네. 아니, 못 잤다는 게 맞으려나.”

승아는 얄밉게 비식거렸다.

“오빠랑 맞선 본 지 벌써 한 달도 더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오빠랑 못 잔 거예요? 세상에, 어찌나 매력이 없으면…….”

승아가 혀를 쯧쯧거리면서 찼다.

실로 유치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 유치한 공격은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고속으로 날아 들어와 은서의 심장에 퍽 명중시켰다.

“그쪽은 우리 오빠 타입이 아니에요.”

승아는 확고한 어조로 단정했다.

“성격도, 외모도, 모두 오빠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죠. 내가 그쪽에 대해서 좀 알아봤는데, 직업이 화가라면서요? 무능력해서 아버지 회사에는 못 들어가고 그림이나 그리고 있나 봐요?”

무례한 언사에 열이 바짝 오른 은서는 이 자리를 그냥 박차고 나가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승아의 사랑을 방해했다는 죄책감이 분노보다 조금 더 컸다. 은서는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리를 꾹 지켰다.

“전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림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구요.”

“무능력한 건 아니고 한량이다? 아니면, 나중에 나이 먹고 미술관 차리려고 그러는 거예요? 미술관 통해서 검은돈도 움직이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돈세탁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은서는 대답하기에 앞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마른 목을 축이고 정돈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승아 씨, 모욕적인 말은 삼가 주세요. 저 때문에 강혁 씨와 헤어지게 된 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승아 씨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진심인가요? 미안하다는 말.”

“네. 진심이에요.”

“그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세요. 그쪽이 말하는 진심이라는 걸.”

“……네?”

“물러나세요.”

승아의 입술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방금 말했다시피 우리 오빠는 그쪽 같은 타입 안 좋아해요. 오빠는 유유자적하면서 예술이나 즐기는 한량보다는 나처럼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좋아한다고요.”

“…….”

“명품으로 치장한 여자보다는 나처럼 브랜드가 없는 옷도 명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여자를 좋아하고, 그쪽처럼 창백하게 하얀 여자보다는 나처럼 건강한 타입을 좋아하죠.”

“…….”

“그쪽처럼 아담한 여자보다는 나처럼 시원시원하게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하고, 그쪽처럼 얌전한 여자보다는 나처럼 활발한 여자를 좋아해요.”

구구절절 유치하게 늘어놓는 말에 은서는 반박할 생각조차 못 했다. 민승아의 말은 모두 옳게 들렸으므로.

어떻게 봐도 저보다 민승아가 차강혁과 더 잘 어울렸다.

“오빠가 장남이라서 집안과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해요. 맞선을 본 것도 그 책임감 때문이죠. 삼우조선의 사장이 나처럼 평범한 집안의 딸보다는 그쪽 같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게 훨씬 얻는 게 많을 테니까.”

“…….”

“오빠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만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만남을 지속한다고 해서 그쪽을 좋아하게 되는 일 따위도 없을 거고요. 그쪽은 오빠가 완전히 싫어하는 타입인 데다,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

“어젯밤에 오빠가 왜 그쪽을 먼저 보냈겠어요? 날 사랑하니까, 그쪽을 일찌감치 보내고 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죠. 어젯밤, 우린 세 번이나 했어요. 그쪽은 꿈도 못 꿀 일이죠.”

“…….”

“이봐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불행한 결혼이 될 텐데 굳이 감수하고 싶은 거예요?”

“…….”

은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는 엄격하게 말하고 있었다. 조연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최선이라고.

* * *

재즈 바의 조명은 늘 그렇듯이 어두웠다.

무대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애절한 음색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은서는 칵테일을 들이켜다가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제는 훼방꾼이었지만 오늘은 실연당한 여자였다.

「그쪽은 우리 오빠 타입 아니에요. 성격도, 외모도, 모두 오빠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죠.」

「어젯밤에 오빠가 왜 그쪽을 먼저 보냈겠어요? 날 사랑하니까, 그쪽을 일찌감치 보내고 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실연의 슬픔 사이로 민승아의 목소리가 악령처럼 되살아나 가슴을 잔인하게 할퀴었다.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면서 얼굴을 촉촉하게 적신다.

