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30)

1권

프롤로그

* * *

두 달 전, 은서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를 다쳤다.

5주 동안은 통깁스를 하고 그 후로 3주 동안은 반깁스를 했다. 무려 8주간이나 갑갑한 석고 붕대에 다리가 감긴 채로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해서 지내 왔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날이었다.

은서는 진료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앉아 깁스를 한 오른쪽 다리를 길게 뻗었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의사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곧이어 붕대가 다 풀리고, 다리를 고정시키던 단단한 석고가 떨어져 나갔다.

다리를 압박하듯 조이던 석고와 붕대가 사라지자 마침내 해방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해방감도 잠시, 무릎 위를 가로지르는 지네처럼 길고 징그러운 흉터를 보자 마음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흉측한 흉터가 하나도 모자라 이제는 두 개나 생겼다.

무릎에 새로 생긴 선명하고 진한 흉터는, 오래전 정강이에 새겨진 연한 분홍빛의 흉터와 짝이라도 맞춘 듯 보였다.

열세 살 때에도 은서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문 앞에는 항상 실버색 세단이 어린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단은 은서를 싣고 학원으로 향하고는 했다.

어느 날은 판에 박힌 그 일상이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나도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 먹고 싶은데.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도 읽고 싶은데…….」

그날은 타고나길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은서가 처음으로 일탈을 감행한 날이었다.

검은색 슈트를 멀끔하게 차려입은 경호원이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은서는 차에 올라타는 척을 하다가 가방을 경호원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지고 무작정 달렸다.

경호원이 애타는 목소리로 ‘아가씨!’라고 부르짖으면서 뒤쫓았다. 은서는 멈추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달리고 또 달렸다.

때마침 맞은편 시장 골목이 보였다.

「저긴 좁으니까 숨기에 좋지 않을까?」

이대로는 경호원에게 금방 붙잡힐 것이 뻔했다. 달리기로 건장한 경호원을 따돌릴 수 있을 만큼, 은서는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도 지구력이 좋지도 않았으니까.

운명처럼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은서는 좁은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더욱 속력을 내서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작은 몸은 신호를 위반하고 달려오던 차체에 부딪혀 힘없이 튕겨 나갔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병원 천장이 초현실주의 화폭처럼 혼란스럽게 일렁거리고 있었고, 오른쪽 다리에는 깁스가 단단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열세 살 때 정강이에 생긴 흉터가 하나, 그리고 지금 서른한 살이 되어서 무릎에 생긴 흉터까지 둘.

내 오른쪽 다리는 참 운이 없는 모양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번번이 험한 꼴만 보네.

“무릎을 천천히 굽혔다가 펴 볼까요?”

초로의 의사는 다리 상태를 꼼꼼히 체크한 후 점잖게 말했다. 은서는 지시대로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어떻습니까?”

“아프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아요.”

“자, 그럼 목발 없이 천천히 일어나 볼까요?”

은서는 침대에 올려 두었던 다리를 내려 신발을 신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손등 위로 힘줄이 도드라진 큼지막한 남자의 손이 대뜸 은서의 여린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볍게 잡았을 뿐인데도 강한 악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괜찮겠어?”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짤막한 말이었는데도 강한 악력의 손길처럼 목소리에서도 묵직한 위압감이 묻어났다.

“괜찮아요. 혼자서 일어날게요.”

은서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남자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짙은 밤처럼 검은 눈동자가 말없이 그녀를 겨누었다. 직선으로 찬란하게 꽂혀 드는 눈빛에는 걱정이 자욱했다.

이상하고 어색하다. 이 남자가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본다는 것이.

사고 이후로 그는 내내 이런 눈이었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걱정스럽고 불안한 시선…….

냉혹하고 차갑기만 하던 남자가 연민 가득한 눈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사고를 당하고 나서 처음으로 알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내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은서는 손목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강혁.

은서보다 세 살 연상인 그는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진한 눈썹과 영민하게 빛나는 눈동자, 높고 날렵한 콧대와 살짝 도톰한 입술은 근사한 조화를 이루고, 다부진 턱선과 볼록하게 솟아오른 목울대는 서늘하면서도 남성적인 매력을 넘치게 내뿜고 있었다.

191cm의 장대 같은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의 윤곽에서는 위력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고는 했다.

차강혁은 어디 하나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는 남자였다. 그는 신이 아주 공들여서 만든 창조물임이 분명했다.

그를 볼 때마다 은서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와 결혼을 한 지도 어느덧 벌써 1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가 제 남편이라는 사실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은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까, 손 놔요.”

그러나 차강혁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은서는 다시 또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좀 더 강한 힘을 실어서.

“당신, 지금 진료를 방해하고 있어요.”

“차 사장님, 사모님은 괜찮으실 테니 저를 믿고 손을 놔주셔도 됩니다.”

부부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의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을 거들었다.

그제야 그는 손을 놓아주었다. 손은 거둬들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집요하게 은서를 직선으로 겨누고 있었다.

은서는 그 끈질긴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목발에 의지하지도 않고,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만.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는 느낌이 실로 오랜만이라 생경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때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그럼 한번 걸어 보시겠습니까? 진료실 한 바퀴만 돌아보죠.”

은서는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오른쪽 다리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야 하긴 했지만, 걷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리를 살짝 저는군요.”

차강혁은 은서가 걷는 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말했다.

“아, 그건 깁스를 오래 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겁니다. 긴 시간 동안 오른쪽 다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근육도 빠지고 힘도 빠져 있는 상태거든요. 곧 좋아지실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친절하게 대답한 의사는 의자를 끌어와 탁탁 두드리며 은서에게 여기 앉으라고 일렀다. 은서가 자리에 앉자 의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뼈는 잘 붙었습니다. 예정대로 깁스 다 풀고 목발도 이젠 쓰지 마세요. 물리치료는 오늘 마지막으로 받고, 앞으로는 혼자서 걷는 연습을 하도록 합시다. 걷기 외에 다른 운동은 하시면 안 되고, 걷기 운동도 평지에서 천천히 30분 이내로 걸어야 합니다.”

진료가 끝나자, 차강혁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은서는 고개를 내젓고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났다.

“먼저 가요. 난 치료받고 갈게요.”

물리치료를 받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짧지 않은 시간이다. 특히 차강혁처럼 바쁜 사업가에게 한 시간은 금쪽같지.

오늘도 깁스를 푼다고 업무 시간을 빼서 병원에 같이 와 줬는데, 그의 시간을 여기서 더 빼앗을 수는 없겠다 싶어 먼저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냐. 기다릴게.”

