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 *
그는 은서의 뒷목을 사정없이 잡아채고 난폭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새빨간 입술이 맛있는 과육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요하게 빨고 할짝거린다.
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취기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 이 남자가 제 입술을 탐하고 있다는 것이.
꿈일까? 꿈일 수도 있었다. 그와 키스를 하는 앙큼한 꿈을 곧잘 꾸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입술 위로 닿는 그의 입술이 미치도록 부드러웠다.
은서는 눈을 스르륵 감아 버렸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도통 분간할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그와의 키스를 마음껏 느껴 보고 싶었다.
그는 장난을 치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더니, 자연스럽게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탐색하듯 유영했다. 붉은 혀로 입천장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치열을 꼼꼼하게 훑기도 한다.
거칠다가도 느긋하게, 느긋하다가도 거칠게, 그렇게 능숙하게 그녀의 입속을 지배하고 유린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밀폐된 공간 안에는 달뜬 숨소리로 가득 찼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와 시선이 얽혀 들었다. 밤처럼 까만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은서를 겨누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묘한 열기가 보였다. 그 열기를 그대로 마주 보는 것이 버거웠던 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피했다.
“유은서, 너.”
거친 숨소리가 더해진 저음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야릇하게 자극했다.
“다시는 취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그땐 입술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
“널 넘어뜨리고, 네 옷을 찢고, 널 울게 만들 거야.”
“…….”
“그러니까 고루하게 정숙한 여자처럼 굴고 싶다면, 앞으로 내 앞에서 빈틈 따윈 보이지 말라고.”
살벌한 경고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막혀서 무어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은서는 눈만 깜빡거리며 혼란스러워하다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재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그를 피하는 것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 들어오냐는 부모님의 인사에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방으로 피신했다. 문을 쾅 닫고서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심장은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긴박하게 날뛰고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마치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기만 했다.
키스의 여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은서는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이 그 키스는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의미였을까? 난데없이 입술을 맞춘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술주정을 부린 것에 대한 복수일까?’
그러나 복수라고 하기에 키스는 너무나도 달콤하지 않은가.
은서는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깊은 밤이 되도록 해답 같은 건 찾아낼 수 없었다.
* * *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이 열렸다.
날이 바뀌었지만 은서는 여전히 어젯밤의 키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다가도 갑작스러웠던 키스를 떠올리며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내가 차강혁과 키스를 하다니…….’
그와 키스를 하는 꿈을 여러 번 꿨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강혁은 제게 관심도 없었으니까.
내내 무심하게만 굴던 사람이 대체 왜 키스를 했는지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유를 막론하고 그 키스는 끝내주게 짜릿했다는 것이다.
환상적이었다. 강렬하고 황홀했다. 난생처음으로 키스를 했을 때보다도, 어젯밤의 키스가 훨씬 더 설레고 두근거렸다. 이전에 했던 키스들이 과연 키스였나 의문이 들 정도로 그와의 키스가 미치도록 좋았다.
뜨겁고도 달콤했던 키스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졌다. 문득,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까? 아니면, 거래처 사람들과 미팅을 하거나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것도 아니면, 바쁜 업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잠깐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은서는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해서 물어볼까.’
지금 뭐 하는지,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그런 사소한 메시지를 보내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 남자에게는 별것 아닌 키스일 텐데, 괜히 혼자 난리가 나서 설레발을 치고 있다는 깨달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키스, 그 남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해 봤을 거야.’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긴다는 말을 쉽게 하는 남자다. 키스쯤은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아마 그건 장난이었을 거야.’
들뜬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뜬구름 위에 있었으니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땅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었다.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알람 소리가 울리면서 액정에 메시지창이 떴다.
은서는 재빠르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차강혁?’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그 기대감은 1초 만에 무참히 무너졌지만 말이다.
발신인은 신우현이었다. 우현은 대화방으로 지현과 은서를 불러들였다.
‘바보같이 무슨 기대를 한 거야.’
자조적으로 웃은 은서는 머리를 가볍게 털고 메시지 내용을 읽었다.
