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
그에게 반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이 결혼 또한 없었을 테니.
처음부터 불행이 예고된 결혼이었다.
* * *
1960년대에 창립한 삼우조선은 한때 전 세계 조선업계 Top 3에 꼽힐 정도로 탄탄하고 우수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IMF와 2000년대 글로벌 경제 위기를 연타로 맞고, 선대 회장의 방만한 경영과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삼우조선은 추락하다 못해 매각에까지 이르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이 쓰러져 가는 거대 골리앗을 인수 합병한 기업이 바로 유성중공업이었다.
삼우조선은 유성중공업의 자회사가 되면서, 선대 회장이었던 차강혁의 조부가 경영에서 물러나고 대신 그의 부친이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더불어 기술개발팀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차강혁이 사장으로 승진한다.
차강혁은 선대의 매너리즘적인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시장을 주도할 만한 새로운 유형의 선박을 만들기 위해 연구진들과 함께 밤을 새워 가면서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그의 열정과 땀으로 에너지 효율은 높이고 환경에는 친화적인 천연가스 엔진 시스템을 탑재한 LNG 운반선이 탄생했다.
G-타입의 울트라 롱 스트로크가 적용된 LNG 운반선은 유해가스는 낮추고 연비는 높여서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선박이었다.
신개념 LNG 운반선의 등장으로 조선업계는 열광했다. 그해 삼우조선은 전 세계 수주량의 46%를 달성하면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인수 합병 3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그건 삼우조선을 두고 하는 표현일 테다.
삼우조선 부활의 중심에는 단연코 차강혁이 있었다. 그는 업계의 판도를 단번에 뒤바꿔 놓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였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 차강혁이 재계의 주목을 받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를 ‘재계의 신성’이라고까지 칭했을까.
모기업인 유성중공업의 유강호 회장 역시 차강혁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유 회장은 그를 만나고 온 날이면 가족들 앞에서 유난히 말이 많아졌다.
그날도 그랬다.
결혼해서 출가한 첫째 딸 은하만 빠지고, 안주인 신 여사, 둘째 딸 은경, 막내딸 은서와 단란히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유 회장은 차강혁에 대한 감상을 술술 풀어놓았다.
“얼마나 자신만만한지 몰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일 때마다 긴장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실패할 리 없으니 긴장할 필요도 없다고 대답하더군.”
기세등등한 태도가 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유 회장은 껄껄 웃고는 금쪽같은 막내딸 은서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은서야, 남자는 자고로 패기가 있어야 한단다. 차강혁이처럼.”
“그런가요.”
“패기가 없는 놈은 어디 가져다 쓰지도 못해. 차강혁이 같이 배짱 있고 담력 있는 녀석이 큰물에서 놀면서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거야.”
유 회장은 목청을 높여 가며 그를 칭찬했다. 덩치만 컸지 이빨은 다 빠진 삼우조선을 단기간에 살려 놓았으니 감탄할 만도 했다.
“차강혁이가 말이지, 머리도 비상하고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굉장히 잘생겼어. 아빠가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한번 볼래?”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 회장은 휴대폰을 꺼내서 은서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는 유 회장과 차강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유 회장은 정말 연예인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차강혁은 입가에 살짝 옅은 미소만 띠고 있었다.
유 회장이 말한 그대로였다. 사진 속의 남자는 강하고 오만한 인상에 호기로운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빼어난 미남이었고, 체격도 상당히 좋았다.
장신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옷 위로도 탄탄한 골격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수려한 외모와 단단한 육체, 그리고 탁월한 경영 능력과 특유의 터프함까지. 여자라면 누구든 반할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다. 아니, 이 정도면 남자도 반하게 할 것 같았다.
“어디, 나도 보여 줘.”
신 여사의 말에 은서가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신 여사는 사진을 보자마자 10대 소녀처럼 소리를 꺅 질렀다.
“어머나! 영화배우 같다. 어쩜 이렇게 멋질까.”
“업계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보다 더 잘생겼다고 난리예요. 여자들이 껌뻑 죽는다니까요.”
은경이 말했다. 유 회장의 둘째 딸이자 유성중공업의 상무이사인 은경은 차강혁과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그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야심 찬 기업인이자, 여자들을 잠 못 들게 만드는 섹시한 수컷이었다.
“그럼, 여자들이 아주 좋아 죽지! 맞선을 보려고 줄을 섰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은서야.”
유 회장은 신나게 맞장구를 치더니 의미심장하게 운을 뗐다.
“한번 만나볼 생각 없어?”
“네?”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서 너도 이제 슬슬 결혼할 때가 됐잖니.”
유 회장은 소극적이고 수줍음 많은 은서에게는 차강혁처럼 강하고 담대한 남자가 제격일 거라고 판단했다. 여린 은서를 지켜 주고 보호해 주려면 남자가 그 정도 배짱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생각 없어요.”
은서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사진을 보자마자 동공이 확장되었고 가슴도 두근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당장 맞선에 나갈 만큼 대책 없이 넋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왜?”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은걸요.”
“결혼한다고 그림 못 그리는 거 아니잖아.”
은서의 직업은 화가였다.
재벌가 자식치고는 다소 독특한 직업이지만, 화가는 은서가 일찌감치 정한 길이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기업인이 되겠다 하던 언니들과 달리, 은서는 어릴 때부터 늘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붓으로 세상을 그릴 때면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치열한 경영의 세계보다는 붓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이 훨씬 즐거웠다.
물론 은서가 처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유 회장은 그 선택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당신을 따라 가업을 이어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분명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 회장은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는 남자였다. 딸의 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심쯤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이기에 유 회장은 그녀의 꿈을 열렬히 지지해 주었고, 덕분에 은서는 화가로 무탈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 은서야. 한번 만나 봐. 엄마도 이 남자 마음에 들어.”
“선본다고 무조건 결혼하는 거 아니야.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나 해 보자는 거지. 잘생겼잖아. 비주얼 구경이라도 하고 와.”
신 여사와 은경까지 가세해서 맞선을 보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상 맞선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 자리는 생각만 해도 불편했다.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네 남편감은 내가 직접 고를 거다. 다음 달에 은경이 결혼시키고 나면, 바로 네 차례라고!”
“아빠…….”
“네 성격에 남자한테 뒤통수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아빠가 진국인 놈으로 고를 테니까, 괜히 쓸데없는 놈들 만나고 다니지 말거라.”
유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신 여사도 은경도 유 회장의 말에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은서는 약지도 않고 계산적이지도 못한 주제에, 괜히 마음은 여려서 종종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는 했으니까.
독하지 못한 성격답게 은서는 유 회장의 말에 더 반기를 들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 *
예정대로 은경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부인 은경은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우아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의 열띤 축하를 받으며 신랑과 키스를 나누는 작은언니를 보면서, 은서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결혼을 꿈꾸어 보았다.
