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풋사랑 (4/6)

4장. 풋사랑

그 시절, 국왕은 어린 왕녀였고 성기사는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소년이었다.

정부의 괴롭힘은 심약한 레나엘 왕비의 건강을 야금야금 좀먹었다. 해가 갈수록 몸이 약해진 왕비는 최근에는 산책을 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어린 칼리오페는 어떤 의사가 다녀가도 차도가 없는 모친의 상태에 근심이 컸다. 소용없는 의학 대신 신의 자비에 기대보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탓이었다.

왕궁에 성직자를 부를 수는 없었다. 부정을 죄악시하는 교단과 부정 그 자체인 정부의 관계가 좋을 리가 없었다.

성직자를 부른 사실이 보렐리 후작 부인의 귀에 들어가면 사달이 날 것이 자명했다. 하물며 호출 이유가 왕비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드리기 위함이어서야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타락의 온상인 왕궁에서 기도를 올려봐야 신에게 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칼리오페는 밖에서 기도를 하고 싶었다.

칼리오페는 보렐리 후작 부인이 심어놓은 감시 시녀들의 눈을 피해 새벽 일찍 왕궁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근교에 위치한 에셀하라트 수도원이었다. 얼마 전에 다과회에서 엿들은 귀부인들의 대화에 의하면, 이곳에서 하는 기도가 그리도 영험하다고 했다. 맞장구치는 이들도 많았던 것을 보면 확실했다.

마차가 목적지에 섰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누구든 환영하듯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당당한 걸음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문제가 발생했다.

수도원 부지는 너무 넓은 데다 숲속 산길이나 다름없었다. 칼리오페는 그곳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다.

다리가 아파서 양산을 지팡이 삼아 걷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을 발견했다.

“거기!”

그녀의 외침을 들은 은발의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칼리오페는 세상이 정지하는 줄 알았다.

‘사람?’

성스러운 장소에서 맞닥뜨리는 첫 인물이라선지 천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한편 은발의 소년, 이제키엘도 칼리오페를 유심히 보았다.

보닛과 미니 드레스 차림을 한 것이 딱 봐도 어린 귀족 영애 같은데, 대체 이런 곳에 홀로 무슨 일일까.

‘요하네스의 손님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어린데…….’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끝난 뒤, 먼저 입을 연 건 칼리오페였다.

“으흠! 그대는 이곳에서 지내는 견습 사제인가? 기도하는 장소가 어디 있는지 말해다오.”

“…….”

자그마한 체구로 오만한 말투를 뱉는 입술이 야무졌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제키엘은 기도실을 찾는 손님이시냐고 묻기 위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소리 없이 다물었다.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은 아직 아침. 수도원에서 지내는 고아들에게 매일 오전은 묵언 수행 시간으로, 일체의 대화가 금지되었다.

칼리오페가 재촉했다.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기도 드리고 싶어서 그렇다. 길을 알려줘.”

이제키엘은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고는 먼저 뒤돌아 앞장섰다. 칼리오페는 어어, 하며 그의 빠른 걸음을 뒤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역대 성인들의 석상이 세워진 작은 정원이었다. 과연 영험함이 더해져 기도가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십자가도 있었다. 칼리오페는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고맙구나. 그런데 그대는 왜 한마디도 안 하지?”

이제키엘은 묵언 수행 중이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술에 검지에 대고 고개를 저은 뒤 두 손을 모았다.

“아, 그대…… 말을… 못하는구나…….”

애틋한 눈빛이 석연찮았지만 어쨌든 핵심은 전달된 것 같았다. 대충 맞다는 뜻으로 그는 고개를 작게 숙여 보였다.

이제 목적을 수행할 시간이었다. 칼리오페는 보닛과 양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바르게 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황급히 이제키엘을 돌아보았다.

“저기…….”

“……?”

“가지 말고 옆에 있어라.”

그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두고 가면 또 길을 잃을 테니까.

칼리오페는 어색하게 양손을 붙잡고 한참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녀는 기도가 처음이었다.

보렐리 후작 부인이 실권을 쥐고 나서부터 왕궁에서 요직을 맡아보던 성직자들은 축출되었다. 교단은 왕국의 큰 행사를 주관하는 권한도 빼앗긴 채 왕궁 출입이 일절 금해졌다.

그게 칼리오페가 다섯 살 때의 일이었으니, 그녀는 종교 문화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자세를 잡은 지 한참 만에 그녀가 첫 기도를 시작했다. 초보자가 으레 그러하듯 그녀도 신이 기도를 듣기 위해선 기도를 말로 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곧 내밀한 가정사를 담은 음성이 낭랑히 울려 퍼졌다.

“신이시여, 듣고 계시나요? 듣고 계시다면 어머니의 병환이 낫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정말 착하고 어진 분이신데, 정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시는 것도 모자라서 몸까지 아프시니 너무 슬퍼요.”

“…….”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기도였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굳이 에셀하라트 수도원을 찾을 건 뭐란 말인가.

이제키엘은 눈앞의 어린 귀족 영애가 참으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도는 계속되었다.

“못된 정부는 겨울 감기 한번을 안 걸리는데 저희 어머니는 봄날 산책조차 하기 힘드시다니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게 어려우시다면 차라리 어머니의 병을 정부한테 옮겨주시면 안 될까요? 아예 불치병 같은 것에 걸려서 멀리 쫓겨나면 더 좋고요. 물론 정부의 자식들도 같이요. 듣자하니 몸이 썩는 병 같은 것도 있다던데, 그런 걸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어째 점점 기도가 아니라 저주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칼리오페 본인은 진지했다. 그녀는 어느새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나쁜 사람들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어하세요. 제발요. 간청드립니다, 신이시여.”

“…….”

이때만 해도 어린 왕녀는 마음이 여렸다. 레나엘 왕비의 섬약함을 그대로 물려받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감춰지지 않는 훌쩍임을 이제키엘은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자존심이 세다고 했다. 하다못해 못 본 척이라도 하기 위해 등을 돌리려는데, 칼리오페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이제키엘은 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조금 망설이다가 호의를 받아들였다.

“신세를 졌다. 이건 나중에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주마.”

시선을 피하며 불퉁하게 내뱉는 모습은 위엄 있다기보다는 새초롬했다. 영락없는 보통의 소녀 같았다.

‘아니, 보통은 아닌가.’

꽤 많이 예쁘고 귀여운, 그런 소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기도는 끝났지만 눈물 자국이 마르려면 시간이 필요할 성싶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칼리오페는 다리가 아프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탁탁 쳤다.

