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삐뚤어진 사랑을 끝내기 위해 (5/6)

5장. 삐뚤어진 사랑을 끝내기 위해

국왕이 부재하는 동안 국서는 나름대로 왕궁에서 제 역할과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귀족들을 대면하는 횟수를 늘려서 중앙 정계를 살피고 왕실과 귀족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파르네세 후작도 국서의 노력을 지원했다. 후작은 훌륭한 부관으로서 국왕 대신 내정을 처리하느라 바쁜 참이었다.

쓸데없이 국왕을 알현하겠다고 찾아와서 시간을 낭비하는 귀족들을 국서가 전담해주니 솔직히 반가웠다.

그리하여 그날도 국서는 알현실에 앉아 제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맞이하는 사람들 중 퍽 특별한 손님이 끼어 있었다. 국왕의 부재중을 틈타, 성황청에서 추기경이 온 것이다.

추기경은 교황이 직접 준비했다는 귀한 성물을 생색내며 주었을뿐더러, 국서의 왕궁 생활에 여러모로 살뜰한 관심을 보였다.

국서는 시종일관 예의 바르되 ‘알아서 어련히 잘 살고 있다’라는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좀 당황한 눈치를 보이던 추기경이 한참 만에 본론을 꺼냈다.

내용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제 와서 ‘언제든 다시 성황청으로 돌아와도 좋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시국의 보신을 위해 성기사를 속여서 공물로 바칠 때와 태도가 사뭇 차이 났다. 마치 자식을 버리듯 보내놓고 뒤늦게 후회하는 친정의 모양새였다.

국서는 추기경을 적절히 예우하고 돌려보냈다. 그는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백은 기사단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안토니오 추기경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역시 성황청이 우리를 버릴 리 없었어요!”

응접실에 모인 백은 기사단이 들떠 했다. 국서는 부하들의 거취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백은, 너희들은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폐하께서 구류도 풀어주셨으니 이제 그만 판로엠 시국으로 돌아가라.”

“예? 단장은요?”

“나는 환속해야지. 결혼도 했지 않나.”

“단장!”

공기가 대번에 침통해졌다. 백은 기사단이 국서를 보는 눈은 평화를 위해 폭군에게 바쳐진 희생양을 보듯 했다.

그들의 소신 있는 발언이 시작되었다.

“단장이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결혼은 무슨 결혼입니까? 어차피 인정 못 받을 약탈혼인데!”

“무엇보다 단장은 따로 연모하는 여인도 있잖아요!”

“맞아! 어느 영애를 10년 동안이나 못 잊어서 아직도 찾아다니시는 걸 우리가 다 아는데!”

애절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는 부하들이 생겨났다. 국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말해줬다. 이참에 밝히는 건데, 내가 10년 동안 찾아다녔던 그 영애가 바로 국왕 폐하야.”

“예?!”

충격 고백에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에셀하라트 수도원에 기도를 드리러 오시는 동안 알고 지냈었어. 이름을 다르게 알려 주셨고 왕녀이실 줄은 꿈에도 몰라서 찾지 못했지.”

“뭐, 뭐라고?!”

이번 반문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응접실에 붙어 있는 곁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파르네세 후작이 난입했다.

그는 성황청의 불온한 접촉이 신경 쓰여서 몰래 국서를 살피며 대화를 엿듣던 참이었다.

백은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그러나 국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부하들을 제지했다.

“파르네세 후작, 엿듣는 건 나쁜 행동입니다.”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아까 했던 말 다시 말씀해보십시오, 전하!”

“뭘 더 말하라는 겁니까. 들으신 대로입니다.”

“그, 그, 수도원에서 우리 폐하를 꼬시고 도망친 나쁜 놈이 너였습니까?”

엉망인 예법과 화법이 그 나쁜 놈에 대한 깊은 악감정을 전해주었다.

오해가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국서는 후작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맞습니다만.”

“이 나쁜……! 아, 아니야. 그럴 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선왕비 전하의 유품인 목걸이도 안 가지고 있잖습니까?”

“아…….”

“왜, 왜요? 왜 탄식합니까?”

“그 티 인퓨저를 닮은 로켓 펜던트가 선왕비 전하의 유품이었습니까? 폐하께 너무도 죄송하군요. 사정이 생겨서 반지로 만들어 가지고 다녔던 터라…….”

국서가 습관처럼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지금은 비어있는 손가락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항상 낡은 반지가 자리해 있었다.

국서와 오래 함께한 백은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뒷조사를 한 후작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목걸이의 특이한 형태를 정확히 아는 데서 부정할 길이 없었다. 후작은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그럼 저번에 정리할 과거가 없다고 당당하셨던 게…….”

“예, 당당합니다.”

국서는 세상 결백한 얼굴이었다.

후작의 넋 나간 듯한 얼굴이 다시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국서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때! 대체 왜 폐하를 떠났습니까? 그때 폐하께서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아십니까?!”

“…….”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하실 겁니까? 그러시면 안 되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폐하 곁에 있으셨어야지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입니까.”

눈을 내리깔고 넌지시 되뇌는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국서가 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백은, 잠시 떨어져 있어라.”

부하들과 거리를 벌린 국서는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흠칫하는 후작의 귓가에 국서는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늘 고민해온 문제입니다만……, 그럼 후작이 한번 답을 줘 보시겠습니까?”

“……?”

“제가 그때, 보렐리 후작 부인과 자는 대가로 폐하 곁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보다 나은 결과가 되었을까요?”

“…….”

후작은 딱 국서가 예상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역시나 오랜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다.

후작은 제 건방짐을 인정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폐하께는 직접 말씀드리십시오.”