‘나도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언니처럼 예쁠까. 내 신랑은 어떤 사람일까.’
참 이상한 일이다. 평소에는 결혼에 대해서 새끼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데, 결혼식에만 오면 왠지 모르게 결혼을 하고 싶다는 묘한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막연히 본인의 결혼식을 그려보던 은서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결혼에 대해 생각은 해도 선명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만나는 남자도 없는데 무슨 결혼이야…….’
본식과 폐백이 끝나고 홀에서는 리셉션 파티가 열렸다. 집안 어른들은 물러가고 젊은 남녀들만 모인 파티 분위기는 제법 자유로웠다.
커플들은 공연 중인 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키스를 나눴고, 싱글 남녀들은 호감 가는 상대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고 술을 마셨다.
은서는 구석에 있었다. 파티에서 그녀의 자리는 언제나 구석이었다. 사람들 눈에 띄는 건 질색이니 말이다.
구석에서 혼자 동떨어진 채, 샴페인을 홀짝이며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감상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던 것도 잠시, 술에 취한 어눌한 목소리가 청각을 불쾌하게 때렸다.
“유은서, 여기 숨어서 뭐 하냐?”
고개를 돌리니 눈자위가 풀리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남자가 서 있었다.
윤종하였다.
은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작은언니가 초대했을 리는 없을 텐데…….
“윤종하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왜긴. 초대받았으니까 왔지.”
“초대? 누구한테 초대를 받았는데요?”
“새신랑 동생이랑 업무적으로 좀 알아.”
신랑 측 하객이었구나……. 은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종하는 TN유통 회장의 외손자로, 몇 달 전에 잠깐 은서와 교제한 남자이기도 했다.
지인이 운영하는 복지 재단 파티에서 윤종하를 처음으로 만났다. 은서는 그때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연회장 구석에 있었고, 그런 그녀를 윤종하가 찾아내 말을 붙였다.
그때 윤종하는 이렇게 술에 취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지적인 느낌마저 얼핏 풍겼었다.
은서가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하자, 윤종하는 미술사에 대해서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대화는 즐거웠고 헤어질 무렵에 윤종하는 젠틀하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은서는 고민하다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고, 며칠 후에 윤종하를 다시 만났다. 첫 데이트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윤종하는 은서의 취향에 맞춰 데이트 코스를 꼼꼼하게 짜 왔으니까.
그 후로 호감을 가지고 만남을 몇 번 더 가졌다.
하지만 다섯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젠틀하던 남자가 돌변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나자, 윤종하는 대뜸 객실을 예약했다며 그리로 가자고 한 것이다.
은서는 당황했다. 이건 너무 빨랐으니까.
「이런 건…… 천천히 하고 싶어요.」
「천천히?」
정중한 거절에 윤종하가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알 만큼 다 알 나이면서 뭐가 천천히야. 괜히 내숭 떨지 말고 어서 올라가자고. 다섯 번이면 나도 참을 만큼 참은 거야. 난 보통 세 번째 데이트에서 여자와 잠을 잔다고.」
윤종하는 은서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어 객실로 막무가내로 데려가려고 했다.
위협을 느낀 은서는 싫다고 고함을 크게 내질렀고, 소란스러움에 호텔 직원들이 달려와 상황이 겨우 수습되었다.
그 뒤로 은서는 윤종하와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하필, 작은언니의 결혼식에서 마주치다니…….
“그럼 파티 즐기세요.”
은서는 냉랭하게 대꾸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윤종하가 더 빨랐다. 윤종하는 팔을 뻗어 은서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가긴 어딜 가.”
“왜 이래요?”
“왜 이러긴. 오랜만에 만나서 좋으니까 그러지. 근데, 넌 또 재미없게 긴 치마를 입었냐?”
치맛자락이 발목까지 오는 맥시 드레스를 입은 은서를 보고 윤종하가 타박했다.
“항상 긴 바지, 긴 치마. 지겹지도 않아? 여자면 여자답게 각선미도 자랑하고 그래야지. 딱 봐도 다리 예쁠 것 같은데, 뭘 그렇게 꽁꽁 숨겨 놔?”
서른두 살 먹은 남자가 어쩜 이렇게도 꼬질꼬질한 꼰대처럼 말을 할 수가 있는지.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조용히 응수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나 좀 놔줄래요?”
“싫은데. 이런 파티에서 혼자 있고 싶다니 말이 안 되잖아.”
은서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러나 순하게 생긴 얼굴 특성상, 눈을 아무리 치켜떠 봤자 뾰족한 효력은 없었다.
윤종하는 낄낄 시답잖게 웃더니 덜 떨어진 말투로 지껄였다.
“그날 일 때문에 아직도 꽁해 있는 거야? 미안하다고 내가 계속 메시지 보냈잖아. 그날은 내가 성급했어. 잘못했다고. 그렇지만 너도 잘못이 있어. 남자 맘을 그렇게 설레게 해 놓고 자 주지도 않고, 너무 냉정했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마음 같아서는 윤종하의 뺨을 후려치고 꺼지라고 큰소리를 바락바락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작은언니의 결혼식 리셉션 파티를 망칠 수는 없었다.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파티인데…….
은서는 작은언니를 위해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이 손 치워요. 기분 나쁘니까.”
작은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계속 표했지만, 윤종하는 물러서지 않고 은서의 어깨를 끈덕지게 주물럭거렸다.
불쾌함에 순한 얼굴이 잔뜩 이지러진다. 어깨 위로 징그러운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여기 스위트룸 가 봤어? 되게 좋아.”
“어쩌라고요.”
“같이 올라가자.”
“윤종하 씨는 학습 능력이 없어요? 내가 저번에 분명히 싫다고 했죠?”
“자자는 거 아니야. 그냥 같이 들어가기만 하자고.”
속이 뻔히 보이는 싸구려 수작에 은서는 코웃음을 치고 어깨를 비틀었다. 그러나 윤종하가 어깨를 감싼 팔뚝에 힘을 세게 줘서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살짝 터치 정도만 할게. 꽁꽁 숨겨 둔 네 다리도 좀 보여 주고, 괜찮다면 가슴도…….”
“적당히 하지 그래?”
윤종하의 변태 같은 말 사이로 남자의 담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은서는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키가 무척이나 크고, 몸 윤곽이 상당히 다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눈을 뗄 수 없는 미남에 위압적인 아우라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은서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이 남자의 평소 성격과 성향에 관해서도 아버지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차강혁…….
“네놈이 뭔데 끼어들어? 꺼져.”
윤종하가 투박하게 반응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일단 겉으로 봤을 때는 차강혁 쪽이 우위로 보였다. 그는 윤종하보다 키가 20cm나 더 컸고, 눈빛도 칼날처럼 날카로워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꺼져야 할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 여자분이 싫어하잖아.”