“너도 앉아라.”

“…….”

“빨리.”

얼떨결에 앉은 그가 이게 무슨 상황일까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격식 없는 말투로 난데없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신은 부정을 싫어한다던데 왜 우리 집안을 두고 보실까. 정말 신벌이 내려 정부가 벼락이라도 맞는다면 좋겠는데.”

“…….”

“아니, 제일 나쁜 건 아버지야. 어머니가 나를 낳기도 전에 정부에게서 자식을 셋이나 봤어. 평생을 약속한 부인을 두고 코르티잔과 바람을 피워서 살림까지 차리다니, 이게 말이 돼?”

“…….”

“하여간 처자식 두고 바람피우는 남자는 다 그곳을 못 쓰게 만들어야 해.”

한번 말문이 열리자 거침이 없었다. 그간 쌓인 것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아니 글쎄, 아버지 주변의 귀족들은 죄다 결혼해도 애인 하나씩은 두는 거래. 더러워. 한 사람에게 만족을 못 하겠으면 애초에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난 내 남편이 그러면 가만 안 둘 거야. 뭘 가만 안 둘 거냐고? 그곳 말이야, 그곳. 알았어?”

“…….”

알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박력에 못 이겨 이제키엘은 고개를 끄덕끄덕해버렸다.

한참 씩씩거리던 칼리오페가 정신을 차리고 새초롬한 귀족 영애로 돌아왔다.

“아, 내가 잠시 감정이 북받쳐 격양되었구나. 하마터면 기품을 잃을 뻔했어. 이래 봬도 나는 엄청 대단한 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숙녀인데.”

“…….”

“진짜다. 들으면 놀랄까 봐 안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오해할 것 같아서 일러두는데, 나는 원래 말이 많지 않다. 러비 외에는 별로 이렇게 편하게 말해본 적도 없고…….”

“…….”

“아, 러비는 내가 키우는 개야. 하얀 개. 너처럼 예쁘고 순하고 조용하고……. 그러고 보니 하얀 것도 비슷하구나. 머리 만져 봐도 돼? 러비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데.”

“…….”

“아, 안 되겠지. 미안하구나.”

“…….”

이제키엘은 생각했다.

많이 외로웠던 사람 같다고. 마치 자신처럼.

꼬르르륵!

“앗!”

별안간 칼리오페의 배에서 웅장한 소리가 났다. 성장기의 어린 왕녀는 새벽 댓바람부터 왕궁 탈출극을 찍느라 아침을 거른 채였다.

이제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오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손은 계속 맞잡은 채였다.

두 사람은 수도원 뒷문을 통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부패한 수도원은 꼭 이런 데만은 청빈했다. 이것저것 뒤져 보았으나 음식이라고는 성찬식에 쓸 무교병과 포도 과즙뿐이었다.

“나 주는 거야? 먹어도 돼?”

끄덕.

칼리오페는 이제키엘이 준 무교병을 받아들고 오물거리다 툴툴댔다.

“이건 무슨 과자야? 딱딱하고 맛이 없는데.”

포도 과즙을 따라주던 이제키엘은 괘종시계를 힐끗 확인하고 대답했다.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입니다. 무교병이라 부르지요.”

“……?!”

칼리오페가 이제키엘을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어… 어어…. 말…….”

“묵언 수행 시간이 끝났으니까요.”

“…….”

그녀의 손에서 무교병이 추락하려는 것을 이제키엘이 순발력 좋게 막았다.

칼리오페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키엘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을 뻔했다.

“으, 으아아.”

말 못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주절주절 하소연을 했던 것이 떠올라 어린 왕녀는 울상이 되었다.

뭐라고 말하며 달래야 하나 이제키엘이 고민할 때였다.

“이제키엘! 이제키엘 형제! 어디 있나요?!”

“요하네스 사제가 부르는군요. 가봐야 하니 잠시만 여기에…….”

잠깐 눈을 뗀 사이 칼리오페는 후다닥 도망친 상태였다. 빈자리를 보며 이제키엘은 왠지 모르게 아쉽다고 느꼈다.

칼리오페와 이제키엘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뒤였다.

소년이 약간의 상실감과 함께 귀족 소녀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할 때쯤, 그녀는 꿈결처럼 그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

칼리오페는 심술궂게도 일부러 그늘을 드리워 이제키엘의 독서를 방해했다. 태양을 등지고 선 그녀가 눈이 부셔서 그는 조금 넋을 놓은 채 쳐다보고 말았다.

“손수건을 돌려주러 왔다. 받아.”

“…….”

“이, 이젠 안 속아! 말할 줄 아는 거 안다!”

“…….”

“안다니까. 그러니까 그대의 이름이 이제키엘……이랬나.”

그제야 이제키엘의 정신이 돌아왔다. 두 눈이 숨길 수 없는 기꺼움으로 빛났다.

묵언 수행이고 뭐고 상관없이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아십니까?”

“저번에 누가 부르는 거 들었어.”

“그걸 기억하셨고요?”

“……응, 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키엘은 스스로가 생각보다 훨씬 더 그녀를 반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게 허락된 질문일까 고민하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의 성함은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나?”

“예.”

“나는…… 어, 음, 칼리…….”

당황스러워 일단 애칭만 우물쭈물 알려주었다.

‘칼리…….’

이제키엘은 속으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녀의 짙붉은 눈이나 당당한 태도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알게 되어 기뻤다.

“부르진 못하겠지만 기억해두겠습니다.”

이제키엘이 웃었다. 그 순간, 어린 왕녀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 그대는 이곳의 견습 사제지?”

“예. 수도원에 몸을 의탁하는 고아들은 임시 견습 사제로 취급됩니다.”

“그럼…….”

칼리오페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여기 올 때마다 그대를 볼 수 있겠구나.”

“……예.”

그는 홀린 듯이 대답해버렸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순간에 철회되었다.

만남은 매주 이루어졌다. 성인들의 석상이 있는 정원은 둘만의 약속 장소가 되어, 이제키엘은 항상 그곳에서 칼리오페를 기다렸다. 칼리오페는 한번 들를 때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머물다 떠났다.

크게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함께 기도하고 산책하고 대화를 나누고 칼리오페가 가져온 달콤한 간식들을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한두 번은 이제키엘이 성경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듣다가 칼리오페가 깜빡 잠이 들어 그대로 시간을 다 보내버리기도 했다.