[누나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 휴고 넬슨 콘서트 초대권 생겼는데.]
[나나! 나 갈게!]
우현의 메시지에 지현이 부리나케 답장했다.
휴고 넬슨은 요즘 잘나가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세 사람 모두 좋아하는 아티스트였다.
예고, 예대 동창인 지현은 현재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고, 지현의 두 살 어린 남동생 우현은 작년에 입봉한 영화감독이었다.
다들 예술계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지 취향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영화도 비슷했고,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했다. 아마도 비슷한 취향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으리라.
[휴고 넬슨 콘서트 티켓 몇 달 전에 매진됐다던데, 초대권 어디서 구한 거야?]
지현이 메시지를 이어서 보냈다.
[아는 PD가 줬어.]
[오, 역시 인맥이 최고야. 신우혀니, 간만에 이쁜 짓 좀 하는구나?]
[저녁은 누나가 사라.]
[오키오키, 내가 살게. 공연 몇 시에 시작해?]
[8시.]
[그럼 저녁부터 먹고 볼까?]
남매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은서도 나도 가겠다며 키패드를 눌렀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고 했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토요일 오후 3시, 집 앞으로 데리러 가지.]
간단하고 명료한 문장. 마치 문장에 지문이라도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본론만 전하는 메시지가 실로 차강혁다웠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였지만 은서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런 건조한 연락에도 기꺼이 기뻐할 만큼 은서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섬섬한 손가락이 춤을 추듯 키패드를 누른다. ‘데이트를 신청하는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네요.’라고 썼다가, 이런 뼈 있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싶어 벅벅 지우고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네. 시간 맞춰서 준비할게요.]
그게 끝이었다. 돌아오는 답장 같은 건 없었다.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은서는 그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어 본 다음에야, 남매가 있는 단체 대화방으로 돌아가 메시지를 입력했다.
[난 못 갈 것 같아. 토요일에 약속이 있어서.]
[약속? 그날 데이트하기로 했어?]
[아, 누나 맞선 봤었지.]
지현과 우현이 나란히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은서는 짤막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맞선남이랑 잘 되어가는 모양이네?]
[누나, 데이트는 미루고 같이 공연 보러 가면 안 돼? 휴고 넬슨 언제 또 내한 올지 모르잖아.]
[미리 잡아둔 약속이라서. 선약을 깰 수는 없을 것 같아.]
선약은 무슨. 불과 30초 전에 정해진 약속이었고, 오히려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를 꺼낸 건 우현이었다.
하지만 은서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차강혁과의 데이트를 선택했다. 언제 또 한국으로 올지 모르는 유명한 아티스트의 공연보다, 그와의 만남이 더 기다려지고 소중했기에.
[선약 좀 깨면 어때. 휴고 넬슨 앞에서 그깟 데이트가 대수야?]
[그럼 그럼. 그깟 데이트가 대수지! 저 멀리 무대에서 피아노 치는 남자보다는 내 앞에 있는 현실의 남자가 더 중요하다, 이거야.]
지현이 은서를 두둔했다. 그러자 우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했고, 지현은 그게 왜 말이 안 되냐며 둘이서 이러쿵저러쿵 설전을 벌였다.
[은서 누나, 진짜 안 갈 거야?]
[응.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변함없는 답변에 우현은 징징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누나, 다음에 나한테 그 남자 소개해 줘. 누나가 휴고 넬슨 공연까지 포기하면서 만나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야, 신우현. 네가 뭐라고 끼어들고 그러냐? 은서가 알아서 잘 만나겠지.]
우현의 오지랖에 지현이 타박했다. 하지만 우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은서 누나 순진해서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직접 검증해 봐야지.]
[참나. 야, 너는 은서 말고 나를 좀 챙겨봐라. 내가 남자 만날 때는 그 남자가 불쌍해 죽겠다고 염불을 외더니.]
[누나랑 은서 누나가 같아?]
[다를 건 또 뭔데?]