“우리 둘 사이 일이니까 신경…… 읏!”
그는 은서의 어깨를 더듬던 윤종하의 손을 단번에 떼어 내고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가공할 만큼 센 악력에 윤종하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읏.”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좋았잖아.”
“이, 이거 놔…….”
“당해 보니까 어때? 너도 기분 더럽지?”
“놓으라고, 이 새끼야! 으아악!”
그는 윤종하의 팔뚝을 잔인하게 꺾어 버렸다. 두둑,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윤종하는 밴드 음악 소리보다도 더 크게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순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이곳을 쳐다보았다.
졸지에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은서는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동자를 뱅글뱅글 굴리고 애꿎은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깽값은 얼마든지 물어 줄 테니까, 여기로 연락하라고.”
그는 윤종하의 얼굴로 명함을 툭 내던지고 곤란해하는 은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죠.”
* * *
은서는 홀린 듯이 손을 잡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양과 다르게 그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은서를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도착한 곳은 호텔 밖에 설치된 커다란 분수대 앞이었다.
분수대의 물줄기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근사한 광경을 넋 놓고 쳐다보는데, 그가 슈트 재킷을 벗어서 은서에게 덮어 주었다.
“괜찮습니까?”
그는 잘 다듬어진 존댓말로 말을 건넸다. 윤종하에게 냉혹하게 굴던 모습과는 확연히 상반되는 신사다운 태도에, 은서는 가슴이 또 출렁거렸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은서는 고개를 공손하게 숙였다.
“제가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괜히 문제를 일으켰네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곤란해지진 않을지…….”
“곤란할 거 없습니다. 은서 씨가 사과할 일도 아니고요.”
은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차강혁은 놀란 토끼처럼 어벙하게 뜬 눈을 지그시 마주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유 회장님께 은서 씨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 이해가 됐다는 듯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쑥 걱정스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쓸데없이 저를 추어올리면서 만나 보라고 종용이라도 했다면…….
“혹시, 아버지께서 저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신 건 아닌지…….”
“귀엽고 예쁜 막내딸이라고 하던데요.”
귀엽고 예쁘다니. 아빠 눈에나 귀엽고 예뻐 보이는 걸, 팔불출처럼 왜 남한테까지 그런 소리를 하셨는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은서는 괜히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입술을 조그맣게 우물거렸다.
“저도 차 사장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능력이 출중하고, 남자답고, 미남이시라고…….”
“은서야!”
그때, 누군가가 은서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큰언니 은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은서야, 괜찮아?”
은서의 곁으로 가까이 온 은하가 걱정스레 물었다. 은서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니, 나 괜찮아.”
“은경이도 오겠다는 걸, 내가 파티에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된다고 말렸어.”
“잘했어, 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건이 일어난 순간, 남편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던 은하는 윤종하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은서가 시끄러운 일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은하가 홀 사이드로 갔을 때, 은서는 이미 차강혁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윤종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서는 분에 찬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윤종하 씨가 귀찮게 집적거리는 걸 차 사장님께서 도와주셨어.”
은서가 손짓으로 차강혁을 가리켰다. 그는 반듯한 자세로 은하에게 묵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 전무님.”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의 인사에 은하는 화사하게 웃었다.
“아, 차 사장님이 도와주신 거구나.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은서 씨가 많이 당황해서 일단 제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람들 없는 곳에서 진정시키려고요.”
“고마워요. 우리 은서를 다 챙겨 주시고.”
“아닙니다. 유 전무님께서 오셨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다음에 밥 살게요.”
“저, 재킷…….”
자리를 떠나려는 그에게 은서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냥 입어요.”
그는 간명하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뒤돌아 가는 넓은 등을 멍하게 바라보는데, 가슴이 이상했다. 계속 요란스럽게 요동을 치고 쿵쾅거리면서 뛰는 것이다.
나사가 풀린 것 같은 동생의 모습에 은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은서의 옆구리를 툭 쳤다.
“차 사장님한테 반했어?”
“어? 아, 아니야! 반하긴, 뭘 반해…….”
“왜? 반할 만하잖아. 성가시게 치근덕거리던 윤종하도 멋지게 조져 버리고, 재킷까지 벗어 줬는데.”
“언니, 그런 말 쓰지 마.”
속된 말을 구사하는 은하를 두고 은서가 한마디 했다. 유성중공업의 유은하 전무이사는 단아한 외모와는 달리 말투가 제법 거친 편이었다.
이에 대해 은하는 중공업처럼 험한 업계에 몸을 담고 있다 보면 말투 또한 자연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는 했지만 말이다.
“뭐 어때. 조진 걸 조졌다고 하지. 윤종하 팔뚝 골절된 것 같더라. 완전 꼬시지? 그런 새끼는 제대로 당해 봐야 돼. 은경이도 오늘 윤종하 발견하고 기겁을 하던데 잘됐지, 뭐. 이 자리가 어디라고 감히 기어들어 와?”
은서의 언니들은 윤종하에 대한 인상이 영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걸 넘어서 극도로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예전에 윤종하가 은서에게 저지른 패악을 부모님은 모르고 있어도, 언니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종하, 앞으로 너한테 집적댈 시도조차 못 할 거야. 팔뚝이 꺾여서 트라우마가 남았을 테니까. 차 사장님이 참 좋은 일 했어. 쓰레기도 깔끔하게 처리해 주고 말이야.”
은하는 깔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암튼, 은서야. 어떡할래? 연회장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차 불러 줄까?”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언니는 형부랑 같이 남아서 파티 끝까지 빛내줘.”
“그래, 알았어.”
조금 뒤,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은서는 큰언니의 전송을 받으며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차 안, 재킷을 만지작거리며 차강혁을 떠올린다. 우연히 나타나서 저를 멋지게 구해 준 의기 높은 모습부터 무심하게 재킷을 걸쳐 주던 모습까지.
가슴 발작이 또 시작됐다. 오늘따라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은서는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러 보았다. 쿵쿵, 선명한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 * *
예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은서를 보고 유 회장과 신 여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리셉션 파티가 벌써 끝났어?”
“아뇨. 파티는 계속하고 있는데, 전 몸살기가 있어서 일찍 들어왔어요.”
“그 재킷은 누구 거냐?”
은서가 걸치고 있는 낯선 재킷을 보고 유 회장이 물었다.
“우현이 거예요. 몸살기 때문에 제가 몸을 으슬으슬 떠니까 벗어 주더라구요.”
은서는 차강혁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대며 둘러댔다. 사실대로 답을 했다가는 유 회장이 당장 맞선을 보라며 부추길 게 뻔했으니까.
맞선이라…….
차강혁이란 남자를 더 알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맞선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그는 단지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이쪽에서 맞선을 보자고 나서면,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당황스러울 테니까.