두 계절이 지났다. 시간은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로 만들어 주었다.

“이즈.”

“예, 시어도어 아가씨.”

시어도어는 칼리오페가 먼 나라 귀족이라며 대충 지어낸 성이었다.

“그대는 성년이 되면 뭘 할 거야?”

“환속하거나, 이대로 신께 서약하고 교단에 남거나 하겠지요. 어느 쪽이든 에셀하라트 수도원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본래는 좀 더 일찍 떠나려 했지만.

칼리오페의 빨간 눈이 커졌다.

“떠나?”

“예. 저는 교단에 종신 서약을 한다 하더라도 사제보다는 성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에셀하라트는 신학 연구 위주인지라 기사 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아가씨는요?”

칼리오페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게 싫어서 황급히 대화의 초점을 돌렸다. 그러나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야…… 정략결혼을 하지 않을까.”

“……그렇, 습니까.”

“응……. 의무니까.”

“…….”

“…….”

서먹한 침묵이 두 사람 주변을 감돌았다.

이제키엘은 조금 멍해졌다. 귀족들이 결혼으로 장사를 한다는 사실은 상식과 다름없었지만, 칼리오페의 입에서 나온 ‘정략결혼’이란 단어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제키엘은 마치 그를 둘러싼 세계에 금이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속이 따끔따끔했다. 그러나 그 감각을 들켜선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이제키엘은 온 힘을 다해 그가 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말을 쥐어짜냈다.

“훤칠하고…… 상냥하고…… 신실한 남편감을 만나실…… 겁니다.”

“흥! 이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보람도 없이 따지는 듯한 퉁명스런 대꾸가 돌아왔다.

“머리는 벗겨지고 배는 불뚝하게 나온 중년이겠지. 여자 쪽이 팔려가는 정략결혼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

실컷 씩씩거린 뒤에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즈 같은 영식이 청혼해주면 좋을 텐데.”

“…….”

이제키엘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찰나의 기쁨이 지나고, 심장을 저미는 듯한 통증이 가슴께에 퍼졌다.

왜 자신은 귀족 영식이 아닌 걸까.

길게 남은 듯한 아픔이었다.

그때 봄바람이 하늘하늘 불어왔다. 그들이 기대앉은 벚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연분홍색 꽃잎을 떨궜다.

“아, 이즈. 꽃잎.”

고운 손이 은발에 달라붙은 꽃잎을 떼 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가 움찔한 순간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칼리오페가 그대로 이제키엘의 은발을 쓰다듬듯 매만졌다.

“와아, 역시 부드럽구나.”

이제키엘의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무언가가 자극받는 순간이었다.

그가 칼리오페의 손을 붙잡았다.

“이즈?”

“저는…….”

그의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저는, 러비가 아닙니다.”

“…….”

“러비가 아니에요.”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붉은 눈을 보면서 이제키엘은 정신을 차렸다.

무작정 떠오른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뒤늦게야 그는 자신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돌이켜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그녀를 향한 마음을 확실하게 깨달아버렸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이대로 시선을 마주하면 제 안의 내밀한 감정을 그녀에게 들켜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요하네스 사제가 부르는 것 같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어? 어, 응. 다, 다음에 봐.”

어디 있는지도 모를 요하네스를 비겁한 변명으로 썼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걸음이 빨랐다.

신은 이제키엘을 본격적으로 시험하는 듯했다.

자그마하던 소녀는 한 주가 다르게 성숙해지며 제 미모를 세상 만방에 알릴 기세로 아름다워졌다.

도도하고 기품 있는 귀족 소녀의 모습은 뭇 소년들이 처음 품는 동경과 사랑을 모아다 빚어 놓은 것만 같았다. 여기서 그녀가 더 성장하면 얼마나 무섭도록 매력을 발산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즈, 보고 싶었어.”

“…….”

특히 애칭을 부르며 달콤한 말을 할 때면 이제키엘의 심장은 요란하게 난동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늘려가던 때였다. 칼리오페의 눈이 수상한 것을 발견했다. 수도원 건물 뒤쪽의 은밀한 출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귀족들의 모습이었다.

“저기는 뭐하는 곳이야?”

“저기는…….”

이제키엘은 적잖은 낭패감을 느꼈다.

“기도실입니다.”

“기도실이 지하에 있어?”

“내밀한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찾습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일단 아가씨가 갈 만한 곳은 아닙니다.”

“나는 못 가?”

“예. 그러니 근처도 가지 마세요.”

잘 모른다면서 마지막 덧붙임만은 단호했다.

문제의 장소가 기도실이라는 경건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이 은밀히 성욕을 채우는 용도로 빌려 쓰는 장소였다.

미혼의 연인들이 밀회를 하는 건 그나마 건전한 축에 속했다. 대체로는 불륜을 저지르거나, 욕구만 해결할 상대를 불러들이는 쪽으로 쓰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부패한 수도원은 장소뿐만 아니라 착취당할 사람까지 제공하기도 했으므로.

이런 쪽의 더러운 일은 요하네스 사제가 맡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은밀한 귀족 고객들을 요하네스의 손님이라 불렀다.

칼리오페는 호기심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흐음, 젊은 사람들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중년 귀족들이네. 기혼이 조건이라서 나는 안 되나?”

“……아가씨, 오늘 하늘이 참 예쁜 것 같습니다.”

“그러게, 이즈의 벽안과 닮았구나.”

칼리오페는 주제를 돌리고 싶어하는 이제키엘의 장단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그 과정에서 눈동자로 플러팅을 당한 이제키엘이 귀 끝을 붉힐 때였다. 칼리오페가 새로운 화젯거리를 꺼냈다.

“이즈, 궁금한 게 있는데.”

“뭔가요?”

“기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성기사도 결혼할 수 있어?”

“아뇨. 성기사직을 반납하고 환속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사제보다는 좀 더 자유롭지 않아?”

“적용되는 규율은 같습니다. 다만 성기사들 쪽이 편법을 많이 쓰고, 교단에서도 대체로 눈감아주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지요.”

“편법?”

“일단 가정을 꾸리고, 충분한 명예와 부를 쌓은 다음에 환속해서 결혼하는 겁니다. 보통 아이가 열 살을 넘기면 그렇게 합니다. 계속 사생아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종교는 속세와는 전혀 다른 계급 체계를 가진다. 태생이 평민이라 해도, 고위 성직자가 되면 어지간한 귀족들보다도 유복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정부로,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사생아로 만드는 것만 감수할 수 있다면 포기할 이유가 없는 출셋길이다.