[다들 그만해. 아직 알아가는 단계일 뿐이니까. 혹시나 진지한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때 다들 소개해 줄게.]
티격태격대는 남매를 향해 은서가 재빨리 메시지를 입력해서 상황을 수습했다.
[그래, 은서야. 데이트 재미있게 해.]
[알겠어.]
이제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우현이 단체 대화방이 아니라 1대1 메시지를 보내왔다.
[은서 누나, 남자는 다 늑대야. 알지? 함부로 맘 주지 말고 항상 조심하면서 만나. 그 남자 만날 때는 늘 경계 모드를 발동하라고.]
기어코 지현 몰래 잔소리를 하는 우현이었다. 은서는 가볍게 웃고 답장을 보냈다.
[조언 새겨들을게. 고마워.]
* * *
그날 밤, 차강혁으로부터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토요일 상영 시간표를 보내왔다.
[보고 싶은 영화 있으면 골라 봐.]
딱딱한 말투에도 가슴이 요동치는 건 왜일까.
액정에 뜬 메시지를 보며 은서는 혼자서 샐샐 웃다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이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 반말을 쓰고 있다는 것을. 어젯밤 키스 후에 불쑥 말을 놓더니, 그 후로 계속 말을 놓고 있었다.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맘대로 말을 놓다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례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차강혁이 저를 좀 더 편하게 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서.
[강혁 씨는 어떤 영화가 보고 싶어요?]
들뜬 마음에 은서도 슬그머니 용기를 냈다. ‘차 사장님’이라는 사무적인 호칭에서 벗어나 ‘강혁 씨’라고 그를 부른 것이다.
메시지를 보내 놓고 심장이 조마조마해졌다. 혹시라도 바뀐 호칭을 그가 탐탁지 않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다.
그가 저보다 세 살이나 많으니 멋대로 ‘강혁 씨’라고 부르면 싫어할 수도 있을 텐데…….
소심하길 타고난 은서는 걱정도 많았다.
[난 어떤 영화든 상관없어.]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봐서는 다행히 그는 새로운 호칭에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도한 은서는 상영작들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런데 딱히 끌리는 영화가 없었다. 죄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조폭 영화들뿐이었다.
[강혁 씨, 우리 영화 말고 오페라 보면 안 될까요?]
고심 끝에 은서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취향에도 안 맞는 폭력적인 영화를 볼 바에는 차라리 명작 오페라를 다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 오페라 제목이 뭔데.]
[《라 보엠》이요.]
그 뒤로 메시지는 뚝 끊겼다. 용건이 끝나면 메시지도 끝나는 것이 차강혁의 스타일이었다.
잘 자라는 형식적인 말이라도 해 주고 끝내면 좋으련만……. 어쩜 이리도 매정한지.
* * *
약속했던 토요일, 오페라 《라 보엠》을 보고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은서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오페라, 재미없었죠?”
《라 보엠》은 은서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였다. 하지만 차강혁은 공연 내내 무감동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세상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예술 쪽은 문외한이라고 했잖아.”
건조한 대답에 후회가 파도처럼 떠밀려 왔다.
어릴 적부터 굉장히 좋아하던 작품이라 함께 보고 싶었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사업가 마인드가 깊게 박힌 남자에게 보헤미안의 삶은 전혀 와닿지 않을 텐데 말이다.
작품 선정을 잘못해도 너무 잘못했다. 차라리 조폭 영화나 볼걸…….
“우리 다음에는…… 강혁 씨가 하고 싶은 거 할까요?”
“난 별로 하고 싶은 거 없어.”
서운할 정도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은서의 어깨가 맥없이 처졌다. 자신과는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는 그의 대답이 절망적으로 들렸다.
대부분의 남녀는 키스 후에 엄청난 관계의 진전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유은서와 차강혁은 전혀 아니었다. 이 관계는 여전히 밍숭밍숭하고 시시하기만 했다.
은서가 울적해하는 사이, 그가 우아한 손짓으로 지배인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프렌치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코스 요리로.
“와인은 어떤 걸로 마실래?”