“우현이가 참 착하네.”
“그럼요, 착하죠. 오늘도 어찌나 방긋방긋 웃으면서 인사를 잘하던지.”
유 회장의 말에 신 여사가 유쾌히 동조했다.
“저, 그럼 방에 들어가서 쉴게요.”
“죽이라도 끓여 줄까?”
“괜찮아요. 심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푹 자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은서는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와 가만히 문에 등을 대고 기대섰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서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수신자는 은하와 은경이었다.
[언니들, 아까 파티에서 소란 일으켜서 미안해. 그리고 그 일 말인데, 부모님이 아시면 걱정할 테니 비밀로 해 줘.]
오늘 일을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아시게 된다면 보나마나 저를 차강혁과 엮으려 들 것이었다. 그러니 숨기는 게 상책이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은서는 메시지를 발송하고 다시금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촉감이 좋았다. 옷깃에 코를 살짝 묻었더니 청량한 향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 * *
그날 밤, 은서는 꿈을 꾸었다.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솟구쳐 오르는 분수대 앞에서 차강혁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열기 섞인 뜨거운 시선이 직선으로 꽂혀 들어온다. 그는 손을 뻗어 은서의 뺨을 어루만지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입술 위로 포근한 감촉이 녹아들었다. 그는 뒷목과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며 로맨틱하면서도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환상적인 키스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은서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격한 키스에 호응했다.
한참 뒤, 서로의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은서를 그윽하게 보다가, 뭉툭한 콧잔등에 가볍게 입술을 찍고 다시 입을 맞췄다.
두 번째 키스는 처음보다 더 짜릿했다. 그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고 능숙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가 입안을 고루 휘젓자 은서는 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오늘 처음 본 이 남자에게 안기고 싶다는 발칙한 욕구가 피어오른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손을 꼭 잡아 제 가슴 위로 가져왔다. 그가 입매를 끌어올리면서 봉긋한 가슴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갑자기 영상이 산산조각 나듯 깨지면서 눈이 번쩍 떠졌다.
“하아.”
꿈에서 깬 은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꿈속 키스의 여운 때문인지 온몸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웠다.
“미쳤어. 그런 망측한 꿈을…….”
주먹으로 머리통을 툭 때렸다. 저를 도와준 사람을 두고 그런 몹쓸 꿈을 꾸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은서는 숨을 몰아쉴 대로 몰아쉰 다음에야,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면서 정신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뜨거워진 몸은 좀체 식지를 않았다.
* * *
은서는 멍하게 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다.
작업을 하다가도 붓질을 멈추고 넋을 놓고서는 차강혁에 대한 상념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그가 떠올라 질문을 놓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기 앞에 섰는데 그의 생각에 골몰하느라 물만 아깝게 낭비한 적도 있었고,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감은 눈 사이로 그의 모습이 아른아른 그려져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적도 있었다.
은서는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스케치북에 그를 그리기도 했다.
연필로 쓱쓱 스케치를 하다가, 그의 완벽한 외모를 구현해 내기에는 제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 좌절한 적도 자주 있었다.
“하아…….”
한숨을 무겁게 내리 쉬었다. 이 증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사랑이다.
* * *
이 사랑이 불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혼자만의 사랑이니까.
만약 차강혁이 저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었다면, 연락처를 알아내서 메시지를 보내든 전화를 걸든 뭐라도 했을 것이다.
제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닐 테고, 더군다나 재킷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연락할 만한 구실도 충분했다.
그러나 차강혁으로부터 연락은 일절 없었다. 은서의 휴대폰은 마냥 심심하기만 했다.
물론 은서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해서 재킷을 돌려줄 테니 만나자고 제안할 수도 있었다. 그가 은서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쉬운 만큼, 은서도 그의 연락처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은서의 성격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남자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건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기 없는 은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드레스 룸 깊숙한 곳에 숨겨 둔 그의 재킷을 이따금씩 꺼내 보는 것밖에 없었다.
혼자서 몰래 그의 재킷을 끌어안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아련한 그리움에 취하는 것,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혼자만의 사랑을 차곡차곡 키워 나가며 시간은 흘러갔다.
은경이 결혼을 하고 3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은경은 남편과 대판 싸웠다며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친정을 불쑥 습격했다.
가파른 숨을 씩씩 내쉬는 은경은 제 남편이 얼마나 속이 좁고 고집이 센지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은경에게 유 회장과 신 여사는 마음을 가라앉혀라,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이렇게 친정으로 오면 안 된다, 어서 신혼집으로 돌아가서 남편과 화해하라며 다독였지만 은경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유 회장 내외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그날 은경은 친정집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부부싸움의 여파 때문인지 은경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동생의 방문을 노크하고 문을 빠끔히 열었다.
“은서야, 자니?”
“아, 언니. 들어와.”
은서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은서는 외사랑에 의한 지독한 불면증을 겪고 있었으므로.
“우리, 오랜만에 맥주나 마실까?”
은경이 방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은서는 침실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방에 가서 맥주랑 안줏거리 챙겨올게. 언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은서가 주방으로 내려간 사이, 은경은 동생의 방을 둘러보았다. 미적 감각이 타고난 은서는 방도 예쁘게 잘 꾸며 놓았다.
방을 쭉 구경하는데 책상 위에 있는 휴대용 스케치북이 은경의 시야를 차지해 왔다.
“오랜만에 동생 그림 좀 볼까.”
은경은 스케치북을 천천히 넘겨 보았다. 하얀 종이 위에는 정물, 풍경, 인물 등의 다양한 그림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일곱 번째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뜻밖의 그림에 은경의 입이 턱 벌어졌다.
“어머, 이 기집애 봐라.”
* * *
은경은 은서와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자고로 폭탄은 사람들 많을 때 터트려야 제맛인 법.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은경은 스케치북을 살랑살랑 흔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엄마, 아빠! 우리 은서, 사랑에 빠졌나 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식탁에 앉은 가족들이 일제히 은경을 바라보았다.
은경이 스케치북을 펼쳐 은서가 몰래 그린 그림을 보여 주자, 유 회장과 신 여사는 눈동자가 확장되었고 은서는 사색이 되었다.
두 손으로 빨개진 볼을 짚으며 당황해하던 은서는 이내 손을 뻗어 스케치북을 냉큼 빼앗았다. 그러나 빼앗으면 무얼 하나. 이미 연정을 듬뿍 담아 그린 그림이 시원하게 공개가 되었는데.
“은서야, 너 차 사장에게 마음이 있는 거냐?”
유 회장이 들뜬 기색으로 물었다.
“…….”
은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혼자서 몰래 간직해야 하는 짝사랑을 이렇게 허술하게 들켜 버리다니.