그때, 잠자코 설명을 듣던 칼리오페가 담담히 물었다.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럼 있잖아, 이즈…….”

“예.”

“나랑 살래?”

“…….”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이었다.

담담하고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이제키엘과 마주친 예쁜 적안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농담을 가장한 진심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심장의 박동이 거칠어졌다.

이제키엘은 오만 가지 번민에 휩싸였다.

그가 보는 칼리오페는 안온한 세계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라온 귀족 아가씨였다. 반면 당장 이제키엘은 아직 성기사도 뭣도 아닌 평민 고아일 뿐이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함께하는 고단한 삶을 그녀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입술이 뱉어내야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아가씨는 지체 높은 귀족 영애잖습니까. 평생을 함께 할 반려는 귀족 중에서…….”

“나더러 대머리 배불뚝이 중년이랑 결혼하라고?”

끝까지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칼리오페가 말을 잘랐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잔뜩 씩씩거리며 외쳤다.

“이 바보야!”

칼리오페가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이제키엘은 차마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잡아도 그녀가 원하는 말은 들려줄 수 없을 테니까.

만약 이제키엘이 성기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신 같이 귀한 사람을 세상 모두가 정부라 손가락질하도록 둘 순 없다. 하물며 당신은 정부와 사생아 때문에 줄곧 아파해온 사람이지 않은가.

못 할 짓이었다. 이제키엘은 결코 자신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금 가고 부서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때 그의 벽안이 달갑지 않은 인물을 발견했다. 칼리오페가 사라진 바로 그 방향에서, 연갈색 머리의 깡마른 청년이 이제키엘에게 다가왔다.

처진 눈꼬리가 선량해 보일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눈물점을 파들거리며 웃는 얼굴은 뱀처럼 간교했다.

“여기 있었군요, 이제키엘 형제. 한참 찾았어요.”

“죄송합니다, 요하네스 사제님.”

“그나저나 오는 길에 굉장히 예쁜 귀족 영애가 지나가던데, 아는 사이인가요?”

“기도를 드리러 가끔 오시는 분입니다. 말 상대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아, 기도요.”

“……의미 그대로의 기도입니다.”

“흐음.”

권력자들의 비위 맞추는 일을 하느라 눈치가 남다른 요하네스였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제키엘 형제와는 아무 사이 아니다? 그럼 제가 저 영애와 다른 기도를 같이 해도 되겠군요?”

“……!”

가여울 정도로 정직한 반응이었다. 요하네스는 악취미적으로 즐거워했다.

“농담입니다.”

“……예.”

“혹시나 싶어 말해두지만, 쓸데없는 마음은 품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

대꾸 없는 이제키엘에게 슬슬 요하네스는 용건을 꺼내고자 했다. 마침 그것은 이제까지 그들이 나눈 대화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런, 이제키엘 형제. 그대의 눈에 번민이 보이는 것 같네요. 마침 참회 기도 시간입니다.”

이제키엘의 어깨가 움찔했다.

“……오늘입니까.”

“예, 그렇답니다.”

“알겠습니다.”

찰나의 두려움은 곧 체념으로 바뀌었다. 이제키엘은 요하네스를 뒤따라 어두운 지하실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한 달이 흘렀다.

“후우…….”

이제키엘은 숨을 몰아쉬며 나무 그늘에 앉았다. 등은 기대지 않도록 자세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이마는 땀이 배어나 앞머리가 살짝 젖어 붙어 있었다.

부쩍 잦아진 참회 기도 탓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 뻔했을 때였다.

“어디…… 아파?”

“……아가씨?”

이제키엘은 순간적으로 꿈인가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곧추세우다가 하마터면 등이 나무에 닿을 뻔했다.

“역시 불편해 보이는데.”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칼리오페가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공기가 서먹해지기 전, 이제키엘이 미소 지으며 인사를 꺼냈다.

“오랜만이네요.”

“……응.”

한 달 만에 만난 칼리오페는 성숙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특히 오늘은 무도회장에 왕자님이라도 만나러 갈 것처럼 유난히 반짝반짝 예쁘게 꾸미기까지 했다.

이제키엘이 칼리오페의 모습을 망막에 아로새겨 넣는 동안, 그녀는 그들의 마지막 헤어짐을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전에는 내가 숙녀답지 못했어.”

“아닙니다. 제가…….”

귀족이 아닌 탓이다. 공연한 자괴감으로 벽안이 흐려졌다.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주고 싶구나.”

“괜찮습…….”

“받아.”

박력에 못 이겨 이제키엘은 칼리오페가 건네는 것을 받고 말았다.

그것은 금제 목걸이였다. 향초를 넣도록 고안된 로켓 펜던트 형태가 독특했다.

“잘 간직해야 해.”

이제키엘은 이 목걸이가 칼리오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덧붙여 그녀가 어떤 의미로 이것을 준 것인지도.

잠시 우울한 낯을 했던 칼리오페는 다시 평소처럼 웃었다.

“이즈.”

“예.”

“칼리라고 불러줄래?”

“안 됩니다.”

선물을 받은 직후였음에도 거절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실수로라도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흘러넘칠 듯했으므로.

한편 칼리오페도 예상한 바였던 듯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다음 단계에 넘어갔다.

“그럼 게임을 하자.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뻔히 보이는 속내에 이제키엘은 조금 웃어버렸다.

“음……. 그다지 내키진 않습니다만.”

“뭐?”

그 말이 또 칼리오페를 자극했다.

“소원이 걸렸는데? 넌 나한테 바라는 게 없어?”

“……예.”

한 템포 느린 대답이 양심을 긁고 겨우 나왔다.

칼리오페의 볼이 불퉁해졌다. 평소라면 씩씩거렸겠지만 거사를 앞둔 그녀는 경거망동을 삼갔다.

“거짓말쟁이.”

“…….”

“됐어. 괜찮아.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아가씨가 이기는 게임입니까. 그럼 제가 불리한 게임을 굳이 해야 할까요?”

“질까 봐 그래? 이즈, 패기가 없구나. 그래 가지고 무슨 성기사를 하겠다고.”

“…….”

들어나 보자 싶었다.

“자!”

오늘 칼리오페는 가지고 온 짐이 많았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꺼낸 것은 납작한 정사각형의 초콜릿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16구 상자 속에서 코팅된 초콜릿이 반질반질 빛났다.