내가 비켜나 주는 게 당연한 일인데, 왜 이리도 받아들이기가 힘든 걸까.

차강혁이 나를 손톱만큼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차강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왜 이다지도 아픈 걸까.

30대가 되면 여유도 생기고 의연해져서 사랑 때문에 우는 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저는 미숙하기만 해서 한낱 사랑 때문에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은서는 눈물을 삼키고 술을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때, 재즈 바로 들어온 한 남자가 은서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함께 어울리던 무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은서에게 다가갔다.

“누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은서는 젖은 얼굴로 남자를 올려 보았다. 흐린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 우현이네…….”

“왜 혼자서 마시고 있어?”

우현은 바텐더에게 마티니를 주문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누나, 이런 곳에서 여자 혼자 술 마시면 위험해. 질 나쁜 놈들이 치근덕거리기 일쑤라고.”

“하아, 맞아. 질 나쁜 남자들 아니고서는…… 나한테 관심이 없겠지? 멀쩡한 남자는…… 나한테 흥미 없을 거야, 그치?”

은서는 한숨을 내쉬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주절거렸다. 우현이 이맛살을 구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되게 매력 없는 타입이지?”

“뭐?”

“남자들은…… 나 같은 타입, 안 좋아하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혹시, 맞선 본 남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자식이 누나한테 뭐라고 했어?”

은서는 배시시 웃었다. 술주정뱅이다운 모습이었다. 울었다가 웃기도 했다가.

“우현아, 나는 사랑 같은 거…… 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

믿었던 첫사랑은 내 흉터를 보고 실망했다. 윤종하는 나를 다짜고짜 호텔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리고 차강혁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사랑과 인연이 없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좋은 남자 많아. 맞선남이랑 잘 안 됐으면 다른 놈 찾아가면 그만이지, 그놈이 뭐라고 누나가 울어? 누나, 엄청나게 매력 있어! 누나가 우리 누나 친구만 아니었으면 내가 벌써 들이댔을걸?”

우현이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 주었다. 변변찮은 위로에 은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데도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 * *

자정이 지난 시각, 은서는 휘청휘청 형편없는 걸음걸이로 집에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는 유 회장과 신 여사가 앉아 있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가가 늦는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서는 부모님을 마주 보고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은서야,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누구랑 마신 거야?”

신 여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우리 딸, 무슨 일 있었어?”

연락 없이 늦은 은서에게 호통을 치려던 유 회장도, 술에 잔뜩 취한 막내딸의 모습을 보자 얼굴에 걱정이 만연해졌다.

“엄마, 아빠…….”

은서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 이제…… 차 사장님 안 만날 거예요. 완전히 끝났으니까…… 엄마, 아빠도 기대 접으세요.”

“아니, 왜? 차 사장이랑 싸웠어?”

유 회장의 물음에 은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 남자와 싸울 군번이나 되던가. 싸움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 사람…… 여자 친구가 있어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구요.”

눈물이 또 왈칵 흘러내렸다. 재즈 바에서 그토록 울었는데도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 * *

한남동에 위치한 전통적이고 예스러운 한식당의 VIP룸, 유 회장은 널따란 테이블 앞에 앉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차강혁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껏 경직된 분위기였다. 무거운 긴장감이 룸 안을 채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맛깔스러운 음식들로 가득했지만, 두 남자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 우리 은서랑 선을 본 건가?”

유 회장이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강혁은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시니컬한 미소였다. 여자 친구라니. 지나치게 거창한 단어다. 그는 민승아를 단 한 번도 ‘여자 친구’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맞선 보기 전에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 회장의 워딩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어른 앞에서 ‘민승아는 단지 엔조이 상대였고, 재미가 전혀 없어서 맞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끝낼 작정이었습니다.’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리했다면서, 왜 우리 은서는 자네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는 건가?”

“미련이 남은 건지 그 친구가 무작정 저희 집으로 찾아와 은서 씨와 마주쳤습니다. 그 일로 은서 씨가 오해를 한 것 같고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맞아, 자네 불찰이야. 끝을 내려면 제대로 끝을 냈어야지.”