“물론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

“예.”

국서도 그럴 생각이었다. 국왕이 듣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예민한 이야기를 기분 상하지 않게 꺼낼 말재간이 없어서 줄곧 분위기만 살피고 있는 게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그들이 있는 응접실로 시종장이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전하, 후작 각하, 폐하께서 환궁하셨습니다. 곧 본궁에 당도하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바로 뵈러 가야겠습니다.”

무표정하던 국서의 얼굴에 꽃이 폈다. 그는 딴청을 피우는 백은 기사단까지 챙겨서 이동했다. 후작도 걸음을 같이 했다.

누구보다 앞장선 국서가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왕실 법도를 어길 듯 말 듯 한 빠른 걸음이었다.

곧 그는 샹들리에 빛이 쏟아지는 그랜드 홀에서 국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환한 그녀는 진명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던 중이었다.

맞은편의 기척을 느낀 듯 그녀가 국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다. 반가움과 기쁨이 국서를 찬연히 미소 짓게 했다.

국왕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국서와 마주쳐 버렸다.

그런데 국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도 그녀를 반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서가 긴 다리로 한달음에 국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국왕은 제 눈의 흔들림이 들킬까 싶어 잠시 숨을 멈췄다.

국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떠나시는 날 배웅 인사도 못 해서 죄송했습니다.”

“……몸은 괜찮나.”

국왕이 겨우 한마디 꺼냈을 때였다.

“아뇨.”

“…….”

“몸도 마음도 외로웠습니다.”

“…….”

“어서 오세요. 보고 싶었습니다.”

뒤에 시립해 있던 백은 기사단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의 단장이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국왕이 제 10년의 사랑이라 밝히자마자 국서는 사랑꾼이 되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후작은 국서의 처신이 바람직하다고 느낀 듯 남몰래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사정을 모르는 진명 기사단 중 누군가가 실소를 흘리자 매서운 안광으로 기를 죽여 놓기도 했다.

국왕은 이런 낯간지러움 속에서 철저히 유리된 채였다. 혼자만 음습한 분위기에 발을 담근 채로, 그녀는 국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 꼴을 당해 놓고도.’

어떻게 자신에게 저리 웃으며 달콤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국왕은 제 눈과 귀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국서가 저를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겉은 온유하지만 속은 어떨지 누가 알겠는가. 그저 순응적인 성직자답게 이런 운명도 신이 내린 고행처럼 받아들이니까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고결한 성기사였던 이가 욕망에 몸을 섞도록 종용당하는 것이 치욕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러니 지금쯤 그의 속은 뭉그러졌을지도…….

“칼리?”

“…….”

그의 음성에도 국왕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깊고 어두운 생각에 침잠해 있었다.

국왕은 왕궁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줄곧 고민했다. 자신이 과연 국서를 놔줄 수 있을지.

그녀의 내면은 용납하지 못했다. 빼앗고 부수고 망쳐서라도 갖거나, 차라리 제 심장을 파버리는 게 낫다고 외쳤다.

국왕은 그런 자신의 미쳐 날뛰는 소유욕과 가까스로 타협했다.

그의 일부만이라도 갖기로.

오랜 침묵 끝에 국왕이 입을 열어 국서에게 전했다.

“오늘 밤 찾아갈 테니까 준비해둬.”

그녀는 그를 삐뚤어진 방식으로 사랑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를 상대로는 올바른 사랑법을 영영 익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의 아이를 가지면.’

그의 일부이되 그가 아니니까, 그때는 망가뜨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도 행복이란 것을 조금은 느껴보고 싶었다.

해질녘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복도의 통유리 창을 두드리는 상냥한 빗소리를 들으며 국왕은 국서의 침실로 향했다.

시종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홀로 방 안에 발을 내디딘 국왕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심호흡했다. 공연한 긴장감이 들었다.

휘 둘러본 침실은 마치 그녀가 성기사를 약탈했던 첫날밤처럼 꾸며져 있었다. 은은한 불빛과 달콤한 향, 거기에 오늘은 잔잔한 빗소리까지 더해졌다.

그 안에서 국왕은 카우치에 정자세로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칼리?”

“……그 꼴은 뭐야.”

국서는 앞섶이 다 벌어진 드레스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는데, 셔츠 안에 검은 가죽 끈이 상체를 조이고 있는 것이 비쳤다. 눈에는 웬 안대까지 착용시켜 놓았다.

음전한 부군이 하기에는 퇴폐적인 차림새였다. 하물며 그는 신실한 성기사이건만.

손이 딱히 묶여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성기사는 제가 직접 불편한 안대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거리와 방향을 가늠하며 국왕에 다가왔다. 허공을 더듬는 그의 손을 국왕이 잡아주었다.

국왕이 다시 물었다.

“왜 이러고 있어?”

“오늘 밤 준비해두라고 하신 말씀을 전해 듣고 시종들이…….”

국왕은 성기사의 눈이 안 보이는 참에 마음껏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떠나기 전에 그녀가 성기사를 농락한 꼴을 침실 시종들이 다 봤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왕의 취향을 맞춘다고 노력한 것일 테니, 탓하려면 술에 취해 개가 된 스스로를 탓해야 맞았다.

표정을 빠르게 정돈한 국왕이 성기사의 안대부터 풀어주었다.

“일단 앉아라.”

“……예.”

국왕이 성기사를 이끌고 간 곳은 침대 위가 아니라 테이블 앞이었다. 성기사의 벽안에 살짝 실망감이 어렸으나 국왕은 그 이질적인 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주 앉은 국왕이 한동안 말이 없자 성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낮에 잠깐밖에 못 뵈어서 중요한 걸 여쭤보질 못했습니다.”