“딱 하나만 안에 꿀 말고 다른 게 들어 있어. 그걸 골라 먹은 사람이 패배야.”

“모르는 척 삼켜버리면 뭐가 들었는지 확인을 못 할 텐데요.”

“반만 먹고 반은 상대방을 줄 거야.”

초콜릿 하나를 둘이서 나눠 먹는다니, 참으로 저같이 달콤한 게임을 고안해왔다고 이제키엘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즈는 못 속일걸. 꿀 말고 들어간 게 독한 럼주거든. 교리에 의하면 사제는 금주지? 럼주 초콜릿을 고르면 이실직고하고 꼭 뱉도록 해.”

“…….”

그의 신실함을 이용한 룰에 이제키엘은 조금 감탄해버렸다. 그의 아가씨는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잠긴 이제키엘은 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칼리오페가 시무룩한 어조로 말을 흘렸다.

“이 초콜릿, 되게 힘들게 구해왔는데…….”

“하죠.”

“정말?”

“예.”

오랜만에 만난 칼리오페가 속상하고 실망한 얼굴만 보여주다 간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신 위치를 섞게 해주세요.”

“철저하네. 안 보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조치가 끝난 후,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 먼저 고를게.”

“예.”

칼리오페는 앙증맞은 입술로 반을 베어 문 뒤 남은 반을 이제키엘에게 건넸다. 자연히 손으로 먹여주는 구도가 되었다.

그의 입술에 스친 칼리오페의 손끝이 움찔했다. 이제키엘은 모르는 척 혀로 초콜릿을 굴리고는 말했다.

“달콤합니다.”

“…….”

“꿀이네요.”

“응…….”

이제키엘도 똑같이 했다. 제 입술이 닿은 초콜릿 반쪽을 칼리오페의 입술이 삼키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때마다 벽안이 짙은 빛을 띠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

“…….”

그렇게 열세 번을 더 반복했다.

대단한 우연이었다.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도 럼주가 들어간 초콜릿은 나오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이런, 이즈 차례네.”

“예…….”

“굳이 확인해서 교리를 어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작은 손이 마지막 초콜릿을 후다닥 가져갔다.

“이즈는 못 먹으니까 내가 대신 먹어줄게.”

독한 럼주가 들어 있는 초콜릿이었다. 그런 것을 낼름 먹어버리는데도 웬일인지 이제키엘은 칼리오페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결과가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숨을 쉰 그가 웃으며 결과에 승복했다.

“제가 졌군요. 칼리……라 부르면 될까요?”

“아니.”

거절은 예상 범위 밖이었다.

“내 소원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말한 적 없어.”

“그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마침내 목적이 드러났다.

“키스해줘.”

“…….”

이제키엘은 깨달았다. 그의 아가씨는 덫을 놓는 데 재능이 있었다.

칼리오페는 숨길 수 없이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도 승자다운 오만함을 담아 요구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서.”

“저는…….”

벽안이 크게 흔들렸다. 거부의 말을 해야 하는 입술이 그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

칼리오페는 달려들 듯 이제키엘에게 안기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숨결이 섞였다. 예상했다시피 술 향이라고는 전혀 없이 마냥 초콜릿 향만이 가득한 입맞춤이었다. 하긴 처음부터 달콤하기만 한 덫이었다. 겁 많은 은색 짐승을 잡기 위한.

이 사랑스러운 기만을 깨달은 순간, 이제키엘의 인내가 끝났다.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 쥔 손을 풀어 칼리오페의 허리와 뺨을 감쌌다. 고개를 틀어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바짝 붙였다.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미각이 마비될 정도로 단것을 잔뜩 먹어 놓고도 그녀의 입술은 그 이상으로 달았다.

이성이 흐려지며 더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을 때였다. 칼리오페가 먼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떨어졌다.

얕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온몸 가득히 남은 아쉬움에 이제키엘이 다시 그녀를 제 품에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

그녀의 말이 이제키엘에게 제동을 걸었다.

“아.”

그녀의 뺨에 긴 물 자국이 생겨났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에 칼리오페가 당황하며 황급히 비벼 닦았다.

“이, 이만 가볼게. 안녕.”

마치 첫사랑이 끝난 표정으로 그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멀어졌다.

그제야 이제키엘은 깨달았다. 그녀는 달콤한 덫뿐만 아니라 쓰디쓴 끝까지 준비해 왔다는 것을.

왼쪽 가슴께가 지독하게 아파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이제키엘은 제 목을 쥐고 휘청거렸다. 어깨가 나무 기둥에 부딪히며 그의 몸이 볼썽사납게 미끄러져 내렸다.

겨우 호흡이 돌아와 박약한 몸뚱이를 살려냈을 때였다.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있었다. 고개를 든 이제키엘은 기껏 되찾은 숨이 다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키엘 형제.”

요하네스. 그가 전부 보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벌써 영애를 꼬실 줄도 알고.”

“……사제님.”

“얌전한 척은 다 하더니, 그 반반한 낯짝으로 제일 먼저 여자 몸에 올라탈 줄 알았어요.”

“그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함부로 내뱉는 저속한 말 속에 담겨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키엘의 반발은 요하네스에게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었다.

“감히 말대답을 해?”

“…….”

“신께서는 당신의 되바라짐을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늘은 아주 긴 참회 기도가 필요하겠어요. 따라와요, 당장.”

“……예.”

차라리 이 마음이 죄악이라 참회로 씻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없을 것임을, 이제키엘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라미네의 패악질로 인해 칼리오페에게는 장신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빼앗기지 않고 꼭꼭 지키고 있던 것이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그런 물건을 건넨 것은,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그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가망 없는 첫사랑을 끝내며 주는 선물로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이별 선물을 주었지만, 눈치 없는 그는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꼭 가지고 싶은 하나를 그에게서 빼앗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정했고, 원래라면 엄두도 못 낼 짓을 그에게 저지르기도 했다.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지독한 열병과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단단한 결심은 덧없이 무너져, 결국 두 달 만에 그녀는 에셀하라트 수도원으로 발길을 했다.

이제키엘은 약속 장소에 없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물어볼 사람을 찾기 위해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 사제와 마주쳤다.

“이제키엘이라면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웃는 얼굴은 첫인상과 달리 간교한 느낌이었다. 칼리오페는 내심 흠칫했다.

사제는 자신을 요하네스라 밝혔다. 그가 칼리오페를 이끌고 간 장소는 일전에 이제키엘이 그녀에게 갈 만한 곳이 아니라 했던 지하 기도실이었다.