“……안 마실래요.”
은서는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술에 흥청망청 취해서 어떤 추태를 보여 줬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생각 없이 또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주문을 끝내자 지배인이 물러갔다. 테이블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
“오늘은 왜 안 마시지? 와인 좋아하잖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요.”
“나한테 잡아먹히기 싫어서 내빼는 건가?”
“……?”
적나라한 표현에 연갈색 눈동자가 거의 터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팽창되었다.
동시에 음산한 경고가 뇌리를 강렬하게 때렸다.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넘어뜨리고 옷을 찢고 울려 버리겠다는 맹수 같던 경고가.
“정숙한 여자 캐릭터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나 보군.”
“……지난번엔 그런 모습을 보여서 정말 죄송했어요.”
은서가 고개를 숙이고 면목 없다는 식으로 사과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냐. 재미있었어.”
“재미있었다구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여자의 주정이 재미있었다고?
“응. 재미있던데.”
“…….”
“망가지니까 제법 볼만하더군.”
“…….”
“아쉽게 됐어. 좀 더 심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는 한쪽 입매를 의미심장하게 끌어올렸다.
* * *
페라리는 밤을 가르며 역동적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차 안은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차강혁은 능숙하게 운전했고, 은서는 그를 힐끔거리며 훔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 속, 은서의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발신인은 우현이었다.
[누나 뭐 해? 난 휴고 넬슨 공연 보고 방금 집에 도착했어.]
[공연 재미있었어?]
답신을 보내자마자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창이 뜨면서 화면이 어두워졌다. 은서는 작게 탄식했다.
“아…….”
“왜 그래?”
“배터리가 거의 다 나가서요.”
“거기다 꽂아.”
그가 턱짓으로 대시보드에 부착된 무선 충전 거치대를 가리켰다. 은서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끼웠다.
그러고 1분 뒤, 우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따로 보안을 걸어 두지 않아서 메시지 내용은 액정 위에 그대로 표시되었다.
[응. 공연 진짜 좋았어. 근데 누나가 없으니까 허전하더라.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신우현’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현은 이어서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나는 맞선남이랑 아직도 같이 있는 거야? 만약 같이 있다면 어서 집에 들어가. 남자랑 밤늦게까지 같이 있지 말라고. 내가 누차 말하지만 남자라는 족속은 쉽게 믿으면 안 돼. 죄다 늑대야.]
시어머니처럼 줄줄 늘어놓는 우현의 잔소리에 은서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메시지 내용이 다 보였을 텐데!’
은서는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얼른 빼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눈동자를 굴려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기분 상했으려나? 뜬금없이 늑대라고 공격당했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왜 충전을 하다가 말아?”
“집에 가서 하면 돼요.”
괜히 여기서 충전했다가 애먼 메시지만 보여 주고 말았다. 은서는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
“누구지?”
“네?”
“신우현이라는 녀석이 누구냐고. 보아하니 그쪽도 늑대과인 것 같은데.”
“아……. 친구 남동생이에요.”
“친구 남동생과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인 건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은서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네. 친해요. 지현이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동생이에요.”
“…….”
“고등학교 때, 수업 끝나면 지현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갔거든요. 그럼 우현이도 있어서, 셋이 같이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그러면서 놀았어요.”
“…….”
“우현이가 진짜 착해요. 저보다 두 살 어린데도 제가 가면 라면도 끓여 주고, 토스트도 구워 주고, 귀찮게 심부름시켜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다 해 줬어요.”
“…….”
“워낙 착하다 보니, 제 걱정 한다고 잔소리를 하느라 늑대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말들이 나온 거예요. 별말 아니니까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은서가 구구절절 떠들어 댔지만 그는 입술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응’이나 ‘어’ 같은 간단한 대답조차도 없었다.
표정은 차가워 보였다.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아서 그런 걸까. 기가 죽은 은서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은서는 피로감을 느꼈다. 데이트 때문에 설레서 가뜩이나 잠도 못 잔 상태로 비협조적인 남자를 상대하려니, 자연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은서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조그맣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잠시 후, 페라리가 집 앞에 도착했다.