“뭔데?”

“그간 몸은 괜찮으셨습니까? 떠나시는 그날 새벽까지 제가 좀…….”

뼈아픈 주제가 훅 찌르고 들어왔다.

“……네가 뭐.”

“제가 과격하게 굴지 않았나…… 싶어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성기사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일주일을 못 본다는 생각에 그는 자제를 못 했다. 그녀도 같은 상황이었는지 똑같이 굴었지만 말이다.

서로 비슷하게 지쳤을 때쯤에 국왕은 그만 좀 발정하라고 성기사를 타박하며 그의 손을 묶고 나서 곯아떨어졌다.

그녀가 탓하면 정말 제 탓인 줄 아는 성기사는 그간 죄책감이 깊었다.

물론 기억에 손상이 있는 국왕은 성기사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픽 웃었다.

“네가?”

“…….”

“네가 과격해봐야 짐만 할까.”

국왕은 불편한 주제를 돌리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을 테이블에 꺼내 보였다. 납작한 상자에 성기사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반지입니까?”

“아닌데.”

성기사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그럼 뭔가요.”

“열어봐.”

“이건…….”

뚜껑을 열자 보인 것은 16구의 초콜릿이었다.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그대로 꺼내놓은 듯했다.

국왕은 성기사가 기억하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규칙은 알고 있겠지?”

“……또 하시게요?”

“자신 없는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옛날보다 패기가 늘긴 했다. 성기사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대신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위치를 섞는 수고를 하는 대신 첫 순서를 청했다. 그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반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즉시 흠칫했다. 국왕은 모르는 척 물었다.

“왜?”

“아니, 이게 왜…….”

당황하는 성기사에게서 국왕이 남은 초콜릿 반쪽을 빼앗았다. 그녀는 살짝 핥기만 하고서 내려놓았다.

“럼주로구나.”

“…….”

“패배를 인정하겠나?”

“……잠시만요.”

성기사는 어차피 곧 환속할 예정이었으므로 금주에 구애받지 않았다. 의혹이 떠오른 즉시 다른 초콜릿 하나를 더 골라 맛보았다.

역시나 또 럼주가 들어간 초콜릿이었다. 저번에는 꿀이 들어간 초콜릿만 들고 와서 그에게 마지막 차례를 주더니, 이번에는 럼주가 들어간 초콜릿만 들고 와서 첫 차례를 주었다.

성기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 쉬었다. 국왕은 발뺌할 생각이 없는지 당당히 말했다.

“내가 덫을 좀 잘 친다.”

“예, 사냥감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싶게끔 말입니다. 하지만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들키셨으니 당신의 패배입니다.”

“그래, 굳이 진실을 파고드는구나. 의욕적인 것을 보아하니 내게 바라는 게 생긴 모양이지?”

국왕이 깍지 낀 손에 턱을 괴었다. 나른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패배가 본래 그녀가 의도한 결과임을 의미하는 듯했다.

“어떤 소원을 들어줄까?”

그녀가 그를 떠보았다.

“키스해줄까? 아니면 아래 착용한 링을 풀어줄까? 그것도 아니면…….”

“…….”

“……널, 놓아줄까?”

국왕의 말투는 짐짓 무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날뛰는 소유욕을 가까스로 잡아 가두고 나온 말이었다.

성기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을 잠깐 하다가,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제 바람을 밝혔다.

“안고 싶습니다.”

“…….”

“당신을 안고 싶어요, 칼리.”

그녀의 붉은 눈이 커졌다. 예상도 못했다는 눈빛에 성기사는 조금 상처받았다는 듯이 말했다.

“일주일을 독수공방했습니다만…… 저만 급합니까?”

짐짓 처연한 척하지만 벽안에는 정염이 가득했다.

음성과 눈빛이 보내오는 신호에 국왕은 몸이 반응함을 느꼈다. 저릿하고 뭉근한 쾌감의 잔상을 기억하는 뱃속이 조여 왔다.

국왕이라고 해서 딱히 여유로운 사정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단 한 번의 중요한 기회를 준 참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어차피 그녀는 덫을 빠져나갈 생각이 없는 짐승을 거절할 정도로 마음씨 좋은 사냥꾼이 아니었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너 하고 싶은 대로……, 읍.”

허락의 말을 성기사가 먹어치웠다. 입술을 빈틈없이 비벼 붙이고 혀를 찾아내서 얽었다. 갈급한 입맞춤이 숨을 앗아갈 듯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성기사의 한 손이 국왕의 허벅지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받쳐 안고서 침대로 갔다.

시트가 크게 출렁였다. 금발을 흐트러뜨리며 누운 국왕의 몸 위로 성기사가 올라탔다.

역광으로 음영을 짙게 드리운 상태에서도 그의 벽안만은 요요한 빛을 내는 듯했다.

성마른 손이 국왕의 옷을 벗겼다. 천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그녀를 순식간에 알몸으로 만들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나신이 그의 흥분을 부추겼다. 성기사는 달려들 듯 국왕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었다.

국왕은 뺨을 간질이는 은발에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다가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가 쇄골의 살갗을 깊게 빨아들여 울혈을 남겼다.

성기사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쥐어 뭉그러뜨리고는 손가락 사이로 삐쳐 나온 봉긋한 돌기를 입에 머금었다. 입술로 부드럽게 씹고 치아로 긁어 올려 꼿꼿이 세웠다.

“아, 흐읏.”

달콤한 신음에 그의 입술이 유두를 문 채로 호선을 그렸다. 성기사가 국왕의 가슴을 괴롭히길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저도 만져 주세요, 칼리.”