지하답지 않게 깔끔한 복도를 지나 가장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기도실다운 모양새로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십자가가 수놓아진 휘장이 둘러쳐 있고, 중앙에는 성찬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은은한 촛불 속에서 방은 막 성스러운 의식을 시작할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푹신한 매트리스의 용도와 휘장 너머에 숨겨져 있는 각종 도구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생각은 바로 바뀔 것이다.

요하네스는 상기된 얼굴로 뿌듯하게 말했다.

“가장 좋은 방이랍니다.”

“아, 응. 고맙구나.”

“여기서 잠시 기도하고 계십시오. 제가 금방 이제키엘 형제를 불러오지요.”

요하네스는 성찬 식탁 위에 있는 향초에 불을 붙여주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자마자 칼리오페는 향초를 꺼버렸다. 왠지 제 부친의 방에 정부가 항상 피워놓는 향과 비슷해서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즈는 언제 오는 거지?’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괜스레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요하네스가 일을 똑바로 안 한 것은 아닌지, 혹은 이제키엘이 그녀가 왔다는 말을 듣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본래 그녀는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마침 이제키엘이 지하 기도실은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서 직접 그를 찾아 돌아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복도를 되돌아 출입구로 향할 때였다. 올 때는 미처 못 들었던 이상한 소리들이 다른 방들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그것은 다친 짐승이 앓는 듯한 소리였다.

칼리오페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서, 설마 다른 방은 성찬식이 아니라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라도 하는 건가?’

소리가 가장 크게 새어 나오는 곳의 문은 살짝 틈이 벌어져 있었다.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왕가의 피를 잇는 자로서 불의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칼리오페는 문틈에 눈을 댔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방 안에선 상의가 벗겨진 소년이 덫에 걸린 짐승처럼 사슬에 애처롭게 매달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등은 채찍으로 맞은 듯 처참하게 피범벅이었다.

흐트러진 은발을 하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칼리오페는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이제키엘!’

그녀는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 이즈! 정신 차려, 이즈!”

“……칼리?”

음성을 들은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올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불러준 이름이 기뻤으나 이런 곳, 이런 상황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

“기, 기다려. 내가 풀어줄게.”

천장에서 내려온 사슬 수갑에 그녀의 키가 닿지 않았다. 스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올라서는 사이 이제키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칼리가 왜 이런 곳에……. 아니, 그보다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어서 나가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요하네스가 오기 전에 어서……!”

“이런 꼴을 하고 있는데! 널 두고 어떻게 가!”

이제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화난 외침보다는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 때문에.

수갑이 풀렸다. 몸을 지탱할 힘을 잃은 이제키엘이 순간 휘청였다.

“윽!”

“이, 이즈!”

무너지려는 이제키엘을 칼리오페가 겨우 막았다. 작은 몸은 거의 안기다시피 그를 받쳐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기도의 한 방식입니다.”

“이런 게?”

더 이상 답해줄 기색이 없어 보였으므로 그녀는 다른 걸 묻기로 했다.

“그 사제가 그런 거지? 요하네스라는 그 남자.”

“…….”

“맞네.”

적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마냥 귀하게 자라온 줄 알았건만, 살기를 뿜어내는 순간부터 위압감이 주변을 짓누를 듯했다.

이제키엘은 말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칼리는 여기서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출구로 안내해 드릴 테니…….”

이제키엘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빠르게 칼리오페를 끌어당겼다.

“이, 이즈?”

“칼리, 이쪽으로.”

참회 기도를 빙자한 고문실에도 성스러운 만찬의 식탁은 있었다. 구김 하나 없는 하얀 테이블보는 마침 바닥까지 늘어져 식탁 아래를 완전히 가려주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숨었다. 좁은 공간이었기에 이제키엘이 칼리오페를 뒤에서 바짝 끌어안는 자세가 되었다. 그는 한 손으로 칼리오페의 입을 부드럽게 막으며 속삭였다.

“쉿…….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

굳이 그가 당부하지 않아도 칼리오페는 심장이 터질 듯해서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등에 닿은 그의 맨가슴과 한쪽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억눌린 숨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아 요하네스가 들어왔다. 그가 빈방 안을 둘러보며 콧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흐응? 우리 이제키엘 형제가 어디 갔을까요. 시간이 좀 남아서 직접 참회시켜주려고 했더니, 유감이네요.”

쉬익, 하고 채찍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냈다. 놀란 칼리오페가 화들짝 어깨를 떠는 것을 이제키엘이 제 품에 더 단단히 안아서 억눌렀다.

요하네스가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바닥에 던졌다.

“하, 뭐 됐어. 녀석 덕분에 2왕자님이 좋아할 만한 금발 머리 영애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

칼리오페의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2왕자. 늘 저를 뱀같이 소름 돋는 눈으로 훑어대던 에드몬드를 떠올리자 칼리오페의 전신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상태를 누구보다 똑똑히 느낄 수 있었던 이제키엘이 이를 악물었다.

일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요하네스가 2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칼리오페를 이 음탕한 곳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분명 마비향과 미향을 피워놨을 텐데 그녀가 당하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곧 방 안에서 요하네스가 떠나갔다. 그의 기척은 옆방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끔찍한 채찍질 소리와 비명을 만들어냈다.

그 틈에 칼리오페는 이제키엘을 부축하여 지하 기도실에서 도망쳤다. 먼 풀숲까지 가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 듯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칼리오페는 그를 편히 쉬도록 앉힌 뒤, 손수건을 꺼냈다. 울먹이는 얼굴로 그의 처참한 등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키엘은 상의를 추슬러 등을 가렸다. 그 과정에서 소매 주머니에서 펜던트 목걸이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재빨리 그가 주워 손안에 꽉 쥐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칼리오페는 하다못해 그의 젖은 이마라도 닦아주고자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이며 그녀가 물었다.

“드, 등이…… 왜 그런 건데. 이제 말해 줘 봐. 기도니 뭐니 하는 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학심을 해소하고자 헌금을 내고 오는 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견습 사제들이 차출되고는 합니다. 이런 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요하네스고요.”

몸을 파는 이야기를 뺐음에도 칼리오페에게는 충분히 충격이었다.

“미, 미쳤어. 수, 수도원이란 곳이,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니었어? 원래 수도원은 다 이래?”

“아닙니다. 이곳은 왕도와 가까워서, 중앙 귀족들의 헌금을 받다가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수도원은 정상적일 겁니다.”