그가 실내등을 환하게 밝혔다. 은서는 안전벨트를 풀고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숄더백을 어깨에 걸쳤다.
“데려다주셔서 고마…….”
인사를 하려는데 불쑥 큼지막한 손이 다가와 은서의 뺨을 감싸 쥐었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은서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연갈색 눈동자는 겁을 먹은 것과 동시에 은근한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곧은 시선으로 은서를 유심히 바라보며 천천히 간격을 좁혀 왔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입안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더운 숨결이 코끝을 부드럽게 간지럽혔을 때,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그는 제 입술을 난폭하게 훔치리라.
저를 꽉 껴안고 짐승처럼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탐욕스럽게 입술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입술 위로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는 엄지로 은서의 눈꼬리를 쓱쓱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뭐지? 이건 누가 봐도 키스할 타이밍인데……. 왜 키스는 하지 않고 눈꼬리만 만지고 있는 거지?’
은서는 의아해하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화장이 번졌어.”
그는 손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아까 눈을 비비면서 아이라이너가 번진 모양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차강혁이 키스해 줄 거라고 착각했다니!’
창피해서 죽고만 싶었다.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설레발 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쳐 놓고도 걸핏하면 기대를 품는다. 멍청하게도.
“네……. 전 이만 들어갈게요.”
은서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서 쫓기는 사람처럼 대문까지 빠르게 뛰어갔다.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마자 냉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차강혁은 백미러로 그런 유은서의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부리나케 꽁무니를 내빼는 모습이 꼭 사냥개를 피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새끼고양이 같았다.
* * *
그 후로도 두 번 더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차강혁은 늘 그렇듯 무감하게 굴었고, 은서는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긴장하다가 지쳐 버리기를 반복했다.
만남은 계속되었지만 그와 그녀는 평행선만 긋고 있었다. 도무지 진전이랄 게 없었다. 스킨십은 오히려 후퇴했다.
처음 키스한 이후로 더 이상의 키스는 없었다. 짜릿했던 그날 밤의 키스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진 듯했다.
“짝사랑이니까…….”
은서는 턱을 괴고 힘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강혁과 맞선을 보고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짝사랑이 동화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형식적인 만남을 이어 가면 이어 갈수록, 이 남자와 저는 결코 닿을 수가 없다는 냉엄한 현실만을 지독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여러 번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교차되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강혁이 감정을 교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결혼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고 했으니, 저와의 만남도 데이트라기보다는 일종의 업무 미팅쯤으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비즈니스 상대와 사적인 감정을 공유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쓸데없이 다정할 필요도 없고, 쓸데없이 키스할 필요도 없는 거겠지.
은서가 포기하면 이 관계는 금방 끝날 관계였다. 저만 정리한다면 차강혁은 미련 없이 손을 툴툴 털고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나리라.
명치가 아렸다. 응답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이 불쌍하고 한심했다.
차강혁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제가 멍청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늘 그렇다. 이성을 좀먹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서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없게 만든다.
은서 역시 사랑의 흔하고 흔한 부작용에 빠져서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무슨 멍을 그렇게 때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은서는 복잡한 사념에서 깨어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언니 왔어?”
둘째 언니 은경이었다. 은경은 화사하게 웃고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은서는 유성중공업 본사 사옥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은경을 기다리던 중에 깊은 상념에 빠져든 것이었다.
“멍 때리면서 무슨 생각했어?”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배고프다. 난 A코스 먹을 건데, 언니는 뭐 먹을 거야?”
은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고 메뉴를 건네주었다. 은경은 메뉴를 뒤적이더니 직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요즘 차 사장님이랑 어때?”
“그냥 그렇지, 뭐.”
“그냥 그래? 야, 아버지가 난리도 아니야. 맞선 본 지 벌써 한 달도 넘었는데, 은서 너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한다고.”
오늘 은경의 역할은 정찰병이었다. 유 회장으로부터 두 사람 사이가 당최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차 사장님은 은서 네가 맘에 든다고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네가 발 뺐다며?”