단호한 목소리가 은서의 귓전을 두드렸다.

기다리겠다는 대답 하나에 마음이 묘하게 넘실거린다. 왼쪽 가슴 주변으로 뜨거운 열이 번지면서 심장이 쿵쿵 발길질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작 이런 일로 설레느냐고 우스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차강혁과 유은서는 그런 사이였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사이.

부부라고 해서 모두들 말랑말랑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니까.

* * *

한 시간쯤 뒤에 물리치료가 끝났다.

물리치료실에서 나오는 은서를 향해 차강혁이 또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재차 거절했다. 그에게 의지하지 말고, 혼자서 걷는 법을 빨리 익혀야 했다.

그러나 차강혁은 이번만큼은 거절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은서의 손을 낚아채더니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끌리듯 따라가면서 은서는 큼지막한 손에 시선을 던졌다.

손가락은 길고 늘씬하게 뻗었지만, 마디는 은근히 굵어서 남성적인 아우라가 한껏 느껴진다. 한없이 강인해 보이는 손.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병원 정문 앞에는 강렬한 붉은색의 페라리가 주차되어 있었다. 은서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다 진료 시간에 맞춰, 윤 기사가 모는 롤스로이스 팬텀을 타고 은서를 픽업해서 병원으로 왔다.

그런데 지금, 윤 기사도 롤스로이스도 보이지 않고, 대신 페라리가 눈앞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윤 기사님은요?”

“먼저 보냈어.”

“그럼 이 차는…….”

“윤 기사가 갖다 놨지.”

“아니, 그런 수고로운 짓을 대체 왜…….”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조수석 문을 벌컥 열어 다짜고짜 은서를 태웠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올라타 액셀을 밟았다.

문득, 결혼 전에 그와 데이트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간에 그는 맞선을 보던 날을 제외하고,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트렌디한 스포츠카를 직접 몰고 왔었다.

웅장한 롤스로이스 팬텀은 업무용이지, 데이트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 뜻은 아니지만.

은서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면서 해가 짧아졌다. 오후 6시, 황혼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 빛으로 물든 가을 하늘이 낭만적이면서도 왠지 애처로워 보였다.

하염없이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이 거리가 낯설다는 것을.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

“우리 어디로 가요?”

“밥 먹으러.”

“밥이요? 집에서 안 먹고요?”

“레스토랑 예약했어.”

“왜요?”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만개했다.

결혼 전에나 예의상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밥을 먹었지, 결혼 후로는 그런 일이 일절 없었다. 간지럽게 그런 걸 할 만큼 부부 사이가 좋지는 않았으니까.

“그냥.”

차강혁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무뚝뚝하고 건조한 말투, 동요 없는 목소리.

아니, 늘 그런 건 아니다. 적어도 은서를 집어삼킬 때만큼은 그도 짐승처럼 난폭하게 으르렁거리니까.

* * *

프렌치 레스토랑은 세련되고 호화로웠다.

이 넓은 레스토랑에 손님은 차강혁과 유은서, 오직 둘뿐이었다. 그가 레스토랑 전체를 예약해 버린 탓이다. 맞선을 보던 날처럼.

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는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고, 홀에서는 턱시도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피아니스트가 스탠다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류의 스노브한 레스토랑에서는 재즈가 아니라 클래식을 연주하던데…….’

클래식이 아닌 재즈가 흘러나와 다소 의문스러웠지만 레스토랑 오너의 취향이겠거니,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어찌 됐든 재즈를 좋아하는 은서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애피타이저로 샐러드와 관자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메인 메뉴로 송아지 스테이크가 나왔다.

은서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칼질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나이프가 고기를 제대로 자르지 못하고 번번이 엇나가는 것이다.

“썰어 줄까?”

무감한 목소리가 물었다. 은서는 눈을 맹하게 떴다.

거절할 틈도 없이 접시를 빼앗겼다. 그는 먹기 좋은 크기로 스테이크를 썰더니, 네모난 고기 조각을 은서의 입술 앞으로 대령했다.

은서는 그만 굳어 버렸다.

그래, 스테이크를 썰어 주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먹여 주는 건 심히 당황스러운데…….

“안 먹고 뭐 해. 아, 해 봐.”

꼼짝도 않고 있자 그가 재촉했다. 자상한 행동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어서.”

그가 한 번 더 엄하게 다그쳤다.

은서는 조종이라도 당한 것처럼 입을 벌려 고기를 앙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씹어 삼키자 그는 또다시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술 앞으로 고기를 들이밀었다. 황당하다.

“이러지 않아도 돼요. 내가 알아서 먹을…… 읍!”

괜찮다고 사양을 하려는 순간, 고깃덩어리가 입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처구니가 없어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칼질하는 솜씨가 영 형편없어서, 그냥 두고 봤다가는 날 새겠더군. 내가 먹여 주는 게 훨씬 효율적일 거야.”

밥 먹는 일에 효율 타령하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비즈니스 마인드로 중무장한 차강혁 같은 남자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럼 썰기만 해 줘요. 먹는 건 내가 알아서……. 우웁!”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고기가 또 입속으로 들어왔다. 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이후로도 똑같은 패턴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벙긋거리면, 그는 기계처럼 입안에다 고기를 쏙쏙 집어넣었다.

스테이크를 다 해치울 때까지 그는 우직하게 그 행동을 반복했다. 사육이라도 하는 것처럼.

메인 메뉴를 먹고 난 후에는 웨이터가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은서는 스푼으로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푹 찔렀다.

그런데, 무언가 딱딱한 게 닿았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푼으로 아이스크림 내부를 뒤적거렸다. 딱딱한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지고 홍채가 팽창되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속에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은서는 스푼으로 반지를 떠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반지잖아.”

“아니, 내 말은……. 이 반지, 혹시 강혁 씨가 나한테 주는 거예요?”

“내가 아니면 누가 주는데? 유은서한테 반지 줄 남자, 나 말고 또 있나?”

“왜 나한테 이걸 줘요?”

“내가 당신한테 선물도 못 주는 건가.”

선물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처음 받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단순한 선물이 아니지 않는가. 특별한 날도 아닌데 5캐럿짜리 왕방울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반지가 마음에 안 드나?”

“마음에는 들어요.”

의외의 선물에 당황하긴 했지만, 반지는 굉장히 곱고 예뻤다.

“최 실장님이 고른 거예요?”