“엄마, 아빠. 리셉션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은경이 발랄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지금 은경은 부부싸움도 잊고 막내의 풋풋한 사랑에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웬 취객이 우리 은서한테 치근덕거리는 걸 차 사장님이 근사하게 물리쳐 줬어요. 은서 놀랬다고 따로 바깥으로 데려가서 재킷까지 벗어 주고요.”
은서의 얼굴로 짙은 낙담이 드리워졌다. 그 일은 부모님께 비밀에 부쳐 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했건만.
“그럼 그 재킷 주인이 우현이가 아니었어?”
“…….”
신 여사의 물음에 은서는 이번에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 은서가 그 재킷을 우현이가 줬다고 했어요? 우현이는 무슨. 차 사장님 거였지. 은하 언니가 다 봤대요. 차 사장님이 우리 은서 분수대 앞으로 데려가서 재킷도 벗어 주고 다정하게 달래 줬대요.”
“다, 다정하지 않았어. 그냥…… 평범했다고.”
이제야 은서가 고개를 슬쩍 들고 목소리를 냈다. 은경은 홍당무가 된 동생의 얼굴을 보고 키드득거렸다.
“아무튼, 그 재킷 주인은 차 사장님이잖아. 재킷은 깨끗하게 드라이해서 잘 돌려줬겠지? 그날 이후로 둘이 썸 타는 중인 거야?”
썸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모른다구!”
“뭐? 그럼 재킷은 어쨌는데?”
“……아직 못 돌려줬는데.”
“야! 결혼식이 언젠데 아직도 재킷을 안 돌려줘? 연락처를 모르면 나도 있고 은하 언니도 있고 아버지도 계신데, 그냥 물어보면 되지 그걸 못해서 바보처럼 굴어? 그럼 뭐야? 썸도 뭣도 아닌데, 너 혼자 푹 빠져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던 거야?”
“…….”
은경이 언성을 높였다. 은서는 또다시 죄인처럼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소심한지 모르겠어.”
“은경아, 그만해라.”
유 회장이 진정하라는 의미로 은경을 향해 손짓했다.
“은서야, 남의 물건을 그렇게 오래도록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아빠나 언니들한테 차 사장 연락처를 물어서 곧바로 돌려줬어야지.”
“…….”
“한시 빨리 날을 잡아야겠다.”
“네?”
당황한 은서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차 사장을 만나기는 해야 될 거 아니냐. 재킷 돌려주면서 미안하다고 꼭 사과하거라.”
“아빠, 저…….”
“그럼 차 사장 옷을 네가 계속 가지고 있을 거냐?”
유 회장의 엄격한 태도에 은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아빠 말대로 해. 차 사장 만나서 재킷도 돌려주고 맛있는 밥도 먹고.”
신 여사가 기죽은 은서의 어깨를 살살 만져 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은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살면서 부모에게 반항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 고분고분 온순하게 순한 양처럼 살아온 은서였다.
이번 일 역시 제멋대로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며칠 뒤, 유 회장은 차강혁의 부친인 차 회장과 골프를 치면서 약속 날짜를 잡았다고 알려 주었다. 진행 속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수준이었다.
은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불편한 자리에 끌려 나오게 된 차강혁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유 회장은 리셉션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게 된 후로, 그에 대한 호감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런 사내라면 얼마든지 딸을 맡길 수 있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것이다.
유 회장이 차강혁을 은서의 신랑감으로 보고 있다는 건, 이제 지나가는 개도 아는 일이었다.
유 회장의 그러한 생각은 차 회장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이고, 차 회장은 장남에게 유 회장이 널 사윗감으로 보고 있다며 넌지시 말을 전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어른들이 나서서 주선된 만남이다. 재킷을 돌려준다는 건 순전히 핑계에 불과할 뿐, 실은 결혼을 전제로 한 맞선이었다.
‘그 사람, 부담스럽겠지. 거절하고 싶어도 모기업 회장의 제안이라 거절하지도 못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짝사랑하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설레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가 저를 싫어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 * *
무거운 긴장감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설렘을 끌어안은 채 약속의 날이 도래했다.
만남은 W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는데, 차강혁은 레스토랑 전체를 예약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했다.
높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서는 아름다운 조명이 떨어져 내리고, 중앙 홀에서는 앙상블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웨이터는 음식을 내어 와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세팅했고, 글라스에 와인을 채워 준 뒤 물러갔다.
은서는 차강혁의 배려에 감동받았다.
대충 커피만 마시고 만남이 끝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 예상이 완벽히 빗나간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오직 단둘이서 식사를 하다니.
“재킷 감사했습니다. 늦게 돌려드려서 죄송해요.”
은서는 깔끔하게 드라이 된 재킷을 건네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차피 잊고 있었으니,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무신경한 대답에 감동 받았던 마음이 파사삭 깨져 버렸다.
잊고 있었다니……. 그때 일로 저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버렸는데, 이 남자에게는 그 일이 그저 가볍게 잊고 넘길 법한 것으로 치부되어서 조금은 서운했다.
하지만 은서는 내색하지 않고 방긋 웃어 보였다.
“갑자기 이런 약속이 생겨서 많이 놀라셨죠? 저희 아버지께서 괜히 일을 크게 만드시는 바람에…….”
“아뇨. 놀라지는 않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네? 감사요?”
“유 회장님께서 먼저 맞선을 제안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분 좋았어요.”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는데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기만 했다. 좀 웃어 주지.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면 정말로 근사할 것 같은데.
“아, 네……. 저도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고는 침묵이 찾아왔다. 차강혁은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
은서도 그를 따라 와인을 마셨다. 와인이 들어갔는데도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 든다. 안 그래도 긴장했는데, 이 남자가 별말이 없으니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긴장을 느슨하게 풀려면 역시 침묵보다는 대화다. 은서는 머리를 굴려 다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차 사장님께서는 선박을 건조하는 일을 하시죠? 저는 그림을 그려요.”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친하지 않은 상대와는 대화를 잘 이어 나가지 못하는 은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해 보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에 돌아오는 대답은 참으로 무성의하기만 했다. 차강혁은 단조로운 답만 할 뿐,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나한테 궁금한 것도 없나.’
기운이 빠져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왔다. 은서는 아름다운 음악에 힘입어 다시 말을 꺼냈다.
“이 곡 너무 좋죠?”
“네. 좋네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곡이에요. 근데, 사실 저는…… 클래식보다는 재즈를 더 좋아해요.”
그 말을 하면서 은서는 살짝 수줍어했다.
“차 사장님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세요?”
“전 음악 잘 안 듣습니다.”
“아, 네…….”
또 대화가 끊겼다. 참 어려운 남자다. 장소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남자의 불성실한 태도가 은서를 실로 맥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좀 더 붙임성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현이처럼 다정하고 살가운 성격이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을 텐데.