“소식이 늦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은서는 싱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강혁은 내가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내 집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거야. 그 남자는 나를 결혼 상대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로 여기고 있다고.’
그러나 아무리 언니라도 속에 있는 마음을 다 꺼내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가끔은 진실을 숨겨야 할 때도 있었다.
“야, 이 언니가 소식은 일찌감치 들었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이제야 말 꺼내는 거야.”
은경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벌써 궁합까지 보셨더라. 두 사람 백년해로할 궁합이라고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야 하는데, 네가 미적미적댄다고 발을 동동 구르셔.”
“뭐어? 궁합?”
“응, 궁합. 원래 아버지 사윗감 정하면 항상 궁합 보시잖아. 우리 셋 중에 네가 제일 잘 나왔대.”
“정말 못 말려. 지금이 어느 시댄데 궁합을 보시는 거야.”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큼 아버지가 딸들을 사랑하니까 그러시는 거지. 근데 두 사람…… 진도는 어느 정도 나갔어?”
시원시원하게 떠들던 은경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하게 물었다.
“진도? 무슨 진도?”
“진도가 진도지, 뭐겠어? 그러니까 예를 들면…… 키스는 했어?”
은서가 입을 벌리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진한 반응에 은경은 혀를 쯧쯧 찼다.
“반응 보니까 뻔하네. 아직 입술도 안 맞춰 봤구나? 만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래? 어린애들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
엄밀히 말하자면, 한 번은 했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키스였다. 아예 하지 않은 것과 똑같았다.
“은서야, 너무 철벽 치지 마.”
“철벽?”
“그래, 철벽. 이 언니는 안 봐도 다 알아. 내가 너를 하루 이틀 보니? 뻔하지, 뭐. 차 사장님은 너한테 훅 치고 들어가고 있는데, 넌 소심하게 벽치면서 뒷걸음질이나 치고 있겠지.”
“…….”
“은서야, 너 차 사장님 좋아하잖아. 몰래 그림까지 그릴 정도로 좋아하면서.”
“…….”
“좋아하면 마음을 열어야지. 차 사장님이 다가오면 그냥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여.”
“…….”
언니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벽을 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차강혁이야. 용기 내서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비집고 들어갈 틈도 허락하지 않은 건, 차강혁이라고.
“나는 너보고 당장 결혼하라는 소리는 안 해. 그렇지만 마음을 열고 차 사장님이 들어올 여지는 줘야지. 그래야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는 거야. 그렇게 서로 알아가다 보면 결혼 결정도 확실히 내릴 수 있게 될 거고.”
언니의 조언에 은서는 군말 않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만약 언니가 ‘진짜 현실’을 알게 된다면, 차강혁은 단지 유은서를 사업적인 이유로 이용하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언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굉장히 클리셰적인 반응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다른 남자 소개해 줄 테니까, 너 이제 그놈 만나지 마! 네가 뭐가 못나서 그놈 비위를 맞춰 주면서 만나?’ 하면서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겠지.
은서는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을 끝낼 준비가 아직은 안 됐으니까.
“아, 내일 차 사장님 생일인 건 알고 있어?”
“응. 알아.”
“생일 선물은 샀어?”
“아니…….”
“너, 차 사장님 생일 안 챙길 거야?”
“만나자는 얘기 없었어.”
은서의 대답에 은경은 기가 막혀 헛숨을 터뜨렸다.
“은서야, 너 그럼 이때까지 차 사장님이 만나자고 할 때만 만났어? 네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은 없어?”
“…….”