최 실장은 차강혁을 보좌하는 비서실의 수장으로 공적인 영역, 사적인 영역을 가리지 않고 그를 열성적으로 서포트하는 남자였다.

은서는 이 반지를 당연히 최 실장이 골랐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늘 그래왔으니까. 결혼반지도 그랬고, 새빨간 튤립 꽃다발도 그랬고, 출장 선물도 그랬다. 차강혁은 여자를 위해 손수 물건을 고르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놀라웠다.

“내가 골랐는데.”

“……네?”

“내가 백화점에 가서 직접 골랐다고. 물론 점원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말도 안 돼. 이 남자가 낯간지럽게 여자 반지를 고르다니. 여자 선물이나 고를 만큼 한가한 남자가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은서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아연해했다.

반대로 차강혁은 표정 하나 없는 태연한 얼굴로 반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냅킨으로 쓱쓱 닦아 냈다. 그런 다음, 그녀의 왼손을 훅 잡아당겨서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몇 달 전에 은서는 홧김에 결혼반지를 빼 버렸으니, 네 번째 손가락에는 새로운 반지가 들어갈 자리가 얼마든지 있었다.

은서는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의문이 뇌간을 타고 사르륵 흘러내린다.

‘이 남자,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다른 사람처럼 구는 거지?’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그가 부쩍 다정해졌다는 걸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다정함이 기준치를 넘어도 너무 넘었다.

느닷없이 근사한 레스토랑을 통째로 예약하고, 음식을 친히 먹여 주고, 직접 고른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선물로 주다니…….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건가? 근데 난 이제 다 나았는걸. 아니면,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흉터가 하나 더 늘어서 안쓰러운 걸까?’

머리를 부지런히 굴려 답을 알아내 보려고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차강혁의 속내는 언제나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오늘처럼 어려운 날도 없었다. 대체 저 잘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미로 속에 갇힌 것처럼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심장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근두근, 설렘을 가득 담아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막연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어쩌면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한 부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감이.

설령 이것이 동정이고 적선이라 할지라도.

* * *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깊은 밤이었다.

“샤워할 거지?”

“네.”

“도와줄까?”

고작 네 음절의 말에 은서는 기겁해서 어깨를 크게 들썩거렸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강혁을 올려다본다.

“왜 그렇게 놀라? 처음도 아니면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그리고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곧잘 샤워를 도와주었다.

실은 도와줬다기보다는 반강제적으로 샤워를 당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땀을 조금이라도 흘렸다 싶으면 그는 멋대로 깁스한 다리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은서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어 욕실로 데려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은서는 엄마가 오면 씻을 거다, 언니들이 오면 씻을 거다, 라고 소리를 치며 완강히 거부했지만, 그는 귓등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옷을 거침없이 벗겨 냈다.

“그건 도와준 게 아니죠. 차강혁 씨가 강제로 나를 욕실로 데려가서 맘대로 씻긴 거잖아요.”

차강혁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샤워를 당할 때마다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사람은 아무리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민망한 샤워만큼은 결코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에게 나신을 보여 준 적은 숱하게도 많았지만, 욕실에서 보여 주는 건 확실히 차원이 다른 부끄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섹스는 하다 보면 정신을 놓기라도 하지만, 샤워는 끝날 때까지 맨정신이지 않은가.

“강제든 뭐든 당신은 좋아했잖아.”

“……?”

“내 손길이 스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고 아래를 적시던 걸,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직설적인 말에 은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달리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말은 비록 저질이었으나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그가 씻겨 줄 때면 온몸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체온은 끝없이 상승했다.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해지면서 다리 사이로는 매번 체액이 흘러나왔다.

차강혁이라는 남자를 알게 된 후로 제 몸은 아주 음탕해지고 만 것이다.

“나 이제 다 나았어요. 앞으로 샤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요!”

은서는 쌀쌀맞게 말을 다다닥 쏘아붙이고는, 거의 도망치듯 뛰어서 욕실로 휙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 * *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걸어가는데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차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서재 책상 앞에 서서 서류를 뒤적거리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여자야. 끔찍한 인간이라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해. 차라리 그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차강혁은 한기가 도는 목소리로 살벌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은서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악의가 진하게 배인 목소리에 오한마저 느껴졌다. 그 여자? 그 여자가 누구길래 저렇게 무섭게 말을 하지?

“서 전무한테서 전화 들어왔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의 통화 상대는 금세 바뀌었다.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엔진이 어쩌고 스트로크가 어쩌고 하는 복잡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은서는 궁금증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서재의 문을 조용히 닫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살벌한 말들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긁어 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누굴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좋았겠다고 말하는 걸까?’

은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차강혁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는 여자가 누구일지.

‘회사 사람일까? 아니면 거래처 사람? 아냐, 일과는 관련 없는 사람일 거야. 일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적으로 엮인 여자겠지. 하지만 차강혁이 일 외적으로 알고 지내는 여자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부단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의심이 가는 인물조차도 없었다.

생각하다 지쳐서 한숨을 작게 내쉬었을 때, 침실 문이 열리고 차강혁이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 협탁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나도 샤워하고 올게.”

그가 침실에서 나가자 은서는 협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까만색 휴대폰이 유독 크게 시야를 차지해 왔다.

‘휴대폰을 뒤져 보면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활활 타오른 호기심에 완전히 홀려 버린 은서는 불쑥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여자’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도 컸다.

조급한 손길로 액정을 터치해서 최근 통화 기록을 살펴보았다. 방금 서재에서 통화를 한 상대는 차강혁의 남동생인 차윤혁이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형제가 메시지를 주고받은 대화창을 찾으려고 스크롤을 내리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다.

‘민승아…….’

민승아는 차강혁이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였다.

178cm의 큰 키에 부러질 듯이 깡마른 몸매의 그녀는 패션계에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던 모델이었다.

그녀는 유니크한 외모에 뛰어난 패션 센스를 겸비하고 있었고, 소심한 성격인 은서와 달리 매사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강혁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하지만 차강혁은 유은서를 선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서는 모기업 회장의 딸이니까.

차강혁과 헤어진 민승아는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그렇게 다 끝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나 몰래 민승아와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

은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읽었다.

[오빠, 전화했네? 샤워 중이라 못 받았어.]

[어딘데.]

[집에 있지. 왜?]

[주소 찍어.]

[오려고?]

[그래.]

[갑작스럽긴 한데 오빠가 온다니까 좋긴 좋네. 샤워하길 잘했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뉴베르 오피스텔 1805호야.]