“그럼 왜! 넌 왜 이런 미친 곳에 있는 건데? 왜 다른 멀쩡한 수도원으로 안 가고……!”

“다른 데로 가면.”

벽안이 마주쳐 왔다.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당신을 못 보잖아요.”

“…….”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할 말을 다 빼앗겨 버린 얼굴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그녀가 홀린 듯이 말을 꺼냈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낸 제안이었다.

“이즈. 나랑…… 나랑 가자. 나랑 그냥 도망가서 살자.”

“그런 소리 마세요.”

그는 여전히 단호했다.

“고생 한번 안 해본 귀한 가문의 아가씨잖습니까. 신분을 내던지고 사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에요.”

“…….”

칼리오페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침묵이 길었다.

괴롭게 바닥을 보고 있던 이제키엘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심장이 멎음을 느꼈다.

칼리오페의 새빨간 눈에서 물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칼리.”

눈물을 닦아주려는 손을 칼리오페가 쳐냈다.

“이제키엘,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또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

단어 하나하나가 유리 조각처럼 심장에 박혔다. 그가 말로 그녀를 상처 입힌 죗값만큼 돌려받았다.

칼리오페는 제 스스로 아무리 닦아내고 닦아내길 반복해도 소용없을 만큼 펑펑 울면서 말했다.

“내가 철없어서, 세상을 몰라서, 어리석어서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런 뜻이…….”

“달라질게.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똑똑해져서, 다시 만나면 그런 소리 못하게 할 거야.”

“…….”

“두고 봐. 그런 말로 거절 못하게 할 거야.”

“…….”

칼리오페가 이제껏 이제키엘의 손에 꽉 쥐여 있던 펜던트 목걸이를 빼앗았다. 다시 거두어가는 것인가 싶어 그가 흠칫했을 때였다. 그녀는 그것을 직접 이제키엘의 목에 걸어주었다. 마치 제 것에 목줄을 채우듯이.

“기다려.”

“…….”

“반드시 기다려.”

이제키엘은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신은 그에게 결코 그녀를 기다릴 수 없는 미래를 안배해놓았으므로.

비극은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날 저녁 에셀하라트 수도원에 방문한 사람은 2왕자 에드몬드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주인공은 2왕자의 에스코트를 받는 귀부인이었다.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에 검은 베일까지 쓴 귀부인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스산하고 음험한 기운이 수도원을 잠식하는 듯했다.

권력의 정점에 선 귀부인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오늘 에셀하라트 수도원은 각별한 준비를 했다.

그 증거로 귀부인이 걷는 길 양옆으로는 소년과 청년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환영 행렬이 아니라 진열된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중에는 이제키엘도 있었다. 요하네스는 참회 기도를 하는 대가로 이런 자리가 생길 때마다 그를 열외시켜 주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귀부인의 비위를 맞추려면 수도원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꺼내보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성화 속 천사가 아닐까 싶은 외모를 가진 이제키엘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와서 자리를 지키게 된 이제키엘은 이를 악물었다. 부디 이 정체 모를 귀부인이 빨리 저를 스쳐 지나가 주기를 기도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검은 귀부인은 정확히 이제키엘의 앞에 멈춰 서서 감탄까지 내뱉으며 그를 훑었다.

“세상에. 이 소년으로 하겠다. 당장 준비를……, 응?”

이제키엘은 귀부인의 시선이 가슴팍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온종일 넋을 놓고 있던 나머지 칼리오페가 제 목에 걸어준 목걸이를 그대로 둔 상태였다.

귀부인의 입꼬리가 음험한 곡선을 그렸다.

“재미있는 것을 하고 있구나. 어디서 얻었느냐?”

“……주웠습니다.”

왠지 그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웠다?”

“…….”

“그럴 리가.”

그 순간 이제키엘은 베일 너머로부터 지독할 정도의 악의를 느꼈다.

그녀가 요하네스에게 명령했다.

“저 소년에게 여러 가지 흥미가 생기는구나.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준비시켜두고 기다려라. 금방 다시 오겠다.”

“예, 부인.”

목걸이가 잠깐의 시간을 벌어줬으나 나중에 더 큰 위험을 몰고 돌아오리란 예감이 들었다.

요하네스는 이제키엘을 이끌고 지하 기도실로 가기 위해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나무가 우거진 뒤뜰의 길을 걷는 동안 요하네스는 이제키엘을 준비시키기를 잘했다는 둥, 귀한 분의 간택을 받았으니 영광으로 알라는 둥, 혼자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거기서 이제키엘은 마음을 정했다.

퍽 소리가 요하네스의 목 뒤편에서 울렸다. 이제키엘은 기절한 요하네스를 덤불 속에 숨겨 놓고 그 길로 에셀하라트 수도원을 도망쳤다.

‘이제 됐어.’

구태의연한 명분에 얽매여 겁쟁이처럼 구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용감하게 덤비는 그녀가 세상에 지레 겁먹고 망설이기만 하는 그보다 훨씬 나았다.

교단이 그들의 사이를 인정하지 않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애초에 이 마음은 누가 인정해줘서 피어난 것이었던가.

이제키엘은 결심했다. 성기사가 되어 성황청의 높은 곳까지 오르자고.

귀족은 못 되겠지만 그녀에게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안겨 줄 수 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세례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겠지만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다.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그는 곧바로 환속하여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이제키엘은 곧장 국경을 넘어서 성황청이 있는 판로엠 시국을 향했다.

과연 그날 에셀하라트를 찾아온 검은 귀부인은 엄청난 권력자였는지 독이 바짝 올라 이제키엘을 추격했다. 그녀가 그 유명한 보렐리 후작 부인이었다는 사실은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에서야 알았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목걸이 때문에 발각될 뻔한 적이 몇 번인가 생겼다. 착용하고 다니지 않아도 도시의 검문소마다 그의 소지품을 확인하려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그는 뒷골목의 대장장이를 찾아갔다. 목걸이는 원래의 형태를 잃는 대신 한 쌍의 반지가 되었다.

그날부터 약지의 반지는 단 하루도 이제키엘의 몸에서 떨어진 적 없었다.

보렐리 후작 부인의 추격은 끈질겼다. 이제키엘은 알펜시아드 국경의 절벽에서 떨어진 척 사망을 위장하는 것으로 간신히 추격대를 따돌렸다.