아니다. 내가 애교가 넘치고 사교성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이런 남자에겐 그런 사랑스러운 여자가 제격일 테지…….
소심한 성격답게 은서는 문제의 원인을 결국 스스로에게 돌렸다.
“저는…… 영화 보는 거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거 좋아하고, 전시회 보러 다니는 거 좋아하는데요. 차 사장님께서는 뭘 좋아하시나요?”
은서는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냈다. 입가에 경련이 일 만큼 의식적으로 미소까지 지으면서.
“전 일하는 거 좋아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참 협조를 안 해 준다. 어쩜 이리도 무뚝뚝한지.
은서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저에게 단 1%의 호감도 없다는 것을. 맞선을 제안해 줘서 감사했다는 말은 그저 입에 발린 말에 불과했다.
그의 얼굴에 표정이랄 게 없는 것도, 사무적인 말투도, 대화가 뚝뚝 끊어지는 것도, 모두 다 당연했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자와 억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내는 건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굳이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노력은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재킷만 돌려주고 깔끔하게 자리를 뜨는 게 이 남자를 위하는 일이었으리라. 어차피 맞선 따위는 원하지도 않았을 테니.
은서는 글라스를 잡아채고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저, 이제 그만…….”
“나랑 살면 별로 재미없을 겁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겠다고 말하려는데 선수를 빼앗겼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서가 눈을 맹하게 떴다.
“네?”
“은서 씨가 말한 대로 난 대형 선박 만들어서 파는 놈입니다. 은서 씨도 이쪽 업계가 거칠고 하드하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겠죠. 업계 성향이 그러면 일하는 사람도 자연히 그 성향을 따라가게 됩니다. 나도 거칠고 하드하다는 말입니다.”
“…….”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일밖에 없습니다. 예술은 쥐뿔도 몰라요. 은서 씨 같은 예술가와 나 같은 사업가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가려던 참이었다고. 맘에 안 든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하네. 괜히 서러워져서 눈가가 화끈거렸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결혼하죠.”
“……네에?”
은서가 나사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나랑 재미없이 살아도 괜찮다면, 결혼하잔 말입니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줄곧 저한테 관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면서, 대뜸 결혼을 하자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제안이었다.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요?”
“난 결정을 빨리 내리는 편이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
“충분히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나한테는 결혼도 비즈니스입니다. 이득이 생기면 하는 거죠. 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을 뿐입니다. 유성중공업 사위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 결국은 조건이었구나. 나에게는 일말의 관심과 감정도 없으면서, 고작 조건 하나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거구나…….
은서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감정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럼 나는 차강혁과는 다르게 순수한가?’라고 자문을 던져보면, 단호하게 ‘아니오.’라는 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저 역시 순수한 의도를 품고 차강혁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걸출한 능력, 알파메일 다운 호기, 건장한 체격과 근사한 외모, 저음의 목소리에 이끌렸을 뿐이다.
만약 그가 무능력했다면, 그가 저처럼 소심한 성격이었다면, 그의 체격이 볼품없고 외모가 별로였다면, 그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가 자신을 구해줬어도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순수라…….
여기서 순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강혁도, 유은서도, 그리고 양가 부모들도, 그 누구도 순수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혼맥으로 더 큰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맞선을 주선했다.
유 회장은 차강혁의 출중한 능력과 패기 넘치는 성향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만약 그가 삼우조선의 사장이 아니라 어디 변두리 회사의 사장이었다면 귀한 막내딸과 아예 엮으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 회장 역시 은서가 유성중공업의 막내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화가였다면 장남을 맞선 자리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시장에서 애당초 순수를 찾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엄연히 따지고 보자면 공평한 셈이었다. 차강혁은 유은서의 배경을 원하고 있었고, 유은서는 차강혁이 발산하는 수컷다운 매력에 매료되었으니까.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 몇 번은 더 만나봤으면 해요.”
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 맞선을 보자마자 결혼을 결정해 버리는 건 억울하니까.
“그럽시다.”
그는 감흥이라고는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 * *
식사를 끝내고 나왔더니 호텔 정문 앞에서 롤스로이스 팬텀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강혁의 운전기사인 윤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데려다줄게요. 타요.”
차강혁의 말에 은서는 잠깐 주저하다가 차에 올라탔다.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어 그가 은서의 옆자리에 올라탔고, 윤 기사는 운전석과 뒷좌석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불투명한 유리 칸막이를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은서는 자신의 개인 기사인 정 기사에게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괜히 꼼지락거리며 홀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아무 말이라도 꺼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입 닫고 있는 게 좋을까?’
분위기는 레스토랑에서보다 더 어색했다.
롤스로이스가 아무리 넓고 훌륭하다고 한들, 레스토랑에 비하면 훨씬 좁다. 밀폐된 공간이라 그런지 공기 밀도마저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서는 찬찬히 호흡을 고르고 곁눈으로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고 결정한 은서는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앗!”
은서가 얼른 허리를 굽혀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차강혁 역시 휴대폰을 주우려고 팔을 길게 뻗었다. 한순간에 서로의 손이 포개졌다.
의도치 않게 은서는 휴대폰이 아니라 그의 손을 겹쳐 잡고 말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몸이 급격히 얼어붙어서 손을 쉽사리 뗄 수가 없었다. 은서는 저도 모르게 수 초간이나 커다랗고 잘생긴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뒤늦게야 숨을 들이마시고 겨우 손을 떨어뜨렸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가슴이 발작하듯 두근거렸다. 민망하면서도 마음이 봄처럼 설렜다.
“여기.”
그는 휴대폰을 주워 은서에게 돌려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차강혁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뜻밖의 사고로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날뛰는 은서와 달리, 그는 한없이 평온하고 무감해 보였다.
은서는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저, 혹시…… 리셉션 파티에서 있었던 일로 곤란한 일이 생기지는 않으셨나요? 윤종하 씨가 차 사장님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돼요.”
“잘 처리했으니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는 적선하듯 눈길을 짧게 던져 주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한 3초 정도 눈을 맞춘 것 같았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대답 또한 참 그랬다.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말이 관심 끄라는 것처럼 들려서 괜히 섭섭했다.
발광하듯 날뛰던 가슴은 찬물을 확 때려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은서는 그의 마음을 재차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 저에게 호감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것이다.
‘이럴 거면 왜 데려다준다고 한 거야? 그냥 알아서 집에 가게 내버려 두지.’
불현듯 의문이 피어올랐다. 과연 다음 만남이 존재하기나 할까?
대화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그는 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만남을 이어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좀 더 만나 보자는 제안에 그는 ‘그럽시다.’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어투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심지어 귀찮다는 뉘앙스마저 얼핏 느껴졌다.