[15분 안에 도착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예쁘게 하고 있을게. 빨리 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숨통이 꽉 조여들었다.

‘뉴욕으로 떠났다는 민승아가 대체 언제 한국으로 돌아온 거지? 두 사람은 언제부터 내 뒤에서 몰래 만나고 있었던 걸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강한 충격으로 호흡조차 고르게 내쉬기 어려웠다.

은서는 불규칙한 숨을 앓듯이 쏟아내며 메시지를 주고받은 날짜를 체크했다.

제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해서 침상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시간마다 독한 진통제와 항생제를 복용하고, 통증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던 시기.

‘내가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 동안, 그는 민승아를 만났어. 그것도 민승아의 집에서…….’

배신감으로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은서는 이전 메시지들도 확인하기 위해 스크롤을 맨 위쪽까지 끌어 올렸다.

[오빠, 나 승아야. 있잖아, 나…… 한국으로 돌아왔어. 오빠는 그동안 잘 지냈어? 난 하나도 못 지냈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응. 미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빠가 없으니까 영 재미가 없더라. 나 오피스텔 구했어. 시간 날 때 놀러 와.]

이 메시지에 차강혁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은서는 직감적으로 다시 통화 목록으로 들어가, 예전 기록들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가 민승아와 통화한 내역들이 남아 있었다.

통화 기록과 대화창을 번갈아 보며 날짜와 시간대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는 답장 대신 민승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약 5분가량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나서 민승아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업무 때문에 바빴던 모양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아 부재중 통화가 두 건 찍혀 있었다.

후에 민승아는 전화를 더 걸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나 회사 앞이야. 잠깐만 만나.]

이번에도 차강혁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약 7분 정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락은 이게 다였다. 통화 횟수가 많지도 않았고, 통화 시간이 길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용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그들이 나눈 연락들이 이게 전부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에게 세컨드 폰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회사 전화로 더 많은 연락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은서는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는 차강혁과 민승아의 뻔하고 뻔한 재회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민승아가 뉴욕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을 시작했고, 그리움에 사무친 옛 커플은 몰래 밀회를 즐겼으리라.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는 애달픈 감정과 몰래 불륜을 즐기고 있다는 짜릿한 스릴을 느끼면서, 내 뒤에서 나를 기만하고 나를 비웃으면서 그렇게 서로 사랑과 욕망을 나누었겠지.

비참하고 괴로웠다. 심장이 깨질 듯이 아팠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암흑이 온몸을 덮친 것만 같았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난 누구랑 달라서 불륜 판타지 따위는 없거든.」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파도처럼 떠밀려 들어왔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나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막연하게 품었었는데…….

바보같이…… 왜 그런 믿음을 가졌을까.

목숨처럼 아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남자들도 뒤에서 너저분한 짓들을 하고 다니는데, 하물며 내게 쥐뿔만큼의 애정도 없는 남자가 신의를 지킬 리가 없잖아…….

날개 달린 코끼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가증스러운 여자야. 끔찍한 인간이라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해. 차라리 그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가 다시금 귓바퀴를 세차게 진동시켰다. 은서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결국 나였어…….’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는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결혼 전부터 나를 향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이 결혼은 단지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단호히 말했었다.

결혼 후에는 쭉 쇼윈도 부부로 지냈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도화선에 불이 붙듯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섹스는 지겹게도 많이 하게 되었지만, 몸이 타 버릴 것만 같은 야만적이고 본능적이기만 한 섹스는 오히려 부부 관계를 악화 일로로 치닫게 만들기도 했다.

은서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이 잔인한 현실을 겸허히 수용해야만 했다.

차강혁에게 있어서 유은서는 아내도 뭣도 아닌, 그저 걸림돌에 불과하니까. 그의 사랑을 방해한, 그의 여자를 괴롭힌, 몹쓸 장애물일 뿐이니까.

‘죽여 버리고 싶다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그동안 은서를 미로에 빠뜨렸던 의문의 퍼즐이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저를 고작 물건이나 미물 취급을 하던 남자가 어울리지도 않게 다정하게 굴었던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바람을 피우고 있었으니까.

적선도 동정도 아니고, 단지 바람이 나서……. 원래 남자들은 다 그런다고 했다. 바람이 나면 아내에게 괜히 더 잘해 주고 그런다더라.

‘바보같이 착각하고 있었어. 남들처럼 평범한 부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백일몽이나 꾸고…….’

은서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정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다이아몬드도 그저 돌덩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 돌덩이는 필요 없다. 은서는 미련 없이 반지를 빼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고작 몇 시간 끼고 있었을 뿐인데 손가락이 허전해졌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돌덩이 하나 빠졌다고 허전함을 느끼다니.

은서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내던졌다. 지독히도 허탈하고, 지독히도 쓰디쓴 웃음이었다.

이윽고 무너지듯이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빛이 차단되고 완벽한 어둠이 몰려왔다.

작은 어둠 속에서 은서는 몰래 눈물을 떨어뜨렸다.

* * *

차강혁은 가운을 느슨하게 걸치고 부부 침실로 들어왔다. 젖은 머리칼에서는 샴푸 향이 은은하게 풍겨 왔다.

그러나 달콤한 향기와는 대조적으로 침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은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고, 저녁때 선물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협탁 위에 외로이 놓여 있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당신, 반지 빼는 게 상습적이군. 난 한 번도 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은서가 반지를 두 번이나 빼는 동안, 결혼은 그저 비즈니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이 남자는, 결혼식 날 은서가 조심스럽게 끼워 준 반지를 여태껏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은서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또 심통이 난 건데.”

은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입매를 비틀었다. 심통? 이건 심통처럼 귀여운 종류가 아니다. 슬프고,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허울뿐인 결혼이라고 해도 배신의 칼날이 무디게 다가오지는 않는 법.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이불을 걷어 낸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빨개진 눈자위와 투명한 눈물로 젖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그의 동공은 급격히 흔들렸다.

“울었어? 왜? 다리가 아파?”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은서는 벌떡 일어나 코웃음을 쳤다.

“어설픈 연기는 그만둬요. 이제 와서 좋은 남편인 척하는 거 역겨우니까.”

“뭐?”

“우리, 이혼해요.”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은서는 언제나 차강혁만을 원했으니까.

그가 혹독하게 몰아붙여도, 저질스러운 말들로 수치스럽게 모욕을 줘도, 유은서는 오직 차강혁만을 원했다.