유 회장은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근사하게 빚어진 도자기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차강혁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유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잔에 전통술을 따랐다. 술이 흘러가는 소리가 제법 맑았다.

술로 목을 적당히 축인 유 회장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부탁이니 제발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 자네는 그 여자에게 미련이 없는 건가?”

“없습니다.”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확고한 말투처럼 미련 따위는 없었다. 민승아와는 스치듯 만난 것뿐, 미련 따위를 남길 만큼 대단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민승아에게 차강혁이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최고의 남자였다면, 차강혁에게 민승아란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진심인가? 우리 은서 말로는 자네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던데?”

그는 미간을 진하게 찌푸렸다.

‘여자 친구에 사랑까지.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유은서, 정말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군.’

사랑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그는 민승아뿐만 아니라 그 어느 여자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라…….’

그에게 사랑이란 뜬구름처럼 멀리 있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여자와 그런 간지러운 장난질을 치기에 그의 심장은 너무도 차갑고 딱딱했다. 그의 심장을 뜨겁게 불태울 수 있는 건 여자도 사랑도 아니고, 오직 성공과 야망뿐이었다.

“은서 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깊은 사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우리 은서가 착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네. 오해고 착각입니다. 그날, 우연히 마주치고 은서 씨가 많이 당황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흠…….”

유 회장은 숨을 깊게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차강혁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전에 만나던 여자와는 일찌감치 정리를 했고 미련도 없다면, 굳이 일이 틀어질 필요는 없을 텐데.’

유 회장은 예리한 눈길로 그를 뜯어보았다. 검게 빛나는 눈이, 견고한 어조가, 당당한 태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의 공백 후, 유 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차 회장 말로는 자네가 우리 은서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군. 자네 뜻이 맞는가? 차 회장이 강권하는 건 아니고?”

“제 뜻입니다. 은서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결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고민 따위는 일절 없어 보였다.

유 회장은 그의 강고한 모습을 곧게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내 딸을 사랑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도를 넘는 정직함에 유 회장은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허허 웃었다.

“하긴, 너무 섣부른 질문이었지. 맞선 본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됐으니까. 하지만 자네, 지나치게 솔직했어.”

이런 상황에서도 입에 발린 거짓말은 하지 못하는 차강혁이 어이없으면서도 꼭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앞에서 굽실거리며 아첨을 떨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 갔다. 처음 유 회장을 사로잡았던 패기 넘치고 호기롭던 차강혁, 그 모습 그 자체여서.

“그럼 다시 묻겠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우리 은서랑 결혼하려는 건가?”

“저는 사랑 안 믿습니다. 그건 너무 추상적인 관념이니까요. 대신 제 안목을 믿죠. 은서 씨는 좋은 여자고, 은서 씨라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은 끝까지 함께 갈 여자를 찾는 거니까요. 사랑 같은 찰나의 감정에 빠져서 충동적으로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향한 실소를 내뱉었다.

유은서가 좋은 여자라고? 아니, 차강혁에게 있어서 유은서란 그저 ‘안고 싶은 여자’일 뿐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다. 이 여자가 달갑지 않은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율배반적이게도 그녀를 안고 싶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밑에 무력하게 깔려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순백처럼 하얀 몸 위로 낙인을 찍고 싶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고, 걷지 못해 앙금앙금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눈망울을 색에 흠뻑 취하게 만들고 싶고, 조그만 입술이 예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을 물고 빠는 것을 보고 싶었다.

더럽히고 싶고, 망가뜨리고 싶다. 울게 하고 싶고, 육욕에 침몰시키고 싶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폭압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이었다.

그 좆같은 본능이 일을 이 지경까지 이끈 것이다.

한편, 유 회장은 턱을 매만지며 그의 말을 차근차근 곱씹어 보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인즉, 우리 은서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인가?”

“은서 씨를 제 아내로 맞이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결연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 결연한 대답을 한 남자는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강해 보였다.