“읏, 어디를?”

“어디든…….”

국왕의 손이 성기사의 은발을 쓰다듬다 조각 같은 뺨을 감쌌다. 그는 손바닥에 제 콧날을 비비며 유순한 짐승처럼 굴었다.

그러나 국왕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손길로 성기사의 근사한 가슴팍을 더듬어 내려갔다.

벌어진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가죽 하네스에 감싸인 퇴폐적인 남체를 쓰다듬고 유두를 손끝으로 굴려 세웠다.

신음을 삼키는 그의 턱에 입 맞추며 손을 더 아래로 움직였다. 예고도 없이 사타구니 사이로 침범한 손이 터질 듯한 바지춤을 꽉 쥐었다.

“하아…….”

벽안이 밤을 빨아들인 듯이 짙어졌다. 신실한 성기사가 욕망에 몸을 섞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성기사는 국왕의 손을 낚아채서 손목 안쪽에 입 맞추고 내려놓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국왕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자리 잡았다.

그의 손끝이 갈라진 곳을 더듬었다. 도톰한 살점을 벌리고 움찔거리는 질구를 찾아내 긴 손가락을 넣었다. 찔꺽찔꺽 물소리를 내며 속살이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성기사 못지않게 그녀도 침실에 오기 전 준비를 했다. 안에 품고 있던 향유가 체온에 녹아 그의 검지와 중지를 질척하게 적셨다.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갔다. 천천히 찔러 넓히는 작업을 계속하며 성기사는 금색 음모로 덮인 둔덕에 경배하듯 입 맞추었다. 그리고 조금 아래로 내려가서 음핵을 빨아들였다.

“아읏.”

국왕은 제 다리 사이에서 살랑이는 은발에 양손을 집어넣고 헤집었다.

입으로 하는 정성스러운 애무에 국왕의 허리가 들썩이며 질구의 찔꺽거림이 커졌다.

민감한 돌기가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빨아댄 후에야 성기사는 고개를 들었다. 젖은 입술을 핥는 빨간 혀가 색정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네요. 칼리만 벗는 건.”

“너도, 벗어.”

“안 됩니다. 안쪽에 입은 게 너무 부끄러워서.”

오늘 그는 정말 자기 마음대로 할 예정인 듯했다.

“그래도 아래는 벗어야 할 텐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국왕이 손을 뻗어 성기사의 바지춤을 벌렸다. 시종들이 속옷조차 안 입혔는지 성난 남근이 바로 퉁겨져 나왔다.

벌겋게 부푼 성기는 여전히 선단 바로 아랫부분과 뿌리 부분이 링으로 꽉 조여져 있었다. 그녀가 아름답게 세공된 링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아, 칼리…….”

애태우는 감각에 성기사는 신음하듯 그녀를 불렀다.

국왕은 링을 풀어 성기를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가까스로 사정감을 참았다. 그 사이에 성기는 착실하게도 크기를 좀 더 늘렸다.

그가 물을 뚝뚝 흘리는 남성을 쥐고 입구에 맞추었다. 뭉근하게 문지르고 비벼가며 조금씩 집어넣었다. 선액과 애액과 향유로 질펀하게 젖은 질구가 귀두를 기쁘게 삼켰다.

“하아, 빨리…….”

재촉에 못 이긴 척 힘주어 밀어 넣었다. 충분히 풀어줬지만 오랜만에 받아들이기엔 그의 것이 너무 컸다.

“아윽.”

국왕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우아한 선을 드러낸 목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울렸다. 성기사가 국왕의 얼굴에 키스를 떨어뜨리며 달랬다.

“외롭게 두셨으니 끝까지 품어주세요.”

“흐으읏…….”

느릿하게 속살을 벌리며 진입을 계속했다. 마침내 두툼한 기둥이 뿌리까지 깊게 파묻혔다.

그가 터질 듯이 맥박치며 꿈틀거리는 것이 그녀의 뱃속에서 똑똑히 느껴졌다.

“칼리.”

“아……!”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신호로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으로 굵은 기둥이 사납게 들락거렸다. 그녀의 안을 마음껏 긁고 비비며 짓뭉갰다.

“아, 아흣, 응! 아으읏!”

격한 자극이 기껍기만 한 듯, 녹을 듯이 뜨거운 그녀의 아래는 성기를 조여 물며 끈적끈적 달라붙었다.

제 밑에서 흔들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총애받는 국서답게 굴어보기로 했다.

“하아, 칼리……. 일주일이나…… 저를 두고……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넌 몰라도, 흣, 돼.”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한데요.”

“아읏…?!”

그는 약간의 심술을 부렸다. 국왕의 시야가 어둡게 가려졌다. 아까 그가 착용하고 있던 안대가 그녀에게 쓰였다.

국왕이 손으로 내리려 하자 성기사는 양 손목을 붙잡아 시트에 고정했다.

“아흣, 하응, 아… 하앗… 응, 으읏!”

시각을 뺏긴 국왕의 몸은 감도가 더 좋아졌다. 성기사는 기껍게 미소 지었다.

“이, 이즈. 하읏, 이즈!”

“예, 칼리. 여기 있어요.”

성기사의 손이 국왕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매만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귀두가 질구에 걸치게 빼냈다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쑤셔 박았다. 마치 성기사의 위와 아래는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듯했다.

격한 행위에 국왕의 눈을 가린 안대가 반쯤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벗겨내 주고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물론 허릿짓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양 팔뚝으로 시트를 누른 채 위로는 혀를 얽고 아래로는 저를 파묻었다.

“아, 하으, 읏!”