바보같이 그를 원하고 또 원했다. 언제나 태양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뜨거운 태양 빛이 자신을 잔인하게 불태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혼?”

그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내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그래요, 이혼. 우리 이혼하자구요.”

은서는 굳은 의지를 담아서 다시금 확고하게 말했다.

차강혁에게 질질 끌려가기만 하던 연약하고 소심한 유은서는 이제 없다. 이제는 이 미련한 짓거리를 관둘 것이다. 그를 놓아주고 다시는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오늘 우리, 좋았잖아. 당신 깁스도 풀었고, 저녁도 맛있게 먹었고, 선물도 마음에 든다고 했어. 근데, 갑자기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앙탈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군.”

“앙탈이요? 차강혁 씨 눈에는 내가 고작 심통이나 앙탈을 부리는 걸로 보이는군요?”

내 상처는 전혀 보지도 못하고…….

“내가 실수한 거라도 있나?”

그는 은서의 손을 지그시 잡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화가 난 연인을 달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혀 차강혁답지 않았다. 이렇게 다정한 척 구는 것도 어차피 다 민승아를 위한 연극에 불과할 테지.

은서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젖은 눈을 독기로 빛냈다.

“차강혁 씨는 실수한 거 없어요. 실수는 내가 했죠.”

그가 비겁하게 뒤에서 민승아와 바람을 피운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든 벌을 이제야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차강혁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게, 내 실수였죠. 당신에게 빠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투명하고 뜨거운 눈물이 하얀 얼굴을 촉촉하게 적신다. 은서는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거칠게 닦아 냈다.

“내일 당장 이혼 서류 준비할게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쓸데없는 짓이라뇨? 내가 이때까지 살면서 한 일 중에 가장 보람찬 일이 될 거예요. 서류 준비해 둘 테니 서명이나 똑바로 해요.”

은서는 처연하게 젖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단단했다.

“차강혁 씨, 여기서 잘 건가요? 그럼 내가 게스트 룸으로 가서 자죠.”

미련을 털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장 그에게 손목이 붙잡혀 다시 침대로 털썩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

“무슨 짓이에요?”

“그렇게 우는 얼굴로 이혼을 말하는 건, 붙잡아 달라는 뜻 아닌가?”

“착각하지 말아요. 이 손 놔요. 난 깔끔하게 끝내고 싶으니까.”

“아니. 난 이 손도 놓지 않을 거고, 너랑 이혼도 안 해.”

이해할 수 없었다.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나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악의와 증오밖에 없으면서, 이혼은 못 해 주겠다니.

아니, 어쩌면…… 이혼하지 않겠다는 게 당연한 걸까.

차강혁은 언제나 치열하고 경쟁했고, 언제나 영광스럽게 승리했다.

그는 서울대 조선해양공학 주 전공에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하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은 후, 삼우조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기술개발팀 팀장을 거쳐 사장직에 올라 기울어져 가던 기업을 마법처럼 일으켜 세운 남자였다.

사람들은 차강혁에게 ‘재계의 신성’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오로지 달콤한 승리만을 맛본 남자.

그런 남자에게 이혼이라는 건, 치욕스러운 실패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지.

“차강혁 씨, 그냥 인정해요. 이 결혼 사업은 완전히 망했어요. 당신이 처음으로 실패한 거라구요. 실패를 순순히 인정하고 나랑 깨끗하게 이혼해 줘요.”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면서도 동시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차강혁처럼 오만한 남자는 한 번쯤 실패의 쓴맛을 맛볼 필요가 있다.

“자존심은 상하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강혁 씨, 인기 많잖아요. 충분히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만나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자유로운 연애를 만끽하는 것도 좋겠죠.”

“…….”

“그러니까 어서 이 손을 놓고 나를 놔줘요.”

그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려고, 팔을 흔들고 손목을 비틀어 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구속에서 벗어나기에 은서의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나한테 화가 난 게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해.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말을 하라고. 다짜고짜 이혼하겠다고 우기지 말고.”

“화난 거 없어요. 나는 그냥 차강혁 씨와 헤어지고 싶은 것뿐이야.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그래요.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는 걸 넘어서서, 이젠 당신이 싫고 미워요!”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조금씩 떨렸지만, 은서는 최대한 분명한 발음으로 다부지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이제 끝났다고.

“내가 미워? 싫다고? 유은서가 이렇게 깜찍한 소리도 할 줄 아는 여자였나?”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고 간신히 쏟아 낸 말이었건만, 돌아오는 건 가소롭다는 비웃음이었다.

돌연, 그가 은서의 손목을 확 끌어당겨 간격을 바짝 좁혔다. 콧잔등 위로 숨결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저 가까워지기만 했을 뿐인데도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져 어깨가 움찔 떨렸다. 오직 유은서만을 향해 직선으로 메다 꽂히는 그의 시선은 강렬하면서도 찬란했다.

검게 빛나는 눈동자가 마치 밤의 바다 같았다. 너무도 어둡고 깊어서 한 번 빠져들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내가 얼마나 미운데?”

그가 은서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은근한 장난기가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굳은 결심을 하고 던진 말들이 차강혁에게는 그저 한낱 장난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했다. 은서는 주먹을 꼭 말아 쥐고 눈빛을 독살스럽게 빛내며 악에 받친 음성으로 받아쳤다.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

“그럼 증명해 봐.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는 걸, 어디 한번 증명해 보라고.”

“증명이라니 그게 무슨……. 으읍!”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술이 먹혀들어 갔다. 그는 거침없이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입속을 샅샅이 헤집으면서 탐욕스럽게 유린했다.

은서는 온몸을 바르작거리고 주먹으로 넓은 어깨를 쾅쾅 치면서 그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런 반항이 통할 리가 없다.

차강혁은 전국 대학 춘계리그 MVP까지 수상한 풋볼팀의 주장이자 쿼터백 출신이었고, 지금도 운동을 습관처럼 하는 남자였다.

그보다 키가 30cm나 작은 아담한 체구의 은서가 그를 밀어내어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리어 밀려나는 건 은서였다. 장신의 체구가 자그마한 몸을 손쉽게 쓰러뜨린다. 침대 스프링이 척추 선을 타고 훑어 내리자, 머리끝이 쭈뼛 서면서 살결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그녀의 위를 차지한 그는 입술과 숨결을 여념 없이 빼앗으면서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앗, 싫어……!”

순간, 은서가 그의 입술을 세게 물어뜯고 소리쳤다. 볼품없는 반항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불같던 키스가 멈추고 팬티 속을 침범하던 손도 빠져나갔으니까.