빠질 게 없는 남자였다. 비상한 두뇌, 출중한 능력,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강렬한 카리스마로 직원들을 이끄는 리더십까지.

사윗감으로 탐이 나는 남자다.

감상적으로 사랑 타령이나 하는 애송이들보다야 완고하고 담백하게 은서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유능한 차강혁이, 유 회장의 심금을 세차게 울렸다.

이 결혼을 일종의 비즈니스로 보고 있는 건 차강혁뿐만이 아니었다. 유 회장도 결국엔 사업가였다. 계산기를 다 두드려 보고 이 맞선을 진행시킨 것이다.

추락하던 삼우조선을 각성시키고 화려하게 날아오르게 만든 차강혁의 미래는 누구보다도 밝았고, 그런 남자를 유성중공업의 사위로 들이는 건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은서가 술을 흥청망청 마시고 엉엉 울 정도로 좋아하는 남자였다.

유 회장은 어릴 때부터 은서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손에 쥐게 해 주었다. 남자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딸애가 원하고 좋아하는 남자라면, 기꺼이 가지게 해 줄 것이다.

유 회장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네를 믿어 보겠네. 다시는 실망시키지 말게.”

* * *

유 회장은 불씨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막내딸의 결혼 생활이 무탈하려면 불씨는 아예 없애 버리는 게 좋았다.

유 회장은 민승아의 집을 찾아갔다. 깜짝 놀라는 승아에게 유 회장은 정중하게 본인 소개를 하고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승아는 유 회장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자그마한 원룸은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소파가 없어서 스툴을 끌고 왔다.

“여기 앉으세요. 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회장님.”

“그럼 내가 말을 놓도록 하지.”

유 회장은 인자하게 웃었다.

온화한 인상에 베이지색 면바지에 회색 점퍼를 걸친 유 회장의 모습은 지극히도 평범해 보였다. 동네 마실이나 나온 한가로운 60대 후반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회장이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평범한 척을 해도 속으로는 매구가 수천 마리쯤은 드글거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승아는 바짝 긴장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무슨 꿍꿍이로 이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혹시, 그 여자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내가 막말을 쏟아부었다고 일러바치기라도 한 걸까?

“아가씨 직업이 모델이라고 들었는데.”

“네. 데뷔한 지 이제 1년쯤 되었어요.”

“모델들이 꿈으로 생각하는 무대가 뉴욕 패션 위크라고 하던데,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나?”

“그렇죠. 뉴욕 패션 위크는 모델들 중에서도 탑 모델만 서는 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면서도 승아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잔뜩 그려졌다. 느닷없이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아가씨 꿈도 그건가? 뉴욕 패션 위크에 서는 거 말이야.”

“네.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잖아요. 지금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뉴욕으로 가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 같은 인재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떤가. 뉴욕으로 가서 커리어를 키워 볼 생각은 없나?”

“저야 가고 싶죠. 근데 뉴욕이 무슨 동네 맛집도 아니고 마음만 먹는다고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밑천이 있어야 가죠.”

구구절절한 푸념에 유 회장이 살짝 입매를 끌어 올리고 흰 봉투를 내밀었다. 동시에 승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무수한 물음표는 일제히 느낌표로 바뀌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완료됐다. 대기업 회장이 친히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그리고 난데없이 진로 상담을 한 이유를.

“기분 나빠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나는 돕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뉴욕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아가씨 말대로 밑천이 필요하잖나.”

승아의 시선이 레이저처럼 돈 봉투에 착 꽂혀 들어갔다. 저 봉투 안에는 돈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저, 회장님. 봉투 좀 잠깐 열어 봐도 될까요?”

유 회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승아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봉투를 잡아채서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우와!”

금액을 확인하는 순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촌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거액 앞에서는 누구든 촌스럽게 굴 것이었다.

수표는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0이 많이 붙어 있는 수표는 생전 처음이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거액의 돈에 머리가 빙그르르 돌면서 현기증까지 일었다.

“그 정도면 뉴욕에서 지내는 경비로는 충분할 것 같은가?”

“네. 완전 충분하죠!”