국왕은 성기사에게 저를 완전히 내맡긴 채 난잡하게 흐트러졌다. 허벅다리를 달달 떨면서 그에게 기껍게 꿰뚫리길 반복했다.

절정이 가까워짐을 알리듯 국왕의 눈이 황홀함에 흐려지고 성기사의 몸짓이 격해졌다. 성기사는 국왕의 두 다리를 어깨에 올린 채 찍어 누르듯 그녀를 탐했다.

“이, 이즈…….”

“예.”

“안에…… 안에 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국왕이 손을 뻗어 성기사의 둔부를 감싸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탄탄한 엉덩이가 우물이 패도록 조여들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그는 그대로 파정해 버렸다.

성기사가 국왕의 몸 위로 엎드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국왕도 잘게 떨리는 두 다리 사이에 성기사의 몸을 가두었다.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도 성기사의 뜨거운 손은 국왕의 땀이 배어난 가슴을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서로의 살이 땀에 젖어 붙는 감촉마저 사랑스러운 후희의 시간이었다.

국왕이 성기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잠시 이러고 있자.”

“……예.”

더 하고 싶은 기색을 누르며 성기사가 유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은발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칼리?”

“…….”

평온하게 눈을 감은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하…….”

벽안에 원망이 살짝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별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옆에 누운 성기사가 그녀의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주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쉬세요.”

국왕의 무방비한 모습은 오로지 국서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일 터였다.

제 곁에서 잠든 그녀가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그는 이런 담백한 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국왕과 국서의 사이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국서가 총애를 잃을까 걱정했던 귀족들의 노파심이 무색하게도, 국왕은 여전히 국서의 몸에 왕성한 욕망을 드러냈다.

왕실 의전부는 국왕 부부를 위해 왕궁의 구조를 조금씩 손보았다.

국왕과 국서가 주로 사용하는 모든 공적인 장소에 침대가 있는 곁방을 만들었고,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쉴 공간을 마련했다. 그 일환으로 생긴 대표적인 것이 생울타리 미로 정원과 어두운 이중 복도였다.

국왕과 국서는 그곳에서 장식용 담비 털가죽을 바닥에 깔고 몇 번인가 몸을 겹쳤다.

그 와중에 국왕은 새벽까지 정무를 붙들고 내정을 완벽히 처리했다. 국서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자 노력하기에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런 부부가 낮에 잠깐 뜨거운 밀회를 갖는 일쯤은, 무절제하다기보다는 그저 금슬이 좋은 부부의 귀감으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마침내 국왕 부부에게 소식이 찾아왔다.

“회임을 감축드립니다!”

“…….”

요즘 들어 툭하면 잠이 쏟아지는 게 이상해서 진찰을 받았다가 들은 진단이었다.

국왕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국서의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을 먹긴 했지만 막상 결과를 마주하자 심히 얼떨떨했다.

주치의는 다시금 못 박았다.

“4주 되신 듯합니다.”

국왕과 국서 모두 신체 건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사 출신의 젊은 남녀인지라 금세 성과가 나온 듯했다.

“이제부터는 음식을 조심해서 드셔야 합니다. 제가 주의해야 할 음식을 따로 적어드리겠습니다.”

“그거 큰 도움이 되겠구나.”

“잘 모르고 넘어가시는 게 곰팡이가 핀 치즈와 허브티입니다. 아, 술이 안 되는 건 아시지요? 애주가셔서 힘드시겠지만 뱃속의 아기님을 위해 참으셔야 합니다.”

주치의의 잔소리에 국왕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술은 이참에 끊을 생각이다.”

“오호호,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국왕이 바람직한 결심을 한 데에는 필시 성기사 출신 국서의 영향이 클 터였다.

주치의의 눈이 한 폭의 그림처럼 미동 없이 서 있는 국서를 훑었다. 그녀의 얼굴에 할머니처럼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때 주치의의 머릿속에 문득 스친 생각이 있었다. 국왕 부부에게는 금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을 터였다.

“흠흠, 폐하. 아뢰옵기 황공합니다만…….”

“뭔가?”

“회임 중에 관계를 가지실 때에는 시기별로 자세를 다르게 하셔야 합니다. 일단 기승위와 후배위는 피하셔야 하고, 초기에는 정상위가, 중기 이후에는 후측위가…… 흠흠, 이 부분은 아무래도 국서께 알려드리는 편이 좋으실까요?”

“……나중에 같이 교육받겠다.”

“예, 예. 역시 부부는 함께 해야지요.”

국왕은 곁에 시립한 국서를 힐끗 돌아보았다.

국서는 주치의의 진단이 떨어진 직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표정이 어쩐지 조금 멍해 보였다.

그때, 이제껏 조용하던 후작이 국서의 옆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전하.”

거기까지만 하면 될 것을, 그는 굳이 국서를 향해 한소리 했다.

“이제부터 국서께서 더욱 잘해주셔야겠습니다. 교단의 교리에 따르면 가정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남편 된 자의 미덕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섭섭하시지 않게 살뜰한 보필을 당부드립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자고로 임신했을 때 서운했던 일은 임종까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가봐라.”

국왕이 쫓아내 주었다. 후작과 주치의가 다 나가자 국왕과 국서 두 사람만 남았다.

국서의 상태는 여전했다. 미동 없이 굳은 그는 현실감이 없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국왕은 국서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공연히 불안해진 그녀는 방어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 뱃속에 있는 아이인데 뭐 어쩔 것이냐고.

그때였다. 정신을 차린 국서가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미남자의 얼굴에 꽃이 만개하듯 미소가 걸렸다.

“칼리. 아……, 칼리, 칼리.”

“…….”

이름 부르는 음성 속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저절로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좋은가.”