마침내 판로엠 시국에 입성한 그는 운 좋게도 한 추기경의 보호와 후원을 받으며 성황청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검술에 재능이 있었고 성황청이 그를 좋게 보았기에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그 사이에 정작 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성기사 서임을 받은 직후부터 이제키엘은 칼리오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키엘이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완전하지 않았고 성은 아예 거짓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보렐리 후작 부인이 집권해 있는 동안 알펜시아드는 교단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성기사로서 명성을 떨치고 권력을 얻어도 그녀를 찾는 데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키엘은 줄곧 의문을 떨쳐 내지 못했다.

- 기다려.

그녀의 말대로 기다리는 것이 10년의 헤어짐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다시 수도원을 찾은 칼리오페는 제 발밑을 아득히 무너뜨릴 것만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제키엘 형제는 어느 귀부인을 따라 제 발로 수도원을 나갔습니다.”

“…….”

“놀라시기는. 그런 부류가 의외로 흔하답니다. 늙고 돈 많은 귀족의 정부가 되어 팔자를 고쳐 보려는 것이지요.”

“…….”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제키엘 형제가 여태껏 공들여온 여인이 귀족 영애부터 귀부인까지 꽤 된답니다. 보아하니 영애도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군요. 가엾어라.”

“…….”

“후우, 제가 그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참회 기도까지 드리도록 했건만, 결국 검은 양은 제 추악함을 씻지 못한 채 타락해 버리고 마는군요. 참으로 안타깝습…….”

칼리오페는 요하네스의 말을 그 이상 들어주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의 교활한 혓바닥을 믿지 않았다. 이제키엘은 결코 그녀를 말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수도원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요하네스가 일찍이 이제키엘을 밉게 보고 고립시킨 데다 함구령까지 내린 상태였으므로 바른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칼리오페는 포기하지 않고 요하네스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법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십수 년 전부터 에셀하라트 수도원에 있었던 늙은 종지기와 요양을 왔다가 잊힌 노인이 그녀에게 입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끌끌끌, 그 소년 말인가? 웬 까만 부인이 다녀간 날 이후로 보이지 않던데. 끌끌. 수도원에서는 흔한 일이야. 팔자 폈으니 축하해줘야지.”

“켁? 새까만 귀부인? 아아, 기억하고말고. 켁켁. 재수 없이 상복 같은 걸 입고 와서는. 처음엔 날 데려가려는 사신인 줄 알았는데, 그 천사처럼 생긴 친구를 잡아가지 뭔가. 켁켁.”

입단속을 당하지 않은 이들조차 진실의 전달자는 되어주지 못했다.

믿음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칼리오페의 마음속에 불안을 심으려 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악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마음을 잡아야 했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환궁했을 때, 칼리오페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마마마……?”

레나엘 왕비가 피를 토한 채 바닥에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옆에는 기분 나쁜 보라색 액체가 묻어 있는 도자기 병이 굴러다녔다.

“어, 어마마마! 어마마마!”

정신을 차린 칼리오페가 황급히 레나엘 왕비에게 다가갔다.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 왕비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였다. 칼리오페는 왕비를 끌어안고 꺽꺽 울었다.

그때 나붓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문간에 선 보렐리 후작 부인이 말했다.

“이런, 칼리오페 왕녀. 이제야 왔나요? 어미의 임종도 지키지 못해서 어쩌나.”

“무슨…… 무슨 짓을 했어요? 어마마마께 무슨 짓을 했어?!”

핏발 선 눈으로 울며 노려보는 칼리오페가 정부를 기껍게 했다.

짐짓 안타까움을 꾸며내던 얼굴 근육은 웃고 싶은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궁금하니? 알려 줄까?”

“…….”

“네 어미는 기사와 사통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단다.”

“……!”

충격으로 칼리오페의 숨이 일순 멎었다. 정부는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리 나를 멸시하던 네 어미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구나! 망측한 짓거리로 폐위된 여자에게 장례는 안 될 말이지. 여봐라, 이 방의 모든 물건들을 태워 없애라. 그리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레나엘의 시체를 왕궁 바깥에 내다 버려라!”

“……!”

칼리오페의 전신이 벌벌 떨렸다. 그녀는 재빨리 무릎으로 기어 정부의 발치로 다가갔다.

“안 돼, 안 돼요. 부인, 그러지 마세요. 부인……. 어마마마의 장례를 치르게 해주세요.”

“어머나, 고귀하신 적통 왕녀께서 이러시면 어떡하나요. 일어나세요.”

“부탁, 아니 간청드립니다. 제발, 부인……. 제발…….”

“아이 참, 일어나시래도.”

칼리오페는 도리어 무릎을 꿇고 정부의 드레스 자락을 쥐기까지 했다.

비참하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모습은 정부가 꿈에 그려왔던 것이었다. 황홀한 만족감에 미소 짓는 악귀가 자비를 내렸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답니다.”

정부가 허리를 숙여 칼리오페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이 방에서 네 어미의 죽음을 추모하세요. 끝까지 잘 해내면 장례를 치르도록 해드리죠. 물론 그동안 이 방에는 누구의 출입도 금할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칼리오페는 물막이 끼어 흐려진 시야를 하고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주일 뒤에 보아요, 왕녀.”

“…….”

쾅!

거대한 아치문이 닫혔다. 어둠이 내린 방 안에 칼리오페는 모친과 단둘이 남았다.

바깥에서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왕녀가 슬픔을 못 이겨 일주일간 주검과 함께 칩거할 예정이라고 지껄이는 정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숨이 끊어진 모친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칼리오페는 의문을 떠올렸다.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녀의 몇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가.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다, 어느 순간부터 메말라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을 맞이했다.

잠식할 듯한 어둠과 코를 마비시키는 시취(屍臭)와 흐려져 가는 시간 감각 속에서, 의문은 지긋지긋하도록 계속되었다.

대체 무엇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버석하게 메말라버린 어린 왕녀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힘이 없어서 빼앗기는 것이다.’

제게 적통 왕녀에 걸맞은 힘이 있었다면 모친이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뿐일까. 이제키엘도 떠나지 않았을 터였다. 설령 정부가 되더라도 추잡하고 변태 같은 귀족 부인이 아니라 젊은 왕녀의 정부가 되지 않았겠는가.

모든 게 다 자신에게 힘이 없어서다. 그러니까…….

‘힘을 얻어서, 가지고 싶은 것은 다 빼앗아서 가지고 모두를 무릎 꿇릴 것이다.’

가슴에 독과 악이 차오른 어린 왕녀는 잔혹한 약탈자가 될 것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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