그의 입술에 피가 조금 맺혔다. 상처가 아린 모양인지 미간을 찌푸린다. 엄지로 피를 훔친 그는 성가시다는 식으로 혀를 찼다.

은서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침대를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침대 바깥으로 발을 내디뎌 보기도 전에 그의 마수 같은 손길에 붙잡혔다. 연약한 몸은 다시 침대 위로 풀썩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간단히 은서의 두 손목을 움켜잡아 결박시키고, 왼손으로는 잘록한 허리를 꽉 부여잡은 채 또다시 거칠게 입술을 맞췄다. 비릿한 피 맛이 나는 키스였다.

“그거 알아? 유은서 네가 성질부리면 나는 더 꼴리는 거.”

그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린 그는 혀로 하얀 목덜미를 핥아 올리며, 눅눅하게 젖은 음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이 이렇게 표독스럽게 변하면, 잡아먹는 재미가 배가 되거든.”

그는 다시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외음부를 지분거리다가 익숙하게 내부를 비집고 들어온다.

“하아.”

질구를 파고든 손가락이 내부를 부드럽게 휘젓자, 입술이 벌어지면서 단 숨이 쏟아져 나왔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짓궂게 움직이던 우아한 손가락은 본격적으로 음란해졌다. 회전을 하듯 빙글빙글 돌려 대기도 하고, 손끝에 힘을 줘서 여린 내벽을 긁어 대기도 하고, 퍽퍽 난잡하게 쑤셔 박기도 한다.

좁은 구멍을 능욕하는 음란한 손길에 말초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면서 뜨거운 본능이 깨어났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느끼고 싶지 않은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체온은 제멋대로 치솟아 오르고 발끝은 오그라졌다.

“하읏.”

미끌미끌한 애액이 흘러내리면서 그의 손가락을 흥건하게 적신다. 그가 구멍 속을 파헤칠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밉다면서 왜 이렇게 물을 질질 흘리지?”

이윽고 손가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끈적끈적하고 투명한 애액이 실처럼 연결되었다.

“이것 봐. 내 손을 온통 다 적셔 놨어.”

투명한 액으로 번들거리는 가운뎃손가락을 보란 듯이 들어 보인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혀로 애액을 쓰윽 핥아먹었다.

은서는 수치심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차강혁이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색광이라는 걸.

잘난 외모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뛰어난 경영 실력으로 재계에서 신성이라고 불리며 추앙받고 있는 이 남자도, 침대에서는 발정 난 수컷이 된다.

이지적이고 냉정한 가면 아래, 지저분한 음담을 즐기고 자극적인 애무와 거친 플레이로 여자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위험하고 퇴폐적인 짐승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하고 나를 놔줘요…….”

“놓아달라고? 난 그 말 못 믿겠는데.”

“강혁 씨…….”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어느 쪽일까? 윗입일까, 아랫입일까?”

파자마 바지와 팬티가 한꺼번에 끌어 내려졌다. 은서가 발을 버둥거려 보기도 했지만 금세 발목이 붙잡혔다.

그는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아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음부를 손끝으로 누르고 지분거리자, 어서 농락해 달라는 듯이 음순이 벌름거렸다.

“솔직한 건 이쪽인 것 같군.”

잔뜩 젖어서 요기를 부리는 구멍을 흥미로운 눈길로 주시하며 그는 가운을 열어젖혀 팽팽하게 솟아오른 페니스를 꺼냈다.

은서가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안 돼요……. 나, 사고 난 후로 피임약 안 먹었단 말이에요.”

애원에 가까운 거부에 그는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지독히도 음험하고, 지독히도 위험한 눈빛이었다.

“잘됐네. 이 기회에 아예 임신을 시켜 버려야겠어.”

경악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임신을 운운하다니. 소스라치게 놀란 순간, 그는 단단하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클리토리스에 대고 부비적거렸다.

“싫어. 하지 말아요!”

은서가 주먹을 휘두르고 어깨를 비틀었다. 발악하듯 온몸을 흔들면서 악착같이 반항했지만, 그는 간단히 제압하고 좁은 구멍 속으로 페니스를 자비 없이 밀어 넣었다.

“하아앗!”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쏟아지고, 뜨겁고도 거대한 페니스가 아랫배를 가득 채웠다.

그는 시선을 흘긋 내려 딱 맞게 교합된 지점을 보며 느린 템포로 허리를 쳐올렸다. 서두르지 않고 리듬을 타듯이 천천히.

안을 파고들 때마다 좁다란 구멍이 페니스를 꽉 조이면서 압박해 온다. 저릿하게 물고 늘어지는 음탕한 구멍에 그가 입매를 거만하게 말아 올렸다.

“하지 말라더니, 박아 주니까 내 자지를 뽑아 먹을 듯이 조여 대잖아. 하아……. 은서야, 좋아?”

“흐읏. 시, 싫어…….”

은서는 젖은 눈에 서릿발을 세워 차강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비식거리며 조소를 뱉을 뿐이다. 젖은 눈매로 앙칼지게 쏘아보면 더 야하게 보인다는 걸, 은서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역시, 윗입은 솔직하지가 못해.”

그는 은서의 입술을 거칠게 빨아먹은 다음, 시선을 꼭 맞대었다.

눈을 맞춘 상태로 허리짓의 강도와 속도를 높인다. 허리를 강하게 쳐올릴 때마다 그의 젖은 머리칼이 흔들리고, 은은한 샴푸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평소 냉철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욕망에 잠식되어 흐려졌다. 뜨거운 정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오직 은서로만 가득 차 있었다.

심연처럼 깊은 눈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은서는 문득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이상하다고.

나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여자는 오로지 나밖에 없다는 듯 애절하게 보면서 날 탐하는 건, 너무나도 괴이한 짓이야…….

찬란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이 버거워 은서는 고개를 꺾어 버렸다.

그를 보지 않는 쪽이 현명할 것이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와 눈을 계속 맞추고 있다면 괴상한 착각에 빠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마저도 은서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거센 악력으로 은서의 턱을 틀어잡아 고개를 바로 돌려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유은서, 피하지 말고 나를 봐.”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지금 네가 누구한테 박히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퍽퍽, 피스톤질이 더욱더 과격해진다.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사납고 격정적이다.

“아흣. 제발, 그만…….”

터프한 몸짓을 감당하기 버거워, 은서는 손톱을 세워 그의 뒷목이며 어깨며 갈빗대를 마구 할퀴어 댔다.