“예.”

담백한 한마디는 가득한 진심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국왕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일부만이라도 온전히 갖고자 하는 이기적인 결정을 했을 뿐인데, 도리어 그가 세상 모든 기쁨이 제 몫인 양 행복해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계속 보고 있다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만 헤실거려.”

“아, 죄송합니다. 실없게 굴어서.”

국서는 턱을 쓸어내리는 척 허물어진 입가를 가렸다. 평소대로 표정을 돌리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솔직히 꿈만 같았다. 줄곧 외로웠던 그에게 가정이, 그것도 그녀와의 가정이 생긴다는 사실은 더 없는 축복이었다.

“뭔가 먹고 싶으신 건 없으십니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요? 제가 잘하겠습니다. 건강하게만 낳아주세요. 아이도, 칼리도요.”

“괜한 걱정이구나. 누구 아이인데 당연히 건강하겠지.”

“예. 우리 아이지요.”

우리 아이라는 어감이 강하게 귀에 박혔다. 국왕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마치 그의 말이 주문이 되어 그녀는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다. 제 뱃속에 움트는 조그마한 생명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마법 말이다.

귀 끝을 붉힌 그녀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회임을 했으니 상을 내려야겠구나.”

“회임은 칼리가 했는데요.”

“다 국서인 네가 힘써서 나온 결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국서가 목을 울려 웃었다.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이면서까지 뭘 해주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도 많이 기쁘구나 생각했다.

국왕이 권하는데 청하지 않는 것도 무례라고 했다. 마침 그는 바라는 것이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잠시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국왕은 흠칫했다.

“……어디?”

“접경지역에 있는 작은 호수 마을입니다.”

“…….”

역시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조금 전까지 간지러우면서 좋았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국왕의 적안이 어둡게 침잠해 들어갔다.

그녀는 음성을 가까스로 가다듬어 겨우 물었다.

“혼자, 가려고?”

“오고 가는 데만도 왕궁에서 열흘은 걸리는 곳이라…….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 곳에 저와 같이 가자고 하는 그의 무신경함이란. 국왕은 어쩔 수 없이 이 순간만큼은 국서에게 깊은 미움이 들었다.

그러나 설령 숨이 막히는 장소라고 해도 그런 곳에 그를 혼자 보내기는 더 싫었다.

“못 간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후작과 상의해서 일정을 짜도록 해.”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또 기뻐 보였다.

“호수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아마릴리스 꽃길이 예쁜 곳입니다. 특히 나무다리 위에서 보는 꽃밭이 장관이죠. 칼리와 꼭 한번 걷고 싶었습니다.”

구실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국왕은 차마 음습하게 가라앉았을 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국왕 부부 일행은 느긋한 일정으로 이동한 끝에 닷새가 걸려 호수 마을에 도착했다.

언덕배기의 저택은 마을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마을에 입성한 국왕은 기사단을 여관에 묵도록 하고 국서와 단둘이서 움직였다. 이런 오붓한 외유는 국서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직 한낮이었다. 저택에 들르기 전에 국서는 볼일이 있다며 국왕을 이끌고 마을 어귀에 있는 한 집으로 찾아갔다. 한참 종을 울렸으나 집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안에 없나 보군요. 오늘은 집에서 쉬는 날일 텐데, 잠시 어디 나간 걸까요.”

“…….”

난감해하는 음성에 국왕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자는 국서가 저택 관리를 일임한 집사로, 국왕이 진작 돈을 줘서 멀리 보내버린 상태였다.

“별수 없네요. 사용인 없이 단둘인 것도 그 나름으로 괜찮겠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국서는 구김 없는 소년 같은 미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국왕의 양심을 짓눌렀다.

마을의 가장자리는 물빛 호수와 인접해 있었다. 그곳에서 언덕까지는 국서가 말한 예의 그 아마릴리스 꽃길이 쭉 이어져 운치를 자아냈다.

“이틀 밤을 묵는 일정인 건 알고 계시지요?”

“그래.”

“마을 여관에는 기사들끼리만 묵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지내겠다고 전해두었고요.”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안 물어보십니까?”

“……도착해보면 알겠지.”

“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국서가 미소 지을 때마다 국왕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꽃길이 예뻐도 예쁜 줄을 모르고 걸었다.

높은 언덕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저택은 등대처럼 눈에 띄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국왕의 표정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쯤에서 슬슬 국서도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칼리.”

“왜.”

“혹시 어디 불편하신…….”

“아니다.”

국서는 뭐라 말하려던 것을 관두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는 말재간이 별로 없었으므로 다른 것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국왕이 제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흠칫하며 국서를 돌아보았다. 국서는 미소 지었다.

“손잡고 걸어요.”

“…….”

이번에 국왕은 벽을 치지 않았다.

착실한 발걸음은 기어코 두 사람을 목적지에 옮겨놓고야 말았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끝나자, 초록 잎사귀 너머로 크림색 벽과 진청색 지붕을 인 예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기입니…….”

국서의 말이 뚝 끊겼다.

과연 기사단장답게 감이 좋았다. 아직 저택과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그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반색하던 낯빛이 순식간에 탈색되고 저택에 못 박힌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칼리, 잠시만……. 잠시만 여기 있어 주세요. 먼저 가서 확인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두 발이 땅을 박찼다.

여유 없는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남겨진 국왕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었다.

국서는 온 힘을 다해 저택으로 달렸다. 불길함을 부추기듯 쇠창살로 된 철문은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뛰쳐 들어간 즉시 펼쳐진 광경은 끔찍했다.

“아…….”