과연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지 은서는 도저히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고 나면 그는 일절 연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차강혁은 결혼 시장에서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그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여자를 찾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늘 만남을 뒤로하고 새로운 여자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집안도 좋고, 즐겁게 대화도 나눌 수 있고, 그를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게 할 그런 여자를…….
은서는 고개를 떨구고 속으로 한숨지었다.
* * *
무거운 침묵과 복잡한 심경을 껴안은 채 롤스로이스가 은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강혁이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 주었다. 덕분에 은서는 편하게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울적했다.
아마도 이게 그가 보여 주는 마지막 매너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까.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은서는 우울한 심경을 애써 숨기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괜히 그의 성의 없는 말만 믿고 연락을 기다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그에게 등을 보이고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때, 낮은 목소리가 발목을 강하게 붙잡아 세웠다.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됩니까?”
“……네?”
은서는 몸을 돌리고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말에 뒷머리가 아찔해졌다.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되는지 물었습니다.”
“…….”
“우리, 데이트해야죠.”
“…….”
“저는 점심, 저녁 다 여유 있습니다.”
“아…….”
은서는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아마도 저는 이 남자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레스토랑에서도 차 안에서도 내내 무뚝뚝하게 굴었으면서, 뻔뻔하게 데이트를 운운하다니.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명치는 살살 간지러워졌다. 숨죽이고 있었던 설렘이 슬금슬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볼 수 없을 거라 단정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데이트 신청을 받을 줄은 몰랐다. 기대하지 못했던 만큼 기쁨은 배가 되었다.
“저도 점심, 저녁 시간 다 돼요.”
은서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럼 정확한 시간은 차차 잡죠.”
“네……. 그럼 그때 봬요.”
은서는 다시 그에게 등을 보이고 걸었다.
대문을 통과해 정원 길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데, 걷는 게 걷는 것 같지 않고 무중력 공간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
은서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 회장과 신 여사는 눈을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빛내며 맞선이 어땠는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자세히 말해 봐.”
“그냥 밥 먹고 대화 좀 나눈 것뿐이에요. 한 번 더 만나기로 하기는 했어요.”
은서는 솔직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차강혁이 결혼을 언급했다는 이야기만큼은 절대로 꺼내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를 하는 즉시, 아버지는 신이 나서 성급하게 결혼을 추진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언제? 언제 또 만나기로 했는데?”
“다음 주 일요일이요. 엄마, 아빠, 저 피곤해요. 올라갈게요.”
“왜? 조금 더 얘기해 주지 않고.”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별로 말씀드릴 것도 없어요.”
“밥 먹으면서 대화했다며. 차 사장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어?”
유 회장이 끈질기게 물었다. 은서는 할 말이 없었다.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곤란하게 입술을 깨무는 은서를 보며 신 여사가 유 회장의 팔뚝을 툭 쳤다.
“당신도 참. 너무 그렇게 캐묻지 말아요. 남녀 사이 일인데 곧이곧대로 다 말하고 싶겠어요?”
“아, 그런가.”
“그럼요.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잖아요. 은서랑 차 사장이 알아서 잘하겠죠. 은서야, 올라가서 쉬어.”
그제야 은서는 끈질긴 심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차강혁과의 만남을 돌이켜 보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개운하게 몸을 씻어도 복잡한 머릿속은 좀체 말끔해지지 않았다. 차강혁이라는 남자는 은서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미로처럼 어렵고,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남자였다.
젖은 머리칼을 말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더니 언니들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니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차강혁에 대해 물었다.
[맞선 어땠어? 차 사장님, 좋은 남자인 것 같아?]
[기업인 차강혁 말고, 남자 차강혁은 어떤 스타일이었니?]
은서는 잘 모르겠다고 회신했다. 진심이었다. 그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남자였기에.
* * *
일요일 저녁, 은서의 집 앞으로 스포츠카 한 대가 멈춰 섰다. 날렵한 몸체에 트렌디한 느낌을 물씬 자아내는 강렬한 붉은색의 페라리 스파이더였다.
대문 앞에 서서 차강혁을 기다리고 있던 은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보았던 웅장하고 묵직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롤스로이스 팬텀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페라리의 유리창은 진하게 선팅되어 있어서 바깥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이 차강혁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때, 유리창이 스르륵 내려가고 근사한 얼굴이 나타났다.
“타죠.”
“직접 운전하고 오셨나 봐요.”
은서가 배시시 미소를 짓고 차에 올라타자 그는 액셀을 밟았다. 차는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10월의 저녁은 벌써부터 깜깜했다. 거리의 조명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을 은은히 내뿜고 있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둠을 가르며 달려가는 페라리 안은 낭만과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지난 만남처럼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그들을 에워싼 공기는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페라리가 멈춘 곳은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지배인이 예약한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회원제로만 운영된다는 이 레스토랑은 테이블이 일곱 석밖에 없었고, 모두 룸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서 프라이빗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뭐 먹을 겁니까?”
그가 메뉴를 넘겨 보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스페셜 코스 요리로 부탁합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그는 더 묻지 않고 알아서 주문했다. 지배인이 물러가자 은서는 눈동자를 빙그르르 굴려 룸 내부를 살펴보았다.
순백의 테이블보는 깨끗한 느낌을 자아냈고, 은색의 커트러리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높은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룸 내부를 환하게 비춰 주었고, 거대한 통창으로는 탁 트인 도심의 전경이 내다보였다.
세련된 분위기와 그림 같은 시티 뷰, 데이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문제는 사람이 데이트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차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레스토랑에서도 핑퐁 같은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할 때 잠깐 말이 오간 이후로는 침묵만이 조용히 흐를 뿐이었다.
차강혁은 말뿐만 아니라 표정조차도 없었다. 지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은서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그의 눈치만 살피며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이건 분명 데이트였지만, 결코 데이트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테이블 위로 애피타이저가 올라왔고 웨이터는 투명한 글라스에 적색의 술을 채워 주고 물러났다.
와인 잔으로 손을 뻗는 은서와는 달리, 그는 잔을 한쪽으로 밀쳐 두었다.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인 안 드세요?”
“내가 술 마시면 운전은 누가 합니까.”
아, 맞아. 이 남자 오늘 차를 손수 몰고 왔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갑자기 고갯짓이 뚝 멈추었다.
은서는 깊은 생각 끝에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이따 가실 때 기사님 부르면 안 될까요? 만약 기사님이 못 오신다면, 택시를 타거나 대리운전을 불러도 되구요. 같이 마셨으면 좋겠는데…….”
“난 됐습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이었건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저번에는 그래도 같이 와인을 마셔 줬는데, 이번에는 같이 마시기도 싫다는 건가.
별수 없이 은서는 혼자서 와인을 넘겼다. 드라이한 술이 식도를 적신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시나브로 마시다 보니 벌써 잔이 비었다. 그는 능숙하게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적정한 높이로 차오른 술을 보면서 은서는 문득 생각했다. 와인을 따라 주는 대신,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운전 얘기 이후로 대화는 또 끊겨서 계속 정적 상태였다.