탄탄한 몸 위로 빨갛고 날카로운 상처들이 생겼지만 그는 격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게 허리를 놀리며, 은서의 파자마 상의를 끌어 올려 가슴을 꺼냈다.

유륜은 벌써 부풀어 올랐고, 젖꼭지도 이미 딱딱하게 서 있었다.

“그거 알아? 유은서 너한테서 솔직하지 않은 구석은 그 입밖에 없다는 거.”

“흐읏, 싫어……. 그만.”

“이것 봐. 젖꼭지도 빨아 달라고 단단하게 서 있고, 보지도 어서 박아 달라고 질척하게 젖어 있는데, 그 망할 입만 싫다고 고집을 부리지.”

그는 손끝으로 유륜을 문지르고 젖꼭지를 튕기듯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혀를 날름거렸다.

매끄러운 살결을 혀로 할짝거리면서 능선을 타고 오르다, 정상에 올라 도도하게 솟아오른 핑크색 젖꼭지를 입안에 담았다.

입술에 살짝 힘을 줘서 젖꼭지를 빨아올리자, 츄릅거리는 야릇한 소리와 퍽퍽거리는 교합음이 서로 맞물려 침실의 공기를 음란하게 진동시켰다.

“내가 네 말을 왜 믿어야 하지?”

“흣.”

“그 입은 순 거짓말밖에 못 하는데.”

“하으…….”

“이혼? 좆같은 소리 하지 마.”

“흐응.”

“내가 널 놓아줄 것 같아? 내가 네 보지 안에 싸지른 정액이 얼만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너 못 놔줘.”

“……개자식!”

앙칼진 욕설에 그는 싱긋 미소를 짓고 이를 세워 젖가슴을 잘근잘근 물었다. 설원처럼 새하얀 살결 위로 붉고 푸른 자국들이 각인처럼 남는다.

영역 표시를 하듯 자국을 여기저기 남기며 그는 엇박으로 페니스를 가열차게 쑤셔 박았다.

“하읏.”

거대한 페니스는 흉포하게 움직이면서도 스위트 스팟을 정확하게 찔러 댔다. 은서는 결국 엉엉 울고 말았다.

항상 그랬다. 그가 저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제 위에서 사납고 맹렬하게 군림할 때면,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쾌감에 찬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스스로가 끔찍하게도 혐오스러웠다. 머리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짜릿한 열락에 지배되고 마는 어리석은 자신이.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섹스라고는 일절 모르던 순진한 그녀를 혹독하게 교육시킨 게 바로 차강혁이었으니까.

그는 아내를 숱하게 안으면서 그녀의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제대로 길들여 놓았다. 남자 손길 한 번 닿은 적이 없던 순백의 그녀를, 그의 손끝만 스쳐도 반사적으로 흥분해 버리는 요염한 탕녀로 개발시킨 것이다.

“줄곧 참았어. 네가 다친 이후로 계속 참기만 했지. 하아, 그냥 박아 버릴까 싶다가도 다친 네 다리를 보고 겨우 참았어.”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빨면서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거친 숨이 귓가를 뜨겁게 어지럽힌다.

“오늘도 병원을 나오자마자 차에서 박아 버리고 싶은 걸, 일단 밥부터 먹여야 될 것 같아서 또 참았다고. 기껏 참아 줬는데 넌 감히 이혼하자는 소리를 해?”

“아흣.”

“다시는 그딴 소리 꺼내지도 못하도록, 네 안에 내 씨를 잔뜩 뿌려 줄게. 넌 내 아기를 품고 영원히 내 밑에서 우는 거야.”

“흐읏. 차강혁 당신, 미쳤어…….”

“날 미치게 만든 건 너야.”

“아윽.”

“하아, 은서야…….”

흐트러진 동공으로 시선을 짙게 맞추면서 그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얼핏 다정하게 들렸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음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어떻게든 유은서를 가지고야 말겠다는 난폭한 음욕이.

그가 피치를 최고조로 끌어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지고 쾌감이 뼛속 깊이 작렬했다.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가혹한 피스톤질에 정신마저 붕괴되면서, 극한의 오르가슴이 온몸을 점령해 버렸다.

“흐으응.”

“하아.”

거침없던 피스톤질이 서서히 멈추고, 그는 짐승처럼 포효하듯 격한 숨을 터뜨리며 파정했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거리고 가파른 숨이 흩어진다.

절정에 도달한 은서 역시 가쁜 숨을 쉴 새 없이 토해 냈다. 강렬한 여운으로 전신이 날연하게 풀어졌다.

실컷 농락당한 좁은 구멍은 애액과 정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그는 그 난잡함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크림 파이가 된 음부를 그윽하게 감상했다.

충분히 감상을 한 그는 티슈를 뽑아 페니스를 닦고 은서의 아래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그의 입술은 콧잔등을 지나 자연스럽게 입술 위로 안착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입속을 혀로 파고들면서 허벅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서는 그의 혀를 깨물고 그를 힘껏 밀어냈다. 시트를 끌어와 나신을 가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망가고 싶어?”

“…….”

“그런데 어쩌지. 난 널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

“유은서, 넌 내 거야. 내 품속 말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고.”

그는 시트를 잡아채 던져 버리고 은서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랑이를 억지로 벌려서 이미 한 차례 정액을 쏟아낸 페니스를 질 입구에 대고 지분거린다.

은서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저항해 봤지만 쉽게 제압당할 뿐이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옭아매듯 붙잡아 포박하고, 새빨간 귓불을 야금야금 짓씹었다.

그의 페니스는 금방 팽창했다. 당장이라도 쑤셔 넣을 준비가 되었다는 기세로 빳빳하고 단단하게.

준비가 된 건 그의 페니스뿐만이 아니었다. 짧은 페팅으로 그녀의 음부 역시 촉촉하게 젖어서 벌름거리고 있었으니.

“이것 봐. 얘 또 박아 달라고 질질 울고 있잖아.”

거대하게 솟아오른 페니스를 구멍에 넣을 듯 말 듯 장난을 치며 그는 조롱조로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음탕한 보지를 내가 아니면 누가 감당하겠어? 응?”

비참했다. 이런 순간에도 그를 원한다는 사실이. 그를 떠나겠다고 다부지게 결심을 한 순간에도 멍청한 몸뚱어리는 그를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물은 비참해서 흐르는 걸까, 아니면 흥분을 견디지 못해서 흐르는 걸까. 어느 쪽이든 바보 같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는 혀로 눈물을 핥아 주고 악마처럼 속삭였다.