정원은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직접 심은 꽃과 나무들이 무자비하리만치 다 파헤쳐져 있었다.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붙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경비는 아무도 없었고 문고리는 부서져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을 열었다.

“…….”

이번엔 작은 탄식조차 뱉지 못했다.

내부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가 수년 동안 하나하나 채워 넣은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보여줄 날만을 기대하며 아껴왔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참혹하게 부서져 잔해로 변해버렸다.

국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쉬어지지 않는 숨을 간신히 쉬어내며 계단을 올랐다.

1층 못지않게 난도질되어 있는 2층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실로 갔다. 그리고 협탁을 뒤졌다.

그곳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국서는 망연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사고회로가 마비된 듯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도둑인가. 그런데 도둑이 이토록 악의와 증오에 차서 집을 부숴놓기도 하나.

그때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돌아본 곳에선, 그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국왕이 있었다.

“칼리…….”

국서는 참담함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런 폐허가 아니었다.

그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예쁜 것들이 모조리 쓰레기가 된 채로 그녀에게 보여지는 기분은 끔찍했다.

“……이즈.”

국왕은 제게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지 고개를 푹 숙인 국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녀는 애써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고 태연한 척했다. 정면에서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기만적인 질문을 했다.

“괜찮은가?”

“괜, 찮습…… 아.”

국왕과 국서가 동시에 흠칫했다.

대답한 즉시 국서의 벽안에 물막이 꼈다. 급속도로 차오른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터지며 뺨을 타고 한 줄기 물 자국을 만들어냈다.

“…….”

일련의 과정을 코앞에서 똑똑히 보고 만 국왕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울다니.

국왕은 괴로워졌다. 동시에 너무도 화가 났다.

이게 뭐라고. 이깟 집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 속상한가?”

아무리 가다듬으려 노력해도 말투는 씹어뱉듯 나와 버렸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졌다. 국왕이 국서의 양 어깨를 아프게 붙잡았다.

“집이라면 짐이 새로 지어주겠다. 훨씬 크고 웅장하게. 이딴 보잘것없는 저택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아예 궁전을 지어주겠어. 눈 닿는 모든 곳에 대리석과 황금과 보석을 바르고 벽과 천장에는 최고의 예술가들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겠다. 복도에는 온갖 보물과 예술품을 늘어놔 주지. 그러면 되나?”

국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도리어 심한 말을 들어 상처받은 눈을 했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칼리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게 있어서 이 저택은 그런 것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대관절 이깟 저택이 뭐라고!”

“칼리?”

영문을 몰라 말갛기만 한 벽안을 앞에 두고, 그녀는 분노를 터뜨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네가 그런 얼굴을 해? 이깟 게 뭐라고. 이깟 집 한 채 엉망이 된 게 무슨 대수라고!”

“……칼리, 제가 못난 꼴을 보여드려 화나신 것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제일 괴로운 것은 그일 텐데도 침착하게 그녀를 이해시키고자 했다.

“이 집은 제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호소력 있는 애틋한 어조였다. 그러나 지금의 국왕에게는 역효과였다.

“하, 심장.”

짓씹힌 입술에서 나온 음성이 음습하고 살벌했다.

그의 심장. 그건 본디 그녀의 것이어야 했다. 다른 여자와의 추억으로 빚어낸 끔찍한 공간에 투영해도 좋을 그런 게 아니었다.

붉은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나 동시에 입술은 비틀린 호선을 그렸다.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겨버린 국왕은 잔혹해졌다.

“재밌는 걸 알려줄까?”

“…….”

“네 심장, 내가 부쉈어. 내가 짓밟았어.”

“예……?”

넋 나간 얼굴이 가학심을 자극했다. 국왕이 품에서 꺼낸 물건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네 뒷조사를 했더니 이런 집을 숨겨놨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찾아 가서 다 부숴버렸어. 내가, 직접.”

“…….”

제 손안을 내려다보는 국서의 벽안이 깨질 듯이 흔들렸다.

그가 찾던 반지가 있었다. 그녀가 범인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가 간신히 질문을 뱉어냈다.

“왜…….”

“거슬려서.”

“…….”

“네가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마냥 이것저것 채워 넣고 애지중지했을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거슬렸어.”

“…….”

국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벙긋거리는 입 모양만이 계속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듣고 싶은가?”

국왕은 속이 비틀려 진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랬냐고? 그걸 말하라고? 말하고 비참함을 인정하라고? 이쪽은 피눈물을 흘릴 만큼 아팠는데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괴로워할 듯했다. 그걸 보고 있는 게 더 아팠다.

그래서 국왕은 자조하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이유가 궁금하다며 애원하는데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 약점을 알려줄 테니 한번 휘둘러봐. 한 번 정도는 원하는 만큼 휘둘려 주마.

“내가 널……!”

그때였다.

“저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

결코 그녀를 휘두르려는 게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저를 사랑하시면서,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까? 왜 제게…… 상처 주듯이 말씀하십니까? 당신은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

원망을 담은 눈동자로, 정말 이해 안 된다는 듯이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이곳은……, 제가 손수 만든 집입니다.”

“…….”

“당신을…… 당신을 생각하며 손수 가꾸고, 손수 고르고, 손수 채워 넣은 모든 것이 제 마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당신이 직접……, 왜, 왜 그러셨어요.”

“……뭐?”

국왕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국서의 말은 계속되었다.

“혹시 제가 착각한 건가요?”

“…….”

“혹시 정말 저를 미워하셨습니까? 세간의 말처럼 당신이 증오해 마지않는 하일릭의 핏줄이라서, 복수하다 버리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래서 제 마음 같은 건 귀찮고 짜증나서 그러셨습니까?”

“…….”