승아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뺨까지 발갛게 상기되었다.

“내가 아가씨를 도와주었으니, 이제 아가씨도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안 만날게요! 저 당장 뉴욕으로 떠나서 강혁 오빠 다시는 안 만날게요!”

유 회장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승아는 성급하게 선수를 쳤다.

은서에게 모진 모욕을 쏟아부으며 물러서라고 일갈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나선 만큼 결혼을 어그러뜨리는 건 녹록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차강혁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고.

그렇다면 차라리 돈이나 받고 훌훌 떠나는 게 이득이었다.

“근데 회장님…… 저, 두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편히 말해보게.”

“저는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뉴욕으로 떠날게요. 그런데 그 전에, 강혁 오빠 딱 한 번만 만날게요. 깔끔하게 이별하고 싶어서 그래요. 인사만 할 거니까 1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유 회장은 턱을 슬슬 매만지며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좋아.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회장님, 저 돈 받은 거 강혁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 앞에서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거든요.”

“알겠네.”

“감사합니다!”

승아가 신나게 소리를 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찌나 크게 숙였는지 머리카락이 다 흩어져 산발이 되었다.

* * *

그날 밤, 차강혁은 바이어와 미팅 겸 가볍게 술을 마시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대리석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민승아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말라고.”

그의 목소리엔 짜증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얼굴에도 귀찮음이 가득했다.

“오빠, 너무 화내지 마. 마지막으로 찾아온 거니까. 나…… 곧 있으면 뉴욕으로 떠난단 말이야.”

“뉴욕?”

“오빠, 나 오늘…… 엄청나게 황당한 일 겪었다.”

승아는 갑자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를 입은 듯 눈동자는 물기로 촉촉해졌다.

늦은 밤에 승아가 차강혁을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헤어짐의 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승아는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던 여자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안타까운 여자로 기억되고 싶었다.

“오늘 우리 집으로 그 언니 아버지가 찾아왔어. 오빠가 맞선 본 여자의 아버지 말이야.”

일순, 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나한테 무작정 돈 봉투부터 내던지시더라. 어디 해외로 멀리멀리 떠나서 죽은 듯이 살라고. 다시는 오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내가 얼마나 서럽던지……. 자존심이 막 구겨지는 거 있지. 나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딸인데…….”

승아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혹시라도 영화나 드라마에 캐스팅이 될까 간간이 연기 수업을 받았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돈 많은 사람들은 다 그런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걸까? 내가 분수도 모르고 오빠를 넘본 죄치고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사를 막힘없이 술술 읊으면서 승아는 모델 일뿐만 아니라 연기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속으로 자찬했다.

“심장이 막 깨지는 것 같았어. 속상해서 화내고 싶었어. 그런데 아무리 내 마음이 아파도 그러면 안 되잖아……. 어르신께 예의를 지켜야지.”

승아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꼭 짚었다. 심장이 미어진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연기를 잘하려면 행동 묘사도 중요하니까.

“죄송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거절했어. 대신, 회장님 소원대로 멀리멀리 떠나고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뉴욕으로 떠나겠다고?”

“응……. 이참에 나, 뉴욕으로 가서 성공할 거야. 모델로 성공을 해야 오늘 당한 수모를 깨끗이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눈물로 얼굴이 흠뻑 젖어 있는 승아에게 티슈를 건네주었다.

승아는 티슈를 받아들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톡톡 애처롭게 찍었다. 연기가 잘 먹혀든 것 같다며 속으로 자신하고 있을 때였다.

냉담한 목소리가 청각을 무신경하게 툭 찔러 왔다.

“잘됐군. 가서 열심히 해 봐. 가라, 이제.”

하마터면 승아는 욕을 할 뻔했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구슬프게 우는데, 거기다 대고 매정하게 가라고 해?

한없이 차가운 그의 태도에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졌지만, 승아는 금세 감정선을 잡고 다시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 갈게. 오빠 잘 지내…….”

가라고 하는데 안 가고 버티고 있으면 역효과만 날 것이었다. 승아는 아쉬웠지만 천천히 등을 보이고 걸었다.