“박아 줘?”

“시, 싫어…….”

“여기는 박아 달라고 난린데?”

그는 페니스로 젖은 구멍을 툭툭 건드리며 빈정거렸다.

“은서야, 실패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하아.”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는 걸 증명하는 데에 넌 완전히 실패했지.”

색정에 취한 행동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서늘해서 뒷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아, 아니야! 난 싫어. 당신이 밉다고……. 하읏.”

“은서야, 이렇게 물을 질질 흘리고 앙앙거리면서 그런 소리를 하면 누가 믿겠어?”

“으흣.”

“실패를 순순히 인정하고 나한테 실컷 박히기나 해. 그러다 애도 낳고. 응?”

차디찬 조소를 더는 견딜 수 없어 사력을 다해서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악다구니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은서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부정의 외침이 아니라 앙칼진 교성이었다.

“하으응……!”

꼿꼿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질 속으로 깊숙이 꽂혀 들어오자 은서는 온몸을 자지러뜨리면서 발정기의 암고양이처럼 울먹거렸다.

그는 입매를 끌어 올리고 승리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예민하고 민감한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그를 환희와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무너진 얼굴과 색기가 가득한 신음을 즐겁게 감상하면서, 그는 포악하게 피스톤질을 해대고 하얗고 풍만한 가슴을 마음껏 주물러 댔다.

* * *

그가 대체 몇 번이나 제 안에 정액을 뿌려 댔는지 모르겠다. 밤부터 새벽까지 실컷 쑤셔 박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오후 1시였다.

차강혁은 이미 출근을 하고 없었다.

은서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천장을 멍하게 응시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밀려 들어온다. 광포하고 광란했던 지난밤이.

「난 이 손도 놓지 않을 거고, 너랑 이혼도 안 해.」

「이 기회에 아예 임신을 시켜 버려야겠어.」

「네 안에 내 씨를 잔뜩 뿌려 줄게. 넌 내 아기를 품고 영원히 내 밑에서 우는 거야.」

임신에 집착하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혼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미친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날 강제로 임신시켜서라도 이혼을 피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자존심이 상해? 당신이라는 남자는 단 한 번의 실패도 허용할 수 없는 거야?’

하긴, 언제나 비즈니스가 최우선인 그 남자에게 이혼은 번거롭고 귀찮기만 한 일이겠지.

그는 나를 인형처럼 내세워 애도 낳아 겉으로는 그럴싸한 가정을 꾸미면서, 그가 가진 것들을 안전하게 지켜 나갈 심산인 것이다.

그의 사업, 그의 부, 그의 명성, 그의 모든 것들을.

그러면서 뒤로는 민승아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나눌 테지. 대부분의 성공한 남자들이 부인 따로, 연인을 따로 두듯이.

「나한테는 결혼도 비즈니스입니다. 이득이 생기면 하는 거죠.」

그는 처음부터 확고하게 말했다. 이 결혼은 사업이라고. 나는 그에게 사업상 이용 가치가 있는 허수아비 아내에 불과하다.

맞선을 보던 날을 떠올리자 자동 연상되듯 그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유은서, 결혼은 무조건 하는 거야.」

「딱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무결한 공주님인데, 이상하게 울리고 싶더라고.」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네가 자꾸 날 자극하잖아.」

「나쁜 건 내가 아닐지도 몰라. 널 만나기 전에는 나도 이러지 않았으니까.」

「내가 오늘 여기서 당장 임신시켜 줄게. 아기 몇 명이나 낳고 싶어?」

「유은서, 난 그 이상을 원해.」

「난 지옥 끝까지 유은서 너를 데리고 갈 거니까.」

켜켜이 쌓여 있던 기억들을 헤집자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나빴던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어쩌다 가끔은 좋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 그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들은 그저 해변의 모래성처럼 허약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다.

부질없다. 우리가 그동안 뭘 했던가.

끝없는 육체의 탐닉뿐이었다. 동물적인 섹스로만 점철된 결혼 생활이었다. 그는 내 일방적인 외사랑을 이용해서 욕구를 충족했고, 나는 어리석게 몸을 내어 주었다.

이제는 불온한 욕망으로 얼룩진 이 결혼을 내 손으로 무너뜨릴 때가 왔다.

‘차강혁, 네가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무너뜨리고야 말겠어.’

결연하게 다짐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까지 이어진 과격한 섹스로 육신은 만신창이였지만 일단은 움직여야 했다.

시트를 걷어차고 침대를 빠져나오려는데, 협탁 위에 붙어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시야로 들어왔다.

은서는 손을 뻗어서 작은 종이를 떼어 냈다.

[오늘 일찍 들어갈게. 같이 저녁 먹자.]

메모를 확인하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낯 간지러운 짓을 하다니. 개새끼는 그냥 개새끼답게 구는 게 좋은 것 같다. 어울리지도 않은 짓을 하면 그게 더 비참해지지 않는가.

은서는 종이를 벅벅 찢어 버리고는 욕실로 향했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수전을 열자 미지근한 물이 비처럼 쏟아진다. 물줄기를 하염없이 맞으며 넋 놓고 서 있기만 하다 무의식중에 그가 또 떠올랐다.

「난 이 손도 놓지 않을 거고, 너랑 이혼도 안 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목소리가 왜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지 모를 일이다. 별 의미도 없는 말인데 왜 자꾸 거슬리는 걸까.

은서는 신경질적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수전의 방향을 확 꺾어 버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 뒷머리가 아찔해지면서 털끝이 삐죽 곤두섰다.

‘이렇게 찬물을 맞아서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계속 차강혁에게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어.’

마음을 굳게 먹은 은서는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 옷을 챙겨 입고, 노트북을 열어 이혼 서류를 출력했다.

법률 용어로 점철된 사무적인 서류를 보자 마음이 살짝 휘청거렸다. 하지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한번 결심을 단단하게 굳히고 서명을 했다.

은서는 부부 침대에 이혼 서류를 보란 듯이 내려놓고, 흉터가 깊게 새겨진 오른쪽 다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의사 말대로 당분간은 조심해야겠지만 걷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상태는 어제보다 훨씬 좋았다. 깁스를 푼 직후에는 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줘서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완벽한 상황이야. 결심도 굳혔고, 이혼 서류에 서명도 했고, 다리도 멀쩡해.’

은서는 여권과 지갑만 달랑 챙기고 씩씩하게 걸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행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떠나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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