“아니……, 아닐 겁니다. 당신이 제게 그럴 리 없어요. 당신은 제게 그럴 분이 아닙니다.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말해주세요. 왜 그러셨는지.”

“…….”

“왜, 왜 말이 없으십니까? 하다못해 여기서 전투라도 벌어졌다고 말해 봐요. 제발, 거짓말이라도 해요. 속아드릴 테니까!”

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비통한 음성이 끝에 가서 갈라졌다.

그녀는 제 심장도 갈라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 생각이란 걸 하려고 애썼다. 마비되었던 사고회로가 삐걱거리며 기능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생각하며 가꿨다고?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라고? 자신을 그리면서?

그럼 제가 피눈물을 흘릴 만큼 질투한 여자가 자신이라고?

“…….”

굳어버린 몸뚱이에 가까스로 호흡이 불어 넣어졌다.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이, 이즈.”

“…….”

“오, 오해를…… 내가 오해를 한 것 같다.”

“…….”

늦은 걸까. 국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꾸가 없었다. 시선조차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초조함에 국왕의 입술이 바싹 탔다. 이제 애원은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 그런 이유로 부순 게 아니니까 화내지 마.”

“……화내는 게 아니라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으나 그녀를 돌아보진 않았다.

빨리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질투…했어.”

“…….”

혀를 씹고 나온 단어는 유의미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얻는 데 성공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산, 시, 신혼집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번에는 국서가 머리를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냐는 눈빛에, 국왕이 버럭 했다.

“반지가! 반지가 있었잖아. 나는 본 적도 없는 반지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면서. 내가 준 목걸이는 버려놓고!”

“제 반지는 그 목걸이를 녹여서 만든 것입니다.”

“……뭐라고?”

국서는 이참에 시원스레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목걸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들키지 않게 반지로 만들어야 했어요.”

“……도망을 왜 쳐?”

“10년 전 그날 밤, 보렐리 후작 부인이 에셀하라트 수도원에 찾아왔습니다.”

“……!”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할 목적으로 저를 지명했는데, 당신의 목걸이를 알아보고는 잠시 확인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비우더군요. 그래서 그 길로 곧장 시국으로 도망쳤습니다.”

“…….”

“그곳에서 가능한 한 빨리 성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서임을 받은 후부터 교단을 통해 계속 당신을 찾았고요. 하지만 이름과 성이 정확하지 않아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국서가 적안을 직시하며 똑똑히 말했다.

“저는 한순간도 당신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제 사랑은 평생 당신 한 분뿐이니까요.”

“…….”

“이제 오해는 다 풀린 겁니까?”

명료한 정리에 국왕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엉망진창이었다. 미안하고, 기쁘고, 기쁨을 느끼는 자신이 배덕하고, 다시 미안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 나는…….”

“…….”

“내가, 뭐라고 사죄해야…….”

“…….”

“미, 미, 미안…. 미안해…. 미안해, 이즈. 나…….”

국왕이 다급히 그의 양 뺨을 감싸 저를 보도록 했다. 흡사 매달리는 듯한 손길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즈, 제발. 이즈.”

“…….”

그의 심장을 난도질해 상처 입힌 대가가 무엇일지 너무도 두려웠다. 정이 떨어졌다며 외면당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시큰해졌을 그때였다. 어깨를 감싸 안는 따뜻한 팔이 느껴졌다. 그녀를 나락에서 구하는 온기였다.

국서가 국왕을 품 안에 넣어 다독였다.

“아닙니다. 제가 처신을 똑바로 못한 탓입니다.”

“…….”

“제가 너무 행복해서…… 칼리도 저와 같을 것이라 멋대로 생각했습니다. 저만 혼자 행복해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하고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달래듯이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했다.

그의 상냥함은 언제나처럼 진심이었다. 국왕은 그게 너무도 위안이 되는 동시에 목이 멜 만큼 미안해졌다.

“내,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나는 네가 나를 버린 줄 알고…, 미워서, 너무 미운데 곁에 잡아놓고 싶어서……, 하일릭 공작과 성황청을 협박해서 네가 나한테 오게끔 하고……, 결혼을 강요해서 주저앉히고……, 또 너를 어, 억지로…….”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데 국서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억지였던 적 없습니다. 단 한 번도.”

“…….”

“결혼식 때 분명 말했잖습니까. 이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

“당신의 반려가 되고, 당신을 맘껏 안고. 모든 게 제 오랜 바람대로였습니다. 기꺼웠다면 기꺼웠지, 억지일 리가요.”

그들의 결혼은 처음부터 정말 결혼이었다고, 단 한 번도 약탈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그는 열렬한 고백과 함께 말하고 있었다.

“너는 성기사인데…….”

“이제 환속할 거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저는 당신의 국서입니다.”

국서는 단호하다 못해 정색까지 해가며 호칭을 정정했다. 국왕의 적안이 부풀었다.

놀란 눈으로 저를 담아내는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국서는 다시금 그녀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칼리.”

“응.”

“칼리오페.”

“응.”

“당신을 사랑합니다.”

“…….”

국왕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국서가 그러지 말라며 엄지로 입술을 훑을 때에서야 그녀는 제 감정을 토해냈다.

“나도, 나도 그래. 사랑해, 이즈.”

국왕의 팔이 국서의 목을 끌어안았다. 코끝이 스치며 숨결이 섞였다.

마음을 확인한 연인의 실루엣을 발코니의 바람이 흔들고 지나갔다. 정원에 몰래 피어난 붉은 아마릴리스들이 그들의 입맞춤을 훔쳐보며 같이 하늘하늘 춤추었다.

분명, 그들의 폐허는 금방 재생될 것이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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