만날 때마다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남자에게 먼저 만나자고 말을 꺼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심한 은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차 사장님 생일인데 네가 먼저 연락해서 약속 잡고 챙겨야지. 차 사장님이 ‘내 생일이니까 우리 만납시다.’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
“은서야, 수동적인 여자는 한물갔어. 남자한테 먼저 만나자고 해도 괜찮아. 연락해서 내일 같이 저녁 먹자고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
* * *
날이 바뀌었다. 10월 31일이 되었다. 차강혁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은서는 하루 종일 고민했다. 샤워를 하면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번번이 행동을 멈추고 그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긴긴 번뇌의 시간을 거쳐,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은서는 먼저 백화점으로 가서 넥타이부터 샀다. 어두운색 계열의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지금까지 봐 온 차강혁은 클래식한 스타일의 슈트만 입었음으로, 심플한 디자인의 넥타이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카드에는 간단하게 ‘생일 축하해요.’라고만 적고 함께 포장했다.
선물을 챙겨 들고 백화점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정 기사가 세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올라탄 은서는 호흡을 충분히 고른 다음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세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았다.
“강혁 씨, 저 은서예요. 혹시 잠깐 통화 가능해요?”
-말해.
“오늘 생일이죠? 축하해요.”
-고마워.
“실은…… 제가 선물을 샀거든요. 혹시, 괜찮다면…… 강혁 씨 오피스텔 주소 좀 알려 줄래요? 데스크에 선물 맡기고 갈게요.”
아마도 오늘 밤, 차강혁은 가족들과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과 시간을 보낼 테니 무척 바쁠 것이었다.
은서는 그가 자신에게 내어 줄 시간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도둑고양이처럼 데스크에 선물만 맡기고 가겠다고?
“……네?”
-지금 어디지?
“반포동 J백화점이요.”
-가깝군. 금방 갈 거야. 기다리고 있어.
“여기로 오겠다구요?”
-그래. 얌전히 기다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뚝 끊겼다. 은서는 연결이 끊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만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
기대치도 못한 만남에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은서는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짚었다.
이래서 내가 이 남자를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지칠 대로 지치다가도, 한 번씩 기습적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때가 있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그의 변칙적인 행동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마냥 달콤하게 느껴졌다.
까끌까끌한 모래바람과 숨 막히는 건조함에 살결이 다 찢어질 것 같을 때, 저 멀리 사막의 수평선 너머로 푸르른 물빛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목을 촉촉하게 축이고 나면 이 빌어먹을 사막도 제법 여행할 기분이 난다.
은서에게 차강혁이라는 남자는 그랬다.
까끌까끌하고 건조한 사막이지만, 거기에는 신비롭게도 오아시스가 있어서 도무지 여행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런 남자…….
* * *
거친 엔진 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키고 눈앞으로 아벤타도르 로드스터가 멈춰 섰다.
처음 보는 차였지만 은서는 주인이 누구인지 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직선의 공격적인 디자인이 차강혁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타.”
유리창이 내려가고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오만하지만 그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말투였다.
시저 도어가 하늘을 향해 높이 열리고 은서가 차에 올라탔다. 아벤타도르는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그게 내 선물인가?”
은서의 손에 든 쇼핑백을 보고 그가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넥타이예요. 마음에 안 들면 교환하세요.”
“열어 봐.”
은서는 쇼핑백에서 예쁜 리본이 감긴 직사각형 상자를 꺼냈다.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어 그에게 넥타이를 보여 주었다.
“어때요?”
“맘에 들어.”
“다행이네요.”
은서는 배시시 웃으며 상자를 닫고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기우에 그쳤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차에 타라고 해서 타기는 탔는데,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집.”
“아, 저 집에 데려다주려구요? 그럴 필요 없었는데. 아까 기사님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아니, 너 안 데려다줄 건데.”
“……네?”
“지금 내 오피스텔로 가는 중이야.”
“…….”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은서는 순진한 눈망울만 끔뻑끔뻑거렸다. 만남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의 집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유은서 네가 아까 물었잖아. 내 오피스텔이 어디 있냐고.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보여 주려고.”
손에서 땀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긴장감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걱정 마. 손 안 댈 거니까.”
그가 흘긋 시선을 던지고 말했다. 겁먹은 초식동물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듯이 설핏 부드러운 말투였다.
“……네.”
실은 ‘약간은 손을 대도 괜찮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은서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짧은 대화 끝에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침묵이다.