최대한 아련하고 쓸쓸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그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각인될 수 있도록 안타깝고 애틋해 보이게.

물론 효과는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 * *

같은 밤, 유 회장이 은서의 방문을 노크했다.

“은서야, 아빠가 좀 들어갈게.”

유 회장은 다정하게 말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은서는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유 회장의 등장에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밥도 안 챙겨 먹고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

유 회장은 부쩍 야윈 얼굴을 보고 탄식하듯 혀를 찼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초췌해진 막내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별로 입맛이 없어요.”

실연의 주요 증상이다. 사랑을 잃으면 본능적인 욕구마저 사그라들고 만다.

“은서야, 이제 그만 아파해도 돼. 아빠가 다 해결했단다.”

해결? 선뜻 이해되지 않는 말에 은서가 미간을 좁혔다.

“아빠가 차 사장을 만나서 물어봤더니, 네가 오해한 거란다. 여자 친구랑은 진즉에 헤어졌고 남은 감정도 없대. 그날, 그 아가씨가 일방적으로 찾아온 것뿐이래.”

“아빠……. 아빠가 왜 강혁 씨를 만나서 그런 걸 물어봐요?”

은서의 얼굴이 울상으로 이지러졌다.

“내 딸 일이니까 그러지! 은서 네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끙끙 앓고만 있는데, 애비가 되어서 손 놓고 있으란 말이냐?”

유 회장은 언성을 높이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은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버지 앞에서 차강혁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그 아가씨는 뉴욕으로 떠나기로 했다. 다시는 차 사장을 만나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약속도 했으니, 이제 걱정할 것 하나 없다고.”

“뭐라구요?”

은서의 얼굴엔 이제 경악이 만연해졌다.

“아빠, 승아 씨도 만났어요? 만나서 대체 무슨 이야길 하신 거예요?”

“별 얘기 안 했다. 그냥 직업이 모델이라길래 기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게 좋을 듯해서, 뉴욕으로 떠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기만 했을 뿐이야. 밑천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그 아가씨가 자존심이 센 모양인지 그건 거절하더라.”

“아빠!”

은서는 고막이 쟁쟁해질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은서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아빠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은서가 울먹거렸다. 차강혁을 만나서 압박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 민승아를 만나 그런 잔인한 짓까지 하다니…….

아버지가 흔하디흔한 재벌들처럼 교만하게 위력을 뽐냈다는 사실에 은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게 더 너를 위해서 한 일이야! 그 아가씨도 별 불만 없이 뉴욕으로 간다고 했어. 원래 꿈이 뉴욕에서 활동하는 거였다더라. 다 깔끔하게 정리가 됐으니 질질 끌지 말고 어서 차 사장이랑 결혼 진행하도록 해라.”

“아빠……. 저는 강혁 씨랑 결혼 안 해요.”

“잔말 말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 은서 너, 차 사장 많이 좋아하잖니. 차 사장이랑 결혼하면 이렇게 울 일도 없어.”

“아빠, 저는 싫어요…….”

“차 사장, 단단하고 강한 사내라 인생을 맡겨도 괜찮을 거다. 밤이 늦었구나. 그럼 이만 쉬어라.”

유 회장은 은서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고 방에서 나갔다.

딸애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는 이유야 뻔했다. 민승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유 회장은 여린 심성 때문에 소중한 막내딸이 좋아하는 남자를 놓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완고하고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것이었다.

한편, 혼자 남은 은서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흐느꼈다.

일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저만 포기하면 되는 일을 괜히 아버지가 들쑤시는 바람에 또 엉망이 되고 만 것이다.

가냘프게 울던 은서는 눈물을 닦아 내고 협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가져와 만지작거렸다. 차강혁의 번호를 빤히 보기만 한다.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사과할까. 아니야, 밤이 너무 늦었어. 괜히 더 화만 돋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사과는 빨리하는 게 좋을 텐데.

확실하게 사과를 하고 내가 어떻게든 결혼을 막아 보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차강혁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고민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마음을 굳게 먹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든 결혼을 막아 볼 테니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하라고. 민승아를 뉴욕으로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단조로운 수화음 끝에 차강혁이 전화를 받았다.