말 많은 남자는 가벼워서 별로라고들 하지만, 막상 차강혁처럼 말이 없는 남자를 상대하다 보니 외려 가벼운 남자가 낫다 싶었다.
수다스러운 남자는 적어도 이렇게 숨통을 막히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저…… 차 사장님은 별자리가 어떻게 되세요?”
“그런 거 모릅니다.”
고심하고 고심해서 겨우 대화 주제를 찾아내 말문을 다시 열었는데, 그는 노력에 보답해 주지 않았다. 달랑 모른다고만 할 뿐 거기서 말을 더 보태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잘 모르니 알려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별자리를 묻든가 할 텐데, 그는 ‘모른다.’가 끝이었다. 지극히도 비협조적인 태도였다.
“생일이 언젠데요? 제가 알아봐 줄게요.”
그럼에도 은서는 포기하지 않고 뚝심 있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버거운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건, 그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10월 31일.”
답을 듣자마자 은서는 휴대폰으로 그의 생일을 검색해 보았다.
“전갈자리네요.”
“…….”
“음……. 전갈자리는 질투심이 강하고, 소유욕이 세다고 하네요.”
은서는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을 술술 읽었다.
“전 물고기자린데, 물고기자리는 애정을 무한대로 퍼 주는 로맨티시스트래요.”
“…….”
차강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게 확실했다. 은서는 주제 선택을 잘못했다며 후회했다.
어린애들도 신빙성이 없다며 믿지 않는 별자리 심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논리와 이성으로 중무장한 비즈니스맨 차강혁 앞에서 꺼냈으니 오죽할까. 패착도 그런 패착이 없었다.
“이런 거 안 믿으시죠? 사실 저도 안 믿어요. 그냥 차 사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 꺼낸 것뿐이에요.”
“미안합니다.”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주절거리자 그가 불쑥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느닷없는 사과에 은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난 여자랑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편이라,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나랑 살면 재미없을 거라고.”
“그럼 이때까지 여자랑 데이트할 때, 대화가 아니면 대체 뭘 하셨는데요?”
인기가 대단히도 많은 남자라 분명 여러 여자들을 만났을 텐데. 그동안 여자들을 만나면서 대화를 잘 나누지 않았다면 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은서의 미간에 주름까지 생겼다.
그는 곧은 시선으로 은서를 응시했다. 짙고 까만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왠지 위험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저를 단번에 집어삼킬 것처럼 어둡고 깊은 눈…….
그는 은서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런 기품 있는 레스토랑보다는 주로 침대로 데려가죠.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옷을 벗기고요.”
감히 예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극도로 당황한 은서는 뺨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방금…… 너무 무례했어요. 선을 넘으셨다구요.”
은서는 숨을 고르고 겨우 한 소리 했다. 따끔하게 지적을 하는 말이긴 했으나 얼굴은 상기되고 목소리는 벌벌 떨려서, 그 말은 그저 어설프게 들릴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없이 어수룩한 그녀의 모습에 차강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은서 씨가 질문을 했고 난 솔직하게 답한 것뿐인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뻔뻔하고도 뻔뻔한 그의 대답에 반박할 의지가 꺾였다. 논쟁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 은서다. 특히나 차강혁처럼 어딘가 어긋나고 뒤틀려 보이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은서는 아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침묵의 기류가 금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입을 닫았다고 해서 불쾌한 감정도 함께 수그러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을 밖으로 분출해 내지 못한 탓에 열이 더 차올랐다.
화가 났다. 남자의 무례한 응수에 화가 났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과 실컷 잤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은서는 거칠게 와인 잔을 잡아채, 와인이 무슨 냉수라도 되는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켜 마시고는 숨을 씩씩거렸다.
잔이 비는 건 금방이었다. 차강혁은 한쪽 입매를 유려하게 끌어 올리고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왜인지 그는 즐거워 보였다. 지루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으니까.
은서가 순한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 술을 무분별하게 퍼마시는 게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묘한 미소에 은서는 더욱더 열이 치솟아 올랐다. 날 놀리는 게 재미있어? 내 기분을 상하게 하니까 좋냐고! 분노에 사로잡혀서 거침없이 술을 쭉쭉 삼켰다.
잔이 비면 금방 술이 채워진다. 그럼 은서는 또 급하게 술을 마시고, 그는 또 능숙하게 술을 부어 주기를 반복했다.
* * *
은서는 취했다. 과음의 결말은 늘 그런 것이다.
차강혁이 운전을 하는 동안, 그녀는 조수석이 제집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태평하게 늘어져 잠이나 잤다.
페라리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가 은서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제야 은서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나 움직임은 없었다. 의식이 흐리멍덩했다. 알코올에 달큰하게 적셔진 뇌는 잔뜩 흐물흐물해져서, 행동이 빠릿빠릿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맨정신이었다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벌써 차에서 내렸을 텐데, 취기에 한껏 사로잡힌 은서는 시트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는 멍하게 흐트러진 동공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던 은서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만졌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헤아려 보자면, 이건 도를 매우 심하게 넘는 대담함이었다.
대담한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은서는 손으로 톡톡 그의 뺨을 두드려 보고는 어눌하게 웅얼거렸다.
“차강혁, 너어. 참 잘생겼네…….”
“너?”
그의 눈썹이 삐딱하게 휘어졌다.
“그래, 너…….”
불분명한 발음으로 주절거리면서 은서는 손을 느릿느릿 움직여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 두꺼운 팔뚝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몸도 좋아. 딱딱해.”
평소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짓들을 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감없이 하는 중이었다. 날이 밝고 술에서 깨면 분명 후회하리라.
그러나 술주정뱅이에게 다음날을 생각할 만큼의 멀쩡한 정신머리가 있을 리 없다. 술주정뱅이가 왜 술주정뱅이겠는가.
“근데에, 너……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싸가지가 없어. 헤헤…….”
은서는 콧등을 씰룩거리고 바보처럼 헤 웃었다. 그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다.
“차강혁……. 너어, 나 싫지? 나도 너 싫어.”
술주정뱅이답게 두서없는 말들을 잘도 지껄여 댔다.
“근데…… 사실은 좋아.”
그러나 두서없는 말들 속에서도 진심은 있다. 일종의 취중 진담인 셈이다.
“너어…… 되게 재수 없는데, 그런데도…… 난 네가 좋아.”
일순, 그의 눈빛이 변했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안광은 사냥감을 발견한 야만적인 짐승처럼 거칠고 음산해 보였다.
“네가 너어무 좋아서 온종일 네 생각만 하구……. 네 꿈도 꾸고…… 읍!”
키스는 언제나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방심하는 순간, 입술은 도둑맞고 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