은서는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바깥의 풍경이 어떤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으니까.
‘이따가 오피스텔로 가면 뭘 할까?’
그의 사적인 공간에서 단둘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격랑처럼 소용돌이쳤다.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상상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자신이 그에게 넥타이를 매어 주고, 그는 고맙다는 의미로 키스를 해 주는 그런 상상이…….
정말이지 심각한 병이었다. 이런 유치찬란한 상상을 하다니. 그것도 그와 같이 있는데.
은서는 야릇한 상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왜 그래? 어지러워?”
“아, 아뇨. 괜찮아요.”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차 세울까?”
“아니에요. 그냥 잠깐…… 생각을 좀 하다가 그런 거예요. 불편한 거 없어요.”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요. 근데 어쩜 이렇게 운전을 잘해요? 전 운전을 못 해서, 운전 잘하는 사람 보면 참 멋있더라구요.”
망측한 상상을 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은서는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내던지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을 하고 보니 되게 별로였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조선 그룹의 사장에게 고작 운전을 잘한다는 시시한 칭찬을 하다니.
형편없는 센스에 머리를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운전을 못 해?”
“네? 네…….”
“왜?”
어릴 적 당한 교통사고가 원인이었다.
끔찍하게도 고통스러웠던 사고……. 차에 치인 순간에도 고통스러웠고, 수술도 고통스러웠고, 수술 이후의 회복 과정도 고통스러웠다. 고통 끝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흉측한 흉터까지 얻었다.
그 지난한 고통을 잘 알기에 은서는 절대로 사고를 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다짐했다. 제 차로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강박관념은 운전을 배우는 데에 크나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운전대를 잡기만 하면 몸이 늘 움츠러드는 것이다. 혹여 미숙한 실력으로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할까 두려웠다.
장내 주행은 겨우 했어도 도로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수많은 차들과 함께 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달릴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으니까.
결국 은서는 운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냥…… 못해요.”
은서는 대충 얼버무렸다. 교통사고가 트라우마로 남아 운전을 못 한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별로 관심도 없을 테고 또 도로를 나가지 못하는 두려움을 그가 딱히 이해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유학 생활할 때도 운전기사를 달고 다녔나?”
“네…….”
“하긴, 직접 할 필요가 없으니 배울 필요도 없었겠군.”
단조로운 그의 대답에 은서는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어요.’라는 말은 그저 입속에서만 조용히 맴돌 뿐이었다.
* * *
아벤타도르는 청담동의 럭셔리한 오피스텔 앞에서 정차했다.
웅장하면서도 날카롭게 각이 잡힌 현대적인 감각의 고층 건물은 잿빛 도시의 차가운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렸다.
차강혁은 차를 발렛 파킹 요원에게 넘겨 주고 은서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오피스텔이라기보다는 호텔에 더 가까워 보였다. 로비의 안내 데스크에는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했고, 주변으로는 건장한 보안 요원들이 건물을 지키고 있어서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그는 22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은서는 미궁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의도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선물 달라고.”
“아…….”
은서가 짧은 탄성을 내고 선물이 든 쇼핑백을 건넸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쇼핑백을 쥐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따라 걸었다.
구두 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괜히 긴장해서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 은서는 혀를 할짝거리며 입술을 촉촉하게 적셨다.
굳어 있는 그녀와 달리 차강혁은 편안해 보였다. 쇼핑백을 가볍게 흔들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2204호의 차가운 철제 현관문 앞에서 멈췄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자 고요한 공간 속으로 기계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고, 은서는 머뭇거리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현관을 지나 길게 이어진 대리석 복도를 걷자 천장 위에 달린 센서 등이 하나하나씩 켜졌다. 따스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렌지빛 조명이었다.
복도 끝은 널찍한 거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거실 조명을 밝히기 위해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렀다.
복도와는 다른 새하얀 빛이 거실을 환하게 밝히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소파 뒤에서 어떤 여자가 스프링처럼 툭 튀어 오르더니 폭죽을 팡팡 터트렸다.
“오빠,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