“강혁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은서는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결례를 범하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

-올래?

“네?”

-지금 내 오피스텔로 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야심한 밤에 오피스텔로 오라니…….

-내가 아까 술을 마셔서 직접 데리러 갈 수는 없고, 대신 기사를 보내지.

* * *

은서는 2204호의 두꺼운 철제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몇 번이고 했다. 그가 화가 많이 났을까봐 긴장이 되었다.

초조한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초인종을 눌렀다. 이내 문이 열리고 차강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보던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편안한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모습조차도 근사해서 숨이 턱 막힐 뻔했다.

자연스러운 그의 패션과 달리 은서는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새였다. 며칠 전에 새로 산 옷에 아끼는 클러치백, 꼼꼼한 화장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액세서리까지.

꾸미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차강혁과 유은서의 권력관계는 분명했다.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힘이 없고, 언제나 안간힘을 쓰고, 언제나 불안해서 까치발을 든다.

“들어와.”

그가 말했다.

은서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거실로 가서 어정쩡하게 섰다. 그러자 그는 턱짓으로 기다란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지.”

반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은 은서는 클러치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하고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테이블 위에는 담배와 은색의 지포라이터, 재떨이가 있었다.

‘차강혁이 담배를 피웠던가?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으레 안 피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며 은서는 테이블 바깥쪽에 클러치백을 올려놓았다.

차강혁은 찬장에서 위스키와 잔을 꺼내와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자리도 있는데 그는 굳이 은서의 옆을 차지했다.

심장박동이 쿵쿵거리며 빨라진다. 사랑에 서툰 그녀는 이런 사소한 행동에도 가슴이 가파르게 뛰고는 했다.

“이 오피스텔에 차나 커피 같은 건 없어.”

그는 위스키 병을 열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사과하러 온 것뿐이니까요.”

대단한 대접을 받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아버지의 오만한 행동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결혼을 막아 보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려고 온 것뿐이니, 의례적인 매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극진한 응대를 받을 정도로 반갑거나 귀한 손님도 아니었다. 오히려 눈엣가시에 가깝지.

그는 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은서에게 내밀었다.

“마셔.”

은서는 당황했다. 이 독한 술을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라니.

“전 위스키 못 마셔요. 독해서…….”

손을 내저었지만 차강혁은 잔을 거두지 않았다.

기묘한 안광이 어른거리는 눈은 압박하듯 은서를 겨누고 있었다. 직선으로 거침없이 꽂혀 드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감히 내 명을 거역할 수 있을 것 같아?’

강한 눈빛에 패배한 은서는 하는 수 없이 잔을 받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술을 아주 약간만 넘겼다.

미량임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이 탈 것 같았다. 얼굴이며 가슴이며 온몸으로 열이 확 끼치고 뜨거워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가 남아 있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오더니 잔을 날렵하게 채어 갔다.

그는 은서가 남긴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삼켰다. 깨끗하게 빈 잔을 그는 다시 술로 채운다. 그리고 이번에도 은서에게 내밀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검은 눈 위에서 빛나는 안광은 여전히 팽팽했다.

은서는 결국 반항하지 못하고 술을 조금 마셨다.

“강혁 씨, 제가 여기 온 건 술을 마시려고 온 게 아니구요…….”

“무슨 사과를 하고 싶은 건데?”

그가 말을 자르고 불쑥 물었다.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말투였다.

“저희 아버지께서 무례하게 행동하셨어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다 제 잘못이에요……. 저 때문에 강혁 씨에게도 승아 씨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요. 미안해요.”

은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붉은색 불빛이 담배 끝을 서서히 태운다. 그는 담배를 빨고 한숨 쉬듯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공중을 배회하듯 떠돌았다.

“이해가 안 가는군. 우리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 아니었나?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유 회장님을 끌어들인 거지? 너라는 여자는 자아도 없는 건가?”

“……죄송해요.”

“하긴, 넌 스스로 하는 게 없지. 곱게 자라서 운전도 제 손으로 안 하는 여자니까. 남자가 치근덕거려도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하고, 나한테 반했어도 직접 나서는 대신 유 회장님께 부탁해서 시시한 맞선 자리나 만들었지. 당연히 이번 일도 유 회장님께 달려가 처리해 달라고 떼쓰는 쪽이 훨씬 쉬웠을 거야.”

그는 한참을 오해하고 있었다. 맞선도 이번 일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졌는데. 저는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하지만 은서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한다고 한들 그가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너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야.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귀찮고 지저분한 일들은 죄다 남한테 미루면서 교양 있는 척한다고 바쁘잖아.”

그는 담배 연기를 후 불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화살촉 같은 말들을.

“그렇게 귀하고 귀한 공주님께서 어쩌다 나 같은 놈한테 반하게 되었는지 실로 의문스럽군.”

차디찬 비소에 은서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그가 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폐부를 찌르며 아릿한 상처를 남겼다.

그가 저를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으니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것도 제 단점이자 콤플렉스를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질색이라고 말하다니…….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두 언니들에 반해, 은서는 매사가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웠다. 기질적으로 내향적인 성향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입원 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은서는 자존감도 낮은 편이었고 늘 남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종종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유 회장이 여린 막내딸 은서를 유독 챙기는 것도 어쩌면 지당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은서는 벌써 큰일을 당하고도 남았으리라.

은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든든한 우산 아래서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다. 우산 속은 안전했지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콤플렉스였다. 나약하고 의존적인 성향과 그로 인한 아버지의 비호는 은서의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나도 알아요. 강혁 씨가 나 싫어하는 거…….”

은서는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곧게 맞대었다. 마지막은 당당하게 눈을 맞추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안간힘을 쓰고 겨우 참아 냈다. 눈물을 보이면 이 남자는 나를 또 비웃을 테니.

“나도 이런 내가 싫은데, 강혁 씨는 오죽하겠어요.”

아버지가 저를 차강혁과 결혼시키려는 의중은 뻔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든든한 우산’ 역할을 이제 이 남자에게 떠넘겨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차강혁은 그 역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 역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차강혁 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

굳은 결의가 그대로 전달되도록 은서는 단어 하나에 또박또박 힘주어서 말했다.

“이 결혼, 제가 꼭 막을게요. 그러니까…… 승아 씨도 뉴욕으로 떠날 필요 없어요.”

그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끌어 올리더니 담배를 깊숙이 빨고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짧아진 꽁초를 짜증 섞인 손길로 비벼 껐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바쁜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서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손목이 붙들렸다. 그는 거센 악력으로 손목을 움켜쥐어 은서를 다시 소파에 주저앉혔다.

“너, 내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했구나.”

음산한 목소리가 달팽이관으로 걸쳐졌다.

“유은서, 결혼은 무조건 하는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건 나더러 완전히 엿 먹으라는 뜻 아닌가? 내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다뤘는데.”

“강혁 씨…….”

은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러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질색이라면서 나랑 굳이 결혼을 하겠다고? 대체 왜?

머릿속에 물음표들이 가득 채워질 때였다. 그가 어깨를 툭 밀어 은서를 넘어뜨렸다.

긴 머리칼이 무질서하게 흐트러지고 이제는 머릿속이 아예 텅 비어 버렸다. 위협적인 그의 행동에 사고 회로는 뚝 끊어진 듯했다.

무력하게 쓰러진 몸 위에 올라탄 그는 무릎으로 은서의 허벅지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흡사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가 발톱으로 피식자의 몸통을 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대화 따윈 통하지도 않으니 집어치우는 게 낫겠군.”

“…….”

“유은서, 네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었지. 다음번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

“내가 너랑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은서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전신이 달달 떨렸다.

그는 입매를 묘하게 끌어 올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위험하게 느껴졌다.

“궁금해.”

“…….”

“네가 내 밑에서 어떻게 굴지.”

“…….”

“유 회장님께 고자질을 할 때처럼 수동적일지, 아니면 의외로 허리를 잘 놀릴지, 정말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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